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브라보! 피카소” : 월간조선

문화·예술의 도시답게 파리에서는 크고 작은 전시회가 사시사철 열린다. 음악회와 오페라로 상징되는 공연예술에 있어서도 아직 파리는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고, 미술 전시회는 그 어느 도시보다 앞선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인상파) 미술관, 퐁피두 미술관, 현대미술관 등 대표적인 미술관에서는 상설전시회와 곁들여서 특별기획전을 자주 연다. 특히 파리 중심부 샹젤리제 大路(대로)에 인접한 그랑팔레와 프티팔레 같은 곳에서는 연중기획전을 주로 열고 있고, 그 외의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화랑에서도 각종 전시회가 계속 열린다.

1970년대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알고 지내던 문화성 예술창작국의 한 간부는 파리 시내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참관하며 유망한 작가들을 찾아내고, 화가들의 작품을 정부에서 구입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분이었는데, 하루에 5개 이상의 크고 작은 전시회를 다녀도 파리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회 모두를 소화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던 기억이 난다. 문화 예술의 도시 파리는 아직도 미술전시회만은 세계 정상의 도시인 듯하다.

지난해 말 연로하신 모친(李聖子 화백)을 돌봐 드리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주변 친지들의 권유로 몇 개의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타이밍과 행운이 함께했던 것 같다.

프티팔레에서 열린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1910~1998)의 회화전은 화가의 재능을 지닌 명감독의 또 다른 측면을 볼 수 있었던 데다가, 일본 문화가 파리 한복판에서 수많은 유럽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있는 현장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그랑팔레에서 개최되고 있는 ‘피카소와 대가들’(2월 2일까지)은 압권이었다. 전시회의 기획도 참신하고 기발할뿐더러 세계 각국의 유명 미술관들로부터 수많은 명화들을 대거 빌려온 프랑스의 문화 외교력이 돋보인 전시회였다. 워낙 인기가 있는 전시회라서 예약 없이 전시장에 가서 줄을 서면 서너 시간 이상 기다려야 되는 데다가, 예약표가 많이 팔린 시간대에는 그 이상을 기다려야 되는 인기 절정의 전시회였다. 마침 문화성 친지의 도움으로 예약표(12월 24일 오전 11시)를 구해서 피카소展(전)을 관람했다.

하루 23시간 동안 관람객 입장

주최 측에서는 전시회장 면적과 1인당 관람 시간 등을 감안, 한 시간에 500명 정도를 입장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몰려드는 관람 희망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수용하기 위해 전시회 개관시간을 12월 20일부터는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아침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하루 14시간) 연장하여 하루에 7000여 명이 전시회를 관람하도록 했지만 예약 대기자 수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전시회를 주관하고 있는 프랑스 미술관협회(RMN) 측에서는 전시회 마지막 3일 동안은 장내 정리를 위한 1시간을 제외하고 23시간 동안 관람객을 받기로 했다. 하루에 1만1100명이 입장하게 되는 셈이다.

RMN의 토마 그레농 회장은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외국 미술관에서 대여해 온 작품들을 대부분 계약 기일에 반납해야 되기 때문에 전시회 기간 연장은 절대 불가능하므로 하루 23시간 전시회 개관을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RMN 측에서는 프랑스에서 처음 시도되는 전시회의 심야 공개와 함께 아침 일찍 전시회장에 온 사람들을 위해 아침식사도 그랑팔레의 구내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심야전시회 관람권도 이미 매진 상태인 것을 보면 이른 새벽 시간에 전시회를 보고 그랑팔레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최초의 하루 23시간 전시회 공개가 성공한다면 앞으로 인기 있는 전시회는 ‘예약 필수’와 함께 ‘심야 관람’도 일반화될 듯하다. 그동안 무대공연 예술이나 영화 관람 등은 예약제가 정착된 상태지만, 이제는 전시회까지도 예약제가 보편화되는 것은 21세기에 들어와 문화산업의 큰 변화이자 문화 수요가 점증하는 징조로 보였다.

그랑팔레의 피카소전은 전시회 제목(피카소와 대가들)이 말해주듯 20세기 미술사를 스스로 만들고 체험하고 작업했던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대표적 작품들을 시대별로 전시해 놓고, 그 작품을 만드는 데 피카소가 영향을 받았던 세계적 대가들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해 놓고 있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는 피카소가 10대의 나이에 그린 작품들이 많은데, 섬세한 구상화들을 보고 젊은 화가 피카소의 재능에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번 전시회에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서도 여러 작품을 대여해 와서 초기 구상화가로서의 피카소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피카소에 영향 준 작품 함께 전시

2008년 10월 8일부터(2009년 2월 2일까지)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전을 관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서서 대기하고 있다.

당시 피카소가 좋아했고 따라서 피카소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던 엘 그레코, 고야,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타이티안 등의 작품들과 함께 걸려 있는 피카소 작품들을 보면서 위대한 창작은 모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특히 피카소가 바르셀로나에 이주하여 미술학교에 다닐 때에는 프랑스의 인상파 미술과 북유럽의 미술이 바르셀로나에서도 점화되고 있을 때였는데, 당시 피카소가 좋아하던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렉, 뭉크 같은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걸려 있는 피카소의 작품들을 통해 구도와 화법에 이들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이 미친 영향을 실감할 수 있었다.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이듬해 파리에 정착했던 피카소는 고갱과 고흐의 화풍에도 큰 영향을 받아 어떤 작품은 고흐의 독특한 화필을 그대로 모방한 것 같기도 했다.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보헤미안 같은 젊은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소재로 삼으면서 피카소 미술사의 큰 획을 긋는 청색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피카소 청색 시대의 대표작들은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대여해 왔는데, 특히 러시아 미술관의 소장품이 눈길을 끌었다. 청색 시대가 서서히 끝나면서 桃色(도색) 시대로 접어든 피카소의 작품들 가운데 인상파 화가들의 화풍과 영향을 받은 것들은 흥미 있었다. 도색 시대의 피카소는 과거 에스파냐 미술과 카탈루냐 지방의 중세 조각에서도 영향을 받아 고스란히 화폭에 반영되었다.

‘광대’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곡예사 가족’같이 서커스의 곡예사를 통해서 인생의 어두운 애수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이 당시의 작품들도 20세기 미술사를 대변하는 피카소 작품들의 중요한 시기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전시회 관람을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파리에 정착한 이후 청색과 도색 시대를 거친 피카소는 1905년 아폴리네르와, 다음해에는 마티스와 교유하고 폴 세잔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기념비적인 ‘아비뇽의 처녀들’로 절정을 이룬다.

브라크와도 交友(교우)하게 된 피카소는 입체파 운동에 가담하고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 화법을 구사하게 되는데, 당시 피카소의 작품과 브라크 작품을 보면 누가 브라크이고 누가 피카소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구도와 기법, 심지어 색조까지도 비슷하다는 것을 이번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카소 화풍으로 정착된 것은 전쟁의 비극과 잔학성을 묘사한 ‘게르니카’ ‘통곡하는 여인’ ‘프랑코의 꿈과 허언’을 거쳐 한국전쟁을 테마로 한 ‘전쟁과 평화’(1952)와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 아닌가 한다. 이들 피카소의 대표작은 각기 마드리드 미술관과 남프랑스의 발로리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번 파리전시회에는 출품되지 않았지만 피카소 예술의 절정기는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파리의 미술관은 성황 중

그랑팔레의 전시회에는 1950년대의 작품부터는 피카소가 독창적으로 구상하고 창작했다는 점을 강조하듯 다른 대가들의 작품과 비교 전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전시회장을 가득 메운 피카소의 대표작들과 생전의 피카소가 영향을 받았던 대가들의 작품을 함께 보면서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가 정착하기 전까지 각종 새로운 미술운동에 동참하고 스스로의 예술세계를 개척해 온 현대미술의 거장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에서도 ‘피카소와 대가들’ 전시회는 성공적인 전시회였다.

한 권에 45유로(8만원)씩 하는 전시회 圖錄(도록)도 이미 10만권 이상이 팔렸고 2월 2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의 입장객 수는 70만명을 넘기게 될 전망이다. 시간당 입장객 수를 철저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100만명 이상이 관람한 프랑스 최고의 기록을 깰 전시회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만 社說(사설)을 게재하는 프랑스의 권위지 <르 몽드>에서도 ‘브라보! 피카소’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23시간 전시회를 개방하는 프랑스 최초의 실험을 언급하면서 “문화소비 대중이 미술 전시회의 관례를 벗어나 새벽 3시에 피카소 작품 앞에 선다는 것은 21세기의 새로운 시도”라고 평했다.

<르 몽드>는 이어서 “재정적으로도 성공한 이번 전시회가 미술관의 작품 구입 등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면서 “무대예술 쪽보다 재정수입이 열악하던 미술 전시회가 계속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피카소전과 동시에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르네상스 화가’ 전시회가 30만명의 입장객을 예상하고 있었고, ‘피카소와 들라크로아’전도 연일 성황이었다. 인상파 미술 전시관인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피카소와 마네’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폐막 때까지 40만명의 입장객을 예상하고 있어서 연말·연초 파리의 큰 전시회는 피카소가 독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의 예외가 아닌 파리에서 피카소 관련 전시회에 수십만 명의 관객이 몰려드는 것을 보면서 문화 소비는 불경기 때 더욱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또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21세기의 새로운 생활양식이 미술 전시회만은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미술 전시회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예약할 수 있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2008년 연말의 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