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 浚 瑞 美 미시간주립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러시아史 전공
美 인디애나大 사학과 석사. 한국외국어大 동구지역학과 석사. 논문 「1930년대 소련에서의 대협약(Big Deal)의 성립과 그 수혜자들」 등.
美 인디애나大 사학과 석사. 한국외국어大 동구지역학과 석사. 논문 「1930년대 소련에서의 대협약(Big Deal)의 성립과 그 수혜자들」 등.
조국의 강철심장 마그니토고르스크
소련이 붕괴된 지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다. 러시아는 그 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하면 모스크바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보면 모스크바는 11개의 시간대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러시아 영토의 북서쪽 한쪽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점이나 다름없다. 우랄산맥 동편에 위치한 마그니토고르스크라는 도시에서 내가 만났던 한 사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모스크바는 러시아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거대한 러시아 땅덩어리를 생각하면 모스크바는 러시아 전체의 모습을 대변하기에는 너무나 지엽적이고 제한적이다. 러시아의 내륙 깊숙이 위치한 지역에서는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한 번 모스크바 밖에서, 그리고 외부세계와 접촉이 별로 없는 곳에서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 사회가 어떻게 변했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모스크바에 잠시 머문 후 동쪽으로 향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 불리는 우랄산맥을 넘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1400㎞ 떨어져 있는 인구 43만명의 한 중소도시였다. 완만한 구릉들이 달리고 있는 남부 우랄의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외롭게 섬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가 바로 러시아의 浦項, 마그니토고르스크이다. 러시아語로 「자석」을 의미하는 「마그니트」와 도시를 의미하는 「고로드」의 합성어인 마그니토고르스크市는 첼야빈스크州에 속해 있으며 인구 140만명의 州都 첼야빈스크 다음으로 州 내에서 큰 도시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가운데로는 우랄江이 北에서 南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6만명의 노동자를 거느린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가 江의 동쪽 거대한 부지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조국의 강철심장」이라는 도시 선전문구답게,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소련 붕괴 이전까지 소련 강철생산의 심장부였고, 소련 붕괴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하여 러시아 최대 철강 생산지 지위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철강 생산지로서의 경제적 중요성 외에도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도시는 1929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되어지면서, 당시 사회주의 건설의 모델 및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 상징으로 소련 국내외에 널리 선전되었던 것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우리나라의 포항보다 약 40년 먼저인 1929년에 제철소의 건설과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한 도시였다. 사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건설 이전에 이곳은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왜 이 허허벌판에 스탈린 정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제철소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곳에 있는 해발 614m의 마그니트카라 불리는 작은 산 때문인데, 이 산에는 풍부한 양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神話
전설에 의하면 13세기 초 러시아 남부지방을 정복, 거대한 킵차크 汗國을 건설한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 지역에 왔을 때 그의 궁수가 쏜 화살이 이 산의 강력한 자석 기운에 끌려와 박혔으며, 아타취라는 바슈키르人 戰士는 이 산에 올라간 후 산이 쇠로 된 그의 군화 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려오지 못하고 산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의 건설은 역시 세계 최대 규모의 드녜프르 水力발전소 건설, 발틱海와 白海를 연결하는 白海 운하 건설과 함께 1차 5개년 계획의 3大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다. 1929년에 착공, 1932년에 처음으로 철을 생산해내기 시작하였다.
제철소의 건설과정은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영웅적 노동과 사회주의 건설의 모범으로 신문, 책, 영화 등을 통해 소비에트 정부 및 공산당에 의해 널리 선전되었고, 이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건설은 소비에트 산업화 및 사회주의 건설의 신화로 남게 되었다.
특히 1930년대 초 자진하여 마그니토고르스크로 와서 제철소 건설에 노동자로 참여한 젊은 미국 대학생 존 스코트(John Scott)는 「우랄 뒤편에서(Behind the Urals)」라는 자서전적 기록을 통해서 당시 제철소 건설의 공정과정 및 노동자들의 생활 등을 자세히 기술해 서방세계에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알렸다.
이 제철소의 건설에는 서방기술이 많이 도입되었다. 특히 독일 기술자, 설계사들이 제철소는 물론 도시의 건설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 서방에서 온 노동자, 기술자들이 볼 때 사회주의 체제는 당시 대공황으로 그 한계가 드러난 서구자본주의 체제의 밝은 대안책이었다.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된 「大조국전쟁」(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이 치른 제2차 세계대전을 일컫는 소비에트 및 현재 러시아의 공식 용어)은 또 다른 마그니토고르스크 신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서부국경에서 깊숙이 떨어진 우랄산맥 너머에 위치한 이 제철소는 전쟁 기간 중 건재하여 무기용·장갑용 강철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얘기를 꺼내면 『전쟁 중 생산된 소비에트 탱크의 2분의 1, 그리고 포탄의 3분의 1이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생산된 철로 만들어졌다』는 자랑을 빼놓지 않는다.
1930년대에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병든 자본주의 체제와 대조되는 건강한 사회주의 체제의 상징이었고, 1940년대에는 나치즘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과 잠재력의 증거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그야말로 신화를 창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화의 도시 마그니토고르스크는 1980년대 말까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닫힌 도시」로 남게 되었다. 1937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大숙청 여파와 나치의 등장으로 인한 국내외 전쟁분위기의 고조는 외국인 노동자 및 기술자들을 본국으로 내몰았고,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시작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외부인에게는 우랄산맥 어딘가의 잊혀진 도시로 남게 되었다.
한국産 가죽 재킷 가격은 대학강사 봉급의 두 배
외부인의 출입이 다시 허락된 소비에트 시절 말기인 1988년경에 이 도시를 방문한 미국의 젊은 사학자 스테픈 코트킨(Stephen Kotkin)이 보여 준 도시의 모습은 50년 전 새로운 사회 건설의 상징이었던 마그니토고르스크의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일상용품의 부족, 주택 부족, 그리고 공해문제 등으로 고통받는 소련 내 여타 산업도시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그런 도시가 되어있었다.
이후 또 다시 10여 년이 지났다.
코트킨의 책을 읽고 나서 이 도시에 대해 막연히 암울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나는 마그니토고르스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생각을 바꿔야 했다. 내가 떠나온 모스크바 근교의 브이코보 공항은 물론, 국제선 전용의 모스크바의 쉐르메체보 공항과 비교해도 이곳 우랄 산맥 너머의 한 중소 도시의 공항은 나의 예상을 뒤엎고 무척 깨끗했고,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규모만 작았다 뿐이지 시설은 국제급 공항이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더 이상 「닫힌 도시」가 아니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이미 비행기에서 청사로 가는 공항 버스 내에서는 독일어, 영어로 떠드는 외국 사람들은 물론, 내가 한 달 반 후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 올 때는 공항 대합실에서 두 명의 한국인 비즈니스맨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1980년대 말에 이 곳을 방문했던 코트킨은 이곳 주민들이 자신이 가져 온 일본제 노트북 컴퓨터, 자동 초점 카메라 등을 처음 보고 무척 신기해 했다고 적고 있지만,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붕괴되고 시장 경제체제가 도입된 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 마그니토고르스크에는 외제 물품들이 가득했다. 길거리에는 BMW, 아우디 같은 값비싼 독일 자동차의 거대한 선전 광고와 대리점들이 있었으며, 상점에는 한국의 家電제품도 빠지지 않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한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 전자제품의 광고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기는 했지만 이곳 南우랄의 도시에서까지 한국의 LG 家電제품 광고 및 대리점을 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의 한 상점은 아예 간판을 「한국에서 온 가죽」이라 내걸고, 한국産 검은 가죽 재킷 등을 팔고 있었다. 검은 가죽 재킷의 경우 한 벌에 약 100달러 정도 하였는데, 이곳 대학 전임강사의 월급이 5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무척이나 비싼 가격이었다.
한 백화점의 비디오 가게에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점령을 하고 있었고, 거리의 키오스크 상점에서 만난 20代 중반의 노동자 친구 아르촘은 『내가 어렸을 땐 이런 것들이 없었다. 이런 것들이 어린이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냐』고 진열대를 채운 미국제 껌, 초콜릿, 캔디 등을 비아냥댔다. 시장을 찾아서라면 세계 끝 어느 오지라도 찾아가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속성을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의 위력은 이곳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허름한 아파트 단지 곳곳에 인터넷 카페와 컴퓨터 오락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나이의 동네 꼬마들이 하나 가득 스크린 앞에 앉아 컴퓨터 오락에 여념이 없었다. 대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웹서핑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인터넷 사용료는 시간당 1달러. 속도가 무척 느려 효율적인 웹서핑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나는 수천 km 떨어진 한국과 미국에 있는 친지들과 이메일은 계속 교환할 수 있었다. 이제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더 이상 「닫힌 도시」가 아니었다.
「노브이 루스키」와 보통사람들
석유가격의 인상으로 産油國인 러시아의 전반적 경기가 몇 년 전부터 좋아지기 시작한 것처럼 우랄산맥 너머의 이 제철도시의 경기도 무척 활기차 보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 국립대학교 사학과장 아브람존 교수는 지금 이 도시의 경기는 최근 몇 년 중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한다. 그는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경제를 좌우하는 제철소의 사업이 잘되고 있는 것이 그 주요 원인 중에 하나라 한다.
덧붙여 그는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모스크바보다 뭐든지 「단지」 3일밖에 늦지 않다』고 한다 (왜 하필 3일인지는 묻지 못했지만, 1930년대 이 도시가 처음 건설되었을 때 모스크바와 마그니토고르스크 간의 기차여행이 3일 소요되는 데서 유래된 것 같았다). 이제 물질생활에 관한 한, 모스크바와 지방 도시의 차이는 현격히 줄어든 것 같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10년,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첨예해진 貧富差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장소인 것 같았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러시아의 신흥부자들인 「노브이 루스키」(新러시아人)들은 모스크바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 우랄의 중소도시에도 있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의 극소수의 신흥부자들과 보통사람들 간의 빈부 차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 중의 하나는 교통수단이었다. 출퇴근 시간이면 BMW, 벤츠를 포함 각종 최신 모델의 외제 자가용들이 거리를 누비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20년은 된 듯한 낡은 만원버스
반면에 보통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은 요금이 약 15전 하는 대중버스이다. 최소 20년 이상은 된 것 같은 낡은 대중버스는 출퇴근 시간이면 시민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만원이 되고, 매연을 심하게 내뿜어 제철소에서 내뿜는 연기보다 자동차 매연이 더 도시공기 오염의 주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시내버스 안에 서서 번쩍이는 최신 모델의 독일제 차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이 도시의 貧富差가 얼마나 심한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발행되는 「파르트네르(파트너)」라는 잡지에 실린 자료에 의하면 市 주민의 약 63%는 평균임금 이하, 그 중 절반인 30%는 최저임금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그런 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것일까? 다름 아닌 제철소의 고위 간부들과 그 자제들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건축 중인 유럽스타일의 고급주택단지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단지는 제철소 고위 간부들 소유의 주택들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내부는 러시아 전통 사우나 시설을 포함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호화롭다고 한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영어 가정교사는 몇 년 전 어떤 제철소 간부 자제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 학생의 부모가 왕복 비행기 값을 포함 체재비 전액을 대주어 교사 자신과 자신의 학생이 미국을 몇 달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물론 모스크바에 사는 일반 서민들에게도 자비부담의 해외여행은 아직은 요원한 얘기인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이 우랄 너머의 도시에도 「노브이 루스키」들이 있다는 얘기이다. 제철소 간부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붕괴 이후 개인 사업을 통해 신흥부자가 된 사람들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개인 사업을 한다는 어떤 학생은 『책을 사러 모스크바에 가기도 한다』고 말해 나를 놀라게 하였다. 물론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모스크바까지의 기차 가격은 약 50~60달러로 대학 전임강사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보통사람들은 어떤가. 내가 만난 제철소 노동자들은 몇 년 전에는 근처 휴양지 아브자코보에 휴일 날 놀러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휘발유 값이 비싸 그곳에 놀러 갈 수 없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도시인구의 약 7분의 1, 즉 6만 명의 제철소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사실 다른 직장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다만 임금의 일정액은 현금이 아닌 식당이나 상점에서 식사를 하고 일상용품을 살 수 있는 일종의 배급카드 형태로 지불되므로 현금이 아주 풍족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제철소에서 12년째 일하고 있다는 노동자는 월급이 약 8000루블, 즉 266달러였고, 그 옆의 또 다른 노동자는 5년째 일하고 있는데 5000루블, 즉 166달러였다. 제철소 전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001년 1월 기준으로 약 6000루블 약 215달러인데 이 수치는 全國 평균 임금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중국人·일본人·한국人을 분명히 구별
마그니토고르스크가 공식적으로 「열린 도시」가 된 1980년대 후반과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 초반 이래 외국 비즈니스맨, 기술자들이 종종 이 도시를 방문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사람을 만나고 가기 때문에 도시의 보통사람들은 외국인을 대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길을 묻다가 만난 20代 중반의 젊은 노동자 아르촘은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서는 무척 신기해 하면서 『외국인과 얘기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자기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도 취소하고 즉석에서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겠다고 제의하였다. 나는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흔쾌히 수락하고 따라가 보았다.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 주변과는 반대로, 아파트 내부는 무척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아르촘의 부모는 모두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오고 있는 고참 기술자였으며, 아르촘 자신은 기술대학을 마치고 모스크바에서 軍 복무를 마친 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저녁으로 감자와 쇠고기를 넣고 만든 스튜와 빵을 대접하고 차와 캔디까지 내온다.
식사 후에는 잘 정돈된 자기 방에서 자신이 軍복무 할 때의 사진 등을 보여 주며,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기념엽서를 선물로 나에게 주었다.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는 데에 무척 놀랐다. 지방도시 사람들의 훈훈한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만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노동자들도 따뜻한 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제철소 노동자 기숙사 건물의 1층에 위치한 노동자 식당에서 주로 점심을 먹었던 나는 어느 날 점심식사 중인 두 명의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여타 노동자들처럼 영락없이 100㎖의 보드카를 반주로 점심을 먹고 있던 그들은 내가 다가가 말을 몇 마디 걸자 나를 자세히 보더니, 한국에서 왔냐며 단번에 알아맞힌다.
어떻게 알았냐고 깜짝 놀라 물으니 중국·한국·일본인 정도는 구분한다고 했다. 동양인을 잘 구분 못하는 미국인들에 비하면 놀라운 실력이다. 이들은 나에게도 보드카를 따라 주면서 마시라 한다. 내가 사양하고, 보드카보다는 러시아 전통 과일 음료인 캄폿이 더 건강에 좋다고 하니, 그들은 어이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보드카가 훨씬 건강에 좋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은 매점 카운터에 가서 나를 위해 1달러 하는 사과 주스를 사와서 내 컵에 가득 따라 준다. 1달러이면 이곳에선 따뜻한 수프를 포함한 한 끼 정식 식사. 그다지 적은 돈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낯선 땅에서 온 외국인에게 베푼 그들의 친절함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학생들도 외국인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다. 내가 묵었던 마그니토고르스크 국립대학교(마그니토고르스크 기술대학교, 음악대학교와 함께 이 도시의 3개 대학교 중 하나) 기숙사 방에는 내가 미국에서 온 것이 소문이 나자, 호기심 많은 몇몇 학생들은 밤늦은 시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을 두드리며, 인사를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곳의 학생들은 많은 수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밤에 공장 등에서 경비로 일하는 경우도 많고, 여학생들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 등의 일도 한다고 한다.
국가 안의 「국가」-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표어의 변화만큼이나 소련 사회주의 정책의 성격과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 정책의 성격 변화를 잘 나타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 시절의 제철소 표어가 「첼로벡 들랴 메탈라」, 즉 「강철을 위한 인간」이었던 데에 반해, 소련 붕괴 1년 후인 1992년 제철소의 선전 팸플릿의 글귀는 「메탈 들랴 첼로벡카」, 즉 「인간을 위한 강철」로 바뀌어 있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철강 생산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순위를 지녔다. 노동자의 복지나 환경문제는 차후의 문제였다. 사실 소비에트 시절의 노동정책은 강철생산을 위해 노동자의 영웅적 노동을 부추기고, 희생을 강조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미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부터 노동자의 복지문제에 대한 무수한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하였고,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소련 붕괴 이후 제철소의 정책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노동자들의 건강을 담보로 한 철강 생산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철소는 노동자들의 복지, 노동조건, 안전문제 개선에 더 많은 배려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제철소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도시민을 위한 복지, 건강, 문화 생활의 증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가 꾸준히 추진되어 현재는 제철소 자체가 70%의 주식을 그리고 국가가 23%, 그밖에 소 투자가들이 7%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주식회사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은 하나의 거대기업을 넘어서 이 도시에서는 하나의 작은 국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는 제철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곳곳에 새로 만들어진 롤러블레이드 광장, 농구장 등에는 제철소 마크가 선명하다.
뿐만 아니라,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은 이 도시 도로 건설비용의 15%에 해당하는 돈을 市에 기부하고 있으며, 마그니토고르스크 공항은 물론, 도시를 가로지르는 우랄江 서편에 새로 지어지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도 제철소의 기부금에 의해 지어지고 있다. 또한 이 도시의 주요 대로 중 하나인 칼 마르크스街에는 제철소의 자선 상점이 있는데, 이 상점에서는 제철소 근무 가족 중, 불구자나 환자 등이 식료품 등을 다른 상점에 비해 좀더 싼값에 살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는 이 도시에서 주민의 모든 복지, 보건을 책임지는 하나의 국가 역할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 도시의 주민들에 의하면 市정부도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면 막강한 재정력을 갖고 있는 제철소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제철소장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이 도시에서 제철소장의 영향력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마그니토고르스크에 머물고 있을 때 제철소 소장 빅토르 라쉬니코프가 신병치료차 스위스에 갔다가,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도시에 쫙 퍼졌다. 그날 저녁 나이트 클럽을 가려 했던 한 학생은 그곳에 전화를 걸어 보니, 소장의 사망을 추모하는 뜻에서 그날 나이트 클럽은 열지 않는다고 나에게 전했다. 그 다음날 現 소장의 사망소식이 유언비어인 것으로 밝혀지자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철소의 진분홍색 연기-환경오염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공해 및 환경오염 문제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제철소 소장, 이반 로마잔이 언급했듯이 제철소의 건설 이후 1980년대 초까지는 제철소의 수많은 굴뚝에서 뿜어내는 시커먼 연기는 오히려 소련 산업 발전의 상징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면서, 공해의 심각성과 연관된 질병은 서서히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1990년에 발행된 소련의 한 잡지에는 마그니토고르스크가 소련 내에서 가장 오염된 다섯 개 지역 중의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내가 방문했던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박물관의 안내원은 현재 제철소의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물론, 공해문제』라고 대답한다.
특히 공장이 위치하고 있는 우랄江의 좌안, 즉 도시 동쪽지구의 대기 오염상태는 심각했다. 이 곳에서는 공장의 매연에 그냥 속수 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市정부는 이 지역에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는지, 건물들의 페인트들은 벗겨진 채로 있었고, 강 건너 서편에 비하면 길거리도 지저분하였다.
이 동편은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출발지로서 이곳에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최초의 극장이 이곳에 있고, 최초의 레닌 흉상이 있으며, 최초의 학교, 최초의 「사회주의 거리」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이제 이 동쪽지구, 특히 공장에 인접한 지역은 직접적인 공해 피해를 받는 곳으로 주로 빈곤층이 살고 있었다. 강 건너 서편에서 이곳으로 전차를 타고 오면 매캐한 냄새를 금방 느낄 수 있다. 특히 공장의 정문이 있는 콤소몰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낮게 불어오는 분홍색 연기와 매캐한 냄새로 괴로웠다. 하지만 제철소 소장이 토요일에도 출근해 업무를 본다는 1930년대에 지어진 본사 건물은 굴뚝의 연기가 24시간 내뿜는 정문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단지, 이 건물은 1930년대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외관에 유리를 둘러 외부의 오염된 공기를 완전 차단할 수 있게 보수된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그리고 공장 정문 앞에는 脫스탈린주의 운동이 한창이었던 흐루시초프 정권시기인 1961년에 기존의 스탈린 동상을 대체해 세워진 레닌 동상이 40년 동안 공장의 매연을 들이마시며 서 있었다.
이런 극심한 공해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의외로 공해에 대한 경각심이 그다지 높지 않아 놀랐다. 오히려 공해문제에 대해 무척 관대하였다. 모두 익숙해져서인가, 아니면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인가? 26년째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마그니토고르스크 메탈」 신문의 副편집장 밀눌예바는 『지구는 좁다. 온 지구가 공해문제를 몸살을 앓고 있고 공해문제는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철강도시 피츠버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녀의 가족이 모두 제철소에서 일했다고 말해, 지금 모두 건강하냐고 내가 물으니, 자신의 아버지는 7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제철소도 환경문제에 점차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1999년 한 해에만 공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에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한다.
되살아나는 러시아 정교회
21세기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새로운 상징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랄江의 우안에 건설 중인 웅장한 정교회 건물이었다. 1980년대 중반 및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內에서의 한 가지 특징적인 변화라면 러시아 정교회가 활발히 부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대 말에 플로르라는 한 신부에 의해 주도된 교회건설 계획은 당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소장 로마잔의 자금지원 약속을 얻어내,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기 직전인 1991년 11월10일, 교회 건물의 헌당식을 가졌다. 이후 제철소장이 바뀌면서 제철소의 지원이 중단되었다가 1998년 아니쿠쉰 시장이 공사 재개를 결정했다.
현재 공정의 80~90%는 끝난 듯,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교회 꼭대기의 거대한 황금빛 돔들과 십자가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교회의 높이는 52m나 되고 약 12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실내공간을 갖추고 있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최초의 교회는 놀랍게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건설되었는데 그 교회 건설은 당시 공산당원이자 제철소 소장인 노소프의 非공식적인 물적 지원下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1961년 흐루시초프 정부의 反종교 선동과 이데올로기 교육강화 분위기 속에서 문을 닫았다가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문을 열었고, 현재는 일요학교까지 운영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젊은 층에서도 종교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늘고 있지만 오랫동안의 사회주의 교육의 유산인지, 교회나 司祭(사제)들에 대한 불신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난 노동자 아르촘의 방에서, 책상 위 성경을 보고,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으니, 『교회는 신도들의 돈을 모으는 데만 관심 갖는 곳』이라 하며 안 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성경책에는 밑줄이 여기저기 그어져 있고 열심히 읽은 흔적이 보였다. 이들의 교회에 대한 불신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종교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면서 생긴 신념의 공백을 아주 서서히 종교가 메우고 있는 것을 이곳 우랄의 도시에서 느낄 수 있었다.
현재 건설 중인 거대한 정교회 사원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1㎞ 정도 올라가면 이슬람사원의 공사현장이 나타난다. 마그니토고르스크에는 사원을 지을 만큼의 충분한 이슬람교도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자동차로 서쪽으로 1시간 가면 이슬람교 인구가 많이 살고 있는 바슈키르 자치 공화국이 나오며 남동쪽으로 두세 시간 가면 또 다른 이슬람 국가 카자흐스탄이 나온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이슬람사원은 공사가 오랫동안 중단된 것처럼 보여 러시아 노동자 아르촘과 그의 친구 지마에게 물어보니 『우리는 크레인으로 교회를 짓는데, 그네들은 자금 부족으로 말 그대로 손으로 사원을 짓고 있다. 손으로 벽돌을 나르고 쌓아올린다』고 했다.
市 정부에서 러시아 정교회 건설은 지원을 하지만 이슬람교 사원 건립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지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건설의 상징이었던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이제 더 이상 1930년대의 급진적 무신론자들의 도시가 아니었다.
脫아시아 노선
『러시아人을 긁어봐라, 그러면 타타르가 나올 것이다』
1812년에 러시아를 침공해서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다가 퇴각한 나폴레옹이 1816년 그의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한 말이다. 나폴레옹에게는 러시아人이 완전한 유럽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나폴레옹과 같은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러시아人들 자신들도 아시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1248년 러시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키에프 루시를 함락시키고 이후 240년 간 러시아 땅을 통치한 타타르(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유럽 원정시 동원한 병사들 중에 절대 다수를 차지한 민족의 이름)에 의한 아시아적인 전제주의 정치문화의 이식은 이후 최근까지 러시아人들을 괴롭혀온 후진성의 흔적이 되었다. 덕분에 러시아에서는 「아시아적」이라 하면 「후진적」이라는 것과 동일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18세기 초 피터 大帝부터 시작한 「유럽 따라잡기」 노력은 19세기에 서구를 모델로 러시아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서구주의자 지식인들, 그리고 20세기 초 러시아를 半아시아적인 후진성이 지배하는 나라로 본 레닌을 거쳐 스탈린에까지 이른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건설은 스탈린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아시아」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스탈린이 1931년에 우랄지역의 산업발전 잠재성을 강조하면서 행한 한 연설에는 러시아의 「후진성」 극복의 발버둥이 잘 나타나 있다.
『템포를 늦춘다는 것은 뒤처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처진 자는 얻어맞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맞기를 원하지 않는다.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를 보라. 몽골 汗에게 얻어맞고, 터키 귀족들에게 얻어맞고, 스웨덴 봉건군주에게 맞았다. 그 다음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얻어맞았다. 영국, 프랑스 자본주의자들에게 또 맞았다. 그리고 일본에게 얻어맞지 않았는가. 우리는 군대의 후진성, 문화적 후진성, 정부의 후진성, 그리고 산업의 후진성, 농업의 후진성 때문에 얻어맞았다….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후진적일 수 없는 이유이다』
이 대목은 소비에트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가, 마그니토고르스크 건설에서의 청년 공산당원(콤소몰)들의 영웅적 노동을 소재로 1930년대 초에 쓴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 「시간, 앞으로!」 첫 부분에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인 콤소몰원들은 모스크바에서 마그니토고르스크로 가는 긴 열차여행 중, 「우파」라는 우랄산맥에 위치한 도시를 지나면서 근처에 있는 「유럽-아시아」라는 경계 팻말을 보고 『우리는 절대, 절대, 절대로 다시는 아시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몇 년 후, 그들은 「혁명」을 몰고 마그니토고르스크로 왔으며, 세계 최대 제철소 건설을 통해 아시아였던 우랄을 바꾸어 놓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시 우랄을 넘어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내가 미국에서 몇 년 전 만났던 젊은 러시아 학생들은 러시아가 유럽이라는 것을 무척 강조하였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한 러시아 남학생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니 『우파에서 왔다』고 하며 한마디 덧붙이는 말이 있다.
『우파는 아직 유럽』
우랄산맥을 넘기 바로 직전에 있는 우파는 유럽쪽 러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 것 같았다. 우파가 유럽인지 아시아인지 누가 묻기나 했나? 그리고 아시아人인 내 앞에서 굳이 우파가 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어야 하는지… 우랄 산맥 등성이에 있는 도시에서 온 청년이 이 정도면 西유럽과 더욱 가까이 접해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사람들은 어떠할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우랄산맥 너머의 마그니토고르스크 사람들에게 아시아 또는 아시아적인 것은 후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시아는 저 멀리 떨어진 이질적인 것도 아니었다. 아시아는 그들에게 생활 속의 한 부분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었다.
『러시아는 유럽과도 아시아와도 다른 그 무엇』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지리적 경계인 우랄산맥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아시아 쪽 러시아이다. 하지만 이곳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오니 아직도 유럽은 끝나지 않았다. 이 도시內에서 또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고 있었다. 市를 東西로 나누면서 가로지르는 우랄江의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로 간주한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교각 초입에 아시아를 의미하는 러시아語 「아지아」의 첫 자 「A」와 유럽을 의미하는 러시아語 유로파의 첫 자 「E」가 새겨진 현판을 달아놓았다. 그리고 좀더 가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나타내는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결국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제철소와 低소득층 아파트는 아시아 쪽에 있는 것이고, 왼쪽의 행정, 교육, 및 新시가지와 주거지는 유럽에 있는 셈이 된다. 우랄江을 가로지르는 네 개의 다리를 통해 많은 주민들은 매일 유럽과 아시아를 오간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마그니토고르스크 주민들은 마그니토고르스크를 유럽 또는 아시아로 구분하기보다는 두 부분이 공존하며 섞여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민들도 러시아人이 主流를 이루지만 그래도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89년의 통계에 의하면 이 도시의 주민은 92개의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러시아人이 81.5%, 타타르人 6.4%, 우크라이나人 4.3%, 바슈키르人 2.8%, 백러시아人 1% 등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러시아 저널」이라는 주간지가 올해 초 마그니토고르스크 주민을 대상으로 『당신은 유럽인과 아시아인 중 어느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54세인 엔지니어인 아나톨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우랄江을 건너, 유럽, 아시아를 오가는데, 과연 강의 서쪽에 산다고 유럽人이고, 동쪽에 산다고 아시아人이라 할 수 있는가? 유럽人인가 아시아人인가는 이 도시에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26세의 교사인 베로니카는 한편으로 러시아는 유럽과 더 가깝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러시아는 유럽과도 틀리고, 아시아와도 틀린 그 다른 무엇이다』고 말한다.
내가 만난 「마그니토고르스크 메탈」 신문의 副편집장 밀눌예바의 견해도 비슷했다. 그녀는 러시아의 특성은 『순수히 유럽 또는 아시아적이라기보다는 두 요소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랄지역으로 오래 전에 아시안人들이 이동해 왔는데, 바투가 13세기 초에 러시아를 침입했을 때 타타르人들도 왔고, 마자르人(헝가리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민족)들도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자신의 선조 중에도 마자르系가 섞여 있다고 한다.
유럽·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이 때문에 숙명적으로 아시아系 문화와의 접촉이 빈번해서인지, 내가 만난 마그니토고르스크 사람들 중에 단호하게 『러시아는 유럽이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유라시아적 특성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제철소 박물관을 견학갔을 때 박물관 안내자는 나에게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는 현재 매출액 면에서 세계 제17위라고 했다. 나는 왜 한때 세계 최대의 제철소가 17위로 밀려났는지 묻고 싶었다. 1950년대의 제철 기술 혁신과 그 기술을 미국을 비롯한 유럽국가에 수출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안내자에게, 나는 서방 언론에서 보고 들은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의 低생산성과 낙후된 설비의 非효율성 등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 안내자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냐며 얼굴을 찡그리면서, 소련 붕괴 이후부터 이런저런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 소련 시절에는 계속 좋은 상태를 유지했다고 강조한다.
한 번은 아르촘에게 한국에도 이렇게 큰 제철소가 있는데, 들어보았냐고 물으니, 들어본 적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제철소의 非효율성 등에 대해 물어 보니 갑자기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사실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만난 그 누구도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한국의 포항제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제철소를 가진 도시, 현재도 러시아 제1의 제철 도시의 주민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를 해 본 적도 없는지 궁금했다. 분명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독일人에 감정 없다
하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제철소와 관련된 소비에트 시절 신화는 거의 자리잡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에게 마그니토고르스크는 규모·인구 등에서 볼 때, 첼야빈스크州 제2의 도시로서 양질의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외국 기업과 교류가 많은 제철소에서 통역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또한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평범한 노동자로도 일할 수 있는 「기회」의 도시였다. 그들에게 마그니토고르스크와 이데올로기는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의 역사의식도 무척 실용적이었다. 독일어를 전공하는 여학생과 작년 겨울 이곳에서 열린 국제 스키대회에서 독일 대표들의 통역 경험담을 얘기하는 중, 내가 독일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독일인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時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수많은 소비에트 인민이 죽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 당시는 『히틀러가 시켜서 할 수 없이 했을 뿐』이라고 했다.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2700만여 명의 소비에트 인민들이 희생당했으며, 또한 나치 독일군을 무찌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소비에트 탱크의 절반이 이 도시에서 생산된 철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런 질문을 던졌던 나는 그들의 단순한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할아버지 세대들이 이 말을 들으면 과연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회주의 건설 모델로서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時 철강생산 중심지로서의 마그니토고르스크 신화는 포스트 소비에트 세대들 사이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다. 과연 이들 신세대들이 주역이 될 10~20년 후의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아니 러시아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며 우랄을 떠나왔다. ●
소련이 붕괴된 지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다. 러시아는 그 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하면 모스크바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보면 모스크바는 11개의 시간대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러시아 영토의 북서쪽 한쪽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점이나 다름없다. 우랄산맥 동편에 위치한 마그니토고르스크라는 도시에서 내가 만났던 한 사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모스크바는 러시아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거대한 러시아 땅덩어리를 생각하면 모스크바는 러시아 전체의 모습을 대변하기에는 너무나 지엽적이고 제한적이다. 러시아의 내륙 깊숙이 위치한 지역에서는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한 번 모스크바 밖에서, 그리고 외부세계와 접촉이 별로 없는 곳에서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 사회가 어떻게 변했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모스크바에 잠시 머문 후 동쪽으로 향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 불리는 우랄산맥을 넘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1400㎞ 떨어져 있는 인구 43만명의 한 중소도시였다. 완만한 구릉들이 달리고 있는 남부 우랄의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외롭게 섬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가 바로 러시아의 浦項, 마그니토고르스크이다. 러시아語로 「자석」을 의미하는 「마그니트」와 도시를 의미하는 「고로드」의 합성어인 마그니토고르스크市는 첼야빈스크州에 속해 있으며 인구 140만명의 州都 첼야빈스크 다음으로 州 내에서 큰 도시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가운데로는 우랄江이 北에서 南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6만명의 노동자를 거느린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가 江의 동쪽 거대한 부지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조국의 강철심장」이라는 도시 선전문구답게,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소련 붕괴 이전까지 소련 강철생산의 심장부였고, 소련 붕괴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하여 러시아 최대 철강 생산지 지위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철강 생산지로서의 경제적 중요성 외에도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도시는 1929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되어지면서, 당시 사회주의 건설의 모델 및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 상징으로 소련 국내외에 널리 선전되었던 것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우리나라의 포항보다 약 40년 먼저인 1929년에 제철소의 건설과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한 도시였다. 사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건설 이전에 이곳은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왜 이 허허벌판에 스탈린 정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제철소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곳에 있는 해발 614m의 마그니트카라 불리는 작은 산 때문인데, 이 산에는 풍부한 양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神話
전설에 의하면 13세기 초 러시아 남부지방을 정복, 거대한 킵차크 汗國을 건설한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 지역에 왔을 때 그의 궁수가 쏜 화살이 이 산의 강력한 자석 기운에 끌려와 박혔으며, 아타취라는 바슈키르人 戰士는 이 산에 올라간 후 산이 쇠로 된 그의 군화 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려오지 못하고 산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의 건설은 역시 세계 최대 규모의 드녜프르 水力발전소 건설, 발틱海와 白海를 연결하는 白海 운하 건설과 함께 1차 5개년 계획의 3大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다. 1929년에 착공, 1932년에 처음으로 철을 생산해내기 시작하였다.
제철소의 건설과정은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영웅적 노동과 사회주의 건설의 모범으로 신문, 책, 영화 등을 통해 소비에트 정부 및 공산당에 의해 널리 선전되었고, 이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건설은 소비에트 산업화 및 사회주의 건설의 신화로 남게 되었다.
특히 1930년대 초 자진하여 마그니토고르스크로 와서 제철소 건설에 노동자로 참여한 젊은 미국 대학생 존 스코트(John Scott)는 「우랄 뒤편에서(Behind the Urals)」라는 자서전적 기록을 통해서 당시 제철소 건설의 공정과정 및 노동자들의 생활 등을 자세히 기술해 서방세계에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알렸다.
이 제철소의 건설에는 서방기술이 많이 도입되었다. 특히 독일 기술자, 설계사들이 제철소는 물론 도시의 건설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 서방에서 온 노동자, 기술자들이 볼 때 사회주의 체제는 당시 대공황으로 그 한계가 드러난 서구자본주의 체제의 밝은 대안책이었다.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된 「大조국전쟁」(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이 치른 제2차 세계대전을 일컫는 소비에트 및 현재 러시아의 공식 용어)은 또 다른 마그니토고르스크 신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서부국경에서 깊숙이 떨어진 우랄산맥 너머에 위치한 이 제철소는 전쟁 기간 중 건재하여 무기용·장갑용 강철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얘기를 꺼내면 『전쟁 중 생산된 소비에트 탱크의 2분의 1, 그리고 포탄의 3분의 1이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생산된 철로 만들어졌다』는 자랑을 빼놓지 않는다.
1930년대에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병든 자본주의 체제와 대조되는 건강한 사회주의 체제의 상징이었고, 1940년대에는 나치즘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회주의 체제의 효율성과 잠재력의 증거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그야말로 신화를 창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화의 도시 마그니토고르스크는 1980년대 말까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닫힌 도시」로 남게 되었다. 1937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大숙청 여파와 나치의 등장으로 인한 국내외 전쟁분위기의 고조는 외국인 노동자 및 기술자들을 본국으로 내몰았고,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시작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외부인에게는 우랄산맥 어딘가의 잊혀진 도시로 남게 되었다.
한국産 가죽 재킷 가격은 대학강사 봉급의 두 배
외부인의 출입이 다시 허락된 소비에트 시절 말기인 1988년경에 이 도시를 방문한 미국의 젊은 사학자 스테픈 코트킨(Stephen Kotkin)이 보여 준 도시의 모습은 50년 전 새로운 사회 건설의 상징이었던 마그니토고르스크의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일상용품의 부족, 주택 부족, 그리고 공해문제 등으로 고통받는 소련 내 여타 산업도시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그런 도시가 되어있었다.
이후 또 다시 10여 년이 지났다.
코트킨의 책을 읽고 나서 이 도시에 대해 막연히 암울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나는 마그니토고르스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생각을 바꿔야 했다. 내가 떠나온 모스크바 근교의 브이코보 공항은 물론, 국제선 전용의 모스크바의 쉐르메체보 공항과 비교해도 이곳 우랄 산맥 너머의 한 중소 도시의 공항은 나의 예상을 뒤엎고 무척 깨끗했고,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규모만 작았다 뿐이지 시설은 국제급 공항이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더 이상 「닫힌 도시」가 아니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이미 비행기에서 청사로 가는 공항 버스 내에서는 독일어, 영어로 떠드는 외국 사람들은 물론, 내가 한 달 반 후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 올 때는 공항 대합실에서 두 명의 한국인 비즈니스맨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1980년대 말에 이 곳을 방문했던 코트킨은 이곳 주민들이 자신이 가져 온 일본제 노트북 컴퓨터, 자동 초점 카메라 등을 처음 보고 무척 신기해 했다고 적고 있지만,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붕괴되고 시장 경제체제가 도입된 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 마그니토고르스크에는 외제 물품들이 가득했다. 길거리에는 BMW, 아우디 같은 값비싼 독일 자동차의 거대한 선전 광고와 대리점들이 있었으며, 상점에는 한국의 家電제품도 빠지지 않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한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 전자제품의 광고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기는 했지만 이곳 南우랄의 도시에서까지 한국의 LG 家電제품 광고 및 대리점을 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시장의 한 상점은 아예 간판을 「한국에서 온 가죽」이라 내걸고, 한국産 검은 가죽 재킷 등을 팔고 있었다. 검은 가죽 재킷의 경우 한 벌에 약 100달러 정도 하였는데, 이곳 대학 전임강사의 월급이 5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무척이나 비싼 가격이었다.
한 백화점의 비디오 가게에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점령을 하고 있었고, 거리의 키오스크 상점에서 만난 20代 중반의 노동자 친구 아르촘은 『내가 어렸을 땐 이런 것들이 없었다. 이런 것들이 어린이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냐』고 진열대를 채운 미국제 껌, 초콜릿, 캔디 등을 비아냥댔다. 시장을 찾아서라면 세계 끝 어느 오지라도 찾아가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속성을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의 위력은 이곳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허름한 아파트 단지 곳곳에 인터넷 카페와 컴퓨터 오락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나이의 동네 꼬마들이 하나 가득 스크린 앞에 앉아 컴퓨터 오락에 여념이 없었다. 대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웹서핑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인터넷 사용료는 시간당 1달러. 속도가 무척 느려 효율적인 웹서핑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나는 수천 km 떨어진 한국과 미국에 있는 친지들과 이메일은 계속 교환할 수 있었다. 이제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더 이상 「닫힌 도시」가 아니었다.
「노브이 루스키」와 보통사람들
석유가격의 인상으로 産油國인 러시아의 전반적 경기가 몇 년 전부터 좋아지기 시작한 것처럼 우랄산맥 너머의 이 제철도시의 경기도 무척 활기차 보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 국립대학교 사학과장 아브람존 교수는 지금 이 도시의 경기는 최근 몇 년 중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한다. 그는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경제를 좌우하는 제철소의 사업이 잘되고 있는 것이 그 주요 원인 중에 하나라 한다.
덧붙여 그는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모스크바보다 뭐든지 「단지」 3일밖에 늦지 않다』고 한다 (왜 하필 3일인지는 묻지 못했지만, 1930년대 이 도시가 처음 건설되었을 때 모스크바와 마그니토고르스크 간의 기차여행이 3일 소요되는 데서 유래된 것 같았다). 이제 물질생활에 관한 한, 모스크바와 지방 도시의 차이는 현격히 줄어든 것 같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10년,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첨예해진 貧富差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장소인 것 같았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러시아의 신흥부자들인 「노브이 루스키」(新러시아人)들은 모스크바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 우랄의 중소도시에도 있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의 극소수의 신흥부자들과 보통사람들 간의 빈부 차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 중의 하나는 교통수단이었다. 출퇴근 시간이면 BMW, 벤츠를 포함 각종 최신 모델의 외제 자가용들이 거리를 누비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20년은 된 듯한 낡은 만원버스
반면에 보통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은 요금이 약 15전 하는 대중버스이다. 최소 20년 이상은 된 것 같은 낡은 대중버스는 출퇴근 시간이면 시민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만원이 되고, 매연을 심하게 내뿜어 제철소에서 내뿜는 연기보다 자동차 매연이 더 도시공기 오염의 주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시내버스 안에 서서 번쩍이는 최신 모델의 독일제 차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이 도시의 貧富差가 얼마나 심한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발행되는 「파르트네르(파트너)」라는 잡지에 실린 자료에 의하면 市 주민의 약 63%는 평균임금 이하, 그 중 절반인 30%는 최저임금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그런 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것일까? 다름 아닌 제철소의 고위 간부들과 그 자제들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건축 중인 유럽스타일의 고급주택단지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단지는 제철소 고위 간부들 소유의 주택들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내부는 러시아 전통 사우나 시설을 포함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호화롭다고 한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영어 가정교사는 몇 년 전 어떤 제철소 간부 자제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 학생의 부모가 왕복 비행기 값을 포함 체재비 전액을 대주어 교사 자신과 자신의 학생이 미국을 몇 달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물론 모스크바에 사는 일반 서민들에게도 자비부담의 해외여행은 아직은 요원한 얘기인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이 우랄 너머의 도시에도 「노브이 루스키」들이 있다는 얘기이다. 제철소 간부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붕괴 이후 개인 사업을 통해 신흥부자가 된 사람들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개인 사업을 한다는 어떤 학생은 『책을 사러 모스크바에 가기도 한다』고 말해 나를 놀라게 하였다. 물론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모스크바까지의 기차 가격은 약 50~60달러로 대학 전임강사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보통사람들은 어떤가. 내가 만난 제철소 노동자들은 몇 년 전에는 근처 휴양지 아브자코보에 휴일 날 놀러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휘발유 값이 비싸 그곳에 놀러 갈 수 없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도시인구의 약 7분의 1, 즉 6만 명의 제철소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사실 다른 직장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다만 임금의 일정액은 현금이 아닌 식당이나 상점에서 식사를 하고 일상용품을 살 수 있는 일종의 배급카드 형태로 지불되므로 현금이 아주 풍족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제철소에서 12년째 일하고 있다는 노동자는 월급이 약 8000루블, 즉 266달러였고, 그 옆의 또 다른 노동자는 5년째 일하고 있는데 5000루블, 즉 166달러였다. 제철소 전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001년 1월 기준으로 약 6000루블 약 215달러인데 이 수치는 全國 평균 임금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중국人·일본人·한국人을 분명히 구별
마그니토고르스크가 공식적으로 「열린 도시」가 된 1980년대 후반과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 초반 이래 외국 비즈니스맨, 기술자들이 종종 이 도시를 방문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사람을 만나고 가기 때문에 도시의 보통사람들은 외국인을 대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길을 묻다가 만난 20代 중반의 젊은 노동자 아르촘은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서는 무척 신기해 하면서 『외국인과 얘기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자기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도 취소하고 즉석에서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하겠다고 제의하였다. 나는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흔쾌히 수락하고 따라가 보았다.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 주변과는 반대로, 아파트 내부는 무척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아르촘의 부모는 모두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오고 있는 고참 기술자였으며, 아르촘 자신은 기술대학을 마치고 모스크바에서 軍 복무를 마친 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저녁으로 감자와 쇠고기를 넣고 만든 스튜와 빵을 대접하고 차와 캔디까지 내온다.
식사 후에는 잘 정돈된 자기 방에서 자신이 軍복무 할 때의 사진 등을 보여 주며,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기념엽서를 선물로 나에게 주었다.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는 데에 무척 놀랐다. 지방도시 사람들의 훈훈한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만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노동자들도 따뜻한 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제철소 노동자 기숙사 건물의 1층에 위치한 노동자 식당에서 주로 점심을 먹었던 나는 어느 날 점심식사 중인 두 명의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여타 노동자들처럼 영락없이 100㎖의 보드카를 반주로 점심을 먹고 있던 그들은 내가 다가가 말을 몇 마디 걸자 나를 자세히 보더니, 한국에서 왔냐며 단번에 알아맞힌다.
어떻게 알았냐고 깜짝 놀라 물으니 중국·한국·일본인 정도는 구분한다고 했다. 동양인을 잘 구분 못하는 미국인들에 비하면 놀라운 실력이다. 이들은 나에게도 보드카를 따라 주면서 마시라 한다. 내가 사양하고, 보드카보다는 러시아 전통 과일 음료인 캄폿이 더 건강에 좋다고 하니, 그들은 어이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보드카가 훨씬 건강에 좋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은 매점 카운터에 가서 나를 위해 1달러 하는 사과 주스를 사와서 내 컵에 가득 따라 준다. 1달러이면 이곳에선 따뜻한 수프를 포함한 한 끼 정식 식사. 그다지 적은 돈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낯선 땅에서 온 외국인에게 베푼 그들의 친절함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학생들도 외국인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다. 내가 묵었던 마그니토고르스크 국립대학교(마그니토고르스크 기술대학교, 음악대학교와 함께 이 도시의 3개 대학교 중 하나) 기숙사 방에는 내가 미국에서 온 것이 소문이 나자, 호기심 많은 몇몇 학생들은 밤늦은 시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을 두드리며, 인사를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곳의 학생들은 많은 수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밤에 공장 등에서 경비로 일하는 경우도 많고, 여학생들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 등의 일도 한다고 한다.
국가 안의 「국가」-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표어의 변화만큼이나 소련 사회주의 정책의 성격과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 정책의 성격 변화를 잘 나타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 시절의 제철소 표어가 「첼로벡 들랴 메탈라」, 즉 「강철을 위한 인간」이었던 데에 반해, 소련 붕괴 1년 후인 1992년 제철소의 선전 팸플릿의 글귀는 「메탈 들랴 첼로벡카」, 즉 「인간을 위한 강철」로 바뀌어 있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철강 생산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순위를 지녔다. 노동자의 복지나 환경문제는 차후의 문제였다. 사실 소비에트 시절의 노동정책은 강철생산을 위해 노동자의 영웅적 노동을 부추기고, 희생을 강조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미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부터 노동자의 복지문제에 대한 무수한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하였고,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소련 붕괴 이후 제철소의 정책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노동자들의 건강을 담보로 한 철강 생산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제철소는 노동자들의 복지, 노동조건, 안전문제 개선에 더 많은 배려를 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제철소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도시민을 위한 복지, 건강, 문화 생활의 증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가 꾸준히 추진되어 현재는 제철소 자체가 70%의 주식을 그리고 국가가 23%, 그밖에 소 투자가들이 7%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주식회사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은 하나의 거대기업을 넘어서 이 도시에서는 하나의 작은 국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는 제철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곳곳에 새로 만들어진 롤러블레이드 광장, 농구장 등에는 제철소 마크가 선명하다.
뿐만 아니라,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은 이 도시 도로 건설비용의 15%에 해당하는 돈을 市에 기부하고 있으며, 마그니토고르스크 공항은 물론, 도시를 가로지르는 우랄江 서편에 새로 지어지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도 제철소의 기부금에 의해 지어지고 있다. 또한 이 도시의 주요 대로 중 하나인 칼 마르크스街에는 제철소의 자선 상점이 있는데, 이 상점에서는 제철소 근무 가족 중, 불구자나 환자 등이 식료품 등을 다른 상점에 비해 좀더 싼값에 살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는 이 도시에서 주민의 모든 복지, 보건을 책임지는 하나의 국가 역할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 도시의 주민들에 의하면 市정부도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면 막강한 재정력을 갖고 있는 제철소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제철소장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이 도시에서 제철소장의 영향력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마그니토고르스크에 머물고 있을 때 제철소 소장 빅토르 라쉬니코프가 신병치료차 스위스에 갔다가,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도시에 쫙 퍼졌다. 그날 저녁 나이트 클럽을 가려 했던 한 학생은 그곳에 전화를 걸어 보니, 소장의 사망을 추모하는 뜻에서 그날 나이트 클럽은 열지 않는다고 나에게 전했다. 그 다음날 現 소장의 사망소식이 유언비어인 것으로 밝혀지자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철소의 진분홍색 연기-환경오염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공해 및 환경오염 문제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제철소 소장, 이반 로마잔이 언급했듯이 제철소의 건설 이후 1980년대 초까지는 제철소의 수많은 굴뚝에서 뿜어내는 시커먼 연기는 오히려 소련 산업 발전의 상징이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면서, 공해의 심각성과 연관된 질병은 서서히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1990년에 발행된 소련의 한 잡지에는 마그니토고르스크가 소련 내에서 가장 오염된 다섯 개 지역 중의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내가 방문했던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박물관의 안내원은 현재 제철소의 문제들 중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물론, 공해문제』라고 대답한다.
특히 공장이 위치하고 있는 우랄江의 좌안, 즉 도시 동쪽지구의 대기 오염상태는 심각했다. 이 곳에서는 공장의 매연에 그냥 속수 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市정부는 이 지역에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는지, 건물들의 페인트들은 벗겨진 채로 있었고, 강 건너 서편에 비하면 길거리도 지저분하였다.
이 동편은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출발지로서 이곳에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최초의 극장이 이곳에 있고, 최초의 레닌 흉상이 있으며, 최초의 학교, 최초의 「사회주의 거리」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이제 이 동쪽지구, 특히 공장에 인접한 지역은 직접적인 공해 피해를 받는 곳으로 주로 빈곤층이 살고 있었다. 강 건너 서편에서 이곳으로 전차를 타고 오면 매캐한 냄새를 금방 느낄 수 있다. 특히 공장의 정문이 있는 콤소몰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낮게 불어오는 분홍색 연기와 매캐한 냄새로 괴로웠다. 하지만 제철소 소장이 토요일에도 출근해 업무를 본다는 1930년대에 지어진 본사 건물은 굴뚝의 연기가 24시간 내뿜는 정문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단지, 이 건물은 1930년대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외관에 유리를 둘러 외부의 오염된 공기를 완전 차단할 수 있게 보수된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그리고 공장 정문 앞에는 脫스탈린주의 운동이 한창이었던 흐루시초프 정권시기인 1961년에 기존의 스탈린 동상을 대체해 세워진 레닌 동상이 40년 동안 공장의 매연을 들이마시며 서 있었다.
이런 극심한 공해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의외로 공해에 대한 경각심이 그다지 높지 않아 놀랐다. 오히려 공해문제에 대해 무척 관대하였다. 모두 익숙해져서인가, 아니면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인가? 26년째 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마그니토고르스크 메탈」 신문의 副편집장 밀눌예바는 『지구는 좁다. 온 지구가 공해문제를 몸살을 앓고 있고 공해문제는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철강도시 피츠버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녀의 가족이 모두 제철소에서 일했다고 말해, 지금 모두 건강하냐고 내가 물으니, 자신의 아버지는 7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제철소도 환경문제에 점차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1999년 한 해에만 공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에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한다.
되살아나는 러시아 정교회
21세기 마그니토고르스크市의 새로운 상징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랄江의 우안에 건설 중인 웅장한 정교회 건물이었다. 1980년대 중반 및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內에서의 한 가지 특징적인 변화라면 러시아 정교회가 활발히 부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그니토고르스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0년대 말에 플로르라는 한 신부에 의해 주도된 교회건설 계획은 당시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소장 로마잔의 자금지원 약속을 얻어내,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기 직전인 1991년 11월10일, 교회 건물의 헌당식을 가졌다. 이후 제철소장이 바뀌면서 제철소의 지원이 중단되었다가 1998년 아니쿠쉰 시장이 공사 재개를 결정했다.
현재 공정의 80~90%는 끝난 듯,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교회 꼭대기의 거대한 황금빛 돔들과 십자가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교회의 높이는 52m나 되고 약 12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실내공간을 갖추고 있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최초의 교회는 놀랍게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건설되었는데 그 교회 건설은 당시 공산당원이자 제철소 소장인 노소프의 非공식적인 물적 지원下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1961년 흐루시초프 정부의 反종교 선동과 이데올로기 교육강화 분위기 속에서 문을 닫았다가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문을 열었고, 현재는 일요학교까지 운영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젊은 층에서도 종교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늘고 있지만 오랫동안의 사회주의 교육의 유산인지, 교회나 司祭(사제)들에 대한 불신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난 노동자 아르촘의 방에서, 책상 위 성경을 보고,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으니, 『교회는 신도들의 돈을 모으는 데만 관심 갖는 곳』이라 하며 안 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성경책에는 밑줄이 여기저기 그어져 있고 열심히 읽은 흔적이 보였다. 이들의 교회에 대한 불신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종교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면서 생긴 신념의 공백을 아주 서서히 종교가 메우고 있는 것을 이곳 우랄의 도시에서 느낄 수 있었다.
현재 건설 중인 거대한 정교회 사원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1㎞ 정도 올라가면 이슬람사원의 공사현장이 나타난다. 마그니토고르스크에는 사원을 지을 만큼의 충분한 이슬람교도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자동차로 서쪽으로 1시간 가면 이슬람교 인구가 많이 살고 있는 바슈키르 자치 공화국이 나오며 남동쪽으로 두세 시간 가면 또 다른 이슬람 국가 카자흐스탄이 나온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이슬람사원은 공사가 오랫동안 중단된 것처럼 보여 러시아 노동자 아르촘과 그의 친구 지마에게 물어보니 『우리는 크레인으로 교회를 짓는데, 그네들은 자금 부족으로 말 그대로 손으로 사원을 짓고 있다. 손으로 벽돌을 나르고 쌓아올린다』고 했다.
市 정부에서 러시아 정교회 건설은 지원을 하지만 이슬람교 사원 건립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지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건설의 상징이었던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이제 더 이상 1930년대의 급진적 무신론자들의 도시가 아니었다.
脫아시아 노선
『러시아人을 긁어봐라, 그러면 타타르가 나올 것이다』
1812년에 러시아를 침공해서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다가 퇴각한 나폴레옹이 1816년 그의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한 말이다. 나폴레옹에게는 러시아人이 완전한 유럽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나폴레옹과 같은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러시아人들 자신들도 아시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1248년 러시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키에프 루시를 함락시키고 이후 240년 간 러시아 땅을 통치한 타타르(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유럽 원정시 동원한 병사들 중에 절대 다수를 차지한 민족의 이름)에 의한 아시아적인 전제주의 정치문화의 이식은 이후 최근까지 러시아人들을 괴롭혀온 후진성의 흔적이 되었다. 덕분에 러시아에서는 「아시아적」이라 하면 「후진적」이라는 것과 동일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18세기 초 피터 大帝부터 시작한 「유럽 따라잡기」 노력은 19세기에 서구를 모델로 러시아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서구주의자 지식인들, 그리고 20세기 초 러시아를 半아시아적인 후진성이 지배하는 나라로 본 레닌을 거쳐 스탈린에까지 이른다.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건설은 스탈린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아시아」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스탈린이 1931년에 우랄지역의 산업발전 잠재성을 강조하면서 행한 한 연설에는 러시아의 「후진성」 극복의 발버둥이 잘 나타나 있다.
『템포를 늦춘다는 것은 뒤처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처진 자는 얻어맞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맞기를 원하지 않는다.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를 보라. 몽골 汗에게 얻어맞고, 터키 귀족들에게 얻어맞고, 스웨덴 봉건군주에게 맞았다. 그 다음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얻어맞았다. 영국, 프랑스 자본주의자들에게 또 맞았다. 그리고 일본에게 얻어맞지 않았는가. 우리는 군대의 후진성, 문화적 후진성, 정부의 후진성, 그리고 산업의 후진성, 농업의 후진성 때문에 얻어맞았다….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후진적일 수 없는 이유이다』
이 대목은 소비에트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가, 마그니토고르스크 건설에서의 청년 공산당원(콤소몰)들의 영웅적 노동을 소재로 1930년대 초에 쓴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 「시간, 앞으로!」 첫 부분에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인 콤소몰원들은 모스크바에서 마그니토고르스크로 가는 긴 열차여행 중, 「우파」라는 우랄산맥에 위치한 도시를 지나면서 근처에 있는 「유럽-아시아」라는 경계 팻말을 보고 『우리는 절대, 절대, 절대로 다시는 아시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몇 년 후, 그들은 「혁명」을 몰고 마그니토고르스크로 왔으며, 세계 최대 제철소 건설을 통해 아시아였던 우랄을 바꾸어 놓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시 우랄을 넘어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내가 미국에서 몇 년 전 만났던 젊은 러시아 학생들은 러시아가 유럽이라는 것을 무척 강조하였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한 러시아 남학생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니 『우파에서 왔다』고 하며 한마디 덧붙이는 말이 있다.
『우파는 아직 유럽』
우랄산맥을 넘기 바로 직전에 있는 우파는 유럽쪽 러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 것 같았다. 우파가 유럽인지 아시아인지 누가 묻기나 했나? 그리고 아시아人인 내 앞에서 굳이 우파가 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어야 하는지… 우랄 산맥 등성이에 있는 도시에서 온 청년이 이 정도면 西유럽과 더욱 가까이 접해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사람들은 어떠할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우랄산맥 너머의 마그니토고르스크 사람들에게 아시아 또는 아시아적인 것은 후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시아는 저 멀리 떨어진 이질적인 것도 아니었다. 아시아는 그들에게 생활 속의 한 부분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었다.
『러시아는 유럽과도 아시아와도 다른 그 무엇』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지리적 경계인 우랄산맥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아시아 쪽 러시아이다. 하지만 이곳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오니 아직도 유럽은 끝나지 않았다. 이 도시內에서 또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고 있었다. 市를 東西로 나누면서 가로지르는 우랄江의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로 간주한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교각 초입에 아시아를 의미하는 러시아語 「아지아」의 첫 자 「A」와 유럽을 의미하는 러시아語 유로파의 첫 자 「E」가 새겨진 현판을 달아놓았다. 그리고 좀더 가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나타내는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결국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제철소와 低소득층 아파트는 아시아 쪽에 있는 것이고, 왼쪽의 행정, 교육, 및 新시가지와 주거지는 유럽에 있는 셈이 된다. 우랄江을 가로지르는 네 개의 다리를 통해 많은 주민들은 매일 유럽과 아시아를 오간다.
사실 내가 만났던 마그니토고르스크 주민들은 마그니토고르스크를 유럽 또는 아시아로 구분하기보다는 두 부분이 공존하며 섞여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민들도 러시아人이 主流를 이루지만 그래도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89년의 통계에 의하면 이 도시의 주민은 92개의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러시아人이 81.5%, 타타르人 6.4%, 우크라이나人 4.3%, 바슈키르人 2.8%, 백러시아人 1% 등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러시아 저널」이라는 주간지가 올해 초 마그니토고르스크 주민을 대상으로 『당신은 유럽인과 아시아인 중 어느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54세인 엔지니어인 아나톨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우랄江을 건너, 유럽, 아시아를 오가는데, 과연 강의 서쪽에 산다고 유럽人이고, 동쪽에 산다고 아시아人이라 할 수 있는가? 유럽人인가 아시아人인가는 이 도시에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26세의 교사인 베로니카는 한편으로 러시아는 유럽과 더 가깝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러시아는 유럽과도 틀리고, 아시아와도 틀린 그 다른 무엇이다』고 말한다.
내가 만난 「마그니토고르스크 메탈」 신문의 副편집장 밀눌예바의 견해도 비슷했다. 그녀는 러시아의 특성은 『순수히 유럽 또는 아시아적이라기보다는 두 요소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랄지역으로 오래 전에 아시안人들이 이동해 왔는데, 바투가 13세기 초에 러시아를 침입했을 때 타타르人들도 왔고, 마자르人(헝가리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민족)들도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자신의 선조 중에도 마자르系가 섞여 있다고 한다.
유럽·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이 때문에 숙명적으로 아시아系 문화와의 접촉이 빈번해서인지, 내가 만난 마그니토고르스크 사람들 중에 단호하게 『러시아는 유럽이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유라시아적 특성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제철소 박물관을 견학갔을 때 박물관 안내자는 나에게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는 현재 매출액 면에서 세계 제17위라고 했다. 나는 왜 한때 세계 최대의 제철소가 17위로 밀려났는지 묻고 싶었다. 1950년대의 제철 기술 혁신과 그 기술을 미국을 비롯한 유럽국가에 수출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안내자에게, 나는 서방 언론에서 보고 들은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의 低생산성과 낙후된 설비의 非효율성 등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 안내자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냐며 얼굴을 찡그리면서, 소련 붕괴 이후부터 이런저런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 소련 시절에는 계속 좋은 상태를 유지했다고 강조한다.
한 번은 아르촘에게 한국에도 이렇게 큰 제철소가 있는데, 들어보았냐고 물으니, 들어본 적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제철소의 非효율성 등에 대해 물어 보니 갑자기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사실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서 만난 그 누구도 세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한국의 포항제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제철소를 가진 도시, 현재도 러시아 제1의 제철 도시의 주민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를 해 본 적도 없는지 궁금했다. 분명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독일人에 감정 없다
하지만 내가 만난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제철소와 관련된 소비에트 시절 신화는 거의 자리잡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에게 마그니토고르스크는 규모·인구 등에서 볼 때, 첼야빈스크州 제2의 도시로서 양질의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외국 기업과 교류가 많은 제철소에서 통역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또한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평범한 노동자로도 일할 수 있는 「기회」의 도시였다. 그들에게 마그니토고르스크와 이데올로기는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의 역사의식도 무척 실용적이었다. 독일어를 전공하는 여학생과 작년 겨울 이곳에서 열린 국제 스키대회에서 독일 대표들의 통역 경험담을 얘기하는 중, 내가 독일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독일인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時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수많은 소비에트 인민이 죽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 당시는 『히틀러가 시켜서 할 수 없이 했을 뿐』이라고 했다.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2700만여 명의 소비에트 인민들이 희생당했으며, 또한 나치 독일군을 무찌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소비에트 탱크의 절반이 이 도시에서 생산된 철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런 질문을 던졌던 나는 그들의 단순한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할아버지 세대들이 이 말을 들으면 과연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회주의 건설 모델로서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時 철강생산 중심지로서의 마그니토고르스크 신화는 포스트 소비에트 세대들 사이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다. 과연 이들 신세대들이 주역이 될 10~20년 후의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아니 러시아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며 우랄을 떠나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