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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제주교구의 기도문 ‘3·1운동 100주년 십자가의 길’ 분석해보니…

20세기 한국사를 ‘해방신학’ 관점으로 해석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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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년간 이 땅의 많은 형제들이 불의한 권력의 약탈, 탄압, 사찰, 구금, 고문, 징용, 학살, 추방, 토벌, 수형과 단죄를 받았다”(강우일 제주교구장)

⊙ 일부 신자, “편향된 역사의식 담고 있다”며 ‘강우일 주교 파문요구서’ 제출
⊙ “10월 19일 14연대의 병사들은 동족 형제를 죽이는 일에 출동할 수는 없다고 봉기”(여순사건)
⊙ “주민들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차별 학살… 유가족들은 평생 폭도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4·3사건)
⊙ 일제시대, 4·19, 6·10 등에 대해서도 ‘민중항쟁’이라는 시각 강조
천주교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가 작년 11월 6일 ‘제주 4·3, 미국의 책임을 묻는다!’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강연하고 있다. 강 주교는 “미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천주교 제주교구 홈페이지
  천주교 제주교구(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894년 동학농민봉기부터 2016년 촛불집회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되짚는 〈3·1운동 백주년 기념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이하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을 발표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1처(處)에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고(12처) 무덤에 묻힌 것을 묵상하는 14처까지의 기도를 말한다. 신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1~14처를 걸으며 회개와 은혜를 청한다. 모든 천주교 성당과 성지(聖地)에는 ‘십자가의 길’이 마련돼 있다.
 
  그런데 올해 초 제주교구에서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이란 기도문을 만들어 교구 신자들에게 배포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일부 신자들이 제주교구의 기도문 배포 행위를 신성(神性) 모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강우일 주교 파문 요구서’를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에 전달한 상태다.
 
  반발 이유는 기도문에 담긴 편향된 역사인식 때문이다. 예컨대 제주 4·3사건을 두고 ‘남로당 무장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제주교구는 ‘무자비한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로만 규정하고 있다. 일부 신자들은 “편향된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 기도문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여정으로 둔갑됐다”고 비판하고 있다.
 
  제주교구가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에 담은 한국 근·현대사의 14개 장면은 ①동학농민봉기 ②한일 강제 병탄 ③3·1운동 ④일제에 의한 강제노역과 위안부 동원 ⑤제주 4·3사건 ⑥여순사건 ⑦제주 계엄령 선포(1948) ⑧6·25사변 ⑨4·19혁명 ⑩5·16군사정변 ⑪베트남 파병 ⑫광주 5·18 ⑬6월민주항쟁 ⑭촛불집회 등이다. 근·현대사의 흐름에서 좌·우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역사적 쟁점거리다.
 
  강우일 주교는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 서문에서 “지난 100년간 이 땅의 많은 형제들이 불의한 권력의 약탈, 탄압, 사찰, 구금, 고문, 징용, 학살, 추방, 토벌, 수형과 단죄를 받았다”며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불의한 현실에 순응하고 악과의 싸움을 두려워했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강 주교의 이런 주장은 100년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치게 자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36년의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 동강 난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제주교구의 한 신자는 “강 주교가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를 ‘해방신학’이 유행하던 라틴아메리카 상황처럼 기술했다”며 “이는 강 주교의 역사인식이 대단히 편향되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일부 신자들에게 편향된 사관(史觀)이 담겼다고 지적받는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을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해보기로 한다.
 
 
천주교 제주교구가 작성, 배포한 〈3·1운동 백주년 기념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 표지.
  제1처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 겨레와 국토를 유린하였습니다.
 
  조선의 힘없는 농민들은 오랫동안 부패한 관리들의 탐학과 횡포에 짓밟히다가 견디지 못하고 봉기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청과 일본의 군대를 번갈아 끌어들이고 온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 군대는 농민군을 땅끝까지 추격하고 공격하고, 이 땅의 가난한 농민 3만여 명이 권력자들과 외국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당하였습니다. 조선의 지배계층은 권력 다툼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민초들은 부패한 정권과 외국 군대의 폭력에 무참히 희생당하고 쓰러져갔습니다.
 
  분석: 기도문에는 유물사관에 의한 역사인식이 드러나 있다. 구한말을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재생산되는 상황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회의 불평등 구조 속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간 대결의 관점에서 지배집단에 반한 민중의 봉기를 강조한다.
 
  피지배계층인 민중이 겪은 고통과 죽음, 희생만을 강조한 채, 동학운동이 가져온 긍정적인 평가는 없다. 예컨대 동학세력이 세운 ‘집강소’는 우리나라 근대 시민 민주주의의 시발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동학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농민군의 잔여 세력은 을미의병에 가담해 투쟁했고, ‘영학당’ 등 새로운 조직을 결성해 반봉건, 반침략의 민족운동을 계속해나갔다.
 
  동학운동의 부정적인 측면도 많다. 고을마다 관리를 살해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한 사례들이 그것이다. 지주들에게도 돈과 곡식을 강제로 헌납받아 원성을 들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동학운동은 기존 체제를 부정한 급진적 혁명이라기보다 유교적인 근왕주의(勤王主義)에 입각해 서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복고적 개혁의 성격이 강했다는 평가다.
 
 
  제2처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겨레의 고난과 핍박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제국은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색출, 제거하였습니다. 국토의 토지조사를 통한 토지침탈이 시작되고 식량과 물자는 헐값으로 일본으로 유출되어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갔습니다. 땅을 빼앗겨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은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중국, 러시아, 하와이, 중남미로 흩어져 갔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유랑민들은 세계 구석구석에서 차별과 중노동의 십자가를 지며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분석: 일제 무단통치로 인한 백성들의 피폐한 삶에 초점을 맞춰 당시 민중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묘사한다. 이때 민중은 지배와 복종 관계를 복제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일제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희생과 노고가 적잖았음에도 이러한 면은 외면하고 있다.
 
 
  제3처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남녀노소 민초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펼치며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자유와 존엄을 외쳤습니다. 장터에서, 공원에서, 교회에서, 사찰에서, 모든 계층과 직업의 시민들이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맞서 여러 달을 두고 끊임없이 자주독립을 외치며 궐기하였습니다. 학생, 교사, 주부, 간호사, 기생, 변호사, 상인, 공무원, 군인, 해녀들이 일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구타와 투옥, 고문과 처형으로 넘어지고 스러져가면서도 그들은 자유를 향한 부르짖음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분석: 민중 봉기의 관점에서 3·1운동을 기술하고 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중심이 돼 국제 정세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함을 기술하지 않고, 남녀노소 민초들이 아무런 무기 없이 거대한 제국의 권력에 맞섰다고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은 일본제국에 맞서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집결되어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할 때 3·1운동은 한국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또 기도문에는 학생, 교사, 주부, 간호사, 기생, 변호사, 상인, 공무원, 군인, 해녀 등을 열거해 지나치게 피지배 노동자 계급을 강조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제4처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 후 일본제국은 100만이 넘는 우리 국민을 강제노역과 종군위안부로 동원하였습니다.
 
  전쟁이 심해지자 일본은 일본 전국의 탄광, 건설현장, 공장 등에 조선의 노동자들을 강제로 차출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정당한 보수도 없이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며,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무참히 짓밟히고, 몸과 영혼에 회복할 수 없는 치욕과 상처가 깊숙이 새겨졌습니다. 지금도 생존자들은 회한과 울분 속에 눈물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분석: 일제의 강제노역과 종군위안부로 짓밟힌 우리 민족을 묘사하고 있다. 노예, 성노예, 치욕, 상처, 회한, 울분 같은 단어로 민족의 현실을 그린다.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으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타율적 존재로 당대 국권을 상실한 한국인을 절절히 바라본다.
 
  다만, 식민지 수탈론과 함께 식민지 근대화론은 학자들 간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학자들 사이에 “식민지 시대에 3%대 후반의 고도성장을 해왔고, 근대적인 산업구조 개편으로 1인당 소비 증가율이 연평균 3.7%나 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론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과거 일제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강점기에 선전하던 거짓된 ‘식민지 정책홍보’”라는 주장이 다수다. 식민지 경제를 운용하려는 의도와 결과로 볼 때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가 과연 획득했는지를 따져본다면 그 성장이나 개발이 식민지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3·1운동 백주년 기념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 제5처는 제주 4·3사건을 다루고 있다.
  제5처
  1947년 3월 1일 3만여 명의 제주 시민들이 북초등학교에 모이고 4·3이 시작되었습니다.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이한 이 땅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구도에 편입되어 남북으로 분단되고, 나라 전체가 처절한 좌우 이념 갈등의 올무에 걸려들었습니다. 해방 후 제주는 귀향민 급증으로 식량난, 취업난을 겪으며 경제파탄 상황을 맞았고, 민생고로 힘들어하며 3·1절 기념식에 모여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하니 6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어서 대대적인 책임자 색출과 체포가 이어지고, 폭행과 고문이 자행됨으로써 도민 전체가 총파업에 참여하며 미군정에 대한 비폭력 저항에 동참하였습니다.
 
  분석: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많았던 4·3사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 나오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한 좌익세력들의 선동에 기인했다’는 시각을 배제하긴 어렵다. 반면, 좌파 진영은 4·3사건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이데올로기 투쟁의 일환으로 해석한다.
 
  제주교구의 기도문은 무장세력이 공권력인 경찰·군인·우익인사들에게 저지른 학살은 외면한 채 전적으로 공권력의 양민학살로 몰고 가는 느낌을 준다.
 
  당시 불법화된 조직인 남로당은 광복 이후 첫 선거던 5·10선거 반대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기치로 내걸고 합법·비합법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지하조직의 한계상 합법보다는 비합법투쟁, 폭력투쟁으로 치닫게 됐다.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3년 ‘제주 4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표한 진상보고서는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면서도 “이런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명시했다. 이런 부분을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은 외면하고 있다.
 
 
  제6처
  1948년 10월 19일 여순 봉기가 발발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에 제주도로 출동, 4·3 사태를 일으킨 무장세력을 토벌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10월 19일 14연대의 병사들은 동족 형제를 죽이는 일에 출동할 수는 없다고 봉기하였습니다. 정부는 여수·순천 지역에 11개 대대의 진압군을 급파하고 봉기한 14연대 병사들은 지리산으로 도주하니 봉기는 8일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여수·순천 지역 수천여 명의 무고한 일반 주민들이 봉기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국가는 아무런 진상규명도 하지 않은 채 이 무고한 죽음을 70년 동안 침묵과 망각 속에 묻어왔습니다. 오늘도 치유되지 않은 유가족들의 상처에는 출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석: 여순(여수·순천)사건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을 기술하고 있다. ‘국가는 아무런 진상규명도 하지 않은 채 이 무고한 죽음을 70년 동안 침묵과 망각 속에 묻어왔습니다’라고 썼다.
 
  당시 여수·순천 지역에 주둔한 부대에는 좌익세력들이 상당수 입대해 있었다. 남로당에 포섭된 장교와 하사관들은 ‘제주도 4·3사건 진압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을 외치면서 상관들을 사살하고 여수와 순천과 인근 지역을 장악했다. 이들은 우익인사들과 경찰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진압군이 여수와 순천을 탈환한 뒤에는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일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됐다.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은 반란군이 자행한 학살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군경에 의한 학살만을 강조한다.
 
  또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은 일부 좌익 군인들이 무장해 일으킨 반란을 ‘봉기’ ‘봉기군’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제7처
  1948년 11월 21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제주도 경비사령부는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 이상 들어간 지역 통행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중산간 지역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시키고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였습니다. 정부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며 주민들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무차별 학살하였습니다.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유가족들은 평생 폭도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범죄자 취급당하며 살았습니다.
 
  분석: 1948년 11월 21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산간 마을을 초토화한 대대적인 강경진압 작전으로 4·3사건 희생자의 80%가 죽임을 당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사태가 단순한 지역 문제를 넘어 국가 정통성을 해치는 도전으로 인식했다.
 
  다수 양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무장대의 강요를 따르면 나중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폭도로 몰려 죽었고, 경찰을 도와주면 무장대에게 반역자로 몰려 죽었다. 그러나 제주교구는 무조건 공권력을 악으로 기술한다.
 
  어떻게 보면 제주 4·3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좌익의 무장투쟁과 군경의 과잉진압이었다. 양민의 죽음을 담보로 강경투쟁만을 고수한 좌익 지도부의 무모함과 모험주의, 그리고 군경의 과잉진압 모두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무고한 희생의 가해 폭력에 대한 책임은 분명한 실체가 있는 공권력, 즉 정부가 책임을 지게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지적이다.
 
 
〈3·1운동 백주년 기념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 제8처는 6·25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제8처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은 조국을 외세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외세가 제공한 가공할 무기를 총동원하여 동포와의 살육전을 벌였습니다.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양측 모두 군인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일반 시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투는 멈추었어도 상처와 대결, 원한과 증오는 배가하고, 오늘 남북에 쌓아놓은 무기는 옛날보다 훨씬 더 가공할 살상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평화는 오지 않고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은 아련한 부모 형제의 얼굴을 가슴에 묻고 그리움에 사무친 한 많은 나날을 살아갑니다.
 
  분석: 좌파들이 곧잘 주장하는 ‘북침설’은 따르고 있지 않다. 다만, 북한의 남침 주장(조국을 외세에서 해방시키다)을 앞세워 전쟁발발 책임을 모호하게 서술하고 있다. 외세를 ‘미국’으로 지칭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에 대한 방어적인 반작용으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6·25전쟁 당시의 기밀문서들이 대거 공개되면서 조국해방전쟁 운운은 힘을 잃었다. 수많은 문서를 통해 김일성의 요청, 스탈린의 최종 승인,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으로 면밀하게 계획되고 실천에 옮겨진 전쟁이 6·25전쟁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8처’ 기도문은 전반적으로 6·25를 내전(內戰)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민족해방전쟁, 통일전쟁 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다. 내전의 관점에서 보면 유엔 16개국 참전국도 ‘제국주의 세력’이 된다.
 
  그러나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 준비 과정에서 소련의 긴밀한 협의와 지원이 있었고, 중국은 직접 참전했다. 또한 유엔군의 이름으로 16개국이 참전한 만큼 명백한 ‘국제전’이었다.
 
  기도문에 나오듯 현재까지 남북 사이에 ‘상처와 대결, 원한과 증오’가 있다. 그렇다고 6·25전쟁의 의미를 뒤집을 순 없다. 6·25는 공산주의 침공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였다. 전쟁으로 수많은 신앙인이 죽어갔으며, 지금까지 북한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제주교구 성직자들은 북한 신앙을 위해, 숨어 있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제9처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장기집권을 위한 3·15부정선거에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항의하여 궐기하였습니다. 경찰은 시민들을 향하여 발포하며 강경진압에 나섰고, 7명이 사망, 87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때 시위에 참가했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얼굴에 최루탄 박힌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고 이는 온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4월 19일 서울 경무대 앞에는 수많은 대학생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경찰은 또다시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꽃다운 젊은이들 21명이 자유와 인권을 위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쳤고, 172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잔혹한 폭력은 공권력의 정당성과 권위를 무너뜨리고 엿새 후 대통령은 하야,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피 흘리며 목숨 바친 학생들의 정의로운 힘이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분석: 4·19를 기술하며 이승만 정권의 잘못(독재와 장기집권)에 의한 무고한 희생을 강조하고 있다. 4·19는 학생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동참한, 아시아에서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혁명이었다.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능동적인 혁명이었음에도 4·19 참가자의 죽음과 희생을 두드러지게 표현해 이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한 이유는 이승만 정권의 포악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 ‘피 흘리며 목숨 바친 학생들의 힘이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며 민중혁명의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4·19는 국민주권과 대의제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재확인한 ‘민주혁명’으로 표현해야 마땅하다. 국가체제의 기본원리를 바꾸고자 한 민중혁명과 계급혁명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제10처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였습니다.
 
  4·19혁명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대한민국은 제2공화국 시대를 맞았으나, 새로운 시대의 빗발치는 국민의 여망과 요구에 새 정부가 미처 대응하지 못하는 가운데 1년도 채 못 되어 총과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국민의 민주적 선택으로 구성된 정부였지만, 군인들의 무력 쿠데타에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정치인들을 구악에 물든 부패세력이라고 단죄하고 심판하였지만, 정권을 장악한 그들은 국가 권력과 모든 이권을 독점하며 위협과 공포의 정보정치를 펼치고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국민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존엄을 박탈당하고 두려움과 굴종의 군사문화에 길들여져 갔습니다.
 
  분석: 5·16군사정변을 두고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4·19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과 시민들이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5·16이 일어났을 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점은 단지 군인들의 총칼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지식인, 정치인, 학생 할 것 없이 5·16을 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5·16은 헌법 절차를 거쳐 수립된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라는 국민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이 결여된 구(舊)집권세력을 대신하여 군인 특유의 추진력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해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 전례가 드문 기적을 이루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4·19에 참여한 일부 인사들은 4·19 안에 포함되어 있던 근대화라는 시대적 요구를 박정희 정권이 5·16을 통해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제11처
  1965년 이 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타국에 군대를 파병, 참전하였습니다.
 
  우리 역사에 다른 나라 침략에 시달리고 고통받은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우리가 타국에 쳐들어가 고통을 안겨주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5년 우리는 미국의 요청으로 우리 군대를 베트남에 파병하고 우리 군인들이 타국에서 죽고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습니다. 베트남 여러 마을 주민들은 혈육을 눈앞에서 살해당하고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기억하며 지금도 눈물 속에 물음을 던집니다. 왜 비무장의 노인과 여성, 어린이까지 무참히 죽여야 했냐고. 참전한 이들도 귀국 후 오랜 세월을 두고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영혼의 상처에 시달리고 신음합니다.
 
  분석: 제주교구는 베트남 파병에 대해 ‘미군의 요청’으로 파병했다고 썼다. 또 베트남 여러 마을 주민들은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기억하며 지금도 눈물 속에 물음을 던진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은 우리 정부가 스스로 내린 결단이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1961년 11월) 중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한국 정부는 월남에 부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한 것이 참전의 시작이었다. 박 대통령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6·25 때 진 빚도 갚아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파병에 동의했으나, 내심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겠다는 실리를 추구했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1965~73년 군사원조 증가분 10억 달러, 미국의 한국군 파월경비 10억 달러, 베트남 특수 10억 달러, 기술 이전 및 수출진흥 지원 20억 달러 등 총 50억 달러의 외화 획득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렇게 들어온 종잣돈 덕분에 한국은 만년 빈곤 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한 단계 격상되는 계기를 맞았고, 1970년대 고도성장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여러 마을 주민들은 혈육을 눈앞에서 살해당하고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기억하며 지금도 눈물 속에 물음을 던집니다. 왜 비무장의 노인과 여성, 어린이까지 무참히 죽여야 했냐고’라고 한 부분은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다. 2017년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희생으로 한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해 베트남이 들끓은 적이 있다. 당시 “한국군의 잔인함을 기억하자” “한국 제품을 사지 말자” 등의 반한(反韓) 여론이 일었다. 지난 4월 4일 월남전 당시 한국군에 피해를 입은 베트남인 103명이 민간인 학살진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제12처
  1980년 5월 18일 5·18민중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권력공백기가 찾아오자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제2의 군사독재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공포, 국회를 봉쇄하고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 수천 명을 감금하며 ‘정치활동 금지, 휴교령 발동, 언론 보도검열’을 강화하자, 광주의 수많은 시민들이 일제히 봉기하고 군부의 정치개입과 권력장악에 격렬히 저항하였습니다. 군부는 시위진압 집중훈련을 받은 계엄군을 출동시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10일에 걸친 시민들의 시위와 저항의 결과 166명이 거리에서 살해되고 376명이 이어서 훗날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천 명이 중상으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수십 명의 시신을 아직도 찾지 못한 대재앙이 자행되었습니다. 군부독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봉기한 수많은 의인들이 권력을 탐하는 죄인들에 의해 극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분석: 2005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와 5·18기념재단 등이 밝힌 광주민주항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606명이다.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65명은 행방불명, 376명은 부상 후 사망했다. 부상자는 총상자 499명을 포함해 605명이었고, 1394명이 구속되거나 연행되었다. 계엄군은 부대 간 오인 사격으로 사망한 13명을 포함해 23명이 사망하고 경찰은 차량사고로 4명이 숨졌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0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선정된 첫 5·18 보상 대상자는 2224명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 4252명에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2017년에 4377명으로 늘었고, 2018년 8월 현재 4403명에 이른다.
 
 
  제13처
  1987년 6월 10일 6월민중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확대하며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초법적 권력기구로 국가법체계를 왜곡,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급조된 꼭두각시 선거인단의 투표를 통하여 군부의 대표가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군사정권에 의하여 국민의 투표권은 박탈당하고 민주주의의 기초가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과 학생들은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에 지속적으로 저항,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죽임을 당하고, 이한열군이 최루탄을 얼굴에 맞아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반정부 시위가 격해지자 정부는 원천봉쇄로 대응했으나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6월민주항쟁의 불길 앞에 공권력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분석: 1987년 6·10항쟁을 다루고 있다. 4·19와는 달리 정권 교체라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닌 항쟁으로 불리는 6월항쟁은 노동·통일·시민·문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다수 시민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박종철·이한열 사망과 같은 인권유린 사건들이 경제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중산층의 정치의식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 점에서 1987년 6월에 있은 대규모 시위는 자유와 인권을 추구한 ‘민주주의 국민운동’이었다.
 
  한계도 존재한다. 전 국민적 항쟁이던 6월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얻어냈지만, 결국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욕구에 의한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분열이란 오점도 남았다.
 
 
〈3·1운동 백주년 기념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 제14처는 촛불시위를 ‘촛불혁명’으로 서술했다.
  제14처
  2016년 10월 시민들의 촛불이 무수히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고 304명이나 되는 승객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으나 국가의 통수권이 법과 규범에 의하여 신속히 작동하지 않음을 보고 온 나라가 경악하였습니다. 행정부의 최고기구가 극소수의 이해관계 속에 움직이고 국가 권력이 개인 친분관계로 남용되고 뒤틀리니 마치 국가가 바다 밑 어둠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는 위기 같았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많은 시민이 분노하며 이 어둠을 물리치고자 촛불을 밝혀 들었습니다. 3·1만세운동 이후 처음으로 2백만 넘는 남녀노소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6개월 동안 밤거리를 촛불로 밝히며 탄핵을 이끌어냈습니다.
 
  분석: 세월호 사건 당시 국가적 위기 대처가 부실했던 사실을 국가적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그러나 그 혼란을 틈타 가짜뉴스가 판을 쳤다. 특히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둘러싼 온갖 유언비어가 나라를 뒤흔들었다. 프로포폴 투약설, 정윤회와의 밀회설, 최태민 목사를 기리는 ‘굿판’을 벌였다는 의혹, 미용 시술설 등이 제기됐으나 검찰은 7시간 의혹에 실체가 없다고 발표했다.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동조해 촛불을 든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탄핵당한 박 전 대통령을 지키기 위한 태극기 집회도 열렸다. 이러한 혼란에서 천주교 일부 신부들은 평신도들에게 촛불집회 참여를 미사 강론 중에 공공연하게 독려해 신도들의 반발을 샀다. 〈우리 겨레 십자가의 길〉은 이런 부분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 참고도서: 《20세기 이야기(1~10권)》(김정형), 《대한민국을 바꾼 70대 사건》(월간조선·한국현대사학회),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박효종·이영훈·차상철 등 교과서포럼), 《한국 현대정치사의 쟁점》(이정희), 《일제 식민지정책과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신용하 著)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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