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金正 화백
신문을 향한 金교수의 애정은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단계로까지 뻗어 올라간다. 지금은 사라진 舊조선일보 사옥은 그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것이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0년대 초 조선일보 창간 당시 관철동의 韓屋(한옥)에서 신문을 편집하고 제작하는 풍경까지 살려내었다. 당시를 경험했던 언론계 원로들의 증언을 듣고 관철동에 남아 있는 창간 무렵의 한옥을 찾아다니는 정성에 곁들여 옛 사진을 뒤져 고증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현장을 확인하는 기자의 치밀함에, 화가의 상상력과 그림 솜씨가 어우러져 초기 조선일보의 모습을 살려낸 것이다. 사실에 기초한 역사적 장면의 재현이면서 화가의 따뜻한 체온이 스며 있는 그림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金교수는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만 10년 동안 조선일보에 근무했다. 소년조선일보에 소속되었던 그는 신문에 게재할 그림을 그리는 한편,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에도 손을 대었다. 全사원이 맡은 분야에서 분초를 다투면서 신문 만드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루하루 피 말리는 紙面 경쟁을 벌이는 장면에 동참하면서 기자·부장·국장·사장을 포함한 여러 언론인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신문사를 떠난 후에는 독일로 가서 작가수업과 연구를 하고 돌아와서 대학교수가 되었고,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지만 젊은 시절 그가 근무했던 조선일보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던지 당시의 스케치를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이다. 신문 만드는 작업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全사원이 일사불란하게 호흡을 맞추어 화음과 리듬을 창조하는 교향악이라는 것이다. 신문 제작이라는 오케스트라는 개성이 뚜렷한 언론인들이 자유분방한 창의력을 모아 만들어 내는 종합 예술이다. 젊은 시절의 金正은 신문사의 숨가쁜 일상 속에서 수줍은 자세로 조용히 남몰래 편집국 안의 인물들을 스케치했다.
그의 손에 잡히는 연필·볼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간단한 필기구와 종이만 있으면 준비는 갖추어진 것이다. 조선일보 사람들, 취재차량, 사옥, 주변의 풍경, 심지어 예비군 훈련모습 같은 것도 기록의 대상이 되었다.
1975년 3월의 「조선일보 사태」 때 편집국에서 농성하는 풍경도 있다. 그도 농성 기자 그룹의 일원이 되어 언론자유 실천을 외치며 밤을 지샜다. 그러면서 편집국 한구석에서 역사를 그림으로 남기는 史官(사관)의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누가 어느 위치에서 밤을 새며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고뇌했는지 역사의 기록자 金正의 그림을 통해서 그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랍고 흥미 있는 부분은 무려 191명의 조선일보 맨들이 그의 그림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인물로 따지면 191명이지만 같은 사람을 두 번 또는 일곱 번까지 그린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전체 연인원으로는 304명이 된다. 놀라운 인물화첩이다.
조선일보에 입사했던 1969년 당시 그가 소속되었던 소년조선일보에는 정재도, 박녹영이 편집위원이었다. 국어학자 정재도는 金正이 신문사를 그만둘 때까지 소년조선일보의 주간이라는 직책으로 그의 상사였다. 길우영, 김유동은 오랫동안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사람들이다.
주필 최석채, 편집국장 선우휘의 지휘 아래 편집국에는 민완 일선기자를 비롯해서 차장·부장·국장의 순으로 각 부서에 人材들이 들끓었고, 논설위원·임원 등 언론계를 주름잡는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金正 기자는 그중 191명을 알게 모르게 10년 세월에 걸쳐 언론 역사 인물화 시리즈 작업을 하였다.
方又榮과 安秉勳은 일곱 차례 그렸다. 가장 많은 빈도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기간 方又榮은 사장이었고, 安秉勳은 사회부·정치부 기자를 거쳐 金正 기자가 퇴직하던 1979년에는 정치부장이었다. 이주혁과 유정현은 여섯 차례 그렸다.
이주혁은 문화부와 사회부에 근무하다가 1975년 파동 때에 신문사를 떠난 사람이다. 유정현은 金正이 재직하는 동안 주로 사회부 기자였다가 후에 정치부, 月刊朝鮮에서 근무했다.
방일영(회장, 5회)에 이어 조영서(편집), 조연흥(사회), 주돈식(정치), 김명규(사회), 유경환(문화), 이현구(정치), 이도형(외신), 김종원(주간조선)이 네 차례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세 차례 등장하는 사람들로는 김대중(정치), 김덕형(문화), 김윤환(정치), 인보길(편집), 방상훈(상무), 정광헌(편집·공무), 임준수(편집), 이규태(문화), 최병렬(정치), 안철환(편집), 고학용(사회), 최영정(체육), 신동호(편집국장) 등이 있다.
그 밖에 수많은 사람들을 다 나열할 수는 없다. 언론계의 중진이 되는 사람과 정계·문화계·학계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30여 년 전에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모습을 金교수의 인물화에서 만나는 즐거움과 흥미는 새롭다.

金正 교수가 근무했던 1969년부터 1979년까지의 조선일보는 頂上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던 도약기였다. 그 10년간 조선일보의 여러 모습을 그리는 한편, 사라진 역사의 현장을 재현하는 작업에도 손을 댄 것이다. 숨가쁜 신문 제작의 현장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은밀히 남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병행하여 역사기록화를 예술적으로 배합한 작품을 만들었다. 신문기사는 보존돼 있지만, 社屋의 역사를 생동감 있는 회화 작품으로 제작한 것은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다. 조선일보 창간 당시의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창간호조차 소실된 상태이며 창간 사원들이 누구였는지 정확한 기록조차 없다. 社屋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조선일보가 창간호를 낸 장소는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성부 관철정(町) 249번지」였다. 그러나 1962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 사업으로 이곳은 종로구 관철동 43-12번지 자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철동 43-12번지는 보신각 옆 골목에 위치한 「종로 삼계탕」집 4층 건물이 있는 자리다.
조선일보는 이 「관철동 창간 社屋」에서 최초의 압수 신문인 창간 4호까지의 신문을 발행한 후, 1920년 4월29일 삼각정 71번지의 새 社屋으로 옮겨 지령 5호를 발행했다.
金교수는 조선일보 창간 社屋인 관철동 249번지(現 43-12번지) 일대를 현장답사하고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창간 社屋을 그렸다. 정사각형인 전통 韓屋에서 신문을 창간했다는 증언에 따른 것이다. 가장 사실에 가까운 자료를 토대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필수적인데 국내에는 관철동의 韓屋 사진이 없다. 金교수는 엉뚱하게도 멀고 먼 독일에서 관철동 근처 사진을 입수했다. 1905년에서 1910년대 관철동 근처 韓屋 사진을 찾으러 다니는 걸 아는 독일인 친구가 2년 만에 뮌헨에서 찾아준 것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한 에피소드다.
창간 社屋의 내부구조는 남아 있는 옛날 집을 스케치하였다. 건넌방에 편집국장이 앉아 취재와 편집을 지휘하고 여러 개의 방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마루에서는 편집과 교정을 보던 광경이다. 창간 당시 편집국 인원은 약 20명이었을 것이다.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를 기준으로 조선일보의 인원을 추산해 보자. 매일신보의 당시 인원은 17명이었다. 日人 고문과 편집국장 대리 각 1명, 논설부 5명, 편집부 5명, 사회부 6명, 지방부 2명, 외사부 1명이었는데, 4명은 겸직이었으므로 실제 인원은 17명이 된다.
동아일보는 주간과 편집국장 각 1명, 논설반 5명, 정치-학예·사회-정리·통신-조사부장 각 1명, 기자 15명, 사진반 1명으로 모두 26명이었으나 편집국장 이상협은 사회-정리부장과 논설기자를 겸하고 있었고, 논설반의 장덕준이 통신-조사부장을 겸했기 때문에 편집국 인원은 24명이었다.
조선일보도 대략 이 수준이었을 것이다. 金교수는 약 20명의 제작진들이 1920년 초봄 정사각형의 관철동 韓屋에서 바삐 돌아가며 신문을 만들던 광경을 한 폭의 살아 있는 역사화로 만들어낸 것이다. 편집국장, 부장, 기자를 포함한 사원들은 한복과 양복을 입은 사람이 섞여 있었다. 원고나 採字(채자)한 교정쇄는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에 담았다.
조선일보는 관철동에서 4월28일까지 겨우 4호를 발행한 뒤에 삼각동 71번지로 옮겼고, 1921년 4월9일에는 다시 수표동 43번지로 옮겼다. 그 후로도 견지동, 연건동을 거쳐 1935년 6월에 태평로 1가 現 코리아나 호텔 자리에 신축 社屋을 완성했다. 金교수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면서 1930년대에 方應謨 사장이 야심적으로 건축한 태평로 社屋의 마지막 모습과 그 역사적인 社屋이 헐리고 호텔이 들어서는 현장도 그림으로 남겼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일보는 1920년 3월9일자 지령 제3호이다.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여 배대판 크기의 8면 석간이었다. 판면은 12단제, 1단 95행 체제였다. 제3호 1면에 「창간 기념호」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남아 있는 제3호는 거의 창간호에 해당하는 지면으로 볼 수 있다. 인쇄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3월5일에 창간호를 발행하고 제2호는 3월7일, 그리고 3호를 9일에 발행하였다.
총독부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3개 민간紙 발행을 허가한 날은 1920년 1월5일이었다. 그런데 신문 발행허가의 법적 근거가 되었던 「광무신문지법 제9조」는 발행허가를 받은 날로부터 2개월 이내에 신문을 발행하지 않으면 허가의 효력을 상실하도록 되어 있었다. 허가받은 날로부터 2개월은 3월5일이었으므로 이날까지 신문을 발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준비기간 2개월 만에 신문을 창간할 수는 없었다. 조선일보는 일단 법에 규정된 마지막 날인 3월5일에 맞추어 창간호를 내놓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발행을 계속하지 못한 상태로 인쇄시설을 갖출 때까지는 不정기적으로 신문을 발행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와 시사신문은 4월1일까지 창간 기일을 한 차례 연기하여 준비를 완료한 다음에 정상적인 발행을 시작하였다.
창간 당시의 조선일보 제호는 도안이 아니라 붓으로 쓴 것이다. 제호는 봉황과 꽃무늬(화문)의 바탕 위에 붓글씨 漢字였다. 누구의 필체일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없었다. 金교수는 원로 화가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貫齋 李道榮(관재 이도영)과 心汕 盧壽鉉(심산 노수현) 둘 중 한 사람의 글씨일 것으로 범위를 좁혔다. 원로들은 李道榮의 글씨로 보는 사람이 많았고, 金교수도 여러 측면에서 李道榮의 글씨로 추정했다. 글씨는 매우 성실한 서체이며 능숙한 솜씨를 지닌 사람의 품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제호는 지령 제7호까지 짧은 수명으로 끝났다. 창간 제호를 쓴 인물로 짐작되는 李道榮은 시사만화의 선구자였다. 1909년 6월2일 대한민보 창간호부터 「삽화」라는 제목으로 시사만평을 게재하여 최초의 신문만화가로 공인받고 있다. 제호의 도안은 80년이 넘는 동안 여러 차례 바뀌었다.
지금의 코리아나 호텔 자리에 조선일보의 舊사옥과 아카데미 극장이 있었다. 金교수는 덕수궁 정문 쪽에서 광화문을 향해 조선일보의 社屋을 바라보기도 하고, 건너편에 있던 신문회관 3층 강당 창문을 통해서 건너다보이는 조선일보도 스케치했다. 없어진 신문회관 강당은 기자회견과 강연회를 비롯하여 각종 집회 장소와 언론인들의 결혼식장으로도 활용되었는데, 金교수도 이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결혼예식장을 예약하러 신문회관에 들렀을 때에도 조선일보를 건너다보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舊사옥은 1933년에 조선일보를 인수한 方應謨 사장의 야심찬 작품이었다. 광산 사업으로 巨富가 되어 경영난에 허덕이던 조선일보를 인수한 方應謨는 대각선으로 마주 보이는 동아일보를 능가하는 빌딩을 짓는다는 계획 아래 조선일보 사옥을 신축하여 1935년 7월6일에 낙성식을 가졌다. 그러나 5년 후인 1940년 8월의 강제 폐간, 1945년 11월의 복간과 6·25 전쟁의 참화를 이곳에서 거쳤던 건물이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양쪽 길가에 우거졌던 태평로의 모습은 이제 크게 바뀌었다. 도로 중앙에 쇳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전차도 없어졌고, 1960년대 말의 도시계획으로 조선일보 社屋의 전면이 잘려 나갔다. 일제시대에 方應謨가 세웠던 신문사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 높은 호텔이 서고 신문사는 호텔 뒤로 숨었다. 金교수는 이 건물의 최후를 지켜보고 코리아나 호텔과 신문사 건물이 신축되는 모습을 그림으로도 남기고 판화로도 제작했다.
金교수는 화가의 상상력과 고증을 보태어 조선일보 자리였던 태평로 1가 61의 1920년대 전후 풍경도 그렸다. 1920년대에 코리아나 호텔에서 성공회 쪽으로 올라가는 부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약간 언덕진 지대로 한옥촌이 있었고, 덕수궁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다른 동네에 비해 나무가 좀 많았다는 것이다.
예전의 덕수교회 자리, 성공회를 끼고 올라가는 뒷길 야트막한 언덕길 꼭대기에 조선일보의 심장부가 된 별관이 우뚝 솟아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 광화문 네거리 쪽에서 올라가는 골목길에 있었던 원자력병원을 아는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그보다 예전에는 경성방송국, KBS의 출생지가 그 골목길 입구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 金교수의 세밀한 필치는 이제는 없어진 그곳 풍경까지 요모조모로 담아 두었다.
6·25 전쟁 중에 조선일보는 「戰時版(전시판)」을 네 차례 발행했다. 1950년 10월23일 수복된 서울의 폐허에서 제1차 전시판을 발행했고, 제2차는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제3차, 그리고 중공軍의 개입으로 서울이 공산軍의 수중에 떨어진 후에는 수원으로 내려가서 제4차 戰時版을 발행했다. 金교수는 戰時版을 발행하던 당시의 임시 社屋도 그림으로 재현했다.
제3차 타블로이드 1면 戰時版을 들여다보던 면면들은 역사畵로 재현했다. 1952년 4월21일 방일영, 유건호, 방락영, 전동천, 김한호, 김해룡의 6人이 선발대로 태평로 본사에 도착하여 再수복 후 서울에서 발행한 유일한 신문이 조선일보였다. 전쟁 폐허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신문을 보고 모두들 긴장과 감격의 묘한 느낌을 받았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언론사의 차량은 군용 지프가 主流를 이뤘다. 이어서 국산 승용차인 코로나가 등장했다. 지프의 모양도 차츰 여러 형태로 제작되었고, 현대차의 초기 포니가 나타났다, 기아차의 삼륜차는 뛰어난 기동력으로 신문 수송을 담당했다.
社旗(사기)는 신문사의 얼굴이다. 신문사의 취재 차량을 비롯해서 신문사의 행사장에 신문사를 상징하는 社旗가 휘날렸다. 金교수는 심벌마크와 함께 1920년대 일제 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社旗의 변천을 추적하여 그림으로 살려내었다.
충남 태안군 천리포에 있던 조선일보 휴양소, 1975년 10월3일 옛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사원체육대회, 소년조선일보 주최 「학생미술대회」의 심사를 맡았던 화가 李承萬(이승만), 朴古石(박고석), 金榮注(김영주), 禹慶熙(우경희) 등의 얼굴도 스케치화로 남겼다. 이제는 모두 故人이 된 인물들이다.
「이런 화가도 있구나!」
金正 교수의 그림을 처음 본 소감이었다. 수줍은 성격의 소유자인 金교수가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지니고 조선일보 관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니다가 특종을 낚은 사진기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남이 보기에 우연한 기회를 포착하여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랜 노력과 준비가 있어야 특종을 얻을 수 있다. 분신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던 카메라가 있었기에, 그리고 사물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을 지녔기에 특종이라는 행운을 낚을 수 있는 것이다.
金교수는 언제나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는 사진기자의 대비태세와 기자의 현장감과 사실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역사畵」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그는 언론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겼고, 그가 살지 않았던 시기, 이미 사라졌던 역사적인 현장까지 복원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