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江戶) 시대의 鎖國政策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었다. 이것이 明治維新을 통해 오늘날의 日本을 만들었다.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하늘에서 내려다본 나가사키공항. 이 공항은 세계 최초의 해상 국제공항이다.
2003년 12월15일 오후 2시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KE793편은 같은 날 3시50분 日本 나가사키(長崎) 국제공항에 착륙을 앞두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나가사키공항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고속도로와 같았다. 이 공항은 1975년 나가사키縣의 중심부 오무라만(大村灣)에 있던 작은 섬을 매립해 만든 세계 최초의 海上 국제공항이다. 영종도를 매립해 만든 인천공항이 바로 나가사키공항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日本 땅을 밟은 일행을 처음 맞이한 것은 오무라灣으로 불어들어온 세찬 海風(해풍)이었다. 이 바람은 日本을 처음 방문한 기자에게 섬나라 日本의 첫인상으로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됐다. 나가시키로 불어오는 海風은 이곳으로 흐르는 海流(해류)와 함께 나가사키를 東西洋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한 천혜의 조건으로 작용했다.
나가사키縣은 규슈(九州ㆍ日本열도를 이루고 있는 4개 섬 중 가장 아래쪽에 있는 섬)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나가사키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中國ㆍ한반도와 마주하고 있어 대륙과의 교통요충지 역할을 했다. 나가사키는 야마토 지방과 함께 日本 古代문화인 야요이 문화의 2大 중심지의 하나이다.
13세기 후반에는 2차에 걸쳐 麗蒙(여몽)연합군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17세기 에도(江戶) 시대에는 유럽 문물이 이곳을 통해 본토로 전해져 日本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곳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무역항도 설치됐다. 한 때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나가사키縣 內에는 이국정서가 넘치는 유물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나가사키 시내를 달리는 전차.
나가사키縣은 무인도를 포함해 971개에 달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縣의 총면적 4100㎢ 중 45%가 이에 해당된다. 緯度(위도)上 제주도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나가사키는 온난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이 섭씨 16.6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2000㎜이다. 나가사키縣은 나가사키ㆍ사세보(佐世保)ㆍ히라도(平戶)ㆍ마쯔우라(松浦)ㆍ시마바라(島原) 등 8개의 市와 쯔시마(對馬島) 등 15개의 君으로 이뤄져 있다. 2002년 10월 현재 나가사키縣의 인구는 152만명이다.
이번 여행은 나가사키縣 관광연맹 측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日本은 최근 국내 경기불황과 내국인 관광객 감소로 관광적자를 免(면)하기 위해 해외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韓國과 中國을 상대로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內 여행관계자 및 언론인들을 초청해 自國의 관광상품을 홍보하는 것도 정책의 일환이다. 나가사키縣 관광연맹의 마츠오 씨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서울과 부산을 자주 드나든다』면서 『두 나라의 관광교류는 단순한 관광을 넘어 文化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일행은 나가사키현 관광연맹 측이 제공한 버스를 타고 나가사키市로 향했다. 오무라灣을 끼고 돌아 오무라市를 통과한 후 한 시간이 지나자 나가사키市를 알리는 도로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시속 80㎞를 넘지 않는 버스 운전기사의 안전운행이 인상적이었다. 일행의 안내자 역할을 담당한 나가사키 서울사무소장 출신의 황일휘 씨는 『日本 사람들이 크락션(경음기)를 사용하는 회수는 일년에 고작 두세번에 불과하다』고 귀띔했다.
나가사키灣을 품은 듯한 모습의 나가사키市는 산 중턱의 급사면까지 시가지가 발달된 항구도시이다. 이 곳은 2次 大戰이 막바지에 달했던 1945년 8월9일 日本內에 두번 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市內에는 원자폭탄의 위력과 전쟁의 참화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헤이와(평화) 공원이 조성돼 있다. 1864년 프랑스人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日本 최초의 성당인 「오우라 천주당」과 1895년부터 30년에 걸쳐 완성된 동양 제일의 대성당으로 불리는 우라카미 천주당도 관광명소이다.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의 야경. 하우스텐보스는 '숲속의 집'이라는 뜻의 네덜란드語이다.
나가사키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나가사키는 韓日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607년 朝鮮통신사가 최초로 日本을 방문한 곳이 바로 나가사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와 몽고軍의 연합군이 日本을 공격한 곳도 나가사키 일대였다. 高麗ㆍ朝鮮시대 당시 남해안 일대를 공격했던 倭寇(왜구)의 본거지 또한 나가사키였다.
607년 中國 隋(수)나라의 對日本 외교사절단인 遣隋使(견수사)와 唐(당)나라의 遣唐使(견당사)가 日本 본토로 들어가기 위해 入港한 곳도 나가사키 지방이다. 서양인이 日本을 처음 방문한 지역 또한 나가사키이다. 1549년 동양 선교의 선구자인 프란치스코 자비엘 신부는 日本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그가 日本 땅을 밟은 곳은 지금의 나가사키縣 히라도市이다. 자비엘 신부는 짧은 日本 체류 기간 동안 기독교를 전파했다.
이듬해인 1550년 히라도港을 통해 포르투갈船이 들어왔다. 이 선박은 日本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선박으로 기록됐다. 1571년 나가사키港은 포르투갈의 무역항으로 開港한다. 이후 日本은 나가사키를 통해 대량의 서양문화을 받아들였다. 네덜란드ㆍ중국 商人들도 이 곳을 드나들었다.
1641년 네덜란드 무역관이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 설립됐다. 데지마는 나가사키市의 남쪽에 위치한 면적 1만3000평방미터 정도의 부채형 인공섬이다. 이 곳은 17세기 에도 시대 당시 鎖國政策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무역상대국이었던 네덜란드人의 거류지로 성장해갔다. 이곳은 19세기 日本이 개국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서양과 통했던 유일한 창구였다.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서양문물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다음과 같다.
<해시계, 사진기, 통조림, 활판인쇄, 영자신문, 유리세공, 서양의학, 기구, 배드민턴, 당구, 철도, 카스테라, 빵, 커피, 맥주, 안경, 벽돌, 시계>
나가사키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랑가쿠(蘭學ㆍ난학)이다. 18세기 日本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도입, 思想 측면에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이러한 물결은 네덜란드(和蘭)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학문은 蘭學이라 불렸으며, 洋學(양학)이라고도 했다. 쇼군의 실학 장려로 蘭學은 급속히 전파됐으며, 서양의 의학ㆍ천문학ㆍ지리학 등이 특히 발전했다.
일행은 첫날 숙소인 뉴나가사키 호텔(WWW.NEWNAGA.COM)에 여장을 풀었다. 13층 높이의 이 호텔은 나가사키市에서 비교적 고급호텔(1泊 평균 2만 4000엔)에 속하는 편이라고 한다. 인근에 나가사키 市廳과 나가사키驛이 있어 나가시키市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호텔 앞쪽으로는 「진친 전차」라고 불리는 路上전차가 5분 간격으로 달리고 있었다.
시마바라 시내에 있는 시마바라성.
일행은 호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로 日本 정식을 택했다. 飯酒로 대나무통에 담긴 정종을 몇 잔 기울였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호텔 주위를 돌아봤다. 밤 9시가 지나자 호텔 주변은 나가사키市의 중심부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대부분의 酒店은 문을 닫았다. 일행인 황일휘 씨는 『인건비가 너무 비싸 대부분의 가게가 일찍 문을 닫는다』고 했다. 사람의 손이 가는 것은 한국과 비교해 상당히 비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日本에서 夜景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나가사키市의 밤거리는 유흥가에서 내뿜는 요란한 네온사인이 아니라 도로와 건물 그리고 일반 주택에서 발하는 빛의 조화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2월16일 오전 일행은 사세보市 동남쪽의 오무라灣 일대에 펼쳐져 있는 테마공원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로 향했다. 하우스텐보스는 「숲속의 집」을 뜻하는 네덜란드語로 152만 평방미터(약 46만평)의 부지 위에 17세기의 네덜란드 거리 모습을 再現(재현)하고 있다. 공원 內에는 수십만 그루의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으며, 다양한 가게와 레스토랑, 극장, 박물관, 오락시설 등이 있다. 최고급 호텔과 별장도 함께 갖추고 있다. 1人 입장료는 어른의 경우 3200엔으로 조금 비싼 편이다.
일행은 하우스텐보스 국제영업부에서 근무하는 한국人 이정은 씨와 유학생 배인자 씨의 통역서비스를 받으며 하우스텐보스 일대를 둘러봤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女王이 살고 있는 궁전을 충실하게 再現한 「팰리스 하우스텐보스」. 하우스텐보스의 상징이기도 한 이 궁전은 건물조형은 물론 건축자재까지 네덜란드에서 직수입해 만들었다. 물론 하우스텐보스 內의 모든 건물에 들어간 벽돌과 자갈 등도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운젠다케 재해기념관 내부광경. 바닥의 붉은 부분은 화산폭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습이다.
궁전 내부에는 미술관과 日本 최대의 「벽화의 방」이 있다. 벽화의 방은 네덜란드 예술가인 톱 스왈테와 40人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4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벽화의 광대한 규모가 압권이다. 건물 뒤편에는 18세기 프랑스人 다니엘 말로가 왕궁을 위해 설계했던 「바로크식 정원」이 초기 설계도대로 조성돼 있다.
하우스텐보스 內에 있는 유리박물관 또한 볼만하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로부터 전해진 유리는 이곳 나가사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나가사키 지방 사람들은 유리를 「기어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어만은 다이아몬드를 뜻하는 네덜란드語이다. 당시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유리의 장식기법 중 하나가 다이아몬드 포인트였다. 이 때문에 日本人들은 유리를 「기어만」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전시실에는 유럽 각지로 널리 퍼진 유리와 중세 베네치아의 작품 등 총 70여점이 전시돼 있다.
도자기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다. 16~18세기에 中國과 日本의 도자기는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전해졌다. 하우스텐보스의 인근에는 日本 내 최대 도자기 생산지인 아리타가 있었다. 아리타로부터 17~18세기에 걸쳐 막대한 양의 도자기가 네덜란드연합동인회사에 의해 수출됐다. 이 도자기들은 「이마리」로 불려지면서, 유럽 도예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獨逸의 마이센 도자기를 비롯한 유럽 도자기는 「이마리」를 과학적으로 분석, 연구해 나온 성과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도예기술은 백제, 조선에서 건너간 도예인들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우스텐보스의 또하나의 즐거움은 야간 입장객을 위한 레이져 쇼와 불꽃놀이다. 매일 밤 9시부터 약 20분 동안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벤트는 하우스텐보스의 밤을 오색 불꽃으로 채색하고 있다.
일행은 하우스텐보스 內에 위치한 「호텔 덴하그」에서 두번 째 밤을 보냈다. 하우스텐보스에는 한국人 유학생들이 곳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語 서비스를 손쉽게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하우스텐보스 국제영업부의 매너저인 켄지 카지하라 씨는 『한국人 관광객이 이 곳을 찾는 수는 매년 1000명 정도』라고 밝혔다. 국제영업부 이정은 씨는 『한국의 테마공원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편이지만 자연과 함께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관광코스』라고 말했다.
시마바라성 인근에 있는 무사의 집.
12월17일 일행은 나가사키縣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시마바라(島原) 반도로 향했다. 성곽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사마바라의 歷史는 1618년 다이묘(大名)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시마바라城 착공에서 시작된다. 7년에 걸쳐 완성된 이 城은 시마바라 반도의 행정, 경제의 중심이 됐다.
다이묘(大名)란 에도 시대의 바쿠한(幕藩) 체제 下의 藩主(번주)를 일컫는 말이다. 日本의 근대사회는 바쿠한 체제의 사회라고 할 만큼 幕府(막부)와 藩(번)으로 구성된 견고한 봉건지배 체제였다. 봉건사회의 기본적인 계급관계는 봉건영주층과 농민층이었는데, 日本의 근대사회는 농민층에 대립관계에 있던 봉건영주층이 바쿠한 체제로 강하게 결속돼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앙에 쇼군이 지배하는 幕府가 있고, 지방에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다이묘가 지배하는 藩이 존재했다. 이 두 개의 세력이 결합해 日本사회를 지배했던 것이다.
시마바라市 상공관광과 직원 카네코 씨와 부산시청 공무원으로 현재 나가사키縣廳(현청ㆍ우리나라의 道廳에 해당)에 파견돼 있는 김영욱씨의 도움을 받으며 시마바라 반도 일대를 구경했다.
우선 시마바라의 다이묘(大名)인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발휘해 건축한 시마바라城을 찾았다. 현재 이 城은 천주교 사료관, 관광 부흥기념관, 민속 자료관 등 교육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에도시대 당시의 무사가 착용했던 갑옷. 시마바라성 내에 전시돼 있는 것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기자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城의 3층에 전시돼 있는 1600년대 초 에도 시대의 武士(무사)들이 입었던 갑옷이었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 倭軍이 조선을 쳐들어올 때 착용한 전투복과 유사한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섬뜩했다. 武士는 150~6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체구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칼ㆍ활 그리고 조총으로 무장한 채 한반도를 「먹겠다」는 탐욕이 武士의 갑옷 속에 스며 있는 것 같았다.
카네코씨는 『당시 갑옷을 대대로 보존해오던 사람으로부터 기증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욱씨는 『日本 사람들의 역사 보존 의식은 대단하다』면서 『작은 것이라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그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행은 시마바라城에서 동쪽 해변가로 30분 가량 차로 달려 운젠다케 재해기념관에 도착했다. 이 기념관은 국립공원 운젠의 主峰(주봉)인 후겐다케가 198년만에 분화활동을 시작한 이후 1996년 6월 大분화 당시 44명(취재기자 20명을 포함해 경찰관, 자위대원)의 목숨을 앗아간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규슈호텔 뒤쪽에 위치한 운젠지옥. 하얀 수증기가 지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지옥이라는 부른다고 한다.
재해기념관 관계자는 『당시 화산 폭발에 의해 토사가 내려와 주택가를 삼킨 지역을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화산의 위력을 실감하고 후세에 자연재해를 대비하는 교훈으로 전달하고자 기념관을 건립했다』고 밝혔다. 2002년 7월 완공된 재해기념관은 2003년 12월 현재 55만2100여명의 내국인이 이 곳을 다녀갔다. 기념관 건립에 들어간 비용은 한화로 470억원이라고 한다. 재해기념관은 日本 內에서 유일하게 화산재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행은 日本여행의 마지막 밤을 묵을 규슈호텔로 향했다. 시마바라 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규슈호텔은 日本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운젠(雲仙) 온천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운젠 온천은 천년 이상의 歷史를 지닌 곳으로 지금도 활발하게 수증기를 뿜어내는 온천이 곳곳에 있다. 이 곳은 유황성분이 풍부해 피부질환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운젠 온천의 가운데에 있는 운젠 지옥은 이 곳을 대표하는 관광의 名所(명소)이다. 하얀연기가 일고 있는 火口(화구) 언덕에 길이 만들어져 있어 地熱(지열)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다.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이 지옥과 같다고 해서 「지옥」이라는 말이 붙여졌다고 한다. 地熱을 이용해 삶은 온천달걀(1개 200엔)이 名物(명물)이다.
규슈호텔의 오카미(女將ㆍ日本의 경우 호텔 경영은 사장의 부인이 주로 맡으며 그 女주인을 부르는 말) 시치조 유키코씨가 日本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일행을 만갑게 맞이했다. 이 호텔은 운젠 지역에서 두번 째로 오래된 호텔로서 現 사장이 설립자의 4代孫이라고 한다. 유키코씨는 『1917년에 설립된 규슈호텔은 日本 전통 가옥을 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호텔』이라고 강조했다.
호텔 內에 있는 천연유황온천에서 旅毒(여독)을 푼 일행은 규슈호텔이 자랑하는 동서양 퓨전음식을 저녁식사 겸해서 들었다. 음식 맛이 깔끔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규슈호텔의 女주인 유키코씨가 『술 한잔 대접하겠다』고 했다. 일행은 호텔 2층에 위치한 「빠 에스페란스」에서 기린 맥주와 日本 술을 몇 잔 걸쳤다. 보기 드문 美貌(미모)의 女주인은 마음씨 또한 호탕했다. 日本 여행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키코 씨는 3일 동안 일행을 가이드해 온 나가사키縣 관광연맹 소속 마츠오씨의 고교동창이자 막역한 친구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나가사키공항. 이 공항은 세계 최초의 해상 국제공항이다.
2003년 12월15일 오후 2시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KE793편은 같은 날 3시50분 日本 나가사키(長崎) 국제공항에 착륙을 앞두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나가사키공항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고속도로와 같았다. 이 공항은 1975년 나가사키縣의 중심부 오무라만(大村灣)에 있던 작은 섬을 매립해 만든 세계 최초의 海上 국제공항이다. 영종도를 매립해 만든 인천공항이 바로 나가사키공항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日本 땅을 밟은 일행을 처음 맞이한 것은 오무라灣으로 불어들어온 세찬 海風(해풍)이었다. 이 바람은 日本을 처음 방문한 기자에게 섬나라 日本의 첫인상으로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됐다. 나가시키로 불어오는 海風은 이곳으로 흐르는 海流(해류)와 함께 나가사키를 東西洋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한 천혜의 조건으로 작용했다.
나가사키縣은 규슈(九州ㆍ日本열도를 이루고 있는 4개 섬 중 가장 아래쪽에 있는 섬)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나가사키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中國ㆍ한반도와 마주하고 있어 대륙과의 교통요충지 역할을 했다. 나가사키는 야마토 지방과 함께 日本 古代문화인 야요이 문화의 2大 중심지의 하나이다.
13세기 후반에는 2차에 걸쳐 麗蒙(여몽)연합군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17세기 에도(江戶) 시대에는 유럽 문물이 이곳을 통해 본토로 전해져 日本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곳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무역항도 설치됐다. 한 때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나가사키縣 內에는 이국정서가 넘치는 유물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나가사키 시내를 달리는 전차.
나가사키縣은 무인도를 포함해 971개에 달하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縣의 총면적 4100㎢ 중 45%가 이에 해당된다. 緯度(위도)上 제주도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나가사키는 온난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이 섭씨 16.6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2000㎜이다. 나가사키縣은 나가사키ㆍ사세보(佐世保)ㆍ히라도(平戶)ㆍ마쯔우라(松浦)ㆍ시마바라(島原) 등 8개의 市와 쯔시마(對馬島) 등 15개의 君으로 이뤄져 있다. 2002년 10월 현재 나가사키縣의 인구는 152만명이다.
이번 여행은 나가사키縣 관광연맹 측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日本은 최근 국내 경기불황과 내국인 관광객 감소로 관광적자를 免(면)하기 위해 해외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韓國과 中國을 상대로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內 여행관계자 및 언론인들을 초청해 自國의 관광상품을 홍보하는 것도 정책의 일환이다. 나가사키縣 관광연맹의 마츠오 씨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서울과 부산을 자주 드나든다』면서 『두 나라의 관광교류는 단순한 관광을 넘어 文化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일행은 나가사키현 관광연맹 측이 제공한 버스를 타고 나가사키市로 향했다. 오무라灣을 끼고 돌아 오무라市를 통과한 후 한 시간이 지나자 나가사키市를 알리는 도로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시속 80㎞를 넘지 않는 버스 운전기사의 안전운행이 인상적이었다. 일행의 안내자 역할을 담당한 나가사키 서울사무소장 출신의 황일휘 씨는 『日本 사람들이 크락션(경음기)를 사용하는 회수는 일년에 고작 두세번에 불과하다』고 귀띔했다.
나가사키灣을 품은 듯한 모습의 나가사키市는 산 중턱의 급사면까지 시가지가 발달된 항구도시이다. 이 곳은 2次 大戰이 막바지에 달했던 1945년 8월9일 日本內에 두번 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市內에는 원자폭탄의 위력과 전쟁의 참화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헤이와(평화) 공원이 조성돼 있다. 1864년 프랑스人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日本 최초의 성당인 「오우라 천주당」과 1895년부터 30년에 걸쳐 완성된 동양 제일의 대성당으로 불리는 우라카미 천주당도 관광명소이다.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의 야경. 하우스텐보스는 '숲속의 집'이라는 뜻의 네덜란드語이다.
나가사키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나가사키는 韓日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607년 朝鮮통신사가 최초로 日本을 방문한 곳이 바로 나가사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와 몽고軍의 연합군이 日本을 공격한 곳도 나가사키 일대였다. 高麗ㆍ朝鮮시대 당시 남해안 일대를 공격했던 倭寇(왜구)의 본거지 또한 나가사키였다.
607년 中國 隋(수)나라의 對日本 외교사절단인 遣隋使(견수사)와 唐(당)나라의 遣唐使(견당사)가 日本 본토로 들어가기 위해 入港한 곳도 나가사키 지방이다. 서양인이 日本을 처음 방문한 지역 또한 나가사키이다. 1549년 동양 선교의 선구자인 프란치스코 자비엘 신부는 日本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그가 日本 땅을 밟은 곳은 지금의 나가사키縣 히라도市이다. 자비엘 신부는 짧은 日本 체류 기간 동안 기독교를 전파했다.
이듬해인 1550년 히라도港을 통해 포르투갈船이 들어왔다. 이 선박은 日本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선박으로 기록됐다. 1571년 나가사키港은 포르투갈의 무역항으로 開港한다. 이후 日本은 나가사키를 통해 대량의 서양문화을 받아들였다. 네덜란드ㆍ중국 商人들도 이 곳을 드나들었다.
1641년 네덜란드 무역관이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 설립됐다. 데지마는 나가사키市의 남쪽에 위치한 면적 1만3000평방미터 정도의 부채형 인공섬이다. 이 곳은 17세기 에도 시대 당시 鎖國政策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무역상대국이었던 네덜란드人의 거류지로 성장해갔다. 이곳은 19세기 日本이 개국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서양과 통했던 유일한 창구였다.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서양문물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다음과 같다.
<해시계, 사진기, 통조림, 활판인쇄, 영자신문, 유리세공, 서양의학, 기구, 배드민턴, 당구, 철도, 카스테라, 빵, 커피, 맥주, 안경, 벽돌, 시계>
나가사키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랑가쿠(蘭學ㆍ난학)이다. 18세기 日本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도입, 思想 측면에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이러한 물결은 네덜란드(和蘭)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학문은 蘭學이라 불렸으며, 洋學(양학)이라고도 했다. 쇼군의 실학 장려로 蘭學은 급속히 전파됐으며, 서양의 의학ㆍ천문학ㆍ지리학 등이 특히 발전했다.
일행은 첫날 숙소인 뉴나가사키 호텔(WWW.NEWNAGA.COM)에 여장을 풀었다. 13층 높이의 이 호텔은 나가사키市에서 비교적 고급호텔(1泊 평균 2만 4000엔)에 속하는 편이라고 한다. 인근에 나가사키 市廳과 나가사키驛이 있어 나가시키市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호텔 앞쪽으로는 「진친 전차」라고 불리는 路上전차가 5분 간격으로 달리고 있었다.
시마바라 시내에 있는 시마바라성.
일행은 호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로 日本 정식을 택했다. 飯酒로 대나무통에 담긴 정종을 몇 잔 기울였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호텔 주위를 돌아봤다. 밤 9시가 지나자 호텔 주변은 나가사키市의 중심부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대부분의 酒店은 문을 닫았다. 일행인 황일휘 씨는 『인건비가 너무 비싸 대부분의 가게가 일찍 문을 닫는다』고 했다. 사람의 손이 가는 것은 한국과 비교해 상당히 비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日本에서 夜景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나가사키市의 밤거리는 유흥가에서 내뿜는 요란한 네온사인이 아니라 도로와 건물 그리고 일반 주택에서 발하는 빛의 조화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2월16일 오전 일행은 사세보市 동남쪽의 오무라灣 일대에 펼쳐져 있는 테마공원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로 향했다. 하우스텐보스는 「숲속의 집」을 뜻하는 네덜란드語로 152만 평방미터(약 46만평)의 부지 위에 17세기의 네덜란드 거리 모습을 再現(재현)하고 있다. 공원 內에는 수십만 그루의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으며, 다양한 가게와 레스토랑, 극장, 박물관, 오락시설 등이 있다. 최고급 호텔과 별장도 함께 갖추고 있다. 1人 입장료는 어른의 경우 3200엔으로 조금 비싼 편이다.
일행은 하우스텐보스 국제영업부에서 근무하는 한국人 이정은 씨와 유학생 배인자 씨의 통역서비스를 받으며 하우스텐보스 일대를 둘러봤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女王이 살고 있는 궁전을 충실하게 再現한 「팰리스 하우스텐보스」. 하우스텐보스의 상징이기도 한 이 궁전은 건물조형은 물론 건축자재까지 네덜란드에서 직수입해 만들었다. 물론 하우스텐보스 內의 모든 건물에 들어간 벽돌과 자갈 등도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운젠다케 재해기념관 내부광경. 바닥의 붉은 부분은 화산폭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습이다.
궁전 내부에는 미술관과 日本 최대의 「벽화의 방」이 있다. 벽화의 방은 네덜란드 예술가인 톱 스왈테와 40人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4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벽화의 광대한 규모가 압권이다. 건물 뒤편에는 18세기 프랑스人 다니엘 말로가 왕궁을 위해 설계했던 「바로크식 정원」이 초기 설계도대로 조성돼 있다.
하우스텐보스 內에 있는 유리박물관 또한 볼만하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로부터 전해진 유리는 이곳 나가사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나가사키 지방 사람들은 유리를 「기어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기어만은 다이아몬드를 뜻하는 네덜란드語이다. 당시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유리의 장식기법 중 하나가 다이아몬드 포인트였다. 이 때문에 日本人들은 유리를 「기어만」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전시실에는 유럽 각지로 널리 퍼진 유리와 중세 베네치아의 작품 등 총 70여점이 전시돼 있다.
도자기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다. 16~18세기에 中國과 日本의 도자기는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전해졌다. 하우스텐보스의 인근에는 日本 내 최대 도자기 생산지인 아리타가 있었다. 아리타로부터 17~18세기에 걸쳐 막대한 양의 도자기가 네덜란드연합동인회사에 의해 수출됐다. 이 도자기들은 「이마리」로 불려지면서, 유럽 도예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獨逸의 마이센 도자기를 비롯한 유럽 도자기는 「이마리」를 과학적으로 분석, 연구해 나온 성과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도예기술은 백제, 조선에서 건너간 도예인들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우스텐보스의 또하나의 즐거움은 야간 입장객을 위한 레이져 쇼와 불꽃놀이다. 매일 밤 9시부터 약 20분 동안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벤트는 하우스텐보스의 밤을 오색 불꽃으로 채색하고 있다.
일행은 하우스텐보스 內에 위치한 「호텔 덴하그」에서 두번 째 밤을 보냈다. 하우스텐보스에는 한국人 유학생들이 곳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語 서비스를 손쉽게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하우스텐보스 국제영업부의 매너저인 켄지 카지하라 씨는 『한국人 관광객이 이 곳을 찾는 수는 매년 1000명 정도』라고 밝혔다. 국제영업부 이정은 씨는 『한국의 테마공원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편이지만 자연과 함께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관광코스』라고 말했다.
시마바라성 인근에 있는 무사의 집.
12월17일 일행은 나가사키縣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시마바라(島原) 반도로 향했다. 성곽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사마바라의 歷史는 1618년 다이묘(大名)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시마바라城 착공에서 시작된다. 7년에 걸쳐 완성된 이 城은 시마바라 반도의 행정, 경제의 중심이 됐다.
다이묘(大名)란 에도 시대의 바쿠한(幕藩) 체제 下의 藩主(번주)를 일컫는 말이다. 日本의 근대사회는 바쿠한 체제의 사회라고 할 만큼 幕府(막부)와 藩(번)으로 구성된 견고한 봉건지배 체제였다. 봉건사회의 기본적인 계급관계는 봉건영주층과 농민층이었는데, 日本의 근대사회는 농민층에 대립관계에 있던 봉건영주층이 바쿠한 체제로 강하게 결속돼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앙에 쇼군이 지배하는 幕府가 있고, 지방에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다이묘가 지배하는 藩이 존재했다. 이 두 개의 세력이 결합해 日本사회를 지배했던 것이다.
시마바라市 상공관광과 직원 카네코 씨와 부산시청 공무원으로 현재 나가사키縣廳(현청ㆍ우리나라의 道廳에 해당)에 파견돼 있는 김영욱씨의 도움을 받으며 시마바라 반도 일대를 구경했다.
우선 시마바라의 다이묘(大名)인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발휘해 건축한 시마바라城을 찾았다. 현재 이 城은 천주교 사료관, 관광 부흥기념관, 민속 자료관 등 교육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에도시대 당시의 무사가 착용했던 갑옷. 시마바라성 내에 전시돼 있는 것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기자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城의 3층에 전시돼 있는 1600년대 초 에도 시대의 武士(무사)들이 입었던 갑옷이었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 倭軍이 조선을 쳐들어올 때 착용한 전투복과 유사한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섬뜩했다. 武士는 150~6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체구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칼ㆍ활 그리고 조총으로 무장한 채 한반도를 「먹겠다」는 탐욕이 武士의 갑옷 속에 스며 있는 것 같았다.
카네코씨는 『당시 갑옷을 대대로 보존해오던 사람으로부터 기증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욱씨는 『日本 사람들의 역사 보존 의식은 대단하다』면서 『작은 것이라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그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행은 시마바라城에서 동쪽 해변가로 30분 가량 차로 달려 운젠다케 재해기념관에 도착했다. 이 기념관은 국립공원 운젠의 主峰(주봉)인 후겐다케가 198년만에 분화활동을 시작한 이후 1996년 6월 大분화 당시 44명(취재기자 20명을 포함해 경찰관, 자위대원)의 목숨을 앗아간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규슈호텔 뒤쪽에 위치한 운젠지옥. 하얀 수증기가 지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지옥이라는 부른다고 한다.
재해기념관 관계자는 『당시 화산 폭발에 의해 토사가 내려와 주택가를 삼킨 지역을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화산의 위력을 실감하고 후세에 자연재해를 대비하는 교훈으로 전달하고자 기념관을 건립했다』고 밝혔다. 2002년 7월 완공된 재해기념관은 2003년 12월 현재 55만2100여명의 내국인이 이 곳을 다녀갔다. 기념관 건립에 들어간 비용은 한화로 470억원이라고 한다. 재해기념관은 日本 內에서 유일하게 화산재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행은 日本여행의 마지막 밤을 묵을 규슈호텔로 향했다. 시마바라 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규슈호텔은 日本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운젠(雲仙) 온천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운젠 온천은 천년 이상의 歷史를 지닌 곳으로 지금도 활발하게 수증기를 뿜어내는 온천이 곳곳에 있다. 이 곳은 유황성분이 풍부해 피부질환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운젠 온천의 가운데에 있는 운젠 지옥은 이 곳을 대표하는 관광의 名所(명소)이다. 하얀연기가 일고 있는 火口(화구) 언덕에 길이 만들어져 있어 地熱(지열)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다.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이 지옥과 같다고 해서 「지옥」이라는 말이 붙여졌다고 한다. 地熱을 이용해 삶은 온천달걀(1개 200엔)이 名物(명물)이다.
규슈호텔의 오카미(女將ㆍ日本의 경우 호텔 경영은 사장의 부인이 주로 맡으며 그 女주인을 부르는 말) 시치조 유키코씨가 日本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일행을 만갑게 맞이했다. 이 호텔은 운젠 지역에서 두번 째로 오래된 호텔로서 現 사장이 설립자의 4代孫이라고 한다. 유키코씨는 『1917년에 설립된 규슈호텔은 日本 전통 가옥을 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호텔』이라고 강조했다.
호텔 內에 있는 천연유황온천에서 旅毒(여독)을 푼 일행은 규슈호텔이 자랑하는 동서양 퓨전음식을 저녁식사 겸해서 들었다. 음식 맛이 깔끔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규슈호텔의 女주인 유키코씨가 『술 한잔 대접하겠다』고 했다. 일행은 호텔 2층에 위치한 「빠 에스페란스」에서 기린 맥주와 日本 술을 몇 잔 걸쳤다. 보기 드문 美貌(미모)의 女주인은 마음씨 또한 호탕했다. 日本 여행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키코 씨는 3일 동안 일행을 가이드해 온 나가사키縣 관광연맹 소속 마츠오씨의 고교동창이자 막역한 친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