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戰後 70年

‘시대의 얼굴’ 남자 배우로 보는 전후 70년

‘미국화 된 청년’ 이민에서 ‘불안한 시대의 액션 배우’ 마동석까지

  • 글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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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祖 꽃미남’ 배우 이민, 〈자유부인〉 등 통해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상’ 보여줘
⊙ ‘1960년대의 얼굴’ 신성일, 근대화 욕망하지만 좌절하는 청춘의 아픔 그려
⊙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 붐과 함께 주목할 만한 남자 배우 실종
⊙ 1980년대를 독주한 안성기는 신성일의 ‘1980년대 버전’
⊙ 고도성장의 열매 따 먹게 된 1990년대에는 한석규, 박신양, 배용준 등 ‘안경 쓴 남자’ ‘부드러운 남성상’ 등장
⊙ ‘푸근한 외모의 중년’ 송강호, 소시민적인 고민·갈등·분노 표현하면서 IMF 사태 이후의 스타로 등장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시대의 얼굴’이라는 수사(修辭)가 있다. 대부분 언론미디어에서 붙여주는 칭호인데,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분야건 이런 수사로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적지 않다. 대중문화계에서도 마찬가지. 이 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게 영화배우들이다. 당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 인물들을 구현(具現)하면서 그 당시 대중의 갈망과 딜레마들을 끄집어내 직설적으로 반영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몇 배우는 시대 자체를 상징하게도 된다.
 
  한국에선 상당 부분 여자 배우들 중심으로 이런 접근이 많다. 예컨대 문희·남정임·윤정희의 ‘1세대 트로이카’, 유지인·정윤희·장미희의 ‘2세대 트로이카’, 심은하·전도연·고소영의 ‘3세대 트로이카’ 등이다. 애초에 ‘트로이카’ 등의 명칭과 분류 자체가 여자 배우들에게만 해당된다. 물론 이 역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당대의 특징적 여성상과 함께 시대에 따른 미적(美的) 기준의 변천(變遷)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업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
 
  전후(戰後) 70년을 맞는 지금, 이번에는 생각보다 많이 다뤄지지 않는 각 ‘시대의 얼굴’ 격 남자 배우들을 통해 서로 다른 한국 사회 공기(空氣)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큰 차원에선 ‘대중문화를 통해 바라본 전후 70년’, 좁게는 각 시대마다 가장 인기 있었던 스타 배우들의 면면(面面)을 통해 당대 대중의 동경(憧憬)과 아픔을 짚어본다는 취지다. 차례로 살펴보자.
 
 
  경성제대 출신 ‘元祖 꽃미남’ 이민
 
  휴전협정 직후 1950년대 한국 영화계를 돌아볼 때 당시를 경험했던 원로 영화인들이나 영화학자들에게서 반복되는 언급이 있다. “모든 것은 〈춘향전〉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이규환 감독의 1955년 작 영화 〈춘향전〉 얘기다. 전쟁의 상흔(傷痕)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점, 한국 영화산업의 존폐(存廢)조차 아슬아슬하던 시기에 서울 관객 18만 명을 동원하며 해방 이후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고, 한국 영화 부활의 신호탄이 됐다.
 
  물론 〈춘향전〉은 영화화됐을 때 늘 좋은 반응을 얻어온 소재다. 1923년 개성의 이름난 기생이었던 한룡(한명옥)을 춘향 역으로 캐스팅한 버전이 영화화 최초다. 흥행에 대성공해 장안(長安)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이 대거 영화계로 뛰어드는 현상을 낳았다. 이후 1935년 버전 〈춘향전〉은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로서 다른 영화들에 비해 두 배나 비싼 입장료인 1원을 받았음에도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 〈춘향전〉은 본래 스테디셀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1955년 판 〈춘향전〉이 특별한 건 그 시기 탓이다. 1955년 1월 개봉작이니 휴전협정으로부터 1년 반도 채 되지 않은 때다. 당시 경제 상황이나 문화소비 심리 등으로 봤을 때 서울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18만 명이 봤다는 건 누가 봐도 놀랄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단순하다. 〈춘향전〉을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해 세간의 화제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입소문이 워낙 자자했던 탓에 그를 구경하러 비싼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극장 앞에 줄을 섰다는 것. 바로 이몽룡 역을 맡은 ‘꽃미남’ 배우 이민(李敏)이다.
 
  1921년생인 이민은 실제로 외모도 빼어났지만 이력도 당시로서 특이했다. 일본 사이타마현(縣)의 명문 우라와고등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기도 하고, 돌아와선 경성제국대학 광산학과에서 학업을 마친 상당한 엘리트였기에 그야말로 귀공자 역할로 딱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 이 같은 배경이 함께 알려지면서 〈춘향전〉은 어마어마한 문화현상으로 거듭났고, 이민도 여기서 성립된 귀공자 이미지로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상’ 대변
 
1956년에 나온 〈자유부인〉에 출연한 배우 이민(왼쪽). 그는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상’을 대변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정확히 1955년부터 1959년까지, 1950년대 후반 한국 영화계는 그야말로 ‘이민의 시대’였다. 적어도 흥행 차원에서는 그랬다. 〈춘향전〉 대성공 이후 1956년에 3편, 1957년에 5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이어 1958년에는 10편 출연으로 또 배가 늘어난다. 그러다 1959년에 이르면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한 해 동안 무려 13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민 없이는 영화 못 찍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1960년이 되자 그의 출연작은 다시 4편으로 급격히 줄었고, 심지어 1961년에는 출연작이 한 편도 없었다. 이러다 1963년 〈백마고지〉를 끝으로 주연급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린다. 짧은 전성기, 사실상 ‘반짝스타’였던 셈이다.
 
  이 ‘반짝스타’의 커리어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민은 분명 〈춘향전〉의 이몽룡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것이 맞지만 그를 대변하는 이미지는 바로 다음 해 또 다른 히트작을 통해 굳어졌다. 1956년에 영화화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다. 역시 서울 관객 15만 명을 동원하는 대히트작이 됐고, 사회·문화적 파급력은 오히려 〈춘향전〉을 능가했다. 여기서 이민은 유부녀인 주인공 오선영(김정림 분)에게 춤바람을 불어넣는 대학생 춘호 역을 맡았다.
 
  미국행(行)을 앞두고 있다는 춘호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소위 ‘미국물’이 들어 있는 청년이다. 비니를 쓰고 다니는 차림새부터, 위스키를 즐겨 마시며, “익스큐즈 미” “아이 러브 유” 등 영어를 틈틈이 섞어 대화한다. “그저 프렌드인 여성과 뭐 키스 좀 했다고 해서 뭐가 상관있느냐”는 식으로 예의 영어를 섞어가며 미국식 사고방식을 열변(熱辯)하기도 한다. ‘미국화된 청년’ 또는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물상이 당시 대중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한 배우
 
  이 탓에 이민은 이후 비슷비슷한 역할, 세련된 양장(洋裝)을 한 도회풍의 신세대 청년 역할을 주로 맡았고, 1959년 작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에선 아예 재미(在美)동포 출신 종군기자 헨리 장 역을 맡아 ‘미국화’ 노선의 정점을 보여줬다. 이에 대해 공영민 영화사연구자의 한국영상자료원 칼럼 “1950년대 한국 영화의 성장과 스타의 등장: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한 배우 이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망의 대상이자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남아 있는 미국적 생활양식과 소비는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스타의 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방은 원용진의 표현처럼 “영어로 말하기, 다방에서 커피 마시기, 할리우드 영화 보기 등은 단순히 언어, 물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이민은 미국을 경험한 지식인 엘리트 혹은 미국 문화의 수혜를 받은 젊은이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중략) 흥미로운 것은 ‘미국행’ 혹은 ‘미국에서의 귀환’은 〈자유부인〉뿐만 아니라 〈촌색씨〉나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극의 갈등 상황을 유발하거나 해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건의 내부에서 얽히고설키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관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외부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 문화를 동경하고 선망하지만, 우리의 내부로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이 이민이 맡은 역할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청춘의 얼굴’
 
신성일은 근대화 시대 ‘청년의 얼굴’이었다. 1963년 11월 30일 열린 제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의 신성일과 엄앵란. 사진=조선DB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국토의 절반이나마 자유를 지킨 6·25전쟁이 휴전된 직후 대한민국의 공기란 이처럼 미국에 대한 양가(兩價)감정이 극단적으로 부풀어 오른 분위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민은 바로 이 시대 공기를 정확히 보여주는 대표적 청춘 아이콘으로서 짧으나마 현상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어찌 됐건 이민의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연타석 흥행 홈런 덕에 한국 영화 제작편수는 1955년 15편에서 급격히 성장, 1959년에는 무려 111편에 달하게 된다. 이민이 묘사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들과 그에 영향받은 일련의 신세대 영화들이 함께 이뤄낸 기적적인 산업 부흥이었다.
 
  이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사실 영화계 ‘시대의 얼굴’ 속성은 ‘청춘의 얼굴’이란 점이다. 대중문화 자체가 10~30대 젊은 층이 주로 소비하는 것이기에 대부분 콘텐츠가 10~30대 주인공을 설정해 주(主)소비층 공감대를 얻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민 이후 ‘시대의 얼굴’을 생각해볼 때, 물론 1960년대에는 지금까지도 회자(膾炙)되는 수많은 스타 배우들이 존재했지만, 역시 신성일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60년 작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 신성일 말이다. 젠틀한 신사적 이미지를 선보인 김진규, 이와 반대로 반항적인 이미지의 최무룡, 무게감 있는 전통적 남성상을 그린 신영균 등도 물론 당시를 대변하는 영화 스타들이었지만, 역시 ‘1960년대의 청년’ 하면 신성일부터 떠오르게 된다.
 
 
  신성일, ‘부모 不在’ 청춘들의 고통 그려
 
  이에 대해 한국영화학회 발행 영화연구에 실린 강성률의 논문 〈신성일, 청춘(영화)의 표상〉은 “신성일은 ‘고독한 인상의 반항아’이고 ‘한국의 제임스 딘’이었다”면서 “도시의 이미지를 영화 속에 강하게 그리면서 근대화를 욕망하지만 그 안에서 좌절하는 청춘의 아픔을 그렸고, 부모 세대의 부재를 통한 청춘들의 고통을 그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확실히 그렇다. 한국의 근대화 선언은 1962년에 이뤄졌다. 한국 학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미국 케네디 정권의 근대화론을 처음 적용해 학술회의를 연 게 1962년이다. 곧 국가 근대화의 신호탄과도 같았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같은 해 수립돼 추진됐다. 그러고 불과 1~2년 사이 한국 대중의 조건과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물살을 탔고, 이촌향도(離村向都)는 생존의 기본 방향처럼 여겨졌다.
 
  당시 신성일이 출연한 〈청춘교실〉 (1963), 〈맨발의 청춘〉(1964), 〈육체의 대결〉(1966), 〈불타는 청춘〉(1966), 〈만추〉(1966), 〈초우〉(1966), 〈상처뿐인 청춘〉(1967) 등은 대부분 근대화와 함께 피어오른 갖가지 욕망과 삶의 도전, 신분 상승의 의지, 그리고 그런 의지의 처절한 좌절과 패망(敗亡) 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신성일이 이런저런 청춘영화들에서 고아(孤兒) 출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 합쳐 300만 명 가깝게 사망한 6·25전쟁에서 실제로 부모를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앞선 이촌향도를 통해 기존의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갑작스러운 이동과 적응을 요구받은 당시 젊은이들은 많건 적건 고아와도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성일은 또 다른 ‘시대의 얼굴’이 된다. 전쟁 직후 젊은이들의 미국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부적응을 담았던 이민과는 또 다른 시대, 거센 근대화와 압축 성장이 낳은 청춘의 갈등과 고뇌를 담는 그릇이 됐다.
 
 
  1970년대, 남자 배우들의 실종
 
신성일·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 이후 ‘호스티스 영화’가 이어지면서 여배우들에게 중심이 이동했다. 사진=조선DB
  이어지는 1970년대는 영화계 차원에서 조금 기묘한 시대였다. 활동한 남자 배우는 많았지만 그 인상은 대부분 희미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1970년대는 실질적으로 전후(戰後) 70년사에서 유일하게 여성 캐릭터들이 영화 미디어의 절대 중심에 섰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단적으로, 1970년대 들어 TV 보급률이 어마어마하게 뛰어오른 탓이다. 1965년만 해도 한국의 TV 등록대수는 3만1701대, 가구당 보급률은 0.6%에 불과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불과 10년 뒤인 1975년에는 등록대수 206만1072대, 보급률은 무려 30.3%에 이르렀다. TV는 순식간에 극장 관객들을 빼앗아가는 강력한 경쟁 미디어가 됐고, 영화는 TV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과는 다른 방향을 택해야 했다.
 
  미국의 경우 1950~1960년대 이 같은 경쟁 구도에서 TV로는 보여줄 수 없는 초대형 스펙터클 노선을 선택, 〈성의〉 〈삼손과 데릴라〉 〈벤허〉 등 성서(聖書) 블록버스터와 〈콰이강의 다리〉 〈나바론 요새〉 〈대탈주〉 등 전쟁 영화들을 제작하는 방향으로 갔다. 그러나 아직 자본과 기술력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지 못했던 한국은 성(性) 묘사 중심으로 수위를 높여 ‘TV로는 볼 수 없는 콘텐츠’ 제작에 골몰했다.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 붐의 시작이다.
 
  그 신호탄 격이었던 1974년 작 〈별들의 고향〉의 대성공 이후 〈영자의 전성시대〉(1975), 〈O양의 아파트〉 (1978), 〈꽃순이를 아시나요〉(1979) 등등 ‘호스티스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성공했고, 호스티스 소재는 아니어도 달라지는 젊은 여성의 성 모럴을 다룬 〈겨울여자〉(1977),가 역대 한국 영화 흥행기록을 경신(更新)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남자 배우들의 존재감은 한없이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 성 모럴을 다루자니 변화의 중심인 여성으로 핵심 인물이 이동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엔 1960년대에 신성일 등이 맡았던 역할을 여자 배우들이 맡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도태(淘汰)되거나 압축 성장이 낳은 가치관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마는 청춘 군상(群像) 말이다.
 
 
  ‘매운맛 신성일’ 안성기
 
영화 〈안개마을〉에 출연한 안성기. 그는 ‘1980년대의 신성일’이었다. 사진=조선DB
  그렇게 특이한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들어서자 명실상부(名實相符) 1980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 얼굴로 기억되는 안성기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흥행 면에서나 연기력 면에서나 모두 안성기가 크게 앞서나간 시대이기도 했지만, 특히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 그가 출연한 영화들 자체가 곧 1980년대를 대변하는 영화들이 됐다는 점에서 확실히 1980년대 한국 영화는 안성기의 독주(獨走)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안성기는 많은 점에서 1960년대에 신성일이 맡던 청춘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6·25 전쟁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안성기는 〈오염된 자식들〉(1982)이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등에서 여전히 고아 출신으로 등장했고, 〈안개마을〉(1983)이나 〈고래사냥〉 (1984) 등에서도 소위 ‘집도 절도 없는’ 부랑자로 분하기도 했다. 모두 근대화와 압축 성장의 뒤안길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다만 1960년대 당시보다 표현이 자유로워진 만큼 피폐(疲弊)한 청춘 묘사에 있어 한층 극단적인 모습을 띠었다는 정도만 다르다. 요즘 말로 하면 ‘매운맛 신성일’ 정도가 되겠다.
 
  예컨대 1980년대에 안성기가 맡은 역할들은 실질적으로 악역(惡役)과의 구분이 모호한 것들이 많았다. 〈적도의 꽃〉 〈안개마을〉 〈깊고 푸른 밤〉 등에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서슴없이 범죄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심지어 〈성공시대〉(1988)에선 자신의 얼굴을 새긴 만 원짜리 복돈에 매일 나치식 경례를 하는 배금주의(拜金主義)의 화신(化神)으로 등장, 사실상 반(反)자본주의적 메시지를 전하기까지 한다.
 
  결국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영화 속 ‘시대의 얼굴’들은 모두 유사한 종류 인물들로서 사실상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 압축 성장, 그 엄청난 속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과 그 속에서 가치를 상실하고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이들의 처절한 추락을 보여주면서 같은 고통과 번민, 불안을 안고 있던 청년 대중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역할을 맡았다. 개발연대의 초(超)고도성장은 분명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정도의 획기적인 삶의 질 향상을 단기간에 가져다줬지만, 그 기적적인 성취만큼이나 대가(代價)로서 치러야 했던 대중의 정신적 혼란과 적응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안경 쓴 남자 배우’의 등장
 
한석규 등 ‘안경남’의 등장은 경제발전에 따른 ‘남성성’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진=조선DB
  이처럼 30년 가깝게 지속돼온 기존 패러다임에 처음 대대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이 1990년대다. 한국 영화산업의 부흥과 함께 1990년대에는 영화 스타들도 크게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추리자면 1990년대 초중반에는 박중훈, 문성근 등이, 1990년대 중후반은 한석규와 박신양 등이 영화계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흥행 스타로 크게 주목받았다.
 
  여기서 일련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 한석규, 박신양, 문성근은 ‘안경 낀 남자 배우’라는 점이다.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의외로 스타산업에선 중요한 지점이다. 예컨대 서구에서도 주연 남자 배우 마이클 케인이 안경을 끼고 등장한 1966년 작 영국 영화 〈알피〉가 특히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됐던 바 있다. ‘안경 낀 남자 배우’가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일도 드물었지만, 그런 배우가 섹스 심벌로서 청춘스타로 거듭나는 건 사실상 초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주연급 남자 배우들은 극 중에서 어떤 식으로건 강한 남성성(男性性)을 증명해야 했고,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낀다는 건 일종의 나약함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어딘지 ‘범생이’ 같다는 인상을 줘 역할도 제한되고 극(劇) 중심으로는 꺼려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1990년대 한국에선 영화계뿐 아니라 대중문화계 어디서건 ‘안경남(男)’이 대세처럼 몰려왔다. TV 브라운관에서 역시 안경을 낀 배용준, 손지창, 이창훈 등이 막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었고, 대중음악계에서도 신승훈, 이승환, 서태지 등이 청년 세대를 이끌며 시대를 풍미했다. 이유는 1960년대 당시의 미국과 다르지 않을 듯싶다. 한창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끽하던 당시 미국처럼 1990년대 한국도 이제 막 초(超)고도성장의 열매를 따 먹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자신감도 생겼고, 1인당 GDP 3000달러를 훌쩍 넘기며 중산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맨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악물고 고군분투(孤軍奮鬪)하던 시절에 요구되던 거칠고 강인한 남성상보다는 지식사회에서 활약할 수 있는 지적(知的)인 이미지와 세련된 매너, 덜 공격적이고 조화를 꾀하는 부드러운 남성상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선호됐던 것이다. 거기다 일정 부분 여성성까지 지니고 있어 여성에 가부장(家父長)적 억압을 가하려 하지도 않을 듯한 남성상이 그렇게 새로운 섹스 심벌로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낮은 도수(度數)를 마케팅 포인트로 홍보하던 어느 소주 광고의 카피는 “독한 남자 싫어요. 부드러운 남자 좋아요”였다. 대략 한석규 정도로 대표되는 영화계 ‘안경남의 시대’의 배경이다.
 
 
  ‘喜悲劇’에 강한 송강호
 
영화 〈우아한 세계〉 속의 송강호. 송강호는 IMF사태 이후 소시민의 고민과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럼 지금은 어떨까. 다소 부침은 있더라도 지금 역시 번영의 열매를 따 먹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힘드니 같은 맥락에서 ‘시대의 얼굴’들이 나타나고 있을까. 현실은 의외다. 지금의 영화계 ‘시대의 얼굴’은 송강호다. 송강호는 첫 단독 주연 히트작인 2000년 〈반칙왕〉 이래 거의 사반세기 가깝게 한국 영화계의 얼굴로서 자리매김하는 어마어마한 지속력을 지닌 대스타다. 그리고 결국 지난해 〈브로커〉로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흥행과 연기력 양면에서 모두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존재로 우뚝 서게 됐다.
 
  그런데 송강호는 참 특이한 종류의 스타다. 첫 단독 주연 영화가 한국 나이 34세 때 나오고 대부분 히트작들은 40~50대에 걸쳐 있으니 청춘스타라 보기는 힘들다. ‘꽃미남’과도 거리가 먼 푸근한 인상이다. 부산 출신으로 경상도 억양이 여전히 섞여 있다. 대구 억양이 강한 탓에 대사를 성우(聲優)의 후시(後時) 녹음에 의존하며 전성기 대부분을 보냈던 신성일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송강호는 희극(喜劇) 연기로 처음 스타덤에 오른 탓에 계속 그 이미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고, 정극(正劇)에도 다수 출연하지만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대부분 희비극(喜悲劇)이라는 평판이다. 희극 중심 배우가 딱히 정상급 인기를 차지한 적이 없는 한국 풍토에서 이 역시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여러 면에서 기존의 스타산업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 기준으로 봐도 그렇다.
 
  그럼 송강호는 대체 어떤 당대 현실을 반영하는 인물인 걸까. 상당 부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낳은 스타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근대화 선언 이후 처음 무한(無限)성장 신화가 무너지고 기업들의 연쇄 도산(倒産)과 청년 취업 빙하기가 닥치면서 청년 세대의 생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시작된 시점 말이다. 그런 시대이기에 송강호 같은 푸근한 외모의 중년 남성이 다분히 소시민적인 고민과 갈등, 분노 등을 표현하는 영화들에서 위안을 찾았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렇듯 만성적인 불안과 공포의 시기이기에 송강호가 품은 해학(諧謔)적 요소가 빛을 발하게 됐다는 것이다. 엄혹한 현실에 대한 냉소(冷笑)로서의 웃음이든 치유(治癒)로서의 웃음이든, 웃음으로 삶의 고통을 덜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세대의 심리가 반영됐다.
 
 
  ‘불안한 시대’의 액션스타 마동석
 
영화 〈범죄도시〉(2022)의 마동석은 ‘불안한 시대’의 액션스타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한국 영화산업의 상업적 ‘큰 꿈’이라 할 수 있는 ‘1000만 영화’를 4편(〈괴물〉 〈변호인〉 〈택시운전사〉 〈기생충〉)이나 내놓고, ‘대박’으로 분류되는 500만 관객 이상 영화는 무려 13편이나 탄생시킨 송강호의 믿기 힘든 초장기 스타덤은 바로 이런 종류 시대의 아픔, 즉 이제 생존의 위협은 사라졌으나 개인으로서 존재 증명 및 사회적 역할 차원에서 점차 자존감(自尊感)을 잃어가는 신세대 멘털리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른 얘기도 들린다. 신작 주연 영화 〈범죄도시 3〉가 6월 4일 현재 불과 개봉 6일 만에 450만 관객을 돌파하고 있는 마동석이 새로운 ‘시대의 얼굴’로 올라선 게 아니냐는 의견이다. 거대하고 육중한 근육질 체구로 상대를 주먹 한 방에 픽픽 쓰러뜨리는 모습들을 선보이며 〈범죄도시〉 3부작은 물론 〈악인전〉 〈나쁜 녀석들: 더 무비〉 등까지 흥행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대표적 액션스타. 3년여에 걸친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전 세계 경제와 사회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는 지금, 한국의 청년 대중이 원하는 ‘시대의 얼굴’은 이렇듯 선명한 선과 악 구도에서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며 묵은 체증(滯症)을 속 시원히 날려줄 거구의 액션스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고급입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 이민에서 신성일과 안성기, 한석규와 송강호를 거쳐 어쩌면 마동석까지 이어지고 있는 영화스타들의 면면(面面)만으로 각 시대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다.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가 《파편화한 전쟁》에서 지적했듯 “어떤 특징들이 지배하는 시기로 한 시대를 구성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구상했거나 구상하려는 시대상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삭제”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렇기에 더 많은, 다양한 정보와 시각, 관점들이 필요한 것이고, 이처럼 대중문화에서 시대 공기를 찾아내려는 시도 역시 전후 70년을 맞이하는 지금 한 번쯤 되짚어봐야 할 역사의 한 조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대중문화가 보태는 역사의 조각들은 역사책을 더 두껍게 만드는 정보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정보들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데 역할 한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정보가 새롭게 나열되는 데 역할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역할이 사뭇 간절해지는 순간들이 온다. 예컨대, 근래 명품 사치 풍조가 만연하다는 보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가운데 이 같은 풍조가 지금이 처음이 아님을 앞선 이민의 1956년 영화 〈자유부인〉에서 당대 유행어로 거듭났던 대사, “뭐든지 최고급품으로 주시오. 최고급입니까?”를 통해 확인해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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