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마쓰 가나메의 안행형태론, 한국은 물론 중국 경제 발전에도 적용 가능
⊙ 박정희, 수출 주도 공업화에 성공해 민족(대중)경제론의 허구 보여줘
⊙ 후발국의 발전 가능성 부정적이었던 신식민지론·수입대체산업화론·종속이론
⊙ 한-일-동남아 기러기 떼와 중국 일대일로 기러기 떼 간의 경쟁과 공존 필요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박정희, 수출 주도 공업화에 성공해 민족(대중)경제론의 허구 보여줘
⊙ 후발국의 발전 가능성 부정적이었던 신식민지론·수입대체산업화론·종속이론
⊙ 한-일-동남아 기러기 떼와 중국 일대일로 기러기 떼 간의 경쟁과 공존 필요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일본의 기술과 자본은 포철 설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진=조선DB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반공 태세를 유지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정부는 기어코 계엄령을 선포해 반대 여론을 억눌렀고, 1965년 한일 수교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명박과 박정희
이명박 전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은 1964년 6·3 사태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진=조선DB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삶은 이후 역설적(逆說的)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전과 이력 때문에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 그는 “국가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젊은이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겁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내용은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이후 젊은 이명박은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정주영(鄭周永) 회장 밑에서 일하다가, 1968년 귀국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이 공사는 4년 전 그가 반대했던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확보한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으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훗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을 총사령관, 정주영 회장을 야전사령관,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전장(戰場)으로 비유했다.
당시 대일 청구권 자금은 대한민국 경제 기적의 또 다른 상징 사업에도 투입되고 있었다. 현대건설이 1967년 수주한 동양 최대의 사력(沙礫)댐인 소양강댐, 그리고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에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 하여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라는 박태준(朴泰俊) 회장의 각오와 함께 1970년 착공된 포항제철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 기적의 밑거름이 된 한일 수교와 대일 청구권 자금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장 큰 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청구권 확보를 위해 일본에 면죄부(免罪符)를 주었고, 이 결과 오늘날까지 역사 정의(正義)가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다는 점에 집중된다. 또한 원래 피해자 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금을 국가가 대신 수령해 전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청구권과 배상 문제가 당시에도 중요한 쟁점이었지만, 1964~65년 한일 수교를 둘러싼 재야 인사들과 학생들의 반발에는 또 다른 핵심적인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대일 경제 종속과 매판(買辦) 자본 문제였다. 경제력에서 앞서 있던 일본 자본이 수교를 계기로 한국에 대거 유입되면, 한국은 다시 일본 자본에 종속되는 신(新)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은 당대에 매우 일반적이었다. 이는 외세와 결탁한 매판 자본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실제 당시에 작성된 글을 읽어보면 청구권 논쟁만큼이나 경제 종속과 매판 문제가 재야 인사와 학생들의 행동에 불을 지핀 이념적 동력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을 역사로 배워 알고 그 업적 위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당대인들의 우려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한국은 오히려 일본에 경제가 종속되기는커녕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 기업과 당당히 경쟁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1960년대 사람들 입장에서 이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당시 시대의 ‘상식’은 수교 반대론자들에 훨씬 더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런 ‘익숙지 않은 상식’을 알기 위해서는 위태로운 신생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과 처지가 비슷했던 여타 비(非)서구 국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크루마의 신식민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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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
은크루마의 신식민주의 비판은 큰 주목을 받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를 통해 형성된 국가 간의 불평등한 경제 관계에 대한 논의는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럽 열강의 압력 속에서 해체된 오스만 제국을 새로운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전환하며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대표적이었다. 아타튀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과거 오스만 제국이 유럽 열강과 그 ‘앞잡이들’인 비무슬림 자본가들에 의해 경제적으로 종속된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튀르키예 독립 전쟁을 거치면서 튀르키예 인구가 무슬림 튀르크인으로 동질화된 결과, 아타튀르크는 국가가 국내 자본을 동원하여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etatism) 경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근대화 의욕을 가진 국가 엘리트가 있다면 종속적인 무역과 관계 없이 자주적으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케말주의의 믿음은 이후 등장하는 이집트, 인도, 버마(미얀마) 등 아시아 신생 독립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남미의 수입대체산업화와 종속이론
더 주목할 만한 산업 정책을 추진한 곳은 라틴아메리카였다. 라틴아메리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지만, 19세기 초에 대부분의 국가가 독립을 이룬 상태였다.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광대한 토지를 이용하여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무역에서 농산물과 광물을 수출하며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하지만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며 그동안 자연스러웠던 자유무역의 시대가 끝나고 블록화된 보호무역의 시대가 열렸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농산물과 자원 수출이 급감하며 외화가 부족해지자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선진국 공산품을 구매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러한 무역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30년대부터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이 본격 추진되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실용적 대응책이었던 수입대체산업화는 1950년대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이 복원된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에 의해 이론적 정당성을 갖추게 된다. 프레비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무역에서, 1차 산업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의 교역 조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고, 선진국은 생산성 향상과 기술 발전의 이익을 독점해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더 큰 이윤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프레비시는 개발도상국의 이익을 대변하며 중심부와 주변부 간 경제적 종속 문제를 다룬 종속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다. 빈곤한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가 되어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도 5·16 군사혁명 직후에는 얼마간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했을 정도로 이는 당대의 상식이었다.
민족경제론과 대중경제론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
수치상으로 보면 이러한 비판이 완전히 근거 없는 주장만은 아니었다.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의 공격적인 투자는 대규모 외국 차관(借款)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외채망국론(外債亡國論)’이라는 표현이 사회에 널리 퍼졌다.
박정희 정부는 열심히 수출 확대와 외화벌이를 강조했지만, 대일 무역수지는 좀처럼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가공무역에 집중하며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을 수출한 데 반해, 산업 기반 구축에 필요한 고부가가치의 중간재(中間材), 기계, 소재는 인접한 선진국 일본에서 계속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업이 성장할수록 일본산 고부가가치 중간재 수요는 더욱 늘어나 대일 무역적자는 오히려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대일 청구권 자금과 일본 차관으로 추진된 다양한 경제 기반 사업들에도 일본 기업들이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참여하면서, 결과적으로 일본이 제공한 돈이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1970년대부터 정부의 수출 주도 정책과 일본을 포함한 미국·영국·서독 등 선진국과의 적극적인 교역이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중소자본의 성장을 억누르며 왜곡된 경제 구조를 만든다는 비판이 본격화되었다. 이어 박정희 정부와 이와 결탁한 재벌,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미국과 일본 등 외세 자본이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 중소자본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신식민주의 구조 비판으로 발전되었다.
1978년 전직 빨치산 대원이었던 박현채(朴玄埰·1934~1995년) 조선대 교수가 집필한 《민족경제론》과 박현채의 영향을 받은 김대중(金大中) 신민당 후보가 1971년 대선(大選)에서 내세운 ‘대중경제론’이 이를 대표한다. 이들은 국내 농촌 시장을 발전시켜 내수 구매력을 기반으로 한 자립적 산업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며 ‘내포적 공업화론’을 주장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휩쓴 수입대체산업화와 종속이론이라는 ‘상식’을 한국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기적
하지만 한국에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반발이 격해지던 197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는 또 다른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주변부의 고착된 빈곤을 끊어내고 근대적 경제 발전에 성공했다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동아시아 경제 기적은 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소련의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활용되었고, 동시에 무역을 통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불평등 구조가 고착된다는 종속이론의 주장에 대한 생생한 반박으로 작용했다.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는 종속이론이 비판하던 바로 그 ‘외세와 교역하는 국내 자본’을 통해 경제 기적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종속이론의 통찰과 현실을 보다 세련되게 종합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제시된 시기이기도 했다. 월러스틴은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 ‘반(半)주변부’라는 중간 개념을 도입했다. 반주변부는 중심부만큼 고도화된 자본과 기술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주변부보다는 앞선 산업과 기술 기반을 보유한 지역을 의미했다.
세계체제론을 1980년대 동아시아에 적용하자면, 일본은 한때 반주변부였으나 중심부인 미국, 서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중심부로 도약했고, 한국은 주변부에서 일본을 추격하며 반주변부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이후 21세기에 들어서며 한국 자본주의는 반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중심부에 준하는 수준까지 도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이라는 존재
세계체제 내에서 자국의 위치를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업적은 소련, 튀르키예, 인도, 라틴아메리카 등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성과였다. ‘경제 기적’은 오직 동아시아에서만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발전국가론’과 ‘유교(儒敎) 자본주의론’ 등 여러 이론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이론일 뿐 역사와 지리를 고려했을 때 동아시아가 다른 비서구 지역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비서구의 유일한 세계체제 중심부 국가였던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보면 일본의 존재는 오히려 한국이나 대만과 같은 동아시아의 후발국(後發國)을 더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제국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실제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메이지(明治) 근대화를 이루면서 일본 자본을 적극적으로 조선과 대만으로 침투시키지 않았던가? 값싼 일본산 공산품이 들어오며 조선의 토착 산업 기반은 와해되고, 조선의 토지는 팽창하는 일본의 도시 인구를 위한 쌀과 면화 생산 기지로 재편되지 않았던가? 이처럼 저발전이 강제되는 전형적인 종속 상태에서 일본의 침투는 곧 신식민주의의 도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앞서 살펴보았듯 이미 1960년대부터 한국 재야 인사와 운동권을 사로잡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은 전혀 다른 발전 모델을 구상하고 있었다. 1935년, 일본의 경제학자 아카마쓰 가나메(赤松要·1896~1974년)는 동아시아에서 경제 발전이 지역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관찰하고 이를 ‘안행형태론(雁行形態論)’이라는 이론으로 제시했다. 일본을 선두로 조선, 만주, 대만, 중국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처럼 순서대로 비행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행형태론의 골자는 간단하다. 선도국이 먼저 선진 산업을 발전시키면, 이에 따라 기존의 저부가가치 산업은 경쟁력을 잃게 되고, 이 산업들은 인접한 후발국으로 이전된다. 선도국이 산업을 한 단계 더 고도화하면, 과거의 선진 산업이 기성 산업이 되어 다시 후발국으로 이전된다. 선도국에서 산업을 이전받은 후발국 역시 자신보다 더 낙후된 국가로 저부가가치 산업을 넘기면서 산업구조를 자체적으로 고도화해 나간다. 이 결과 선도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 전체가 산업 발전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구조가 형성된다.
사실 이는 아카마쓰 가나메 개인의 구상에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일본은 동아시아에 독자적인 경제 블록을 만들고, 유럽 제국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국과 식민지가 함께 발전한다는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모델을 구상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각 지역에 어떤 산업을 유기적으로 배치할지 다양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아카마쓰 가나메의 초기 구상은 일본이 전쟁에 휘말리고 제국이 패망하면서 한때 중단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 수교를 추진하던 1960년대 중반 무렵부터 다시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후에 부활한 안행형태론
전후(戰後) 혼란에서 벗어난 일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산업 중심지로 부활했다. 문제는 일본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저가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저부가가치 제조업의 경쟁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호황 속에서 과도한 설비 투자로 인한 과잉생산 문제도 겹쳐, 새로운 상품 소비시장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공해(公害) 산업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거부감 역시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한국은 이러한 일본의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최적(最適)의 협력 대상이었다. 산업화를 절실히 원하던 박정희 정부는 일본에서 유지하기 어려워진 저부가가치 제조업을 적극 유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미 한일 수교 이전부터 재일동포 자본가들이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입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 출신 자본가로서 조국 발전에 기여하고 동시에 새로운 사업 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한국에 과감히 투자했다.
이렇게 유입된 의류·가발 등 단순 제조업을 시작으로, 한국은 고도화된 일본 산업 구조의 뒤를 바짝 뒤쫓아 추격해 나갔다. 이에 따른 결과는 조국 근대화를 향한 정부, 기업, 국민의 노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본 경제가 빠른 속도로 고도화되며 선도 산업들을 한국으로 이전해 준 결과이기도 했다. 신일본제철의 기술은 포항제철로, 고베의 조선소 기술은 거제도의 조선소로 이어졌다.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고부가가치 중간재를 일본에 의존해 대일 무역적자가 지속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수입하던 품목을 하나씩 국산화하며 산업 수준을 차례차례 끌어올리고 있었다. 일본이 만들어가는 더 높은 수준의 중간재와 기술을 한국이 자체적 산업 구조 고도화를 통해 수요를 형성하여 빠르게 흡수해 나간 점은 무역수지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중대한 변화였다.
한국, 일본의 근대화 경험 학습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 김포공항 인근 가도에는 이를 축하하는 간판이 세워졌다. 사진=조선DB |
식민지 조선이 일제 시대는 물론 독립 이후에도 겪은 비극에 일정한 책임감을 느낀 일본 정·재계 인사들은 한국과의 무역과 투자에 꽤 호의적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엘리트들은 일본의 지배와 만주국 시절의 교육 배경 덕분에 일본어에 능통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경험을 신속히 학습하여 한국식으로 적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배와 비행기로 쉽게 오갈 수 있는 근접성은 양국 간 무역 비용을 낮추고,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으로 부담 없이 출장을 와 기술 이전을 도와주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한일 수교가 이루어진 지 30년이 지난 1995년, 한국은 전후 최빈국(最貧國)에서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며 고소득 국가의 반열에 올라섰고, 종속이론이 예측했던 저발전의 덫을 극복했음을 전 세계에 입증해 보였다. 1965년에 ‘매판자본’이라 비난받던 재벌들은 외화를 벌어들인 주역이 되었고, 외세 자본 역시 산업과 기술 이전의 실질적 파트너로 기능했음이 드러났다.
다른 지역의 운명은 사뭇 달랐다. 지리적 인접성, 역사적 유대감, 문화적 친숙성을 바탕으로 세계체제의 중심부와 주변부가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맺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서유럽과 미국은 최초의 산업 대국 영국과의 인접성을 통해 수혜를 본 사실상 거의 마지막 사례였다.
‘기러기형 비행’은 계속됐다
많은 비서구 국가에서는 종속이론이 우려했던 매판자본이 실제로 등장해, 국민 경제의 발전보다는 소수 지배층을 위해 국가 자원을 수탈하고 중심부 국가의 이익만을 증대시키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들 국가에는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자본주의 중심부가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고, 참고할 만한 친숙한 발전 모델도 부재했다. 결국 멀리 떨어진 서구의 사례만 바라보며 각자 고립된 채 힘겹게 산업화를 시도해야 했다. 무역과 수출보다는 내향적 경제 운영과 수입대체산업화를 ‘상식’으로 삼았던 다른 국가들은,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 동안 산업 구조의 고도화를 충분히 이루지 못한 채 오일쇼크와 외채 위기를 맞아 경제적 충격과 사회 혼란을 겪게 되었다.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경제의 기러기형 비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그는 과거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 자본의 힘을 빌리고자 일본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이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을 만나 “중국에도 포항제철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자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기에 어려울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 중국은 박태준 회장을 수도강철의 명예고문으로 위촉하며 본격적인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는 한국이 기러기형 비행에서 선두에 서서 이제 막 이륙을 시작한 중국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이미 작고한 아카마쓰 가나메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자신의 안행형태론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보며 흡족해했을지도 모른다.
합종연횡의 기러기 떼
그러나 아카마쓰가 안행형태론을 발표한 지 90년이 지나고,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의 동아시아는 또다시 중요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바로 중국의 전례 없는 경제적 추격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가치사슬의 상부에서 한국과 일본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으며, 저부가가치 산업의 경우 인근 저개발국으로 이전하기보다는 자국 내 내륙 지역으로 배치하면서 공급망 자국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거대한 규모는 과거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기러기 편대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미 후발국들은 중국이라는 ‘천장’에 가로막혀 산업 고도화에 어려움을 겪는 동시에, 세계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의존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반면 한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선발국들은 중국의 추격을 경계하면서도, 중국과의 교역에 자국 공급망과 경제의 생존이 달려 있는 딜레마를 마주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1965년에 당대의 상식을 거스르면서도 한일 수교를 통해 동아시아 경제 기적을 이뤄낸 역사 속에서, 오늘날 중국이라는 도전에 대응할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절대적이던 과거와 중국이 미국에 필적하는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오늘의 환경은 같지 않다. 그러나 지역 내 산업과 가치사슬의 분업이 지정학과 긴밀히 연동되고 있는 점, 지리적 인접성과 역사적 연고를 바탕으로 한 호혜적 공동 발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지고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가 ‘합종(合從)’의 기러기 떼를 형성하여,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경제권이라는 ‘연횡(連橫)’의 기러기 떼와 경쟁하면서도 공존하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일본이 1965년 수교를 통해 묵은 갈등을 넘어섰던 역사적 선택과 이후 60년간 선린(善隣)의 경험을 다시 성찰해 보면 어떨까.⊙

이명박 전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은 1964년 6·3 사태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진=조선DB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 김포공항 인근 가도에는 이를 축하하는 간판이 세워졌다. 사진=조선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