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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末秘錄] 1953년 李承晩의 여름

『친구로서 헤어지자. 자살도 우리의 특권이다』

이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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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美 대통령과의 처절한 결투를 통해서 韓美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낸 李承晩의 벼랑 끝 전술. 비밀해제 문서를 중심으로 쓴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 秘話

미국이 서둘러 공산군 측과 휴전한 뒤 다시 한국을 버리려 한다고 생각했던 李承晩은 「단독 北進」, 「유엔사령부로부터 한국군 철수」를 공언하면서 미국의 아이젠하워를 몰아세우고 공갈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려고 反共포로를 석방하여 세계를 경악케 한다. 미국 대통령의 멱살을 잡고 국가 생존을 위한 대결투를 벌이던 李대통령은 결국 韓美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어 韓美동맹이란 든든한 안보의 울타리, 번영의 발판을 후손들에게 선물한다. 이 글을 盧武鉉 대통령에게 바친다
포로 강제 송환 對 자유의사 존중
1952년 12월, 美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오른쪽은 李承晩 대통령.
  1950년 6월25일 38선 전역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金日成은 단숨에 부산까지 점령해서 한반도를 그의 지배 아래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이 중심이 된 UN군의 도움으로 북한군을 밀어내고 38선을 돌파한 李承晩 대통령도 이 기회에 분단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중공군의 대거 참전으로 통일의 꿈은 사라지고 1951년 중반부터 현재의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고착되었고 전쟁은 지루한 高地戰·소모전으로 바뀌고 말았다.
 
  양측은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의도를 관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공산세력의 팽창을 일단 저지하는 데 성공한 미국은 더 이상 국민에게 출혈을 강요할 명분을 잃게 되었고, 소련 역시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이 전쟁에 계속 자원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1951년 3월, 美 국무부는 다시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는 휴전안을 작성했고, 5월 중순 그것을 공식정책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체면 때문에 먼저 휴전을 공식적으로 제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소련 문제 전문가 조지 케난이 나서 당시 유엔주재 소련대사 야콥 말리크와 비밀리에 접촉, 한국전의 휴전문제를 협의했다. 6월23일, 말리크는 유엔의 라디오 방송에 나와 한국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전 당사자 간의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틀 후인 6월25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소련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선언했다. 6월30일,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원산항에 있는 네덜란드 병원선에서 휴전회담을 시작하자고 제의했다. 7월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회담이 열리고, 본회담 개최장소를 개성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틀 후인 7월10일, 쌍방은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열었고, 10월에는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협상을 계속했다.
 
  첫날부터 공산 측(북한·중공)은 회담장에서 정치선전을 시작했고, 7월26일에야 겨우 토의 의제에 합의할 수 있었다. 회담은 2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일만 해도 38선 복귀를 고집하는 공산군과 現 전선을 주장하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대립, 합의에 이르는 데 4개월이 소요되었다. 포로 교환문제에서도 포로 전체의 강제송환을 주장하는 공산군과 포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한 자유송환을 주장하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맞서 거의 2년간 진전을 보지 못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당시 군사적 상황이 우리 쪽에 유리했으므로 좀더 압력을 가하면 그의 염원이었던 국토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휴전은 통일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장차 공산세력이 다시 한반도를 적화할 수 있는 빌미를 주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같은 강력한 의지를 반영하여, 미국이 휴전협상을 모색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지 얼마 뒤인 6월10일, 당시의 임시 수도 부산에서 처음으로 수만 명의 군중이 휴전반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6월 30일,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의 통일과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되는 어떠한 조건의 휴전도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 휴전을 거부하고, 누가 보아도 실현이 불가능했던 한국군의 단독북진을 주장한 완고한 老대통령의 고집 뒤에 韓美상호방위조약이라는 복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이젠하워의 등장과 李承晩의 고민
 
  1952년 10월, 휴전회담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53년에 들어와 몇 가지 사태발전으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1952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한국휴전을 중요한 공약으로 내걸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가 승리했다.
 
  그 무렵 미국인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해결의 전망은 보이지 않고, 희생자만 늘어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당선자의 신분으로 한국전선을 방문하고 그의 공약을 확인했다. 1953년 3월5일, 한국전쟁의 배후 지령자이자 휴전을 바라지 않았던 스탈린이 사망했고, 소련의 새 지도층은 좀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한국전쟁의 휴전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3월 하순, 포로송환문제를 둘러싸고 중단되었던 휴전협상이 재개되었다. 이에 맞추어 李承晩 대통령의 휴전저지 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4월5일, 그는 한국군 제2군단 창설기념행사에서 『국토 통일이 이룩되지 못하는 휴전보다는 차라리 韓滿 국경선으로 진격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을 신호로 4월6일과 10일, 서울과 부산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시위했다.
 
  李대통령은 전쟁이 끝나면 東아시아 한쪽에 잊혀진 존재로 돌아갈 이 조그만 나라의 독립과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의 힘을 알고 있었다. 韓末의 격동기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주변 열강들의 세력확장 경쟁을 목격했고,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미국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던 그는 이 강대국으로부터 어떤 선언이나 약속보다도 구속력이 강하고 확실한 조약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李承晩 벼랑 끝 전술에 착수
 
  그것이 韓美상호방위조약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 어떤 잠재력도 보이지 않는 한국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는 새로운 전쟁에 끌려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협상카드는 휴전을 거부하고 北進통일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벼랑 끝 전술밖에 없었다.
 
  李대통령의 구상했던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공산세력의 위협뿐만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가능성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런 구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철수가 끝나가고 있던 1949년 5월 중순, 李承晩 대통령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태평양조약 체결, 외부 침략에 대한 韓美 양국의 상호방위협정, 미국 대통령의 공개적인 한국방위 공약 같은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우호통상조약 이상의 것은 체결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당시 미국은, 政情이 불안하고 이렇다 할 천연자원이 없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아주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서 최우선적인 관심지역은 어디까지나 일본이었고, 한국은 그 전략거점을 위한 전초기지에 불과했다.
 
  1948년 초 트루먼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는 미군이 부정적인 영향을 극소화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빨리 한국으로부터 철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 內의 세력이 취한 행동이 미국에게 개전의 사유가 되는 사건으로 간주되지 않도록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전후 지상군을 대폭 감축하고, 유럽에서 170억 달러가 소요되는 마샬경제원조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에게는 한국에까지 자원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950년 1월12일, 美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워싱턴市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선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연결하는 선이며, 한국과 대만은 이 방위선에서 제외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의 원래 취지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확인해서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어느 나라도 그 영향권에 대해 군사적 도발을 할 수 없으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과 중국대륙의 공산화 및 1950년 2월 中蘇상호우호동맹조약 체결, 6월25일의 한국전쟁 발발 등으로 그 전략을 검토하게 되었지만, 한반도 때문에 다시 아시아 전쟁에 말려든다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같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 李承晩 대통령이 목표를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반도의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미국의 조급한 심정을 철저히 활용하는 것뿐이었다.
 
  휴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휴전협상은 한국 정부의 강력한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진전되고 있었다. 1953년 4월11일에는 부상한 포로를 교환하는 협정이 체결되었고, 20일에서 26일 사이에 판문점에서 양측의 부상병 포로가 교환되었다.
 
  4월21일, 한국 국회는 李承晩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하는 의안을 가결시켰다. 힘을 얻은 李대통령은 본격적으로 휴전을 저지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4월24일, 그는 미국 대통령에게 중공군이 압록강 남쪽에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로 휴전이 된다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되찾아 독자적인 작전을 단행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놀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서한을 보내 UN과 미국이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으나, 李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은 UN군 사령관을 통해 李대통령에 대해서 휴전협정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美, 상호방위조약 요구 거절
 
   1953년 4월27일, 李承晩은 휴전 수락을 설득하기 위해 방문한 유엔군 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에게 수락조건으로 韓美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소련이 침략할 경우 미국의 즉각적인 지원 보장, 그리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美 해군과 공군의 지원 계속과 한국군의 증강을 계획대로 실현시킬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휴전이 성립되기 전에는 韓美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런 조약을 맺으면 UN군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가들의 군사적 참여도가 축소되고, 한반도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는 공산주의자의 지배를 법적으로 인정하게 되며, 휴전을 반대하고 작전지휘권 회수를 위협하고 있는 한국의 태도가 美 의회 및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대신 참전국들이 함께 공산 측의 침략기도에 대해서 對제재선언(Greater Sanctions Statement)을 발표하고, 한국군의 戰力을 20개 사단선으로 증강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5월6일, 李承晩은 아이젠하워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이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해 준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휴전에 응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침략에 대항해서 대한민국을 방위해야 하고, 한국군이 독자적인 능력을 보유할 때까지 미군을 주둔시키고, 한국군이 미국의 군사적 지원 아래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충분한 보급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남아서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한국은 고유의 자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다.
 
 
 
 『국군을 UN군 산하에서 철수시키겠다』
 
  5월12일, 클라크 장군은 공산 측의 제의에 대한 회답을 전하기 위해 판문점으로 가기 전 경무대에 들러 李承晩 대통령에게 휴전협상의 진전 상황을 설명하면서, 공산 측이 휴전 후 포로를 관리할 5개국 중립국 관리위원회 의장으로 인도를 제의했다고 말했다.
 
  李대통령은 인도가 중립국가가 아니라 공산국가이며, 네루는 소련을 상전으로 모시고 있다고 반대하면서, 인도군이 한국에 들어오면 공산군의 진입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클라크 장군이 그렇다면 제주도는 괜찮겠느냐고 묻자, 李대통령은 인도군이 제주도에서 최장 두 달 동안 머물 수 있지만, 한국의 다른 곳으로는 갈 수 없다고 못 박았다.
 
  李대통령은 미국인들 중에는 일본을 맹목적으로 선호하는 나머지 그들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얼마 전 경쟁국이 된다는 이유로 목선의 對한국 판매를 금지시킨 사례를 들면서, 자유경쟁 대신 낡은 독점정책을 추진하고, 경쟁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李대통령은 해군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일본이 해군을 다시 건설하게 되면 미국에게도 대단히 위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도 최소한 일본과 같은 수준의 해군력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클라크 장군의 협조를 요청했다.
 
  클라크 장군은 그때까지 한국의 육군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해군 쪽에도 신경을 쓰겠다고 대답했다.
 
  클라크 장군은 李대통령에게 중공군이 잔류한 채 휴전이 이루어지면 한국군을 UN군 사령부로부터 철수시키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느냐고 물었다. 李대통령은 변함이 없다고 하면서, 그 정책을 비난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만일 UN군이 고의로 우리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중공군을 한반도에 허용하는 형식으로 휴전을 추진한다면,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방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5월25일, 李承晩 대통령은 경무대를 방문한 엘리스 O. 브릭스 駐韓 미국 대사와 클라크 장군으로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구상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美日안보조약과 같은 수준의 韓美안보조약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중립국 관리위원회로 이관하는 휴전안도 수락할 수 없다고 하면서, UN군이 철수하고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가 중단되어도 한국군은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공군의 대공세
 
  그는 5월3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중공군의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이 한국에 대해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지적하면서, 韓美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선행조건으로 하여 UN군과 중공군의 동시철수를 제의했다. 그는 공산주의 침략은 말이 아니라 행동만이 저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6월6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李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의 통일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고 설명하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다음 신속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등과 이미 체결한 것과 비슷한 상호방위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통고했다. 그는 중대한 시기에 두 나라 사이에 분열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6월8일, 판문점에서 공산군, UN군 양측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포로 교환 협정에 합의하고 서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휴전선을 확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날 李承晩은 아이젠하워의 상호방위협정 제의가 충분치 않다고 거절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149-0으로 통일이 없는 휴전은 거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한국군에게 공산주의자의 침략을 방지하고, 북진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6월10일, 차기 美 합참의장으로 선정된 아더 W. 래드포드 제독이 대만으로부터 날아와 李承晩을 방문, 휴전을 수락하라고 설득했다.
 
  이날 밤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 1951년 5월의 6차 공세 이래 최대의 공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李承晩의 의지를 꺾지 않고서는 휴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공군의 공격은 UN군의 전선 중에서 금화 북동부에서 금성을 거쳐 동쪽으로 연결되는 돌출부에 집중되었다. 이 지역엔 한국군 2군단의 5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군단규모 병력을 투입, 치열한 야포공격을 가한 뒤 대대 또는 연대급 규모로 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은 한국군 5사단의 전초진지를 유린하고, 단장의 능선 서북방 15km 지점의 고지를 점령했다. 한국군 3사단은 1개 연대를 보내 5사단을 지원, 반격을 시도했지만 빼앗긴 고지는 탈환하지 못했다. 중공군은 9일간의 공격으로 4km 가량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역사적 배신 행위 비판
 
   UN군 측의 사상자는 6월 한 달 동안 4861명의 전사자와 부상 1만6000명, 실종 2300명에 달했다. 그 대부분은 한국군이었다. 그래도 李承晩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양보하면 장차 수백만의 희생자가 생기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6월11일, 덜레스 국무장관은 李承晩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고, 韓美간의 현안을 협의하기 위한 미국 방문을 제의했으나, 李대통령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오히려 덜레스 장관이 서울로 올 것을 제의했다.
 
  덜레스 장관도 의회가 개회 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그 대신 극동문제담당 국무부 차관보 월터 S. 로버트슨을 서울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李대통령은 동의했다. 그것은 휴전과 韓美상호방위협정을 둘러싼 韓美양국 외교의 결전장을 예고했다.
 
  6월17일, 李承晩은 경무대로 브릭스 대사를 불러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보낸 6월 6일자 서한에 대한 답신을 수교하면서, 그 서한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韓美상호방위협정에 관한 그의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李承晩은 미국 정부가 1904년, 필리핀에 대한 이권을 보장받는 代價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묵인하기로 합의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은 1882년에 체결된 韓美 수호조약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이 1945년에 소련과 38선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통일을 막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 정부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고 발표함으로써 공산군에게 남한을 침공하도록 고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李承晩은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 등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도 한국은 빼놓았다고 불평하면서, 오늘은 그런 조약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데 필요하지만, 내일은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는 데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야욕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일본 언론들이 韓美상호방위조약 협상을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예로 들었다.
 
  같은 날, 미국 워싱턴市에서는 白斗鎭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한국사절단이 국무부를 방문, 존 포스터 덜레스 장관을 만났다. 白斗鎭 총리가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非우호적인 사람들과 어떻게 협상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덜레스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38선을 시찰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한반도의 장래에 대해 낙관론을 폈다.
 
  白斗鎭 총리는 수긍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지금 당장 공산당 학정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구해 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통일을 해서 북한 주민을 해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은 다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군대를 재건해서 남한에 침투하려 할 것입니다』
 
  덜레스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의 장래에 대한 그의 철학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白총리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날 모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白斗鎭 총리는 덜레스 장관에게 감사하고, 비록 어려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계속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반공포로 석방
 
  그러나 白斗鎭 총리 일행이 숙소로 돌아간 뒤, 한국에서는 휴전협상은 물론 韓美관계 그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李承晩 대통령이 미국 정부와 아무런 협의 없이 反共포로를 석방해 버린 것이다.
 
  그 무렵 金日成에게 계속 충성하면서 北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골수 공산주의자 포로들이 수용소 내부를 장악하고 그들을 반대하는 포로를 학대하거나 죽이기까지 하자 UN군 사령부는 이들을 분리하여 수용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북한 출신포로 9만 명 중 40%, 남한 출신 포로 5만 명 중 50%, 중공군 포로 2만 명 중 75%가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부산, 마산, 광주, 논산, 대구, 영천, 부평 등 7개 지역에 분산 수용되고, 북쪽으로 돌아가겠다는 親共포로는 계속 거제도에 남아 있었다. 反共포로의 수용소는 대부분 한국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李承晩은 자기를 무시하고 진전되고 있는 휴전협상에 무언가 충격을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대담한 도박을 했다. 그는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에게 3만5400명의 反共포로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6월18일 오전 2시를 전후하여 포로수용소의 문이 열리자 反共포로들은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날 탈출에 성공한 反共포로는 2만6930명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경비하고 있던 수용소에서는 경비병의 발포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했다. 탈출하지 못한 反共포로는 8293명이었다.
 
 
 
 허를 찔린 미국
 
  허를 질린 미국인들은 격분했다. UN군 사령부는 그것이 한국 정부의 최고수준에서 비밀리에 계획된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판문점에서는 양측 실무자들이 휴전협정의 거의 모든 조항에 합의한 상태였으나, 공산 측은 세부 조정 작업을 중단하고, 이날 오후 양측 고위 연락장교의 회의를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 윌리엄 K. 해리슨 대표는 반공포로의 탈출 사실을 공산 측에게 정식으로 통고하고, 모든 책임은 李承晩 대통령에게 있다고 설명했지만, 공산 측 대표들은 회담장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날 UN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에게 서한을 보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개인적 의견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또 국제적인 복잡성 때문에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들을 석방하겠다고 사전에 알려 주었더라면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을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내가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이 무고한 청년들을 오래 수용소에 억류해 두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1000명 이상의 인도군이 와서 이들을 경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2~3개월 동안 공산세계로 돌아가게 세뇌를 하도록 도와주는 사태였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런 사태를 묵과할 수 없을 것이며, 親공산주의적 인도군과 충돌이 벌어질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몇 가지 계획을 모든 당사국에게 제시했지만,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마지막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책임을 지고 한국 헌병에게 그들을 일시에 석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알려 주십시오.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우호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하나 더 설명할 것이 있습니다. 이 조처가 그동안 이야기 해오던 「일방적 조처」의 시작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그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휴전이 발효되면 양측은 지정된 시간 내에 2km 씩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한국군이 동맹군과 함께 물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런 상황에 대처할 필요는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한국군을 당신의 지휘로부터 빼낼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기가 무척 싫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장군이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상황의 산물이며, 서로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대한 문제는 UN군이 現 전선에서 2km 물러서고, 한국군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게 되면 敵들이 이용하여 침투할 수 있는 간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서 이 점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공적 의무와 개인적 우정은 서로 혼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나는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려 하고 있고, 아무리 원해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李대통령 성토장
 
  6월18일, 백악관의 각료실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주재 아래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다. 이 제 150차 국가안보회의는 독일문제 등 다른 의제는 제쳐 놓고 李承晩의 성토장이 되어버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구 대신 새로운 敵을 얻게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李承晩이 UN군 사령부와 사전협의 없이는 단독행동을 취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2만5000명 가량의 북한군 포로를 석방한 사건은 사전에 신중히 계획된 것이고, UN군 사령부와 李承晩 자신의 약속을 무시한 행동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지금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지금 李대통령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 중에 있는데, 만일 그가 그런 행동을 계속하면 그것은 한국에 대한 결별을 의미하게 된다는 내용이 포함될 것입니다.
 
  클라크 장군 혼자서는 李承晩과 싸울 수 없습니다. 그에게 보낼 메시지를 온 세상에 공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자유세계는 당황하고,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李承晩이 혼자서는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으므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국 하원에서도 6시간 전에 이 소식을 듣고 야단이 났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아이젠하워는 처음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이제는 휴전회담이 완전히 무산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는 『李대통령에게 대단히 노골적이고도 강경한 메시지를 보내, 자제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미군이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통고하겠다』고 말했다. 조지 험프리 재무장관이 만약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면 그 과정에서 군사적 재난이 초래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이젠하워는 필요하다면 중대한 손실 없이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고 대답했다.
 
  『李承晩의 행동은 최근 중공군의 대공세와 전혀 관계가 없고, 몇 주일 전부터 계획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보낼 메시지에 대해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敵이 그런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백악관 보좌관 로버트 커틀러는 한국에서 철수할 생각이라면 대통령이 명확하고도 강력한 성명을 발표하여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신뢰를 파기했다고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미군을 철수시킨다면 동맹국과 美 국민들에게 무서운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李承晩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덜레스 장관은 지금부터라도 잘 수습하면 사태가 그렇게 악화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휴전을 무산시키고, 미국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에 최후의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그 시도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안다면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 측이 2만5000명의 포로탈출 사건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휴전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공산 측이 이번 사건에 관계없이 휴전에 응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李대통령에게 가능한 가장 강경한 자세로 대응해서 그가 사실상 이 쇼를 연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통령 특별보좌관 C. D. 잭슨은 이번 사건은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와 연관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李대통령에게 대해서는 강경하게 나아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휴전협상을 포기하면서 미군철수를 시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동독과 동유럽 위성국에서 직면하고 있는 사태 때문에 중대한 난관에 부딪쳐 있습니다. 이런 압력을 중단시켜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 철수하면 이들에게 승리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그렇다면 李대통령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는 말이냐고 농담조로 반문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李承晩 대통령의 조처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아니면 강력한 비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아무런 항의 없이 이 사건을 용인한다면, 동맹국들은 그것을 동맹정신의 파기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에서 드러난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려 할 것이고, 미국이 한국조차 통제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해석될 것입니다. 이 사건은 테일러 장군이나 클라크 장군에게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후방에서 무슨 일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을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리처드 닉슨 부통령은 미국이 한국에서 철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물러나면 우리가 어떻게 설명을 하든 공산주의들의 승리로 간주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는 韓美상호방위협정 체결을 제의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李承晩이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뜨렸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같은 행동은 미국의 자존심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李承晩은 극동의 모사데크
 
   국무장관 덜레스는 말했다.
 
  『李承晩이 이번 사건에서 적당히 넘어가고, UN군 사령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휴전은 불가능해집니다. 그가 우리의 권위를 인정하든가, 우리가 따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통해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는 체면을 살리는 길을 택해서 휴전을 수락할 것입니다』
 
  안보회의 참석자들은 영국의 반응에 관심을 돌렸다. 아이젠하워는 아마 美 하원의 야당과 비슷할 것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영국은 미국을 비난할 것이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설적인 제안은 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스타센은 李承晩이 그들의 모사데크와 같은 존재라고 설명하면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사데크는 이란의 민족주의자로, 1951년 수상이 되어 영국 지배下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가, 1953년 서방 측의 지원을 받은 親王 쿠데타로 실각했던 인물이다. 여러 가지를 시사하는 비유였다.
 
  이날 회의는 李대통령에 대한 공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아주 강경한 비밀 서한을 보내기로 결론짓고 끝났다. 아이젠하워는 덜레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李대통령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전쟁과 全세계를 통해서 추구한 중요한 목표의 하나는 자유세계를 분열시키는 것이다. 한 나라의 행동이 대다수 국가의 욕구나 목적을 훼손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의 이익과 목적을 강화하는 상황이 자동적으로 생성된다. 자유세계 국가가 단결하지 못하면 한국의 통일과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우리들의 집단구조가 와해되면 한국의 장래는 암담할 것이고, 강화되면 영속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아 한국이 완전한 통일 국가가 될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같은 날 오후 2시 30분, 白斗鎭 총리 일행은 덜레스 장관의 요청으로 다시 국무부를 방문했다. 덜레스는 그 직전 李대통령에게 발송한 서한의 내용을 설명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UN군 사령부의 권위를 무조건 수락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조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덜레스는 격렬한 어조로 李대통령을 비난했다.
 
  『李대통령의 조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이로울 뿐입니다. 李대통령의 일방적 행동은 UN군 사령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클라크 장군에게 일방적인 행동은 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는 휴전문제에 관해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질 자유가 있지만, 그럴 경우에는 우리에게 협조할 수 없다고 통보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적절한 대책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한국과 긴밀히 협조하여 경제력과 군사력, 정치력을 신속히 증강시켜 북한 주민이 이끌릴 수 있도록 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긴밀히 협조하면 통일도 가능합니다. 무력통일은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때문에 위험하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600마일이나 되는 국경선을 지킬 병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초기에 압록강까지 진격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정치력을 활용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李대통령은 우리들의 신뢰를 흔들었습니다. 15개월간의 협상 노력과 수많은 희생을 代價로 우리는 공산주의자의 양보를 얻어냈고, 反共포로들은 얼마 후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李대통령은 우리 모르게 음모를 꾸며 이 모든 성과를 파괴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反共포로를 석방하는 것이 아니라 휴전협상을 뒤집는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미국 대통령의 서한에 대한 반응을 알기 전에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사태는 심각합니다. 李대통령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면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再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덜레스는 그러나 분열이 드러나면 공산주의자들만 덕을 볼 것이기 때문에 아이젠하워의 서한은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로서 헤어지자… 자살도 우리의 특권이다』
 
  1953년 6월19일, 東京의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합동참모본부에 電文을 보내 남아 있는 反共포로들이 이날 밤 다시 탈출할 움직임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이들이 수용되어 있는 포로수용소 경비를 미군이 인수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들에게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사살 이외의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극한적인 수단을 사용하게 되면,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의 이같은 결정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6월19일, 워싱턴에서는 美 국무부와 美합참 관계자들이 모여 반공포로 석방사건을 검토했다. 존슨은 의회 지도자들이 대체로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라는 의견이었다고 말했다. 프랭크 내시 국방차관은 휴전 전 상호방위 협정 체결이 李대통령의 태도를 바꾸는 데 효과적이라면 그렇게 해보라는 의견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로버트슨은 이미 李대통령이, 안보조약 그 자체는 좋지만, 찬성할 수 없는 휴전의 代價로 체결하지는 않겠다는 답변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白斗鎭 총리의 태도변화입니다. 처음 그가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50분간 만났을 때는 李대통령의 결정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국무장관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워싱턴을 떠날 때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白총리는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李대통령의 휴전에 대한 생각을 바꾸겠다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李대통령이 끝까지 휴전을 거부할 경우 그와 그의 심복인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구금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또 그럴 경우 한국군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논의되었다.
 
  6월19일 오후 6시, 브릭스 駐韓 미국 대사는 李대통령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의 메시지를 전달한 후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전문을 보냈다.
 
  <메시지를 전달하자 李대통령은 변영태 외무장관에게 큰 소리로 읽도록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국과 우리나라가 각자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된다면, 우리 모든 분야에서 친구로서 헤어집시다』
 
  李대통령은 한국의 입장을 다시 설명하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경제 및 군사적 지원을 해준 데 영원히 심심한 감사를 드리지만, 한반도에 중공군을 남겨 놓는 휴전은 수락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만이 그를 심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비록 그것이 자살일지라도 그들의 특권이라고 말했습니다.
 
  李대통령은 전날 밤 전달된 클라크 장군의 서한에 언급, 자기가 약속했던 것은 UN군 사령부로부터 한국군을 철수시킬 경우 사전에 통보하겠다는 것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변영태 외무장관도 李대통령의 사전협의 약속은 한국군 철수에 관한 것이었고, 「일반적인 단독행동」을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1950년 7월의 협정에는 사전협의에 관한 조항이 없으며, 원용덕 장군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은 대통령 이외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설명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李대통령이 서한에서 요구한 보장을 몇 차례 강조하자 그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결정을 바꿀 수 없다고 대통령에게 전해 주십시오. 휴전협정에 서명하면 한국군은 자동적으로 UN군 사령부로부터 철수합니다』
 
  李대통령은 분노보다는 슬픔이 앞선다고 하면서 접견을 마쳤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갈라졌으면서도, 계속 친구로 남게 된 두 친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李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전에 그로 인해 발생할 사태에 관해서 신중히 검토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李대통령은 인도 정부를 규탄하면서 인도군이 한국으로 들어오면 한국인들이 공격을 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도군이 포로문제로 한국에 입국하는 것은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에버레디 계획… 李대통령 제거 검토
 
   1953년 6월20일, 브릭스 대사는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에게 보낸 電文에서 李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李대통령이 끝까지 버틸 경우 그를 제거하는 「에버레디(Ever Ready)」 계획이 UN군 사령부에서 작성되고, 워싱턴에서 검토되었다는 사실을 국방부 電文을 통해 알았다고 하면서, 한국에 UN군 사령부 주도의 군사정부를 수립한다는 생각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는 美 합참의 의견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단독북진도 불사하겠다는 李承晩 대통령의 위협이 현실로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서 5월4일 이 계획을 작성했다. 그 중에는 한국 정부와 한국군, 그리고 한국민이 UN군에게 공공연한 적대행위를 할 경우, UN의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실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5월29일에는 美 국무부와 합참본부가 회의를 열어 UN군 사령관이 군정을 선포하고 李承晩 대통령을 감금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토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브릭스 대사는 클라크 장군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본인은 李대통령의 동기가 진지한 것이고, 애국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만약 그가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의 반대를 제거할 수 있는 과감한 조처를 취할 준비를 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협조적인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한국 정치인에 대한 정보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白斗鎭 총리가 李대통령을 설득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6월22일,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경무대를 방문해서 1시간 10분 동안 李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난 뒤 합참본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電文을 보냈다.
 
  <李대통령은 극도로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으며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는 李대통령에게 미국 정부는 명예로운 휴전을 추구하려는 결의를 하고 있고, 무력으로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거나, 그런 조항을 휴전협정에 삽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 문제는 정치회담에서 해결하려 한다는 점을 수락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나는 포로문제로 韓美 양국군 간에 충돌이 생길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했고, 李대통령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제기했던 정치회담의 시한, 상호방위협정, 한국군 증강, 인도군 입국 등 4개 항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韓美상호방위협정에 대해서 강한 관심을 표시하면서, 장황한 문서보다는 유사시 미국이 한국에 와서 도와준다는 일반적인 내용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이 침략을 할 경우에도 도와준다는 식의 조약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李대통령은 그럴 경우 미국이 도와주기보다는 자기를 규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군 증강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장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증강계획에는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과 공군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李대통령은 또 휴전조약은 한반도의 분단을 수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지지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중요한 발언을 했습니다.
 
  나는 또 한국군이 현재로서는 독자적으로 공격 또는 방어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휴전기간을 통해서 증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나는 또 그 기간 중 한국은 경제적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며,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공산주의자의 침투에 더 유리한 위치에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李대통령 4개 조건 제시
 
  6월23일 정오, 클라크 장군이 東京으로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李대통령이 각서를 보냈다. 22일자로 된 이 각서는 한국정부가 한국군을 UN군 사령부로부터 철수시키지 않을 것이며, 한국인은 UN대표단의 일원으로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지만, 한국군의 모든 이동은 UN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실행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각서에는 네 가지 전제조건이 달려 있었다.
 
  <1. 정치회담은 휴전협정 조인 후 90일 이상 계속될 수 없다. 이 회담 종식 후 60일 이내 중공군의 철수와 한국 재통일에 합의하지 못하면, 휴전은 무효가 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럴 경우 한국군은 美 공군과 해군의 지원 아래 북진할 것이다.
 
  2. 미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하기 전에 대한민국과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3. 미국은 한국 육해공군의 방위능력을 증강할 수 있는 적절한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전쟁으로 피폐된 경제를 재건해서 자립하는 데 필요한 경제원조를 제공한다.
 
  4. 어느 외국군도 포로를 경비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다. 공산주의 세뇌사들도 들어올 수 없다. 아직 억류되고 있는 반공포로는 국제기구의 단기간 심사로 그 의사를 확인하고, 어떤 강압이나 세뇌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이 밖에도 이 각서에는 한국의 공업화 추진, 한국군 戰力의 일본 수준 강화 등의 요구가 들어 있었다.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세계대전을 각오하고라도 자동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 한국이 불법으로 이웃 나라를 공격하면 미국은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상호방위조약에는 이른바 「친선조항」도 제시되어 있었는데, 제3국이 한 조약 당사국의 복지를 위협했을 경우, 다른 조약 당사국은 조정을 통해 그 조약 당사국에게 유리하도록 우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각서를 보고 워싱턴에서는 경악했지만, 서울로 가고 있는 美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월터 S 로버트슨의 접촉결과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6월24일, 東京의 UN군 총사령부에서는 로버트슨 차관보가 참석한 가운데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李대통령의 각서를 집중적으로 토의한 끝에 李대통령이 제의한 1항은 전혀 현실성이 없으며, 미국 정부는 정치회담에서 韓美 양국이 원하고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항의 군사원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상황이 만족스럽게 진전된다면 상호방위협정에 관해서 일반적인 협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3항의 경제 및 군사원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났지만, 4항의 포로문제에 대해서는 장시간 토의를 하는 것으로 그쳤다.
 
 
 
 미국, 한국 포기 검토 시작
 
  참석자들은 모두 李대통령이 현재의 정책을 계속 밀고 간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떠날 수밖에 없다고 최후통첩을 할 때가 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리고 워싱턴에서 3~4일 안에 이 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데도 의견이 일치했다.
 
  6월25일, 서울에 도착한 로버트슨 차관보는 다음 날 李대통령을 방문한 후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電文을 보냈다.
 
  <오늘 아침 나는 브릭스 대사와 함께 李대통령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白斗鎭 총리, 卞榮泰 외무장관, 申性模 국방장관 등이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두 시간 동안 토론을 했습니다. 李대통령이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한 다음, 나는 미국이 이미 제시한 바에 따라 한국이 얻게 될 이익을 강조하고, 동맹국들은 한국의 무력통일을 위해서 전투를 계속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美 국무장관은 정치회담에서 자유롭고 통일된 한국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히 한국 정부와 협조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나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토론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李대통령에게 따로 만나 이야기하자고 제의했고, 그는 수락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사무실에서 50분간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분열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계속 협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자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는 휴전 뒤에 초래될 상황에 대한 우려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앞서 각서에서 제시했던 내용을 일부 수정한 제의를 받아들이면 휴전을 수락할 수 있다고 시사했습니다.
 
  1. 남아 있는 한국 반공포로 8600명은 비무장지대로 보내서 중립국관리위원회의 관리 아래 두고,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남아 있게 해서 중립국 관리위원회의 관리를 받도록 한다.
 
  2. 정치회담의 시한을 90일로 한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조건으로 생각하면서도 당신에게 제시한다.
 
  3. 앞서 약속한 것처럼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 선으로 증강한다.
 
  4. 韓美상호방위조약은 대체로 필리핀과 체결한 조약과 같은 수준으로 즉시 보장한다>
 
  이 電文에 대해 美 국무부는 고무적이라고 판단하고, 6월26일, 주한 美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보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1항에 대해서는 수송문제만 없다면 동의한다고 말했다. 3항과 4항의 상호방위협정 「보장」에 대해서도 미국 헌법에 따라 상원의 권고와 동의가 필요하지만 역시 동의했다.
 
  2항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 회담 참가국에 대해서 시한을 설정할 수 없지만, 90일이 경과한 후 아무런 진전이 없고, 공산주의자들이 침투와 선전, 또는 기타 방법으로 한국을 난처하게 만드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미국은 한국과 함께 이 정치회담에서 함께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의견이다. 우리는 휴전이 발효된 후 즉시 시작될 정치회담에 관해 한국과 협의를 한 후 이 점에 대해서 우리들의 의사를 명확히 발표할 태세가 되어 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
 
  6월27일, 로버트슨 차관보는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電文을 보냈다.
 
  <상호방위조약 논의에서 「보장」이란 말은 부정확한 단어입니다. 李대통령은 이 조약은 상원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요청하고 있는 것은 휴전협정 조인까지 기다리지 말고 즉시 협상을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李대통령은 그가 발표했던 격렬하고 단호한 성명 때문에 태도를 바꾸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50만 명 가량이 모인 대규모 한국전쟁 기념집회에서 그는 감동적인 연설로 현재 협상 중인 휴전협정을 규탄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나를 만난 단독접견에서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오. 우리가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시오』
 
  우리는 기본 정책은 유지하면서도 세부사항은 수정하는 식으로 그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책상을 치거나 비난하고, 위협을 가할 시기가 아닙니다.
 
  국무장관의 서한을 읽을 때, 李대통령의 목소리는 감정에 복받쳐 떨리기도 했습니다. 서한을 다 읽고 나서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서한의 정연한 논리가 李대통령과 다른 참석자들에게 큰 인상을 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문보도는 이 서한에 새로운 제안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한국민들이 그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李대통령의 체면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그 서한을 공개하는 것은 너무 이르고, 李대통령이 태도를 번복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지연시킬 새로운 구실을 제공하지 않는 한, 李대통령은 싫어하면서도 호의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뒤에도 나는 李대통령과 긴 대화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도 그는 우리와 협조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6월28일, 李承晩 대통령은 로버트슨 차관보와 클라크 장군에게 미국의 지원을 조건으로 UN군 사령부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하는 장문의 각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이 각서를 읽어본 덜레스 국무장관은 李대통령의 고집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치회담에서 휴전협정 서명 후 90일 이내에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고, 유일한 합법정부 아래 재통일을 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韓美양국은 정치회담에서 철수하고, 다른 국가나 기구와 군사적 수단의 원래 목표에 관해 협의함이 없이 즉각 공동으로 군사작전을 재개한다」는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로버트슨 차관보와 클라크 장군은 李承晩 대통령을 만나서 전날 받은 각서의 내용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그동안 양측 사이에 합의되었던 내용과는 차이가 있으며, 부정확하거나 불필요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李대통령은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고, 한국인들은 무기가 있건 없건 공산주의자들과 싸울 것이라고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슨이 아이젠하워가 제의한 지원의 내용과 정치회담에 대한 미국 정부의 목표를 설명하자 李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정책에 맞추어 각서를 수정하겠다고 동의했다.
 
  이 자리에서 李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단순히 한반도의 내전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전쟁이며, 군사적 승리만이 全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을 단념시키고, 한국이 제2의 중국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미국이 한 번도 군사적 방법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키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상호방위조약도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빈틈 없고 광신적인 인물』
 
  7월1일, 李대통령과 끈질기게 접촉하면서 그의 마지막 결단을 기다리고 있던 로버트슨은 李대통령에 대한 좌절감과 존경심이 섞인 심경을 국무부에 보고했다. 그는 李대통령을 「빈틈없고, 수완이 있는 상인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감정적이고 非합리적이며 광신적이기까지 해서 충분히 나라를 자살의 길로 이끌고 갈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李대통령은 현재의 휴전협정은 공산주의자들이 군사적 행동으로 얻지 못했던 것을 협상으로 획득하려는 교묘한 책략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로버트슨은 여론만으로는 李대통령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는 미국과 세계의 여론이 자기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李대통령의 협조를 얻으려면 그가 생애를 바쳐 추구하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미국과 협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확신시키는 것뿐이라고 하면서, 아직 희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때로는 압력을 가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李대통령은 全 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을 포함해서 세계 어느 나라의 지도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정신과 의지는 보존해야 하며,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장비를 제공한 그의 군대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군사력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李대통령을 위협하라』
 
  로버트슨 특사는 어느 새 李대통령의 애국심과 대전략에 설득된 것 같기도 하였다.
 
  이날 李대통령의 서한을 받아본 로버트슨은 다시 실망했다. 서한의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휴전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 합의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단,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은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전투를 재개하겠다고 명확히 약속을 하는 조건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휴전에 관해서 당신이 요청한 것을 준수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휴전조건에 대해서 단연코 반대하고 있는 한국민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고를 받은 덜레스 장관은 로버트슨 차관보에게 李대통령을 만나, 그에게는 대통령 특사로서 그런 약속을 할 권한이 없다는 것과, 그것은 사실상 전쟁행위에 상당하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도 의회의 위임 없이는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현재의 전투행위는 美 의회의 명확한 위임 없이 UN안보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그 회원국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 때문에 불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설사 UN안보이사회가 전투재개를 결의한다고 해도, 美 의회의 선전포고 결의 없이는 미국이 개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7월2일, 백악관에서는 제 152회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다. 이 날의 주제도 역시 한국문제였고, 로버트슨의 보고를 토대로 토의가 진행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든 방법으로 미국이 한국에서 철수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李대통령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실제로 한국에서 철수할 수는 없으므로, 절대로 말로 표현해서는 안 되며, 여러 가지 조처로 시사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당부했다.
 
  예를 들면 미군부대나 보급품을 이동시키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행동이 李대통령에게는 효과가 없을지 몰라도 한국민에게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7월3일, 로버트슨 차관보는 李대통령을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적인 내용이 포함된 5개항의 미국 측 제안을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안전과 독립을 공격으로부터 방위하는 것을 돕기 위해 미국과 필리핀 간의 상호방위협정과 유사한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한다. 미국 정부는 즉각 상호방위협정을 기초할 협상을 시작할 태세가 되어 있다. 이 협정의 비준은 미국 상원의 권고와 승인절차에 따른다.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증강하고 유지하는 데 원조를 한다. 한국군에는 20개 사단 가량의 병력과 그 지원 공군 및 해군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이 한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한국군을 유지하며, 자립경제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종합적인 경제원조계획과 수송 및 기타 지원계획을 실시한다>
 
 
 
 上院의 조약 비준을 보장하라
 
  미국 측의 신경을 건드렸던 정치회담 실패 후의 행동에 대해서는 韓美 양국이 함께 이 회담에서 철수하고, 즉시 당시 상황 속에서 한국의 통일을 추구하기 위해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지 협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李대통령은 회의에서 내내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고, 1904년과 1945년에 미국이 저지른 실수를 언급하면서 로버트슨 일행을 몰아세웠다. 그는 미국이 그처럼 자주 마음을 바꾸었는데 미국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다그쳤다. 그는 로버트슨이 가져온 각서는 읽어보지도 않았다.
 
  7월4일, 로버트슨은 경무대에서 李承晩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는 白斗鎭 총리, 卞榮泰 외무장관, 美 국무부 동북아국장 케네스 T 영이 배석했다. 로버트슨은 李대통령에 자기가 가지고 온 제안이 사실상 미국의 최종안이라고 하면서 열심히 설득했다.
 
  초점은 정치회담이 실패한 다음의 상황과 상호방위협정에 대한 美 상원의 처리문제였다. 李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집념을 이야기하면서 정치회담이 실패하면 미국이 한국과 함께 전투를 재개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로버트슨이 헌법상의 제약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자, 李대통령은 말했다.
 
  『난 미국 정치인들이 왜 전투재개를 주저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3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나도 아이젠하워나 美 국민 못지않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독으로 통일을 위해 싸울 때 미국은 최소한 도덕적 및 물질적 지원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그런 지원을 하면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위험이 있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상호방위협정이 美 상원에서 비준을 받지 못하면 나는 휴전이 한국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美 상원이 조약비준을 거부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으로부터 상원 지도자들이 신속하게 상호방위조약을 처리할 것이라는 보장을 해줄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로버트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상원의 양당 지도자들과 상호방위협정에 대해 사전 협의 없이 그런 제안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상원 지도자들은 韓美상호방위협정이 필리핀과 체결한 협정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대체적인 호의를 표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젠하워의 6월6일자 서한이 의회에 공시되었지만, 아직 韓美상호방위조약에 반대하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로버트슨은 이날 모임이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하고 그가 전달한 미국 측 제의를 수락할 것을 재촉했다. 李대통령은 몇 분간 신중히 생각한 끝에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卞榮泰 외무장관이 막고 나섰다.
 
  그는 美 상원이 이 조약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면서, 휴전이 조인된 다음에 美 상원이 비준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민을 만족시키려면 이 조약에 대한 완전한 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로버트슨은 휴전이나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를 신뢰하고 있으므로, 한국 정부도 이 조약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비준하도록 하겠다는 미국 정부를 신뢰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卞장관은 미국 상원이 7월 말에 휴회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해 안으로는 비준이 불가능하고, 내년에 가서야 상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UN군 사령부의 압력
 
  美 국무부 동북아국장 케네스 T 영은 휴전이 이루어질 때를 전후해서 大제재선언이 발표될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선언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휴전협정을 위반하면 즉각적인 반응이 있을 것이며, 그것은 한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韓美 양국에 모두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선언이 선례가 없는 시도이며 한국에게 도움이 되는 보장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로버트슨은 이날 끝장을 내려던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李대통령은 끈질겼다. 그는 상호방위조약의 초안을 보여 달라고 다시 요구하면서, 이 조약 처리에 대한 美 상원 지도자들의 확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로버트슨은 경무대에서 돌아온 후 이날 회의가 가장 생산적이고 실무적이었다고 하면서 李承晩 대통령이 훨씬 더 합의에 접근했다고 美 국무부에 보고했다.
 
  1953년 7월5일, 東京의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일련의 조처를 취했다고 국방부에 보고했다. 그가 취한 조처는 다음과 같다.
 
  〈▲고위 미군사령관 회의 소집
 
  ▲일본에서 정비 중인 美 제24사단의 일부 부대 한국으로 이동
 
  ▲송환거부 한국인 포로 집중 수용
 
  ▲한국에 대한 보급품 및 장비의 공급 감속
 
  ▲한국군 4개 사단 창설용 장비 선적 중지〉
 
  클라크 장군은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계획 계속 지연
 
  ▲전투지역에서 부산에 이르는 도로上의 새로운 시설 조사 실시
 
  ▲한국 정부가 담당하던 구호품의 전달 채널 변경
 
  ▲韓貨계정을 대폭 감소시키고, 보유 인력을 최대한 활용
 
  ▲민간경제를 위해서 지원하던 민간건설공사 중단
 
  ▲전투작전에 직접 관계없는 군사 건설공사 중단
 
  ▲비밀작전 부문의 철수에 대비한 비상 계획 작성
 
  ▲UN司의 움직임에 대한 소문을 은밀한 수단으로 한국군 고위층에게 전파
 
  ▲비밀활동을 위해 고용한 일부 현지인 해고
 
  ▲90척의 기동선단을 인천과 부산에 예비로 배치하고, 해군 해안부대와 해병 상륙여단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
 
  ▲한국 국방장관 및 3군 참모총장 회의 소집
 
  ▲한국군 3군 참모총장과 궁극적으로 훈련 책임을 한국 측으로 이전하는 협의 시작〉
 
  클라크 장군은 이같은 조처는 극비리에 실행해야 하고, 누설되면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이런 조처가 단기간에 李承晩 대통령에게 충격을 주고, 한국의 군부와 정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로버트슨이 서울에서 추진 중인 노력에는 역효과를 주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자동개입을 보장하라…』
 
  당시 미국은 북한 지역에서 중공군이 계속 증강되고 있었고, 휴전이 되면 협정에 따라 중장비 도입이 불가능해지므로, 李承晩 대통령의 요구와는 관계없이 그 전에 한국군을 20개 사단 수준으로 증강하기 위한 계획을 급속히 추진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6월18일까지 26사단과 27사단이 창설되어 한국군은 3개 군단의 18개 사단으로 증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돌연 이런 저런 구실을 들어 장비 인도를 지연시키게 되자 그 메시지는 달리 해석할 수 없는 명확한 것이 되었다.
 
  7월6일, 李承晩 대통령의 고집을 이해하게 된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제는 미국 쪽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의 역사를 훤하게 알고 있는 李대통령으로서는 확실한 보장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다. 그는 이날 밤 美 국무부에 電文을 보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상원의 양당 지도자를 만나 韓美상호방위조약이 상정되면 지지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7월7일, 또 하나의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미국 쪽이었다. 이날 아침 東京의 UN군 방송은 美8군사령관 맥스웰 D. 테일러 장군이 그의 사령부에서 미군 군단장과 한국군에 파견된 미군 고문관을 소집하여 한국 정부의 휴전거부 문제를 토의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이렇게 전했다.
 
  <…美8군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과 휴전에 조인하면 한국 정부와 협조를 하거나 협조 없이도 미군과 영국군 사단을 전선에서 철수시킬 독자적인 계획을 수립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軍지휘관 회의는 李承晩 대통령과 로버트슨 차관보가 오전 11시 서울의 경무대에서 다시 만나기 직전에 소집되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로버트슨을 보자 美 군부가 한국군을 분열시키려 하고 있으며, 그 방송은 자기에 대한 협박이라고 화를 냈다.
 
  『나도 체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덜레스 장관과 합의했다고 발표하면, 사람들은 내가 그 협박에 굴복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겠소?』
 
  李承晩 대통령은 다시 미국 측 초안에 자동개입 조항이 없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그는 한국이 필리핀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는 달리 단숨에 치명타를 받을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으므로 미국은 「즉각적이고도 자동적인」 개입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본토 및 그 주변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한 美日안보조약과 같은 조약을 원했다. 다음 날 회의에서 로버트슨은 한국內와 그 주변에 미군의 주둔을 원하는 李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했다.
 
 
 
 아이크의 불평…『마음에 안 드는 동맹자』
 
  1953년 7월9일, 李承晩 대통령은 처음으로 휴전협정 체결 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를 철회했다. 그는 또 美 상원의 즉각적인 韓美상호방위협정 비준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다음 회기 안에 처리하겠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약속을 수락했다. 이로써 휴전과 韓美상호방위조약을 둘러싸고 韓美 양국 간에 벌어졌던 수개월간의 치열한 외교전은 사실상 대단원을 맞게 되었다.
 
  7월12일, 韓美양국은 다음과 같은 5개항에 합의했다.
 
  〈▲휴전 후 韓美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실시하며, 그의 일환으로 우선 2억 달러를 제공한다.
 
  ▲미국과 한국은 휴전 후 개최하게 되어 있는 정치회담이 90일이 경과해도 하등의 실질적인 성과가 없으면 이를 거부한다.
 
  ▲한국군의 증강을 계획대로 진행시킨다.
 
  ▲정치의회가 열리기 전에 공동목적에 관한 韓美간의 회의를 개최한다〉
 
  당초 3~4일이면 끝날 것으로 낙관했던 로버트슨 차관보는 16일간에 걸친 힘겨운 줄다리기를 마치고 서울을 떠났다.
 
  7월13일 밤,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5개 군단의 대병력을 투입, 한국군 2군단을 다시 人海전술로 공격했다. 한국군 2군단과 미군 9군단은 일단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반격을 가해 7월19일에는 잃었던 지역의 반을 회복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한국전쟁의 마지막 공세로 9km 가량 진출할 수 있었으나, 6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군은 반격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임박한 휴전을 고려한 UN군 사령부의 제지로 더 이상 나아가지는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李承晩 대통령의 고집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李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라고 하면서 아무리 심한 말로 비난해도 충분치 않다고 불평했다.
 
  7월25일, 李대통령은 다시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언젠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재발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공산주의자의 재침뿐만 아니라 일본의 야욕도 사전에 봉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 날 덜레스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공격할 경우에도 미국의 즉각적이고도 자동적인 군사적 대응이 발동되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네루, 당신은 李承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오』
 
  7월27일 오전 10시, UN군과 공산군 대표는 3년 1개월간 계속된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는 정전협정문서에 서명했다. 이날 밤 10시부터 휴전이 발효되어 全전선에서 포성이 멈추었다.
 
  포성은 멎었지만, 한 나라의 생존을 지키려는 끈질긴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8월5일, 韓美상호방위협정의 세부사항을 조정하기 위해 서울에 온 덜레스 국무장관은 경무대에서 李承晩 대통령을 만났다. 회담 분위기는 좋았다. 덜레스는 李대통령에게 말했다(李대통령의 고문 로버트 올리버 기록).
 
  『얼마 전 인도수상 네루를 만났을 때, 李박사를 단단히 붙들어 매놓으라고 하더군요. 내가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하자, 그는 내가 李박사는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李박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덜레스 장관은 지금 미국이 한국과 새로운 토대 위에 관계를 정립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그동안 항상 다른 강대국 몇몇 나라와 한국에 대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한국에 통고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서울에 온 것도 그런 변화의 하나라고 말했다.
 
  『강대국의 국무장관이 정책을 조정하기 위해 멀리 바다를 건너서 약소국의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일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결정짓는 일은 그 결정이 어떻게 나든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李대통령은 동의하면서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회의의 본질문제에 들어가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덜레스 장관이 가져온 韓美상호방위조약 초안에는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개입조항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초안에는 「공산당을 북한에서 몰아내기 위한 미국의 군사행동 보장」도 없었다. 자동개입조항에 대해서는 卞榮泰 외무장관이 미국 측의 주장대로 헌법상 문제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득했고, 결국 李대통령도 몇 가지 단어를 추가하는 선에서 미국 측 초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회담 실패 후 미국의 군사행동 재개 보장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이 회담에서 李대통령은 일본의 잠재적 위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일본을 군사적 및 경제적으로 강화시키려는 생각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일본이 한반도를 다시 점령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덜레스 장관은 미국도 일본이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서태평양의 안전을 위해서 한국과 일본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절묘한 도박사들
 
   8월7일, 李承晩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회의를 열었다. 李대통령의 고문으로 처음부터 이 회담에 참석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두 사람의 주장에 타협의 여지가 없어 그 마지막 회담이 결렬되면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全세계의 모든 정치인들 중에서 이 두 정치가는 공산주의 위협의 성격과 그 대처방법에 대해 기본적으로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는 슬픔과 기구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은 덜레스의 표현대로 전쟁 없이 소련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절묘한 不戰勝의 전략」을 쓸 줄 아는 도박사의 소질을 가진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기질에 있어서도 이들은 닮은 데가 많았다. 두 사람은 지금 자기들이 숙명적으로 맡아야 했던 역할에 극도의 긴장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덜레스의 왼쪽 눈은 자주 경련을 일으켰고, 자기가 완전히 수락하기 어려운 정책을 정당하다고 주장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얼굴은 더욱 지쳐 있었다>
 
  덜레스 장관은 더 의논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미 UN 참전국들이 입장을 결정해 놓았으므로 그것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李대통령은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하러 여기 왔습니까? 나와 함께 조건을 의논할 의사가 없다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조건을 내게 電文으로 통보만 하면 되었을 것 아닙니까?』
 
  덜레스 장관은 李대통령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휴전을 승인해 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나 UN도 민주적이고 독립된 정부 아래 통일하려는 노력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목표는 당신의 목표와 똑같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당신은 전쟁으로 목표를 달성하기를 바라고 있고, 우리는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하려는 것뿐입니다. 왜 당신은 우리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고집하십니까?』
 
  李대통령은 대답했다.
 
  『나도 당신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도 이 전쟁에서 한국만큼 큰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목표를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면 우리보다 그것을 다행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당신들이 평화적 교섭으로 우리들의 공통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공산당이 전쟁터에서 쟁취하지 못한 것을 회담 테이블에서 양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까?』
 
  덜레스 장관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李대통령은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에 한반도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미국이 전투를 재개하겠다고 동의하겠느냐고 다그쳤다.
 
  덜레스 장관은 자기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고 대답했다. 李대통령은 그러면 회담이 실패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덜레스 장관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미국은 실패할 수 없으며,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평화적 방법으로 계속 밀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절망하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이오』
 
   8월8일, 卞榮泰 외무장관과 덜레스 美국무장관이 대한민국과 美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에 가조인했다. 美 국무부는 이 조약이 공통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공통의 조처로 단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美 상원이 신속히 이 조약을 비준할 것을 희망하고, 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한국內의 미군은 휴전조건을 준수할 것이며, 만약 공산군이 이 협정을 위반해서 한국군 등 UN군을 공격하면 즉각 자동적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성명은 또 정치회담이 10월27일 안으로 열릴 것이고, 미국은 한국 및 기타 UN 참전국 대표와 함께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평화적 통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정치회담이 90일간 계속된 다음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고 한국을 난처하게 만들기만 한다는 것이 확인되면 미국은 한국과 함께 철수하고, 자유롭고 독립된 통일한국을 이룩하기 위한 협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성명은 3~4년에 걸친 10억 달러 규모의 한국 경제재건계획을 언급하고, 이미 2억 달러는 예상되는 국방비 절약분에서 인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8월10일, 李承晩 대통령도 성명을 발표했다. 휴전에 반대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정치회담이 한국의 평화와 통일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공산치하에 남아 있게 될 동포들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호소하면서 진해 별장으로 혼자 내려갔다.
 
  <…공산학정 속에 당분간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우리 불쌍한 동포들에게 나는 『절망하지 마시오.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우리 이북 5도와 북한의 우리 동포들을 다시 찾고 구출하려는 한국 국민의 근본목표는 과거와 같이 미래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고 외치는 바입니다>
 
  1953년 10월1일, 卞榮泰 장관과 덜레스 장관은 워싱턴에서 이 조약에 공식적으로 조인했다. 한국 국회는 1954년 1월15일, 미국 상원은 1월26일 이 조약을 비준했다. 그 후 한국군 증강문제 때문에 양국정부 간에 이견이 발생, 비준서 교환이 연기되다가 11월17일부터 이 조약은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韓美상호방위협정 한국어 원문]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저 하는 희망을 재확인하며,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평화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당사국 중 어느 일국이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자신을 방위하고저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조직이 발달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저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제1조 당사국은 관련될지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또한 국제적 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국제연합에 대하여 부담한 의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무력을 행사함을 삼갈 것을 약속한다.
 
  제2조 당사국 중 어느 일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와 상호방위원조에 의하여 무력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며 강화시킬 것이며, 본 조약을 실행하고 그 목적을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하에 취할 것이다.
 
  제3조 각 당사국은 他당사국의 행정지배하에 있는 영토와 각 당사국이 他당사국의 행정지배하에 합법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에 있어서 他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은 선언한다.
 
  제4조 상호 합의에 의하여 美 합중국의 육군, 해군,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內와 그 부근에 배비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美 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제5조 본 조약은 대한민국과 美합중국에 의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와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 효력을 발생한다.
 
  제6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당사국이든지 他당사국에 통고한 후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지시킬 수 있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全權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한다.
 
  본 조약은 1953년 10월1일에 와싱턴에서 한국문과 영문으로 두 벌로 작성됨.
 
 
 
 대한민국을 위해서 변영태
  美합중국을 위해서 존 포스터 덜레스

 
  [필자 後記]
 
  月刊朝鮮 趙甲濟 사장이 관련 자료철을 주면서 올해 출범 50주년을 맞게 되는 韓美상호방위협정의 다큐멘터리를 한 번 정리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들었을 때 그 이면에 이렇게 기막힌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잘 몰랐다. 그러나 美 국무부에서 비밀 해제된 문서를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서 나는 한 나라의 운명을 걸고 세계 최강의 강대국, 아니 온 세계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던 한 老정치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국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내버렸던 조그만 나라 때문에 쩔쩔매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그의 전략은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열강의 세력경쟁을 목격했고, 망명생활을 통해 미국의 힘과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했던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거의 모든 생존수단을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던 우리에게 이렇다 할 협상카드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李대통령은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어르고,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의 의표를 찌르는 행동으로 결국 미국으로부터 韓美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낸다.
 
  그는 국내외적으로 고립되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아이젠하워와 맞서 싸운다. 그를 경멸하고 비난하며 제거하려고까지 했던 적대적인 사람들도 결국은 그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된다.
 
  李대통령이 집념으로 얻어 낸 이 조약은 단순히 휴전 후 공산군의 재침 가능성에 대한 보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문서 자료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의 재무장이나 패권추구 가능성까지를 고려한 원대한 동북아시아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부정선거 때문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에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韓美상호방위조약은 그 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안정의 기초가 되었고, 한국이 세계를 무대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발판과 울타리, 그리고 우산이 되었다.
 
  요즘 주한미군을 단순히 한 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세이고 간섭으로만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구호와 선동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50년 전에 전개되었던 이 극적인 사건은 가치 있는 교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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