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코칭회사 설립해 제2의 인생 살고 있는 정미홍 前 KBS 아나운서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 올리는 코칭에 올인할 생각”

  • : 정혜연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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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9시뉴스, 올림픽 메인 앵커 끝내고 미국行… 난치병 발병
⊙ ‘오늘밤 못 넘긴다’는 얘기만 3번 들어
⊙ 조순 전 서울시장 선거 캠프에 합류… 서울시 첫 여성 홍보담당관 지내
⊙ 코칭 프로그램으로 진정한 행복 찾아

鄭美鴻
⊙ 1958년 서울 출생.
⊙ 경기여고,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美 시카고대 대학원 윌리엄벤턴펠로십 방송전문가 과정 수료.
    명지대 지방자치대학원 행정학 석사.
⊙ KBS TV 9시 뉴스 앵커, 올림픽 메인앵커, MBC ‘정미홍이 만난 사람’ 진행.
    서울시 홍보담당관 의전비서관, 서울시장 부속실장 역임. 現 더-코칭 컴퍼니,
    J&A 대표이사.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 이사.
⊙ 저서: <자신의 날개로 날 때 아름답다> <성공하는 여자들의 7가지 비밀> 등.
“루푸스(lupus)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시작한 코칭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정작 용기를 얻고, 달라져야 할 사람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코칭을 통해 더욱 여유롭고 성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단어도 생소한 ‘코칭’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정미홍(鄭美鴻) 전(前) KBS 아나운서다. 그가 지난 1월 말에 ‘더-코칭 컴퍼니’를 만들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회사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400여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LG전자, SK텔레콤 임원들이 단체로 코칭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나운서에서 공무원으로, 홍보 대행사 대표에서 또다시 코칭회사 대표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정미홍씨를 지난 4월 8일 만났다. ‘코칭 예찬론’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코칭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미국, 호주에서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리더십 프로그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능성과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코칭의 기본 철학입니다. 전문 자격증을 보유한 코치와 개인이 만나, 개인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빨리 높이 끌어내도록 돕는 것이 프로그램의 목적입니다.”
 
  ―해외에서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지만 영 낯선데요.
 
  “국내에서는 10년 전에 코칭이 소개됐는데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중소기업체의 사장들에게 코칭 서비스를 해 주는 정도죠. 미국은 20년의 코칭 역사를 갖고 있는데, 연방 정부 안에 별도의 코칭회사가 있을 정도입니다.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은 공식석상에서 수차례 코칭 리더십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얘기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요.
 
  “일반코칭, 전문코칭, 교육코칭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행복한 부모가 되기 위한 프로그램에서부터 청소년의 잠재력을 최고로 끌어내는 방법, CEO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협상력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룹니다. 관리자들이 부하 직원의 능력을 빠르게 파악하고, 적절한 업무를 맡기는 역량 키우기 프로그램도 있고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나서 달라질까요.
 
  “코칭을 받은 사람들의 80% 이상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과 달라졌다는 학술 보고서가 나와 있습니다. 늘 부하직원들에게 언어 폭력을 가하고 권위적이었던 회사의 임원이 올 초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음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부터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겉으로 잘나가는 듯 보였지만, 항상 더 나은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코칭을 공부하면서 제가 누구였는지를 깨닫고 존재 자체에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코칭을 할 수 있는 코치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미국에는 국제코치연맹(ICF)과 국제코치협회(IAC)가 있는데, 이곳에서 코치전문교육, 실습을 해야 한다. 정 대표가 이끌고 있는 더-코칭 컴퍼니는 국제코치연맹이 인정하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코치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코치 훈련 교육과정도 제공하고 있다.
 
 
  KBS 10기 아나운서로 방송인 입문
 
강의 장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코칭을 얘기하는 그에게서는 사업가보다는 방송인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프리랜서로 일한 시간까지 합치면 20년 넘게 방송인으로 살아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싶었다. ‘정미홍 개인’은 참 사연이 많았다.
 
  어린 시절에 법조인이 되기를 희망했던 정미홍 대표는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후 진로를 방송인으로 정하고, 1982년 KBS 19기 아나운서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뉴스 진행을 꿈꿨지만, 방송 초반 그에게는 오락프로그램의 MC 등이 주어졌다. 정 대표는 방송 인생에 대해 “탄탄대로였던 적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조금씩 보도국의 일을 하며 활동했던 그는 아침뉴스의 앵커를 맡았다. 입사 6년 만에 프라임 시간대인 KBS 9시 뉴스를 진행하게 됐다. 그는 8개월 동안 9시 뉴스 앵커석에 앉았고, 이듬해에는 올림픽 메인 앵커를 맡았다. 이후 그는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의 시카고대대학원에서 윌리엄벤턴펠로십 방송전문가 연수 과정을 운영 중이었는데, 정 대표는 최초의 아시아인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정 대표는 “올림픽 메인 MC 때 모든 기운을 쏟아 붓고 나니, 휴식을 취하며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국 유학 첫 학기에 루푸스발병
 
  그는 1989년 여름,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많은 여성이 선망하는 공중파 방송의 9시 뉴스 앵커, 올림픽을 치른 앵커의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병마(病魔)였다.
 
  정 대표의 얘기다.
 
  “첫 학기 기말고사를 치를 때 두통과 몸살기가 느껴졌어요. 처음 시험을 치면서 긴장을 많이 한 탓이려니 생각했어요. 학교 부속 병원에 갔는데 병명(病名)도 모른 채 진통제만 잔뜩 받아왔습니다.”
 
  급우들은 방학이 되자 뿔뿔이 흩어졌다. 1990년 1월 1일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서 갑자기 몸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도움을 구할 데가 없었다. 우연히 전화벨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한국에서 알고 지냈던 친구가 미국에 들렀다가 그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간신히 전화를 받은 그는 “나를 좀 도와달라”고 말하고 정신을 잃었다. 휴가차 미국에 왔던 이 친구는 폭설을 뚫고 네 시간을 달려 그에게 왔다. 이 친구가 정미홍 대표의 남편이다. 정 대표는 대학 부속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그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다.
 
  “눈을 떠보니 일주일이 흘러 있었습니다. 병원 사람들이 제가 그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일어나 보니, 피앙세도 생겼더군요(웃음). 미국은 가족이 아니면 병원 수속이 안 돼서, 친구였던 남편이 피앙세라고 둘러대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혼수상태에서 간신히 일어났지만, 그는 이때까지 그는 병명을 몰랐다. 여러 검사를 하고 난 뒤 열흘 만에 의사는 그에게 ‘루푸스’를 앓고 있다고 말했다. 들어보지도 못했던 병이었다. 3주 뒤 퇴원을 할 때, 담당의사가 루푸스협회를 알려주며 병에 대해 충분히 공부를 하라고 했다.
 
  정 대표의 얘기다.
 
  “무슨 병인지 몰랐어요. 약 먹으면 낫는 병인 줄 알았는데, 담당의사가 이 병에 대해 차분히 공부하라는 얘기를 했을 때 심각한 일인가 싶었어요.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루푸스(Systemic lupus erythematosus)는 신체의 여러 부분에 만성적인 염증을 일으키는 자가 면역 질환이다. 우리 몸속의 면역 체계는 바이러스, 세균 등 외부의 침입자(항원)가 나타나면, 항체를 만들어서 공격한다. 그런데 이 병은 외부의 침입이 없어도 항체가 형성돼, 건강한 자기 조직을 공격하는 희귀병이다. 자기 몸을 외부의 침입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염증, 조직손상, 통증을 유발한다. 원인이 불분명하고, 완치도 불가능하다. 적절한 투약과 요양이 필수적인 난치병이다.
 
 
  약 부작용으로 얼굴 퉁퉁 부어 … 우울증으로 이어져
 
   정 대표는 한국에 있는 부모에겐 사실을 숨겼다. 한국에서 전화가 오면 “몸이 안 좋아서 잠깐 입원했다”고 둘러댔다. 그는 “소란을 떨기 싫었고, 부모님이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인데 공연한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고 했다.
 
  그의 얘기다.
 
  “어떻게든 대학원 공부를 끝마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잖아요. 좋은 의사를 만난 덕분에 빨리 약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공부에 몰두했어요.”
 
  그가 꿈꿨던 ‘재충전의 시간’은 ‘투병 생활’로 바뀌었다.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약을 먹으며 공부를 해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석사 과정이 끝나자, 그제야 한국이 미치게 그리워지기 시작했단다.
 
  투병 생활로 인해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약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얼굴이 퉁퉁 붓고, 피부 발진으로 얼굴에 얼룩덜룩한 반점이 남았다. 그의 투병 생활을 알 리 없는 방송국 사람들은 ‘정미홍이 미국 갔다 오더니 왜 저 모양이 됐냐’고 수군거렸다. 정작 미국에서 괜찮았던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방송인으로서의 인생은 끝났다’고 직감했다.
 
  정미홍 대표의 얘기다.
 
  “예전 같은 자신감과 패기는 사라졌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방송인 정미홍은 끝났구나’를 직감했어요. 미국의 담당의가 추천해 준 한국 의사를 만났습니다. 의사가 병상기록을 보더니 ‘정말 고생 많이 했네요’라고 말문을 열더군요. 그 순간 가슴이 찡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엉엉 울었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라도 위안을 받고 싶었던 거죠.”
 
  방송국 사람들의 어색한 시선과 자신감 상실로 머리가 복잡했던 그에게 남편이 프러포즈를 했다. 정 대표가 미국에서 투병 생활을 하면서 친분이 두터워진 터였다. 국제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그는 프러포즈를 받고 머리가 멍했다고 한다.
 
  “한국 생활에 대한 회의감, 또 남편이 제게 보여줬던 신뢰가 떠올랐습니다. ‘결혼이 별거랴’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일주일 만에 결혼을 승낙했죠.”
 
  그의 남편은 현재 국내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인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 그의 방송국 생활도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갔다. 장윤택(張允澤) 당시 KBS 기획제작국 부주간은 그에게 ‘기동취재현장’이라는 시사프로그램의 MC을 제안했다. 방송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2년 동안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그는 1993년, KBS를 그만뒀다. 부산으로 발령이 났는데, 병원을 다녀야 하는 여러 형편 등을 감안해 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993~94년 초까지 혹독하게 앓았다. 1년 내내 병상에서 시간을 보냈다. 심낭에 물이 고여 숨을 못 쉬었고, 늑막에도 물이 찼다. 식도가 헐어 아무것도 못 먹었다. 핏속에 있는 항체가 적혈구를 다 잡아먹어 급성빈혈에 시달렸다. 온몸이 하얗게 변했다. 통증이 심했던 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선고를 두 번 받았다. 발병 초기에 미국에서 한 번 들었던 것까지 하면, 벌써 3번째였다.
 
  정미홍 대표는 “남들은 나를 보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번을 이겨내면 잘될 거라고 믿었다”고 했다.
 
 
  1995년, 조순 서울시장 선거 캠프에 합류
 
  그가 루푸스를 앓고 있다는 사실은 가족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방송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완성하는 대로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새 터전을 잡기로 했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의 투병생활이 외부에 공개됐다.
 
  ―커밍아웃을 하고 난 다음에 홀가분했겠군요.
 
  “아니요. 오히려 힘들어졌어요. 사람들은 이제 저를 ‘전직 방송인’이 아니라 ‘환자’로만 바라보더군요. 완치는 없으나 관리를 잘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병이라고 설명을 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95년 어느 날, 후배 아나운서 김자영(金慈英)씨가 전화를 걸었다. 김자영씨는 김민석(金民錫) 민주당 최고위원의 부인이다. 김씨는 “얼마 뒤에 서울 시장 선거가 있는데, 민주당 후보인 조순(趙淳) 후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고 했다.
 
  정 대표의 얘기다.
 
  “게다가 조순 선거 캠프에서 여자인 저를 부대변인을 시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어느 당색이 없어서, 어느 당이다 그런 것은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차피 책이 완성되는 대로 미국으로 떠날 테니까 마지막까지 서울에서 재미있게 놀다 가자 싶어 합류하게 됐어요.(웃음)”
 
  ―조순 전 시장과 알고 지냈습니까.
 
  “아니요. 조순 전 시장을 경제학자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선거 캠프에 들어가기로 하고 먼발치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봤는데, 솔직히 실망이었어요. 저렇게 근엄하고 점잖은 분이 어떻게 선거를 치를까 싶었습니다. 그분이 연설 도중 환하게 웃는데, 그 모습이 정말 순수해 보였습니다. 저 모습을 시민들이 많이 본다면, 이 선거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무료 봉사로 선거 캠프에 뛰어들었다. 조순 전 시장의 웃는 모습을 적극 홍보하고, 젊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근엄한 재킷 대신에 줄무늬 남방 차림의 유세를 제안했다. 방송인으로 지냈던 그가 경험한 선거판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날들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조순 전 시장은 서울 제30대 시장이 됐다.
 
 
  남편의 절대적 외조
 
  정미홍 대표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방에서 책 쓰기에 매달렸다.
 
  “집에서 책을 쓰고 있는데 조 전 시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주셨어요. 서울시에 들어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곧장, 미국에 먼저 들어가 있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시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겠다’고요. 제가 미국에 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남편은 사정을 듣더니 ‘당신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더군요.”
 
  사실 정 대표는 그가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첫 번째 원동력으로 남편의 외조를 꼽는다. 그의 남편은 그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단 한 번도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절대적인 신뢰와 무조건적인 응원. 이것이 아나운서 정미홍을 여성 경영인 정미홍으로 변화시킨 원동력이다.
 
  그는 1995년 8월 서울시 홍보담당관(별정직 4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하는 생활은 낯설기만 했다.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시스템, 홍보담당관이라는 신규 직책 속에서 그는 고군분투했다. 딱히 목표도 없었다. ‘그저 내가 만든 시장이 끝까지 잘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홍보담당관을 하다가 조순 시장의 의전 비서관을 지냈다. 1997년에는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라는 재단을 설립했다. 이즈음 조순 전 시장의 대선 출마설이 나돌았다.
 
  그는 조순 전 시장의 출마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반신반의했다.
 
  “조순 전 시장이 민주당 후보로 서울시장에 당선됐지만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식사 약속을 여섯 번이나 잡았다가 전날 취소했습니다. 그런 상황인데 대선 출마설이 나오더군요.”
 
  그즈음 정미홍 대표는 타부서의 공무원과 트러블이 있었고, 여러 고민 끝에 공무원 생활을 접었다. 몇몇 언론에서는 ‘정미홍이 정치 세력 싸움에서 밀려나 그만뒀다’고 보도했다. 생사(生死)를 넘나들며 단련이 됐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이런 보도에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미국에 직장을 알아봐야 하느냐”고 물었다.
 
  정 대표의 얘기다.
 
  “참 우습죠. 남편이 저 때문에 미국으로 갔다, 서울로 왔다 몇 번을 한 거예요. 지금 하고 있는 코칭을 그때 알았더라면 그렇게 상처받지는 않았을 텐데요. 사람의 인생이란 이래서 잘 모른다고 하나 봐요.”
 
 
  고 이득렬 MBC 사장의 권유로 방송 복귀
 
  주위 사람들은 얼마 후에 ‘밀레니엄’(2000년)이 시작된다며 들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할 일이 없어서 우두커니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식당에서 고 이득렬(李得洌) 당시 MBC사장을 만났다.
 
  “이 사장이 ‘요즘 뭐 해’ 그러세요. ‘그냥 놀죠 뭐’라고 답했더니, ‘방송하던 사람은 방송해야 돼’라고 말씀하시고는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얼마 뒤 MBC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 이름을 내걸고 토크쇼를 진행하라고요.“
 
  이렇게 맡게 된 것이 화제를 끌었던 ‘정미홍이 만난 사람’이었다. 그는 2년 동안 방송 MC를 맡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팝가수 쉬나 이스턴 등을 인터뷰하며,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보냈다. ‘박찬호 편’은 당시 시청률이 50%를 넘었다.
 
  2000년에는 J&A라는 홍보대행사를 세워 사업가로 변신했다. 2004년부터는 루푸스병 치료를 위해 복용해 왔던 약을 끊었다. 이때부터 6년 동안 그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있다. 늘 일 벌이기를 즐겨 하는 그는 협회 설립과는 별도로 비슷한 처지에 놓인 루푸스환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후배 아나운서의 권유로 시작한 코칭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큰 기대없이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고 아예 코칭 회사를 세웠다.
 
  “예전에 코칭을 접했더라면 훨씬 직장 생활을 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많이 편해졌을 거고요. 오늘의 저보다 훨씬 나은 성공된 삶이 있었을지 모르죠. 우리 사회가 언어 폭력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더들이 의식을 변화시켜 많은 사람이 보다 품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행복한 삶을 이끌 수 있는 코칭을 전하는 일에 올인할 생각입니다. 소명 의식이 들거든요. 한 번 경험해 보세요.”⊙
 
  사진 : 서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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