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시장의 블랙홀’로 불리며 세계 경매시장 흔드는 중국
⊙ 중국 모든 골동 및 미술품 경매에서 진위 판단의 책임은 구매자가 져
⊙ 한 점에 수십억 원 호가하던 현대예술작품, 거품 빠지자 가격유지 위해 작가가 스스로 고가에
매입하기도
金正賢
⊙ 55세. 서울경찰청 경위 퇴직.
⊙ 주요 작품으로 《아버지》 《어머니》 《맏이》 《누이》 등 가족 연작.
⊙ 2002년부터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 준비 중.
⊙ 중국 모든 골동 및 미술품 경매에서 진위 판단의 책임은 구매자가 져
⊙ 한 점에 수십억 원 호가하던 현대예술작품, 거품 빠지자 가격유지 위해 작가가 스스로 고가에
매입하기도
金正賢
⊙ 55세. 서울경찰청 경위 퇴직.
⊙ 주요 작품으로 《아버지》 《어머니》 《맏이》 《누이》 등 가족 연작.
⊙ 2002년부터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 준비 중.

- 2013년 1월 6일 베이징에서 열린 미술품 경매회. 이른 아침부터 경매장은 열기가 가득했다
흔히 ‘문명’ 또는 ‘문화’라 불리는 그것들은 인간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진보적 궤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망각되어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과거와의 고리이기도 하다.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속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유적, 유물과 같은 유형의 유산들이 그렇고, 전래된 풍속과 같은 무형의 것들도 간과할 수 없는 고리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또렷하게 ‘문명’과 ‘문화’를 증거하고, 높은 자긍심과 함께 과거를 향수하며 이어지게 한 것은 빼어난 예술적 성과로, 시공을 초월해 인류의 사랑을 받아 온 유산들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은 어떠할까?
공안에서 예술인이 된 자팅펑
자팅펑(賈廷峰·48)은 중국 문화부예술품평가위원회(文化部藝術品評估委員會) 지정도서인 《藝術收藏》 편집인과 베이징중보국제경매주식회사(北京中博國際拍賣有限公司) 집행이사 및 예술총감독을 거쳐, 지금은 타이중예술가연합회(泰中藝術家聯合會) 고급예술고문 및 독일 DCKD예술센터 예술총고문 등을 맡고 있는 중국 예술품감정과 경매계의 큰손이다. 그를 베이징의 대표적인 미술거리 다산쯔(大山子) 798예술가에 있는 화랑 타이허예술공간(太和藝術空間)에서 만났다. 화랑 대표이기도 한 그의 이력이 뜻밖이었다.
—미술이나 유물 감정에 관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군요.
“저는 문화대혁명(1966〜1976) 직전인 1964년 안후이(安徽)성에서 태어났는데, 지주였던 아버지는 혁명의 광풍으로 고난과 가난의 수렁에 빠졌으니 변변한 정규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죠. 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도 먹고사는 게 우선이었으니 농사를 짓기도 하고 선원으로 배를 타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공산당에 입당해 공안(경찰)을 했었는데, 당 청년학교에서 정규교육 비슷한 공부를 한 게 전부인 셈입니다.”
—공산당 청년학교에서 전문적인 예술교육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경매와 미술계 일은 언제부터 했나요.
“1990년대 초, 하이난다오(海南島) 하이커우(海口)시에서 열린 중국서화경매장에 경매 일을 하는 친구를 도와주러 갔다가 매력을 느껴, 아예 공안을 그만두고 시작했습니다.”
—예술적인 관심으로 시작했나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순전히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적 아버지는 문혁 와중에 낮에 그 힘든 노동 일을 하고서도 집에 돌아오면 어두운 호롱불 아래에서 서예를 했어요. 고통과 상실감에 대한 정신적 위안이었던 거죠. 나도 비록 청년시절이기는 했지만 돈을 벌고 공안 일을 하면서도 공허감이 컸어요. 그런데 예술계통의 일을 하면서는 그런 공허감을 느끼지 않게 되더군요.”
—그렇더라도 공안에서 예술시장으로의 전업이라니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미술품 감정은 쉽지 않았을 텐데.
“예술품 감정은 일정 부분 체계적인 교육도 필요하지만 많은 유물을 직접 접해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더군요. 저도 처음에는 정교한 복제품들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렇지만 손해를 본 만큼 더욱 치밀하게 유물을 들여다보고 분석하게 되니 눈을 뜨는 시간이 줄어들더군요. 그렇더라도 여전히 완벽하지는 않아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왕희지 모사본이 50억원에 팔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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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매장 뒤편에 마련된 큰손들의 자리. 전화로 실구매자의 지시를 받으며 부지런히 번호판을 들어올리더니 순식간에 30배로 작품값을 뛰게 했다. 생생한 요지경의 현장이었다. |
그가 경매에 적극 참여하던 시기, 하루 동안 그 혼자서 매입하는 예술품이 무려 우리 돈 30억원에 이르는 것을 필자가 직접 목격한 바도 있다. 하지만 중국 경매시장에서 작품의 진위에 대한 판단은 철저히 구매자의 책임이다. 즉 구매 후 작품이 위작으로 판명 나더라도 경매회사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작품의 진위에 대한 책임을 경매 주최가 집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중국에서 경매는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에 법률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술의 가치 판단에 법률이 개입한다면 그때부터 예술은 그 지고한 가치를 잃고 일상의 영역이 되는 것이지요. 2012년, 홍콩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동진(東晋)시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307〜365)의 서첩 《매지첩》(妹之帖) 모사본이 약 500만 달러(약 50억원)의 낙찰 예상가로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단순히 진위의 잣대로만 판단한다면 말 자체가 안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왕희지의 글씨가 워낙 드문 데다 모사본이지만 그 예술적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니 국제적으로도 그만한 가치를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각종 청동기 등 여러 빼어난 유물과 예술품의 위작이 많이 있었는데 때로는 그것들이 사라진 역사와 유물에 대한 증거가 되어 주기도 했죠.”
—그렇더라도 복제품이나 위작은 역사와 예술에 대한 모욕이라 해야 할 텐데요.
“물론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는 그 순기능도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몇 년 전, 저도 경매시장의 질서를 흔드는 위작의 유통을 막고 예술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사랑을 넓히기 위해, ‘우디자!(無低價·최소 금액 없이) 바오전지!(保眞迹·가짜 상품 없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매를 주최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몇 백 위안으로 시작하는 작품도 경매시장에서 다루고, 위작으로 판명되는 작품에 대해서는 전액 환불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대부분의 경매에서 1000위안(약 17만5000원)에서 시작하는 작품들도 다루게 되었지만 20년 경력의 저도 몇몇 작품이 뒤늦게 위작으로 판명되는 바람에 엄청난 손실을 봤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그건 상업적 이익에 눈멀어 윤리도덕이 상실된 경매시장에 내 나름대로 희망의 씨를 뿌린 거니까요.”
엔디 워홀·피카소 그림값 뛰어넘는 경우 수두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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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사이에 7배의 수익을 올려준 허자잉의 ‘구채강녀’. |
—단 몇 분 만에 30배까지 치솟는 과잉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직도 예술품 경매를 주식시장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요. 모든 게 급작스런 경제성장에 따른 거품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때라고 봐요. 사람이 조작으로 유지할 수 있는 한계는 뻔합니다. 머지않아 정상적인 시장 질서를 회복해 합리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리라 단언합니다.”
—많은 손실을 봤는데, 요즘도 경매를 주관하나요.
“반드시 손실 때문은 아니지만 요즘은 주관하기보다는 응찰을 하지요. 어쨌거나 예술은 내가 밥을 먹을 수 있게 해 줬고, 무엇보다 정신세계를 만족시켜 주니까요. 김 작가도 내 조언을 받아 참여해 봐요. 큰돈은 몰라도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테니까요.(웃음)”
그가 예를 들어서 보여준, 중국의 대표적 인물전문 화가 허자잉(何家英·55) 톈진(天津)미술대학 교수의 2005년 작 ‘구채강녀(九寨羌女·구채구의 강족 여자)’는 65만 위안에 매입해 1년 뒤 7배의 수익을 보았다고 한다.
—기왕 거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동안 중국 미술품에 대한 고가 행진이 하늘 높은 줄 몰랐는데 어떤 생각인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짱(臟), 롼(亂), 쉬(虛)’라고 할 수 있죠. 더럽고, 어지럽고, 공허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몇몇 현대화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돈에 눈이 멀어 미친 듯이 질서를 어지럽혔으니 언젠가 거품이 빠지면 허망하겠지요. 그래서 이즈음에는 다시 골동품과 중국 전통화 쪽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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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팅펑. 중국 미술품 경매계의 큰손으로 한중 미술교류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 생각이 있단다. |
—특히 현대작가들의 작품은 아무리 잘 봐줘도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과도한 평가를 받고 있는 듯싶습니다.
“처음에는 정치적 억압의 시대를 지나며 그 반동으로 일어난 미술풍이었으니 미술사적 측면에서도 나름 의미가 있었고 주목받을 만했죠. 하지만 그 주목이 돈으로 이어지자 많은 사람이 그런 풍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부추겨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니 과한 정도를 넘어 엄청난 거품이 끼었죠. 하지만 그건 결국 한때에 지나지 않을 거고, 이미 그러한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작품 값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고가로 구입해 가격을 유지하려는 시도도 있었더군요.
“하지만 그런 모습이 중국 예술의 전부는 아닙니다. 중국 예술은 역사가 깊고 수준도 세계 최고를 꾸준히 유지해 왔습니다. 그것의 바탕은 무엇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수많은 애호가에 있습니다. 과함과 거품의 원인이기도 하지요. 어찌 생각하면 시장 바닥에서 버젓이 모작 그림이 활개치고 있는 것도 그만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 수요가 있기 때문일 테죠. 그렇게 애호가가 많은 만큼 바른 정신의 작가군 역시 매우 넓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탐구하고 구축하여 세계의 인정을 받아 왔고, 받고 있습니다.”
쉬빙, 차이궈창 등이 기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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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춘후이의 연작 중 ‘귀가’ . 그의 가족을 그린 듯한 행복이 관람객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
—희망을 걸 만한 작가를 꼽는다면.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판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활동했던 쉬빙(徐冰), 상하이(上海)희극학원 무대미술과에서 공부하고 1995년부터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차이궈창(蔡國强) 같은 이들이죠. 그들을 보면 중국 예술과 예술가가 뛰어나지 않은 게 아니라 중국 예술의 체제와 생태가 우수한 예술가의 성장을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소수 작가들에게 편중된 관심과 집중은 다른 작가들의 창작욕을 꺾는 등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런 면에서도 중국의 문화예술이 다시 르네상스기에 들어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으리라 자신합니다.”
1955년생인 쉬빙은 톈안먼 사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설치미술가로, 1999년 미국 문화계 최고의 상인 MacArthur Award를 수상했다. 2008년 귀국한 이후로는 모교인 중앙미술학원 대학원 부원장으로 재직하며, 문자를 형상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주목받는 차세대 작가이다. 차이궈창은 1957년생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발명품인 화약으로 작품활동을 해 2001년 상하이 에이펙(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09년 중국 국경절 60주년 등 주요행사에서 불꽃공연을 디자인하거나 총감독했다. 서방에서는 ‘차이궈창 회오리’가 불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주목받는 그는 2012년 미국 국가예술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798예술거리의 변화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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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춘후이 화가 부부. 부인은 패션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798예술가에 전시되는 많은 작품은 무심코 찾아간 관람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일쑤였다. 뒤틀리다 못해 학대를 넘어서 인간의 신체를 난자한 듯한 작품이나, 무작정 벗기고 보자는 듯한 에로틱하지도 않은 노출 작품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억눌렸던 정치에 대한 반동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무래도 무엇인가에 대한 막연한 추종인 듯 보여 뒷맛이 씁쓸하기까지 했다. 그럴 때, 그 거리의 한 작은 옷가게에 걸린 유화 몇 점은 허탈한 가슴을 위로하며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줬다. 추상화이니 딱히 무엇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밝고 따스한 느낌의 색조와 전체적으로 포근함을 주는 분위기가 그랬다. 그런데 그 그림들에도 불편한 가시가 숨어 있었다. 헬리콥터며 전차 등 각종 전쟁무기들이 보일 듯 말 듯 그려진 것이었다. 한 점 사고 싶은데 무기가 거슬리니 없애 달라고 요청해 봤다. 하지만 화가는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꼴통!”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한참이 흐른 뒤 기어이 양귀비(楊貴妃)를 다양하게 그린 소품 중 한 점을 몇 백 위안을 주고 샀었다.
이번 글을 쓰면서 그를 떠올려 만날 약속을 잡은 뒤, 조금 일찍 서둘러 그의 아내와 먼저 인터뷰를 시작했다.
—어! 아이를 가졌네요, 축하해요.
“예, 둘째예요.”
—한족(漢族)의 경우는 한 자녀만 둘 수 있잖아요.
“생긴 생명인데 나아야죠.”
—두 자녀로 인한 벌금은 각오했다는 뜻인가요.
“어쩔 수 없죠, 뭐.”
—7년 전인가 처음 봤을 때는 가게가 조그마하더니 그동안 장사를 잘한 모양이네요.
“운이 좋았는지 798거리에 옷과 차(茶), 각종 장식용 소품을 파는 가게를 3개로 늘릴 수 있었어요, 회사도 하나 설립했고요.”
그러고 보니 넓어진 가게에는 그녀가 직접 의류 모델이 된 사진과 그녀에 관한 기사가 실린 패션 및 여성잡지가 여러 권 놓여 있었다.
그녀, 왕훙쥐안(王紅娟)은 1981년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 출생이다. 20살에 같은 우한 출신의 1974년생 리춘후이(李春輝)를 만나 3년간 교제한 뒤, 2005년 결혼하고 이듬해 베이징으로 올라와 798예술가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직영하는 매장 3곳과 더불어 베이징촹밍문화전파주식회사(北京創銘文化傳播有限公司)를 설립해 패션, 차, 그림 등의 각종 문화 사업을 체계적으로 규모 있게 하고 있다.
옷가게 하며 화가 남편 뒷바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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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씨 영하 10도를 더 내려간 날씨에도, 판자위안 시장에서 싸구려 미술품이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는 애호가의 눈길은 진지하다. |
“친구 소개팅에 따라 나갔는데 남편이 오히려 저를 다음 날 작업실로 초대해 만나게 됐어요.”
—그때 리 화가의 여건은 괜찮았나요.
“아니에요. 역시 화가인 가난한 아버지를 두었는데 무슨 여건이 좋았겠어요? 그런데 그림은 잘 모르지만 다락방 같은 그의 작업실에서 작품들을 보며 색조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3년을 사귀다가 결혼하고, 얼마 뒤 베이징으로 올라와 798예술가에 자리를 잡았죠.”
—하필 798예술가에 자리를 잡은 건 역시 남편의 미술활동 때문에?
“그럼요. 우리 두 사람의 고향인 우한보다는 베이징에 있어야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아예 이곳 미술거리로 온 거죠.”
—아무래도 우한에서 수도인 베이징으로 옮겨 자리를 잡으려면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
“남편은 계속 그림만 그렸지만, 저는 유치원 교사를 거쳐 직접 유치원을 경영했었기에 부족하지만 돈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역시 물가의 차이가 있으니 아주 작은 가게와 주거공간만 구했는데도 더는 여력이 없어 남편의 작업공간을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해 안타까웠어요. 조금 지나 변두리 지하실에 작업실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내 안타까운 표정이다).”
—그 후로도 집안의 경제적 활동은 전부 부인이 한 건가요.
“남편은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요.”
—그림이 좀 팔리기는 했나요.
“간간이 팔렸는데 중국인보다는 주로 외국인들이 사 갔어요. 사방 1.2m 크기의 그림 한 점을 8만 위안(약 1400만원) 받은 게 최고가였고요.”
—옷가게에 전시해서 판매한 건가요, 아니면 전시회에서.
“그동안 개인전은 한 번 열었고, 몇 차례 단체전에 참가했는데, 역시 상설전시장인(웃음) 옷가게보다는 전시회 때 큰 작품이 팔리더군요.”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 건 주로 부인의 노력인 것 같은데, 능력이 있어도 역시 힘은 들 텐데 남편에게 서운함 같은 건 없나요.
“저는 여전히 남편의 그림을 사랑해요. 화가로서 아직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한 건 미술계의 잘못된 풍토 때문이지 남편의 능력 탓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여전히 미안한 건 제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남편에게 작품에 몰두할 시간을 좀 더 많이 주지 못한다는 거예요.”
리춘후이, “인간의 모순이 작품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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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자위안 거리의 웨민쥔 등의 모작품. 그래도 작가의 이름은 복제하지 않아 위작의 시비는 피해 간다. |
—화가의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화가로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에도 어릴 적부터 저에게 미술도구를 사다 주셨고, 저는 당연히 화가가 내 길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후회가 들 때는 없어요?
“없어요. 설령 제가 화가로서 아주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고요.”
—당신의 작품세계는 어떤 건가요.
“20대에는 어렵게 자란 환경 때문에 주로 욕망을 표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인간의 모순을 제 작품의 주제로 삼고 있어요.”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선한 이면에 잠재된 악함, 사랑의 반대편에 숨어 있는 미움, 화려함 뒤에 감춰진 더러움 …, 뭐 그런 것들이죠.”
—내가 당신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말한 무기도 그런 의미였나요.
“그때는 열망이 강할 때였는데 꿈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절망감의 표현이 무기였던 거죠. 그렇지만 요즘은 많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하니 미래지향적이 돼요.”
—최근작 중 일종의 ‘가족’ 연작이 되는 작품들이 아주 따뜻하게 느껴지는군요.
“남편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표현해요. 또 처음 느낌대로 색조가 좋고, 색깔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도 그런 점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만찬’ ‘스마일(Smile)’ ‘면대면(面對面 : Face to Face)’ ‘귀가(回家)’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그의 연작들은 관람객에게 잔잔한 미소와 푸근함을 안겨 주는 작품들이다. 질문에 대답을 대신한 아내에게 다시 물었다.
“비싼 그림값은 부동산중개업을 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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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훙쥐안의 3번째 옷가게. 나름 798예술가 요지의 명소다. |
“아주 고집이 세다는 게 불만이긴 하지만 그게 화가의 길을 걸어가는 밑바탕인데 어떡하겠어요.”
—남편의 성공에 대한 바람 같은 건 있겠죠.
“아내로서 당연히 남편의 성공을 바라죠.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으니 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순기자연(順其自然: 장자·莊子에 어원을 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는 뜻)’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과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돈에 대해서는 ‘무소위(無所渭: 상관없다는 뜻으로 타이완의 인기가수 주샤오톈·朱孝天의 노래 제목으로도 유명하다)’라는 게 우리들 생각이에요.”
볼수록 대견하고 아름다운 부부다. 그렇지만 화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798예술가에서 수시로 접하게 되는, 한 점에 수억 위안을 호가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방지산(房地産·부동산중개업)을 보는 것 같아요. 예술이 아니라 탐욕을 훤히 드러내는 투기장 같은. 그러니 재테크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관심둘 것도 없고, 그마저도 이제는 때늦은 것 같더군요.”
—그래도 화가로서 한 번쯤은 그런 호사를 누려 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것도 같은데.
“다행히 아내 덕분에 큰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내 신념을 내다팔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화풍은 내게 맞지도 않고요. 나는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난해한 어려움으로 주목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모두가 같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싶은 거지요.”
리춘후이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할 능력은 내게 없다. 그렇지만 자팅펑이 자신하는, 중국 예술의 르네상스를 반드시 열어 낼 폭넓은 화가군이 무엇을 지칭한 것인지는 알 것 같다. 천민자본주의의 활개 속에 예술시장마저 미쳐 날뛰지만, 그래도 바른 세상의 희망은 어딘가에는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힘은, 소중한 것은 역시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걸 확인한 건 새해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