인터뷰

스포츠 행정가 길 걷는 조재기 前 유도 국가대표

“국가대표가 권력과 돈 가지려 하면 사고난다”

  •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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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유도 무제한급 메달리스트 조재기(趙在基)
⊙ 선수 은퇴 후 37년째 교수 생활, 스포츠 행정가 길 걸어
⊙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일본 요구대로 저녁 9시 딱 맞춰 결승전 시작해 화제
1970년대를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조재기’라는 이름을 적어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터다. 조재기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유도 메달리스트다.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무제한급’이라는 체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이 시작되면 여지없이 영화 같은 사연이 등장한다. 1972년 뮌헨올림픽은 훗날 여러 번 영화화됐을 만큼 많은 스토리를 배출했다. 팔레스타인 독립을 외친 테러 단체 ‘검은 9월단’의 테러가 대표적인 예다.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된 이 엄청난 사건에 묻히긴 했지만, 뮌헨올림픽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뮌헨대회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올림픽 무대에 ‘데뷔’한 대회이기도 하다. 북한은 ‘DPRK’라는 이름으로 나간 첫 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따 종합 22위를 차지했다. 동메달 중 1개는 여자배구에서 나왔다. 3~4위전에서 한국을 꺾고 딴 메달이었다. 우리나라는 은메달 1개를 따 종합 33위의 성적을 거뒀다. 명실상부한 남북대결 참패였다. 그다음에 열린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 주목을 받은 이유다.
 
 
  유도 ‘무제한급’ 동메달
 
  우리나라는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종합 19위를 차지했다. 북한은 물론 주최국인 캐나다마저 제쳤다. 단 50명의 선수로 일궈낸 쾌거였다. 쾌거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조재기였다. 조재기 선수는 유도 무제한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무제한급 메달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그전까지 재일교포에 의존해 성적을 내온 유도가 자생력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조재기는 선수 은퇴 이후 교단을 지키면서 스포츠 행정가로 살아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일하며 올림픽을 치러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이 열렸을 때는 경기담당 사무차장을 맡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직전에는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서는 김성집(金晟集) 이후 두 번째였다.
 
  전 유도 국가대표 조재기를 만나러 그가 교수로 있는 동아대학교에 갔다. 그의 연구실은 스포츠과학대학 4층 맨 끝에 있었다. 넓은 창 너머로 푸른 잎이 무성한 여름날의 교정이 보였다. 미국 오스틴대 심리학 교수 샘 고슬링은 그의 베스트셀러 《스눕》에서 어떤 사람의 방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메달을 딴 조 교수와의 대화가 어쩐지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실 곳곳에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올림픽 시상식 사진도 보이고, 먼지가 소복이 앉은 일본 무사의 와상도 눈에 띄었다. 바닥에 기대놓은 액자 속 기사에서 ‘경남 하동’이란 글이 보였다.
 
  ―원래 경남 하동 출신인가요.
 
  “그렇습니다. 제 고향이라 하는 말이 아니고 하동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을 가진 고장입니다. 섬진강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 참 아름답죠. 벚꽃길이 한 30리 펼쳐져요. 우리나라에서 국립공원을 2개 가진 군이 하동 외에는 없어요. 지리산국립공원 있죠, 한려해상국립공원 있죠. 산 있고, 바다 있고…. 그래서 하동 사람 중에 시인이 많아요. 저도 운동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시적인 표현을 씁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제 친구가 부산시인협회장을 했는데 어느 날 시인들이랑 술을 한잔하고 자갈치를 쫙 걸었습니다. 제가 ‘어이 여기 냄새 안 나나’ 그랬어요. 건어물 파는 시장에서 나는 고릿고릿한 냄새 있잖아요. ‘고릿고릿한 젓갈냄새 아이가’ 이렇게 답하기에 제가 그랬어요. ‘야, 죽음의 냄새 아이가. 봐라, 전부 즐비하게 시체로 누워 있잖아. 이 냄새를 맡고 나는 살아 있다는 감동을 느낀다.’”
 
 
  동아대 총장이 김택수 체육회장에 전화해 올림픽 나가
 
  ―죽음의 냄새라는 표현이 기발하네요.
 
  “시가 다 삶 속에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20대 때는 매일 ‘데드포인트’까지 갔습니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는 이야기 있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가 도전하고, 저녁에 잘 먹고 잘자고 그 다음 날이면 벌떡 일어나고. 지금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데 그 시절은 그렇게 살았어요. 날마다 죽음의 냄새를 10년간 맡으니까 안 되는 게 없습디다. 정말 힘들었어요. 2시간 운동하면 체중이 딱 5킬로가 빠져요. 땀으로. 탈수 직전인 거죠.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행복이었습니다.”
 
  ―1976년 메달 땄을 때 정말 큰 화제였겠습니다.
 
  “그때, 사실 메달 딴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양정모 금메달은 좀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아예 안 된다고 했어요. ‘세계무대에서 한국사람은 80kg급 이상은 보나마나 안 된다.’ 헤비급은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올림픽 출전 기준을 미들급(80kg급)에서 잘라버렸어요. 라이트헤비급(93kg급) 올림픽 출전 선수로 선발은 됐는데 아예 못 나가게 된 거예요. 저는 고집을 부렸어요. 제가 부산에서 학교를 나왔고 체육회 회장이었던 김택수(金澤壽) 회장도 부산사람이니까 뭐가 있잖아요. 오바마 대통령, 몇 다리만 거치면 연결된다 하잖아요.”
 
  ―왜 선발을 하고도 안 데려간다고 한 거죠.
 
  “돈이 없어서 안 데려가는 건 아니었어요. 전 대회인 뮌헨대회 때 처음으로 남북이 스포츠에서 붙었어요. 북한한테 이기고 오라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많은 선수를 보냈는데 은메달 하나 땄어요. 재일교포 오승립 선수가 유도에서 은메달 한 개 따고, 다른 선수들은 귀국장에서 그 뒤에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고. 창피한 거죠. 몬트리올에는 메달권에 가까운 사람만 소수정예로 가고 나머지는 전부 보내지 마라, 이런 정책을 편 이유예요.”
 
  ―그러면 어떻게 가게 됐나요.
 
  “그 당시 동아대 총장님과 김택수 회장님이 경남고등학교 동기였던 거예요. 부산에 내려와서 모교를 찾아 총장님께 ‘선발됐는데 못 가게 됐습니다.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이랬더니 총장님이 김택수 회장에게 전화해서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면 우리 대학 졸업생인데 내가 부담해서 보낼 수 없는가’ 이러신 거죠. 그래서 따라가게 된 거예요.”
 
 
  머리 다 깎고 무제한급 나가겠다 협박?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모습. 왼쪽부터 유도의 박영철, 조재기(동메달), 레슬링의 양정모(금메달), 전해섭(동메달), 유도의 장은경(은메달).
  ―어렵게 갔는데 메달을 처음에 놓쳐서 아쉬웠겠어요.
 
  “선수촌의 숙소는 맨션이었어요. 집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걸 그때 처음 본 거죠. 76년이 그랬어요. 선수촌에 잔디밭이 쫙 깔려 있고 저기 걸어가는 건 세계적인 코마네치고, 저 선수는 누구고….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시합을 했는데 유도는 첫날 헤비급부터 해요. 정신이 없어서 무슨 시합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초반전에 소련 선수를 만나서 졌어요. 그때만 해도 소련 하면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드는 상대였죠. 소련 선수가 그때까지 공개 안 된 삼보의 기술을 썼어요. 거기서 졌지요. 그래서 그 선수가 올라가는 바람에 패자부활전을 했는데 그때 정말 메달 딸 뻔했어요. 3~4위전 때 뮌헨올림픽 은메달리스트를 만났는데 저는 그 사람이 은메달리스트인지도 모르고 그냥 공격을 한 거죠. 거의 다 이겼다 싶은 순간에 한방에 돌아가더라고요. 유도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메달 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무제한급에 나간 거군요.
 
  “그때만 해도 유도는 전 체급이 끝나고 나서 무제한급 경기를 열었습니다. 7체급 경기가 끝나고 나면 각 나라에서 제일 센 선수들이 나와서 체급 관계없이 한번 붙어요. 우리나라는 무제한급 같은 건 아예 생각지도 않고 갔으니까 나갈 선수가 없는 거예요. ‘잘하면 메달 따겠는데’ 싶더라고요. 못 따더라도 한번 해보고 싶은 거예요. 선수단에 얘기하니까 반대하더라고요. ‘네 체급에서도 메달 못 땄는데 세계최고 센 선수들이 나오는 데서 메달 따겠나. 못 딴다, 너 다친다.’ 올림픽 맨 마지막 날이니까 코치님들도 구경도 좀 하고 싶고 그랬겠죠. 안 내보내 준다는 거예요.”
 
  ―어떻게 반대를 꺾었나요.
 
  “선수촌에 가서 머리를 빡빡 밀고 총감독 방으로 갔죠. 지금도 못생겼는데 그때는 살도 하나 없고 완전히 근육, 뼈만 딱 남아서 인상도 못됐어요. ‘진짜 안 내보내 주면 내가 뭔 짓을 할지 모른다, 내보내 달라는데, 시합 한번 하겠다는데, 부러져도 괜찮고 죽어도 책임지란 소린 안 하니까 내보내 달라’ 그랬더니 내 인상 보고는 내보내 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갔어요. 시합 날이 양정모가 금메달 따는 날하고 같은 날인 거예요. 유도 선수들 양정모 금메달 따는 데 응원 가고 저는 지금 일본에 있는 김희태 선생님과 둘이서 시합에 갔지요. 무제한급 3등이라는 게 대단한 거예요. 세계 진짜 3등이에요. 체급 통틀어 3등. 요즘은 저게 없어졌어요.”
 
 
  ‘무인 정신 보여줬다’ 박정희 대통령 좋아해
 
몬트리올올림픽 유도 무제한급 시상식에 선 조재기 선수. 삭발한 머리가 눈에 띈다.
  ―한국에서 반응이 대단했겠습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억수로 좋아했습니다. 무인 기질을 보여줬다고 하면서요.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머리를 깎는다는 건 자기를 버리겠다는 의미라는 걸 아는 거예요. 귀국할 땐 전세기로 돌아왔어요. 딱 들어오니까 프리패스예요.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지요. 서소문 와서 《중앙일보》 근처를 지나는데 꽃가루가 수없이 떨어져요. 서울시청 앞 환영대회 가니까 경남 하동에서 농사짓는 우리 부모님이 한복 쫙, 흰 두루마기에 고무신 신고 서울시청 앞 단상 앞에 앉아 있더라고요. 참 불효자인데 거기서 넙죽 큰절 한 번 했어요. 전 그걸로 효도가 다 끝났어요. 정말로 우리 아버지가 좋아했어요. 살면서 효도를 딱 한 번 해봤는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거예요. ‘아버지 어떻게 올라오셨습니까?’ 그러니까, ‘너 메달 딴 거를 우리는 모르고 있었는데 양정모 메달 따는데 조재기 메달 추가 이렇게 나오더라고. 벌써 졌다고 신문에 나왔는데 또 메달 땄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군수가 지프를 갖고 왔어. 지금 대통령 명령으로 서울 가야 한다고 하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본에서 훈련하다가 올림픽에 나갔는데요.
 
  “졸업하고 고민했죠. 대학선수권 우승을 했으니까 유도를 할 거냐, 공부를 할 거냐. 운동을 더 하고 싶은 거예요. 철도청 유도부에 1년쯤 있다가 경기대에 조교로 들어가 일하면서 선수생활도 하다가 체육과 학사편입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 연습상대가 없는 거라. 그런데 김희태 선생님이라고 재일교포신데 그분이 덴리대(天理大)에 있었어요. 그래서 한 달 비자를 받아 처음 갔는데 덴리대학에서 시합을 시키더라고요. 전 일본선수권 3등 선수와 시합을 했는데 간단하게 제가 이겼어요. 덴리대 측에서 ‘좋다. 이런 친구 같으면 자기들 연습파트너도 되니 받아주겠다’고 했죠.”
 
 
  놓쳐버린 금메달 꿈, ‘三代論’으로 달래
 
베이징올림픽 선수단의 귀국 환영 행사에서 이연택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이 인사를 하고 있다. 그 왼쪽이 조재기 당시 사무총장이다. 조재기 교수는 2008년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을 맡아 베이징올림픽을 치렀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종합 7위라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조재기는 몬트리올올림픽이 끝나고 난 후 금메달의 꿈을 위해 다시 한 번 훈련에 매진했다. 4년 후 모스크바올림픽을 겨냥해서였다. 그 꿈은 끝내 이룰 수 없었다.
 
  ―메달 딴 후에 한 번 더 일본에 나가서 훈련했죠.
 
  “덴리대에서 준비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한국에 들어와서 교수가 됐잖아요. 그런데 금메달을 한번 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다 포기한다는 마음으로 일본에 갔어요. 그때는 무도연구소 정식연구원으로 갔어요. 대접이 달라지대요. 일본사람 그런 게 있어요. 자기 도장에서 연습해서 올림픽 메달을 땄다 그러니까, 선생님 줄에 바로 불러내더라고요. 저는 그전에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 사람들이 ‘조는 정말 열심히 해서 선수들에게 귀감이 된다’ 인정을 해준 거야.”
 
  ―그렇게 훈련했는데 결국 금메달의 꿈은 못 이뤘네요.
 
  “모스크바올림픽 갔으면 금메달 땄죠. 정말로요. 그런데 서방 진영이 올림픽 자체를 보이콧해서 못 갔잖아요. 못 나간다는 건 벌써 알았지만 어쨌든 훈련을 계속하는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한 6개월 동안 목표가 없으니까.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한국 가고 싶고. 제가 원래 비 오는 날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아침 운동을 안 해도 됐거든요. 그런데 못 나간다는 거 알고 난 후부터는 비만 오면 죽겠는 거라. 비가 안 오면 자전거를 타고 나라시를 돌아다녔거든요.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절도 가고. 비가 오면 못 나가잖아요. 거의 돌다시피 했어요. 방안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울다가, 기분 나쁜 사람 욕했다가….”
 
  ―어떻게 극복했나요.
 
  “저를 지원해 주는 일본인이 있었어요. 후원회 회장이셨는데 그분이 하루는 오셔서 그러더군요. ‘미스터 조. 너는 너무 욕심이 과하다. 네가 좋은 아버지의 재능을 받아서 세계 정상에 도전했다. 그런데 정상이 못 됐다. 그러면 네가 너의 경험을 쏟아부어서 네 자식 대에서 금메달 한번 따봐라. 그게 네가 할 일이지 네 대에 못 땄다고 절망하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앞으로의 숙제로 생각해라. 그게 더 재밌을 거다. 다음번 한국의 금메달을 위해 3대에 걸쳐 계획해야 한다. 결혼 배우자의 조건을 네가 정해봐라.’ 그게 바로 삼대론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위안이 되더라고요.”
 
  ―삼대론에 맞춰 배우자를 골랐다는 얘긴가요.
 
  “《동아일보》에 이종세 선배라고 계세요. 그분이 어느 날 저에게 어떤 결혼 상대를 원하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형님, 우선 키가 165는 돼야 되고 100미터를 13초 내에 뛰어야 되고 얼굴이고 가문이고 학벌이고 다 놔놓고 머리는 좀 괜찮아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어요. 왜냐면 운동선수 중에 아무리 가르쳐도 어제 똑같은 기술로 넘어간 걸 뒷날 기억을 못 하는 애가 있습니다. 반면에 ‘아 어떤 동작을 하니까 이렇게 가더라’ 이런 걸 몸으로 익히고 머리로 기억하는 선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거 재밌는데’ 이러더니 ‘야 써봐라’ 이러더라고요. 거기에 본인이 가필을 해서 ‘조재기 삼대론’이라고 해서 《동아일보》 칼럼에 내버렸어요. 그 후부터 대한민국 키 크고 잘 달리는 여자는 전부 다 나한테 시집오려고 난리였어요. 교수지, 연금받지. 부산에 있으면서 토요일만 되면 선보러 서울에 올라갔어요. 결국은 선수촌에 있는 양궁 코치와 만나게 됐어요. 삼대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좋다고 동의하더라고요. 사실 우리 집사람한테는 3대 결혼 불가 조건이 있었어요. 지방에 시집 안 가고, 장남이랑 결혼 안 하고, 운동선수랑 결혼 안 한다는 조건이었는데 제가 그 조건 3가지에 다 맞는 경우였죠.”
 
  ―삼대론을 이뤘나요.
 
  “자식은 참 마음대로 안 돼요. 두 아들 모두 공부를 잘해서 공부 쪽으로 갔어요. 첫째는 경영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고 둘째는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둘째 놈은 정말 체격 조건이 금메달감이에요. 그런데 어쩔 수 있나요.”
 
  ―한편으론 아쉬웠겠네요.
 
  “제자를 키웠잖아요. 하형주 선수가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않았습니까. 제 모든 기술을 전수해 줬습니다. 하형주가 금메달을 딴 순간 ‘아 이제는 됐다. 내 자식일 수도 있지만 내 제자가 금메달을 땄으니 이제 삼대론을 이룬 것이 아니냐’하고 생각했어요.”
 
 
  결승전 9시에 시작하라는 NHK 요구, 2년 연구해 이뤄
 
  ―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했지요.
 
  “올림픽 유도담당관을 했어요. 서울올림픽 관련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88년에 처음으로 일본 NHK가 HD 시험방송을 했습니다. 우리 측 사업부에서 방송 담당하던 사람이 NHK와 협상을 하면서 옵션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사인을 한 거예요. 옵션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조명을 3000룩스로 켜달라, 또 하나는 일본이 유도 전 체급을 석권할 거라 예상했는지 아홉 시 땡 하면 유도 결승전을 행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유도는 5분 시합이지만 30초 만에 끝날 수도 있고 5분 만에 끝날 수도 있는 거예요. 시간을 어떻게 맞춰요.”
 
  ―조건을 위반하면 벌금을 내야 하지 않습니까.
 
  “내야 하죠. 그러나 한국사람은 해냅니다. 제가 국제대회 다니면서 2년 동안 연구했습니다. 모든 경기를. 평균시간 내고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그래서 나온 결론이 ‘C의 세제곱은 I’입니다. 커맨더 컨트롤(commander control), 코디네이션(coordination),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결합하는 거죠. 모든 정보가 나를 통해 통과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뒤에는 담당관을 앉혀놓고 책상에는 매뉴얼 펴놓고 진행하는 거예요. 처음 예행연습을 해봤더니 딱 7분이 남았어요. 남거나 모자라는 시간은 아나운서 멘트로 조절하면서 올림픽을 진행했죠. 딱 아홉 시에 결승전을 시작하니까 일본사람들이 놀라는 거예요. NHK에서 매년 전일본선수권대회를 중계하는데 그게 안 돼서 여러 가지 트릭을 쓴대요. 어떻게 이렇게 했나, 좀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가르쳐줄 수 있나요.”
 
  ―조명도 문제가 됐겠네요.
 
  “3000룩스로 켜달라는데 3000룩스면 엄청난 불빛이거든요. 요즘 조명탑에서 비추는 게 1000룩스 정도예요. 3000룩스를 켜놓고 내가 딱 경기장에 올라서는데 머리가 팽 도는 거예요. 엄청나게 눈이 부셔서. 그런 걸 NHK에서 IOC 승인을 받아서 요구한 거예요. 제가 유도 전문가니까 NHK 쪽에 말을 해서 조금 조도를 내려서 켰죠. 다 켰으면 시합 못 했어요. 또 한국선수들은 사전에 세팅해서 조명에 익숙하도록 연습했죠. 훈련하면 눈은 금방 적응돼요. 한국선수들은 첫날, 둘째 날 연승을 했습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대비할 때는 사무총장을 했네요.
 
  “올림픽을 치르려면 적어도 50억원은 있어야 하는데 사무총장 맡아 태릉선수촌 들어갔더니 딱 7000만원 있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했죠. 대한민국 대표선수가 등에 붙인 게 ‘코리아’ 아닙니까. 그러면 Made in Korea를 가지고 상품을 파는 대기업이 그 수혜자 아닙니까. 무조건 한국 5대 기업에 10억원씩 내라고 했죠. 그동안 선전해 줬으니까. 그렇게 결국 50억원을 모았어요. 그리고 금메달 딴 선수들 자기 경기만 끝나면 한국에 들어갔는데 그러지 말고 한꺼번에 귀국하는 걸로 방침을 만들었어요.
 
  박태환(朴泰桓) 선수한테도 내가 그랬어요. ‘태환아, 한국에 먼저 가지 마라. 나도 예전에 메달을 땄는데 메달 따고 한국에 오니까 완전히 바보가 돼버리더라. 내 선생님 고향이 부산인데 올림픽 끝나고 돌아와서 서울의 호텔에서 그렇게 외롭게 계셨는데 내가 그분 신경을 하나도 못 쓰고 나만 붕붕 떠서 부산까지 와버렸다. 선수촌에서 쉬면서 너한테 지금까지 잘해준 분들 이름을 쫙 써봐라. 선물 안 사가도 되니까 아카데미 시상식할 때 스피치하는 것처럼 나중에 인터뷰할 때 너한테 잘해준 사람들한테 고마웠다고 얘기해라.’ 올림픽 축하 프로그램 만들려고 했던 방송사들은 난리가 났지요. 박태환이나 장미란(張美蘭) 선수는 나중에 제게 ‘총장님 참 감사합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작년에 우수 강의상 받아
 
  조재기 교수가 서울올림픽과 베이징올림픽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은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빛이 났다. 조 교수가 재직하는 동아대학교는 새누리당 공천으로 부산에서 당선됐던 문대성(文大成) 의원이 교수로 일했던 곳이다.
 
  ―최근 전직 국가대표가 범죄에 연루되는 등 불미스런 일도 있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있지요. 이 중 두 개 이상을 가지려고 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국가대표는 명예를 갖는 자리입니다. 그걸로 만족해야 돼요. 또 선수생활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운동만 해야 합니다.”
 
  ―현직 선수는 아니지만, 메달리스트인 문대성 의원의 표절 사건이 문제가 됐습니다.
 
  “참…. 죄송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우리 대학에서 문제가 됐으니까요.”
 
  조 교수는 지금은 새누리당을 탈당한 문 의원 사건에 대해 언급을 꺼렸다. 문대성 사건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 것 같았다. 동아대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문 의원 사태 이후 동아대 스포츠과학대학 교수들은 반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동아대 내부에서 논문 표절 제보를 한 것이라는 주장이 불거져 제보자 색출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한다. 문 의원은 지난 4월 동아대 교수직에서 사퇴했다.
 
  조 교수를 인터뷰하는데 학생들이 몇 번 연구실에 면담을 위해 들렀다가 허탕을 치고 갔다. 대학교 3학년이나 될까, 어린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조 교수를 친근하게 대하는 눈치였다. 조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로서는 인기가 있습니까.
 
  “작년에 학교에서 강의 잘했다고 우수 강의상을 주었어요. 올림픽에서 못 받은 금메달 여기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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