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당시 시위대들은 ‘김일성은 오판 마라, 반공전선 이상 없다’는 구호 외쳐
⊙ 윤석열 대통령, 5·18을 ‘민주화운동’ 아닌 ‘자유민주’라고 명시하여 유사(類似) 민주주의 배격
⊙ 586세대, 5·18을 ‘친북, 민중민주, 반미’로 둔갑시키면서 新조선 시대의 사대부 되어버려
⊙ 보수정당, 5·18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서 대통령 후보도 제힘으로 낼 수 없는 불임(不姙)정당 돼
⊙ 전두환 정권이 사회·경제 자유화하고 선진국 진입 기반 만든 후 직선제 한 것 인정해야
李東昱
1960년생. 서강대 물리학과 졸업, 同공공정책대학원 정치학 석사 / 《월간조선》 기자, 한국갤럽 전문위원 역임. 現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프리랜서 기자
⊙ 윤석열 대통령, 5·18을 ‘민주화운동’ 아닌 ‘자유민주’라고 명시하여 유사(類似) 민주주의 배격
⊙ 586세대, 5·18을 ‘친북, 민중민주, 반미’로 둔갑시키면서 新조선 시대의 사대부 되어버려
⊙ 보수정당, 5·18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서 대통령 후보도 제힘으로 낼 수 없는 불임(不姙)정당 돼
⊙ 전두환 정권이 사회·경제 자유화하고 선진국 진입 기반 만든 후 직선제 한 것 인정해야
李東昱
1960년생. 서강대 물리학과 졸업, 同공공정책대학원 정치학 석사 / 《월간조선》 기자, 한국갤럽 전문위원 역임. 現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프리랜서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은 금년 5·18 추도사에서 “광주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지켜낸 역사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는 5·18과 관련해 지금까지 500여 편이 넘는 학술논문이 발표되었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들어오는 게 없다. 500 대(對) 0이라는 정보의 불균형은 대한민국호(號)에 승선 중인 한국 지식사회의 불균형이 극심하다는 위험신호이다. 건국 75주년의 8·15를 맞아 대한민국호의 지식사회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는 5·18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무관심과 과잉집착이 빚은 두 개의 질문
한 지역에서 9박 10일 동안 민간인 166명, 군경 27명이 사망하고 사건 관련자 2699명이 연행, 구금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며, 부상자 2507명 중 113명이 부상으로 인해 사망한 정치적 재난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43년이 지나는 동안 국가의 한 축을 담당해온 진영(陣營)이 이 사건에 대해 일괄 외면해왔다면, 그리고 반대 진영만 유독 이 사건에 대해 과몰입(過沒入)해왔다면 우리는 먼저 두 가지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질문 - 당대사의 비극을 외면해온 진영이 국민을 통합하고 결속시키며 권력을 유지할 집권 능력을 배양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질문 - 견제조차 받지 않은 반대 진영이 이 사건에만 과몰입했다면 과연 그 진영은 진실의 보편성과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오늘의 대통령이 이야기해주고 있다. 국민의힘(국힘) 후보로 당선된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은 국힘에서 성장하고 배출된 정치인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에서 당선된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에 의해 검찰총장까지 승진했던 인물이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알다시피 문재인 전 대통령과 민주당 인물들의 ‘도를 넘은 정치행위’에 맞서 ‘이건 아니다’라며 반기를 들면서 시작된 개인적 정치투쟁의 결과일 뿐이다. 국민의힘은 운이 좋아 그를 후보로 맞이했고 결과적으로 여당이 되었다. 운도 실력이라고 한다면 몰라도.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윤석열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다’라는 선언을 여당에서 뜨악해하며 마지못해 따라가는 현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86 정치인들의 출발점
국민의힘은 오랫동안 5·18에 대해 의도적으로 외면해온 정당이다. 심지어 자유한국당 시절이던 지난 2018년에는 5·18 북한군 개입설을 신봉하던 세 명의 의원(김진태, 이종명, 김순례)에 의해 5·18 진상규명특별법에 ‘북한군 개입설’을 삽입하여 조사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조사위원회가 발족하고 3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조사 결과에 대한 문의나 의견 제시조차 하지 않았다. 우연히 동석했을 때 해당 사안을 설명하면 마지못해 들어주는 식이었다.
어째서 국민의힘은 5·18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대통령 후보도 제힘으로 낼 수 없는 불임(不姙)정당이 되었을까. 5·18의 후유증과 관계가 있다. 한국 현대사는 지난 1980년 이후 현재까지의 거의 모든 정치적 상황이 5·18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5·18을 외면한 채 미래를 밝히며 국민을 선도하고 국가를 통치하겠다고?
두 번째 질문의 답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도를 넘은 정치행위’란 다양성을 덕목으로 삼는 자유민주체제의 한계를 넘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즉 ‘진실의 보편성’을 유지할 수 없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1980년 5·18 이후 관련자들이 죄다 잡혀가 있는 동안, 저항의 세계(운동권)에서는 주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4·19 정신을 이어받아 독재에 저항하던 ‘자유주의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민중민주주의자’들로부터 ‘감상적 부르주아 운동’이란 비판을 받으며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5·18은 새롭게 덧칠되기 시작했다. 비극을 이용한 욕망의 분투가 오늘날 586 정치인들의 출발점이었다.
5·18의 진짜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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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5월 23일 운동권 학생들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겠다며 서울 중구 을지로1가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다. 사진=조선DB |
▲매일같이 시위대들은 ‘김일성은 오판 마라, 반공전선 이상 없다’는 구호를 외쳤다. 영웅심에 도취되어 시위 군중을 울분의 화신이 되도록 극렬 선동하던 여성을 간첩으로 여기고 계엄군들에게 끌고 가 인계한 사람들도 시위대였다.
▲시위대들은 군부(軍部)정치를 거부한 것이었지 대한민국 헌정(憲政)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외친 민주화는 자유민주였지 인민민주나 민중민주가 아니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武力)진압이 실시될 때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무장 시위대들은 북한군이나 소련군의 개입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부산항에 입항(入港)할 미(美) 해군 엔터프라이즈호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목격자들과 증언자들의 기록으로 확연하게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의 진상은 1980년 말 캠퍼스에서부터 뒤집혔다. 친북(親北) 민중민주 세력들은 ‘자유주의자들의 감상적 부르주아 사상’에 입각한 저항이어서 실패했다고 주도 세력들을 통렬히 비판하며 운동권의 헤게모니를 거머쥐었다. 이들은 ‘5·18의 핏값을 대신 받아주겠노라’며 거의 매년 곳곳의 미 문화원 방화(放火) 사건을 주도했다. 광미방(광주미국문화원방화사건), 부미방(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 서미점(서울미국문화원점거사건), 대미방(대구미국문화원방화사건)….
배경을 모르는 국민들은 ‘도대체 광주 5·18과 미 문화원 불태우기는 무슨 관계냐?’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일련의 사태가 연속되면서 캠퍼스의 반미(反美) 물결은 상식으로 확산되었다.
사회운동이란 사회의 체질 변화를 위한 조직적·집단적·지속적 행위를 말한다. 5·18 이후 캠퍼스를 장악해 1980년대 운동권의 시대를 활짝 열었던 세력들의 사회운동은 노골적인 친북운동이었다. 지식사회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반일·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사회구성체 이론’ 등 계급이론을 통해 5·18을 새롭게 덧칠했다. 그 시절 대학가에 보급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중공(中共)의 마오쩌둥(毛澤東)과 문화대혁명을 극찬한 리영희 교수의 《8억인과의 대화》 같은 책들은,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니고 1990년대에 30대가 되었던 ‘386 세대’ ‘주사파(主思派)’ 등을 탄생시켰다. 그들이 오늘날의 586들이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자 이들 중 일부는 학원 강사로, 일부는 NGO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우리 사회에 안착했다. 시위의 선두주자들은 국회로 입성했고 대개는 보좌관의 길을 걸었지만 일부는 배지를 다는 데 성공하여 신(新)조선 시대의 사대부(士大夫)로서 삶을 누리는 중이다. 5·18은 바로 그런 이들에 의해 ‘친북, 민중민주, 반미’로 둔갑한 채 오늘날까지 거리를 횡행하는 중이다.
4·19와 5·18
여기엔 우파 지식사회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이들은 애당초 제5공화국의 권력자들과 보조를 맞추며 5·18의 본질이었던 ‘반공, 자유민주, 친미’의 에토스를 외면하고 진압군의 시각에 편승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오늘날까지도 당시 계엄군 지휘부의 5·18 시위대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공유한다. 5·18은 ‘불량배와 불순분자들에 의한 폭동’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일반 시민이 어떻게 무기고를 털고 계엄군에게 총질을 하는가. 이게 어떻게 민주화운동이냐’라는 반문투의 문장을 증거처럼 사용한다.
하지만 ‘무장항쟁을 했으므로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타당하려면 5·18보다 그 20년 전인 1960년 4·19 의거는 어찌할 것인가. 당시 시위대는 거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곳곳의 경찰서 무기고들이 털렸다. 마산은 물론이고 서울의 동대문과 심지어 의정부에서도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5·18보다 더 많은 18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었다. 심지어 1960년 4월 11일에는 마산 시위대들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을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0년 4월 13일 자). 이런 사건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마무리하고 왔던가.
당시 4·19 의거의 주도 세력과 보조를 맞춘 박정희(朴正熙) 군부는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이들의 공적을 ‘조사도 없이’ 치하하고, 선양했다. 3·15 마산의거기념탑(1962년 9월 20일), 우이동 4·19 의거 기념탑(1963년 9월 20일)을 세우고 묘지도 조성했다. 이렇게 3·15 국립민주묘지와 4·19 국립민주묘지가 되었다.
오늘의 보수 진영은 ‘왜 경찰서 무기고를 털고 경찰관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죽은 자들을 국가는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추념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답변을 못 한다. 군색하다 느껴지면 한 걸음 더 나아가 ‘4·19를 헌법 전문(前文)에 넣는 것도 반대한다’면서 버틴다.
원래 자유민주체제는 지도자 선출을 일정 연령대 이상 (보통)국민들 (평등)모두의 의사를 (비밀)투표로 물어 (직접)선출하는 제도를 특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제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부정이 개입하여 국민의 의사에 반할 경우, 자유민주체제는 국민들의 봉기로 이를 바로잡아 왔다. 이것이 자유민주체제의 역사이기도 하다.
1961년 5·16 역시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뭉친 육사(陸士) 8기생들의 무력이 강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었다.
유신 말에서 5·18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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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본질적으로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사진=조선DB |
국가가 배라면 선장이 지휘하는 조타실의 선장, 항해사, 기관사 모두가 유고(有故)가 돼버린 황당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사태를 정리하려면 의회의 실력자들이 나서야 했다. 3김씨는 아쉽게도 자신들만의 계산으로 대응했다. 대한민국호가 미증유(未曾有)의 해역으로 정처 없이 휩쓸려 들어가던 중이었다.
광주의 5·18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었다. 1979년부터 여러 저항 세력의 항쟁 조짐이 일어나던 중이었다. 1979년 8월의 YH 여공 투신 사건, 이어서 김영삼(金泳三) 총재의 제명, 그리고 부마(釜馬)사태가 이어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5·18이 터진 것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저변에서 ‘반공, 자유민주, 친미’의 기조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광주의 시위 군중도 이런 기조하에서 시위에 참여했음이 조사 결과 드러나고 있다. 필자가 만나본 무장 시위대들의 면면은 고학력자가 매우 드물고 기층민중 출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계엄군의 강경한 진압에 맞서 총을 들었을 뿐이었고, 계엄군으로부터 광주를 지키겠다는 일념이 전부였다.
‘서로 다른 정당성을 가진 두 집단 간의 충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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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2월 2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5·18 망언 국회의원’ 규탄 집회와 ‘5·18 유공자 공개 요구’ 집회가 동시에 열려 5·18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을 보여주었다. 사진=조선DB |
만약,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이 순순히 연행에 응했으며 총격전이나 심각한 대립 없이 법절차에 순응했더라면 과연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휘하의 세력들이 권력을 넘볼 기회나 잡을 수 있었을까?
권력욕의 화신으로, 광주 학살의 살인마로 기록된 신군부의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역대 경제성장률 최고의 시대를 열어젖히고 학도호국단을 폐지한 뒤 총학생회장 직선제를 도입했고, 통행금지를 해금시키며 해외여행 자유화를 열어 대한민국을 자유의 시대로 진입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한강의 기적’으로 대한민국이 중진국에 진입했다고 하지만, 대개는 ‘자고 일어나 보니 우리가 선진국 문턱에 와 있었다’고들 한다. 그 ‘자고 일어난’ 시기가 바로 5공화국의 1980년대임을 우리는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처럼 시위대와 진압군에게는 어떤 사욕(私慾)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했으며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려던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5·18을 거치며 진압군 측이 권력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그 후 시위대의 주장대로 198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권을 국민에게 돌려주었다. 5·18 사건 자체가 ‘서로 다른 정당성을 가진 두 집단 간의 충돌 사건’이었음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5·18은 어느 한 진영의 시각만으로는 절대 해석이 안 되는 사건이다. 우리가 흔하게 만나는 종이컵으로 비유해보자. 종이컵을 옆에서 보면 사다리 꼴
이지만, 위에서 내려다 보면 ● 원이다. 그래 놓고 서로 니가 옳네, 내가 옳네 하고 싸운다는 것은 부질없지 않은가. 종이컵의 실제는 양면을 살펴 통합된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때 비로소 확인된다. 마치 이런 그림 처럼. 
3개소의 국립민주묘지
대한민국이 성장하는 가운데 3·15와 4·19를 안고 가야 했듯이, 5·18도 안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는 현재 3개소의 국립민주묘지가 존재한다. 3·15, 4·19 그리고 5·18 국립민주묘지가 그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분들의 희생에 살아남은 우리가 무임승차하여 구가하는 중이다.
우리보다 200여 년 앞서 개방하고 근대화를 먼저 했던 일본도 자유민주주의라는 외피(外皮)를 쓰고는 있지만 그네는 단 한 번도 국민적 자발성에 의해 국가 정체(政體)를 만들고 지킨 바가 없다. 승전국 사령관 맥아더에 의해 주어진 천황제의 자유민주주의인 것이다. 매뉴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발성이 없는 자유민주주의란 얼마나 모순되는 말인지를 이제는 우리가 알 때가 되었다. 비록 우리가 조선이라는 이상한 시대에 518년간 감금된 바람에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그들보다 뒤늦게 근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오늘날엔 우리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우리 힘으로 발전시켜가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흔적이 3개소의 국립민주묘지이다.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그리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숭고한 민주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이제는 제대로 기억해야 하지 않겠나.
대선 공약으로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싣겠다고 내건 윤석열 대통령은 필자와 동시대를 캠퍼스에서 대학생으로 보냈다. 덕분에 그는 5·18을 직시해왔으며 선동에 오염된 바 없이 자유의지를 나침반 삼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5·18을 단순히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라고 명시하여 유사(類似) 민주주의를 배격하고 있었다. 평생을 나라 살리기에 헌신했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그토록 염원하며 세운 자유민주국가의 정체성을 이제야 재확립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난 듯 보인다. 그런 윤 대통령의 정치사상을 과연 국힘 의원들이 제대로 이해하며 지원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反지성주의
오늘날까지 43년간 우리 사회는 5·18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을 고수한 채 마주 앉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지난 3년간 5·18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서 서로 다른 시각들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었다.
‘김대중(金大中)은 간첩이며 빨갱이’라는 시각이 현실을 ● 이런 모양으로 인식하고 있는 쪽이라면, ‘전두환은 살인마이자 내란범(內亂犯)’이란 시각은 현실을
이런 모습으로 곡해(曲解)하고 있는 쪽이다.현실을 ● 이런 모습으로 인식하는 쪽은 5·18을 북한군이 들어와 일으킨 내란이며 그들은 소리소문도 없이 북으로 올라간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원들이라 주장한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조사해보니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왜곡하고 날조해서 유포시켜왔다. 무려 20년도 넘게.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다. 그동안 언론을 포함한 지식사회는 이런 만행에 대한 검증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필자는 그 이유를 안다.
이미 종교단체처럼 컬트화된 집단이 되어버린 ● 쪽 진영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조사하고 반박하면 곧장 고소·고발로 응수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 3년여간 필자는 북한군 침투 여부 조사에 매달리며 직접 검증을 다 해봤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代價)는 서울지검, 서울고검, 감사원, 중부경찰서, 그리고 종로경찰서를 통한 고소 고발이었다. 필자는 무려 다섯 차례나 불려가 일일이 해명을 해야 했다.
다섯 건 모두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위원회 건물 앞에서 두 차례나 얼추 보름 가까이 시위 집회를 하며 필자의 사진을 걸어두고 인격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가 필자를 언급하면 “영혼을 팔았다”느니, “좌파로 변절했다”느니 별별 음해(陰害)가 화살이 되어 필자의 등에 꽂히곤 했다.
물론 현실을
모습으로 보는 진영 역시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너그럽지 못했다. 90을 바라보는 치매 노인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자(死者)명예훼손으로 걸어 광주의 법정에 세웠고, 욕을 보였다.‘친북 전체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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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은 금년 5·18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방명록에 “오월의 정신 아래 우리는 하나입니다”라고 적었다. 사진=대통령실 |
이런 모습이었다.그들의 주장이 옳았다면 어째서 ‘살인마 전두환’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질이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어째서 43년 전보다 북한은 더 황폐해지고 대한민국은 나날이 글로벌의 미래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뱅가드(Vanguard·전위)의 다른 말이 ‘진보’일 텐데, 지난 40여 년간 계급론에 입각해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부정해온 진보 진영은 대한민국의 무엇을 진보시켰는지 설명해야 한다. 아울러 그 세월 동안 5·18의 정신을 ‘반공, 자유민주, 친미’에서 ‘친북, 민중민주, 반미’로 둔갑시킨 이유도 설명해야 한다. 음습한 지하실에 모여 앉아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무릎 꿇고 암송하며 성장한 이들을 그냥 586으로 불러야 할까. 필자는 이들이야말로 ‘친북 전체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건국 75년이 되는 동안 우리는 무수한 체험을 통해 많이 알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란 당연히 반공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체제 전복의 의도가 아니라면 관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물론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양쪽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5·18과 관련해 필자나 진상조사위원회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측면들이나, 그런 정치적 격변기에 발생할 수 있는 파생적인 사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43년이나 지난 사건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가능하도록 진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시대적 소명이기 때문이다.
양 극단 세력에 의해 5·18을 방치해온 결과는 심화된 분열과 갈등뿐이다. 게다가 지역감정과 지역혐오는 날이 갈수록 깊어가는데, 어떻게 이대로 5·18을 외면한 채 후대에게 남북통일의 과업을 어찌 물려줄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세대는 단군 이래 가장 유복하게 살고 있는 세대임에도 국민을 결속할 역사 하나 제대로 정리 못 한 채 후대에게 넘겨주는 무책임한 세대라는 비난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건국 75주년을 맞아 8·15를 뒤집은 5·18을 올바로 재정립하기를 바라면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