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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⑩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김현철 사건 (4)

김현철, 구속!

글 : 심재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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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여자관계에 대한 루머까지 퍼뜨리며 중수부장 옥죄기
⊙ 검찰 안팎 실력자들 일제히 “별건수사, 표적수사는 안 된다!”
⊙ 현철씨 문제로 헌정 중단 가능성까지 나오자 정치권·검찰 기류 바뀌어
⊙ 대통령 통치자금 ‘200억 돈가방’ 발견
1997년 5월 17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김현철씨가 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1997년 한보 사태와 관련해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의 이름이 처음으로 공식 거명된 것은 2월 11일, 정부의 한보 부도 발표 후 20일 만이었다.
 
  포문을 연 이는 새정치국민회의 한영애(韓英愛) 의원. 구정(舊正) 연휴 직후 열린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합동 의원총회에서 한 의원은 “한보 사건은 김현철씨가 주동자다. 나는 이렇게 주장할 근거를 갖고 있다. 현철씨는 한보철강 현장에 공식적으로 두 번 방문했으며 나는 언제 어디에 누가 동행했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 의원과 같은 당의 설훈(薛勳) 의원도 “현철씨가 한보 사건의 몸체”라고 지목했다.
 
  앞서 구속된 홍인길(洪仁吉) 의원의 ‘깃털’ 발언 이후, 정치권과 검찰 안팎에서는 한보 사건의 ‘몸통’에 대한 확인 안 된 설(說)들이 난무했다. 홍 의원이라 하면 그 자신이 당장 대통령의 가신(家臣)이자 실세(實勢) 국회의원으로 꼽히던 터. 그런 그조차도 자신을 ‘깃털’이라 말할 정도면 도대체 몸통은 어느 정도의 권력자냐, 여론에 달린 물음표는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바로 그런 가운데 정치권에서, 그것도 두 야당의 공식 회의석상에서 현직 대통령 아들의 이름 석 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대중은 으레 세세한 진실 여부를 떠나 일단 믿고 싶은 것만을 믿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그렇지. 한보 사건 정도의 배후라면 김현철쯤은 돼야 할 것’이란 ‘추정’에 사로잡힌 여론은 ‘검찰은 당장 김현철을 파헤쳐라’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갔다. 내가 광주를 떠나 막 인천지검장에 취임했을 무렵이었다. 김현철이란 이름이 나오고 여론이 그쪽으로 몰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검찰이 과연 저 김현철이란 공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어떻게 저 여론의 폭풍을 돌파할 것인가’ 주목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은 검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민망한 것이었다.
 
  검찰은 자신에게 넘어온 공을 아예 받지도 않았다. 현철씨를 파헤쳐야 한다는 거센 여론에 부응하는 어떤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이름을 거론한 야당 국회의원 5명과 정당 관계자 1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현철씨를 고소인 자격으로 한 차례 예의 바르게(?) 조사하고는 수사를 일단락 지었다. 그것이 검찰의 결정적인 패착(敗着)이 됐다.
 
 
  난파선 같던 한보 1차 수사팀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대폭발을 일으킨 여론에 떼밀려 결국 ‘대검 중수부장 교체와 한보 2차 수사’라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이런 까닭에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2차 수사팀은 자연스럽게 김현철이라는 숙제를 어떻게든 풀어내야 했다.
 
  현철씨는 자기 이름이 거론된 처음부터 (그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겠지만) 나중까지 ‘억울한 표적수사’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처신에 따른 업보(業報)였는지 모른다. 그의 근본적인 잘못은 국정농단. 대통령인 아버지의 힘에 편승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와대, 군경(軍警), 정보기관, 언론계 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아버지 못지않은 실력자로 소문났고 그런 그를 사람들은 아버지 거산(巨山)에 빗대어 ‘소산(小山)’으로 불렀다.
 
  펄펄 끓는 여론의 기대에 부응해, 검찰이 권한과 힘을 총동원해 현철씨의 이런저런 불법행위와 비리를 척척 찾아내고는 즉각 그를 소환해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사람들의) 속이 후련할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기업과 은행은 물론 정관계 쪽을 향해 ‘본격 수사’를 재개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현철씨 쪽은 더더욱 어려웠다. 아무런 정보도 인력도 지원세력(?)도 없이 일단 중책을 맡아야 했던 나로서는 당장 두 가지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먼저 하나는 현철 수사팀의 사기부터 끌어올려야 했다. 내가 중수부장으로 부임해 죽 둘러보니 한보 수사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침몰 직전의 난파선(難破船)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덜컥 그 배에 올라타고만 씁쓸한(?) 선장(船長)이 된 것이다. 다른 수사팀도 그랬지만 특히 현철씨 조사를 담당한 3과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1차 수사 때 현철씨에 대해 제기된 이런저런 의혹들을 치고 들어가기는커녕 ‘검찰에 불러다 놓고는 결국 면죄부만 주었다’는 비난이 비등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격지심이랄까 자책감이랄까, 어쨌든 중수부 전체의 수사팀은 의욕을 상실한 채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내 사람’이 없었다
 
김현철씨에 대한 1차 공판이 열린 1997년 7월 7일 대검 중앙수사부 이훈규 수사3과장(가운데) 등 김현철씨 공판 담당 검사들이 서울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더욱이 (이제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수사팀이 대의(大義)나 일 자체보다도 내부 분위기, 직설해서 위의 눈치를 보아가며 수사방향이 흔들리는 갈 지(之)자 행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차 수사 때 검찰 관련 명령계통이랄까, 권력구조는 청와대(김영삼 대통령, 문종수 민정수석)-법무부장관(안우만)-검찰총장(김기수)-대검 중수부장(최병국)으로 경남 출신 일색이었다. 게다가 정권을 잡은 여당에서도 YS의 민주계가 실세로서 버티고 있었다. 이들이 대통령 아들인 현철씨의 사법처리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제아무리 강골 검사라 해도 그런 상황에서 현철씨 문제를 곧이곧대로 치고나갈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 말에 따라, 내 의지대로 함께 일할 ‘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령관 견장을 차고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마음 털어놓을 부하가 없는 꼴이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다들 ‘갑자기 자리를 차고 앉은’ 중수부장보다는 한 다리 건너뛰어 위의 눈치를 더 살피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참신하게 2차 수사를 시작하겠다며 내가 나서서 수사팀을 확 물갈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검찰은 인원보강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5명의 검사를 새로 보강한 것이 다행이었다. 이들이 실제로 내게는 갈수록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언론이 드림팀이라 불렀던 그들이다. 결국 주어진 상황에서 기존 인력으로 어떻게든 말 그대로 ‘2차 수사’를 시작해야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수사팀의 사기를 다시 일으키고 동시에 그들을 ‘내 사람’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그래서 일을 해나가는 도중에 수시로, 가급적이면 다른 팀보다는 3과 직원들과 좀 더 자주 밥을 함께 먹고 술자리를 해서라도 마음을 터놓고 격의 없는 대화를 해야 했다. 특히 3과를 지휘하면서 누구보다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이훈규(李勳圭) 과장에게 힘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자주 그와 얼굴을 맞대고 “윗선이나 바깥쪽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말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수사팀이 소신껏 수사할 수 있게 하겠다”는 내 속마음을 전달하며 그를 독려했다.
 
 
  대검차장이 건네준 메모
 
  내가 그처럼 속내를 털어놓으며 수사에 대한 열정을 보이자 며칠 지나지 않아 이 과장부터 눈빛이 달라졌다. 다른 이들의 투지도 단시간에 눈에 띄게 살아났다. 급속히, 수뇌부보다 그들을 현장 지휘하는 나와 더 의기투합하게 됐다. 3과 수사팀은 밤도 낮도 없이, 휴일도 없이 현철씨 주변에 대한 전방위 수사에 돌입했다.
 
  거물을 상대하는 만큼 현철씨 수사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정태수 일가 재산압류, 그의 아들인 정보근 구속, 은행장들 수사, 정치인리스트 수사 등으로 안팎 여론을 진정시키며 시간 확보에 나섰다.
 
  현철씨 수사와 관련, 수사팀을 분발하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또 한 가지 있었다. ‘외압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였다. 돌이켜보면 현철씨 수사는 현장수사가 절반, 외압세력과의 기(氣)싸움이 절반이었다.
 
  정치인리스트 수사와 현철씨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4월 어느 날 아침, 대검차장이 급히 나를 불렀다. 밑도 끝도 없이 “요새 협박받고 있지 않으냐” 물었다. 정치인들 쪽에서 친분 있는 기자를 보내 집적대는 일들을 말하는가 싶어서 “몇몇이 찔러오긴 해도 아직 협박 수준은 아닙니다”고 했다. 듣는 둥 마는 둥 차장은 불쑥 “이런 첩보가 올라와서 말이지. 벌써 증권가 찌라시에도 다 올라갔나 봐…”라며 첩보보고서 한 장을 내밀었다.
 
  <심재륜 중수부장이 고시 합격 전 사귀어(동거) 뒷바라지해 주던 여자가 이별 당해 미국에 거주하다 최근 귀국, 심 부장을 협박해 법조 기자들이 이를 취재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두 가지가 웃겼다. 하나는 소위 황당한 ‘신파조’인 그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뜬금없는 그 메모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정말 걱정을 해주는 건지… 아니면 어느 정보기관의 입김에 놀아나는 것은 아닌지….
 
  나는 풋! 헛웃음을 치고는 차장실을 나왔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집사람에게 “나 이런 사람이야, 조심해”라며 메모 내용을 보여주면서 같이 웃고 말았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쏘아댔는지 모를 빈총, 한보 수사, 특히 현철씨 수사와 관련해 아주 작고 치사한 것부터 치명적인 것까지 외압은 소나기처럼 퍼부어댔다.
 
  까짓 거, 흔한 일이다. 유력인사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때는 으레 어떤 형태로든 수사에 영향을 끼치려는 입김이나 유혹, 심지어 공작(工作)이 들어오게 마련이다. 물론 30년 특별수사로 잔뼈가 굵은 내게 웬만한 외압쯤은 간에 기별도 오지 않는다. 그러나 대통령 아들을 쫓는 수사의 경우, 검사에 가해지는 외압의 무게나 성격은 여느 수사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外壓의 법칙
 
  대통령 아들에 대한 수사는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먼 친인척이나 측근에서 어떤 비리가 나와도 세상은 난리가 난다. 하물며 대통령 아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그것이 검찰에 의해 밝혀질 경우 벌어질 사태는 예측불가다. 최악의 경우 대통령이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하야(下野)라도 한다면? 헌정(憲政) 중단, 국정 마비 사태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대통령을 보좌하며 권력을 쥐고 있는 숱한 조직과 기관, 관계자들로서는 어떻게든 수사를 막으려 할 수밖에 없다. 그들로서는 대통령 아들을 보호(?)하는 것이 곧 대통령과 정권을 보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여당, 정부와 각급 정보기관 등 권력을 지탱하는 모든 기구와 인사들이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 어디서 검찰 수사를 무력화(無力化)하려는 시도가 있을지 알 수 없다.
 
  또 외압이란 으레 아무런 겉모습도, 아무런 소리도 없이 은밀하게 다가온다. 설사 표현을 한다 해도 에둘러 말하거나 전혀 외압이란 티가 나지 않게 뜻을 전달한다. ‘이쪽’에서 그 속뜻을 잘 헤아려 ‘알아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겪어보니 외압의 양태는 대체로 네 가지다.
 
  첫째, 상대방의 비리를 약점 삼아 협박해 ‘알아서 기게’ 만든다.
 
  둘째,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쪽으로 파고든다. 형제, 자매, 친인척 비리가 그 사례다.
 
  셋째, 있지도 않은 비리를 조작하거나 살을 붙인다.
 
  넷째, 직접 테러를 가하거나 혹은 테러 협박을 한다. 물론 그런 경우 사건이나 사고로 위장한다.
 
  실제 내가 한보 수사를 진행하던 당시, 정체 모를 남자들이 집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을 수차례 감지했다. 그래서 늘 가족 전부를 집에서 나오라 하여 함께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다. 과거 사이비종교를 비판하던 탁명환씨가 혼자 있을 때 기습당한 것을 떠올리면서….
 
  현철씨 수사의 경우, 역시 대통령 아들이어서 그런지 검찰에 대한 압력이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공개적으로(?) 가해졌다.
 
 
  집권당 사무총장, 청와대 민정수석의 압력
 
  한보 사건의 다른 이슈들을 제치고 현철씨 수사 및 사법처리 문제가 점점 더 뜨거운 이슈가 되어가던 4월 4일, 도하 언론에 당시 박관용(朴寬用) 신한국당 사무총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현철씨의 (국가)인사 개입 등은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사법처리의 대상은 아니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운운한 내용이었다.
 
  이날 신문에 실린 그의 발언 가운데 이래저래 꾸미는 내용들을 제쳐놓고 알맹이만 뽑으면 ‘현철씨 사법처리 불가(不可)’였다. 집권여당의 사무총장, 게다가 YS와 가까운 민주계 실세 정치인으로 꼽히던 박 총장이 현철씨 문제에 대해 검찰에 노골적으로, 공개적으로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다. 이후에도 박 총장은 수시로 S방송사 모 기자를 자신의 ‘사절’로 내 방에 보내 한보 수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이쪽에 전달하거나 이쪽 동정을 탐지해 갔다. 그 모든 것이 나로서는 솔직히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검찰은 앞만 보고 나가려는데 왜 바깥에서 수사방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가.
 
  ‘저쪽 여의도에서도 적극 치고 나오는데 대통령을 직접 모시는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 싶었는지, 그로부터 사흘 뒤에는 청와대 쪽에서 보다 강력한 언질이 나왔다. 역시 YS의 측근인 문종수(文鍾洙) 민정수석이 중수부의 김상희(金相喜) 수사기획관을 통해 ‘김현철은 손도 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온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문 수석이 최상엽(崔相曄) 법무부장관, 김기수(金起秀) 검찰총장, 김 수사기획관(나 대신 참석)과 4월 7일 리츠 칼튼 호텔에서 가진 회식 자리에서다.
 
  외압도 외압이지만 외압 때문에 검찰 내부에 형성되는 수뇌부 분위기의 변화, 나아가 수사진과 수뇌부 간의 불협화음도 문제였다.
 
  현철씨 문제가 처음 불거진 이후 김 총장은 일관되게 그리고 완강하게 현철씨 사법처리에 반대하게 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 총장은 ‘한보와 직접 관련된 비리가 발견되지 않는 한 현철씨 사법처리는 불가’라는 언질을 내놓았다. 다른 무엇보다 조직 내 직속상관의 뜻에 맞서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세상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선이 굵고 마음이 따뜻한 선배였지만 한보 수사가 진행되던 중에는 나와 늘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함께 사건을 헤쳐나가는 검사로서 누구보다 일사불란해야 마땅한 사이였지만 그렇지 못했다. 김 총장 입장에서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뜻을 살펴야 했겠지만, 직접 수사를 지휘해 나가던 나로서는 아쉽고 답답한 때가 많았다.
 
 
  외압이란 무엇인가
 
1997년 5월 15일 심재륜 중수부장이 앞으로의 수사진행과 김현철씨 구속 시기에 대해 기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도 손 놓고 있을 리 없었다. 지역 책임자인 지부장급 고위 요원을 검찰에 투입해, 수시로 내 방을 드나들며 수사 상황 및 검찰의 동태를 살피도록 했다. 안기부는 대통령을 보좌해야 한다. 그런 터에 대통령 아들의 사법처리를 남의 일처럼 보고 있을 리 만무했다. 더욱이 당시 현철씨와 권영해(權寧海) 안기부장, 김기섭(金己燮) 안기부 운영차장은 대단히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 셋이 비밀회동했다가 기자에게 들켜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특히 안기부 쪽은 현철씨도 현철씨지만 그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던 김기섭 운영차장을 좀 더 적극 보호하려는 듯한 분위기였다. 김 차장이 수사대상이 되고 불법행위가 드러날 경우 아무래도 안기부로서는 그 위상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저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감 잡고 있던 만큼 나와 수사팀에 있어서 당시 안기부 요원들의 움직임도 적잖은 부담이었다.
 
  과연 외압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에 대해 검사들 사이에는 ‘검사가 외압이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외압’이란 말이 있다. 때가 때이고 자리가 자리인지라, 현철씨 수사를 진행하던 당시 내게는 심지어 외부에서 걸려온 단순한 안부전화마저도 부담이었다. 어쨌든 현철씨 문제와 관련해 여권 혹은 집권층의 의중은 한 가지, ‘사법처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가진 쪽이라 해도, 분명히 죄가 있는데도, 무턱대고 처벌하지 말라고는 못 한다. 불법행위의 명백한 증거가 나오면 대통령 아들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 해도 처벌돼야 한다.
 
  그러나 만약 뒤지고 뒤져서 한보 비리와 직접 관련된 증거가 안 나오면 어쩔 것인가… ‘저쪽’에서는 바로 이 대목을 정확하게 치고 들어왔다. ‘한보 부도와 관련해 직접적인 불법행위가 발견되지 않는 한 사법처리할 수 없다’는, 이른바 ‘별건(別件)처리 불가’라는 명분 혹은 논리, 나아가 수사결과에 대하여 훗날 책임을 묻겠다는 암시까지 깔린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한보 비리라면 사법처리해도 된다’는 이야기 같지만 속뜻은 ‘사법처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도, 돌이켜보면 ‘(외압을 가해오던 쪽이) 참 머리 좋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도 현철씨에게서 한보 비리와 직접 관련된 증거를 찾아내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현철씨 정도의 인사가 기업 등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을 리 만무했다. 나아가 누군가로부터 청탁을 받고 이권(利權)에 개입했다 해도 그 증거를 남길 리 만무했다. 설사 불법행위가 있었다 해도 측근이나 밑의 사람들이 알아서 했을 것이고 현철씨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실제 비리의 증거가 끝내 나오지 않는 최악의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곤혹스러웠다. 윗선의 정책결정이나 업무방침은 곧바로 실무진의 사기나 의욕에 영향을 미친다. 검찰 외부 또는 수뇌부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든 나는 수시로 우리 수사팀에 내 결심을 대못 박듯 강조했다.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검사로서 응당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게 맞다. 검사가 정치논리에 휘둘리면 안 된다. 한보와 관련된 것이든 혹은 ‘별건’이든 현철씨 비리가 밝혀지면 반드시 법원으로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현철씨에 대해 제기된 의혹이나 혐의가 수사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나면 여지없이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결심이랄까 수사방침은 어디까지나 ‘내부용’이었다. 밖으로는 절대로 그런 나의 속내를 드러내선 안 되었다.
 
 
  안기부 서울지부장의 두툼한 돈다발
 
  4월 8일 오후 안기부 임모 서울지부장이 중수부장실에 찾아왔다. “전에 1차 수사 때 검찰총장과 안기부장 사이에 합의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느냐”면서 “그동안 잘 협조해 주셔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한보 사건과 안기부 관련 수사, 특히 현철씨와 김기섭 운영차장의 연계 부분에 대한 수사를 지금까지 적극 하지 않아 고맙다. 앞으로도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 깔린 방문이었다.
 
  나로서는 ‘안기부든 김기섭이든 비리 혐의가 있으면 즉각 파고들 테니 상관 말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씩씩 웃어가며 꾹꾹 참았다. 내 속 시원하자고 일순 적대감을 드러내 안기부를 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곧이어 그가 “수사비가 많이 들 텐데 권(영해) 부장께서 직접 챙겨 드리는 겁니다”라면서 두툼한 수표다발을 내밀었다. 아찔했다. 그것을 받으면 안기부에 코가 꿰이고 안 받으면 우리의 ‘강력한 수사의지’를 들키게 된다. 진퇴양난.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고맙지만 외부기관에서 돈이 오면 검찰 관행상 개인이 받을 수 없습니다. 기관장 대 기관장으로 검찰총장을 통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오히려 곤혹스러워진 그는 “다른 부서는 별 얘기 없이 잘들 받던데 뭘 그러십니까” 하면서 몇 차례 더 돈을 받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내가 계속 윗선을 통해 달라고 하자 계면쩍게 웃으며 돈을 거두어 나갔다.
 
  외압을 가해오는 바깥에 대고 “우리는 곧이곧대로 밀고 나갈 것”이라는 이쪽의 속내를 내보이며 맞설 필요는 없었다. 외압이 빗발치던 때, 소나기는 피해야 했다. 저들 막강한 외압세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결국 그들을 적으로 만들어 수사에 역효과를 불러온다. 힘을 가진 저들이 똘똘 뭉쳐 검찰 수사를 방해하거나 막는다면 그만큼 수사는 어려워진다. 외압을 차단하거나 물리치는 것은 고도의 기술과 지혜가 필요하다. 또 한 가지, 외압 차단에는 보안유지가 필수요건이었다.
 
  수사과정에 외압이 치고 들어온다는 것은 십중팔구 이쪽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쪽에서 알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쪽 사정을 훤히 아는데 저쪽에서 넋 놓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들이 가진 힘과 사람과 자원을 총동원해서 이쪽의 의지와 움직임을 얼마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수사팀 전체에 보안유지 엄명을, 특히 현철씨 수사를 맡은 3과에 대해서는 “꿈속에서라도 보안을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오아시스 한가운데 먹을 물이 없다
 
  ‘한보에 관련된 것이든 일반적인 것이든 현철씨에 대해 제기된 의혹은 모두 조사한다’는 방침에 따라 3과는 전방위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이런저런 경로로 검찰에 들어온 현철씨의 비리 의혹은 넘쳐났다. ▲국가 주요 인사 개입 등 포괄적인 것부터 ▲한보철강 열연설비 도입 과정의 2000억원대 리베이트 ▲지역민방 사업자 선정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 ▲한전의 태안 화력발전소 수주 ▲고속도로 휴게소 입찰 등 개별사업에 연루됐다는 것들까지 다양했다.
 
  의혹은 넘쳐났지만 불법행위의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현철씨가 국가 주요 인사에 실제 개입한 증거를 찾아내는 등 국정농단 의혹은 일정 부분 밝혀졌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는 쪽이었고 사법처리 대상은 아니었다. 오아시스 한가운데 있었지만 정작 먹을 물은 없었다. 그럼에도 3과는 지치지 않았다. 현철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국민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인 데다 거기서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 여부에 검찰의 명운이 달렸던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수사대상은 ‘세 그룹의 사람들’에 집중됐다. 하나는 정보근 한보 회장,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 등 현철씨와 친분 있는 고위급 인사들, 두 번째는 박태중, 윤성노, 이성호씨 등 현철씨의 측근들, 세 번째는 보다 폭넓게 현철씨를 후원하는 기업인들이었다. 이들을 파고들면서 수사팀은 차곡차곡 크든 작든 성과들을 축적해 나갔다.
 
  참으로 쉽지 않은 수사였다. 여론은 재촉하고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수사팀으로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매일 기자들에게 수사 브리핑을 하면서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나도 슬슬 조바심이 나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현철씨 문제를 바라보는 바깥의 분위기가 문득 반전(反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4월 중순 정치인리스트 수사가 본격 진행되면서부터다.
 
 
  달라지는 분위기
 
권영해 전 안기부장.
  정치인리스트 수사가 시작되고 사흘째 되던 4월 12일, 신한국당의 민주계 중진 의원 12명이 검찰의 ‘한보 수사 관련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 내용은 주로 ‘검찰이 확실한 증거나 자료도 없이 졸속하고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다’며 정치인리스트 수사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그때 검찰은 이미 정태수 총회장을 통해 정치인들이 언제 어떻게 돈을 받았는지 시시콜콜한 정황까지 공식 조사를 다 해놓은 터였다. 정치권에서는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으니 그런 불만과 비판이 나올 만도 했다).
 
  검찰에 대한 비판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튿날 신문 가십(gossip)난에 익명으로 보도된 이날 참석자들의 개별 발언 내용이었다. ‘한보 비리 등 최근 사태의 몸통은 따로 있는데 깃털 격인 민주계 의원들을 마치 권력형 부패의 중심인 양 부각시킨다’, ‘검찰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 수뇌부가 한보 비리 수사방향을 본질이 아닌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정권과 검찰이 한 사람을 살리느라 민주계가 다 죽게 생겼다’ 등등.
 
  ▲몸통은 따로 있는데… ▲검찰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 수뇌부… ▲한 사람을 살리느라… 등 불만이 묻어나는 대목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게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가 아니었다. 그동안 현철씨 사법처리를 반대하던 여권, 그것도 핵심인 민주계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이 감지된 것이다.
 
  ‘대세’란 그런 것일까. 때맞춰 정보통들을 통해 안기부 쪽에서도 그 같은 분위기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내게 전해졌다. ‘권영해 안기부장이 현철씨를 조속히 사법처리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현철씨 문제가 길어질수록 대통령이 위태로워진다. 전국 대학교수들도 4·19 기념일에 맞춰 대통령 하야에 관한 성명을 준비 중이다. 곧 북한의 거물인사(당시 황장엽씨를 지칭)가 들어온다. 거기에 맞춰 현철씨를 빨리 구속하고 언론의 관심을 북한 인사 쪽으로 돌리면 한보 국면을 끝낼 수 있다’라는 첩보성 소식들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 수사팀이 어떤 외압에도 요지부동하자 오히려 ‘저들’이 흔들리고 분열상을 보인 것이다.
 
 
  검찰총장, 박태중 구속 서둘러
 
  이 같은 바깥 분위기의 변화 바람이 검찰에도 불어온 걸까. 4월 16일 김기수 총장이 갑자기 나와 김상희 수사기획관, 이훈규 3과장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뜻밖에도 “박태중을 빨리 구속하자”고 말을 꺼냈다. 사뭇 강경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한데 김 총장은 “지금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대통령 하야 성명을 준비한다더라”, “국가정보기관이 초긴장 상태라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박씨를 통해 현철씨에게 어찌어찌 한보 뇌물이 흘러들어 갔다… 대충 그런 스토리를 엮어 현철씨 문제를 처리하면 이내 한보 사태도 마무리되고 정권이 위태롭던 당시 국면도 전환되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아직 수사가 미진한 상황이고 큰 것이 나오지 않았습니다”라고 이견(異見)을 냈다. 그런데도 김 총장은 “한보와 관련된 뇌물이 작은 것이라도 나오면 그것을 가지고 빨리 (현철씨 문제를) 처리하자. 확보된 것이 정 없으면 외부나 본인이 직접 제공하는 자료라도 가지고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는 아이디어(?)까지 내놓았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급해 보였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작은 것을 들이대 박태중씨를 서둘러 구속하고 나아가 그를 통해 현철씨를 엮어 들인다 해도 이후 공소유지가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당장 총장 의견처럼 ‘작은 것’은 국민의 기대에 반하는 것이고 더욱이 ‘저쪽에서 제공하는 자료’ 운운하는 것은 검찰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현철씨 문제부터 서둘러 처리할 경우 내가 줄곧 주장하던 한보 관련 은행장들 배임 수사와 정치인리스트 수사마저 유야무야 물 건너갈 것이 뻔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국민이 납득할 수사결과가 나와야 검찰도 살고 국가도 살고 정권도 삽니다. 여론이나 상황에 쫓겨 수사를 급하게 몰아가는 것은 모두에게 위험합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제대로 된 물건을 내놓아야 합니다.”
 
  내가 극구 반대하자 김 총장으로서도 더는 종용하지 않았다. 세상 일이란 참으로 우스운 데가 있다. 그때까지도 김 총장은 ‘현철씨 문제에 대해 한보 비리 말고는 사법처리 안 된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반면 우리 수사팀은 ‘한보에 관련된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현철씨 비리에 대해서는 반드시, 조속히 수사해야 한다’며 총장을 압박하던 터였다. 그런데 순식간에 서로의 입장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김 총장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날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록 남들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동안 내 마음 한구석을 노상 무겁게 누르던 여권의 김현철 ‘구속불가론’이 급속히 ‘구속불가피론’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사실.
 
 
  大選 殘金 포착
 
김현철씨의 친구인 박태중씨가 1997년 4월 30일 구속 수감되기 위해 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어쨌든 ‘사법처리는 안 된다’던 것에서 비록 조건이 달렸어도 ‘어서 사법처리를 하자’는 쪽으로 태도가 바뀌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줄곧 ‘한보 관련 비리’만을 강조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현철씨에 대한 국회의 한보 청문회가 열린 4월 25일에도 김 총장은 거듭 “김현철 문제를 조속히 처리하자”고 내게 종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별건처리는 안 되고 한보에 관련된 것으로…”라는 조건을 붙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돌려놓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김 총장과 독대(獨對)한 자리에서 말을 꺼냈다.
 
  “사실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는데, 현철씨 주선으로 한보 정보근이 지방의 여당 정치인에게 수억 원을 줬다는 정보가 확보돼 있습니다. 두 번 만나서 3억을 줬는데 누가 언제 어디서 돈을 전달했는지도 다 파악됐습니다. 김현철 자신이나 일부 정치인들이 자꾸 한보에 직접 관련된 비리가 있으면 내놔 봐라 그러는데 우리가 그 사안을 공식 수사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김 총장으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일이 있은 이후 나와 있는 자리에서는 ‘별건처리’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내가 이처럼 안팎으로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 수사팀(3과)은 조용히 그러나 부단히 적잖은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맨땅에서 어떻게 그처럼 많은 것을 찾아냈는지, 지금까지도 나는 당시 수사팀(3과)의 이훈규 과장과 김경수, 오광수, 신현수, 그리고 김준호 검사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현철씨에 대해서는 원체 다양한 의혹들이 제기됐고 또한 그것에 관련된 측근이나 관계자들 또한 광범위했다. 더욱이 수사가 현철씨 쪽만 아니라 한보, 은행, 정계, 관계 등 여러 방향으로 동시진행되면서 날마다 봇물 터지듯 관련기사도 넘쳐났다. 이런 까닭에 당시 국민들 입장에서는 한보 수사 그중에서도 현철씨 수사가 도대체 뭐 어떻게 되는 것인지 종잡기 어려웠을 것 같다. 묶어보면 간단하다.
 
  우리 수사팀이 현철씨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사안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중에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 ‘나라사랑운동본부(나사본, 1992년 대선 때 YS 진영의 선거조직) 활동자금 잉여금’으로 이름을 붙여 발표한 비자금, 다른 하나는 현철씨가 고교 선배 등 후원자들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아온 활동자금이었다.
 
 
  ‘나사본 활동자금 잉여분’
 
  먼저 비자금 부문. 검찰은 현철씨가 측근들을 통해 관리해 온 것으로 보이는 총 250억원대 비자금을 찾아냈다. (주)심우 대표인 박태중씨 쪽에서 132억, 대호건설 전 사장인 이성호씨 쪽에서 50억+α, 그리고 안기부 김기섭 운영차장이 한솔그룹에 맡겨 관리해 온 70억원 등이다.
 
  당시 검찰은 내부적으로 이들 뭉칫돈이 1992년 대선 때 YS 진영이 선거자금으로 쓰고 남은 돈, 즉 대선잔금(殘金)으로 추정했고, 박씨 등 계좌를 관리해 온 이들로부터 이를 확인받았다. 그것은 이훈규 과장을 비롯한 수사팀의 노력이 거둔 놀라운 개가였다. 수사팀은 100여 명의 이름이 등장하는 가·차명 계좌도를 사무실 벽면 가득 그려놓았다. 현철씨 측의 자금흐름도였다. 그 세밀하고도 엄청난 ‘추적결과’에 수사대상 피의자들이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는 과연 겉으로 드러난 현철씨 측의 수백억대 자금을 무엇이라고 발표해야 하는가였다. 곧이곧대로 대선자금이다, 발표할 경우 당장 검찰의 한보 수사보다도 야당의 정치공세가 대세를 이룰 것이었다. 1997년 대선을 얼마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검찰이 선거, 그것도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우려가 컸다.
 
  결국 나는 이를 ‘나사본 활동자금 잉여금’이라고 에둘러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언론이 모를 리 없었다. 검찰의 발표가 나오자마자 언론은 곧바로 이 돈을 대선자금 혹은 대선잔금으로 보도했다.
 
  대선자금이든 잔금이든 그것은 (정당의) 공적 자금이다. 그 입출금 및 활용 등 제반 관리는 정당의 공식 절차에 따라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 수백억대 자금을 개인이 임의로 관리할 경우 활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개인적인 치부나 증식(增殖)이 가능하다. 따라서 비록 대선잔금이라 해도 그것을 사사로이 운용, 관리하는 것은 사법상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연한 수순으로, 현철씨 측근들 계좌에서 발견된 뭉칫돈이 대선잔금임을 알아차린 언론은 일제히 ▲어떤 경위로 현철씨가 관리하게 됐느냐 ▲규모는 파악이 됐느냐 ▲그것에 대해서는 수사를 안 하느냐 등등을 치고나왔다. 검찰은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현철씨에게 드러난 비자금의 사회 환원을 권유했다. 현철씨는 숙고한 끝에 이를 오웅진 신부가 꾸리는 충북 음성의 ‘꽃동네’ 등에 헌납하기로 자필 각서를 쓰고 일을 매듭지었다.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결국 현철씨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는 과연 그가 장기간 기업인들로부터 받아온 후원금 혹은 활동자금이 어떤 성격의 돈이냐, 하는 것으로 가늠하게 됐다.
 
  앞서 현철씨는 4월 25일 국회 한보 청문회에서 “단 한 푼도 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가 10여 일 뒤인 5월 6일 측근을 통해 “고교(경복고) 선배 기업인들로부터 모두 13억원을 받았다”고 말을 번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이권이나 사업편의와 관련된 것이 아닌 활동비 명목의 후원금”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검찰이 파고들어가자 대가성 없는 돈이란 점을 부각시키려 선수(先手)를 치고나온 것으로 해석됐다. 어쨌든 그것은 그쪽의 주장이고….
 
  현철씨 수사가 마무리되어 가던 5월 12일까지 검찰이 찾아낸 액수는 그보다 훨씬 더 컸다. 현철씨는 1993년에서 1996년 사이 그가 미리 밝힌 고교 선배 기업인들을 포함해 모두 6명의 기업인으로부터 총 66억5000만원의 돈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대가성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32억2000만원. 수사팀은 우선 이 부분에 대해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키로 했다.
 
  나머지 33억3000만원은 대가성이 뚜렷하지 않은 단순 활동비로 판단됐다. 그러나 이 같은 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직전 3과에서 새로운 의견이 나왔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 돈을 주고받아도 증여세를 내야 하는데 현철씨 경우는 어떤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100여 명의 이름을 빌린 가·차명계좌로 돈을 돌려가며 세탁한 것은 세무당국의 추급(追及)을 어렵게 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사기 및 기타 행위에 해당된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든 일반화된 것이다. 수사팀이 관계 법률을 검토해 보니 조세(증여세) 포탈 혐의를 적용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다. 포탈한 증여세 추정액수는 13억5000만원이었다.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수사팀은 이 두 가지를 법정으로 가져가 법원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김기섭보다 김현철 먼저 소환한 뜻은?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이 1997년 5월 19일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수사관들과 함께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이때까지 김기섭 차장에 대해서는 앞서 5월 7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처럼 ‘70억 비자금 관리’ 말고는 별다른 불법행위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철씨와 때맞춰 그를 소환하기로 했다. 현철씨를 둘러싼 전체 자금의 흐름과 관련해 김 차장의 진술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수사팀은 그가 이성호(당시 미국에 머물던 상황)씨로부터 거액을 챙겼다는 모종의 정보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도 검찰로서는 이씨의 귀국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현철씨보다 김 차장을 먼저 소환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의아할 수 있다. 실제로 기자들 중에는 이 같은 질문을 던진 이도 있었다. 이제 터놓고 말해, 나는 반드시 김 차장보다 현철씨를 먼저 소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뚜렷한 비리 혐의가 없는 마당에 그를 먼저 소환할 경우 불응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 그동안 안기부 고위간부인 그를 보호하려 애써온 안기부의 조직적인 반발도 고려해야 했다. 자칫 기관 대 기관의 힘겨루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당장 김 총장도 그를 소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안기부 쪽과 어떤 접촉이나 교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김 총장이 유독 김기섭 차장에 대해 신경 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넘어갈 수밖에.
 
  이윽고 휴일(석탄일)인 5월 14일, 나는 기자들에게 아침 브리핑을 통해 “오늘은 1초만 브리핑을 하겠다” 운을 떼고는 “내일 오후 2시 현철씨를 소환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1시54분 현철씨가 대검 청사에 출두했다.
 
  이틀간의 조사 과정에서 현철씨는 검찰이 그에게 혐의를 둔 두 가지 대목 중 하나는 인정하고 하나는 부인했다. 박태중 쪽의 132억원은 물론 이성호 쪽의 50억원과 김기섭 쪽의 70억원에 대해 “이씨와 김씨가 그렇게 (현철씨 자금을 관리한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 얘기가 맞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돈의 대가성 부분은 끝까지, 완강히 부인했다. 이윽고 5월 17일 현철씨는 서울지방법원에서 피의자 신문(영장실질심사) 절차를 거쳐 구속됐다.
 
 
  “김기섭은 구속하지 말라” 했지만…
 
  현철씨의 구속으로 그동안 줄곧 위로만 치달리던 한보 수사의 열기는 비로소 내리막으로 꺾어졌다. 그러나 검찰로서는 아직 처리해야 할 한 가지 현안이 남아 있었다. 김기섭씨 문제였다. 앞서 본 것처럼 검찰수사팀은 현철씨에 이어 김씨도 즉각 (참고인 자격으로라도) 소환한다는 방침을 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안기부와 검찰 수뇌부는 물론 대통령도 김씨의 사법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가 비록 현철씨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등 주요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제로 검찰수사에서 형사상 문제가 될 특이사항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었는지, ‘김기섭은 구속되지 않게 하라’는 쪽으로 검찰총장을 몰아세운다는 정보가 속속 나에게 입수됐다.
 
  아닌 게 아니라 현철씨 소환사실을 언론에 발표하기 직전인 5월 14일 아침 10시30분쯤, 문득 김 총장에게서 내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현철은 소환해도 김기섭은 구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통령께 보고했으니…”라는 얘기였다. 윗선 여기저기서 김기섭 차장의 소환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 차장의 소환을 하루 앞둔 5월 15일 수사팀에서 그의 한 가지 혐의를 찾아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가 모 케이블TV 회사의 인허가 과정에 개입하고, 이성호씨로부터 1억5000만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김씨의 사법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게 된다.
 
  안 그래도 당시 나는 우리 수사팀이 김씨를 사법처리할 비리를 충분히 밝혀낼 역량이 있다고 믿던 터였다. 그래서 그럴 경우에 대비해, 김씨의 구속문제를 신경 쓰던 김 총장에게 미리 “개인비리가 나오면 (구속이) 어쩔 수 없다”는 동의를 여러 차례 받아둔 터였다.
 
  이윽고 5월 16일 김씨가 순순히 검찰에 들어왔다. 참고인으로 소환된 만큼 사법처리 같은 것은 없으리라, 미리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는지 우리 수사팀이 예의 ‘1억5000만원 건’을 들이대자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이틀에 걸친 조사과정 내내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끝까지 시인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5월 18일 아침, 거짓말처럼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뇌물 수수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고는 절차에 따라 구속, 수감됐다.
 
 
  마지막 뇌관, 안기부의 200억 돈 가방
 
  그렇다면 완강하게 비리 혐의를 부인하던 김씨가 어떻게 해서 갑자기 생각을 바꾸게 됐을까. 그것은 수사팀이 우연히 찾아낸 ‘200억짜리 돈가방 뜨거운 감자’ 덕분이었다.
 
  김현철, 김기섭씨 문제가 매듭지어진 직후인 5월 19일 오후 1시 반, 3과의 이훈규 과장이 내 방으로 올라와서는 “아직 총장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극비사항”이라며 메모지를 슬쩍 내밀었다. ‘김기섭 주변에서 돈 가방 발견. 현금-수표-미화 25만 달러 등 200억대’라고 쓰여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가뜩이나 앞서 발견된 현철씨의 수백억원대 비자금을 어떻게 언론에 발표할 거냐, 그 문제를 놓고 수뇌부 및 정부 관계자들과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또다시 정체 모를 거액의 괴자금이 나타난 것이다. 보고에 따르면, 김씨에게 가방에 대해 알리자 “죽고 싶다. 그것은 대선자금 같은 게 아니다. 중수부장은 못 믿겠으니 과장님이 직접 검찰총장과 안기부장께 이 사실을 말하고 사태를 수습해 달라. 안기부 돈을 내가 임의 인출한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게 보통 물건이 아니로구나’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당장 파 들어가야 되는 것인지, 덜컥 걱정이 앞섰다. “일단 총장께 보고하라”고만 했다.
 
  이틀 뒤 오후 김 총장이 나를 불렀다. “각하께서 가방 압수사실을 말씀하시더라”면서 “그냥 (안기부에) 돌려줄 수 없겠나”라고 물었다. 안기부 측에서는 일단 그것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통치자금’이라고 밝혀온 터였다. 말하자면 벌써 대통령-안기부-검찰총장까지 관계자들이 가방의 행방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 수사팀이 가방을 발견, 압수하자 그것을 관리하던 안기부 쪽 사람이 안기부장에게 보고했고, 다시 안기부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벌써 ‘조용히 돌려놓으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나는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뭐가 어찌됐든 예의 가방, 아니 그 돈의 정체부터 파악해야 했다. 5월 23일 이훈규 과장이 관련 사실들을 확인해 보고했다. “안기부 돈이 맞다. 안기부장도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라 했다. 안기부 공금으로 실제 안기부 모 과장이 관리해 온 것이다. 그동안 대통령이 외부의 다른 데서 돈을 받지 않고 안기부가 조성한 돈을 통치자금으로 받아 써왔다” 등이었다.
 
  따져보면 법적 성격이 모호한 돈이었다. 가방을 둘러싼 사실이 잘못 번져나가면 헌정중단 사태까지 몰고 올 수도 있는, 뇌관이었다. 검찰로서는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한 뒤 안기부에서 이를 자체 처리하도록 맡기기로 했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과는 지켜보기로 하고.
 
 
  ‘한보 몸통’은…
 
  5월 24일 밤 10시20분 이훈규 3과장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가방을 안기부에 돌려주고 안기부장의 확인서와 영수증까지도 확실히 받아두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스르르 긴장이 풀렸다. 온갖 생각으로 복잡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비로소 하얗게 비워졌다. 3월 21일 중수부장으로 발령받고 그때까지 60여 일, 그날 밤에야 푹 잤다.
 
  며칠 뒤 한보 수사를 마무리하는 브리핑에서 어느 기자가 “그렇다면 이번 한보 사태의 몸통은 누구라고 보느냐”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몸통은 없다고 본다. 비록 나라를 뒤흔든 큰 사건이긴 하지만 누군가 사건 전체를 총지휘하거나 어떤 계획된 의도를 가지고 일을 벌인 배후는 없다.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라고 할까. 부도덕한 기업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기 잇속을 채우려던 정계와 관계, 금융계 등 총체적인 부정(不正)세력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대답하겠다.”
 
  여운은 남는다. 과연 사건에 등장했던 장본인들은 시간이 지나고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수사가 진행되던 내내 ‘내가 처벌되면 대통령께도 불똥이 튈 것’이라며 김 대통령을 물고 늘어졌다던 ○○○은 또 뭐라 할는지.⊙
 
  (이상 기재한 모든 일시는 당시에 작성해 두었던 필자의 <수사일기>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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