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투자실패로 본사 기조실에서 모스크바 지사로 전출된 백승근은 지사장 이하 간부들의 견제를 받는다. 그러나 러시아 여직원 올가의 도움으로 이르쿠츠크에 대규모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르쿠츠크로 향한다. 그러나 러시아 가스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이미 한국의 근대건설과 일본의 한신건설로 압축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백승근은 前 KGB 출신의 연합노조위원장 안드레비치를 이용하여 근대와 연합으로 총 4억 달러 공사를 수주한다. 그 과정에서 올가가 피살되었지만 결국 백승근은 이르쿠츠크 지사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러나 그룹 회장의 동생 윤성희의 음모와 비서실 담당부장인 최경일의 견제를 받는다. 결국 백승근은 이르쿠츠크에서 C급 지사인 케냐의 나이로비 지사장으로 전출된다. 폐쇄 직전의 지사인 나이로비 지사장이 된 백승근은 반군 무장단체에 북한이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직접 자금을 대는 미국 측을 설득하여 더 싼 가격과 더 빠른 납기, 그리고 위험성을 강조하여 오더를 따낸다. 오더를 뺏기게 된 북한무역 대표부의 강영주는 기를 쓰고 백승근을 찾는다. 남북간의 생사를 건 싸움이 나이로비에서 시작된 것이다.
? 국경 없는 전쟁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백승근이 8층 복도로 나왔을 때 옆쪽 벽에 기대 서 있던 흑인 한 명이 다가와 섰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807호실입니다』
머리만 끄덕인 백승근은 사내가 가리킨 807호실을 향해 발을 떼었다. 오후 2시40분, 호텔의 복도는 그들 두 사람뿐이었지만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져 오는 것 같은 긴장감에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백승근이 807호실의 벨을 눌렀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금방 문이 열렸다. 그를 맞은 사내는 미국 대사관의 상무관 토드 필립이다.
『백,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한데』
등 뒤로 문을 잠그면서 필립이 백승근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않고 말했다.
『북한 무역사무소의 행동이 심상치가 않아서 말이오』
『그 사람들이야 길길이 뛰는 전문가들 아닙니까?』
소파의 팔받침에 한 쪽 엉덩이만 걸치고 앉은 백승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또 연락이 왔습니까?』
『강영주라는 여자요. 나한테 만나자고 하길래 날 만날 이유가 없다면서 딱 잡아 떼었는데』
앞쪽에 앉은 필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리한테야 대놓고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이나 무기를 받는 움베니 쪽에 그 자들이 보복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단 말이오』
『배는 6일 후에 탕가항에 도착합니다』
정색한 백승근이 필립을 보았다.
『결제는 하역 작업이 끝나는 시점에서 해 주시겠지요?』
『전화 한 통이면 되니까』
필립도 정색하고 말했다.
『물품 확인을 해야 할 텐데 당신 측에서는 누가 갈 겁니까?』
『내가 갑니다』
엄지 손가락을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보인 백승근이 희미하게 웃었다.
『직원 한 명을 데리고 갑니다』
『움베니 측에서는 반군 사령관 안톤 타몬이 직접 나올 것이고 그리고 나도 갑니다』
필립도 백승근이 했던 것처럼 엄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북한 측 앞에서는 내 얼굴을 직접 나타내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겠지』
그리고는 필립이 백승근을 똑바로 보았다.
『조심하시오, 백. 그 강이라는 여자가 당신을 찾으려고 푸카노를 협박까지 했다는 거요』
케냐는 1890년 英·獨(영·독)의 합의에 의해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는데(1895년) 케냐 원주민의 최대 부족인 키쿠유(Kikuyu)族은 1920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키쿠유族 과격파가 1948년에 무장조직인 마우마우(Mau Mau)단을 결성한 후부터 독립투쟁은 본격화되었다.
키쿠유族의 지도자 케냐타(Kenyatta)가 이끄는 독립투쟁은 全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결국 케냐는 1963년 12월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던 것이다. 독립 후에 다수족인 키쿠유族의 케냐타가 집권하여 다수 부족과 소수 부족 간의 대립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여 케냐는 아프리카의 우등생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78년 케냐타가 사망한 후, 소수 부족인 칼렌진族 출신의 모이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갈등은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모이 집권 20년이 넘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집권 측과 다수 종족 간의 갈등 양상을 넘어 부정과 부패에 대항하는 민주세력과의 투쟁이 되었다.
거기에다 모이는 인권과 부패 문제에 간섭하는 서방에 적대적이었으며 우간다와 탄자니아 등의 게릴라 조직을 지원하여 독자세력을 구축해왔던 것이다. 동서 냉전이 舊소련의 붕괴로 와해되고 유일 초강국 미국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독재자들의 운신 범위가 많이 제한되었지만 전과 다른 상황도 일어났다.
그것은 경쟁 상대를 잃은 미국이 전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국의 이해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 가만 놔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가차가 없다. 모이가 그것을 모를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미국과의 우호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해 왔던 것이다. 軍 정보국장 무쿰바가 대통령궁에서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 반이었다.
회의실로 들어선 무쿰바는 부동자세로 서서 맞는 참모들을 둘러보더니 털썩 의자에 앉았다. 지친 듯한 행동이었지만 핏발선 눈이 번들거렸고 입술은 꾹 닫은 채였다. 軍 정보부장은 軍의 2인자 서열이었지만 대통령의 신임도로 따지면 참모총장을 제치고 軍 1인자이며 정권의 2인자가 될 것이었다.
軍 정보국은 軍의 인사는 물론이고 처벌의 권한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종류의 反정부 활동에 대한 수사 지휘권까지 장악하고 있어서 무쿰바의 권세는 참모총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참모들이 테이블에 둘러 앉았을 때 무쿰바가 입을 열었다.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하시기로 했다. 내 건의를 받아들이셨어』
『그렇습니까?』
안도한 듯 이곳저곳에서 한숨 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정보부의 작품인 것이다.
『자, 대외적인 문제는 이쯤 해두기로 하고 안톤 타몬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정색한 무쿰바의 말에 참모들은 다시 긴장했다. 안톤 타몬은 민족민주포럼(FORD)의 무장조직 사령관으로 현상수배범이다. 타몬의 체포나 사살에 현금 100만 달러를 걸어 놓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정보부는 허탕만 치는 중이었다. 그때 참모 비추 대령이 입을 열었다.
『곧 타몬이 대량의 무기를 인도받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무쿰바의 시선을 받은 비추가 말을 이었다.
『무기는 리프트 계곡지역, 타나강가에서 引渡(인도)가 된다는 정보입니다』
『놈들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어』
눈을 부릅뜬 무쿰바가 앞쪽의 벽을 쏘아 보았다.
『대통령께서 미국을 친선방문을 하시는 상황이니 이것을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쿰바의 시선이 참모들을 차례로 훑어갔다.
『배후의 미국 정보원을 잡아 처단해도 미국 정부 측에서는 사건을 공개하지 못할 테니까』
『지사장은?』
안길수가 묻자 이병석은 머리만 저었다. 오후 6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오전에 외출한 백승근은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제 자리에 앉은 안길수가 에어컨을 향해 가슴을 폈다. 아침에 그는 오성전자의 전무 고동식 가족을 암보세리 국립공원에 데려다 주고는 지금 돌아온 것이다.
『지사장은 언제 나간 거야?』
『오전 10시경에 나갔습니다』
이병석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즘 사무실에 붙어 있지를 않고 나가서는 연락도 안 해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큰 소리는 쳤지만 날이 갈수록 맥이 풀리는 거야』
의자에 등을 기댄 안길수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앞쪽 자리의 송대만과 유학재도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도 안길수가 제임스와 함께 뷰익을 끌고 나가려다 거절당한 것을 안다. 안길수가 정색하고 이병석을 보았다.
『그럼 지사장이 뷰익을 끌고 나간 건가?』
『아니, 제임스는 샘플 보내려고 공항에 갔습니다. 지사장은 차를 쓰지 않았어요』
『시발놈』
잇사이로 욕설을 뱉은 안길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 보자』
그 시간에 백승근은 나이로비 무역의 사무실에서 비야마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크렌츠키호는 6일 후에 탄자니아의 탕가항에 도착한다』
백승근이 두 팔로 테이블을 받치고는 비야마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비야마, 나하고 탕가에 같이 가야겠다』
『알겠습니다』
거침없이 대답한 비야마가 백승근을 보았다.
『보스, 물론 이 선적 내용은 사무실 안에서도 저하고 보스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해야겠지요?』
『당연하지, 네 동료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 위험해지기 때문이야』
이제 비야마는 작전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부하가 된 것이다. 얼굴을 굳힌 백승근이 말을 이었다.
『탕가항의 세관은 미국 측이 손을 써 놓았다니 통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거야. 하역된 무기를 확인한 후에 현장에서 안톤 타몬에게 넘겨 주면 된다』
『안톤 타몬을 만날 수가 있겠군요』
비야마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우마우단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설적인 戰士(전사)지요. 젊은이들은 그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시선을 돌린 백승근이 입맛을 다셨다. 타몬은 1250만 달러의 무기를 받아가는 실수요자일 뿐인 것이다. 타몬이 수백 건의 전설을 쌓더라도 직접 구매를 할 자금력이 없는 한, 전혀 관심 밖의 인물이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 케냐타 애버뉴와 카마티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사거리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좌우를 둘러보더니 발을 떼었다. 사내는 행인들 사이를 빠르게 걷더니 곧 인디아 뱅크를 끼고 우측 길로 들어섰다. 헐렁한 흰색 셔츠에 검정색 바지를 입은 특징없는 외모의 흑인이다. 건들거리며 걷던 사내는 다시 우측의 골목길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발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좁은 골목인데다 가로등도 켜 있지 않아서 바깥쪽만 환하게 드러났다. 골목 안에는 사내 혼자뿐이었다. 그때였다. 사내의 바로 옆쪽 벽에 붙은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어둠 속에서 사람의 얼굴만 드러났다.
『어서 안으로』
낮게 영어로 말한 사내의 얼굴은 동양인이었다. 잠시 후에 흑인 사내는 건물 안의 방 안에 들어와 있었는데 앞쪽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는 강영주였다. 강영주는 오늘도 어두운 색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고 야구모를 눌러썼다. 방이 꽤 넓었지만 두 개의 형광등 중 한 개만 켜져 있는 데다 철제 테이블은 어수선하게 놓여 있고 바닥은 휴지와 포장지로 어수선했다. 폐업한 사무실 같았다.
『오티씨, 비밀은 지켜 드릴 테니까요』
강영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것만 말해 주세요. 사례는 할 테니까』
사내가 흰창이 많은 눈을 크게 뜨고 강영주를 보았다. 강영주의 옆쪽 벽에 기대서 있는 사내는 조금 전 오티를 안내해 온 김기승이다.
『난 시간밖에 모릅니다』
메마른 목소리로 사내가 말하고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김기승과 강영주를 번갈아 보았다. 오티는 움베니의 보좌관 푸카노의 경호원이다. 길게 숨을 뱉은 강영주가 바지 주머니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더니 오티 앞의 테이블에 놓았다.
『100달러 줄 테니까 시간을 말해 줘요』
『닷새 후라고 들었습니다』
오티의 시선이 지폐로 옮겨졌지만 아직 손이 가지는 않았다.
『장소나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걸 말해주면 500달러를 드리지』
『그것은 모릅니다』
그러자 강영주가 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당신이 우리 측 연락을 받고 이곳까지 온 것은 정보가 있기 때문이오. 100달러를 받으려고 이런 모험을 했을 리는 없어요』
『1000달러를 주시오』
불쑥 오티가 말했을 때 강영주의 웃음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벽에 기대고 있던 김기승이 어깨를 떼고 바로섰다.
『좋아요. 장소와 누구라는 걸 말한다면』
『장소는 모르지만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건 압니다』
오티의 말이 빨라졌고 표정도 진지해졌다.
『그것만으로도 1000달러 가치가 있을거요』
『좋아요. 말해요. 하지만』
정색한 강영주가 오티를 쏘아 보았다.
『우릴 속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요?』
『압니다』
『그럼 말해요』
『먼저 돈을 보여 주시오』
쓴웃음을 지은 강영주가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묶은 지폐뭉치를 꺼내더니 열 장을 세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자, 말해요』
『한국인이 중개상으로 나섰습니다』
그 순간 강영주는 눈만 크게 떴으므로 방 안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티가 헛기침을 했다.
『움베니 총재와 푸카노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한국인은 러시아의 거물들과 친해서 러시아제 무기를 북한보다 세 배 빠르게 공급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 이름은?』
강영주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을 때 오티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건 모릅니다』
그때 김기승이 강영주의 옆으로 다가와섰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대표동지, 제가 10여 일 전에 보고드린 기억이 납니다. 오성상사의 새 지사장이』
『이르쿠츠크 지사장으로 있던 놈』
혼잣소리처럼 말한 강영주의 시선이 오티의 몸을 뚫고 지나 뒤쪽의 벽에 꽂혀졌다.
『나도 기억납니다』
『난 오늘 늦을 거야』
수저를 내려놓은 안길수가 입 안에 남은 음식을 삼키고는 말했다.
『고전무가 저녁 8시 비행기로 떠나거든. 그래서 공항까지 나가야 돼』
『지사장도 같이 나가요?』
서미옥이 묻자 안길수는 눈을 크게 떴다.
『지사장이? 그 작자는 아직까지 고전무한테 인사도 하지 않았어』
『어머나, 세상에』
주방 개수대의 물을 잠근 서미옥이 안길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전무님이 오신 지 닷새가 지났는데도 말예요?』
『그렇다니까』
안길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한테 뷰익을 가져가지 말라고 허세를 부린 주제에 인사하러 나갈 수가 있겠어? 이미 그 작자는 종친 인생이야』
『고전무님한테 그 이야기했어요?』
『그럼 안해? 지사장이 뷰익 쓴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내 똥차 끌고 왔다고 했더니 고전무 얼굴도 똥색이 되더구만』
『참, 자기도』
쓴웃음을 지은 서미옥이 안길수의 앞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안길수는 서미옥에게는 자상하고 능력 있는 남편이었다. 또한 회사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다 말해 주어서 서미옥은 직원들의 성격까지도 알고 있었다.
『자, 그럼 다녀올게』
식탁에서 일어선 안길수가 양복 저고리를 집어들고 말했다.
『저녁 혼자서라도 먹어. 나 기다리지 말고』
『알았어요』
안길수에게 다가선 서미옥이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지사장하고 너무 부딪치지 말아요』
지사장 숙소도 방 두 개짜리 구조였는데 응접실이 안길수의 아파트보다 조금 넓을 뿐이었다. 그것은 전임 지사장들이 모두 가족을 떼어놓고 단신으로 부임해 와서 넓은 면적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안길수가 설명해 주었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백승근이 빈 그릇을 치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백승근은 전화기를 집어들면서 힐끗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50분이었으니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2시50분이다.
『여보세요』
『백승근씨지요?』
사내의 목소리에 백승근은 긴장했다. 한국말인데다가 자신의 이름 뒤에 씨라고 부를 사람은 주위에 없었던 것이다.
『예,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내가 당신을 직접 만날 수도 있었지만 일단 협상의 주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사내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백승근은 눈을 치켜뜨고 무의식 중에 현관문을 보았다. 아파트는 5층이었는데 현관문은 제대로 잠겨 있다.
『그럼 상황을 설명해 주지』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의 부하 안길수 과장이 있지? 아마 당신 다음의 서열일 텐데. 그렇지?』
『그래서?』
『안길수의 처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 아이가 집안에 혼자 남겨져 있으니까 빨리 가보는 것이 나을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물었지만 대충 짐작은 가겠지? 그러면 우리 요구 조건을 듣고 싶을 텐데. 안길수의 처를 돌려 받으려면 말이야』
백승근이 어금니만 깨물었을 때 사내가 짧게 웃었다.
『어때? 이제는 실감이 가나?』
『너희들은 누구야?』
『그것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백승근』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낮고 굵어졌다.
『우리는 네가 케냐 당국에 신고를 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지』
『…』
『만일 신고를 하면 안길수의 처는 영영 사라지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네가 추진하는 일도 박살이 날 테니까』
그때 백승근이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이봐, 난 지금 장난을 할 시간이 없어. 이만 전화를 끊겠다』
『이것봐』
『미친 놈이군. 이놈은』
그리고는 전화기를 내려 놓은 백승근이 전화코드를 잡아 뽑았다. 북한 측에서 알게 된 것이다. 토드 필립이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저고리를 집어든 백승근이 아파트 안을 둘러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당분간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그로부터 15분쯤 후인 오전 9시20분경에 인터컨티넨탈 호텔 로비로 들어서던 안길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둥 쪽으로 다가선 그가 전화기를 귀에 붙였을 때 수화구에서 다급한 이병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장님, 얼른 댁에 가보시지요. 댁에 애만 혼자 있는가 지사장님이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놀란 안길수가 눈을 치켜떴다.
『애만 혼자 있다니? 와이프도 집에 있는데』
『제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습니다』
『잠깐 어디 나갔을 수도 있지. 그런데 지사장이 왜 그러는 거야?』
『조금 전에 수상한 전화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어떤 놈이 사모님을 납치했다고 지사장한테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사장도 지금 과장님 댁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때서야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안길수가 몸을 돌렸다. 호텔의 방에서는 고동식이 가족과 함께 시내관광 안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그룹 회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못 간다.
아파트 앞에서는 백승근이 제임스와 함께 서 있었는데 안길수를 보더니 서두르듯 말했다.
『안에서 애 울음소리가 들려, 어서 문을 열어봐』
달려오는 동안 열 번도 더 집에다 통화를 시도했지만 받지를 않아서 안길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키를 꽂아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딸이 두 손을 벌리며 맞았다.
『여보』
딸을 안으면서 안길수가 집안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으므로 안길수가 딸에게 물었다.
『엄마 어디 갔어?』
그러나 네 살짜리 딸은 더 소리내어 울 뿐이다.
『안과장, 이야기 좀 하자』
백승근이 그때서야 안길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는 아직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제임스에게 말했다.
『제임스, 문을 닫아라』
겨우 울음을 그친 딸을 안은 채 소파에 앉은 안길수가 백승근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지사장님이 전화를 받으셨다면서요?』
눈을 치켜뜬 안길수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납치했다고 누가 연락을 해왔습니까?』
『끊는 바람에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했어. 하지만 한국 사람이었다』
정색한 백승근이 안길수를 보았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면 살려두지 않겠다는군』
『한국 사람이라면』
안길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어, 어떤 놈이』
『곧 다시 연락이 올 거야』
『…』
『안과장은 당분간 집에 있는 것이 낫겠다. 그놈한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르고 애를 봐야 할 테니까』
『지사장님』
이를 악문 안길수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경찰에 신고를 안 해도 될까요?』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선 백승근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안길수를 보았다.
『그 놈의 요구조건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인 오전 11시반경에 백승근은 힐튼 호텔의 807호실로 들어섰다. 오늘도 토드 필립은 백승근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백,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백승근이 전화로 상황을 설명해 준 것이다. 소파에 앉은 백승근이 길게 숨을 뱉았다.
『그대로 추진할 겁니다. 배는 나흘 후에 탕가에 도착합니다』
『그럼 그 여자는』
흘끗 백승근의 눈치를 살핀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놈들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런데 그 과장은 내막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알려 주실 거요?』
그러자 정색한 백승근이 머리를 저었다.
『북한 놈들이 안과장한테 알려 줄지 모르지만 난 부정할 거요』
『으음』
『내 처가 그런 경우에 닥쳤다면 하고 생각해 보았지요』
백승근이 눈을 치켜뜬 채 입술 끝을 비틀고 웃었다.
『마찬가지로 계속 추진할 겁니다. 그따위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거요』
『백, 내가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소』
어깨를 늘어뜨린 필립이 다시 백승근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오』
『이 사람아, 어떻게 된 거야?』
고동식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송화구를 울렸을 때 안길수는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 예. 전무님』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해줘야 기다리지 않을 것 아닌가?』
『예, 전무님. 그런데』
『우린 기다리다가 지금 시내로 나왔어』
고동식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한국 식당으로 가려는데, 차를 가지고 식당으로 와 주겠나? 짐이 조금 있어서 그래』
『전무님, 제가 지금 바쁩니다』
이를 악문 안길수가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12시10분, 아직 아무 곳에서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허어, 그래?』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동식은 헛웃음 소리를 내더니 전화를 끊었다. 이것으로 10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안길수의 시선이 소파에서 자고 있는 딸 소영에게로 옮겨졌다. 나이로비에 체류하는 한국인은 교민을 포함하여 500명 정도인 것이다. 관광객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을 테니 체류자나 북한계가 개입되었을지 모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안길수는 소스라쳤다. 이번에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가 울린 것이다. 서둘러 전화기를 든 안길수는 심호흡부터 했다.
『여보세요』
『안길수 과장이신가?』
굵은 사내의 목소리에 안길수는 숨을 멈췄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 것이다.
『예, 그런데요』
『내가 당신 처를 데리고 있는데』
사내가 낮으나 분명하게 말했다.
『오늘 중으로 조처가 있지 않으면 당신 처는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거야』
『여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오?』
안길수가 소리치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조처를 하란 말이오? 그리고 내 처를 왜?』
『왜 그런지 모른단 말인가?』
사내도 목소리를 높였다.
『움베니한테 거래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통보를 해, 그러면 네 처는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을 것이다』
눈만 끔벅이는 안길수의 귀에 사내의 목소리가 찌렁이며 울렸다.
『우리는 너희들의 배가 4일 후에 도착한다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이다. 그 배의 짐이 하역된다면 네 처는 죽는다』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안길수는 숨도 쉬지 않고 앞쪽의 벽만 보았다.
『알았어. 당장 사람을 보내지』
안드레비치가 가볍게 말했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로 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백』
『고맙습니다. 안드레비치』
전화기를 내려놓은 백승근이 앞에 서 있는 비야마를 보았다.
『물품은 정확히 4일 후에 탕가항에 도착한다. 계획에 차질은 없어』
『보스, 그럼 내일 출발해야 합니다』
비야마가 탁자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육로로 나망가를 거쳐 탄자니아로 들어가면 탕가까지 이틀이 걸립니다』
『내일 중으로 러시아에서 사람이 올 거야』
가늘게 숨을 뱉은 백승근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12시 반이다.
『우리도 자위 수단을 써야 되겠단 말이다』
이곳은 러시아 대사관의 레온 바시노프가 빌려준 市 외곽의 주택이어서 주위는 조용했다.
『보스, 그럼 납치된 직원 부인은 살아돌아올 가능성이 없겠군요?』
차분한 목소리로 비야마가 물었을 때 백승근이 머리를 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협상을 하겠지만 배는 돌려보내지 못한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으므로 둘은 말을 그쳤다. 백승근의 전화였다. 전화기를 집어든 백승근이 귀에 붙였을 때 곧 안길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안길수가 다급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중으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제처를 어떻게 하겠답니다』
『그래?』
『움베니란 사람한테 거래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통보를 하라는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4일 후에 배가 도착하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짐이 하역되면 제 처가 죽는다는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헛기침을 한 백승근의 목소리가 조금 굵어졌다.
『그 놈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가 본데, 앞으로 전화가 오면 무조건 난 모르는 일이라고 하고 나한테 넘겨, 알았나?』
『예? 하지만』
『내가 처리할 테니까 말이야』
『지금 어디 계십니까?』
『밖에서 지금 당신 일을 처리하고 있어. 그러니까 기다려』
『지사장님』
안길수가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십니까?』
『알아보는 중이야. 그리고 한 가지 알아낸 것은』
그리고는 백승근이 입맛을 다셨다.
『상대는 북한 놈들이야. 그리고 이건 비공식 라인이어서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 그렇다면』
『공개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기다려.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휴대전화의 덮개를 닫은 백승근이 길게 숨을 뱉았다. 안길수가 이렇게 성실한 자세로 상의해 온 것은 처음이다.
대표실로 들어선 김기승이 강영주의 앞에 와 섰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은 더 번들거렸다.
『백승근은 회사에 없습니다. 회사에는 직원 셋만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강영주가 눈만 깜빡이며 가만 있었으므로 김기승이 말을 이었다.
『당국에 신고를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안길수의 행동이 조금 걸립니다』
『시치미를 떼는 것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김기승이 책상 앞으로 바짝 붙어섰다.
『제 처가 납치당한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단 말입니다』
녹음 내용을 들었던 터라 강영주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백승근에게 먼저 연락을 한 다음에 처를 납치당한 당사자가 되는 안길수에게 통보를 함으로써 상황을 증폭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승근은 들은 척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데다 안길수는 모른 척 허둥대기만 했으니 이쪽은 조금 김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강영주가 흘끗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5분 전이다.
『백승근이 지사원들도 모르게 제2의 무역상사를 설립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강영주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내가 백승근 입장이 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렇더라도 안길수는 제2인자입니다. 안길수도 모르게 설립했을까요?』
『어쨌든 지금은 알게 되었을 테니까』
혼잣소리처럼 말한 강영주는 엷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백승근의 행동에 따라서 안길수 처의 생사가 결정되겠지요』
그때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강영주는 전화기를 쥐었다.
『여보세요』
대표 전화여서 강영주는 영어를 썼다.
『조선무역 대표십니까?』
송화구에서 한국어가 울린 순간 강영주는 퍼뜩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김기승을 불러 옆쪽 전화기를 가리켰다. 김기승이 재빠르게 옆쪽 전화기를 들면서 녹음 버튼을 눌렀을 때 강영주가 차분하게 물었다.
『누구시죠?』
『오성의 백승근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그쪽에서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해서요』
『오해라뇨?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아침의 사건 말입니다』
『어떤 사건 말씀입니까?』
『우리 과장한테 배가 어떠니 하역이 어떠니 하셨다는데 우린 전혀 그런 일을 모릅니다』
『글쎄, 우리도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네요』
말투는 차분했지만 강영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전화 잘못 거신 것 아녜요?』
『그럼 피차 전화를 잘못 건 셈이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송화구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으므로 강영주는 어금니를 물었다. 다시 송화구에서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해드릴 일이 없고 직원 가족에 대해서도 처분만 바랄 뿐입니다. 그럼 이만』
강영주가 마악 입을 떼었을 때 전화가 끊겼다.
『이 자식이』
먼저 흥분한 것은 김기승이다. 눈을 부릅뜬 김기승이 강영주를 보았다.
『이놈 아주 지독한 놈인데요. 대표동무』
『가볍게 본 것 같아요』
시선을 내린 강영주가 입술만을 달싹이며 말했다.
『다른 수단을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소영에게 저녁을 차려 먹이고 났을 때는 오후 6시 반이었다. 처음에 엄마는 시장 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친구 집에 가서 조금 있으면 올 것이라고 달랬더니 소영은 곧 잊고 잘 놀았다. 그러나 안길수는 점심과 저녁을 모두 거른 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안해졌다. 사무실 직원들이 자주 전화를 해왔지만 그들은 내막을 모른다. 백승근이 말해 주지 않았고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동식 전무는 지금쯤 이를 악문 표정으로 공항에 나가 있을 것이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안길수는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이병석이 금방 전화를 받았을 때 안길수는 다급하게 물었다.
『지사장하고 연락이 돼?』
『아직 안 됩니다. 전원을 꺼놓아서요』
10분쯤 전에는 통화를 했지만 이병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아직 없어. 그런데』
안길수가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지사장,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우리가 다 사무실에 있는 줄 알고 계시니까』
『경찰에다 신고도 하지 못하게 했으면 본사에다는 보고를 해야 정상 아닌가? 이것도 저것도 다 못하게 하고 연락도 안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병석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안길수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벽시계를 보았다. 저녁 6시50분이다. 한국 시간으로는 밤 12시50분이 될 것이었다.
『두만강호는 10일 후에 몸바사항에 도착합니다』
토드 필립이 유리창을 등지고 서서 말했다.
『그리고 크렌츠키호는 4일 후에 탕가항에 도착하지요』
『북한놈들은 끝까지 밀어붙일 작정이야』
입맛을 다신 알렉 스완슨이 커피잔을 들었다가 잔이 빈 것을 보고는 내려 놓았다.
『그리고 한국놈도 대단하군. 제 부하의 와이프가 납치를 당했는데도 밀어붙이다니』
『예정대로 탕가항에서 하역시킬 테니까 입회해 달라는데요』
『우리는 빠를수록 좋아. 무쿰바가 눈치채기 전에 끝내야 돼』
『그것이 문제입니다. 보스』
정색한 필립이 스완슨을 보았다.
『북한 측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무쿰바에게 제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들 사업을 가로챈 한국 측 정보를 다 넘겨줘서 판을 깰 가능성이 많습니다』
『북한 측이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가 문제야. 우선 오성의 백승근이 노출되었고 듣자 하니 하역 시기도 아는 것 같은데』
『무쿰바가 백승근만 잡아 족치면 다 불게 될 겁니다』
『백은 지금 어디에 있나?』
정색한 스완슨이 묻자 필립은 입맛을 다셨다.
『나한테 탕가에서 만나자고 하고선 자취를 감췄습니다』
『교활한 놈이군』
스완슨이 쓴웃음을 짓더니 곧 정정했다.
『하지만 거래선으로서는 믿을 만해』
다음날 오전 10시 정각이 되었을 때 백승근은 먼저 안길수에게 전화를 했다.
『연락온 것 있나?』
백승근이 대뜸 물었을 때 안길수의 굳은 목소리가 송화구를 울렸다.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구』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안길수가 목소리를 높였으므로 백승근은 소리 죽여 숨을 뱉았다.
『이봐, 이것은 떠들어서 될 일이 아냐』
『난 어젯밤에 본사에다 보고를 했습니다. 본사에서는 알고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본사에다 보고했다구?』
『난 지사장님이 본사에도 보고하지 말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안길수가 그러고는 전화를 끊는 바람에 백승근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로부터 30분쯤 후에도 백승근은 거실에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는데 이번 상대는 정인호 부사장이다.
『안길수는 비서실 라인으로 보고했기 때문에 이미 회장님도 알고 계신다』
정인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안길수는 내막을 모르는 것 같다. 북한 측을 자극한 것 같다고 하면서 그 내막을 네가 알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보고를 했다는군』
『저는 오늘밤에 하역 확인을 하려고 떠납니다. 부사장님』
그러나 정인호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고 백승근도 전화기를 쥔 채 창 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정인호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회장님과 난 이번 일은 네 재량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예, 부사장님』
『그 방법이 최선일까?』
『예, 부사장님』
눈을 부릅뜬 백승근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오더를 따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심호흡을 한 백승근이 말을 이었다.
『저도 목숨을 걸겠습니다. 부사장님』
『누구십니까?』
문으로 다가선 제임스가 영어로 물었을 때 바깥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안선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제임스는 한국어로 안선생이란 단어가 알아 들었지만 안쪽에 있던 안길수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제임스는 어젯밤부터 경호역으로 안길수의 집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안길수가 제임스를 제치고는 문에다 대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요. 그래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사내가 정중하면서도 또렷하게 말했다.
『다 안선생을 위한 일입니다』
눈을 치켜뜬 안길수가 결심한 듯 문을 열었을 때 서 있던 사내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실례합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안길수가 비켜서자 사내는 현관으로 들어섰는데 거침없는 태도였다. 오히려 제임스와 안길수가 손님처럼 허둥대면서 문을 잠그고 건성으로 자리를 권하고는 마주보며 앉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난 북조선 사람입니다』
사내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을 때 제임스는 눈만 끔벅였지만 안길수는 침을 삼켰다. 예상하고 있었어도 긴장한 것이다.
『이번 일의 내막을 알려 드릴까 해서요』
『도대체 왜』
금방 얼굴이 상기된 안길수가 사내를 노려보았다.
『제 처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럼 내막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사내가 안길수를 달래려는 듯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들은 아니, 당신들 지사장의 독단적인 행동인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공을 들여놓은 오더를 일순간에 가로채간 것입니다. 이것은 강도짓이나 같습니다』
이제는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우리는 이런 철면피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기필코 응징하고야 말 것이오』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소』
부대사 홍진국이 안경테를 손 끝으로 밀어올리면서 말했다.
『두만강호가 되돌아간다면 東아프리카 사업 계획은 전면적 수정이 불가피해질 것이고 동무나 내가 본국으로 소환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홍진국이 길게 숨을 뱉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보위부에서 전문이 왔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물을 처분하라는 내용이오』
『최악의 경우에 무쿰바에게 정보를 주고 한국 측의 하역을 막겠습니다. 오성의 백승근만 잡아 족치면 하역항을 알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강영주가 말했을 때 홍진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백승근이 자취를 감췄다고 하지 않았소? 하역 예정일이 사흘 남았는데 그 동안에 잡을 수가 있겠소?』
『백승근을 잡지 못한다면 오성상사 지사원 모두에게 무기밀매 혐의를 씌워 무쿰바가 체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부진 표정으로 강영주가 말을 이었다.
『제가 갖고 있는 정보만 가지고도 그 자들을 충분히 체포시킬 수가 있습니다』
홍진국은 어금니만 지근지근 씹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홍진국은 東아프리카 지역 사업 책임자로서 순풍에 돛단배를 띄운 것처럼 사업이 순조로웠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강영주가 대표로 있는 조선무역이 달성한 실적 때문이었지만 홍진국은 곧 보위부의 부부장으로 승진되어 귀국할 예정이었다.
『백승근이 독한 놈이지만 제 직원 모두의 목숨과 오더를 바꾸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강영주가 낮으나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오성그룹 내부로 노출되도록 했습니다. 회사 내에 이 일이 알려지게 된다면 우두머리들이 여론에 밀려 직원들의 목숨과 오더를 바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상황이 절박하오』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인 홍진국이 신경질적으로 안경테를 밀어올렸다.
『시간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단 말이오』
대사관을 나온 강영주가 케냐타 거리 입구에 닿았을 때는 오후 5시10분이었다. 요즘들어 자주 시계를 내려다 보는 버릇이 들었으므로 이맛살을 찌푸린 강영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호등에 차들이 멈춰서 있는 주위를 행인들이 무질서하게 지나고 있었다. 밝은 표정의 관광객 무리에다 후줄근한 셔츠 차림의 현지인도 흘끗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그때 운전석 옆으로 백인 하나가 다가왔다. 운전사 겸 경호원인 이남규는 핸들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앞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운전석 옆쪽의 유리창이 하얗게 부숴지더니 옆 머리를 강타당한 이남규가 털썩 옆으로 쓰러졌고 문이 열리면서 백인이 들어섰다. 다음 순간 강영주는 자신의 옆쪽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움직이지 마』
벌써 강영주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 백인 하나가 소음기가 끼워진 권총으로 옆구리를 밀어붙였다. 운전석에 오른 사내는 재빠르게 브레이크를 풀더니 차를 우회전시켰다. 근처에 행인들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눈만 멀뚱거릴 뿐이었고 그 사이에 차는 곧장 달려 나갔다. 정신을 차린 강영주가 눈을 치켜뜨고 옆쪽 사내를 보았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소리치듯 말했지만 사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옆구리의 총구는 더 세게 눌려졌다. 그때 옆자리로 엎어진 채 밀려난 이남규가 낮은 신음소리를 뱉으며 꿈틀거렸고 운전석의 사내가 손을 치켜들더니 내려쳤다. 이남규가 짧은 신음과 함께 잠잠해졌을 때 강영주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 자들은 전문가들인 것이다.
강영주가 끌려간 곳은 나이로비 북동쪽의 한적한 주택가였다. 고원지대에 드문드문 세워진 주택들의 외관은 모두 빼어났고 정원에는 빈틈없이 잔디가 깔린 이곳은 舊 영국령 시대부터의 고급 주택가로 지금은 외교관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낮은 구릉을 우회전한 차가 2층의 흰색 저택 앞으로 다가갔을 때 철제 대문이 소리 없이 좌우로 열렸다. 정문에서 저택의 현관까지는 100m쯤 되었는데 좌우에는 무성한 숲이 조성되었고 저택 앞쪽은 잔디밭이다. 차가 현관 앞에 멈춰섰을 때 옆자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자, 내려』
이미 총은 치운 지 오래였지만 사내의 표정 없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강영주는 사내를 따라 차에서 내리고는 계단을 올라 현관 앞에 섰다.
『자, 안으로』
현관문을 반쯤 연 사내가 다시 영어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선 강영주는 넓은 로비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동양인 사내를 보았다. 사내도 강영주를 마주보고 있었는데 키가 컸고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눈빛이 강했다. 강영주가 서너 발짝 발을 떼고는 멈춰 섰을 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강영주씨, 난 백승근이오』
로비의 양쪽 벽에 부딪친 백승근의 목소리가 울렸다. 백승근이 발을 떼어 강영주의 세 걸음쯤 앞으로 다가와섰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모시고 오도록 했는데, 미안합니다』
강영주는 사내가 자신이 백승근이라고 밝혔을 때 웬 일인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다가선 백승근과 다시 시선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 앉읍시다』
백승근이 소파를 눈으로 가리켰을 때 강영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새삼 깨닫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한국인이 전문가를 고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자 백승근이 정색한 얼굴로 강영주를 보았다.
『자, 이쯤 되었으니 안과장의 부인을 돌려보내 주시지요』
백승근의 억양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나하고 협상을 하십시다』
『어떻게 말이죠?』
심호흡을 한 강영주가 똑바로 백승근을 보았다.
『당신들 배를 돌려 보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이미 게임은 끝났어요』
그리고는 백승근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당신들 억지가 통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곧 우리 측에서 무쿰바에게 당신들에 대한 정보를 다 건네 줄 겁니다. 그러면 오성의 지사원 모두가 어떻게 될지 아시지요?』
『안길수를 찾아와 상황을 다 알려 주셨더군. 당신들 의도대로 안길수는 본사에다 다 보고를 했고』
『당신들 체제에서 社內 여론을 무시할 수 없겠지요. 노조가 들고 일어날 테니까』
『그래서 당신을 데려온 것인데』
소파에 등을 기댄 백승근이 눈으로 뒤쪽 벽에 기대 서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정보 하나를 더 드리지. 저 사람들은 러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의 우방국 러시아가 지금은 나하고 손을 잡은 형편이 되어 있습니다』
백승근이 강영주를 쏘아보았다.
『그들도 오더를 위해서라면 북한 대사관을 폭파시키고도 남을 사람들이지요. 알고 계시지요?』
강영주가 이를 악물었고 백승근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곳은 러시아 대사관 전용 별장이오. 이만하면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을 테니』
상체를 세운 백승근이 다시 정색했다.
『협상을 합시다. 어때요?』
『내 조건은 다만』
강영주가 안간힘을 쓰듯이 말했을 때 백승근이 말을 잘랐다.
『내가 당신 물건을 팔아 드리지요. 기간은 한 달, 그러니까 두만강호는 공해상에서 20일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눈만 크게 뜬 강영주에게 백승근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가격은 현재 가격보다 45%를 깎아야 합니다. 당신들 가격은 너무 높습니다』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마침내 강영주가 그렇게 물었을 때 백승근이 희미하게 웃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나한테 맡기시고』
『보증을 한다면 고려해 보겠어요』
『먼저 당신에 대한 보증부터 해 드리지요』
부드럽게 말한 백승근이 강영주를 보았다.
『당신 계좌번호를 알려 주시면 일차로 즉시 10만 달러를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 하물이 팔렸을 경우에는 잔액 40만 달러를 더 넣지요』
백승근이 눈만 깜박이는 강영주를 향해 이제 환하게 웃었다.
『만일 하물이 팔리지 않았을 경우에는 10만 달러가 날아가는 셈이 되지요. 어때요? 한 번 믿어 보시겠습니까?』
숨까지 죽인 강영주는 한동안 백승근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속이 텅 빈 것 같기도 했고, 복잡해서 실뭉치처럼 얽혀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느낌만은 분명했다. 이 남조선 인간은 교활한 데다 끈질기며 더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있다. 놈은 하이에나처럼 턱 힘이 강해서 먹이를 물면 놓지 않는다.
서미옥이 돌아온 것은 그날 저녁 8시경이었다. 아파트 근처에 있다는 전화를 받고 안길수가 맨발 바람에 달려 나갔을 때 서미옥은 멀쩡한 모습으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길수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던 제임스가 들려 준 말이다. 그 시간에 백승근은 짙게 어둠이 덮인 국도를 달려가고 있었다. 나이로비에서 국도를 따라 남하하여 탄자니아와의 국경 마을인 나망가를 거쳐 동쪽 탕가항까지는 700㎞로 가까운 거리인 것이다. 비야마가 먼 친척 아저씨 이름으로 빌린 왜건은 성능이 뛰어나 장거리 여행에 안성맞춤이었다. 한동안 라이트에 비친 앞쪽의 검은 아스팔트를 바라보던 비야마가 입을 열었다.
『보스, 그럼 오성 사무실에서도 이번 오더 내역을 다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핸들을 쥔 비야마가 시선을 돌려 백승근의 표정을 살폈다.
『앞으로의 오더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당연히 오더는 나이로비 무역에서 맡는다』
백승근이 라이트에 비친 영양떼에 시선을 준 채 말했다.
『오성 사무소에서 무기를 취급할 수는 없어』
그러나 안길수에 의해 모두 사실을 알게 된 터라 돌아오면 내부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이 잘 수습되어서 다행입니다. 보스』
비야마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므로 백승근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수습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강영주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특히 북한 측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융통성이 제한을 받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저로서도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굴을 굳힌 강영주가 말했을 때 홍진국이 안경을 벗어 쥐었다. 그러자 영 딴판인 얼굴이 되었다.
『그 자가 하물을 팔아 준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이야? 그 말을 믿으라구?』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강영주도 눈을 치켜떴다.
『납치된 여자를 죽이고, 오성상사 지사원 모두를 무기밀매 혐의로 체포시키고, 오성 社內 여론을 들끓게 하여 무기 하역을 중지시킨다고 해도 두만강호에 실린 우리 하물을 대신 판다는 보장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와 협력해서 하물을 판다는 것인가?』
『차기 오더도 있습니다. 그 자와 협력하면 팔 가능성이 있습니다』
『책임을 지겠소?』
불쑥 홍진국이 물었을 때 강영주는 심호흡을 했다.
『제가 목숨을 걸겠습니다. 한 달만 여유를 주십시오』
강영주를 쏘아본 채 어금니를 지근지근 씹던 홍진국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보위부에 연락을 해서 두만강호가 한 달 후에 입항하도록 하겠소. 그때는 책임을 지도록』
副(부)대사실을 나온 강영주는 곧은 자세로 복도 끝까지 걸어 온 다음에 계단 앞에서 멈춰섰다. 밤 9시여서 주위는 조용했다. 홍진국에게는 보증금으로 선금 1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홍진국은 물론이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 대부분은 더 받고 10만 달러만 말했다고 할 테니까, 쓴웃음을 지은 강영주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야 남조선 상사원들의 실체를 알았다. 놈들은 너무나도 태연히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준 돈 10만 달러쯤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며 아마 놈은 그 수십 배의 자금을 횡령했을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 8시 정각에 사무실로 출근한 안길수에게 직원들이 몰려 들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직원들의 따뜻한 위로의 말에 응답하던 안길수는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얼굴이 상기되었다.
『지사장은 오늘부터 사흘간 휴가를 떠났습니다』
안길수의 눈치를 살핀 이병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장님도 며칠 쉬시지 그러세요?』
『나는 지사장 목 떨어지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갈라진 안길수의 목소리에 사무실 안은 금방 조용해졌다. 눈을 치켜뜬 안길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직원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제 실적만 올리려는 놈은 가만 안 두겠어. 내가 어젯밤에 비서실에다 다시 直報(직보)를 했으니까 곧 조치가 있을 거야』
직원들은 어제 이미 안길수로부터 다 들은 터라 눈치만 보았다. 안길수의 목소리가 다시 사무실을 울렸다.
『내 처가 돌아온 건 회사 내부에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야.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백승근이는 내 처를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라구』
그때 지사장실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이병석이 전화를 돌려받더니 곧 긴장한 얼굴로 응답을 했다. 그리고는 전화기의 수화구를 손바닥으로 막더니 안길수를 보았다.
『비서실장이십니다. 과장님 바꿔 달라시는데요』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선 안길수는 전화기를 빼앗아 쥐었다. 얼굴이 다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예, 안길수 과장입니다』
힘차게 응답한 안길수가 부동자세로 선 채 앞쪽의 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응답을 계속했는데 이병석은 물론이고 직원들은 그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는 얼굴도 하얗게 굳어졌다. 그래서 안길수의 통화가 끝났을 때 아무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계속>●
투자실패로 본사 기조실에서 모스크바 지사로 전출된 백승근은 지사장 이하 간부들의 견제를 받는다. 그러나 러시아 여직원 올가의 도움으로 이르쿠츠크에 대규모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르쿠츠크로 향한다. 그러나 러시아 가스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이미 한국의 근대건설과 일본의 한신건설로 압축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백승근은 前 KGB 출신의 연합노조위원장 안드레비치를 이용하여 근대와 연합으로 총 4억 달러 공사를 수주한다. 그 과정에서 올가가 피살되었지만 결국 백승근은 이르쿠츠크 지사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러나 그룹 회장의 동생 윤성희의 음모와 비서실 담당부장인 최경일의 견제를 받는다. 결국 백승근은 이르쿠츠크에서 C급 지사인 케냐의 나이로비 지사장으로 전출된다. 폐쇄 직전의 지사인 나이로비 지사장이 된 백승근은 반군 무장단체에 북한이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직접 자금을 대는 미국 측을 설득하여 더 싼 가격과 더 빠른 납기, 그리고 위험성을 강조하여 오더를 따낸다. 오더를 뺏기게 된 북한무역 대표부의 강영주는 기를 쓰고 백승근을 찾는다. 남북간의 생사를 건 싸움이 나이로비에서 시작된 것이다.
? 국경 없는 전쟁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백승근이 8층 복도로 나왔을 때 옆쪽 벽에 기대 서 있던 흑인 한 명이 다가와 섰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807호실입니다』
머리만 끄덕인 백승근은 사내가 가리킨 807호실을 향해 발을 떼었다. 오후 2시40분, 호텔의 복도는 그들 두 사람뿐이었지만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져 오는 것 같은 긴장감에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백승근이 807호실의 벨을 눌렀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금방 문이 열렸다. 그를 맞은 사내는 미국 대사관의 상무관 토드 필립이다.
『백,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한데』
등 뒤로 문을 잠그면서 필립이 백승근에게 자리를 권하지도 않고 말했다.
『북한 무역사무소의 행동이 심상치가 않아서 말이오』
『그 사람들이야 길길이 뛰는 전문가들 아닙니까?』
소파의 팔받침에 한 쪽 엉덩이만 걸치고 앉은 백승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또 연락이 왔습니까?』
『강영주라는 여자요. 나한테 만나자고 하길래 날 만날 이유가 없다면서 딱 잡아 떼었는데』
앞쪽에 앉은 필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리한테야 대놓고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이나 무기를 받는 움베니 쪽에 그 자들이 보복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단 말이오』
『배는 6일 후에 탕가항에 도착합니다』
정색한 백승근이 필립을 보았다.
『결제는 하역 작업이 끝나는 시점에서 해 주시겠지요?』
『전화 한 통이면 되니까』
필립도 정색하고 말했다.
『물품 확인을 해야 할 텐데 당신 측에서는 누가 갈 겁니까?』
『내가 갑니다』
엄지 손가락을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보인 백승근이 희미하게 웃었다.
『직원 한 명을 데리고 갑니다』
『움베니 측에서는 반군 사령관 안톤 타몬이 직접 나올 것이고 그리고 나도 갑니다』
필립도 백승근이 했던 것처럼 엄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북한 측 앞에서는 내 얼굴을 직접 나타내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겠지』
그리고는 필립이 백승근을 똑바로 보았다.
『조심하시오, 백. 그 강이라는 여자가 당신을 찾으려고 푸카노를 협박까지 했다는 거요』
케냐는 1890년 英·獨(영·독)의 합의에 의해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는데(1895년) 케냐 원주민의 최대 부족인 키쿠유(Kikuyu)族은 1920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키쿠유族 과격파가 1948년에 무장조직인 마우마우(Mau Mau)단을 결성한 후부터 독립투쟁은 본격화되었다.
키쿠유族의 지도자 케냐타(Kenyatta)가 이끄는 독립투쟁은 全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결국 케냐는 1963년 12월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던 것이다. 독립 후에 다수족인 키쿠유族의 케냐타가 집권하여 다수 부족과 소수 부족 간의 대립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여 케냐는 아프리카의 우등생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78년 케냐타가 사망한 후, 소수 부족인 칼렌진族 출신의 모이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갈등은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모이 집권 20년이 넘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집권 측과 다수 종족 간의 갈등 양상을 넘어 부정과 부패에 대항하는 민주세력과의 투쟁이 되었다.
거기에다 모이는 인권과 부패 문제에 간섭하는 서방에 적대적이었으며 우간다와 탄자니아 등의 게릴라 조직을 지원하여 독자세력을 구축해왔던 것이다. 동서 냉전이 舊소련의 붕괴로 와해되고 유일 초강국 미국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독재자들의 운신 범위가 많이 제한되었지만 전과 다른 상황도 일어났다.
그것은 경쟁 상대를 잃은 미국이 전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국의 이해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 가만 놔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가차가 없다. 모이가 그것을 모를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미국과의 우호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해 왔던 것이다. 軍 정보국장 무쿰바가 대통령궁에서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 반이었다.
회의실로 들어선 무쿰바는 부동자세로 서서 맞는 참모들을 둘러보더니 털썩 의자에 앉았다. 지친 듯한 행동이었지만 핏발선 눈이 번들거렸고 입술은 꾹 닫은 채였다. 軍 정보부장은 軍의 2인자 서열이었지만 대통령의 신임도로 따지면 참모총장을 제치고 軍 1인자이며 정권의 2인자가 될 것이었다.
軍 정보국은 軍의 인사는 물론이고 처벌의 권한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종류의 反정부 활동에 대한 수사 지휘권까지 장악하고 있어서 무쿰바의 권세는 참모총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참모들이 테이블에 둘러 앉았을 때 무쿰바가 입을 열었다.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하시기로 했다. 내 건의를 받아들이셨어』
『그렇습니까?』
안도한 듯 이곳저곳에서 한숨 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정보부의 작품인 것이다.
『자, 대외적인 문제는 이쯤 해두기로 하고 안톤 타몬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정색한 무쿰바의 말에 참모들은 다시 긴장했다. 안톤 타몬은 민족민주포럼(FORD)의 무장조직 사령관으로 현상수배범이다. 타몬의 체포나 사살에 현금 100만 달러를 걸어 놓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정보부는 허탕만 치는 중이었다. 그때 참모 비추 대령이 입을 열었다.
『곧 타몬이 대량의 무기를 인도받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무쿰바의 시선을 받은 비추가 말을 이었다.
『무기는 리프트 계곡지역, 타나강가에서 引渡(인도)가 된다는 정보입니다』
『놈들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어』
눈을 부릅뜬 무쿰바가 앞쪽의 벽을 쏘아 보았다.
『대통령께서 미국을 친선방문을 하시는 상황이니 이것을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쿰바의 시선이 참모들을 차례로 훑어갔다.
『배후의 미국 정보원을 잡아 처단해도 미국 정부 측에서는 사건을 공개하지 못할 테니까』
『지사장은?』
안길수가 묻자 이병석은 머리만 저었다. 오후 6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오전에 외출한 백승근은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제 자리에 앉은 안길수가 에어컨을 향해 가슴을 폈다. 아침에 그는 오성전자의 전무 고동식 가족을 암보세리 국립공원에 데려다 주고는 지금 돌아온 것이다.
『지사장은 언제 나간 거야?』
『오전 10시경에 나갔습니다』
이병석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즘 사무실에 붙어 있지를 않고 나가서는 연락도 안 해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큰 소리는 쳤지만 날이 갈수록 맥이 풀리는 거야』
의자에 등을 기댄 안길수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앞쪽 자리의 송대만과 유학재도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도 안길수가 제임스와 함께 뷰익을 끌고 나가려다 거절당한 것을 안다. 안길수가 정색하고 이병석을 보았다.
『그럼 지사장이 뷰익을 끌고 나간 건가?』
『아니, 제임스는 샘플 보내려고 공항에 갔습니다. 지사장은 차를 쓰지 않았어요』
『시발놈』
잇사이로 욕설을 뱉은 안길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 보자』
그 시간에 백승근은 나이로비 무역의 사무실에서 비야마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크렌츠키호는 6일 후에 탄자니아의 탕가항에 도착한다』
백승근이 두 팔로 테이블을 받치고는 비야마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비야마, 나하고 탕가에 같이 가야겠다』
『알겠습니다』
거침없이 대답한 비야마가 백승근을 보았다.
『보스, 물론 이 선적 내용은 사무실 안에서도 저하고 보스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해야겠지요?』
『당연하지, 네 동료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 위험해지기 때문이야』
이제 비야마는 작전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부하가 된 것이다. 얼굴을 굳힌 백승근이 말을 이었다.
『탕가항의 세관은 미국 측이 손을 써 놓았다니 통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거야. 하역된 무기를 확인한 후에 현장에서 안톤 타몬에게 넘겨 주면 된다』
『안톤 타몬을 만날 수가 있겠군요』
비야마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우마우단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설적인 戰士(전사)지요. 젊은이들은 그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시선을 돌린 백승근이 입맛을 다셨다. 타몬은 1250만 달러의 무기를 받아가는 실수요자일 뿐인 것이다. 타몬이 수백 건의 전설을 쌓더라도 직접 구매를 할 자금력이 없는 한, 전혀 관심 밖의 인물이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 케냐타 애버뉴와 카마티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사거리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좌우를 둘러보더니 발을 떼었다. 사내는 행인들 사이를 빠르게 걷더니 곧 인디아 뱅크를 끼고 우측 길로 들어섰다. 헐렁한 흰색 셔츠에 검정색 바지를 입은 특징없는 외모의 흑인이다. 건들거리며 걷던 사내는 다시 우측의 골목길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발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좁은 골목인데다 가로등도 켜 있지 않아서 바깥쪽만 환하게 드러났다. 골목 안에는 사내 혼자뿐이었다. 그때였다. 사내의 바로 옆쪽 벽에 붙은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어둠 속에서 사람의 얼굴만 드러났다.
『어서 안으로』
낮게 영어로 말한 사내의 얼굴은 동양인이었다. 잠시 후에 흑인 사내는 건물 안의 방 안에 들어와 있었는데 앞쪽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는 강영주였다. 강영주는 오늘도 어두운 색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고 야구모를 눌러썼다. 방이 꽤 넓었지만 두 개의 형광등 중 한 개만 켜져 있는 데다 철제 테이블은 어수선하게 놓여 있고 바닥은 휴지와 포장지로 어수선했다. 폐업한 사무실 같았다.
『오티씨, 비밀은 지켜 드릴 테니까요』
강영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것만 말해 주세요. 사례는 할 테니까』
사내가 흰창이 많은 눈을 크게 뜨고 강영주를 보았다. 강영주의 옆쪽 벽에 기대서 있는 사내는 조금 전 오티를 안내해 온 김기승이다.
『난 시간밖에 모릅니다』
메마른 목소리로 사내가 말하고는 다시 눈동자를 굴려 김기승과 강영주를 번갈아 보았다. 오티는 움베니의 보좌관 푸카노의 경호원이다. 길게 숨을 뱉은 강영주가 바지 주머니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더니 오티 앞의 테이블에 놓았다.
『100달러 줄 테니까 시간을 말해 줘요』
『닷새 후라고 들었습니다』
오티의 시선이 지폐로 옮겨졌지만 아직 손이 가지는 않았다.
『장소나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걸 말해주면 500달러를 드리지』
『그것은 모릅니다』
그러자 강영주가 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당신이 우리 측 연락을 받고 이곳까지 온 것은 정보가 있기 때문이오. 100달러를 받으려고 이런 모험을 했을 리는 없어요』
『1000달러를 주시오』
불쑥 오티가 말했을 때 강영주의 웃음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벽에 기대고 있던 김기승이 어깨를 떼고 바로섰다.
『좋아요. 장소와 누구라는 걸 말한다면』
『장소는 모르지만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건 압니다』
오티의 말이 빨라졌고 표정도 진지해졌다.
『그것만으로도 1000달러 가치가 있을거요』
『좋아요. 말해요. 하지만』
정색한 강영주가 오티를 쏘아 보았다.
『우릴 속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요?』
『압니다』
『그럼 말해요』
『먼저 돈을 보여 주시오』
쓴웃음을 지은 강영주가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묶은 지폐뭉치를 꺼내더니 열 장을 세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자, 말해요』
『한국인이 중개상으로 나섰습니다』
그 순간 강영주는 눈만 크게 떴으므로 방 안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티가 헛기침을 했다.
『움베니 총재와 푸카노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한국인은 러시아의 거물들과 친해서 러시아제 무기를 북한보다 세 배 빠르게 공급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 이름은?』
강영주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을 때 오티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건 모릅니다』
그때 김기승이 강영주의 옆으로 다가와섰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대표동지, 제가 10여 일 전에 보고드린 기억이 납니다. 오성상사의 새 지사장이』
『이르쿠츠크 지사장으로 있던 놈』
혼잣소리처럼 말한 강영주의 시선이 오티의 몸을 뚫고 지나 뒤쪽의 벽에 꽂혀졌다.
『나도 기억납니다』
『난 오늘 늦을 거야』
수저를 내려놓은 안길수가 입 안에 남은 음식을 삼키고는 말했다.
『고전무가 저녁 8시 비행기로 떠나거든. 그래서 공항까지 나가야 돼』
『지사장도 같이 나가요?』
서미옥이 묻자 안길수는 눈을 크게 떴다.
『지사장이? 그 작자는 아직까지 고전무한테 인사도 하지 않았어』
『어머나, 세상에』
주방 개수대의 물을 잠근 서미옥이 안길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전무님이 오신 지 닷새가 지났는데도 말예요?』
『그렇다니까』
안길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한테 뷰익을 가져가지 말라고 허세를 부린 주제에 인사하러 나갈 수가 있겠어? 이미 그 작자는 종친 인생이야』
『고전무님한테 그 이야기했어요?』
『그럼 안해? 지사장이 뷰익 쓴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내 똥차 끌고 왔다고 했더니 고전무 얼굴도 똥색이 되더구만』
『참, 자기도』
쓴웃음을 지은 서미옥이 안길수의 앞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안길수는 서미옥에게는 자상하고 능력 있는 남편이었다. 또한 회사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다 말해 주어서 서미옥은 직원들의 성격까지도 알고 있었다.
『자, 그럼 다녀올게』
식탁에서 일어선 안길수가 양복 저고리를 집어들고 말했다.
『저녁 혼자서라도 먹어. 나 기다리지 말고』
『알았어요』
안길수에게 다가선 서미옥이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지사장하고 너무 부딪치지 말아요』
지사장 숙소도 방 두 개짜리 구조였는데 응접실이 안길수의 아파트보다 조금 넓을 뿐이었다. 그것은 전임 지사장들이 모두 가족을 떼어놓고 단신으로 부임해 와서 넓은 면적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안길수가 설명해 주었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백승근이 빈 그릇을 치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백승근은 전화기를 집어들면서 힐끗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50분이었으니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2시50분이다.
『여보세요』
『백승근씨지요?』
사내의 목소리에 백승근은 긴장했다. 한국말인데다가 자신의 이름 뒤에 씨라고 부를 사람은 주위에 없었던 것이다.
『예,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내가 당신을 직접 만날 수도 있었지만 일단 협상의 주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사내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백승근은 눈을 치켜뜨고 무의식 중에 현관문을 보았다. 아파트는 5층이었는데 현관문은 제대로 잠겨 있다.
『그럼 상황을 설명해 주지』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의 부하 안길수 과장이 있지? 아마 당신 다음의 서열일 텐데. 그렇지?』
『그래서?』
『안길수의 처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 아이가 집안에 혼자 남겨져 있으니까 빨리 가보는 것이 나을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물었지만 대충 짐작은 가겠지? 그러면 우리 요구 조건을 듣고 싶을 텐데. 안길수의 처를 돌려 받으려면 말이야』
백승근이 어금니만 깨물었을 때 사내가 짧게 웃었다.
『어때? 이제는 실감이 가나?』
『너희들은 누구야?』
『그것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백승근』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낮고 굵어졌다.
『우리는 네가 케냐 당국에 신고를 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지』
『…』
『만일 신고를 하면 안길수의 처는 영영 사라지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네가 추진하는 일도 박살이 날 테니까』
그때 백승근이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이봐, 난 지금 장난을 할 시간이 없어. 이만 전화를 끊겠다』
『이것봐』
『미친 놈이군. 이놈은』
그리고는 전화기를 내려 놓은 백승근이 전화코드를 잡아 뽑았다. 북한 측에서 알게 된 것이다. 토드 필립이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저고리를 집어든 백승근이 아파트 안을 둘러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당분간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그로부터 15분쯤 후인 오전 9시20분경에 인터컨티넨탈 호텔 로비로 들어서던 안길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둥 쪽으로 다가선 그가 전화기를 귀에 붙였을 때 수화구에서 다급한 이병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장님, 얼른 댁에 가보시지요. 댁에 애만 혼자 있는가 지사장님이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놀란 안길수가 눈을 치켜떴다.
『애만 혼자 있다니? 와이프도 집에 있는데』
『제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습니다』
『잠깐 어디 나갔을 수도 있지. 그런데 지사장이 왜 그러는 거야?』
『조금 전에 수상한 전화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어떤 놈이 사모님을 납치했다고 지사장한테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사장도 지금 과장님 댁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때서야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안길수가 몸을 돌렸다. 호텔의 방에서는 고동식이 가족과 함께 시내관광 안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그룹 회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못 간다.
아파트 앞에서는 백승근이 제임스와 함께 서 있었는데 안길수를 보더니 서두르듯 말했다.
『안에서 애 울음소리가 들려, 어서 문을 열어봐』
달려오는 동안 열 번도 더 집에다 통화를 시도했지만 받지를 않아서 안길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키를 꽂아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딸이 두 손을 벌리며 맞았다.
『여보』
딸을 안으면서 안길수가 집안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으므로 안길수가 딸에게 물었다.
『엄마 어디 갔어?』
그러나 네 살짜리 딸은 더 소리내어 울 뿐이다.
『안과장, 이야기 좀 하자』
백승근이 그때서야 안길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는 아직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제임스에게 말했다.
『제임스, 문을 닫아라』
겨우 울음을 그친 딸을 안은 채 소파에 앉은 안길수가 백승근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지사장님이 전화를 받으셨다면서요?』
눈을 치켜뜬 안길수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납치했다고 누가 연락을 해왔습니까?』
『끊는 바람에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했어. 하지만 한국 사람이었다』
정색한 백승근이 안길수를 보았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면 살려두지 않겠다는군』
『한국 사람이라면』
안길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어, 어떤 놈이』
『곧 다시 연락이 올 거야』
『…』
『안과장은 당분간 집에 있는 것이 낫겠다. 그놈한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르고 애를 봐야 할 테니까』
『지사장님』
이를 악문 안길수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경찰에 신고를 안 해도 될까요?』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선 백승근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안길수를 보았다.
『그 놈의 요구조건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인 오전 11시반경에 백승근은 힐튼 호텔의 807호실로 들어섰다. 오늘도 토드 필립은 백승근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백,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백승근이 전화로 상황을 설명해 준 것이다. 소파에 앉은 백승근이 길게 숨을 뱉았다.
『그대로 추진할 겁니다. 배는 나흘 후에 탕가에 도착합니다』
『그럼 그 여자는』
흘끗 백승근의 눈치를 살핀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놈들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런데 그 과장은 내막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알려 주실 거요?』
그러자 정색한 백승근이 머리를 저었다.
『북한 놈들이 안과장한테 알려 줄지 모르지만 난 부정할 거요』
『으음』
『내 처가 그런 경우에 닥쳤다면 하고 생각해 보았지요』
백승근이 눈을 치켜뜬 채 입술 끝을 비틀고 웃었다.
『마찬가지로 계속 추진할 겁니다. 그따위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거요』
『백, 내가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소』
어깨를 늘어뜨린 필립이 다시 백승근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오』
『이 사람아, 어떻게 된 거야?』
고동식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송화구를 울렸을 때 안길수는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 예. 전무님』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해줘야 기다리지 않을 것 아닌가?』
『예, 전무님. 그런데』
『우린 기다리다가 지금 시내로 나왔어』
고동식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한국 식당으로 가려는데, 차를 가지고 식당으로 와 주겠나? 짐이 조금 있어서 그래』
『전무님, 제가 지금 바쁩니다』
이를 악문 안길수가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12시10분, 아직 아무 곳에서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허어, 그래?』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동식은 헛웃음 소리를 내더니 전화를 끊었다. 이것으로 10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안길수의 시선이 소파에서 자고 있는 딸 소영에게로 옮겨졌다. 나이로비에 체류하는 한국인은 교민을 포함하여 500명 정도인 것이다. 관광객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을 테니 체류자나 북한계가 개입되었을지 모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안길수는 소스라쳤다. 이번에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가 울린 것이다. 서둘러 전화기를 든 안길수는 심호흡부터 했다.
『여보세요』
『안길수 과장이신가?』
굵은 사내의 목소리에 안길수는 숨을 멈췄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 것이다.
『예, 그런데요』
『내가 당신 처를 데리고 있는데』
사내가 낮으나 분명하게 말했다.
『오늘 중으로 조처가 있지 않으면 당신 처는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거야』
『여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오?』
안길수가 소리치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조처를 하란 말이오? 그리고 내 처를 왜?』
『왜 그런지 모른단 말인가?』
사내도 목소리를 높였다.
『움베니한테 거래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통보를 해, 그러면 네 처는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을 것이다』
눈만 끔벅이는 안길수의 귀에 사내의 목소리가 찌렁이며 울렸다.
『우리는 너희들의 배가 4일 후에 도착한다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이다. 그 배의 짐이 하역된다면 네 처는 죽는다』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안길수는 숨도 쉬지 않고 앞쪽의 벽만 보았다.
『알았어. 당장 사람을 보내지』
안드레비치가 가볍게 말했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로 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백』
『고맙습니다. 안드레비치』
전화기를 내려놓은 백승근이 앞에 서 있는 비야마를 보았다.
『물품은 정확히 4일 후에 탕가항에 도착한다. 계획에 차질은 없어』
『보스, 그럼 내일 출발해야 합니다』
비야마가 탁자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육로로 나망가를 거쳐 탄자니아로 들어가면 탕가까지 이틀이 걸립니다』
『내일 중으로 러시아에서 사람이 올 거야』
가늘게 숨을 뱉은 백승근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12시 반이다.
『우리도 자위 수단을 써야 되겠단 말이다』
이곳은 러시아 대사관의 레온 바시노프가 빌려준 市 외곽의 주택이어서 주위는 조용했다.
『보스, 그럼 납치된 직원 부인은 살아돌아올 가능성이 없겠군요?』
차분한 목소리로 비야마가 물었을 때 백승근이 머리를 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협상을 하겠지만 배는 돌려보내지 못한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으므로 둘은 말을 그쳤다. 백승근의 전화였다. 전화기를 집어든 백승근이 귀에 붙였을 때 곧 안길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안길수가 다급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중으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제처를 어떻게 하겠답니다』
『그래?』
『움베니란 사람한테 거래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통보를 하라는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4일 후에 배가 도착하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짐이 하역되면 제 처가 죽는다는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헛기침을 한 백승근의 목소리가 조금 굵어졌다.
『그 놈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가 본데, 앞으로 전화가 오면 무조건 난 모르는 일이라고 하고 나한테 넘겨, 알았나?』
『예? 하지만』
『내가 처리할 테니까 말이야』
『지금 어디 계십니까?』
『밖에서 지금 당신 일을 처리하고 있어. 그러니까 기다려』
『지사장님』
안길수가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십니까?』
『알아보는 중이야. 그리고 한 가지 알아낸 것은』
그리고는 백승근이 입맛을 다셨다.
『상대는 북한 놈들이야. 그리고 이건 비공식 라인이어서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 그렇다면』
『공개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기다려.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휴대전화의 덮개를 닫은 백승근이 길게 숨을 뱉았다. 안길수가 이렇게 성실한 자세로 상의해 온 것은 처음이다.
대표실로 들어선 김기승이 강영주의 앞에 와 섰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은 더 번들거렸다.
『백승근은 회사에 없습니다. 회사에는 직원 셋만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강영주가 눈만 깜빡이며 가만 있었으므로 김기승이 말을 이었다.
『당국에 신고를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안길수의 행동이 조금 걸립니다』
『시치미를 떼는 것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맛살을 찌푸린 김기승이 책상 앞으로 바짝 붙어섰다.
『제 처가 납치당한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단 말입니다』
녹음 내용을 들었던 터라 강영주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백승근에게 먼저 연락을 한 다음에 처를 납치당한 당사자가 되는 안길수에게 통보를 함으로써 상황을 증폭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승근은 들은 척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데다 안길수는 모른 척 허둥대기만 했으니 이쪽은 조금 김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강영주가 흘끗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5분 전이다.
『백승근이 지사원들도 모르게 제2의 무역상사를 설립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강영주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내가 백승근 입장이 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렇더라도 안길수는 제2인자입니다. 안길수도 모르게 설립했을까요?』
『어쨌든 지금은 알게 되었을 테니까』
혼잣소리처럼 말한 강영주는 엷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백승근의 행동에 따라서 안길수 처의 생사가 결정되겠지요』
그때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강영주는 전화기를 쥐었다.
『여보세요』
대표 전화여서 강영주는 영어를 썼다.
『조선무역 대표십니까?』
송화구에서 한국어가 울린 순간 강영주는 퍼뜩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김기승을 불러 옆쪽 전화기를 가리켰다. 김기승이 재빠르게 옆쪽 전화기를 들면서 녹음 버튼을 눌렀을 때 강영주가 차분하게 물었다.
『누구시죠?』
『오성의 백승근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그쪽에서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해서요』
『오해라뇨?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아침의 사건 말입니다』
『어떤 사건 말씀입니까?』
『우리 과장한테 배가 어떠니 하역이 어떠니 하셨다는데 우린 전혀 그런 일을 모릅니다』
『글쎄, 우리도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네요』
말투는 차분했지만 강영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전화 잘못 거신 것 아녜요?』
『그럼 피차 전화를 잘못 건 셈이 되겠습니다』
그리고는 송화구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으므로 강영주는 어금니를 물었다. 다시 송화구에서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해드릴 일이 없고 직원 가족에 대해서도 처분만 바랄 뿐입니다. 그럼 이만』
강영주가 마악 입을 떼었을 때 전화가 끊겼다.
『이 자식이』
먼저 흥분한 것은 김기승이다. 눈을 부릅뜬 김기승이 강영주를 보았다.
『이놈 아주 지독한 놈인데요. 대표동무』
『가볍게 본 것 같아요』
시선을 내린 강영주가 입술만을 달싹이며 말했다.
『다른 수단을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소영에게 저녁을 차려 먹이고 났을 때는 오후 6시 반이었다. 처음에 엄마는 시장 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친구 집에 가서 조금 있으면 올 것이라고 달랬더니 소영은 곧 잊고 잘 놀았다. 그러나 안길수는 점심과 저녁을 모두 거른 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안해졌다. 사무실 직원들이 자주 전화를 해왔지만 그들은 내막을 모른다. 백승근이 말해 주지 않았고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동식 전무는 지금쯤 이를 악문 표정으로 공항에 나가 있을 것이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안길수는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이병석이 금방 전화를 받았을 때 안길수는 다급하게 물었다.
『지사장하고 연락이 돼?』
『아직 안 됩니다. 전원을 꺼놓아서요』
10분쯤 전에는 통화를 했지만 이병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아직 없어. 그런데』
안길수가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지사장,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우리가 다 사무실에 있는 줄 알고 계시니까』
『경찰에다 신고도 하지 못하게 했으면 본사에다는 보고를 해야 정상 아닌가? 이것도 저것도 다 못하게 하고 연락도 안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병석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안길수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벽시계를 보았다. 저녁 6시50분이다. 한국 시간으로는 밤 12시50분이 될 것이었다.
『두만강호는 10일 후에 몸바사항에 도착합니다』
토드 필립이 유리창을 등지고 서서 말했다.
『그리고 크렌츠키호는 4일 후에 탕가항에 도착하지요』
『북한놈들은 끝까지 밀어붙일 작정이야』
입맛을 다신 알렉 스완슨이 커피잔을 들었다가 잔이 빈 것을 보고는 내려 놓았다.
『그리고 한국놈도 대단하군. 제 부하의 와이프가 납치를 당했는데도 밀어붙이다니』
『예정대로 탕가항에서 하역시킬 테니까 입회해 달라는데요』
『우리는 빠를수록 좋아. 무쿰바가 눈치채기 전에 끝내야 돼』
『그것이 문제입니다. 보스』
정색한 필립이 스완슨을 보았다.
『북한 측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무쿰바에게 제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들 사업을 가로챈 한국 측 정보를 다 넘겨줘서 판을 깰 가능성이 많습니다』
『북한 측이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가 문제야. 우선 오성의 백승근이 노출되었고 듣자 하니 하역 시기도 아는 것 같은데』
『무쿰바가 백승근만 잡아 족치면 다 불게 될 겁니다』
『백은 지금 어디에 있나?』
정색한 스완슨이 묻자 필립은 입맛을 다셨다.
『나한테 탕가에서 만나자고 하고선 자취를 감췄습니다』
『교활한 놈이군』
스완슨이 쓴웃음을 짓더니 곧 정정했다.
『하지만 거래선으로서는 믿을 만해』
다음날 오전 10시 정각이 되었을 때 백승근은 먼저 안길수에게 전화를 했다.
『연락온 것 있나?』
백승근이 대뜸 물었을 때 안길수의 굳은 목소리가 송화구를 울렸다.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구』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안길수가 목소리를 높였으므로 백승근은 소리 죽여 숨을 뱉았다.
『이봐, 이것은 떠들어서 될 일이 아냐』
『난 어젯밤에 본사에다 보고를 했습니다. 본사에서는 알고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본사에다 보고했다구?』
『난 지사장님이 본사에도 보고하지 말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안길수가 그러고는 전화를 끊는 바람에 백승근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로부터 30분쯤 후에도 백승근은 거실에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는데 이번 상대는 정인호 부사장이다.
『안길수는 비서실 라인으로 보고했기 때문에 이미 회장님도 알고 계신다』
정인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안길수는 내막을 모르는 것 같다. 북한 측을 자극한 것 같다고 하면서 그 내막을 네가 알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보고를 했다는군』
『저는 오늘밤에 하역 확인을 하려고 떠납니다. 부사장님』
그러나 정인호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고 백승근도 전화기를 쥔 채 창 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정인호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회장님과 난 이번 일은 네 재량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예, 부사장님』
『그 방법이 최선일까?』
『예, 부사장님』
눈을 부릅뜬 백승근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오더를 따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심호흡을 한 백승근이 말을 이었다.
『저도 목숨을 걸겠습니다. 부사장님』
『누구십니까?』
문으로 다가선 제임스가 영어로 물었을 때 바깥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안선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제임스는 한국어로 안선생이란 단어가 알아 들었지만 안쪽에 있던 안길수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제임스는 어젯밤부터 경호역으로 안길수의 집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안길수가 제임스를 제치고는 문에다 대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요. 그래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사내가 정중하면서도 또렷하게 말했다.
『다 안선생을 위한 일입니다』
눈을 치켜뜬 안길수가 결심한 듯 문을 열었을 때 서 있던 사내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실례합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안길수가 비켜서자 사내는 현관으로 들어섰는데 거침없는 태도였다. 오히려 제임스와 안길수가 손님처럼 허둥대면서 문을 잠그고 건성으로 자리를 권하고는 마주보며 앉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난 북조선 사람입니다』
사내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을 때 제임스는 눈만 끔벅였지만 안길수는 침을 삼켰다. 예상하고 있었어도 긴장한 것이다.
『이번 일의 내막을 알려 드릴까 해서요』
『도대체 왜』
금방 얼굴이 상기된 안길수가 사내를 노려보았다.
『제 처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럼 내막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사내가 안길수를 달래려는 듯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들은 아니, 당신들 지사장의 독단적인 행동인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공을 들여놓은 오더를 일순간에 가로채간 것입니다. 이것은 강도짓이나 같습니다』
이제는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우리는 이런 철면피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기필코 응징하고야 말 것이오』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소』
부대사 홍진국이 안경테를 손 끝으로 밀어올리면서 말했다.
『두만강호가 되돌아간다면 東아프리카 사업 계획은 전면적 수정이 불가피해질 것이고 동무나 내가 본국으로 소환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홍진국이 길게 숨을 뱉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보위부에서 전문이 왔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물을 처분하라는 내용이오』
『최악의 경우에 무쿰바에게 정보를 주고 한국 측의 하역을 막겠습니다. 오성의 백승근만 잡아 족치면 하역항을 알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강영주가 말했을 때 홍진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백승근이 자취를 감췄다고 하지 않았소? 하역 예정일이 사흘 남았는데 그 동안에 잡을 수가 있겠소?』
『백승근을 잡지 못한다면 오성상사 지사원 모두에게 무기밀매 혐의를 씌워 무쿰바가 체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부진 표정으로 강영주가 말을 이었다.
『제가 갖고 있는 정보만 가지고도 그 자들을 충분히 체포시킬 수가 있습니다』
홍진국은 어금니만 지근지근 씹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홍진국은 東아프리카 지역 사업 책임자로서 순풍에 돛단배를 띄운 것처럼 사업이 순조로웠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강영주가 대표로 있는 조선무역이 달성한 실적 때문이었지만 홍진국은 곧 보위부의 부부장으로 승진되어 귀국할 예정이었다.
『백승근이 독한 놈이지만 제 직원 모두의 목숨과 오더를 바꾸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강영주가 낮으나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오성그룹 내부로 노출되도록 했습니다. 회사 내에 이 일이 알려지게 된다면 우두머리들이 여론에 밀려 직원들의 목숨과 오더를 바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상황이 절박하오』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인 홍진국이 신경질적으로 안경테를 밀어올렸다.
『시간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단 말이오』
대사관을 나온 강영주가 케냐타 거리 입구에 닿았을 때는 오후 5시10분이었다. 요즘들어 자주 시계를 내려다 보는 버릇이 들었으므로 이맛살을 찌푸린 강영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호등에 차들이 멈춰서 있는 주위를 행인들이 무질서하게 지나고 있었다. 밝은 표정의 관광객 무리에다 후줄근한 셔츠 차림의 현지인도 흘끗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그때 운전석 옆으로 백인 하나가 다가왔다. 운전사 겸 경호원인 이남규는 핸들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앞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운전석 옆쪽의 유리창이 하얗게 부숴지더니 옆 머리를 강타당한 이남규가 털썩 옆으로 쓰러졌고 문이 열리면서 백인이 들어섰다. 다음 순간 강영주는 자신의 옆쪽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움직이지 마』
벌써 강영주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 백인 하나가 소음기가 끼워진 권총으로 옆구리를 밀어붙였다. 운전석에 오른 사내는 재빠르게 브레이크를 풀더니 차를 우회전시켰다. 근처에 행인들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눈만 멀뚱거릴 뿐이었고 그 사이에 차는 곧장 달려 나갔다. 정신을 차린 강영주가 눈을 치켜뜨고 옆쪽 사내를 보았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소리치듯 말했지만 사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옆구리의 총구는 더 세게 눌려졌다. 그때 옆자리로 엎어진 채 밀려난 이남규가 낮은 신음소리를 뱉으며 꿈틀거렸고 운전석의 사내가 손을 치켜들더니 내려쳤다. 이남규가 짧은 신음과 함께 잠잠해졌을 때 강영주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 자들은 전문가들인 것이다.
강영주가 끌려간 곳은 나이로비 북동쪽의 한적한 주택가였다. 고원지대에 드문드문 세워진 주택들의 외관은 모두 빼어났고 정원에는 빈틈없이 잔디가 깔린 이곳은 舊 영국령 시대부터의 고급 주택가로 지금은 외교관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낮은 구릉을 우회전한 차가 2층의 흰색 저택 앞으로 다가갔을 때 철제 대문이 소리 없이 좌우로 열렸다. 정문에서 저택의 현관까지는 100m쯤 되었는데 좌우에는 무성한 숲이 조성되었고 저택 앞쪽은 잔디밭이다. 차가 현관 앞에 멈춰섰을 때 옆자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자, 내려』
이미 총은 치운 지 오래였지만 사내의 표정 없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강영주는 사내를 따라 차에서 내리고는 계단을 올라 현관 앞에 섰다.
『자, 안으로』
현관문을 반쯤 연 사내가 다시 영어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선 강영주는 넓은 로비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동양인 사내를 보았다. 사내도 강영주를 마주보고 있었는데 키가 컸고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눈빛이 강했다. 강영주가 서너 발짝 발을 떼고는 멈춰 섰을 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강영주씨, 난 백승근이오』
로비의 양쪽 벽에 부딪친 백승근의 목소리가 울렸다. 백승근이 발을 떼어 강영주의 세 걸음쯤 앞으로 다가와섰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모시고 오도록 했는데, 미안합니다』
강영주는 사내가 자신이 백승근이라고 밝혔을 때 웬 일인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다가선 백승근과 다시 시선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 앉읍시다』
백승근이 소파를 눈으로 가리켰을 때 강영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새삼 깨닫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한국인이 전문가를 고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자 백승근이 정색한 얼굴로 강영주를 보았다.
『자, 이쯤 되었으니 안과장의 부인을 돌려보내 주시지요』
백승근의 억양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나하고 협상을 하십시다』
『어떻게 말이죠?』
심호흡을 한 강영주가 똑바로 백승근을 보았다.
『당신들 배를 돌려 보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이미 게임은 끝났어요』
그리고는 백승근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당신들 억지가 통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곧 우리 측에서 무쿰바에게 당신들에 대한 정보를 다 건네 줄 겁니다. 그러면 오성의 지사원 모두가 어떻게 될지 아시지요?』
『안길수를 찾아와 상황을 다 알려 주셨더군. 당신들 의도대로 안길수는 본사에다 다 보고를 했고』
『당신들 체제에서 社內 여론을 무시할 수 없겠지요. 노조가 들고 일어날 테니까』
『그래서 당신을 데려온 것인데』
소파에 등을 기댄 백승근이 눈으로 뒤쪽 벽에 기대 서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정보 하나를 더 드리지. 저 사람들은 러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의 우방국 러시아가 지금은 나하고 손을 잡은 형편이 되어 있습니다』
백승근이 강영주를 쏘아보았다.
『그들도 오더를 위해서라면 북한 대사관을 폭파시키고도 남을 사람들이지요. 알고 계시지요?』
강영주가 이를 악물었고 백승근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곳은 러시아 대사관 전용 별장이오. 이만하면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을 테니』
상체를 세운 백승근이 다시 정색했다.
『협상을 합시다. 어때요?』
『내 조건은 다만』
강영주가 안간힘을 쓰듯이 말했을 때 백승근이 말을 잘랐다.
『내가 당신 물건을 팔아 드리지요. 기간은 한 달, 그러니까 두만강호는 공해상에서 20일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눈만 크게 뜬 강영주에게 백승근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가격은 현재 가격보다 45%를 깎아야 합니다. 당신들 가격은 너무 높습니다』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마침내 강영주가 그렇게 물었을 때 백승근이 희미하게 웃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나한테 맡기시고』
『보증을 한다면 고려해 보겠어요』
『먼저 당신에 대한 보증부터 해 드리지요』
부드럽게 말한 백승근이 강영주를 보았다.
『당신 계좌번호를 알려 주시면 일차로 즉시 10만 달러를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 하물이 팔렸을 경우에는 잔액 40만 달러를 더 넣지요』
백승근이 눈만 깜박이는 강영주를 향해 이제 환하게 웃었다.
『만일 하물이 팔리지 않았을 경우에는 10만 달러가 날아가는 셈이 되지요. 어때요? 한 번 믿어 보시겠습니까?』
숨까지 죽인 강영주는 한동안 백승근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속이 텅 빈 것 같기도 했고, 복잡해서 실뭉치처럼 얽혀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느낌만은 분명했다. 이 남조선 인간은 교활한 데다 끈질기며 더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있다. 놈은 하이에나처럼 턱 힘이 강해서 먹이를 물면 놓지 않는다.
서미옥이 돌아온 것은 그날 저녁 8시경이었다. 아파트 근처에 있다는 전화를 받고 안길수가 맨발 바람에 달려 나갔을 때 서미옥은 멀쩡한 모습으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길수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던 제임스가 들려 준 말이다. 그 시간에 백승근은 짙게 어둠이 덮인 국도를 달려가고 있었다. 나이로비에서 국도를 따라 남하하여 탄자니아와의 국경 마을인 나망가를 거쳐 동쪽 탕가항까지는 700㎞로 가까운 거리인 것이다. 비야마가 먼 친척 아저씨 이름으로 빌린 왜건은 성능이 뛰어나 장거리 여행에 안성맞춤이었다. 한동안 라이트에 비친 앞쪽의 검은 아스팔트를 바라보던 비야마가 입을 열었다.
『보스, 그럼 오성 사무실에서도 이번 오더 내역을 다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핸들을 쥔 비야마가 시선을 돌려 백승근의 표정을 살폈다.
『앞으로의 오더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당연히 오더는 나이로비 무역에서 맡는다』
백승근이 라이트에 비친 영양떼에 시선을 준 채 말했다.
『오성 사무소에서 무기를 취급할 수는 없어』
그러나 안길수에 의해 모두 사실을 알게 된 터라 돌아오면 내부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이 잘 수습되어서 다행입니다. 보스』
비야마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므로 백승근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수습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강영주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특히 북한 측 체제하에서는 개인의 융통성이 제한을 받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저로서도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굴을 굳힌 강영주가 말했을 때 홍진국이 안경을 벗어 쥐었다. 그러자 영 딴판인 얼굴이 되었다.
『그 자가 하물을 팔아 준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이야? 그 말을 믿으라구?』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강영주도 눈을 치켜떴다.
『납치된 여자를 죽이고, 오성상사 지사원 모두를 무기밀매 혐의로 체포시키고, 오성 社內 여론을 들끓게 하여 무기 하역을 중지시킨다고 해도 두만강호에 실린 우리 하물을 대신 판다는 보장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와 협력해서 하물을 판다는 것인가?』
『차기 오더도 있습니다. 그 자와 협력하면 팔 가능성이 있습니다』
『책임을 지겠소?』
불쑥 홍진국이 물었을 때 강영주는 심호흡을 했다.
『제가 목숨을 걸겠습니다. 한 달만 여유를 주십시오』
강영주를 쏘아본 채 어금니를 지근지근 씹던 홍진국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보위부에 연락을 해서 두만강호가 한 달 후에 입항하도록 하겠소. 그때는 책임을 지도록』
副(부)대사실을 나온 강영주는 곧은 자세로 복도 끝까지 걸어 온 다음에 계단 앞에서 멈춰섰다. 밤 9시여서 주위는 조용했다. 홍진국에게는 보증금으로 선금 1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홍진국은 물론이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 대부분은 더 받고 10만 달러만 말했다고 할 테니까, 쓴웃음을 지은 강영주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야 남조선 상사원들의 실체를 알았다. 놈들은 너무나도 태연히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준 돈 10만 달러쯤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며 아마 놈은 그 수십 배의 자금을 횡령했을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 8시 정각에 사무실로 출근한 안길수에게 직원들이 몰려 들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다행입니다』
직원들의 따뜻한 위로의 말에 응답하던 안길수는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얼굴이 상기되었다.
『지사장은 오늘부터 사흘간 휴가를 떠났습니다』
안길수의 눈치를 살핀 이병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장님도 며칠 쉬시지 그러세요?』
『나는 지사장 목 떨어지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갈라진 안길수의 목소리에 사무실 안은 금방 조용해졌다. 눈을 치켜뜬 안길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직원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제 실적만 올리려는 놈은 가만 안 두겠어. 내가 어젯밤에 비서실에다 다시 直報(직보)를 했으니까 곧 조치가 있을 거야』
직원들은 어제 이미 안길수로부터 다 들은 터라 눈치만 보았다. 안길수의 목소리가 다시 사무실을 울렸다.
『내 처가 돌아온 건 회사 내부에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야.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백승근이는 내 처를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이라구』
그때 지사장실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이병석이 전화를 돌려받더니 곧 긴장한 얼굴로 응답을 했다. 그리고는 전화기의 수화구를 손바닥으로 막더니 안길수를 보았다.
『비서실장이십니다. 과장님 바꿔 달라시는데요』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선 안길수는 전화기를 빼앗아 쥐었다. 얼굴이 다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예, 안길수 과장입니다』
힘차게 응답한 안길수가 부동자세로 선 채 앞쪽의 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응답을 계속했는데 이병석은 물론이고 직원들은 그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는 얼굴도 하얗게 굳어졌다. 그래서 안길수의 통화가 끝났을 때 아무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