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고도성장의 동력… 과거사 문제는 아쉬움

  • 글 : 이원덕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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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아시아 전략 작용, 한미일 3자 회담 성격
⊙ 1990년대 이후 日 총리들,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으로 사과
⊙ 합병조약의 합법성 놓고 이견… ‘이미 무효’라는 표현으로 타협
⊙ 韓 5억 달러 청구권, 中·대만은 청구권 포기, 동남아엔 배상·준배상… 북한만 未決

李元德
1962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 국제관계학 박사 /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현대일본학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미 피츠버그대학 연구원, 도쿄대 객원교수, 외교부·통일부·국가안보실·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역임. 現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겸 사회과학대학장 / 논저 〈한일관계 65년 체제의 성격과 한일 신시대의 과제〉 《한일회담》 《대일청구권협정 및 기본관계조약》 등
《조선일보》 1965년 6월 23일 자 1면에 한일협정 조인을 알렸다.
1951년 10월 20일 역사적인 제1차 한일(韓日) 국교(國交) 정상화 교섭(한일회담)이 개최된 날, 한국 측 수석대표인 양유찬(梁裕燦)이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적 경위를 설명한 후 “이제 화해합시다(Let us bury the hatchet)”라고 말하자 일본 측 수석대표인 이구치 사다오(井口貞夫)는 “도대체 무엇을 화해하자는 말입니까?(What is bury the hatchet?)”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후 회담이 파란과 우여곡절로 점철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한일회담이 14년간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난항할 수밖에 없었던 최대의 이유는 과거 일제 35년간의 식민(植民) 지배에 대한 양국의 역사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데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일본 정부는 35년간의 조선 지배가 ‘병합(倂合)조약에 의한 합법(合法) 통치’라는 인식에 서있었던 데 반해, 한국 정부는 ‘일제(日帝)의 무력(武力)에 의한 강점(强占)으로 원천적으로 불법(不法) 무효’라는 기본 인식 하에 회담에 응했다. 이 과거사 인식의 괴리 문제는 비단 한일회담에 그치지 않고 전후(戰後) 한일관계를 줄곧 마찰과 대립의 악순환으로 끌어가는 최대 아킬레스건(腱)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韓, ‘정신적 청산’ ‘물질적 보상’에 全力
 
한일 수교 교섭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진=조선DB
  한일회담은 세 가지 점에서 대단히 복잡한 교섭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이 회담은 세계 외교사(史)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교섭이 장기화되어, 타결되기까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14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둘째, 한일회담은 교섭 개시 이래 타결까지 미국이 지속적으로 깊숙이 관여한, 말하자면 한미일 3자회담의 성격을 띤 교섭이었다. 미국은 냉전 시기 대(對) 공산권 봉쇄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관계를 복원시키기 위해 때로는 배후에서 간접적으로 회담 촉진을 위해 압력을 행사하였고, 때로는 표면에 나서서 직접 회담 타결을 이끌었다.
 
  셋째, 한일회담에서는 여러 가지의 의제가 동시에 다루어졌다. 즉 기본관계, 청구권, 어업-평화선(線),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등 굵직굵직한 중대 현안이 동시에 다루어졌다.
 
  이 중에서 한국 정부는 무엇보다도 과거사 청산과 직결되는 ‘기본관계’와 ‘청구권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기본관계가 과거 정신적인 청산과 관련된 의제라면 청구권 문제는 물질적인 보상·배상을 다루는 내용이다. 기본관계의 핵심 주제는 1910년 한국병합조약의 해석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일본의 식민 통치를 가능케 했던 구한말(舊韓末)의 조약의 정당성 문제, 나아가 식민 통치의 평가 및 해석과 결부된 문제가 과거사 인식과 직결되는 기본관계의 핵심 내용이다. 이에 반해 청구권 문제는 식민지 과거사와 관련된 물질적인 차원의 보상과 관련된 의제다.
 
 
  日, 평화선·재일교포 문제에 관심
 
  한편 일본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 대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1951년 일방적으로 선포한 평화선의 철폐와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를 확정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즉, 일본은 한국의 과거사 청산 요구가 과도하다는 인식 하에 이를 ‘국제법과 증거’ 논쟁으로 적절히 억제하고, 그 대신 평화선 철폐를 통해 일본 어민의 안정적인 어업권 확대를 꾀하고, 일본 사회의 골칫덩어리로 간주되던 재일교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 양국은 미국으로부터 회담의 조기(早期) 타결을 통한 국교 수립 압력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14년간의 장기 교섭에도 양국의 과거사 인식의 근본적인 차이는 좁혀질 수 없었다. 35년간의 식민 통치를 원천적으로 불법 부당한 것으로 보는 한국 측의 인식과 그것을 적법하고 합당한 것으로 보는 일본 측의 인식이 외교 협상을 통해 근접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처럼 과거 일본의 조선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현격한 인식 차로 말미암아 이 교섭은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겪은 후에야 타결될 수 있었다.
 
 
  안보·경제 논리가 구심력으로 작용
 
  14년간의 회담 전개 과정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힘이 지속적으로 작용했다. 회담을 타결로 이끌어 가는 힘은 ‘안보’와 ‘경제’ 논리에 의해 주어졌다. 즉, 안보 논리와 경제 논리가 한일관계의 구심력(求心力)으로 작용하여 교섭의 타결을 촉진했다. 반면 과거사 청산 논리는 회담을 대립과 갈등으로 끌고 가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즉, 과거사 청산은 교섭을 결렬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원심적(遠心的)인 힘의 원천이었다.
 
  냉전 체제와 연계된 안보 논리는 한편으로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라는 형태로 작용했다. 즉, 미국은 회담의 개시 단계부터 타결 시점에 이르기까지 한일회담의 타결을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애당초 한일 양국을 회담의 테이블에 앉힌 것이 다름 아닌 미국이었으며, 나아가 반복되는 회담의 중단과 결렬 사태를 회담 재개와 타결로 이끌어가기 위해 때로는 배후에서, 때로는 내놓고 압력을 가한 것도 미국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회담 타결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것은 안보적 고려였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조선은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匕首)’라는 인식이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한반도 정책의 저류(底流)로 흐르고 있는 일관된 사고방식이다. 박정희(朴正熙) 정권 또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국이 희구하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달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안보 논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추진 동력은 경제 논리였다. 경제 논리가 회담 타결의 주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1950년대에 답보(踏步)를 면치 못하던 한일 교섭이 1960년대 들어서 급격하게 타협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명백하다.
 
  사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일 경제 관계는 미국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상대를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만큼 긴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양국의 경제적 여건은 크게 달라졌다. 특히 한국의 경우 1950년대 말부터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양적으로 크게 삭감되는 한편 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면서 그로 인한 경제적 침체와 불황이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은 전후 대소(對蘇) 전략의 일환으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경제 원조를 서유럽을 비롯한 동맹국에 쏟아부은 결과 달러의 과도한 방출로 인한 후유증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달러 방위’라는 명목 하에 동맹국 경제 원조를 대폭으로 감축하는 정책을 추진했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 케네디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원조의 성격이 소비재 위주의 무상(無償) 원조 방식에서 개발을 지원하는 차관(借款)형 원조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은 대미(對美) 의존형 경제 체질을 탈피하고 자립적인 산업화의 기반을 구축하여 본격적인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韓日의 필요와 미국의 압력으로 대화 급물살
 
1964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과 만난 로버트 케네디 미국 법무장관은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전달했다. 사진=조선DB
  때마침 1961년 5·16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정권의 제일 목표로서 ‘조국 근대화’와 ‘경제개발’을 내걸고 1962년부터 야심 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본과 기술의 부족에 직면하여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곤경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박 정권이 구상한 것이 다름 아닌 ‘대일 관계 타결’ 노선이었다. 박 정권은 만약 한일회담이 타결된다면 상당한 액수의 청구권 자금이 들어올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과의 경제 관계가 정상화된다면 다량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개발에 활용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더욱이 미국은 박 정권에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한일회담 타결로 자본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도록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미국은 박 정권이 한일회담 타결에 나서지 않을 경우 경제 원조를 중단 내지 삭감하겠다는 압박을 가했다.
 
  한편 일본의 경우도 회담 타결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한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일 관계를 경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입장과 다를 바 없었다. 안보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물러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정권의 뒤를 이어 등장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정권은 될 수 있으면 국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안보·정치적 쟁점을 회피하고, 그 대신 정치의 중심축을 경제로 옮기는 쪽으로 정치 노선을 설정했다. 이케다 총리가 야심적인 정책으로 내놓은 ‘소득배증(倍增)계획’은 이케다 정치 노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經協 방식으로 청구권 문제 타결
 
  한일회담의 최대 난제였던 청구권 문제가 이케다 정권 하에서 경제협력 방식에 의해 타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케다 총리는 한일회담의 본질을 경제 문제라고 인식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경제외교의 일환으로 풀어 나가려고 시도하였다. 즉, 이케다 정권은 청구권 문제의 본질이 과거사의 청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제적 이해(利害)의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이케다 정권이 청구권의 해결 방안으로 고안해 낸 것이 경제협력 방식이었다. 경제협력 방식은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명목’과 ‘지불’의 둘로 나누어, 지불 액수에서는 한국의 요구에 최대한 접근하고, 명목에 관해서는 사죄와 보상의 의미를 배제하는 대신 경제협력의 의미를 부여한다.
 
  둘째, 한국에 일본의 공업제품과 역무(役務)를 제공해 이를 장래 한국에 대한 경제 진출의 토대로 활용한다.
 
  경제협력 방식의 요체는 지불의 방식을 자본이 아닌 공업제품과 용역(用役)으로 한다는 데 있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 버마(미얀마),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전후(戰後) 처리에도 적용했던 방식이다. 일본은 이러한 전후 처리 방식을 동남아 지역에 대한 경제 진출을 적극화하는 토대로 활용해 왔다. 일본은 한국에도 이 방식을 적용시키고자 의도했다. 경제협력 방식이 채용된다면 일본으로서도 결코 경제적으로 손해 볼 것이 없으며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과거사 문제, 상반된 해석으로 어정쩡한 타협
 
  한일회담의 타결은 냉전적 상황과 그에 기반을 둔 안보 논리 및 경제 논리에 의해서 촉진되었을 뿐, 정작 회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사 청산의 논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일회담 타결과 한일조약 체결에도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걸림돌로 남아 있는 것은 회담 타결 과정에서 과거사 처리 문제가 유보된 채 안보와 경제 논리에 입각한 편의적인 해결만이 도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루하고도 긴 교섭을 통해 양국 정부가 도달한 해법은 정면 돌파식 과거사 청산을 회피하고 유보하는 선에서 타협을 모색한다는 것이었다. 한일의 동상이몽은 양국 국회에서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할 때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비준 국회에서 한일회담의 최대 초점이 되었던 청구권 문제와 과거 인식 문제를 두고 전혀 상반된 해석을 내놓았다. 한국병합조약을 두고 한국 정부는 한일조약의 “이미 무효”라는 규정을 ‘당초부터 원천적으로 무효였다’고 해석한 데 반해, 일본 정부는 ‘지금은 무효이나, 당시는 유효하고 합법적이었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유·무상 자금의 지불 명목에 대해 한국 정부는 ‘과거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서 해석한 데 반해 일본 정부는 어디까지나 청구권과는 관계없이 ‘한국의 경제 재건을 지원하기 위한 경제협력’이라고 해석하였다. 과거 청산이라는 핵심 문제에 관해서 한일 양국의 이와 같은 상반된 해석은 한일조약이 지닌 한계를 그대로 보여 준다.
 
  한일협정 중 과거 청산 문제와 연관된 조항은 ▲한일기본조약의 전문(前文) ▲한일기본조약 제2조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의 세 가지다.
 
  첫째, 한일기본조약의 전문이다. 일반적으로 조약의 전문엔 조약의 목적과 성격을 표명하는 문구가 들어간다. 한일기본조약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적 점령과 지배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평화와 우호의 기반에서 새로운 양자 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체결되었어야 한다. 과거를 청산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양국 관계의 구축을 꾀한다는 조약 본래의 취지를 생각할 때, 그 전문에는 조선에 대한 강압적인 주권 박탈과 가혹한 식민 통치의 역사를 일본이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죄와 더불어 식민 통치 과정에서 조선인들에 입한 피해와 손실에 대한 보상·배상 의무를 명시했어야 한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 전문에는 일반적인 양국 간 우호·우호통상조약에서 흔히 보는 내용만이 서술되어 있을 뿐 과거사 청산에 관한 내용이 일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조약 체결의 목적’에 관해서 ▲선린우호 ▲주권의 상호 존중 ▲복지 및 이익의 상호 증진 ▲국제평화와 안전을 열거한 후, 역사적 경위에 대해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의 관계 규정 및 유엔 결의 제195호(3)을 상기하여”라고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한일회담의 초기 단계부터 일본은 ‘우호조약’이라는 명칭을 제안한 데 반해, 이승만 정부는 우호가 아닌 ‘기본조약’을 주장하였다. 기본조약을 사실상의 ‘평화조약’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애초부터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연합국과 패전국 일본 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틀 속에서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일 강화(講和)의 일환으로 수교를 이루려던 한국 정부의 구상은 한국이 강화조약의 정식 서명국에서 탈락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강화조약 체결을 위한 영미(英美) 간 협의 과정에서 한국 참여 배제 방침이 확정됨에 따라 한국의 당사국 참여 가능성이 최종적으로 무산된 것이다.
 
 
  ‘이미 무효’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둘째,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 부분이다.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무효’ 시점을 둘러싼 한일 정부의 명백한 합의가 부재(不在)하여, 양국의 해석이 완전히 상이하다.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1910년 한국병합조약 자체가 불법에 의해 강요된 것이므로 ‘애초부터 무효’라고 해석한다. 《한일회담 백서》는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협정, 의정서 등의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국가 간의 합의 문서는 전부 무효이다. 무효의 시기에 관해서는 “무효라는 용어 자체가 별단(別端)의 표현이 부대(附帶)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당초부터 효력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미’라고 강조되어 있는 이상 소급(遡及)하여 무효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반면 일본 측은 한국 병탄을 규정한 구(舊)조약이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이후 비로소 무효가 되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는 한일협정 비준 국회에서 “1910년의 한국병합조약은 양자의 완전한 의사,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것으로 효력이 발생하였다”고 강변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해석은 1965년 대장성(大藏省·現 재무성)이 발간한 《일한조약과 국내법 해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책자는 “무효라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무효가 되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약 및 협정이 대일본제국과 대한제국 간에 정당한 절차를 밟아 체결된 것으로 이것이 유효하게 성립, 실시된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해설하고 있다.
 
 
  ‘전략적 애매성’
 
이동원 외무장관(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은 담판을 통해 ‘구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타협안을 만들어 냈다. 사진=조선DB
  “이미 무효” 조항을 둘러싼 대립은 1952년 2월에 개최된 제1차 한일회담 기본관계위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 측은 애초부터 문서 상으로라도 굴욕의 식민 역사를 불식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하기 위해 구조약의 무효 확인 조항 설치를 주장했다. 일본 측은 이를 마치 한국이 승전국의 입장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고 못마땅하게 여겨 이 조항 설치를 반대하고 삭제를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 끝에 조약안(案)에는 “일본국과 구대한민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한일관계에 있어서 효력을 갖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문장이 삽입되었다.
 
  이후 이 초안을 기초로 조약문의 최종 성안(成案) 작업이 이뤄진 것은 1965년 1월부터 개최된 제7차 회담 때였다. 한국 측은 ‘구조약의 원천적 무효(null and void)’를 규정한 안을 일본 측에 제출하였다. 이에 일본 측은 강화조약에 의해 구조약이 무효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무효 시점이 최초가 아닌 어느 시점부터라는 의미를 내포하도록 ‘have become’ null and void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한국 측의 거부로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실무 레벨에서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 둘만의 담판에 의해 ‘already’ null and void로 낙착되었다.
 
  여기서 합의된 “이미 무효”라는 표현은 양국의 팽팽한 견해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고 하기보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양국의 입장을 그대로 둔 채 양국이 자국의 국내정치 상황 속에서 편의에 따라 이를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 놓으려는 의도로 성안된 것이었다. 즉, 기본조약 제2조는 양국이 식민 통치의 불법성에 관해 자국 국민을 향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양해(agree to disagree)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 합의였다. 외교적 차원의 전략적 애매성(strategic ambiguity)으로 포장한, 타결 아닌 타협에 불과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청구권 변제’인가 ‘독립 축하금’인가
 
  셋째,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관련이다. 협정 제1조는 “일본은 한국에 10년간에 걸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한다”고 하고, 이어 제2조는 “양국은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와 이익 그리고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5억 달러의 자금 제공’과 ‘청구권 문제 해결’의 관계를 제1조의 경제협력의 수반적인 결과로서 제2조의 청구권이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점만을 인정할 뿐, 제1조와 제2조의 법률적인 인과관계는 철저하게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준 국회에서 일본 정부는 유·무상의 5억 달러 제공은 청구권의 변제(辨濟)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 내지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명목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5억 달러 자금 공여가 재산 청구권 변제라고 주장한 것은 한국 정부였다. 한일조약 비준 국회에서 장기영(張基榮) 경제기획원 장관은 “협정 제1조의 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는 경제협력이 아니고 청구권이 주(主)가 된 것이며 실질적으로 배상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동원 외무장관도 “청구권 협정은 청구권의 해결을 주로 하고 경제협력을 종(從)으로 결정한 것이다. 무상 공여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청구한 결과 일본이 지불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한국 정부의 공식 견해는 5억 달러의 자금 제공은 청구권의 변제 혹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배상이라는 것이다.
 
 
  대만·中, 청구권 포기 대가로 막대한 원조 받아
 
  한일 간의 전후 처리는 이처럼 ‘청구권 대 경제협력’이라는 애매한 명목으로 타결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점령했던 기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전후 처리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먼저 대만과 중국의 경우는 여타 연합국의 경우와 같이 각각 일본과의 양자 조약을 통해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최대 피해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이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것은 일본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전후 줄곧 중국에 막대한 규모의 정부 개발 원조를 제공한 것은 이 배상 청구권 포기 조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동남아 4개국에 대해서는 강화조약 제14조에 입각하여 개별 교섭과 배상 협정을 통해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정식으로 배상을 받은 4개국은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이다. 미얀마에 2억 달러, 필리핀에 5.5억 달러, 인도네시아에 2.2억 그리고 베트남에 4000만 달러를 각각 지불했다. 이와 더불어 차관의 형태로 경제협력 자금이 추가 제공되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기타 동남아 국가들에도 준(準)배상적 조치로 다소간의 경제협력이 제공되었다.
 
  현재 일본과 미수교 상태에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전후 처리가 미결 상태로 남아 있다. 일본은 장차 북일 국교 정상화가 달성된다면 1965년 당시 한국에게 제공했던 금액에 상당한 청구권 자금을 북한에게도 지불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하고 있다.
 
 
  현금 아닌 현물·용역 공여 위주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의 회담은 청구권 문제 타결의 돌파구가 됐다. 사진=조선DB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본의 대(對)아시아 전후 처리는 한반도의 남북한에 대해서는 강화조약 제4조에 입각한 재산·청구권의 틀로 해결을 보았고, 중국·대만에 대해서는 배상 청구권의 포기라는 방식으로, 그리고 동남아 제국에 대해서는 강화조약 제14조의 틀에 입각하여 배상 및 준배상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종결지었다. 일본이 배상·준배상, 청구권, 경제협력 등의 명목으로 아시아 국가들에 지불한 금액은 역사상 패전국이 지불한 배상금에 비한다면 아주 가벼운 것이었다. 또한 일본이 지불한 전후 처리 비용은 철저하게 현금의 형태가 아닌 현물과 역무의 방식으로 지불됨으로써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진출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일본이 유리한 조건에서 전후 처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후 냉전 체제의 도래 덕분이었다. 미국이 새로운 적국으로 등장한 공산 소련과 중국에 맞서기 위해 패전국 일본의 배상 책임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 그 대신 경제 및 산업 재건을 후원하는 전략을 추진한 것이다. 전후 냉전 체제의 급속한 확산과 이에 따른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전환으로 말미암아 패전국 일본은 전쟁 배상의 막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오히려 경제 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한일회담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과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가지 조건 속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외교 교섭을 벌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첫째, 한일회담의 출발점은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정부는 이 강화조약에서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펼쳤지만 최종적으로는 좌절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본에게 막대한 배상과 보상을 요구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배상 권리를 향유하는 제14조국에서 탈락함으로써 한일 간 전후 처리는 제4조에서 규정한 대로 재산·청구권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점은 한일회담 내내 한국의 대일 협상력을 제약하는 변수로 작용했다.
 
  둘째, 당시 한일의 국력 차를 고려해야 한다.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경제력으로 보면 1960년대 중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되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고, 일본은 한국의 30배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또한 한국은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위에 수립된 허약한 신생국가에 불과했으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탄탄하게 정비된 막강한 관료 조직을 지닌 강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치밀한 법률론과 증거론을 내세워 한국의 과거사 청산 요구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여건에서 한국 정부는 14년간 일본과 ‘외교 전쟁’을 벌인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대일 교섭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과거사 청산과 개발 자금의 획득, 그리고 서측 진영의 결속을 통한 안전보장의 확보를 추구하려 했다. 박 정부는 이 세 가지 목표 중 경제적 이익의 확보와 안보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였다. 빈곤과 안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통해 경제개발 자금을 도입하고 미국으로부터 안보 공약을 공고히 하는 것이 우선적 국익(國益)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박 정부의 이러한 전략적 선택이 이후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1950년대 배상 자금을 성공적인 경제개발로 연결시키지 못한 동남아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뒤늦은 노력들
 
  한편 경제와 안보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거사 청산 과제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된 점은 한일회담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따라서 일제하 강제동원과 ‘위안부’ 보상·배상 문제 등 과거사 청산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한일 관계를 짓누르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한일회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이후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한 일본과의 협상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도 피해자 구제를 위한 조치가 다양하게 추진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일협정의 최대 미해결 문제인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해서는 2015년 한일 정부 간에 ‘위안부 합의’를 만들어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하는 한편, 10억 엔의 일본 정부 ‘사죄금’을 피해자 구제를 위해 지급하였다. 한편 징용 피해자 문제는 2018년 한국 대법원이 피고 일본 기업이 징용 피해자에게 각 1억원의 배상금 지급을 명령하는 판결을 했다. 이 판결로 일본 정부와 기업이 반발하는 상황에서 윤석열(尹錫悅) 정부는 2023년 3월 국내적 구제 조치의 일환으로,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으로 하여금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결단을 내렸다.
 
 
  日, 과거사엔 ‘부당했지만 합법’ 견지
 
  1965년 한일 기본조약에서 일본의 사죄와 반성 그리고 보상·배상 조치가 미흡하고도 불충분했다는 점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주목을 요하는 사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일본 정부가 사죄·반성의 자세를 보이고 전향적(前向的)인 역사 인식을 거듭 표명해 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일본 정부의 식민 통치에 관한 공식 입장은 1965년 기본조약 체결 당시의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상당한 진전을 보여 왔고 전향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은 199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표명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첫째, 1993년 8월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총리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나라의 식민 지배로 한반도의 사람들이 모국어 교육의 기회를 빼앗기고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당하고 또 위안부, 강제 연행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참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경험한 것에 대해서 가해자로서의 비도(非道)한 행위를 깊이 반성하고 진심으로 진사(陳謝)한다”고 언급했다.
 
  둘째,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각의(閣議) 결정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우리나라는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國策)을 그르쳐서 전쟁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제국 사람들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고 표명했다.
 
  셋째, 1998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渕惠三) 총리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한때 식민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
 
  넷째,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한국 병합 100년에 즈음하여 발표한 담화에서 “100년 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36년간에 걸친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다. 3·1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군사적 배경 하에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식민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고 표명했다.
 
 
  불법·부당론 vs 합법·부당론
 
  우리 정부의 식민 통치에 관한 역사 인식이 한마디로 불법·부당론이라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당시에는 합법·합당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역사 인식은 전향적으로 변화하여, 식민 통치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도 합법·합당론에서 합법·부당론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병합이 합법적인 조약에 의한 것이었더라도 그것은 부당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조선인이 다대한 피해와 손실을 입었으므로 ‘도의적인’ 차원에서 사죄와 반성의 뜻은 표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전후사(戰後史)에서 가장 적극적인 사죄론을 펼친 호소카와 총리, 무라야마 총리조차도 병합조약의 불법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불법·부당하기 때문에 조약 자체가 원천무효라는 한국의 인식과는 여전히 괴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역사 인식의 문제도 있지만, 일본 정부가 1910년 한국병합조약의 불법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경우 국제법적으로는 배상 책임론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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