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意 없는 선량한 얼굴
지난 4월25일 오후 7시50분에 독일 출신 의사인 인권운동가 노베르트 폴러첸(Nobert Vollertsen)을 서울 소공동에 있는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을 때 나는 그에게서 무엇인가 독일적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약속시간 5분 전에 호텔에 도착,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8시가 되어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리셉션에서 물어보았더니 그 호텔에 묵고 있지 않지만, 가끔 로비에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기다려 보기로 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사진으로 보았던 그가 휴대폰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왔다. 흐트러진 금발에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있었고, 검은 티셔츠 위에 가죽 점퍼를 입고 있었다. 번쩍이는 눈이 인상적인,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한 얼굴이었다.
그는 미국 ABC TV 기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양해를 구했다. 그는 연신 손을 저으며 전화에 대고 열심히 탈북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10분 정도 이야기를 더 계속한 다음, 그는 時差 적응을 하지 못해 약속이 겹쳐졌다고 사과했다. 그가 약속했다는 식당으로 들어가자, 미국인 인권운동가와 신문기자 그리고 이름이 알려진 몇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탈북자를 돕기 위한 모임이라고 했다. 그들은 북한의 인권과 탈북자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폴러첸과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오후 7시 정각 그는 웨스틴 조선 호텔 로비에 나타났다. 역시 그는 독일인이었다. 어제 저녁과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전형적인 독일인이라고요? 아닙니다. 전형적인 독일인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는 팔을 들어 경례하는 흉내를 냈다. 그의 아버지는 다임러 벤츠社의 평범한 기계공이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권위에 절대로 복종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기가 옳은 경우에도 경찰이나 학교 선생님에게 항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다른 모든 것은 좋아했지만, 그것만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선생님이 옳다고 했습니다』
열네 살 때였다고 한다. 그가 선생님에게 「바보 같은 놈」이라고 야단을 맞은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대드는 대신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우들 앞에서 바보는 그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항상 가방에 책을 가득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결국 그는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고, 학생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언젠가 선생님이 뒤셀도르프市의 관리와 학부형, 학생, 그리고 신문기자까지 참석하는 모임에서 학교의 신축 건물과 우수한 교사를 찬양하는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예 원고를 써주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 원고를 앞부분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밤을 새워 내 생각대로 고쳤습니다. 학교당국의 독일식 권위주의와 무능한 교사를 비판했습니다. 내 연설을 듣고 모두들 당황하더군요』
폴러첸은 일약 유명 학생이 되었다. 학교당국으로부터는 못된 학생으로 낙인찍혔지만, 성적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그는 의과대학에 갈 수 있었다. 원래 그는 법률이나 정치, 역사, 저널리즘 같은 것에 흥미가 있었으나,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병원을 구경하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처음으로 수술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때까지 그는 인체에 대해서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었다.
그는 뒤셀도르프에 있는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남보다 먼저 모든 과정을 6년에 마치고 25세가 된 1984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軍에 징집되어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군대에서도 그는 여전히 반항적이었지만, 남보다 열심히 일하고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軍 복무가 거의 끝날 무렵, 그는 휴가를 얻어 의료도구를 짊어지고 인도양에 있는 몰디브 섬으로 갔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는 이 섬에서 1년 반 동안 살면서 의료봉사를 하다가 관광객으로 온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이들은 사랑에 빠졌고, 독일로 돌아가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1990년, 폴러첸은 그녀가 사는 괴팅겐으로 옮겨가서 개인진료실을 차려놓고 家庭醫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는 아이도 네 명이나 생겼고, 1999년까지는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반항아적 기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의사들이 진정으로 환자를 치료하기보다는 돈 버는 데 더 열중하고 있고 그 이유는 의료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독일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들은 X선 촬영이나 각종 검사 같은 것을 많이 해야 돈을 벌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혼이나 시험낙방 같은 환자의 정신적 문제 같은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5분간 진찰을 하고, 처방전을 끊어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나는 찾아온 환자와 때로는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가능한 한 검사를 하지 않고, 약이나 주사도 쓰지 않았습니다. 수입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돈을 잘 벌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죠. 어쨌든 환자들은 내 스타일을 좋아했습니다』
독일 최초의 의사 반란
폴러첸은 의료제도를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환자 350명과 함께 괴팅겐市 보건국에 들어가 시위를 했다. 독일 역사상 의사의 시위는 그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신문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어떤 신문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판했고, 『반항적인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이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 때 그는 미디어, 특히 텔레비전 영상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는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고, 때로는 과장된 연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목표를 이해하고 공감한 기자들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런 투쟁방식은 그 후 탈북자를 지원하기 위한 싸움에서도 그대로 활용되었다.
『패배한 보건당국은 내가 의사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했습니다. 나는 법정 증언대에서 텔레비전 화면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기발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나는 권총을 꺼내서 내 머리를 겨누었다가 내려놓고 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수갑을 꺼내서 보여주고 넣으면서 체포당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주사기를 꺼내들고, 주사를 맞고 죽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한 경찰관이 권총을 법정에서 꺼내든 것이 형법위반이라고 하면서 나를 그 자리에서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든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주사기로 목을 찔러 자살하려는 것처럼 했습니다. 목에서 피가 나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습니다. 물론 주사기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마치 기절한 듯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앰뷸런스에 실어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슬쩍 빠져나왔습니다. 그 모든 검사를 받기 싫었고, 상처는 나 혼자서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나는 내 진료실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자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나를 의사가 아니라 배우라고 한 신문도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지지했지만, 그것이 가정생활과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싫어했다. 신문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것이 아이들에게 결코 좋을 리 없었다. 결국 1999년 이들은 이혼했다. 그는 좀더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독일의 의사봉사단체 「캅 아나무르(Cap Anamur)」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베트남전쟁 후 보트 피플을 구조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캅 아나무르에서 남부 수단과 북한 중 어느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북한을 선택했다. 북한에 관한 자료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1999년 7월, 평양에 도착한 폴러첸은 눈을 의심했다. 평양은 아름다운 도시였고, 신문에서 읽은 기아나 빈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각도 호텔에는 호화로운 나이트 클럽이 있었고, 외국인 전용 상점에는 무슨 물건이든지 있었다.
『나중에 나는 지방을 돌아보고 평양이 쇼 케이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트와 군부를 위한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옛 동독 출신 동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실은 통일 전 동독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선전을 위한 피부이식
폴러첸은 헌신적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중화상을 입고 죽어가던 북한 사람에게 피부를 떼어준 일이 있은 후, 친선메달까지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친선메달 증명서만 보이면 북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는 동북지방을 제외하고는 총연장 11만㎞나 여행을 했다. 金正日 생일축하식 같은 행사가 있을 때는 빠짐없이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 11월, 평양 북방 50㎞ 북쪽에서 길 위에 버려진 병사의 시체를 본 다음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안내원과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이 때문에 그 해 12월30일 비자연장이 거부되고 북한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
『피부이식 수술은 세 번 했습니다. 두 번째 수술은 기자와 텔레비전 카메라가 동원되는 등 일종의 선전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150명의 피부제공 자원자들이 줄을 서 있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일부러 칼을 깊이 넣어 피를 많이 냈습니다. 수술용 메스가 없어서 면도칼이나 보통 칼을 사용했습니다. 나중에 이 장면 사진은 북한의 모든 병원에 걸렸습니다. 세 번째는 1년 후 독일에서 한 정치인이 왔을 때였는데, 북한당국은 그에게 피부제공을 하도록 했습니다. 나도 다시 참가했습니다. 이 역시 텔레비전 카메라가 동원되는 등 전적으로 선전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병원책임자는 키가 154㎝밖에 안 되는 여자였는데, 피부를 제공하겠다고 내놓은 허벅지를 보니까 20여 군데나 상처가 있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병원책임자가 환자에게 자기 피부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병원의 젊은 간호사들도 피부를 제공했습니다. 정말 북한 여자들은 대단합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배낭을 메고 100㎞나 되는 여행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는 한국에서도 두 번 경찰 신세를 진 일이 있다. 작년 1월, 그는 판문점에서 미디어의 이목을 끌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가는 쇼를 벌이다가 미군에게 체포되었고, 한국 경찰에게 인계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고의로 범법행위를 했으므로 당국의 태도는 나무랄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후 탈북자 및 인권단체 사람들과 서울에 있는 중국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다가 「가혹행위」를 경험했다. 젊은 경찰관들이 그를 둘러싸고 얼굴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발로는 다리와 국부를 걷어찼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진을 들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공격을 가했습니다. 나는 버스로 끌려가 30분 가량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항의를 하자 경찰은 나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나를 석방한 진짜 이유는 그곳에 모여 있던 미디어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기자는 물론, 타임지, 로이터통신, AP통신, CNN, 독일 기자 등 외국 텔레비전 취재반이 지켜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거든요』
스페인대사관으로
어떤 면에서 그는 당국의 탄압을 오히려 반기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미디어에 보도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없었더라면 북한이나 남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극적인 텔레비전 영상이 나올 수 있는 사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CNN이나 ABC, CBS 쪽에서도 내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남들이 보면 미친 짓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미디어 작품은 탈북자 25명을 중국 베이징의 스페인대사관에 진입시켜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게 했던 사건이다. 지난 3월14일의 일이었다.
『당시 베이징 사건을 내가 계획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홍보책임자였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이즈 메이커(말썽꾼)」였죠. 우리가 그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이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 직전에 동독인들이 프라하에 있는 서독대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헝가리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북한 관계에서도 그런 일이 되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런던에서 열리는 인권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비행기 속에서 탈북자 100명을 베이징에 있는 독일대사관으로 망명시키는 계획을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나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그 숫자를 25명으로 줄였습니다. 시기는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이나 그 전으로 잡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미디어와 공동작전
그 후 내가 워싱턴을 거쳐 베이징에 갔을 때 우리들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일본에서 정보가 새나간 것 같습니다. 유엔고등판무관사무소와 독일대사관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었더군요. 두 명이었던 경찰관이 네 명으로, 아무도 없었던 곳에 새로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도 둘러보았습니다. 독일인 학교도 검토했지만, 영상효과가 좋지 않고, 탈북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계가 가장 허술한 대사관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스페인대사관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당시 스페인은 유럽공동체(EU) 의장국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유럽공동체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대사관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탈북자들에게는 마지막 순간, 식당에서 이 계획변경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스페인대사관에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중국인 관광객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야구모자를 쓰게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디어였습니다. CNN 기자는 대형 장비 대신 핸디캠을 들고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른 미디어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스페인대사관 앞에 있는 그리스 식당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식당 안에는 중국 경찰도 있었는데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 경찰은 우리 계획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대사관 정문에는 경찰관이 한 명밖에 없었고, 나무로 된 문은 전날 밤 확인한 대로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방법도 연구해 보았지만, 아이들과 고혈압 환자가 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런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중국 경찰은 나를 저지하거나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 다음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원래 계획은 그 사건 직후 베이징을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CNN 지국까지 가서 인터뷰를 하고, 이메일로 이 소식을 전하느라고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이날 저녁 나는 거의 모든 독일 신문이나 텔레비전과 인터뷰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면서 약간 걱정을 했는데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 사건이 있은 후 중국대사관에서는 비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나도 당분간 베이징에는 갈 생각이 없습니다. 공연히 다른 사람들만 괴롭히게 될 테니까요』
폴러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는 가방에 사진이나 책, 신문과 잡지 스크랩을 보여주면서 열변을 계속했다. 가방 속에는 북한에서 받은 친선메달과 친선메달증, 자동차 면허증을 비롯해서 아내와 찍은 몰디브 해변 사진, 괴팅겐 법정의 법정투쟁 스크랩까지 기자들을 즐겁게 해줄 모든 자료가 들어 있었다. 미디어 작전을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는 한국의 언론에 불만을 표시했다.
레인 메이커
『햇볕정책 때문에 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독일의 경우, 서독과 동독 사이에 정상급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우리는 동독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동독인이 경계선을 넘어 오다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검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상하게도 북한의 인권유린이나 탈북자의 비참한 생활 같은 이야기를 미디어에서 별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외국의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많이 소개되고 있는 데도.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햇볕정책을 나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우호정책이나 유화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나는 북한의 보통 사람에게 피부를 제공했을 만큼 그들을 포용(Engagement)한 사람입니다. 나는 햇볕정책을 지지하지만, 레인 메이커(비를 오게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에는 햇볕과 함께 비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평지풍파가 아닙니다. 자연은 격동과 변동이 있어야 발전하고 진화하는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홍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량처형, 강제수용소, 유아살해, 인체실험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화제는 중국에서 경찰에 잡힌 탈북자들이 코를 꿰어 북한 보안요원에게 끌려갔다는 보도로 옮아갔다. 나는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만행이나 북한의 강제수용소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 독일인은 괴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치의 강제수용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침묵을 지키는 수치스러운 일을 했습니다. 나는 독일인으로서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침묵하지 않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북한에서 직접 목격한 만행은 길에 버려진 병사의 시체 하나뿐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카메라와 필름을 빼앗고, 구속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모두 똑같은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살 된 아이나 70세 된 할머니가 모두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은 북한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여덟 살짜리 소년과 소녀들이 도로공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남포에서 평양까지 연결된 40㎞나 되는 그 도로를 청년영웅 고속도로라고 부르더군요. 아이들은 아무런 장비나 도구도 없이 돌을 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아이들은 金正日의 생일축하행사를 위한 행진연습까지 했습니다. 새벽 2시에 말입니다.
나는 메들린 올브라이트 美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함께 온 미국기자들을 안내해서 당국이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 지역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나를 맡고 있던 안내원이 사라졌습니다. 외국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군인과 경찰이 밤중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들을 구타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金正日을 국제법정에 세워야 한다
폴러첸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지금은 탈북자를 돕는 운동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유고의 밀로셰비치와 마찬가지로 金正日을 헤이그의 국제법정에 세우는 것입니다. 수백만 주민을 굶어죽게 한 혐의입니다. 그는 내가 알게 된 최초의 독재자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애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주범입니다. 물론 판사는 남북한 사람들이어야겠죠. 그리고 분단의 역사를 가진 독일인으로서 한반도에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가 저지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나는 북한의 보통 사람은 좋아합니다. 어느 의미로는 남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아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척 순수합니다. 물질적 경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죠.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지하철이 어떻고 주차장이 어떻고 하는 데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하고 있을 북한의 동포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한의 학생들은 이스라엘의 인권문제는 알고 있으면서도 70㎞ 북쪽에 있는 동포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판문점에서 나를 체포해서 수갑을 채운 미군병사는 나보고 「말리나 남아공화국, 아프리카 등 상황이 더 심각한 곳이 많은 데 왜 북한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여기 목표가 달성되면 그곳으로 가겠다고. 나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믿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 그 목표를 위해서 일할 것입니다』
그는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제임스 모즐리의 「비탄: 버마의 민주화와 진실을 위한 투쟁」이었다.
『젊은 친구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런던에서 만났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부끄럼을 타는 사람인데 미얀마에서 인권운동을 하다가 3년 동안 투옥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꾸밈이 없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미얀마 당국과 싸웠습니다. 나는 이름난 정치가나 명사는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대개는 실망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아닙니다. 요즘에도 계속 이메일을 주고받고 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기발한 방법을 충고해 주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미국에서 反戰운동을 이끌었던 제리 루빈 같은 사람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는 폭력이나 유혈수단 대신 희극적인 활동으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일종의 정치적 광대였습니다. 나도 단식투쟁이나 폭력, 또는 분신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루빈처럼 텔레비전에 극적인 영상으로 비칠 수 있는 활동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폴러첸은 모습은 전형적인 아리안계 서양인이지만, 사고방식은 동양적이다. 일찍부터 동양의 불교나 문화를 동경했고, 1960년대 말 독일에 간 한국 간호사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인 간호사들은 그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까지도 뒤셀도르프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세례를 받은 개신교 신도이지만, 불교의 윤회사상 같은 것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고, 인간이 에너지(氣)의 존재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나는 의사와 과학자로서 에너지법칙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죽어도 그 에너지는 어딘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2500만 년 전에 사라진 공룡의 에너지가 지금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에너지도 지금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은 절대로 파괴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네 살 난 아들이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마당에 묻은 일이 있었습니다. 4주일 후 그 무덤에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개미와 작은 벌레들이 그 주위에 몰려 열심히 무엇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 것을 보고 땅에 묻힌 개가 꽃을 먹여 살리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그 의미는 몰랐겠지만, 나는 그것이 일종의 연속된 에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권운동을 하다가 죽어도 그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일부러 죽을 생각은 없지만, 때로는 死後의 세계가 어떤 것일지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아마 의사로서 사람들의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생명의 탄생이나 똑같은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환자 중에는 정말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의 다음 단계로 옮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 인터뷰가 끝나면 미국에서 온 인권운동가들과 만나 저녁을 같이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곧 워싱턴으로 가서 5월1일 열리는 미국 종교지도자대회에 참석하고, 그 다음날에는 美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끝나면 기자들을 만나 새로운 계획을 이야기하고, 곧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고 한다. 월드컵 취재를 위해서 오는 독일 텔레비전 기자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정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힘의 원천은 북한 아이들 사진
『아침은 독일식으로 커피 두 잔 정도로 간단히 먹습니다. 점심 역시 돌아다니다가 김밥 같은 것으로 간단히 때웁니다. 여기저기서 초청을 받을 때도 많은데, 대개 그런 자리에는 음식이 많이 나오죠. 그런 음식을 많이 먹고 나면 온몸이 피곤해지고, 녹초가 되어 쉬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초청한 곳에 가면 불고기가 나오고, 성찬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정부관리나 당 간부들이 초청했을 경우입니다. 그들은 돈도 있고, 뭐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식사를 간소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방에서 북한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꺼냈다.
『내 힘의 원천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위험에 처해 있고,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돌아다닙니다. 지금 이 일이 나에게는 생활의 전부입니다. 아내와 이혼한 뒤 외롭기는 하지만 이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생활도 없습니다. 나에게는 북한이 사생활입니다.
독일을 떠나서 탈북자 돕는 운동을 하기 시작한 지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보고 싶죠. 그러나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협박이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 前妻는 나에게 가능한 한 아이들에게서 떨어져 있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前妻는 내가 독일에서도 너무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까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번 베이징에서 탈북자 25명이 스페인대사관으로 들어가 망명한 사건이 있은 다음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 가서도 아이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두 시간이나 열변을 토한 그의 목소리는 어느덧 피로의 기색이 나타났다. 그는 다른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일어나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세계의 시선이 모이는 자리이니까요. 이미 경기 시작 이틀 전에 독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북한에 관한 토크쇼에 나갈 계획이 있습니다』●
지난 4월25일 오후 7시50분에 독일 출신 의사인 인권운동가 노베르트 폴러첸(Nobert Vollertsen)을 서울 소공동에 있는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을 때 나는 그에게서 무엇인가 독일적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약속시간 5분 전에 호텔에 도착,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8시가 되어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리셉션에서 물어보았더니 그 호텔에 묵고 있지 않지만, 가끔 로비에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기다려 보기로 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사진으로 보았던 그가 휴대폰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왔다. 흐트러진 금발에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있었고, 검은 티셔츠 위에 가죽 점퍼를 입고 있었다. 번쩍이는 눈이 인상적인,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한 얼굴이었다.
그는 미국 ABC TV 기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양해를 구했다. 그는 연신 손을 저으며 전화에 대고 열심히 탈북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10분 정도 이야기를 더 계속한 다음, 그는 時差 적응을 하지 못해 약속이 겹쳐졌다고 사과했다. 그가 약속했다는 식당으로 들어가자, 미국인 인권운동가와 신문기자 그리고 이름이 알려진 몇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탈북자를 돕기 위한 모임이라고 했다. 그들은 북한의 인권과 탈북자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폴러첸과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오후 7시 정각 그는 웨스틴 조선 호텔 로비에 나타났다. 역시 그는 독일인이었다. 어제 저녁과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전형적인 독일인이라고요? 아닙니다. 전형적인 독일인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는 팔을 들어 경례하는 흉내를 냈다. 그의 아버지는 다임러 벤츠社의 평범한 기계공이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권위에 절대로 복종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기가 옳은 경우에도 경찰이나 학교 선생님에게 항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다른 모든 것은 좋아했지만, 그것만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선생님이 옳다고 했습니다』
열네 살 때였다고 한다. 그가 선생님에게 「바보 같은 놈」이라고 야단을 맞은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대드는 대신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우들 앞에서 바보는 그가 아니고 바로 그 선생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항상 가방에 책을 가득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결국 그는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고, 학생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언젠가 선생님이 뒤셀도르프市의 관리와 학부형, 학생, 그리고 신문기자까지 참석하는 모임에서 학교의 신축 건물과 우수한 교사를 찬양하는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예 원고를 써주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 원고를 앞부분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밤을 새워 내 생각대로 고쳤습니다. 학교당국의 독일식 권위주의와 무능한 교사를 비판했습니다. 내 연설을 듣고 모두들 당황하더군요』
폴러첸은 일약 유명 학생이 되었다. 학교당국으로부터는 못된 학생으로 낙인찍혔지만, 성적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그는 의과대학에 갈 수 있었다. 원래 그는 법률이나 정치, 역사, 저널리즘 같은 것에 흥미가 있었으나,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병원을 구경하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처음으로 수술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때까지 그는 인체에 대해서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었다.
그는 뒤셀도르프에 있는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그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남보다 먼저 모든 과정을 6년에 마치고 25세가 된 1984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軍에 징집되어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군대에서도 그는 여전히 반항적이었지만, 남보다 열심히 일하고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軍 복무가 거의 끝날 무렵, 그는 휴가를 얻어 의료도구를 짊어지고 인도양에 있는 몰디브 섬으로 갔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는 이 섬에서 1년 반 동안 살면서 의료봉사를 하다가 관광객으로 온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이들은 사랑에 빠졌고, 독일로 돌아가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1990년, 폴러첸은 그녀가 사는 괴팅겐으로 옮겨가서 개인진료실을 차려놓고 家庭醫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는 아이도 네 명이나 생겼고, 1999년까지는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반항아적 기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의사들이 진정으로 환자를 치료하기보다는 돈 버는 데 더 열중하고 있고 그 이유는 의료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독일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들은 X선 촬영이나 각종 검사 같은 것을 많이 해야 돈을 벌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혼이나 시험낙방 같은 환자의 정신적 문제 같은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5분간 진찰을 하고, 처방전을 끊어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나는 찾아온 환자와 때로는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가능한 한 검사를 하지 않고, 약이나 주사도 쓰지 않았습니다. 수입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돈을 잘 벌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죠. 어쨌든 환자들은 내 스타일을 좋아했습니다』
독일 최초의 의사 반란
폴러첸은 의료제도를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환자 350명과 함께 괴팅겐市 보건국에 들어가 시위를 했다. 독일 역사상 의사의 시위는 그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신문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어떤 신문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판했고, 『반항적인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이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 때 그는 미디어, 특히 텔레비전 영상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는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고, 때로는 과장된 연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목표를 이해하고 공감한 기자들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런 투쟁방식은 그 후 탈북자를 지원하기 위한 싸움에서도 그대로 활용되었다.
『패배한 보건당국은 내가 의사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했습니다. 나는 법정 증언대에서 텔레비전 화면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기발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나는 권총을 꺼내서 내 머리를 겨누었다가 내려놓고 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수갑을 꺼내서 보여주고 넣으면서 체포당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주사기를 꺼내들고, 주사를 맞고 죽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한 경찰관이 권총을 법정에서 꺼내든 것이 형법위반이라고 하면서 나를 그 자리에서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든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주사기로 목을 찔러 자살하려는 것처럼 했습니다. 목에서 피가 나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습니다. 물론 주사기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마치 기절한 듯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앰뷸런스에 실어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슬쩍 빠져나왔습니다. 그 모든 검사를 받기 싫었고, 상처는 나 혼자서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나는 내 진료실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자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나를 의사가 아니라 배우라고 한 신문도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지지했지만, 그것이 가정생활과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싫어했다. 신문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것이 아이들에게 결코 좋을 리 없었다. 결국 1999년 이들은 이혼했다. 그는 좀더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독일의 의사봉사단체 「캅 아나무르(Cap Anamur)」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베트남전쟁 후 보트 피플을 구조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캅 아나무르에서 남부 수단과 북한 중 어느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북한을 선택했다. 북한에 관한 자료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1999년 7월, 평양에 도착한 폴러첸은 눈을 의심했다. 평양은 아름다운 도시였고, 신문에서 읽은 기아나 빈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각도 호텔에는 호화로운 나이트 클럽이 있었고, 외국인 전용 상점에는 무슨 물건이든지 있었다.
『나중에 나는 지방을 돌아보고 평양이 쇼 케이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트와 군부를 위한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옛 동독 출신 동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실은 통일 전 동독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선전을 위한 피부이식
폴러첸은 헌신적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중화상을 입고 죽어가던 북한 사람에게 피부를 떼어준 일이 있은 후, 친선메달까지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친선메달 증명서만 보이면 북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는 동북지방을 제외하고는 총연장 11만㎞나 여행을 했다. 金正日 생일축하식 같은 행사가 있을 때는 빠짐없이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 11월, 평양 북방 50㎞ 북쪽에서 길 위에 버려진 병사의 시체를 본 다음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안내원과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이 때문에 그 해 12월30일 비자연장이 거부되고 북한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
『피부이식 수술은 세 번 했습니다. 두 번째 수술은 기자와 텔레비전 카메라가 동원되는 등 일종의 선전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150명의 피부제공 자원자들이 줄을 서 있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일부러 칼을 깊이 넣어 피를 많이 냈습니다. 수술용 메스가 없어서 면도칼이나 보통 칼을 사용했습니다. 나중에 이 장면 사진은 북한의 모든 병원에 걸렸습니다. 세 번째는 1년 후 독일에서 한 정치인이 왔을 때였는데, 북한당국은 그에게 피부제공을 하도록 했습니다. 나도 다시 참가했습니다. 이 역시 텔레비전 카메라가 동원되는 등 전적으로 선전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병원책임자는 키가 154㎝밖에 안 되는 여자였는데, 피부를 제공하겠다고 내놓은 허벅지를 보니까 20여 군데나 상처가 있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병원책임자가 환자에게 자기 피부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병원의 젊은 간호사들도 피부를 제공했습니다. 정말 북한 여자들은 대단합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배낭을 메고 100㎞나 되는 여행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는 한국에서도 두 번 경찰 신세를 진 일이 있다. 작년 1월, 그는 판문점에서 미디어의 이목을 끌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가는 쇼를 벌이다가 미군에게 체포되었고, 한국 경찰에게 인계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고의로 범법행위를 했으므로 당국의 태도는 나무랄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후 탈북자 및 인권단체 사람들과 서울에 있는 중국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다가 「가혹행위」를 경험했다. 젊은 경찰관들이 그를 둘러싸고 얼굴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발로는 다리와 국부를 걷어찼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진을 들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공격을 가했습니다. 나는 버스로 끌려가 30분 가량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항의를 하자 경찰은 나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나를 석방한 진짜 이유는 그곳에 모여 있던 미디어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기자는 물론, 타임지, 로이터통신, AP통신, CNN, 독일 기자 등 외국 텔레비전 취재반이 지켜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거든요』
스페인대사관으로
어떤 면에서 그는 당국의 탄압을 오히려 반기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미디어에 보도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없었더라면 북한이나 남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극적인 텔레비전 영상이 나올 수 있는 사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CNN이나 ABC, CBS 쪽에서도 내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남들이 보면 미친 짓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미디어 작품은 탈북자 25명을 중국 베이징의 스페인대사관에 진입시켜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게 했던 사건이다. 지난 3월14일의 일이었다.
『당시 베이징 사건을 내가 계획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홍보책임자였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이즈 메이커(말썽꾼)」였죠. 우리가 그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이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 직전에 동독인들이 프라하에 있는 서독대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헝가리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북한 관계에서도 그런 일이 되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런던에서 열리는 인권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비행기 속에서 탈북자 100명을 베이징에 있는 독일대사관으로 망명시키는 계획을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나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그 숫자를 25명으로 줄였습니다. 시기는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이나 그 전으로 잡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미디어와 공동작전
그 후 내가 워싱턴을 거쳐 베이징에 갔을 때 우리들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일본에서 정보가 새나간 것 같습니다. 유엔고등판무관사무소와 독일대사관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었더군요. 두 명이었던 경찰관이 네 명으로, 아무도 없었던 곳에 새로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도 둘러보았습니다. 독일인 학교도 검토했지만, 영상효과가 좋지 않고, 탈북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계가 가장 허술한 대사관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스페인대사관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당시 스페인은 유럽공동체(EU) 의장국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유럽공동체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대사관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탈북자들에게는 마지막 순간, 식당에서 이 계획변경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스페인대사관에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중국인 관광객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야구모자를 쓰게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디어였습니다. CNN 기자는 대형 장비 대신 핸디캠을 들고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른 미디어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스페인대사관 앞에 있는 그리스 식당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식당 안에는 중국 경찰도 있었는데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 경찰은 우리 계획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대사관 정문에는 경찰관이 한 명밖에 없었고, 나무로 된 문은 전날 밤 확인한 대로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방법도 연구해 보았지만, 아이들과 고혈압 환자가 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런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중국 경찰은 나를 저지하거나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 다음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원래 계획은 그 사건 직후 베이징을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CNN 지국까지 가서 인터뷰를 하고, 이메일로 이 소식을 전하느라고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이날 저녁 나는 거의 모든 독일 신문이나 텔레비전과 인터뷰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면서 약간 걱정을 했는데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 사건이 있은 후 중국대사관에서는 비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나도 당분간 베이징에는 갈 생각이 없습니다. 공연히 다른 사람들만 괴롭히게 될 테니까요』
폴러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는 가방에 사진이나 책, 신문과 잡지 스크랩을 보여주면서 열변을 계속했다. 가방 속에는 북한에서 받은 친선메달과 친선메달증, 자동차 면허증을 비롯해서 아내와 찍은 몰디브 해변 사진, 괴팅겐 법정의 법정투쟁 스크랩까지 기자들을 즐겁게 해줄 모든 자료가 들어 있었다. 미디어 작전을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는 한국의 언론에 불만을 표시했다.
레인 메이커
『햇볕정책 때문에 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독일의 경우, 서독과 동독 사이에 정상급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우리는 동독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동독인이 경계선을 넘어 오다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검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상하게도 북한의 인권유린이나 탈북자의 비참한 생활 같은 이야기를 미디어에서 별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외국의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많이 소개되고 있는 데도.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햇볕정책을 나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우호정책이나 유화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나는 북한의 보통 사람에게 피부를 제공했을 만큼 그들을 포용(Engagement)한 사람입니다. 나는 햇볕정책을 지지하지만, 레인 메이커(비를 오게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에는 햇볕과 함께 비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평지풍파가 아닙니다. 자연은 격동과 변동이 있어야 발전하고 진화하는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홍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량처형, 강제수용소, 유아살해, 인체실험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화제는 중국에서 경찰에 잡힌 탈북자들이 코를 꿰어 북한 보안요원에게 끌려갔다는 보도로 옮아갔다. 나는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만행이나 북한의 강제수용소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 독일인은 괴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치의 강제수용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침묵을 지키는 수치스러운 일을 했습니다. 나는 독일인으로서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침묵하지 않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북한에서 직접 목격한 만행은 길에 버려진 병사의 시체 하나뿐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카메라와 필름을 빼앗고, 구속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모두 똑같은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살 된 아이나 70세 된 할머니가 모두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은 북한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여덟 살짜리 소년과 소녀들이 도로공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남포에서 평양까지 연결된 40㎞나 되는 그 도로를 청년영웅 고속도로라고 부르더군요. 아이들은 아무런 장비나 도구도 없이 돌을 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아이들은 金正日의 생일축하행사를 위한 행진연습까지 했습니다. 새벽 2시에 말입니다.
나는 메들린 올브라이트 美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함께 온 미국기자들을 안내해서 당국이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 지역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나를 맡고 있던 안내원이 사라졌습니다. 외국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군인과 경찰이 밤중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들을 구타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金正日을 국제법정에 세워야 한다
폴러첸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지금은 탈북자를 돕는 운동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유고의 밀로셰비치와 마찬가지로 金正日을 헤이그의 국제법정에 세우는 것입니다. 수백만 주민을 굶어죽게 한 혐의입니다. 그는 내가 알게 된 최초의 독재자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애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주범입니다. 물론 판사는 남북한 사람들이어야겠죠. 그리고 분단의 역사를 가진 독일인으로서 한반도에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가 저지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나는 북한의 보통 사람은 좋아합니다. 어느 의미로는 남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아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척 순수합니다. 물질적 경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죠.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지하철이 어떻고 주차장이 어떻고 하는 데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하고 있을 북한의 동포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한의 학생들은 이스라엘의 인권문제는 알고 있으면서도 70㎞ 북쪽에 있는 동포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판문점에서 나를 체포해서 수갑을 채운 미군병사는 나보고 「말리나 남아공화국, 아프리카 등 상황이 더 심각한 곳이 많은 데 왜 북한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여기 목표가 달성되면 그곳으로 가겠다고. 나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믿고 있습니다. 나는 평생 그 목표를 위해서 일할 것입니다』
그는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제임스 모즐리의 「비탄: 버마의 민주화와 진실을 위한 투쟁」이었다.
『젊은 친구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런던에서 만났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부끄럼을 타는 사람인데 미얀마에서 인권운동을 하다가 3년 동안 투옥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꾸밈이 없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미얀마 당국과 싸웠습니다. 나는 이름난 정치가나 명사는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대개는 실망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아닙니다. 요즘에도 계속 이메일을 주고받고 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기발한 방법을 충고해 주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까지 미국에서 反戰운동을 이끌었던 제리 루빈 같은 사람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는 폭력이나 유혈수단 대신 희극적인 활동으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일종의 정치적 광대였습니다. 나도 단식투쟁이나 폭력, 또는 분신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루빈처럼 텔레비전에 극적인 영상으로 비칠 수 있는 활동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폴러첸은 모습은 전형적인 아리안계 서양인이지만, 사고방식은 동양적이다. 일찍부터 동양의 불교나 문화를 동경했고, 1960년대 말 독일에 간 한국 간호사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인 간호사들은 그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까지도 뒤셀도르프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세례를 받은 개신교 신도이지만, 불교의 윤회사상 같은 것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고, 인간이 에너지(氣)의 존재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나는 의사와 과학자로서 에너지법칙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죽어도 그 에너지는 어딘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2500만 년 전에 사라진 공룡의 에너지가 지금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에너지도 지금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또 그것은 절대로 파괴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네 살 난 아들이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마당에 묻은 일이 있었습니다. 4주일 후 그 무덤에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개미와 작은 벌레들이 그 주위에 몰려 열심히 무엇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 것을 보고 땅에 묻힌 개가 꽃을 먹여 살리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그 의미는 몰랐겠지만, 나는 그것이 일종의 연속된 에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권운동을 하다가 죽어도 그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일부러 죽을 생각은 없지만, 때로는 死後의 세계가 어떤 것일지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아마 의사로서 사람들의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생명의 탄생이나 똑같은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환자 중에는 정말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의 다음 단계로 옮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 인터뷰가 끝나면 미국에서 온 인권운동가들과 만나 저녁을 같이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곧 워싱턴으로 가서 5월1일 열리는 미국 종교지도자대회에 참석하고, 그 다음날에는 美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끝나면 기자들을 만나 새로운 계획을 이야기하고, 곧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고 한다. 월드컵 취재를 위해서 오는 독일 텔레비전 기자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정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힘의 원천은 북한 아이들 사진
『아침은 독일식으로 커피 두 잔 정도로 간단히 먹습니다. 점심 역시 돌아다니다가 김밥 같은 것으로 간단히 때웁니다. 여기저기서 초청을 받을 때도 많은데, 대개 그런 자리에는 음식이 많이 나오죠. 그런 음식을 많이 먹고 나면 온몸이 피곤해지고, 녹초가 되어 쉬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초청한 곳에 가면 불고기가 나오고, 성찬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정부관리나 당 간부들이 초청했을 경우입니다. 그들은 돈도 있고, 뭐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식사를 간소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방에서 북한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꺼냈다.
『내 힘의 원천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위험에 처해 있고,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돌아다닙니다. 지금 이 일이 나에게는 생활의 전부입니다. 아내와 이혼한 뒤 외롭기는 하지만 이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생활도 없습니다. 나에게는 북한이 사생활입니다.
독일을 떠나서 탈북자 돕는 운동을 하기 시작한 지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보고 싶죠. 그러나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협박이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 前妻는 나에게 가능한 한 아이들에게서 떨어져 있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前妻는 내가 독일에서도 너무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까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번 베이징에서 탈북자 25명이 스페인대사관으로 들어가 망명한 사건이 있은 다음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 가서도 아이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두 시간이나 열변을 토한 그의 목소리는 어느덧 피로의 기색이 나타났다. 그는 다른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일어나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세계의 시선이 모이는 자리이니까요. 이미 경기 시작 이틀 전에 독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북한에 관한 토크쇼에 나갈 계획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