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종전 50주년 맞은 베트남

‘花山 李씨’를 통해 본 한국과 베트남의 만남

한국, 베트남을 교두보로 남방에서 活路 찾아야

  • 글 : 박순교 부산가톨릭대 한국–베트남 학술문화교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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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 왕조 왕족 이용상, 왕조 교체기에 고려로 망명해 화산 이씨 시조 돼
⊙ 현재 국내에 결혼 이주 여성 8만5961명, 어학연수생 3만2690명, 유학생 3만915명
⊙ 3500여 개 한국 기업 베트남 진출, 베트남 GDP의 25% 창출
⊙ 경북 봉화군, 뜨선市와 자매결연 맺고 ‘봉화 베트남 사업’ 진행

박순교
1964년생. 경북대학교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 경북대 문학박사 / 現 부산가톨릭대 인문연구소 교수, 부산가톨릭대 한국-베트남 학술문화 교류센터장 / 저서 《화산군 리용상》 《홍하에서 온 푸른 별들》 《이용상 화산이씨 연구》 외 다수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024년 6월 13일 경북 봉화군 충효당 일원 K-베트남 밸리 조성지를 방문했다. 사진=뉴시스
베트남은 아시아의 남단(南端)에 있다. 위치로 보아 남중국해의 진주(眞珠)라고 할 수 있다. 크기는 한반도 전체의 1.5배로 일본보다 약간 작다. 인구는 남한 인구의 두 배인 1억 명 내외이고 평균 연령은 32세 내외다.
 
  지난해 6월 2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거쳐 베트남을 방문했다. 푸틴은 방문 기간 베트남 원자력과학기술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올해 2025년 벽두부터는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 알렉세이 리카체프 로사톰(RosAtom) CEO 등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베트남이 계획 중인 원전(原電) 13기 중 2기를 놓고 물밑 교섭이 현재 진행 중이다. 양국은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를 구축한 상태다.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 역시 심상찮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추동(推動)하는 관세 폭풍 속에서 베트남은 ‘비(非)시장 국가에서 시장 국가로’ 격상(格上)을 꾀하고 있다. 애플, 인텔, 보잉, 아마존, 나이키 등의 기업과 금융 CEO들의 방문(미국 베트남 비즈니스 사절단), 양국 고위급의 연쇄 회담 등 양국의 무역 관계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바람 앞의 풀잎’처럼 베트남은 때맞춰 유연한 대응을 보인다.
 
  한국은 아시아의 동단(東端)에 있다. 한국의 주변은 좋지 않다. 북쪽의 중국(Red China)과 러시아는 6·25전쟁과 관련 있다. 6·25는 동족상잔의 단일 전쟁이 아니라 중국(중공), 러시아(구 소련), 북한의 합작품이었다. 현실의 위협은 아직도 존재한다. 주적(主敵)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제치고 한국 편에 설 것이라 확언할 사람은 거의 없다.
 
  ‘외딴섬’ 한국의 활로(活路)는 남서쪽 바다밖에 없다. 동남아 시장 진출과 해양 진출의 교두보(橋頭堡) 마련, 고립된 지역성 타개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시절 외쳤던 ‘신(新)남방정책’이 실제 전략적 외교 지형의 확장으로 실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베트남을 교두보로 하는 동남아 일대에 대한 전략적 접근과 시장 분석, 선린 우호를 위한 제반 노력은 미래의 국익 실현과 맞닿아 있다.
 
 
  리 왕조,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
 
  베트남(월남) 역사에서 열아홉 왕조가 명멸했다. 기원전 111년 한 무제(漢武帝)의 남방 경략(經略) 이래 베트남은 중국의 압제와 지배 아래 신음했다.
 
  리(李) 왕조(1009~1225년)가 비로소 중국의 질곡(桎梏)에서 독립을 이뤘다. 리 왕조는 216년간에 걸친 ‘대월몽(大越夢)’을 구현한 최초의 장기 독립 왕조가 되었다. 중국에 복속한 지 1100년 만의 일이었다. 리 왕조는 과거제(科擧制)도 최초로 시행했다. 유교와 불교의 습합(習合) 차원에서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과 공자(孔子) 사당 문묘(文廟)를 설치했다. 태자(적장자) 중심의 후계 체제도 마련했다.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했다. 대월은 이후 722년간 남방 제국(帝國)의 표상으로 사용됐다. 현존 최고(最古)의 베트남 역사서도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다. 리 왕조는 중국의 식민 지배 거점이던 대라성(大羅城)을 새롭게 단장해 탕롱(昇龍·현 하노이)이라 이름했다. 장엄하게 정비된 탕롱은 900여 년 동안 수도(首都)로 기능했다. 리 왕조의 제반 유산은 후대 왕조들에 승계되었다.
 

  베트남 역사의 요체(要諦)는 북쪽을 지키고 남으로 향한다는 ‘북거남진(北拒南進)’으로 표현된다. 북쪽을 지킨다는 말이 함의하듯, 베트남의 역대 승전(勝戰)은 영토를 침범해 온 중국과의 항쟁에서 거둔 힘겨운 승리였다. 승리의 영광 이면(裏面)에는 항상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쩐(陳) 왕조는 몽골에 의해 수도가 3번이나 함락당했다. 레(黎) 왕조는 명(明)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었고 20년 가까이 압제당했다. 응우옌(阮) 왕조 역시 청(淸), 프랑스, 일본에 잇달아 침탈당했다.
 
  이와 달리 리 왕조는 중국 전토(全土)를 호령하던 송(宋·북송)을 선제공격했다. 베트남이 중국 땅을 공격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상걸(李常傑·리트엉끼엣)이 거느린 리 왕조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지금의 광시(廣西) 일대를 초토화했다. 사로잡힌 송의 군사들은 100명씩 짚단처럼 묶였다. 송의 군사들만 도합 5만8000명이 도륙됐다. 리 왕조만이 외세에 상처받지 않은 베트남의 유일한 통일 왕조였다.
 
 
  이용상의 망명
 
호찌민 베트남 주석은 18회나 꼬팝(현 뜨선)의 리 왕조 태묘를 방문했다.
  리 왕조의 산실이 ‘꼬팝(古法·현 뜨선)’이었다. 리 왕조를 세운 이공온(李公蘊·리꽁우언)의 출신지다. 리 왕조의 아홉 군주 모두 수도 탕롱을 제치고 꼬팝에 돌아와 묻혔다. 무엇보다 꼬팝에 리 왕조의 태묘(太廟)가 조성됐다. 중세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오직 베트남 리 왕조의 태묘만이 도성을 벗어나 지어졌다. ‘천자(天子)의 종묘’ 태묘가 있는 꼬팝은 제국의 꿈이 어린 곳이다. 이공온 사후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로 추존(追尊)한 것 역시 베트남 역사상 최초였다. 리 왕조에서 유일하게 ‘-조(祖)’로 한 묘호이기도 하다. 리 왕조의 역사를 높이 평가한 호찌민(호지명·胡志明) 주석은 18회나 꼬팝의 태묘를 방문했다.
 
  12세기 말부터 암군(暗君)들이 잇따라 출현하면서 기울기 시작한 리 왕조는 1225년 외척인 쩐(陳)씨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멸망했다. 리씨 왕족들은 몰살당했다. 그 직전인 1224년 음력 10월, 제6대 영종(英宗·아인똥)의 왕자 이용상(李龍祥·리롱뜨엉·1174년~?)이 대월을 탈출했다. 당시 대륙에서는 남송(南宋)과 금(金), 그 너머 금과 몽골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몽골의 명장 무칼리는 중원을 7년간 헤집었다. 이용상은 이러한 지옥 땅을 밟고 고려에 들어왔다. 만약 육지 대신 내내 바닷길을 이용했다면 제주나 해남 언저리에 닿았을 것이다. 이용상은 황해도 옹진반도 자락 화산(花山)에 몸을 맡겼다. 그곳이 이용상 일가의 본관(本貫)이 됐다.
 
  이용상의 발걸음이 머문 고려의 사정도 고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신(武臣) 정권의 최우(崔瑀)가 권력을 휘둘렀고 왕은 이름뿐이었다. 어지러운 세월이었다. 이용상의 둘째 아들은 경북 안동으로 내려와 다시 권력의 언저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혈통은 은둔과 고요를 가슴에 새기고 경북 봉화에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이장발
 
이장발을 기리는 경북 봉화 충효당.
  이용상이 고려 땅에 온 지 얼추 300여 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용상의 후손인 이장발(李長發· 1574~1592년)이 참전했다. 당시 나이 열여덟. 홀어머니와 젊은 아내, 태어난 지 74일 된 핏덩이를 남긴 채 이장발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나아갔고, 전사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시(詩)가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百年存社計 오랫동안 사직을 지킬 계책으로
  六月着戎衣 유월에 융복(군복)을 입었네.
  憂國身空死 나라 걱정에 몸은 자취 없이 죽으나
  思親魂獨歸 혈육 생각 머금어 혼만 홀로 돌아가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쓴, 슬픔으로 얼룩진 노래다. 그의 후손들도 가슴속 슬픔을 날마다 건져올리며 살았다. 가난과 아픔과 애통은 계절마다 반복되었고 혈통은 하나둘 끊어져 갔다. 이용상의 혈맥(血脈)들은 봉화의 한 골짜기에 잠들어 있다. ‘신(神)들의 정원’이다. 그 침잠(沈潛)의 역사가 800년에 이른다.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이 다시 소환된 것은 이장발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을 기리는 과정에서였다.
 
  2018년 1월, 한겨울 추위를 뚫고 응우옌 부 뚱 주한 베트남 대사가 베트남 출신 선조의 영령 깃든 봉화를 방문했다. 이는 한국민의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 1위를 기록했다.
 
 
  ‘사비니의 여인들’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 2024년 현재 3657개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 있다(외교부 한-아세안 금융센터 현황 자료). 항간에선 자잘한 중소기업을 더해 1만 개를 돌파했다고도 한다. 베트남 국내총생산(GDP)의 약 25%가 한국 기업의 힘으로 창출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베트남의 근원을 파헤치고 그들의 내면을 훑는 작업엔 지나치게 소홀하다. 베트남에도 한류(韓流)가 물결치고 있지만 한국에는 제대로 된 베트남 역사서 하나 번역된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한국은 저출산·고령화라는 위기에 처해 있다. 눈앞의 현실은 참담하다. 지방이 신음하고 있다. 지방이 죽어 가는데 중앙이 안전할 수 없다. 재래식 노동 집약의 농업 경영은 이미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아무도 먼저 말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자영업은 생존의 벼랑에 처했다. 국가 기간산업마저 위기에 직면했다. 젊은 층은 혼인도 출산도 미룬다. 사회 전 분야의 도미노식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 ‘한국’이란 이름의 배가 가라앉고 있다. 그런데도 모두들 주변과 눈앞의 안위에만 관심을 둔다.
 
  8만 5961명에 달하는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들은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비니(Sabine)의 여인들’이 되어야만 한다. 고대 로마인들의 아내가 된 사비니 출신의 여인들은 사비니와 로마의 긴장을 중재함으로써 로마의 발전과 영광을 이끌었다. 그러나 베트남 출신 결혼 이주 여성들의 63%만이 겨우 한국 국적 취득에 성공했다. 사각(死角)지대의 그늘이 작지 않다.
 

  최근 3년(2022~24년) 동안만도 1만3259명의 베트남 신부들이 새로 한국 땅을 밟았다(KOSIS 현황 자료). 지금 베트남 2세들은 속속 군문(軍門)에도 입대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방치된 그늘에서 이들 나이 언저리의 상당수가 학업 지체의 늪에 빠져 있다. 이들을 양국 간 가교를 맡을 매력적 인재로 키울 돌봄이 절실하다. 골든아워가 얼마 남지 않았다.
 
  2025년 3월 기준, 베트남 출신 3만 2690명의 어학연수생, 3만 915명의 유학생(대학원생 포함)이 한국에서 공부 중이다. 이는 중국 출신(어학연수 5434명, 유학 4만1149명)을 넘은 최대 수치다(법무무 외국인 국적별 유학생 현황 자료). 한국 정부는 2027년까지 외국인 유학생을 30만 명까지 유치하겠다는 ‘스터디 코리아 300K 프로젝트(Study Korea 300K Project)’ 정책을 내놓았다. 한국호(號)의 동력원을 베트남과 결부짓는 사회 각계의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부산가톨릭대학교의 한국-베트남 학술문화교류센터 역시 궁극의 목표를 ‘국가 이익 수호, 베트남과의 상생(相生), 초(超)지역의 글로벌 협력’에 두고 있다.
 
 
  봉화 베트남 사업
 
  화산 이씨의 세거지인 봉화는 리 왕조의 뿌리였던 꼬팝(뜨선)과 자매결연을 했다. 이 결연은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한국 지자체의 베트남 결연과 결을 달리한다.
 
  봉화는 ‘베트남의 창(窓)’을 표방한다. ‘봉화 베트남 사업’은 지역에만 초점을 둔 사업이 아니다. 봉화의 지역 사업이기보다 경북 북부 활성화 사업, 더 나아가 노쇠에 빠진 ‘한국 르네상스 사업’이다. 관심의 초점이 국부(國富)의 진작에 있다. 이는 베트남의 물길을 두메산골에서 광역으로, 전국으로 확장하려는 혁신이다. 다만 등불의 심지를 켜고, 북을 치고, 깃발을 꽂은 곳이 봉화일 따름이다. 봉화는 지역 부활, 국가 재생을 위한 상징적인 지휘 거점, 베트남을 흡인할 교두보이자 성소(聖所)다.
 
  한국의 부흥이 ‘한여름 밤의 꿈’이 될지 아닐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렸다. 이제 국가 전략 차원의 제고(提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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