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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추적

정보 당국 관계자가 증언한 北 김정남 암살의 내막

정부는 은밀히 김정남을 관리하고 있었다!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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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택 신상 문제 등 북한 관련 고급 정보 김정남 통해 수집 증언
‌⊙ 김정남 관리 ‘긍정도 부정도 않는’ 노무현·MB 정부 정보 당국 핵심 관계자들
‌⊙ ‘제3루트 통해 김정남에게 전달했다’는 국정원 보고가 갖는 묘한 뉘앙스
‌⊙ 20여 년 가까이 파악해 온 김정남 관련 정보들… 2007~2008년엔 손금 보듯 알았다
‌⊙ “우리 정부와 김정남,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 맺었다”
⊙ 김정남이 망명 결행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 김정남 암살 시기는 ‘탄핵 정국’ 한창일 때… “국내 혼란 틈탔을 가능성 있다”
  정보 당국에서 오래 근무한 한 인사로부터 2017년 암살당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관리를 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동안 설(說)로만 떠돌던 한국 정부의 ‘김정남 관리(管理)’가 정부 당국자 출신의 입에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국자 A씨는 “김정남은 꽤나 오랜 시간 우리 정보 당국과 선(線)이 닿아 있었다”며 “우리 당국과 접촉한 김정남은 장성택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고, 그에 따른 금전적 대가(代價)도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를 비롯한 이명박(MB)·박근혜 정부에 몸담았던 인사들 중 극소수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해 김정남과의 ‘커넥션’이 꽤나 오래 지속돼 왔음을 시사했다.
 
 
  노무현·MB 정부 관계자는 ‘긍정도 부정도 안 해’
 
  기자는 이러한 관계를 알 만한 전직 고위 정부 당국자 두 명에게 A씨의 증언이 사실인지 확인해 봤다. 이들은 “재직 중 취득한 정보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전면적으로 부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 고위 당국자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긍정도 부정도 않는)가 지금으로선 가장 정확한 대답”이라고 했다. MB 정부 관계자도 “그 같은 사안은 극비임으로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사실 여부는 충분히 알 테니 알아서 판단하라”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러한 정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는 2017년 2월 13일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된 직후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보인 반응이다. 2월 27일 김정남 암살과 관련해 국회 정보위원회가 소집됐다. 당시 정보위원들이 ‘왜 김정남을 보호하지 못했냐’고 추궁하자 국정원 측은 ‘지난해(2016년) 하반기 (북측에서) 신변을 노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제3루트를 통해 김정남에게 전달했다’는 취지의 보고를 했다. 이는 우리 정보 당국이 불과 몇 달 전까지도 김정남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 시사주간지의 보도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 《뉴스트레이츠타임스》에 실린 김정남의 피습 직후의 모습. 신경성 독성물질인 ‘VX’에 의해 온몸이 축 늘어진 상태다. 사진=조선DB
  김정남 암살 직후, 한 시사주간지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했다. 《주간경향》(2017년 2월 21일 자)은 ‘유럽코리아재단’(이하 재단)과 김정남-장성택 커넥션에 대해 다루면서 재단 이사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친서(親書)를 김정일에게 전달하는 경로로 김정남과 장성택 라인을 이용했다고 전했다. 매체는 재단과 김정남이 2005년 9월 17일부터 2006년 3월 31일까지, 총 22차례 주고받은 메일 내용도 공개했다. 재단의 이러한 대북 접촉은 국정원은 물론 미국 CIA까지 감지하고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매체는 익명의 대북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한국 국정원이 김정남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정작 김정남은 한국보다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지는 내용이다.
 
  〈“유럽은 대북 정보에 목말라 하지 않았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김정남이 김정일의 아들인 것은 맞지만 다른 고위급 인사들보다 정보가치는 크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며 “특별한 대우를 원했던 김정남과 미국 측의 협상이 결렬됐고, 한국의 경우도 김정남이 요구하는 것과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의 갭(gap)이 워낙 커서 결국 그 정도까지 비용을 지불하면서 데려오는 것은 막판에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매체는 또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 사이의 지지율이 거의 비슷해지자, 막판 역전카드로 ‘NLL 대화록 공개’를 검토하는 한편, 말레이시아에 체류하고 있던 김정남을 한국으로 망명시키거나 인터뷰해 NLL과 관련한 불리한 발언을 이끌어내 참여정부 인사인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려 했다”고도 했다. 이는 다분히 국내 정치 상황과 결부시킨 해석이긴 하다. 하지만 기사 전반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 당국이 김정남과의 ‘접촉’은 물론 ‘망명’에까지 관여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장성택 관련 정보도 포착한 국정원
 
2017년 2월 15일 이병호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김정남 암살 관련 회의를 앞두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정남은 2005년 12월 1일 재단 측에 보낸 메일에서 “명년 2월 23일이 고모부 회갑이다. 한복을 지어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모부는 2013년 12월 처형된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다. 장성택의 회갑을 맞아 한국에서 한복을 지어 북으로 전달하고 싶다는 요청이다.
 
  재단 측은 이에 대해 “옷감, 재질, 체형 등 구체적 수치가 필요하다”며 치수 재는 법 등의 설명이 들어 있는 그림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가격대는 전북 전주에서 옷을 잘 짓는 집의 최고급 가격이 미화 2400달러이며, 서울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부탁할 경우 5000달러 이상은 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황상 이 정보 역시 국정원이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정남이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장성택의 정보까지도 김정남을 통해 우리 정보 당국으로 넘어간 셈이다.
 
 
  2007~2008년의 김정남 행적은 손금 보듯이…
 
  2007년 5월 김정남은 심혈관 장애를 앓는 부친 김정일을 위해 독일 의료진을 섭외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10월 말에는 프랑스의 뇌신경외과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를 찾기도 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2008년 12월호에서 이 같은 사실을 특종 보도한 사실이 있다. 이 두 행적 모두 우리 정보기관은 손금 보듯이 알고 있었다. 이미 후계 구도에서 탈락한 그가 아버지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적극적인 행보에 나선 것이다. 이때 ‘김정남이 다시 후계 구도 전면에 등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렇듯 그의 세세한 행적은 우리 정보기관 감시망에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수년간 ‘김정은’의 본명을 ‘김정운’으로 잘못 알고 있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김정남 관련 정보는 이처럼 다양하고 또 자세하게 올라왔음을 보여준다.
 
  우리 당국이 김정남을 예의주시한 역사는 꽤나 길다. 그 시작은 2001년 5월 1일 일본 나리타(成田)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라고 복수의 소식통은 입을 모은다. 당시 세계 언론은 김정남이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체포되자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정남은 북한의 ‘황태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아버지 김정일의 눈 밖에 난 김정남은 해외를 떠돌며 야인 생활을 전전한다.
 
  국정원 등 국내 정보기관은 그런 김정남에게 관심을 보였다. 경찰 계통에서 대북 정보 업무를 다룬 B씨는 “정보기관이라면 해외를 떠도는 ‘독재자의 아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정남이 갖고 있는 지위와 상징성, 그리고 그가 갖고 있는 정보에 군침을 흘리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이때부터 정보 당국은 김정남의 동선(動線)을 본격적으로 추적했다고 한다. 국내 정보기관은 이 과정에서 김정남의 이메일을 ‘해킹’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김정남은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아버지 김정일에게 이메일로 자신의 근황을 알린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남이 장성택의 한복을 맞추기 위해 문의한 것도 이즈음이다. 정보기관은 김정남이 서울의 한 약국에서 약을 구매했던 사실도 파악했다고 한다. 심지어 김정남이 해외여행을 갔을 때, 숙소에까지 잠입하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국정원 등 정보기관은 김정남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포착하고 있었다. 김정남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함으로써 그에게 좀 더 밀착하려는 계기로 이용했을 것이란 짐작을 가능케 한다.
 
 
  “김정남 접촉, 상대적으로 용이했을 것으로 짐작”
 
김승규 국정원장(가운데)은 2005년 김정남이 ‘북한의 후계 구도에서 탈락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정은이 후계자가 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진=뉴시스
  시점을 추산해 보면, 김정남에 대한 정보기관의 ‘뒷조사’는 김대중 정부 말기에 시작돼 노무현 정부 때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인 2003~2006년까지가 김정남에 대한 첩보 활동이 두드러졌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 국정원은 그동안 면밀히 파악해 온 김정남에 관한 정보와 북한 내부 정보를 토대로, 후계자가 김정남이 아닌 삼남(三男) 김정운(초반엔 ‘김정은’이 ‘김정운’으로 잘못 알려짐)일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북한 후계 구도에 관한 정보는 자주 청와대에 보고됐다. 2005년 김승규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에서 “김정남이 후계 구도에서 탈락했다”고 밝혀 김정남 후계 구도 배제는 공식화됐다. 당시로선 놀라운 정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전문가 C씨(전 국회의원)는 이런 추정을 내놨다.
 
  “김정남이 후계자가 아니라는 판단은 단순히 주변 정보만을 취합해 내린 게 아닐 것입니다. 그 같은 판단의 배경엔 해외를 떠돌고 있던 김정남과의 접촉이 있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자유분방하게 해외 이곳저곳을 다니던 김정남은 (우리 당국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접촉이 용이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C씨는 “청와대에 보고되는 이른바 ‘특상(特上) 보고서’는 언저리만을 훑어 작성하는 보고서가 아니다”는 점도 강조했다. 공교롭게도 김정남의 ‘후계 구도 탈락’이 공식화된 2005년은 앞서 말한 ‘유럽코리안재단’이 김정남과 활발한 접촉을 벌이던 시기와 일치한다. C씨의 분석을 덧붙여 해석한다면 국정원은 2003~2005년 사이 김정남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시점이라 우리 정보기관의 접촉 대상에선 제외된다. 우리 정보 당국은 김정남의 성향, 김정일과의 관계, 북한 내부 동정(動靜)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 김정남이 후계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김정남의 접촉선은 비단 우리 정보 당국만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가 김정남을 관리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이 북한 내 ‘김정남 인맥’을 활용, 자국(自國)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김정남의 대(對) 일본 창구는 특이하게도 정부가 아닌 고미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 기자였다. 고미요지 씨는 김정남과 가장 오래,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유일한 언론인이다. 이를 근거로 중국, 일본과 선(線)이 닿을 만큼 보폭이 넓었던 그가 국내 정보기관과 손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고미요지 씨가 김정남에게 최초로 접근했던 시점은 2004년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 정보 당국이 김정남 ‘뒷조사’에 가장 분주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당시 《도쿄신문》 베이징 특파원이었던 고미요지 씨는 공항에서 김정남과 마주쳤고, 그는 김정남에게 명함을 건넸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3일 김정남은 고미요지 씨에게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지난 9월 15일 베이징 공항에서 만나 기뻤습니다”라고 메일을 보냈다. 이 이메일을 바탕으로 고미요지 씨는 기사를 작성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와 관련해 재일(在日) 대북 전문가 D씨는 “김정남이 북한의 적성국과 다를 바 없는 일본의, 그것도 기자와 접촉한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고 분석했다. 서먹할 수밖에 없는 일본에 손짓을 한 김정남이 한국 정부와 커넥션을 못 가질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D씨의 말이다.
 
 
  우리 정부와 김정남,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
 
2014년 5월 20일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의 한 식당에 등장한 김정남.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뉴시스
  “물론 김정남이 ‘남조선과도 맞닿아 있다’고 드러내진 않았을 거예요. 저는 김정남이 분명히 한·중·일 세 나라에 어떤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다고 봅니다. 그중 접근 통로가 가장 많고 쉬운 건 한국이었을 테지만, 김정남은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겁니다. 그나마 우리 정보기관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김정남이 처한 입지를 고려했을 때, 당연히 자신의 뒤를 봐줄 수 있는…. 그건 한국 정보기관밖엔 없었을 겁니다.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라고 할까요. 그 뒤에 있는 미국도 고려했겠죠.”
 
  한국과 미국이 가지는 무게감은 김정남에게 남달랐을 것이다. 이미 김정남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낭인(浪人)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독재국가에서 권력투쟁의 패배자가 흔히 처하는 상황이다. 최고 권력을 쟁취한 이복동생 김정은이 김정남을 그대로 놔둘 리 만무하다.
 
  실제로 김정남은 생전 김정은에게 자신과 가족을 해치지 말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었다. 김정남은 편지에서 “자신과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해 주기 바란다”면서 “자신들은 갈 곳도 피할 곳도 없고, 도망가는 길은 자살밖에 없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당시 정보기관 고위 관계자는 “국회 정보위에서 보고된 김정남의 편지는 군 정보 당국이 입수해 현재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편지는 우리 정보 당국이 확보한 것으로 그가 암살된 지 약 열흘 후에 공개됐다. 김정남의 서신까지 포착한 것도 놀랍지만, 그가 이복동생에게 ‘읍소’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은 그만큼 김정남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권력투쟁에서 패한 김정남, 세 번의 암살 위기 직면
 
  김정남은 생전에 총 세 번의 암살 위협에 직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첫 위기는 2004년 10월에 찾아왔다. 당시 20세의 김정은은 오스트리아의 이종사촌 누이 김옥순을 방문하고 있던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당신을 암살하려는 북한인의 계획을 파악했다”는 오스트리아 당국의 통보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09년 4월 김정은은 김정남이 비밀 파티를 열어왔던 평양시 중구역 ‘우암각’으로 들이닥쳐 회합(會合) 중이던 그의 측근들을 잡아갔다. 우암각은 납북됐던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평양에 살면서 머물던 고급 주택이다. 당시 평양의 김정남 측근은 김정남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김정남은 “개××, 어린놈이 나를 죽이려 해”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해외 떠돌이 처지의 김정남은 권력 중심부에 있던 동생을 당해낼 수 없었다. 급기야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정남은 마카오에서 싱가포르로 피신했다.
 
  세 번째는 2010년 6월 하순이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해외반탐처 공작원 김영수에게 ‘김정남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사실은 2012년 9월 12일 김씨가 탈북자로 위장해 대한민국에 잠입했다가 구속되면서 알려졌다.
 
  김씨는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2010년 6월 하순 보위부 중국 담당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보위부로부터 김정남 테러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받고, 한족(漢族) 택시기사를 매수한 다음 교통사고로 가장(假裝)해 김정남을 살해한 뒤 북한으로 이송한다는 계획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남 암살 실패와 관련해 “중국에 입국하지 않아 실행하지 못했다”고 했다. 김영수가 보위부로부터 김정남 암살 명령을 받은 2010년 6월은 김정일이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2010년 9월)하면서 3대 세습을 공식화하기 직전이다.
 
  이러한 김정은의 끊임없는 김정남 암살 시도는, 김정남이 ‘동아줄’을 필요로 했다는 개연성을 갖게 만든다. 독재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김정남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방패막이’로 한미(韓美) 양국을 염두에 뒀을 수 있다는 얘기다.
 
 
  김정남이 망명을 결행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김정남은 고(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과정을 지켜봤다고 한다. 김정남은 자신이 망명할 경우, 황장엽 전 비서처럼 국내 친북좌파세력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걱정했다고 한다. 사진=뉴시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신변의 위협을 여러 차례 느낀 김정남은 왜 망명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앞서 《주간경향》의 보도처럼 2012년 우리 당국은 김정남에게 한국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했었다. 그 1년 전 김정일의 죽음으로 김정은의 권력이 공고해진 상태였고, 세 번의 암살 시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러나 김정남은 “가족들도 있고 해서 힘들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탈북자 단체인 ‘국제탈북민연대’의 김주일 사무총장은 지난해 2월 23일 ‘미국의소리(VOA)’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정남에게 세 차례 망명정부 수립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김주일 총장이 밝힌 김정남의 반응이다.
 
  “첫 번째 접촉했을 때는 노코멘트를 했고, 두 번째 접촉했을 때는 자기는 북한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약간의 반응을 보였고, 세 번째 접촉했을 때는 나는 진짜 북한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 그렇지만 북한의 개혁개방을 원한다,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자기는 원치 않는다, 이런 식의 구체적인 입장을 보여오다가 이번에 난리(암살-기자 주)가 난 거죠.”
 
  국정원과 탈북자 단체의 요청을 거절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C씨의 말이다.
 
  “김정남은 고(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전(全) 과정을 유심히 관찰했다고 합니다. 황장엽 전 비서가 남한에 와 소위 친북좌파세력에 시달리는 걸 봤을 테지요. 이른바 ‘백두혈통’도 아닌 황 전 비서가 생전에 그 정도로 심각하게 공격을 받았는데, 자신이 남한으로 갈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겁니다.”
 
  C씨는 “결국 가족 문제, 망명 후 겪어야 할 고충들을 다각도로 고민해 망명 대신 계속 해외에 체류하겠다는 결정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과 미국,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폭넓은 신변보장 협조를 얻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고 C씨는 분석했다.
 
 
  ‘탄핵 정국’이란 혼란 틈타 김정남 암살했을 가능성
 
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김정남 암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시위의 한 장면. 사진=조선DB
  C씨는 또 “김정남이 암살당했을 시기의 남한 정세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며 당시의 상황에 주목했다. 김정남이 암살됐을 때는 이른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였다. 김정남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던 국정원도 일종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C씨는 사견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알려진 대로 박근혜 정부의 이병호 국정원장(현재 구속 수감 중)은 북한 정권 붕괴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김정은 턱밑까지 공작(工作)의 성과가 나타났을 때지요. 그러나 국내 정세가 워낙 험하게 돌아가는 터라 김정남 관리에 소홀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외 파트가 지속적으로 동향 파악을 했겠지만, 정권이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중차대한 기로(岐路)에서 우선순위는 역시 국내 정세였을 겁니다. 그런 공백을 북한이 치고 들어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촛불 정국’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한국은 물론, 미국까지 따돌리고 줄곧 실패해 왔던 ‘김정남 암살’을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동안 김정남이 보인 북한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의미없는 ‘역사의 가정’이지만…
 
  이상의 내용들은 그동안 김정남이 보여준 행적의 퍼즐들을 정보 당국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추적·검증한 것이다. 좀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국가정보원에 관련 내용을 공식 문의했다. ▲우리 정부 당국이 김정남을 관리한 게 사실인지 ▲어느 선까지 김정남을 지원했는지 등이 질문의 요지였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기사 마감일(10월 15일)까지 답변이 없었다.
 
  취재 과정에서 김정남을 둘러싼 남북한 간의 치열한 ‘정보 전쟁’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김정남이 한·미·일 세 나라 중 한 곳으로 전격적인 망명을 결행했다면 지금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에 하나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촛불’이 온 나라를 뒤덮지 않았다면 김정남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이른바 ‘백두혈통’의 진정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김정남이 고발하는 북한 ‘김정은 체제’의 만행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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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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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    (2018-10-29)     수정   삭제 찬성 : 1   반대 : 4
시초부터 김일성도 인정 ㅎ지 않은 사생아! 북한내에서 기낭 조용히 범부 처럼 살지 그렸으
  holypr    (2018-10-19)     수정   삭제 찬성 : 16   반대 : 16
비운의 왕세자... 영면하시고... 통일 한국의 대목으로 다시 태어나시길...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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