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코의 종교개혁가 후스는 ‘근대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원’”
⊙ 방심이 부른 비극 ‘빌라 호라 전투’… 300년간 합스부르크 제국의 종살이
⊙ 나치가 양민 학살하고 마을을 파괴한 리디체에는 ‘전쟁 어린이 희생자 추념상’
⊙ 영화 〈새벽의 7인〉 무대인 성키릴&메서디우스 성당에는 총탄 자국 그대로 남아 있어
⊙ 프라하 구시가지에는 동상, 베들레헴 교회, 카렐 대학 등 곳곳에 후스의 자취 남아
⊙ 방심이 부른 비극 ‘빌라 호라 전투’… 300년간 합스부르크 제국의 종살이
⊙ 나치가 양민 학살하고 마을을 파괴한 리디체에는 ‘전쟁 어린이 희생자 추념상’
⊙ 영화 〈새벽의 7인〉 무대인 성키릴&메서디우스 성당에는 총탄 자국 그대로 남아 있어
⊙ 프라하 구시가지에는 동상, 베들레헴 교회, 카렐 대학 등 곳곳에 후스의 자취 남아

-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
〈요세프 루클 흐로마드카, 아메데오 몰나르 등 체코 신학자들도 15세기 체코 종교개혁을 제1차 종교개혁이라 부른다. 이어서 16세기의 루터, 훌드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의 종교개혁을 제2차 종교개혁이라 부르고 두 종교개혁을 하나로 보았다. 이것은 흐로마드카와 몰나르가 체코 사람이라서 초래된 편견이 아니다. 후스의 언설에는 가톨릭 교회가 유일한 보편적 교회라는 중세적 교회관의 해체, 그리고 근대적 민족의 맹아가 싹터 있었다. 또 위클리프의 교회 개혁 영향이 성직자나 신학자에게 머물러 있었던 데 반해 후스의 종교개혁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전쟁을 일으켜 정치적 사회적인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1918년에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이념은 후스파의 종교개혁에 기반하여 세워졌다. 다시 말해 이 나라는 복고 유신(復古維新)의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1850~1937년)는 후스의 종교개혁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발견했다. 근대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원을 후스의 언설과 종교개혁에서 찾는 것은 분명 가능하다.〉
여기서 또 역사벽(歷史癖)이 도졌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시대에 프라하 여행을 통해 그 뿌리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 추억의 영화 〈새벽의 7인〉(루이스 길버트 감독·1975년 작)도 생각났다. 결국 이번 여행의 테마는 ‘후스와 체코 민족주의’로 잡았다.
얀 후스의 동상
프라하에 도착한 다음 날인 7월 19일 토요일 아침. 구(舊)시가지 광장은 각양각색의 민속의상을 입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프라하 민속의 날’ 행사였다. 체코는 물론 폴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이스라엘, 대만 등 여러 나라에서 온 공연단의 옷차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스위스 공연단은 알프호른을 불었고, 이스라엘 공연단은 후스 동상 옆에서 신나게 춤을 추었다.
구시가지 광장의 중심에는 후스 동상이 있다. 14년 전에 이미 본 적이 있는 프라하의 상징 중 하나지만,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오로지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동상의 중앙에는 꼬장꼬장하게 생긴 삐쩍 마른 사내가 서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얀 후스다. 그의 왼쪽에는 성배(聖杯)가 새겨진 방패를 앞세운 강건한 전사(戰士)의 무리가 있다. 후스 사후(死後)에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후스 전쟁(1419~34년)과 30년 전쟁(1618~48년)에서 싸운 후스파(派) 군대다. 후스의 오른쪽에는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인간군상(群像)이 있다. 1620년 빌라 호라 전투에서 후스파 군대가 참패한 후 해외로 추방된 이들이다. 동상의 뒤로 돌아가면 한 손으로는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갓난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패전과 추방, 외세의 억압 속에서도 언젠가는 민족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의 약속이다.
후스의 동상 전면에는 “MILUJTE SE PRAVDY KAŽDĚMU PŘEJTE”라는 글이 적혀 있다. “서로 사랑하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정의)를 바라라”라는 의미다. 후스가 화형(火刑)에 처해지기 전, 옥중에서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말이라고도 하고, 그의 유언이라고도 한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증오가 판을 치고, 진실이 왜곡되고,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이 말에 이끌려 나는 이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후스는 자기가 말한 그런 삶을 산 사람이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
후스는 남(南)보헤미아 후시네츠 마을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스(Hus)’는 체코어로 ‘거위’, ‘후시네츠’는 거위촌(村)이라는 뜻이다.
후스는 후시네츠 인근 도시 프라하치체에서 공부한 후 프라하의 카렐 대학(프라하 대학)으로 진학, 신학을 공부했다. 카렐 대학은 1348년에 설립된 중동부 유럽 최초의 대학. 후스는 1398년 이 대학 교수, 1409년에는 총장이 됐다. 1402년부터는 프라하 베들레헴 교회의 사제(司祭)로 설교했다. 그러면서 후스는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1320~1384년)의 사상을 받아들여 로마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을 주장했는데, 이는 100년 후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 마르틴 루터(1483~1546년)의 주장과 그대로 통한다.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하고, 이 과정에서 체코어 정자법(正字法)을 만드는 데도 관여한 것도 루터의 행적과 흡사하다.
당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로마 교황청이 이런 후스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1410년에는 프라하 대사교(大司敎)가, 이듬해에는 로마 교황이 후스를 파문(破門)했다. 중세에 파문이란 한 인간을 인류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엄중한 징벌이었다. 후스는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남보헤미아 코지 흐라데크의 성관(城館)에 숨어 저술에 몰두했다.
1414년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됐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그의 신변 안전을 보장했다. 하지만 후스는 콘스탄츠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된 후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재판관들은 후스의 말과 글들을 제멋대로 발췌해서 이리저리 꿰어 맞춘 후 그를 이단(異端)으로 규정했다. 재판관들은 후스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었지만, 후스는 “이 같은 부당한 혐의를 인정하는 것은 신(神) 앞에 죄를 짓는 것이 된다”고 맞섰다. 그는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진실은 이긴다”
후스의 유언에 대해서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체코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후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진실은 이긴다”였다고 한다. 또 후스는 죽기 전에 그의 주장을 철회하면 살려 주겠다는 황제의 신하에게 “나는 내가 쓰고 가르치고 설법한 복음의 진리 속에서 지금 기꺼이 죽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정신은 후스의 동상 앞에 새겨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진리(정의)를 바라라”는 말과 통한다.
후스의 죽음은 중세 가톨릭의 교황 절대주의에 항거한 한 종교개혁가의 순교(殉敎)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체코 민족주의의 거대한 뿌리가 됐다. 후스의 죽음에 분격한 추종자들은 그의 뜻을 잇기 위해 후스 전쟁과 30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코 민족은 300년간 외세의 억압을 받아야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기적처럼 부활했다. 사토 마사루는 《종교개혁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후스파 사람들은 개인과 자기 공동체의 구제(救濟)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가톨릭 교회와 싸웠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체코인이라는 민족감정의 원형, 나아가 언어와 신앙이 같은 사람들이 국가를 건설하고, 그 국가의 방위는 무장한 국민이 맡는다는 발상이 생겨났다. 근대적 민족과 국민국가의 원천 중 하나를 후스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은 후스의 동상 왼편에 있는, 성배가 새겨진 방패를 앞세우고 싸우는 전사의 무리를 연상케 한다. 이들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얀 지슈카(1360?~1424년)라는 무장(武將)이다. ‘체코의 이순신(李舜臣)’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프라하 비트코프 언덕에 거대한 그의 석상(石像)이 서있다.
후스 동상 뒷면에 있는 아이를 젖먹이는 젊은 어머니가 상징하는 것처럼, 후스 이후 체코의 역사는 죽음과 부활을 거듭해 왔다. 후스의 동상을 둘러본 후, 그날 오후에 찾아간 리디체도 20세기에 있었던 체코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곳이다.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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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헨협정 하루 전인 1938년 9월 29일 만난 각국 지도자들. 왼쪽부터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 사진=퍼블릭 도메인 |
히틀러는 1938년 체코와 독일 접경 지역에 있는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인 주데텐(수테티) 지방의 할양을 요구했다.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그 요구를 묵인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국민들에게 한 연설에서 “저 먼 나라의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 간의 다툼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방공호를 파야 한다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황당하고 믿기 힘든 일입니까!”라고 말했다. 12년 후 미국이 ‘알지 못했던 나라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수호하기 위해’ 6·25전쟁에 뛰어들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논리였다. 사실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즉각 참전을 결심한 것은 히틀러의 야욕을 초기에 막지 못하고 유화(宥和)정책으로 일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훨씬 큰 재앙을 불러들였던 데 대한 반성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한국인들은 체코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해 9월 30일 악명 높은 ‘뮌헨 협정’이 맺어졌다. 회담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강대국에 의해 조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오늘은 우리 차례이지만, 내일은 다른 이들의 차례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경고들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주데텐은 자신이 유럽에서 요구하는 마지막 영토라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역에 대한 독립을 보장했던 히틀러는 이듬해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해 버렸다. 체코 지역은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지배하에 들어갔다. 슬로바키아에는 나치의 괴뢰국가가 세워졌다.
많은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영국으로 망명해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했다. 1942년 5월 27일, 나치의 체코 총독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것도 이들이었다. 〈새벽의 7인〉은 바로 이 사건을 다룬 영화다.
리디체 학살
하이드리히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나치 독일은 1942년 6월 10일, 프라하 인근 리디체 마을에 친위대(SS)를 보내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 15세 이상의 남성 192명이 사살되고 여성과 아이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특히 아이들 가운데 82명은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가스로 살해됐다. 가축들도 죽임을 당했다. 나치는 마을의 모든 건물을 폭파하거나 소각하고 잔해들까지 완전히 갈아엎은 후, 이 도시의 이름을 지도와 공문서에서 지워 버렸다.
나치는 리디체의 말살 과정을 영화로 찍어 널리 알렸다. 그리고 선언했다. “리디체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나치는 리디체 말살이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나치에 저항하던 국가들에서는 “리디체는 살아 있다!”며 나치에 대한 철저한 항전을 다짐했다.
82명의 어린이들의 숨죽인 흐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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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디체에 있는 전쟁 어린이 희생자 추념상 (부분). |
뮤지엄에 있는 주된 전시물은 비극이 있기 전 1930년대와 나치 점령기에 찍은 주민들의 사진들이다. 광부, 교사, 어린이, 학생, 신혼부부…. 학살 전날엔가 찍은 가족들의 사진도 있다. 사진 속 얼굴들은 자신들이 그런 야만적인 공격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추모공원에 있는 다양한 조형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것은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학살당한 82명의 어린이들, 더 나아가 전쟁 중 희생된 모든 어린이들을 기리는 ‘전쟁 어린이 희생자 추념상(The Memorial to the Children Victims of the War)’이다. 조각가 마리에 우히틸로바가 만든 이 추념상은 멀리서 보면 그저 크고작은 어린이들의 군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82명의 아이들 하나하나가 생명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모두 두려움에 질린 공허한 눈을 하고 있다. 대여섯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다.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이들은 동생뻘 되는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달래 주려 애쓰는 듯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두려움에 젖어 있음을 감추지 못한다. 아버지들은 총에 맞아 죽고, 어머니들과는 강제로 헤어져서 죽음에 직면하게 된 아이들…. 그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전체주의의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그 어린 것들이 느꼈을 공포감, 숨죽인 흐느낌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체코인들은 정말 조형물들을 잘 만든다.
그 어린아이들의 모습에 공감(共感)해서일까? 추념상 앞에는 이곳을 찾았던 이들이 놓고 간 장난감이나 인형들이 놓여 있다.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먹먹해진 가슴을 달래고 있는데, 어떤 가족이 와서 추념물 앞에 선다. 부모와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던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애는 가만히 가방에 달려 있던 인형을 떼어 추념상 앞에 놓고 고개를 숙인다.
프라하 투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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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프라하 투척 사건이 일어난 프라하 신시청사. |
첫 답사지는 묵고 있는 호텔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신(新)시청사. ‘신시청사’라고 해도 14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곳에서 1419년 ‘제1차 프라하 투척사건’이 벌어졌다. 얀 후스가 독일 콘스탄츠에서 화형에 처해진 지 4년 후인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의 후스파 군중들은 시청을 찾아와 수감 중이던 후스파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 당국이 이를 거부하자 이들은 시청으로 난입해 시장과 시의회 의원 일곱 명을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이 불운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이 사건은 후스 전쟁의 도화선(導火線)이 됐다. 이 건물은 지금은 사적지로 지정되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2차 프라하 투척사건’은 그로부터 199년 뒤인 1618년에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계(系) 보헤미아 귀족들이 프라하성에서 황제의 대리인 세 명을 창밖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이들은 20m 아래로 추락했지만 운 좋게 성벽 아래 쌓여 있던 분뇨 더미 위로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이를 두고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라고 환호했지만, 후스파는 “분뇨 덕분일 뿐”이라고 냉소(冷笑)했다.
이 사건 후 보헤미아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2세를 대신해 팔츠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했다. 이어서 유럽 전체를 휩쓴 30년 전쟁(1618~1648년)이 일어났다.
베들레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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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스가 설교했던 베들레헴 교회. |
여기서 5분쯤 거리에 후스가 설교했던 베들레헴 교회가 있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공중에 매달린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데이비드 체르니가 만든 ‘매달린 남자’라는 조형물이다. ‘매달린 남자’는 다름 아닌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년)다. 현대 지식인의 불안감,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현대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라는데, 내 눈에는 짓궂은 유머로 보인다. 프라하 콰다리오 쇼핑센터 광장에 있는 ‘움직이는 카프카의 두상(頭像)’도 그의 작품이다. 작가는 정겹고 예쁘기는 하지만 너무 고색창연한 이 도시에 그런 식으로 악센트를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베들레헴 교회는 예수가 태어났다는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작고 소박하다. 1391년 두 명의 체코인 평신도가 기부한 돈으로 세워진 이 교회는 체코어로 예배하는 최초의 예배 시설이었다. 사토 마사루의 말처럼 “체코어의 사용은 체코인의 민족의식 형성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양심 있는 자에 의한 미사 집행이라는 조건이 교회의 기강 단속과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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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1년 6월 21일 처형당한 27명의 후스파 보헤미아 귀족들을 기리는 십자가 표식. 천문시계 모퉁이를 돌면 보인다. |
‘보헤미아 귀족’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체코계라기보다는 독일계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체코의 민족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들이 죽은 곳에서 지척(咫尺)에 후스의 동상을 세운 것은 다 뜻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진실이 모든 역사의 영혼이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후스 동상의 기단(基壇)에 새겨진 “서로 사랑하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정의)를 바라라”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어려운 시절을 만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내리치는 죽비(竹箆) 소리다.
생각해 보면 체코 민족주의운동 과정에서 가장 큰 모토는 ‘진실’이었다. 체코인들도 때로는 민족의식을 분기(奮起)하기 위해 자기네 역사를 분식(粉飾)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진실’의 이름으로 그런 유혹을 깨뜨리는 양심(良心)이 나왔다. 체코의 민족주의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겔라시우스 도브너(1719~1790년)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모든 역사의 영혼이 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지식에 대한 사랑으로 후세에 가공된 모든 것을 지워서 그의 민족을 외국인들의 조롱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이러한 지적(知的) 정직성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初代) 대통령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였다. 정치인 이전에 양심적인 학자였던 그는 민족주의 작가 바츨라프 한카(1791~1861년)가 발견했다는 체코 고대(古代) 시가집(詩歌集)이 가짜라는 논쟁에 휘말렸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문서가 가짜라고 믿는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에 그렇다고 알려야 한다. 우리의 자존심과 교육이 거짓 위에 기초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은 과거에 휩쓸려 있는 한, 우리 역사는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다.”
‘민족’이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온갖 허구와 협잡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말들이다.
프라하성의 스타벅스
이외에도 후스 관련 여러 사적지들이 후스 동상 주변에 있다. 1621년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십자가들 왼편으로는 장중한 바로크 양식의 교회가 보이는데 성미쿨라쉬 교회다. 이 교회도 후스의 시대 이후 한동안 후스파의 거점 교회 중 하나였다. 프라하의 상징 중 하나인 틴 성당도 한때는 후스파의 수중에 있었다. 하지만 이 교회들은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이 추진한 ‘반동종교개혁’에 의해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갔다.
후스가 총장으로 재직했던 카렐 대학도 근처에 있다. 이곳에서 15분쯤 걸리는, 레트나산(山) 맞은편에 있는 성살바토르 교회도 후스파와 인연이 있는 교회다.
이제 강을 건너 프라하성으로 향한다. 14년 전에는 카를교(橋)를 건너 네루도바 거리를 거쳐 프라하성으로 갔지만, 이번에는 지하철 말로스트란스카역 앞 광장에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말로스트란스카역 앞 광장에서 커다란 깃발 모양의 조형물을 발견했다. ‘1938~1945’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그것이 나치 점령기의 저항운동을 기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0여 분 정도 걸어서 프라하성 구내에 들어서자, 낯익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STARBUCKS COFFEE’! 프라하성은 체코 역사의 영욕(榮辱)을 간직한 천년고성(千年古城)이자, 지금도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곳이다. 아무리 수많은 관광객들이 밀려드는 관광지라고 해도, 그런 공간에까지 스타벅스가 떡하니 건물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그 거침없는 ‘시장(市場)의 진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아내와 함께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마시며 느긋한 휴식의 시간을 가진 후 성밖으로 나왔다.
‘체코의 이승만’ 마사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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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성 입구. 민중을 몽둥이로 패고 칼로 찌르는 석상이 위협적이다. |
마사리크는 오늘날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재조명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슬로바키아인 마부와 체코인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카렐대 교수를 거쳐 오스트리아 제국의회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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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 흐라드첸스카의 한 작은 공원에 있는 토마시 마사리크의 동상. |
처음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열강은 물론이고 체코나 슬로바키아 내에서도 그의 ‘체코슬로바키아’ 구상은 몽상(夢想)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4년 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표방하면서 마사리크의 구상은 현실화됐다. 1918년 10월 마사리크는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런 마사리크의 행보는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과 무척 비슷하다. 둘 다 당대 최고 수준의 지성인이었고, 국제정세의 흐름을 꿰뚫어 보면서 외교 노선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점, 일찍이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경고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독선적이고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까지도….
실패한 대통령 베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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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코 외무부 입구에 세워진 베네시의 동상. |
베네시는 마사리크 사후 제2대 대통령이 됐지만, 주데텐을 나치 독일에게 넘겨 주는 뮌헨 협정 이후 영국으로 망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이때는 이미 소련군의 점령하에서 공산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뮌헨 협정으로 영국·프랑스 등 서방에 대한 불신감을 품게 된 그는 그런 상황을 방관했다. 그는 1948년 2월 공산당의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베네시는 독립과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나치의 침략과 공산화를 막지 못한 ‘실패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체코인들은 외무부 청사 입구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블타바(몰다우) 강변을 달리는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여, ‘실패한 대통령’을 기억하고 있다.
말이 난 김에 얘긴데, 체코인들은 도로 이름을 통해 역사적 인물들을 기리는 데 열심이다. 에드바르트 베네시 도로의 맞은편 도로는 안토닌 드보르자크 도로인데, 이 도로는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도로와 이어진다. 프라하 중앙역 앞길의 이름은 윌소노바, 즉 ‘윌슨 길’이다. 체코인들은 고마워할 줄 아는 국민이다.
‘반역자 대통령’ 에밀 하하
그 유명하다는 슈트라호프 수도원의 한 건물을 살짝 들여다본 후, 페트린 공원을 거쳐 내려오기 시작했다. 고지(高地)에서 내려다본 ‘붉은 지붕의 도시’ 프라하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프라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철저하게 파괴됐다가 재건된 폴란드의 바르샤바나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과는 달리 중세 이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베네시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에밀 하하(1872~1945년)가 히틀러에게 불려가 “독일의 보호국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프라하를 폭격하겠다”는 말에 기절하는 추태를 보인 끝에 결국 나라를 순순히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하하는 나치 점령 기간중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허수아비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으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직후 반역죄로 체포되었지만 곧 죽었다. ‘하하의 비겁함과 반역 덕분에 프라하가 온전히 보전된 것이라고 감사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평화 지상(至上)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하하처럼, 이완용(李完用)처럼, 순순히 나라를 침략자들에게 들어 바쳐도 되느냐?”라고.
빌라 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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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0년 보헤미아군이 궤멸된 빌라 호라. 왼쪽 나무 밑으로 기념비가 보인다. |
‘한 민족의 운명이, 한 민족의 운명이… 여기서 결정되었구나!’
이곳은 빌라 호라, ‘흰 산(白山)’이라는 의미다(공교롭게도 동학 농민군이 두 번째로 봉기한 곳도 ‘백산’이다). 구글 지도에 빌라 호라에 대한 댓글을 올려놓은 현지 관광 가이드라는 사람은 “들판뿐, 그 이상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요. 굳이 이곳을 와야 할까요?”라고 했다. 하지만 빌라 호라는 그렇게 일축해 버려도 되는 장소가 결코 아니다.
여기서 1620년 12월 8일 보헤미아의 안할트-베른부르크 대공(大公) 크리스티안 1세가 이끄는 2만 명의 후스파 군대와 카렐 보나벤투라 부쿼이가 지휘하는 2만 5000명의 신성로마제국 가톨릭 동맹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보헤미아군은 궤멸했다.
전투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후과(後果)는 엄청났다. 보헤미아의 엘리트(귀족)와 언어는 말살되었다. 종교개혁의 선봉이었던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해 강제로 가톨릭으로 돌아갔다. 이와 함께 보헤미아 독립의 꿈도 무산됐다. 체코 민족은 이후 300년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30년 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보헤미아군이 어이없이 참패한 것은 그날 전투는 없을 것이라는 지휘부의 오판(誤判)과 그에 전염된 병사들의 방심 때문이었다.
1920년, 체코의 민족주의 청년운동 단체인 소콜(Sokol) 회원들이 이곳에 빌라 호라 전투 3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등산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를 연상케 하는 돌탑이었다. ‘전사자(戰死者)들에게. 소콜 포드벨로호르스카 지부. 1620~1920’이라고 적힌 게 전부다. 비극의 역사가 벌어진 현장에서 핏대를 올리거나 통곡하기보다는 입술을 깨물면서 역사를 응시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돌탑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울었다.
‘빌라 호라에서 지휘관과 병사들의 잘못된 판단과 그로 인한 패배가 체코 민족에게 ‘300년 암흑기’를 불러왔다. 지금 우리의 선택이 앞으로 수백 년 동안 민족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도 수백 년간 자유와 번영을 잃고 다시 남의 종노릇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위정자(爲政者)와 국민들은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새벽의 7인〉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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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새벽의 7인>의 무대였던 성키릴&메서디우스성당 지하실은 국가기념관이 되었다. |
14년 전에도 이곳을 찾았었다. 그때 성당 외벽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 이곳에서 최후를 마친 병사들과 그들을 도왔던 성직자들을 상징하는 동판(銅板)과 부조(浮彫)는 보았지만, 지하 기념관은 휴관일이어서 보지 못했다. 그게 두고두고 아쉬워서 이번에는 꼭 보고 오려고 결심했다.
사실 이곳은 과거 공산정권 시절에는 한동안 외면당했었다고 한다. ‘새벽의 7인’의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은 공산주의 계열의 빨치산 활동이 아니라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역사만 기억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조금씩 이곳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다가 2017년에 대대적인 정비를 거쳐 ‘국가기념관’이 되었다.
지하실에 들어서는 순간 울컥했다. 블타바강으로 통하는 터널을 뚫겠다고 곡괭이질을 하다가 그만둔 흔적, 쿠비스와 가브치크가 총과 탄약을 올려놓았던 선반(아마 성당 지하묘지의 관을 두었던 곳일 듯), 그리고 이 성당에서 최후를 마친 일곱 명 특공대원들의 흉상(胸像)…. 이 지하실에서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환풍구 옆에는 단아한 검은 돌기둥이 서있다.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린 오른손 형상 밑으로 ‘VÉRNI ZŮSTALI’라고 적혀 있었다. ‘충실하게 남다’. 조금 의역하면 ‘끝까지 충성을 다하다’라는 의미겠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과 반(反) 나치 투쟁 당시의 구호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훈장’에도 이 구호가 적혀 있다고 한다. ‘아, 투항과 변절의 시대에 이 얼마나 귀한 말인가? 어차피 한번은 죽는 인생, 남보다 더 용감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가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싸움인가’
7월 25일 금요일. 프라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구시가지 광장을 찾았다. 후스 동상 앞에서 체코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역사상 최초의 보헤미아 왕조인 프로셰미슬 왕조(9세기~1306년)가 멸망한 이래 신성로마제국의 지배, 후스 전쟁,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체코인의 독립국가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마사리크의 노력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었지만 불과 20년 만에 나치 독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히틀러의 패망과 함께 나라를 되찾는가 싶었지만, 다시 공산독재 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오는가 싶었지만,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히고 말았다. 하지만 1989년 체코는 ‘벨벳 혁명’을 거쳐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로 다시 일어섰다. 이 기적 같은 부활극(復活劇)의 중심에는 후스가 있었다. 후스 동상 뒷면의 어머니상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대한민국도 다시 일어서는 날이 있을까?’
그날이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후스파 군대가 불렀던 노래 ‘누가 하나님의 전사(戰士)인가?’의 한 구절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싸움인가, 하나님을 위해, 진리를 위해, 자유를 위해, 사랑을 위해.
오, 얼마나 아름다운 싸움인가, 우리가 승리할지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