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柄淏가 바라보는 오늘의 한국] 제도가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 월간조선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고민될 때면, 그동안 「어떻게 해 왔는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역사처럼 좋은 소재도 드물다.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을 들추다 보면, 과거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에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조선 500년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한제국의 몰락, 분단, 전쟁 그리고 경제개발로 이어지는 한국인의 역사적 궤적 가운데 조선 역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한국인의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에 만난 한 권의 책이 인상적이다. 史學(사학)을 전공해 온 사람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관점으로 조선 역사를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학을 공부하고 탄탄한 한문 실력으로 고전을 탐독해 온 申東埈(신동준)씨다.

그는 이미 2003년에 연산군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지식산업사 刊)를 출간했다. 이번에 내놓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살림 刊)라는 책은 조선 역사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담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도와 한 국가의 번영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C. 노스는 한 사회에서 제도의 중요성을 「제도, 제도변화 그리고 경제적 성과」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제도는 사회에 적용되는 게임의 법칙이다. 좀더 딱딱하게 표현하면, 그것은 인간이 고안한 제약으로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구체화한다. 따라서 제도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그리고 어떤 것이든 인간의 교환에서의 인센티브를 구조화한다.

제도변화는 사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는 양식을 구체화하기 때문에 역사변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제도가 경제의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다. 장기에 걸친 경제의 성과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제도가 발전하는 양식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 또한 논쟁의 여지가 없다>

王權이냐 臣權이냐

臣權 중심의 국가건설을 지향했던 鄭道傳.

가장 넓은 의미의 제도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는 바로 정치제도다. 조선 500년 興亡(흥망)의 역사는 「한 나라의 정치제도가 장기적인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동준씨의 책은 누구든지 한국사와 관련해 관심을 갖고 읽어볼 만한 우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대학에서 史學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런 시각으로 접근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떤 분야라도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통념 혹은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웃사이더가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사를 국왕 중심으로 배워 왔다. 저자의 독특한 시각은 왕을 넘어서 그 밑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힘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사를「신하 중심의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왕 중심의 국가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두 가지 관점이 갈등을 빚어온 역사로 이해한다.

武將(무장) 출신인 太祖李成桂(태조 이성계)를 뒷받침해 조선 개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鄭道傳(정도전)의 머릿 속에는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설계도가 있었다.

그는 재상 중심의 관료국가, 즉 臣權(신권) 우위의 국가를 理想的(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太宗李芳遠(태종 이방원)에 의해 비명횡사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조선 500년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정도전의 사상의 핵심에 대해서 신동준씨는 이렇게 말한다.

<정도전은 새 나라의 정치 이념과 현실을 宰相(재상) 중심의 통치로 실현하고자 했다. 그의 재상론은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재상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군주의 자질이 다양하기 때문에 재상은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 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군주로 하여금 大中(대중)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

재상은 단순히 군주를 보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중심에 서서 政令(정령)의 주체가 되어 주도적으로 政事(정사)를 이끌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왕의 재가를 받아야 하지만 국가 대사를 제외하고는 재상의 정령을 독자적으로 발동하고 國事(국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반하는 인물이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꿈꾸었던 河崙(하륜)이란 인물이다. 그는 태종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을 제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초 100년간 강한 王權 아래 번영

대체적으로 역사학계는 정도전에 대해 후한 평가를 주는 반면, 하륜에게는 대단히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도전에 대한 연구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하륜이 차지하는 위치와 기여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드물다. 신동준씨는 『이 점이야말로 조선사에 대한 잘못된 시각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하륜이나 태종 이방원은 한마디로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신하 중심의 국가가 아니라 王權 중심의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性理學(성리학)의 王道 이념을 좇아 조선을 王權보다 臣權이 우세한 臣權국가, 즉 재상 중심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태종 이방원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정치 제도를 꿈꾸었다.

결국 태종·세종·세조·성종·연산군에 이르는 조선 초기 100년은 王權의 토대를 확실하게 다지는 과정이었다. 조선의 國力이 대내외적으로 가장 크게 펼쳐진 시기는 조선 초기 100년이었고, 이는 王權의 강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王權이 허약한 상태였다면 이런 번영을 누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이 영토를 확장하고 왜구를 토벌하고 국방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번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조선 초기 100년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성종과 그 아들 연산군 시대에 이르게 되면 사치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는 그만큼 나라의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종실록」에 당시의 사회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요즘 유생들이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여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책을 갖고 다니지 않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유생이면서 책을 끼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에 처하게 하소서. 근래에 유생들에게 푸른 깃의 겉옷을 입도록 했지만 모두 이를 부끄럽게 여겨 학교 문을 나서면 곧바로 벗어버리니 선생이 어찌 이를 금하겠습니까.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마땅히 사헌부에서 금해야 하겠습니다>

사대부 집안뿐만 아니라 상인 집안에 이르기까지 호화 주택을 짓기 위한 경쟁이 일어나고, 궁중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수입 도자기, 즉 중국의 값비싼 청화백자를 무분별하게 수입해 사대부 집안까지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등 사회 문제가 본격화할 정도로 연산군 시대에는 물산이 풍족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中宗反正 이후 臣權 강화되면서 쇠락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연산군이 신하들에 의해 축출되고 난 후, 조선은 정도전이 일찍이 꿈꾸었던 신하 중심의 사회로 방향을 틀게 된다. 中宗反正(중종반정)을 시작으로 이후 400년간의 조선 역사는 王權이 추락하고 臣權이 강화되는 역사였다.

정치 제도라는 측면에서 조선왕조의 커다란 분기점이 바로 中宗反正이다. 연산군 이후 100년 그러니까 宣祖(선조) 이전 시기까지는 臣權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된 士林(사림) 세력은 朋黨(붕당)정치라는 형식으로 臣權 우위 정치를 실천에 옮긴다. 300여 년 동안 붕당정치가 극성을 부린 후에는 붕당정치의 변형된 형태인 勢道(세도)정치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王權의 추락이 왜 문제가 되는가? 臣權의 독주가 왜 문제가 되는 가? 이에 대한 신동준씨의 주장은 단호하다.

<王權이 극도로 굳어질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일부 지배층에 의한 고위관직의 독점화 현상이다. 이 경우에는 능력에 따른 신분 이동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이른바 門閥(문벌)정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비록 관료 체제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결국 고위관직의 독점화 현상으로 귀족 집단에 버금가는 특권집단이 형성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도전이 내세운 臣權국가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지만 이처럼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왕과 신하의 권력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王權이 미약하고 臣權이 강한 이른바 「君弱臣强(군약신강)」이란 신동준씨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특정 그룹 혹은 당파에 포함된 사람들끼리 철두철미하게 권력을 독점하고 이들에 포함된 사람들끼리 각종 이익을 나누어 갖는 것」을 뜻한다. 이런 와중에서 국가와 국민들의 안위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신동준씨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은 선조 때 朋黨정치가 등장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왕비 간택과 왕세자 책봉은 말할 것도 없고 後嗣(후사) 문제조차 이들 士林(사림)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君弱臣强의 나라로 변질되었다.

士林 세력은 天下爲公(천하위공)을 명분으로 내세워 군주 또한 천지자연의 이치를 실행하는 사대부의 일원으로 간주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南宋代(남송대)의 사대부들과 같이 天下를 실제로 통치하는 君王이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자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

東人과 西人으로 출발한 조선의 붕당은 시간이 갈수록 세분화했다. 東人과 西人은 南人과 北人, 小北과 大北 등으로 세포분열을 거듭하면서 國利(국리)보다는 黨利黨略(당리당략)을 앞세우는 亡國(망국)의 형태를 보였다.

前代未聞(전대미문)의 國難(국난)인 倭亂(왜란)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촉발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선조가 강력한 王權을 바탕으로 臣權 세력을 제압하고 위엄을 보였어도 임진왜란과 같은 外患(외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도가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조선이 초기 100년을 지나면서 서서히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제도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이른바 「경로의존성」을 떠올리게 된다. 일단 한 나라가 특정 진로를 선택하고 나면, 그 길을 중심으로 이익집단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 역사에서 흔히 르네상스라 불리는 英·正祖(영·정조) 시대에도 붕당정치를 적극적으로 쇄신하기보다는 이들 사이에 적절한 타협을 통해서 해법을 도출하려던 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이후의 조선 멸망은 결국 특정 이익집단에 국가의 권력과 정책이 포획됨에 따라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신동준씨는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만일 연산군이 反正을 봉쇄하기만 했다면 우리 역사는 크게 바뀔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은 燕山朝(연산조) 이래 강력한 王權을 토대로 1세기 정도만 富國强兵을 추구했다면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던 요동을 점거할 수 있었을 테고, 왜란이나 호란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라고 말한다.

조선의 역사는 제도가 한 국가의 中長期(중장기) 성장과 몰락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 500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하면서, 한 사회가 제대로 된 제도를 갖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특정 제도下에서 黨派的(당파적) 이익이 생겨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한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현명한 代案(대안)은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면서도 끊임없는 경쟁과 쇄신이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