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 남은 운명의 ‘불기운[餘燼]’을 기록하다
⊙ 아나키스트로서의 정체성과 조국을 향한 독립 의지 잃지 않아
⊙ 열한 살 무렵부터 아버지와 그 동지들의 밀서 전달 등의 심부름
⊙ “(회고록을) 한 글자도 손대지 마라. 틀렸으면 틀린 대로,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찍어라”
⊙ “그저 운명의 장난으로 ‘위국가(爲國家), 위민족(爲民族)’이란 걸맞지 않은 위대한 어휘가 나에게 주어졌다”
⊙ 아나키스트로서의 정체성과 조국을 향한 독립 의지 잃지 않아
⊙ 열한 살 무렵부터 아버지와 그 동지들의 밀서 전달 등의 심부름
⊙ “(회고록을) 한 글자도 손대지 마라. 틀렸으면 틀린 대로,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찍어라”
⊙ “그저 운명의 장난으로 ‘위국가(爲國家), 위민족(爲民族)’이란 걸맞지 않은 위대한 어휘가 나에게 주어졌다”

- 이규창 선생.
20세기 초,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있다는 징후를 먼저 읽은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재산을 처분해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의 기반을 만들자며 형제들을 설득했다. 1910년, 가족은 국경을 넘어 만주로 향했다. 이로부터 3년 뒤 태어난 셋째 아들이 이규창(李圭昌·1913~2005년)이다. 망명지에서 태어난 아이는 날 때부터 ‘운명’을 짊어졌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여신(餘燼)’이다.
“타고 난 뒤 남은 잔불이라는 뜻이죠. 제목은 아버지가 직접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 이종철(李鍾喆·72) 한중문화협회 이사(천원기술자문㈜ 대표)는 선친의 회고록 《운명의 여신》(일조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겉보기엔 제목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단어 속에는, 책 안에는 이글이글 불타는 시적(詩的)인 결기가 살아 있다.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부채의식 같은 것이었죠.”
이규창은 생전 “나는 그래도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아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은 대부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는 것이다. 총과 투쟁의 기억보다 더 무거웠던 것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규창은 회고록 표지에 ‘여신’이라는 낯선 말을 올려두었을지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청춘을 불살랐고, 그 끝에 자신에게 남은 것은 타버린 세월의 잔불뿐이라는 자의식…. 《운명의 여신》은 한 독립운동가의 삶을 넘어, 살아남은 이가 끝내 내려놓지 못한 시대의 무게를 기록한 증언이다.
“한 글자도 손대지 마라”
이규창 선생의 아들 이종철 한중문화협회 이사.《운명의 여신》은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년)의 아들, 소산(嘯山) 이규창이 일제강점기를 직접 통과하며 겪은 일을 되짚어 쓴 수기다. 격정의 시대를 산 한 개인의 회상이자, ‘미화(美化) 없는 기록’에 대한 고집이 응축된 증언이다.
이회영은 경주 이씨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의 10대손으로, 이건영·석영·철영·시영·호영 등 여섯 형제가 모두 애국지사로 활동한 집안의 넷째였다. 우당은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고, 무장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서전서숙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임시정부 지원과 항일 결사 활동을 이어가다 순국했다.
이규창은 1913년 3월 28일, 중국 지린성 통화현 합니하 언덕의 초가집에서 이회영·이은숙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한양과 베이징, 톈진, 상하이를 오가며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의 현장을 밟았다. 부친 순국 이후에는 밀고자를 검거하는 과정에 나섰다가 일제에 체포돼, 해방될 때까지 10여 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가 자신의 삶을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체신부 공직자로 정년을 마친 뒤였다. 19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 연구자들의 구술 채록이 이어졌고, 그는 신흥무관학교 시절의 기억을 몇 시간씩 멈춤 없이 풀어놓았다. 다섯 살과 여섯 살 때의 장면까지 뚜렷하게 떠오를 정도로 기억이 깊게 남아있다.
그러나 출판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종철 이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지 글은 연대순으로 가다가도 기억나는 대목으로 훌쩍 옮겨가곤 했죠.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읽기 좋게 정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형을 중심으로 문장을 다듬고 순서를 정리해 ‘책다운 책’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수정 원고를 본 이규창의 반응은 단호했다.
“‘왜 내 글을 마음대로 고치느냐’며 크게 화를 내셨죠. 그러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글자도 손대지 마라. 틀렸으면 틀린 대로,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그대로 찍어라.’”
결국 원고는 거의 손대지 못했고, 오탈자만 바로잡아 출판됐다. 1992년 박환 수원대 교수가 교정을 맡아 비매품으로 발간했다. 초판은 300~500부 남짓. 판매용이 아니라 지인들에게 나눠준 것이 전부였다.
이규창이 이렇듯 수정을 완강히 거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 이회영이 가장 싫어한 것이 ‘미화’와 ‘과장’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독립운동을 다 한 것처럼 쓰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전기나 회고록에 사실과 다른 대목도 적지 않고요. 그런 걸 몹시 못마땅해하셨습니다. ‘안 한 걸 했다고 쓰지 마라. 있던 그대로만 써라.’ 이게 아버지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명의 여신》은 다듬어진 서사가 아니라 ‘그대로의 기록’으로 남았다. 잔불처럼 남은 기억을 있는 그대로 적어 내려간, 한 시대의 원본이자 원형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들, 그리고 ‘나’
베이징 체류 시절의 이회영(앞줄 오른쪽). 1922년 여름으로 추정한다. 앞줄 왼쪽은 애국지사 김창숙 선생. 뒷줄 왼쪽부터 손영직, 김달하 선생.가족, 그중에서도 부모는 본인이 택할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결국 본인의 선택이 좌우한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이규창의 삶 역시 그러했다. 《운명의 여신》에서 그는 자신이 위대하고 거룩하여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은 그저 운명의 장난으로 그 흐름에 몸을 맡겼을 뿐이라며 회고록 내내 본인의 인생을 담담히 술회한다.
그러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그 표현이 지나치게 겸손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이규창의 삶은 ‘운명’이라는 단어로 눙치기엔 놀라울 만큼 단단했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열한 살 무렵부터 그는 아버지와 동지들의 밀서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맡았고,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는 부친과 동지들의 식생활까지 책임졌다. 어린 나이에 혁명가의 일상을 감당한 셈이다.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어머니 이은숙(李恩淑·1889~1979년)에게 아버지 이회영은 “혁명가의 자식은 어려서부터 모험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자금 마련을 위해 귀국한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우리 규호(규창)가 동지요, 효자’라는 문장도 남겼다. 이규창은 독립운동가의 자식이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처럼, 누구보다 충직하게 행동했다. 《운명의 여신》 재출간 작업에 참여한 한경구 전 서울대 교수(자유전공학부)의 말이다.
“누구 못지않게 치열한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지만, 정착 이규창은 운명 때문이라고 했지요. 감옥살이 후반에는 병보석으로 내보내고 싶어도 인수해 갈 사람이 없어 감옥에서 그대로 죽은 시신을 352구나 수습하는데, 해방 후 들렀던 점집에서 팔자가 시체를 많이 치울 운명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갑자기 운명론자가 된 것은 아닐 겁니다.”
‘남의 손을 타지 않은 기록’
한 교수는 원고를 정독하며 이 책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는 ‘남의 손을 타지 않은 기록’이라는 점이다. 해외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성장했고, 체포돼 장기간 옥고를 치른 당사자가 자신의 체험을 직접 썼기 때문이다. 둘째는 분명한 목적의식이다.
“이규창은 독립운동을 방관했던 이들이 해방 후 공로자인 양 행세하고, 친일 행적을 보인 사람들이 민족 지도자로 등장하는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나 하나만이라 해도 내가 직접 본 것, 들은 것, 아는 것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후세가 그 시절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마음으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감정과 판단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물 평가는 분명했고, 존경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일본을 지칭할 때도 일괄적으로 혐오의 언어를 쓰거나 하지 않았다. 적개심을 담아 ‘왜(倭)’라 부르면서도, 상대적으로 양식이 있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일인(日人)’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넷째는 독립운동사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다. 특히 유년기와 소년기 서술을 통해 이회영과 동지들의 일상, 관계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한 교수는 여인 ‘송동집’에 대한 기록에 주목했다. 그간 송동집은 이회영의 장남으로 태어나 우당의 큰형 이건영에게 입양된 이규룡의 소실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이규창의 증언을 통해 우당 집안 선산을 지켜온 묘지기의 딸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규창이 송동집을 ‘아주머니’라 부르며 형수 호칭을 쓴 이유,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크게 슬퍼한 이유, 그리고 정화암(鄭華岩·1896~1981년)의 회고록을 읽고 분노한 이유가 모두 이해됐습니다.”
이규창은 정화암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백정기(白貞基·1896~1934년)가 송동집의 시신을 매장하며 했다는 발언(“내 팔자는 얼마나 기박하기에 남의 젊은 첩년 송장까지 메고 다녀야 하는지”)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정화암은 현장에 없었고, 백정기가 그런 말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남성 애국자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가족인 여성 애국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평범하지 않았던 가족, 돈독했던 동지들과의 기억과 삶
1935년 무렵 이용로 사살에 참여해 13년형을 언도 받고 경성형무소에 이송될 당시의 수형 기록표. 이규창(개명 전 이규호)의 죄수번호는 661번이었다.《운명의 여신》에는 이규창의 가족만 등장하지 않는다. 망명과 투쟁의 시간을 함께 건넜던 수많은 동지가 교차한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 이회영이 있다. 이규창의 시선으로 그려진 이회영은 기존 기록보다 훨씬 입체적이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인내와 진중함, 아나키스트 사상가로서의 진보성은 물론, 한 번 분노하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불같은 성미와 자식들의 안부를 살피던 다정한 아버지의 얼굴까지 함께 담겨있다. ‘위인’의 초상이라기보다, 가까이에서 본 한 인간의 풍경에 가깝다.
그의 삶의 궤적을 담아낸 무대 역시 다채롭다. 이규창은 어린 시절부터 광복 직후까지의 삶을 더듬으며, 잠시라도 머물렀던 장소들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글자 사이로 모래바람이 이는 듯한 만주에서 시작해, 소학교에 다니며 아버지의 심부름을 처음 맡았던 베이징, 정신적·물질적으로 가장 궁핍했던 톈진,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 거듭나던 상하이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10여 년에 걸친 옥살이의 기록도 촘촘하다. 일제강점기 투옥 사례는 많지만, 서대문형무소·경성형무소·광주형무소 등 실제 수감됐던 감옥의 일상을 이만큼 구체적으로 남긴 경우는 드물다. 《운명의 여신》을 단순히 독립운동가의 수기로만 부르기엔 아까운 이유다.
재출간의 계기는 뜻밖의 지점에서 마련됐다. 근년 이종찬 광복회장(이규창의 조카)은 할머니 이은숙의 저서 《서간도 시종기》가 2017년 일조각에서 새로 출간된 일을 계기로, “이규창의 회고록도 읽기 편한 형태로 교정을 거쳐 재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재출간의 이유
이를 받아 이종철 이사는 우당교육문화재단 등기이사인 김정권 광운대 교수와 상의했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을 지낸 박경목 충남대 교수가 이규창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 연결고리가 됐다. 우선 박 교수 연구팀이 원고를 디지털 파일로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다.
이종철 이사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의 책을 냈던 도서출판 일조각에 다시 출판을 맡기기로 했고, 그때부터는 단순한 재출간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억나는 대로 적어 내려간 기록을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고증하는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재출간본의 기본 내용은 기존과 같다. 다만 독자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구조를 정리했고, 지명과 사건은 재확인해 바로잡았다. 관련 지도는 보완했고, 현지 조사도 병행했다. 미화 없이 남긴 ‘그대로의 기록’을 존중하되, 오늘의 독자가 정확히 읽을 수 있도록 다듬은 것이다. 이렇게 《운명의 여신》은 다시, 시대의 원본으로 독자 앞에 섰다.
교차 검증으로 살려낸 역사의 결
이규창의 어머니 애국지사 이은숙 선생과 손주 종철(안긴 이), 종광.출판사 일조각의 한정은 이사는 《운명의 여신》이 ‘회고록’의 범주를 넘어 하나의 역사서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작업의 출발점은 이규창이 직접 집필한 1992년 초판 비매품. 그는 이를 저본으로 삼아 원문을 최대한 보존하는 한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주석과 한글화, 편집을 새로 진행했다.
기억에 의존해 쓰인 자전적 기록의 특성을 고려해, 맥락상 어긋나 보이는 대목이나 기억의 착오로 판단되는 부분, 오탈자는 바로잡았다. 동시에 지명과 사건, 인물 관계는 국내외 문헌과 지도, 녹취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로 교차 검증했다. 그 결과는 본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주석으로 처리했다. 다음은 한정은 이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오랜 시간 《운명의 여신》을 작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습니까.
“새롭게 작업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쁘면서도 걱정이 앞섰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자전적 기록으로 가치가 큰 책이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은 반가웠지만, 원문의 상당 부분이 한자로 쓰여 있어 단순히 한글화로 끝날 작업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 작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둔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교차 검증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기억에 의존해 쓴 기록이기 때문에 《서간도 시종기》는 물론, 국내외 자료를 가능한 한 폭넓게 살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발행된 지도와 문헌, 사진을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주길 바랍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영웅담이라기보다, 그 시대를 살고 버텨낸 한 인간의 회고로 조심스럽게 읽어줬으면 좋겠습니다.”
— 이 책의 특징을 하나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주석이 많아 회고록이라기보다는 학술서처럼 보일 수 있고, 분량도 적지 않아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이규창 선생의 글은 매우 명쾌합니다. 우리가 잘 알기 어려운 일제강점기 해외 거점 독립운동의 일화와 당대 사회상, 나아가 옥중기까지 삶의 여러 국면을 소상히 풀어냅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우당 이회영의 아나키즘을 아들인 이규창이 이 책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작업하며 많이 배웠고, 개인적으로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아나키즘을 가장 쉽게 설명한 책이자,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이회영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이사는 《서간도 시종기》와의 비교 독서도 권했다.
“두 회고록은 매력이 분명히 다릅니다. 이은숙 여사의 글은 규방 가사의 연장선처럼 고풍스러운 말씨로 고단한 삶을 담담히 풀어냅니다. 힘겨운 기억을 떠올리며 울컥하는 대목도 있지만, 지난 세월을 기꺼이 끌어안는 정서가 느껴집니다. 반면 이규창 선생의 글은 다소 거칩니다. 불같으면서도 철두철미하고 욕심 없는 성미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같은 사건과 인물을 두 사람이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리고 모자가 서로를, 또 우당 선생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겁니다.”
철저한 고증과 절제된 편집을 거쳐 《운명의 여신》은 다시 독자 앞에 섰다. 기억의 기록을 역사로 끌어올린, 재출간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역사에서 정의가 승리한 적은 없다’
1968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 훈장 수여식에 참석한 이규창 선생. 박정희 대통령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했다.다음은 이종철 한중문화협회 이사(전 회장)와의 일문일답이다.
— 선친 이규창은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나요.
“조금 자유분방한 분이었습니다. 아나키 자유주의를 신봉해 형식과 과장을 극도로 싫어했죠. 복장도 아주 자유로워서 어머니에게 핀잔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가벼워 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이런 말씀도 하셨죠.
‘역사에서 정의가 승리한 적은 없다. 나는 할아버지가 살아온 방식대로 삶을 살았고 너희에게 나와 할아버지의 삶을 따르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
물론 어떤 때는 이 민족은 희생할 만한 가치가 없는 민족이라고 분노를 터뜨리신 적도 있었죠. 또 그러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하라는 것도 내가 할 말이 아니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언제나 정의롭지 못한 이 역사와 사회에 대해 공분을 느끼며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책 제목 ‘여신(餘燼)’도 인상적입니다.
“저도 처음엔 ‘여진(餘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신’, 불이 타고 난 뒤 남은 잔불이라는 뜻이더군요. 그 제목은 아버지가 직접 지었습니다.”
— 이 제목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을까요.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부채의식 같은 거죠.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있어요. ‘나는 그래도 살아 돌아왔다.’ 함께 싸우던 분들은 대부분 먼저 세상을 떠났잖아요. 특히 백정기 선생이나 엄순봉 선생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셨습니다.”
백정기는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의열 투쟁에 나서 친일·일제 핵심 인물을 직접 처단하려 한 행동파 독립운동가다. 항일 독립운동의 급진적 실천 노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엄순봉(嚴舜奉·1906~1938년)은 무정부주의계 독립운동가로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항일구국연맹(흑색공포단)에 참여해 의열 투쟁을 주도했다.
— 어떤 사연이었습니까.
“마지막 거사 때 함께 체포돼 압송되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엄 선생이 아버지에게 ‘나는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살 생각이 없다. 너라도 살아남아 결혼도 하고 잘 살아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평생 잊지 못하셨습니다.”
— 친일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셨습니까.
“아버지는 그 문제로 흥분해 비난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국내 형무소에서 오래 옥살이를 하셨기 때문에, 밖에서 벌어진 사정을 모두 알 수는 없다고 보셨거든요.”
—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 1950년)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다고요.
“네. 젊은 시절 상하이로 와 임시정부에 참여하려 했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결기를 품고 왔지만, 막상 와 보니 다들 굶고 있고, 2층 건물 방 하나에 책상 하나 놓고 ‘임시정부’라고 하니 실망했을 것이라는 거죠. 영양실조에 폐병까지 앓았다고 들었어요.”
— 박순천(朴順天·1898~1983년) 여사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까.
“아버지는 박순천 여사가 친일 인물로 분류된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아붙이며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마음 아파하셨어요. ‘그 시절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데…’라고 하셨죠. 감옥 생활을 오래 하며 직접 고문과 억울하게 엮이는 일도 겪으셨기 때문에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겁니다.”
— 그런 태도는 평소 성품과도 닿아 있나요.
“그렇습니다. 굉장히 부드러운 분이었어요. 해방 직후 감찰위원회에서 활동하실 때도 생계형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무작정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주로 고위직 비리 같은 사안을 다뤘죠.”
“인간은 전생의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다”
이규창 선생과 아내 정문경(鄭文卿) 여사.혹독한 옥살이에 대해서도 이규창은 생전에 “감옥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회고록 곳곳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전생의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다”는 자조적인 표현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아나키스트로서의 정체성과 조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이규창은 단지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의 독립운동가였다. 다음은 《운명의 여신》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인간은 필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전생의 운명을 등에 업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위대하고 거룩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운명의 장난으로 ‘위국가(爲國家), 위민족(爲民族)’이란 거창하고 걸맞지 않은 위대한 어휘가 나에게 주어졌다. 내 일생 동안 흘러간 세월과 운명의 찌꺼기를 작성하였다.〉⊙
미발표 육필 원고
‘삶의 기록’을 넘어 ‘사상의 증언’으로… 이규창의 또 다른 원고
자유 추구는 인류 진화의 원동력
⊙ 자유사회 정치는 민족 전체의 이익을 떠나 개인의 이익은 존재할 수 없어
⊙ 공산사회는 인류 진화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연의 진화를 역행하는 사회

[편집자 註]
이규창이 남긴 미발표 육필 원고는 회고록 《운명의 여신》과 대조적이다. 회고록이 독립운동의 현장을 복원한 삶의 기록이라면, 이 원고는 그 삶을 통과해 도달한 사상의 정리문에 가깝다. 사건의 나열 대신 자유·민족·국가·권력이라는 근본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이규창은 자유를 제도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본능에서 비롯된 생명의 조건으로 규정한다. 자유 없는 생존은 성립할 수 없으며, 인류의 역사는 더 자유로운 사회를 향해 이동해 왔다고 본다.
민족에 대해서는 신성화와 부정을 동시에 경계한다. 개인의 자유는 민족 공동체를 떠나 성립할 수 없지만, 민족이 절대화될 때 자유는 오히려 훼손된다는 인식이다.
공산주의 비판은 이념 공세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로 접근한다. 무자비한 투쟁이 인간의 양심과 상호부조(扶助)를 파괴해 인류 진화의 원리를 거스른다는 주장이다. 이 원고는 독립운동의 경험을 넘어,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놓친 자유와 국가의 의미를 증언하는 사상 문헌으로 읽힌다. 이 작업에 참여한 김정권(金楨權) 광운대 교수의 설명이다.
“《운명의 여신》이 ‘무엇을 겪었는가’를 기록한 책이라면, 이 원고는 ‘그 경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정리한 글입니다. 이론가의 책상이 아니라 망명과 옥살이를 통과한 당사자의 사유라는 점에서 학문적 밀도가 다릅니다.”
《월간조선》은 이규창 선생이 남긴 육필 원고의 일부를 소개한다. 구투의 문장은 현대식 표기로 정리하고, 가독성을 위해 한자는 한글로 풀어썼다.
해외에서 성장하였고 학력과 덕망이 부족한 이 몸으로 13년의 장구한 감옥 생활에서 무슨 공부한 학식과 지식을 습득하였는가. 참으로 나의 일생이야말로 무식과 무학의 구렁에서 헤매다 광복의 빛을 보았으나, 무질서 속의 정치·경제·사상 혼란은 불학무식한 나를 더욱더 혼미하고 무정견하게 만들었다. 광복된 지 50여 년 동안 근 30여 년을 신(新)국가 건설에 이바지한다는 일념으로 자격도 없는 신분으로 공무원으로 봉사하다가 만 60세 정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정치·경제·사상이 혼란한 시기에 공무원을 하였으니 내 나름의 경험과 생전에 느끼지 못한 바도 많았다. 더욱이나 처음 몸을 바친 곳이 대통령 직속인 감찰위원회였다. 위원장은 독립민족운동가이며, 사학자이며 청렴결백의 표본이신 정인보 선생님이시며 8명의 위원도 다 독립민족운동의 헌신자인 분이라 자연히 감찰위원회만은 전 직원이 새로 수립한 대한민국 백년대계의 초석이 된다는 각오로 정치적·경제적·사회적·사상적 흐름과 희생적으로 투쟁을 하였으나, 근 7년 만에 부정·부패한 자유당 국회에서 폐쇄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감찰위원회에서 느끼고 경험한 정치·경제·사상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견을 그저 생각나는 대로 체계 없이 작성하여 나의 생활수기 말미에다 첨부할까 하오니 무식한 점 지적 바라나이다.
민족의 존재적 기능
인류사회의 문명 발전이란 것은 이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유 추구에 대한 본성과 본능적 감정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곧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다. 인류사회의 생존 경쟁도 자유 때문에요, 상호부조(相互扶助)도 자유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유를 찾는 것은 동서양을 물론하고 시대를 구분치 않고 똑같이 공통된 사실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공통하는 바와 똑같은 이념 아래서 자유를 찾고, 자유사회를 동경하고 희구한다. 그러면 자유사회를 과학적으로 수립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사회 환경을 우리의 이념대로 변경할 수 있는가? 우리의 주장을 우리가 동경하는 자유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그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자유 추구 감정은 단념하려야 단념할 수 없고, 인간 생활에 있어서 자유 없는 생존이란 생존할 수 없다. 우리는 사회 건설에 있어서 인간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 추구력은 과학에 근거를 둔 이상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자유란 인간의 생명이다.
원시인으로부터 현대 문명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개인 대 개인의 경쟁, 민족 대 민족의 투쟁,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 추구에 대한 역사이다. 자유사회란 우리가 동경할 수 있어도 실현할 수 없다는 반론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자유 욕구는 무한성을 가졌기 때문에 한 번 목표한 자유를 달성하면 또 다른 자유를 목표로 하게 되어, 달하면 달할수록 또 다른 것이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사회의 건설이 영원히 불가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목표한 점까지는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자유사회 이념의 국가
우리는 우리의 자유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는 자유사회를 가져야 한다. 완전히 자주 독립한 민족국가가 필요하고, 법치국가가 필요하고, 도덕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자유행동을 할 수 있는데 자유행동이란 정당할 수도 있고 부정당할 수도 있다. 이 부정당한 행동을 제지하는 법이 없다면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자유란 찾아볼 수가 없는 사회가 된다. 인간은 자유적(自由的) 동물인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단독으론 존재할 수가 없다. 부부가 있으면 자녀가 있고, 자녀가 있으면 형제 자매 숙질이 있고 자연히 친척이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군중이 있고 사회가 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개인 사생활에서도 단독으로 생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의식주 중에 어느 것도 단독으로 자급자족(自給自足)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상호협동(相互協同)하여야만 생활할 수 있다. 인간이 협동하기 위하여는 사회적 조직과 자유행동에 대한 인간 대 인간의 충돌과 마찰을 조절하는 법에 의한 권력을 가진 국가의 존재가 필요하게 된다.
인간이 타고난 자유를 완전히 보유하고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는 타인의 정당한 자유권리도 침략하지 않는 사회가 필요하다. 타인의 정당한 자유를 침략한 자에 대하여 강력히 제지하는 법률과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면 타인이 자기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있다는 도덕적 원리-해타(害他)가 즉 해기(害己)요 애타(愛他)가 즉 애기(愛己)-를 각성시켜 타인의 정당한 자유를 침해하는 부정행위를 자율적으로 미연에 방지하는 도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문화·생활 각 방면에 대하여 이를 통제 조절 지도하는 권력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중략)
자유사회의 정치
유산자나 정상모리배로서 일단 국회에 집합한 폭력 대의원은 비상(非常)한 횡포를 강행할 것이다. 관리의 승진, 면직도 의회에서 자유로 논할 수 있고, 정상으로 거의 이익을 독점(獨占)할 편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입법과 결의(決議)와 논평을 하여야 할 국회가 개인의 영리를 위한 폭력기관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한 일인 것이다. (중략) 의회정치의 이러한 폐해를 방지하는 일책으로 양원제(兩院制)를 채택한 것은 오래전부터 실시되어 온 일이다. 최근에 와서 이탈리아는 조합정치(組合政治)를 사용해 보았으나, 의회정치의 폐해가 개인 의원의 폭행(暴行)에 국한되지 않고 계급을 대표하는 다수당 의원의 횡포는 국가 전체의 이익을 무시하고 각 단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당파 세력이 민족 전체의 세력을 압도(壓倒)하게 되므로 그 피해는 더욱더 크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재미있는 예는 1931년 영국에서 있었다. 영국 의회의 절대다수를 점령한 노동당(勞動黨)은 내각(內閣)에 압력을 가하여 노동자의 임금과 실업수당을 증액하였다. 당시 영국의 실업자는 150만 명에 달하였으나 실업자(노동당 당원)들은 길거리에서 낚시질을 하며 또는 내직(內職)으로 별도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매월 50달러의 실업수당(失業手當)을 받아 넉넉한 생활을 하였다. 아무리 부강(富强)을 천하(天下)에 자랑하는 영국이라도 예산에 적자가 생기지 않을 이치가 없게 되었고, (중략) 의회의 다수 의석을 점령한 의원의 횡포(橫暴)는 이와 같이 국가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양원제가 이런 때에 필요하다. 자유사회 정치는 민족 전체의 이익을 떠나서 개인의 이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이익은 민족 전체의 이익밖에 안 된다. 개인의 이기주의는 물론 단체의 이기주의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자유권리를 침해하는 까닭이다. 양원제는 물론 찬성이다. 국회의 조직을 전 민족의 지역 대표로 구성된 상원(上院) 외에 따로 직능 대표로서 하원(下院)을 구성하는 것은 입법의 합리화인 것이다. (중략)
상호부조의 동정심 없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 사회에는 인류 진화의 주요 요소인 상호부조의 천연적(天然的) 본능이 결여되어 있다. (중략) 인간의 투쟁 본성을 바꾸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 본능을 거스르고 인간의 양심을 거스르는 무자비한 투쟁을 강요한다. 무자비한 투쟁이란 우리 자연성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소위 살부살모(殺父殺母) 등을 조직하는 등 실제로 비(非)인간적 행위를 강행하였다. 자기의 부친을 자기 손으로 살해하고, 자기의 친모를 자기 손으로 살해할 만한 무자비한 투쟁을 통하여서 이 과거를 청산하고 혁명 대상은 멸할 수 있고 당의 신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는 인류 진화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연의 진화 행정(行程)을 역행하는 사회이다. 소련에서는 상호부조의 애정이라고 할 행위는 완전히 박멸되어 버렸다.
현재 북한은 이것을 실행하여 남북통일로서 완성을 이루려고 한다. 우리는 세계 자유진영 내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이러한 민족적 비애를 맛본 민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공산주의 맛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위선을 일일이 설명해 주고, 나아가서는 전 세계 자유국민에게 호소하여 불쌍하게도 이러한 악마의 수중에 끌려가는 민족들을 구원할 방법을 강구할 것은 물론이요, 인류사회를 멸망으로 끌고 가는 이 마수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하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