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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개편 회오리

바른정당 집단탈당 미스터리 김성태 의원에게 듣다

“망가진 둥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것도 ‘철새’인가”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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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에서 영입 제의 있었지만 거절했다”
⊙ “바른정당 만든 것은 좌파에 정권 넘겨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당시 새누리당은
    대권 후보조차 못낼 형편이었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담을 그릇이 바른정당 … 유승민은 페이스 메이커 역할이었다”
⊙ “유승민, 경선 때만 해도 보수 후보 단일화, 3자 단일화 찬성했지만 정작 후보 되자 입장 180도로
    변했다”
⊙ “재산이 50억이나 되지만 1원 한푼 안 쓰는 후보를 누가 돕겠나”
⊙ “홍준표 후보 만나고 탈당설 도는데도 유 후보는 전화 한 통 없었다”
⊙ “김무성 전 대표는 탈당 알았지만 손쓸 도리 없어 … ‘소쩍새’ 발언은 그런 답답한 심경을 비유한 것”
  제19대 대통령 선거전 막판, 바른정당 의원 12명의 집단탈당이 정가(政街)의 관심을 끌었다. 탈당 의원 전원은 과거 새누리당 소속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으며 이후 새로운 보수가치를 창출하겠다며 신당 창당에 나선 인물들이다. 정확히 탈당으로부터 100일 전 상황이었다.
 
  그들이 새누리당의 뒤를 이은 자유한국당에 복당(復黨)한 것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파렴치하다” “보수 통합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귀환’을 두고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통령 후보는 “다 받자”고 했지만 당권파들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은 왜 바른정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탈당파의 ‘보스’ 격인 김무성 의원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유승민 대선 후보는 어떤 스탠스를 취했을까. 《월간조선》은 탈당파 12명의 대표 격인 김성태(金聖泰·강서을) 의원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10일 오후 만나 단독 인터뷰했다.
 
  김성태 의원은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건설 근로자 출신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형 트럭을 몰았으며 이후 한국노총 상임 부위원장, 사무총장 등을 지낸 ‘노동계’ 출신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때 정계에 입문해, 야세(野勢)가 강한 서울 강서을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항상 비주류·소장파에 속했던 그는 박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에게 험구(險口)를 일삼았던 다른 바른정당 소속 몇몇 의원과 달리 그는 비교적 냉정하고 균형 있게 특위를 이끌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나 혼자 살겠다고 양지만 찾는 게 진짜 철새요 기회주의자”
 
지난 5월 2일 바른정당 의원 13명이 국회 기자 회견장에서 바른정당 탈당과 홍준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왼쪽부터 홍일표, 김학용, 박성중, 여상규, 박순자, 이군현, 홍문표(마이크 앞), 김재경, 김성태, 황영철, 이진복, 권성동, 장제원 의원.
  — 100일 만에 얻은 것이라고는 ‘철새’라는 낙인뿐입니다.
 
  “허허, 철새라면 철새죠.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새도 철샙니까?”
 
  — 그렇긴 하네요. 철새는 보통 여기저기 이익을 따라 옮겨다는 정치인을 이르는 말이니까요.
 
  “둥지도 그냥 둥지입니까? 처참하게 망가진 둥지잖아요. 새누리당이 없어진 후 생긴 자유한국당은 이번 대선(大選) 국면에서 후보조차 내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당(黨)이 궤멸 상황에 직면했던 게 불과 몇 달 전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망가진 당에 돌아오는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이익을 따라 여기저기 옮겼다면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겠지만요.”
 
  — 정가 소식통들에 따르면 민주당 일각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다던데.
 
  “국조특위를 진행하면서 몇몇 민주당 의원들이 ‘김성태는 다르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하더군요.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유혹도 있었고 영입 제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갈 곳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런 비유 하나 들어 볼까요?”
 
  — 어떤 비유입니까.
 
  “제 아버지가 아무리 힘 없고 병들었다고 해도 자식된 입장에서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나만 잘살겠다고, 나 혼자 살겠다고 양지(陽地)를 찾아갔다면 그게 더 철새요 기회주의 아닙니까? 저는 그런 심정으로 다시 복당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왜 애초에 탈당해 바른정당을 만들었습니까.
 
  “당시 새누리당은 침몰 직전이었습니다.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저를 비롯한 탈당파들은 난파(難破) 직전의 배에서 나만 살겠다고 우리만 살겠다고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저를 비롯해 바른정당을 만든 의원들은 대통령은 탄핵됐지만 정권만은 좌파들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새누리당을 나온 것입니다.”
 
 
  “반기문과 김무성 사이에 깊은 논의 있었다 … 바른정당은 반기문 위한 ‘그릇’
 
  — 이후의 상황이 애초의 결심과 다르게 진행됐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반기문(潘基文) 전 유엔 사무총장을 영입하려 했습니다. 바른정당은 그를 담을 ‘그릇’인 셈이었어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반 전 총장과도 상당히 깊은 이야기가 오고갔고요. 유승민 대선 후보도 그런 선상(線上)에서 반 전 총장의 대권 도전에 페이스 메이커 역할로 선의 경쟁을 하자, 그래서 유 후보도 그 과정에서 자기 체급(體級)을 올리면 좋지 않겠느냐는 데 동의했고요.”
 
  — 그런데 반기문 전 총장은 ‘유리턱’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검증 공세에 얼마 못 버티고 자진 퇴장했습니다.
 
  “반 전 총장 영입이 어그러진 상태에서 유승민 후보와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경선(競選)을 해 바른정당 대선 후보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문제가 생겼어요.”
 
  —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유승민 후보는 후보 경선 과정에서 보수 후보 단일화를 여러 번 약속했습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를 포함해 3자 단일화도 본인 입으로 밝힌 적이 많고요.”
 
  그러면서 김성태 의원은 ‘유승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유인물을 기자에게 건네줬다. A4용지 2장 분량인데 이것을 잠시 요약해 본다.
 
  유승민 후보는 “보수 궤멸의 위기에서 국민들이 마지막에 보수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2017년 2월 5일 바른정당 당사(黨舍)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 후보가 직접 한 말이다.
 
  유 후보는 또 “보수 후보 단일화 얘기를 이제는 중단하자”는 남경필 경기도 지사의 발언에 대해 “보수 단일화 입장을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유 후보는 한술 더 떠 “야당 대표가 되려는 게 목적이냐”는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끝까지 단일화를 안 하고 패배의 길을 가는 것이 야당이 되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후 유 후보가 보여준 행동과는 정반대의 말을, 유 후보는 불과 석달 전 했던 것이다.
 
  유 후보는 올해 3월 25일 열린 KBS토론회에서도 “범보수 안에서 명분 있는 단일화라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나마 대적할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유 후보의 말이 약간씩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단일화’에서 ‘명분 있는’이라는 조건이 첨가된 것이다.
 
  그랬던 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은 3월 28일 바른정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다음부터다. 유 후보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한국당, 국민의당과의 단일화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불과 사흘 전까지 후보 단일화를 역설하던 그는 변심(變心)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제가 단일화를 하려고 출마를 한 것이 아니다. 단일화는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거기(단일화)에 목을 매거나 그것만 쳐다볼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러한 유승민 후보의 입장 선회는 다른 바른정당 소속 의원들과의 갈등으로 확대됐다.
 
  4월 25일 의원총회에서 주호영 당 대표가 “좌파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3자 단일화를 포함한 모든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으며 유 후보는 그 과정을 지켜보기로 했다”고 말하자 유 후보는 “기존 입장과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 말에 의원들은 경악했다.
 
 
  “유승민 대권 후보 되자 변심”
 
  — 요약하자면 유승민 후보의 변심 때문에 탈당을 했다는 얘기네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렇죠. 안철수는 이래서 안 되고 홍준표는 저래서 안 된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게 뭘 뜻하겠어요. 단일화하기 싫다는 얘기지요.”
 
  — 참 이해하기 어렵네요.
 
  “기억 안 납니까? 국민의당에 대고는 박지원 의원이 북한 핵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지원해 준 장본인이라는 식으로 말했고 홍준표 후보에 대해서는 돼지 발정제 얘기를 하면서 ‘성범죄 모의자’라고 했잖아요. 그게 단일화하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입니까? 안 되는 조건만 내세우고 자신은 대선 레이스에서 완주(完走)하겠다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정치만 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유승민 후보를 좀 말리지 그러셨습니까.
 
  “말렸지요. 당 지지율이 안 나오니 정병국 의원이 당 대표에서 사임한 것이며 김무성 대표가 당의 외연(外延) 확대를 위해 3자 후보 단일화를 위한 노력을 했지만 전부 실패했습니다.”
 
  — 그게 탈당한 이유의 전부입니까.
 
  “굳이 말하자면 다른 이유도 있어요.”
 
  — 뭡니까, 그게.
 
  “유승민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자기 돈을 단 한 푼도 안 썼습니다. 국고(國庫)에서 지원한 63억을 자기 정치를 위해 다 써 버린 겁니다.”
 
  — 정말 1원도 자기 돈을 안 썼습니까. 재산이 상당하다고 하던데.
 
  “제가 탈당하기 전까지 유 후보가 특별당비를 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 부자(富者)들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유 후보는 공중전에 치중하면서 ‘이미지 정치’만 했습니다. 문제는 정치의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지요. 일선 현장을 뛰는 당협 위원장들은 말 그대로 맨몸으로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 지경이었어요. 유세차 한 대만 돌려도 공식 비용이 2000만원이 듭니다. 선거사무원까지 두게 되면 한 지역에서 최소 비용이 4000만~5000만원을 훌쩍 넘습니다. 가뜩이나 바른정당의 미래가 불확실한데 저조한 지지율을 예상하면서 그런 비용을 쓸 당협 위원장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유 후보는 공식적으로 신고한 재산만 50억원 가까이 됩니다. 그중 상당액이 예금 자산이었어요. 가뜩이나 당 재정이 어려운 판국에 의원들이 다만 1억원씩이라도 선거비용을 내놓으려 했어요. 그렇다면 후보 자신이 먼저 1억~2억원이라도 특별당비를 내놓는 모습을 보이는 게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 후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선거가 후보 중심으로 치러진다지만 후보가 일방적으로 당의 지원과 희생만을 강요할 수는 없는 거지요.”
 
 
 
“유승민은 후보 단일화를 자기 거취 문제로만 생각”

 
  — 유 후보는 그것을 ‘후보 거취’로 생각한 거 같은데요.
 
  “비단 재정적인 문제뿐 아니라 바른정당 입장에서는 이번 대선이 당의 미래와 직결된 선거임을 알아야 했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대선에 임하는 전략적 목표나 방법론, 비전을 공유(共有)했어야지요. 후보 단일화를 논의했던 의원총회에서도 우리가 후보에게 요구한 것은 ‘후보의 거취’가 아니라 전략적 차원에서 당의 노선(路線)과 방법론을 밝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후보 흔들기나 사퇴를 종용하는 게 아닌데도 유 후보는 그것마저 거부했습니다.”
 
  — 유 후보 입장에서는 ‘보수 후보 단일화’가 ‘중도 사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중도 사퇴’라는 것도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전략적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선이라는 커다란 판에서 전세(戰勢)가 고착화됐다면 그 ‘판’ 자체를 흔드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전략이 되는 거지요. 대선은 후보의 선거이기도 하지만 당의 미래를 좌우하는 선거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후보 자신의 정치적 미래도 중요하지만 조직적 관점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윈윈하는 최상의 선택이 될 수 있을지 충분히 고민했어야 했어요. 결국 이번 선거는 철저하게 유 후보에게만 이기적인 선거가 됐습니다. 유 후보로서야 자기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지만 정작 당은 만신창이가 됐잖아요.”
 
  — 그래도 정작 대선이 끝나고 보니 유 후보는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 득표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보수들이 표를 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젊은이들이 표를 준 것과 유 후보의 딸 때문에 얻은 득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6.8%의 득표가 적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대중들이 ‘후보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선거를 치렀구나’ 하고 생각해 줄지 몰라도 불과 1~2년이 지나면 대중들의 기억 속에는 그 과정이 다 잊어지고 6.8%라는 미약한 결과만 남을 겁니다. 그것은 유 후보에게도 마이너스지요.”
 
 
  “유승민 독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 실패”
 
4월 10일 바른정당 대전시당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회의에 나란히 앉은 유승민 후보와 김무성 의원.
바른정당 탈당 의원들은 김무성 의원이 유 후보를 설득해 주기를 바랐다.
  — 이해하기 힘든 것이, 김무성 전 대표는 왜 유승민 후보의 독주(獨走)를 저지하지 못한 걸까요.
 
  “사실 우리가 김 대표에게 여러 번 채근했어요. 유승민 후보가 (보수 단일화든 3자 단일화든 자기가 했던) 약속을 지키도록 선대위원장(김무성)이 유 후보를 설득해 달라고요. 그런데 그게 안 됐지요.”
 
  — 그리고 결국 12명이 탈당했는데 김무성 전 대표와 사전에 상의는 했겠지요.
 
  “상의했지요.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쩍새가 우는데도 사연이 있다’고요. 그게 그런 상황을 말한 겁니다. 아무리 김 대표라도 우리를 말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집단탈당설이 파다했을 때 유승민 후보가 말리지는 않던가요.
 
  “언론에 잘못 알려진 게 있는데 저희가 5월 1일에 국회의사당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와 만났습니다. 언론은 마치 그때 우리가 탈당할 뜻을 확고히 하고 홍 후보를 만난 것처럼 보도했는데 사실과 달라요. 당시만 해도 우리는 탈당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홍 후보가 보수 대통합을 이룰 뜻이 있는가, 굳은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 그 모임은 요란하게 보도가 됐는데요.
 
  “그런데도 유 후보로부터는 연락도 없었습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었어요. 결국 우리는 홍준표 후보와 만난 다음 날 탈당을 결심하게 된 겁니다.”
 
  — 김 의원이 탈당을 주동한 것처럼 비치는데.
 
  “어휴, 전혀 사실이 아니고요. 저는 오히려 끝까지 사태를 봉합해 보려 했습니다.”
 
 
 
“탈당 만류도 않고 대선전도 자기 캠프 위주로”

 
  — 탈당하겠다는 동료 의원들에게 전화 한 통 안 한다는 것은 꽤 협량(狹量)해 보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대선 공간에서 자기 캠프 중심으로만 했으니까. 그 작은 정당에서 함께 뜻이 어우러져 뛰어도 부족할 판인데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은 의원도 몇 안 됩니다.”
 
  — 그분을 비롯해 바른정당 의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게 바로 불통(不通)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새누리당을 뛰쳐나온 게 기득권 보수를 청산하고 불통(不通) 보수를 개혁하자는 것이었는데 신종 불통을 만난 거죠.”
 
  — 결국 그런 과정에서 보수는 정권을 통째로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변변한 저항조차 못해 보고.
 
  “이변(異變)은 없었지요. 돌이켜 보면 탄핵 정국과 촛불 민심으로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이 일찌감치 대선 판도를 결정했습니다. ‘문재인 대세론’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고요. 결론이 정해져 있는 선거라서 그랬는지 선거판은 오히려 구(舊) 여권 진영에서만 요동쳤습니다.”
 
  — 뒤돌아보니 변수도 많았습니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보수 민심이 반기문에서 황교안, 안철수, 홍준표를 따라 움직였고 그때마다 연정(聯政)이니 빅텐트니 제3지대니 반문(反文) 연대니 3자 후보 단일화니 하는 말들만 낳은 셈이 됐지요. 하나도 성사가 안 됐고 ….”
 
  — 오늘 정권이 넘어갔는데 섭섭합니까.
 
  “사실 저는 이번 대선은 선거 자체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한 선거였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보수 진영이 처참하게 무너진 상황에서 과연 누가 어떻게 보수를 재건하고 정치 지형의 새 판을 짤 것인가가 대선 못지않은 관심사였습니다.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변수들도 사실 대선 국면보다 대선 이후 국면을 염두에 둔 것들이 많았어요.”
 
  —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선거 막판에 제기됐던 ‘후보 단일화’나 창당 99일 만에 사실상 분당(分黨)된 바른정당 집단탈당 사태가 대선 이후 보수 진영의 지형 변화를 예고하는 예고편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겁니다.”
 
  — 다시 묻겠습니다. 대선 결과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이번 선거에 그대로 반영됐다고 저는 봅니다. 이 점을 처절하게 느끼고 반성해야 보수 진영은 살아날 수 있을 겁니다.”
 
 
  “홍준표 24% 얻은 것은 국민이 채찍과 당근 함께 준 것으로 봐야”
 
  — 보수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까.
 
  “초기에 1%도 안 됐던 홍준표 후보가 24%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국민들이 보수 진영에 대해 채찍과 당근을 같이 주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보수 진영도 새롭게 정비하고 보수 야당으로서 당당히 자기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새 정권도 과거 정권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잘해 주기를 바랍니다.”
 
  — 앞으로 보수 진영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저는 혁신과 통합,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구태(舊態) 보수 청산을 전제로 우선 분열된 보수가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보수가 하나가 돼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가 균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치가 합리적인 보수와 진보의 구도로 복원돼야지요. 보수든 진보든 편향되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균형 잡힌 양 날개가 갖춰져야 나라가 제대로 날지 않겠습니까? 무너진 한쪽 날개, 즉 보수를 복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정치적 과제라고 전 봅니다.”
 
  — 저는 이해합니다만 앞으로 김 의원에게는 상당 기간 새누리당을 분당하고 나가 바른정당을 창당한 뒤 다시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는 비판이 뒤따를 거 같은데요.
 
  “다시 말하지만 제가 새누리당을 뛰쳐나온 것은 구태 보수가 소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역사적 운명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고 그 누구도 그 흐름에 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창당된 바른정당은 사실 스스로를 비워 냈어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아쉬운 것은 바른정당이 연대의 서막(序幕)을 여는 플랫폼 정당으로 정치적 포지셔닝을 가져갔어야 했는데 방법론적으로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참신하고 새로운 보수의 가치를 실현하려 했는데, 이념은 새로워지고자 했는데 방법론은 구태의연했습니다. 그 잘못을 국민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험난한 과정을 거쳐 다시 고향에 돌아왔는데 여전히 친박(親朴)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대선에 져서 정권이 넘어갔는데 무슨 친박이 있겠어요. 앞으로는 친박이라는 용어 자체도 사라질 겁니다. 비박(非朴)도 함께 없어질 거고요. 앞으로는 친박이니 비박이니 다툴 게 아니라 300년 역사를 지닌 영국 보수당이 어떻게 진보보다 더 과감한 혁신과 개혁을 했는지를 배워야지요.”
 
  — 보수가 재기하느냐의 여부는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판가름날 것 같네요.
 
  “저는 정계가 급속히 여권발 정계개편과 야권발 정계개편의 회오리 속으로 말려들 것이라고 봅니다. 집권당으로서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의석을 더 확보하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대상은 국민의당이나 정의당이 될 겁니다. 보수 야권은 제1 보수당을 만드는 게 급선무입니다. 제가 비록 떠나왔지만 바른정당도 함께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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