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면 범죄수사, 네가 하면 정치보복
새해 벽두에 불거진 한나라당의 「안기부자금」 사건으로 21세기가 밝았다.
당초 한나라당 姜三載(강삼재) 의원을 구속하기 위하여 국회에 체포동의까지 요청하였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설 연휴 전날인 1월22일 국가안전기획부 예산을 빼내 1996년 총선 때 선거자금 940억원을 지원한 혐의로 한나라당 姜三載 의원을 불구속 기소하고 金己燮(김기섭) 前 안기부 운영차장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서울고등검찰청은 이날 오후 김 前 차장과 姜의원, 한나라당을 상대로 국고환수청구소송을 냈다.
「안기부 자금」 사건은 1982년 한나라당 前身(전신)의 하나였던 민주정의당 때 입법하고 1993년 통합여당이었던 신한국당에 의하여 긴급명령으로 시행한 금융실명제에 의하여 단서가 잡히고 추적조사 되었으니 자기가 만든 덫에 스스로 걸려들게 된 형국이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공포정치의 대명사였던 斷頭臺(단두대)를 만든 기요틴(J. J. Guillotine)이 자기가 만든 단두대에 처형되었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에서 한나라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정치보복금지법」 제정을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정부 집권 이후, 한나라당 모든 의원과 친인척 등의 계좌가 거의 다 뒤짐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치보복의 문제는 더 이상 묵과될 수 없는 중대 사안이 됐다』고 주장하면서 국회 내에 「정치보복금지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야당 후원과 관련한 검찰과 국세청의 수사나 세무조사 금지, 소급입법을 통한 과거 문제 처벌 금지, 이전 정권에서 일단락된 사안의 뒤집기 금지 등을 명문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최근에 조계종 총무원장 正大(정대)스님이 한나라당 李會昌(이회창) 총재에 대해 『대통령이 인기가 없다고 黨을 떠나라며 쫓아내고, 김광일·신상우 공천 안 주고 얼마나 독하냐』 『그 사람이 집권하면 단군이래 희대의 보복정치가 난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독한 얘기를 한 후 이 법안이 나왔다. 이런 점에서 「정권교체=정치보복」이라는 관념이 고착되면 大選(대선) 전략에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李총재는 정치보복금지법을 만들어 자기 스스로의 족쇄로 삼겠다는 각오인 듯하다.
1997년 大選 때 당시 金大中 후보는 「정치보복금지법」의 제정을 공약으로 내세운 적이 있다. 이번에는 당시의 야당이었던 여당이 그 대통령 밑에서 반대하고 있고 당시의 여당이었던 야당은 찬성하고 있으니 『내가 하면 범죄수사고 네가 하면 정치보복』이라는 코미디 같은 얘기다.
全斗煥 시절의 실명제 入法 시도와 실패
「안기부 자금」 수사나 「정치보복금지법」 제정 문제의 근저에는 모두 다 금융실명제가 깔려 있다. 실명제가 아니었더라면 「안기부 자금」 사건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을 것이고 이 사건이 없었다면 「정치보복금지법」이라는 세계에 유례없는 얘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금융실명제는 태어날 때부터 논란이 많았고 어두운 면과 밝은 면, 두 얼굴을 갖고 있는 야누스 같은 법이었다.
1982년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금융실명제를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재무부에서 일하던 나는 장관의 지시에 따라 지금은 없어진 서울 광화문 서린호텔에서 실무자들과 함께 밤을 새워 실명제 추진방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실무자들과 많은 토론을 거친 후 새벽녘에 나는 假名(가명)이나 借名(차명)에 의한 거래가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는데 법률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실명제를 추진하는 경우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실명과 非實名(비실명) 금융거래를 차별하여 과세하는 단계적인 방법으로 실명거래 관행을 유도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금융측면에서 실명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될 경우 저축의 위축에 의하여 內資(내자) 조달에 애로가 발생할 것이고, 둘째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하자금이 부동산투기와 귀금속, 사치품에 대한 실물투기로 몰리고 자산을 해외로 도피할 위험이 크며, 셋째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으로 노출할 수 없는 개인과 기업의 금전거래가 많고 특히 실명제 실시에 의한 「정치 자금」(Political cost)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일시에 법률에 의하여 실명제를 추진하는 것보다 금융단 협정을 개정하여 관행은 관행으로 고쳐나가는 것이 부작용이 적을 것이기 때문에 3단계에 걸쳐 假·借名의 이자나 배당에 대하여 높은 세율로 차등과세 하자는 결론을 내었다.
일본은 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었고 독일도 실명제를 토대로 금융소득의 종합과세를 추진하다가 자금이 해외로 도피하여 취소한 예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실명거래를 법으로 강제하는 예가 없었다.
보고서에 직접 표현하기 곤란하여 사용한 「Political cost」라는 말의 뜻은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금전거래가 기록되고 공개될 수 없는 상황에서 실명제를 법률로 전면 실시하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들고, 사회가 깨끗해지면 실명제는 되는 것이지 실명제로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것은 소의 꼬리를 잡고 소를 끌고 가겠다는 논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무자들의 이러한 보고는 채택되지 못하고 그해 7월3일 금융소득의 종합과세와 함께 법률에 의한 전면적인 금융실명거래제의 실시가 발표되었다.
뒤늦게 놀란 여당의 반대
실명제 실시가 발표되자 경제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야당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의 야당인 민주한국당은 야당 말살정책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여 국회 재무위원회에서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이때 야당에서 유일하게 洪思德(홍사덕) 의원만 당론과 달리 찬성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여당이 실명제의 문제점을 알고 나면 절대 실명제를 실시할 수 없기 때문에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여당은 입장을 바꾸어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만 제정하되 시행은 미루고 非실명거래에 대한 소득세의 차등과세만 하게 되었다. 당시 실명제 연기의 명분은 실명거래자료의 컴퓨터 처리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도 미국과 유럽에서는 실명제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컴퓨터 처리 문제는 실명제 실시를 연기하기로 한 여야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실무자들이 만들어낸 구실이었다.
洪思德 의원은 정부의 당초 案을 찬성한 유일한 야당의원이었고, 표결과정에서 실명제 실시연기를 규정한 부칙이 포함된 법안을 반대한 유일한 재무위원이었는데 洪의원의 정치감각은 탁월한 것이었다.
이렇게 입법만 하고 시행은 미루어 오던 실명제는 盧泰愚 대통령 때에 와서도 실시논의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되었는데 이때는 입장이 바뀌어 오히려 야당에서 실명제를 실시하자는 정치공세를 펴게 되었다.
실명제는 법이 제정된 후 10년 동안 논란만 계속하다가 1993년 金泳三 대통령에 의하여 긴급명령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金泳三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마자 『재임 중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공직자재산등록을 실시하고 6공화국 시절의 고위공직자에 대한 강도 높은 司正으로 「兎死狗烹(토사구팽)」이라는 말이 회자하던 8월12일 저녁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그날 저녁 8시부터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1982년 발표된 실명제는 신규 금융거래부터 실명제를 실시하고 기존의 非실명 예금은 그 범위 내에서 계속 非실명을 인정하고 대부분의 자금에 대하여 출처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3년 발표된 실명제는 기존의 非실명예금도 실명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非실명에 의한 인출을 금지시킬 뿐만 아니라 5000만원 이하의 소액자금을 제외하고는 자금출처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존의 예금에 대하여도 소급하여 실명전환을 강제하고 과거의 불법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더구나 밤중에 「깜짝쇼」같이 긴급명령으로 실시된 실명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과거 예금에까지 소급 적용된 실명제에 의하여 수많은 과거의 비리가 드러나게 되어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사정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나중에는 全斗煥 ·盧泰遇 前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실명제로 발목이 잡힌 자금 중 아직도 찾아가지 않는 예금이 상당액이고 지하에 묻혀 있는 거액의 현금이 신권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사기사건이 몇 번 일어나기도 했다.
두 얼굴을 가진 실명제
당초에 실명제는 사채를 중심으로 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를 위한 장치로 구상되어 과거의 자금에 대하여 관대하게 처리하려던 것이었다.
1993년에 시행된 실명제는 부정부패의 근절이 주목적이었고, 소급하여 실명을 강제함으로써 과거의 비리를 캐는 데는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과거 들추기에 의하여 정치적인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고 전직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앉지 못할 만큼 사회를 분열시키는 逆작용도 하였다.
이번의 「안기부 자금」 사건도 이러한 실명제의 두 얼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당은 국고자금 유용에 대한 당연한 수사이며 유용자금은 국고에 환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은 국고자금이 아니며 불법적인 계좌추적에 의한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고 金泳三 前 대통령은 金大中 대통령의 과거 정치자금 내역을 알고 있다고 맞불을 놓고 있다.
권력을 쥔 자는 반대자들의 흠을 들추기 위하여 계좌를 추적하고 싶은 끊임없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全斗煥 前 대통령은 자기가 시도했던 실명제로 큰 고난을 당하였고 金泳三 前 대통령도 자기가 실시한 실명제에 의하여 「안기부 자금」 사건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남을 향하여 던진 실명제가 부메랑이 되어 자기를 치게 된 것이다.
지금과 같이 광범위한 계좌추적의 수사관행이 앞으로 계속된다면 또 다른 부메랑이 되어 그것을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당초 실명제는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위한 칼로 구상되고 추진되었는데 지금은 「정치보복」의 칼이 되고 있다.
실명제가 실시된 후 부정부패가 얼마나 뿌리뽑혔는지 통계는 없지만 체감으로는 큰 변화를 느낄 수 없다.
사회가 깨끗해지면 실명제는 되는 것이지 실명제로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시도는 많은 무리를 낳았다. 소는 코를 꿰어야 끌고 갈 수 있지 꼬리를 쥐고 끌고 가다가는 뒷발에 채이게 된다.●
새해 벽두에 불거진 한나라당의 「안기부자금」 사건으로 21세기가 밝았다.
당초 한나라당 姜三載(강삼재) 의원을 구속하기 위하여 국회에 체포동의까지 요청하였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설 연휴 전날인 1월22일 국가안전기획부 예산을 빼내 1996년 총선 때 선거자금 940억원을 지원한 혐의로 한나라당 姜三載 의원을 불구속 기소하고 金己燮(김기섭) 前 안기부 운영차장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서울고등검찰청은 이날 오후 김 前 차장과 姜의원, 한나라당을 상대로 국고환수청구소송을 냈다.
「안기부 자금」 사건은 1982년 한나라당 前身(전신)의 하나였던 민주정의당 때 입법하고 1993년 통합여당이었던 신한국당에 의하여 긴급명령으로 시행한 금융실명제에 의하여 단서가 잡히고 추적조사 되었으니 자기가 만든 덫에 스스로 걸려들게 된 형국이다.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공포정치의 대명사였던 斷頭臺(단두대)를 만든 기요틴(J. J. Guillotine)이 자기가 만든 단두대에 처형되었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에서 한나라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정치보복금지법」 제정을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정부 집권 이후, 한나라당 모든 의원과 친인척 등의 계좌가 거의 다 뒤짐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치보복의 문제는 더 이상 묵과될 수 없는 중대 사안이 됐다』고 주장하면서 국회 내에 「정치보복금지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야당 후원과 관련한 검찰과 국세청의 수사나 세무조사 금지, 소급입법을 통한 과거 문제 처벌 금지, 이전 정권에서 일단락된 사안의 뒤집기 금지 등을 명문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최근에 조계종 총무원장 正大(정대)스님이 한나라당 李會昌(이회창) 총재에 대해 『대통령이 인기가 없다고 黨을 떠나라며 쫓아내고, 김광일·신상우 공천 안 주고 얼마나 독하냐』 『그 사람이 집권하면 단군이래 희대의 보복정치가 난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독한 얘기를 한 후 이 법안이 나왔다. 이런 점에서 「정권교체=정치보복」이라는 관념이 고착되면 大選(대선) 전략에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李총재는 정치보복금지법을 만들어 자기 스스로의 족쇄로 삼겠다는 각오인 듯하다.
1997년 大選 때 당시 金大中 후보는 「정치보복금지법」의 제정을 공약으로 내세운 적이 있다. 이번에는 당시의 야당이었던 여당이 그 대통령 밑에서 반대하고 있고 당시의 여당이었던 야당은 찬성하고 있으니 『내가 하면 범죄수사고 네가 하면 정치보복』이라는 코미디 같은 얘기다.
全斗煥 시절의 실명제 入法 시도와 실패
「안기부 자금」 수사나 「정치보복금지법」 제정 문제의 근저에는 모두 다 금융실명제가 깔려 있다. 실명제가 아니었더라면 「안기부 자금」 사건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을 것이고 이 사건이 없었다면 「정치보복금지법」이라는 세계에 유례없는 얘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금융실명제는 태어날 때부터 논란이 많았고 어두운 면과 밝은 면, 두 얼굴을 갖고 있는 야누스 같은 법이었다.
1982년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금융실명제를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재무부에서 일하던 나는 장관의 지시에 따라 지금은 없어진 서울 광화문 서린호텔에서 실무자들과 함께 밤을 새워 실명제 추진방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실무자들과 많은 토론을 거친 후 새벽녘에 나는 假名(가명)이나 借名(차명)에 의한 거래가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는데 법률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실명제를 추진하는 경우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실명과 非實名(비실명) 금융거래를 차별하여 과세하는 단계적인 방법으로 실명거래 관행을 유도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금융측면에서 실명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될 경우 저축의 위축에 의하여 內資(내자) 조달에 애로가 발생할 것이고, 둘째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하자금이 부동산투기와 귀금속, 사치품에 대한 실물투기로 몰리고 자산을 해외로 도피할 위험이 크며, 셋째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으로 노출할 수 없는 개인과 기업의 금전거래가 많고 특히 실명제 실시에 의한 「정치 자금」(Political cost)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일시에 법률에 의하여 실명제를 추진하는 것보다 금융단 협정을 개정하여 관행은 관행으로 고쳐나가는 것이 부작용이 적을 것이기 때문에 3단계에 걸쳐 假·借名의 이자나 배당에 대하여 높은 세율로 차등과세 하자는 결론을 내었다.
일본은 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었고 독일도 실명제를 토대로 금융소득의 종합과세를 추진하다가 자금이 해외로 도피하여 취소한 예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실명거래를 법으로 강제하는 예가 없었다.
보고서에 직접 표현하기 곤란하여 사용한 「Political cost」라는 말의 뜻은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금전거래가 기록되고 공개될 수 없는 상황에서 실명제를 법률로 전면 실시하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들고, 사회가 깨끗해지면 실명제는 되는 것이지 실명제로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것은 소의 꼬리를 잡고 소를 끌고 가겠다는 논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무자들의 이러한 보고는 채택되지 못하고 그해 7월3일 금융소득의 종합과세와 함께 법률에 의한 전면적인 금융실명거래제의 실시가 발표되었다.
뒤늦게 놀란 여당의 반대
실명제 실시가 발표되자 경제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야당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의 야당인 민주한국당은 야당 말살정책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여 국회 재무위원회에서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이때 야당에서 유일하게 洪思德(홍사덕) 의원만 당론과 달리 찬성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여당이 실명제의 문제점을 알고 나면 절대 실명제를 실시할 수 없기 때문에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여당은 입장을 바꾸어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만 제정하되 시행은 미루고 非실명거래에 대한 소득세의 차등과세만 하게 되었다. 당시 실명제 연기의 명분은 실명거래자료의 컴퓨터 처리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도 미국과 유럽에서는 실명제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컴퓨터 처리 문제는 실명제 실시를 연기하기로 한 여야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실무자들이 만들어낸 구실이었다.
洪思德 의원은 정부의 당초 案을 찬성한 유일한 야당의원이었고, 표결과정에서 실명제 실시연기를 규정한 부칙이 포함된 법안을 반대한 유일한 재무위원이었는데 洪의원의 정치감각은 탁월한 것이었다.
이렇게 입법만 하고 시행은 미루어 오던 실명제는 盧泰愚 대통령 때에 와서도 실시논의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되었는데 이때는 입장이 바뀌어 오히려 야당에서 실명제를 실시하자는 정치공세를 펴게 되었다.
실명제는 법이 제정된 후 10년 동안 논란만 계속하다가 1993년 金泳三 대통령에 의하여 긴급명령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金泳三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마자 『재임 중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공직자재산등록을 실시하고 6공화국 시절의 고위공직자에 대한 강도 높은 司正으로 「兎死狗烹(토사구팽)」이라는 말이 회자하던 8월12일 저녁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그날 저녁 8시부터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1982년 발표된 실명제는 신규 금융거래부터 실명제를 실시하고 기존의 非실명 예금은 그 범위 내에서 계속 非실명을 인정하고 대부분의 자금에 대하여 출처조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3년 발표된 실명제는 기존의 非실명예금도 실명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非실명에 의한 인출을 금지시킬 뿐만 아니라 5000만원 이하의 소액자금을 제외하고는 자금출처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존의 예금에 대하여도 소급하여 실명전환을 강제하고 과거의 불법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더구나 밤중에 「깜짝쇼」같이 긴급명령으로 실시된 실명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과거 예금에까지 소급 적용된 실명제에 의하여 수많은 과거의 비리가 드러나게 되어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사정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나중에는 全斗煥 ·盧泰遇 前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실명제로 발목이 잡힌 자금 중 아직도 찾아가지 않는 예금이 상당액이고 지하에 묻혀 있는 거액의 현금이 신권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사기사건이 몇 번 일어나기도 했다.
두 얼굴을 가진 실명제
당초에 실명제는 사채를 중심으로 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를 위한 장치로 구상되어 과거의 자금에 대하여 관대하게 처리하려던 것이었다.
1993년에 시행된 실명제는 부정부패의 근절이 주목적이었고, 소급하여 실명을 강제함으로써 과거의 비리를 캐는 데는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과거 들추기에 의하여 정치적인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고 전직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앉지 못할 만큼 사회를 분열시키는 逆작용도 하였다.
이번의 「안기부 자금」 사건도 이러한 실명제의 두 얼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당은 국고자금 유용에 대한 당연한 수사이며 유용자금은 국고에 환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은 국고자금이 아니며 불법적인 계좌추적에 의한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고 金泳三 前 대통령은 金大中 대통령의 과거 정치자금 내역을 알고 있다고 맞불을 놓고 있다.
권력을 쥔 자는 반대자들의 흠을 들추기 위하여 계좌를 추적하고 싶은 끊임없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全斗煥 前 대통령은 자기가 시도했던 실명제로 큰 고난을 당하였고 金泳三 前 대통령도 자기가 실시한 실명제에 의하여 「안기부 자금」 사건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남을 향하여 던진 실명제가 부메랑이 되어 자기를 치게 된 것이다.
지금과 같이 광범위한 계좌추적의 수사관행이 앞으로 계속된다면 또 다른 부메랑이 되어 그것을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당초 실명제는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위한 칼로 구상되고 추진되었는데 지금은 「정치보복」의 칼이 되고 있다.
실명제가 실시된 후 부정부패가 얼마나 뿌리뽑혔는지 통계는 없지만 체감으로는 큰 변화를 느낄 수 없다.
사회가 깨끗해지면 실명제는 되는 것이지 실명제로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시도는 많은 무리를 낳았다. 소는 코를 꿰어야 끌고 갈 수 있지 꼬리를 쥐고 끌고 가다가는 뒷발에 채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