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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完이 만난 사람] 명창 安淑善

『평생「소리의 멍에」를 지고 먼 길을 가는 게 소리꾼의 삶』

김태완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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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만 잘하고 발림을 못 하면 어릿광대죠.
천군만마가 뛰어가듯, 천길 벼랑에서 물이 떨어지듯 훔치고 잡아 떼어 관객을 울고 웃게 하는 게 판소리입니다』


安淑善
1949년 전북 남원 출생. 강도근·김소희·박귀희·박봉술·정광수·성우향에게 사사. 남원 전국명창대회 대통령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한국방송대상,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예능보유자로 지정. 프랑스 문화훈장,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상.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전임교수.
몸에 칭칭 감겨 드는 맛
  「춘향가」는 어느 대목이랄 것 없이 노래 속에 잡아끄는 절절함이 있다. 그중에서도 名唱(명창) 安淑善(안숙선·58)이 부른 「쑥대머리」편은 몸에 칭칭 감겨드는 맛이 야물딱지다 못해 서러울 정도다.
 
  『쑥대머리(쑥대처럼 흐트러진 머리칼) 鬼神形容(구신형용) 寂寞獄房(적막옥방)으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漢陽郎君(한양낭군) 보고지고…』
 
  목이 메어 작은 몸을 비틀어 짜는 그녀는 온몸이 소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쪽진 머리를 진저리 치며 쏟아 내는 절규에 관객들은 그저 탄식할 뿐이다.
 
  『내가 만일에 임을 못 보고 옥중 寃鬼(원귀)가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난 돌은 望夫石(망부석)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섰난 남근(나무는) 相思木(상사목)이 될 것이오. 生前死後(생전사후)으 이 원통을 알아줄 이 뉘 있으리. 아이고 답답한 내일이야…』
 
  인간문화재 安淑善은 가야금 병창(자신의 가야금 반주에 판소리 한 대목 또는 단가를 얹어 부르는 것) 예능 보유자다. 아홉 살부터 가야금 풍류와 단가를 익혔고 朴貴姬(박귀희) 선생의 제자가 돼 가야금 병창을 전수했다. 晩汀(만정) 金素姬(김소희) 선생 등 당대 내로라하는 스승에게 사사했다.
 
  작은 키에 심술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둥근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 저리도 천길 벼랑에 쏟아지는 소리를 내는지 의문이다. 아마도 그녀의 혓바닥 속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安淑善 선생을 만나기 위해 지난 3월3일 서울 세곡동에 있는 그녀의 자택을 찾았다. 마침 그녀가 「꼬맹이 제자」라고 부르는 여러 명이 엄숙하게 소리를 배우고 있었다. 말이 꼬맹이지 대학생이거나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국악계의 才媛(재원)들이었다.
 
  먼저 安선생이 제자 李鮮喜(이선희)씨를 불렀다.
 
  『선희, 빨리 와. 너부터 해』
 
  그녀는 현재 이화女大 音大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서울국악藝高에서 「진짜 꼬맹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安선생이 「춘향가」 중 옥중가 한 소절을 부르자 제자가 뒤이어 따라 부르는 식이다. 소리가 마뜩찮으면 한마디씩 한다.
 
  제자가 『一夜(일야)는~ 꿈을 비니(꾸니) 장유가 호접이 되고, 호접이 장유 되어…』하고 부르자, 스승은 『「비니」할 때 「비」 소리를 똑똑히 내』라고 했다. 제자가 『昇天入地(승천입지)허매 춘향의 꿈 혼백이 만리소상 강으로 갔던가 보더라』 하자, 스승은 『승천입지~ 할 때 있지. 올릴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런 식이야…』하고 한 소절 뽑는다.
 
 
  스승과 제자
 
   스승이 제자를 바라보는 눈길은 따스하지만 엄격함이 배어 있다. 당대 권위자를 스승으로 모시니 제자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스승 역시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는다고 한다.
 
  『소리를 먼저 들어 봐요.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지켜보면서 음악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봅니다. 그리고 사람도 봐야 되잖아요. 그 사람 됨됨이가 저와 안 맞으면 일단 고쳐 보죠. 「이것은 안 되고, 저건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못 견뎌서 나가는 이도 있죠. 물론 어느 정도 음악적 완성도가 있는 사람을 받지, 애기(초보자)는 안 받아요. 앞으로 우리 소리를 짊어질 사람에게 남은 시간을 쏟아야지,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은 서로 별로 도움이 안 되니까…』
 
  제자들은 스승을 어떻게 바라볼까. 李鮮喜씨의 말이다.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게 제가 중학교 3학년 되던 1992년이었습니다. 목포에서 자라 소리를 해오던 저는 서울로 오면서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됐어요. 첫 만남은 국립극장 소극장 연습실이었는데 선생님께서 소리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인연이 되어 벌써 16년째 배우고 있으나 한결같은 모습이셔요. 마주 보고 앉아 한 소절씩 따라 부르는 口傳心授(구전심수) 방식으로 배우다 보니, 선생님의 음색은 물론 다루새, 발림까지 닮아 가고 있어요』
 
  安淑善 선생의 친척인 강은경씨는 『듣기 싫은 소리들이 구성지게 변화되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명성이 있으신 만큼 모두가 어려워해요. 아마 존경심에 그렇겠죠. 하지만 다가갈수록 마음이 따뜻하시고 속이 참 깊으신 정이 많으신 분이랍니다. 어떨 땐 아기 같고 순수함이 차고 넘치는 분이셔요』
 
  중앙大 4학년인 鄭普炅(정보경·판소리 전공)씨는 스승을 「보물 보따리」에 비유했다.
 
  『선생님은 사랑 보따리와 소리 보따리를 풀어 주는 보물 보따리이십니다. 「소리도 중요하지만 제일 먼저 웃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바른 겸손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며 「매순간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요』
 
  용인大 4학년 김샛별(가야금 병창 전공)씨는 부산에서 가야금을 공부하다가 5년 전 상경, 문하에 들어왔다고 했다.
 
  『언젠가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신 적이 있어요. 그런 뒤 선생님이 저를 불러 자택 옥상에 올라가 세상 이야기를 들려 주셨어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조리 있게 말씀해 주셔서 제가 너무 죄송해졌습니다. 한번은 감기 몸살로 방에 누워 있는데 손수 감기약을 먹여 주시고 잠까지 재워 주셨어요』
 
안숙선 선생이 서울 세곡동 자택에서 제자 이선희씨에게「춘향가」중 옥중가 대목을 가르치고 있다.
 
  『「꾀목」 쓰지 말고 통성으로 질러, 질러』
 
만정 김소희 선생과 함께.
  安淑善 선생은 1949년 전북 남원 출생이다. 그녀가 소리를 하게 된 것은 필연이다. 남원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이자 「춘향가」와 「흥부가」가 태어난 곳이다. 게다가 외가 쪽은 당대 전국을 돌며 이름을 떨치던 藝人(예인) 집안이었다. 대금 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이 안숙선 선생 어머니의 사촌이며, 외삼촌은 「동편제」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이다. 이모는 가야금 명인인 강순영이다.
 
  『아홉 살 무렵, 이모님께서 제게 소리와 가야금을 가르치셨는데, 가난한 집안에 도움이 될까 생각하셨나 봐요. 이모님은 가야금·춤·소리를 모두 잘하는 팔방미인이셨죠.
 
  이모님 등을 두드려 드리고, 방도 닦아 드렸더니, 어느 날 가야금을 척 내려놓으시고 따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첫 시작이 됐어요. 손가락에 피가 나도 그만하라는 말씀이 없으셨어요. 가야금에 피가 흥건하게 묻었지만 그래도 시켰어요. 한집안끼리니 레슨비도 없이 배웠죠』
 
  그녀는 소리를 잘해 귀여움을 받았지만 직업삼아 판소리에 매달리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소리꾼의 삶은 그저 고달프고 궁하며 천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신식 여인」이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스승의 소리를 따라 하면서 소리가 너무 처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잖아요. 좀 고상하게 살고 싶고, 아름답게 소리를 내고 싶었어요. 소리를 있는 대로 지르는 것이, 마치 몸부림 치는 것 같아 속으로 「저렇게 안 할 순 없을까」 생각했죠. 소리를 질러야 할 대목엔 그냥 假聲(가성)을 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스승에게 「꾀목」을 쓴다고 혼이 났었죠. 「꾀목을 쓰지 말고 통성으로 질러, 질러」 하셨어요』
 
 
  기쁨보다 슬픔을 소리로 표현하는 맛이 더 달다
 
   「꾀목」이란 소리를 끌어올리는 통성이 아닌 겉치레 발성을 뜻한다.
 
  이모는 그녀에게 한마을에 살던 주광덕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선생은 그녀를 보자마자 「심청가」의 한 대목을 따라 해 보라고 했다.
 
  『둥둥둥 내 딸이야. 어허둥둥 내 딸이야. 금을 준들 너를 사며 옥을 준들 너를 사랴. 백미 닷 섬에 뉘 하나 열 소경에 한 막대로구나…』
 
  얼마나 질기고 구성진 목소리인지 어린 소녀의 심금을 울렸다. 선생은 곧잘 「기쁨보다 슬픔을 소리로 표현하는 맛이 더 달다」고 했다.
 
  『그 말뜻을 열 살 때 깨달았어요. 제자가 된 지 1년도 채 안 돼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였습니다. 태어나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어요. 상여가 나가는 날엔 제가 하도 발버둥을 치고 울어 대서 저러다 어린 것도 따라 죽겠다고 어머니가 큰 걱정을 하셨어요』
 
  슬픔을 담은 소리를 내기 위해 소리의 大家(대가)들은 슬픔을 터뜨리지 않는다고 한다. 슬픔을 담기 위해 슬픔을 터뜨리지 않는 절제가 슬픔을 담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슬픔이 고통스럽지 않고 달디 단 것은 슬픔이 갖는 치유능력 때문이다. 슬픔은 고통을 온전히 쓸어안는 사랑이다.
 
 
  스승, 스승들
 
판소리「심청가」를 재구성한 창극「효녀심청」공연.
  남원의 「애기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던 安淑善 선생은 1970년 남원에서 상경, 晩汀 金素姬(1917~ 1995) 선생의 문하에 들어간다. 일찌감치 여러 스승이 그녀를 탐냈지만 어머니는 맏딸을 보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제가 소리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너무 힘드니까 안 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그때는 새벽 기차 타고 전국 예술제를 돌아다녔는데, 어머니는 그 새벽에 일어나 기필코 밥을 해 먹이고 열차에 저를 태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플랫폼에 앉아 우셨어요.
 
  예술제에 가면 여러 스승들이 절 데려 가려 하셨어요. 國劇(국극)을 하셨던 김연수 선생님은 초콜릿을 사주시면서 「나 따라가자」고 하셨어요. 남원까지 오셔서 심청이를 시키겠다고 하셨어요』
 
  그녀는 가야금을 타던 동생 안옥선(현재 중앙大 겸임교수)씨와 함께 상경, 晩汀 선생을 뵙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晩汀은 당시 여류명창으로 한국 국악계의 최고봉이었다. 소리만이 아니라 예의범절이 깍듯해 생전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작고한 안향련·김동애를 비롯해 성창순·신영희·박윤초(晩汀의 친딸)·남해석·이명희 등 명창들을 길러낸 것이다. 다음은 安淑善의 회고록(경향신문 1996년 3월14일자)의 일부다.
 
  <지금도 상경한 첫날의 서울역 밤품경이 눈에 선하다. 어느 조그만 다방 안에서 선생은 따님인 박윤초 언니와 함께 우리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히 쪽진 머리에 엄해 보이기만 하던 눈매…
 
  우리는 반드시 한복을 단정히 차려 입고 수업에 임했다. 옷매무새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꾸중을 들었다. 밥먹는 예절까지 일일이 참견하셨다. 나는 밥 먹을 때만 되면 걱정이 되어 한동안 소화불량에 걸리기도 했다>
 
  『晩汀 선생의 소리연습은 혹독했어요. 소리는 단순히 목으로만 하는 게 아니었어요. 손끝·발끝·머리끝으로부터 氣(기)를 모아 힘찬 뱃심으로 밀어올려야 했어요.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지요.
 
  「이것들아 언제까지 때까치마냥 입으로만 딸싹딸싹 부를래. 기를 모아야지 기를!」』
 
 
  朴貴姬·金素姬 두 스승의 사랑
 
  첫 서울생활이 즐겁지는 않았다. 晩汀 선생 곁에만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계를 잇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서울에서 생활을 해야 되겠고 해서 지금의 워커힐인 국제관광공사의 「가야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당시로선 유일하게 공연할 수 있었던 곳이었어요. 오디션을 거쳐 뽑혔는데, 판소리·가야금 병창을 하고, 민요도 불렀어요. 그땐 김세레나처럼 불렀죠. 오전에는 晩汀 선생에게 배우고 오후 4시쯤 버스 타고 출근해 공연하고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설날 하루 빼고 1년 내내 공연해야 했죠』
 
  상경한 지 얼마 뒤 무형문화재이자 가야금 병창, 창극, 민속춤에 조예가 깊었던 朴貴姬(1921~1993) 선생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朴선생은 나이 많은 선배들을 뒤로 하고 그녀를 가야금 병창 전수자로 택했다. 金素姬 선생이 서운해한 것은 당연했다. 그녀를 자신의 제자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朴貴姬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를 전수생으로 지목하셨어요. 당시 선생은 충무로에 학원이 있었는데, 연습이 끝나면 제 손을 잡고 비원까지 한 바퀴 휙 도시며 이 얘기 저 얘기 하시곤 했어요. 그 뒤 晩汀 선생과 같은 건물로 옮기셨는데, 공부하다가 새참 잡수실 때면 제자들에게 「숙선이하고 둘이 먹을라니께 달걀 두 개 삶고 토스트 2인분 구워 놔라」 하셨어요.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두 스승이 제자를 두고 「사랑다툼」을 한 일도 있다. 언젠가 천재 명창 안향련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장지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었다. 물 웅덩이가 군데군데 파였기에 晩汀 선생을 부축해 드렸더니 朴貴姬 선생이 한참 뒤에 「너는 어째 형님만 부축하고… 나도 너무 슬펐는데 난 안 부축하고, 섭섭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어르신들도 이런 일에 시샘하시나 싶어 한참을 혼자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朴貴姬 선생의 전수생이 되면서 晩汀 선생과의 인연이 끊어질까 걱정한 일이 있다. 그러나 晩汀은 어린 그녀를 이해했다. 물론 晩汀의 판소리 가르침도 계속됐고 꾸지람도 그치지 않았다. 여전히 제자로 받아 준 것이다.
 
  安淑善은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국악계의 「프리마 돈나」로 자리 잡는다. 金素姬·朴貴姬 선생 외에 당대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 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KBS 국악대상을, 1993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得音(득음)을 이룬 것이다.
 
 
  得音의 길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평생 가야할 길이라고 느꼈어요. 제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많은 스승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국립극장장이셨던 허규 선생이 단원들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인간문화재 스승들을 차례로 모셔 학습을 시켰습니다.
 
  정광수·정권진·박봉술·성우향 선생에게 소리를 제대로 배운 겁니다. 신기하게 느낀 건 그분들이 똑같은 「춘향가」, 「심청가」를 부르는데 색깔이 모두 달랐어요. 진짜 보물 같다는 생각을 했죠. 그분들이 전수하지 않고 돌아가시면 우리나라의 보물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욕심이 생겼어요』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저마다 더늠(개성적인 창법)을 가진 스승에게서 다양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꾀목」도 부리지 않았다. 가슴 속 恨(한)을 뿜어 냈다. 박봉술 선생에게 「적벽가」, 정광수 선생에게 「수궁가」, 성우향 선생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나이 서른이 넘자 그녀는 각 스승들의 소리 더늠을 분간할 수 있게 됐고 자신만의 개성을 가질 수 있었다. 安淑善이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완창(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것)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다.
 
  『돌아가신 김동준 선생은 잊을 수 없어요. 그분은 원래 소리꾼이셨지만 목소리가 안 나와 북을 치셨어요. 워낙 소리도, 북도 타고나신 분이어서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그분이 제게 「밤이나 낮이나 소리를 하라. 소리를 입에서 떼지 말라」고 하셨죠. 명창 오정숙 선생은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1시간 이상은 꼭 소리를 해야 되네」 하셨어요. 그때부터 막 소리를 질렀죠. 한번은 더운 여름날 문을 열어 놓고 소리를 하는데, 사람들이 「돈 여자 아닌가」 하고 쳐다봐요. 미치다시피 그렇게 질렀죠』
 
  安淑善은 지난해 5월11일 서울大 초청 강연에서 득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득음을 해야 하며 득음을 한 번 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소리라는 것이 이틀만 안 하면 녹이 슬어 버리기 때문에 가속도를 내기 위해 더 뛰어야 한다>
 
  득음은 소리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제가 생각하는 득음은 좀 달라요. 소리만 나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소리에 대한 공력을 쌓지 않으면 안 돼요. 살아가면서 의미를 깨닫게 되고, 하면 할수록 느껴지고 자꾸만 소리에 대한 갈증이 생겨나게 돼요. 마치 그릇이 채워지듯이…』
 
 
  인물치레는 사람의 됨됨이
 
   ―득음을 한 뒤에도 계속 연습을 해야 하나요.
 
  『한 번 득음을 했다고 해서 놔두면 녹이 슬어 버려요. 다시 그 소리를 찾기 위해 힘을 올려붙여 한꺼번에 쏟아 내도 안 됩니다. 소리꾼은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돼요. 일생 동안 「소리 멍에」를 지고 먼 길을 가야 하는 법이지요. 前生(전생)의 業(업)을 지고 가는 거죠. 편하게 살아선 안 되는 게 바로 소리라니까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요. 「그냥 노래를 부르면 되지」 하고. 하지만 그게 단순한 노래가 아니잖아요』
 
  ―명창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申在孝(신재효) 선생 말씀이 「광대는 첫째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며 인물치레를 첫머리로 꼽았습니다. 얼굴이 잘나기도 해야 하지만, 단순히 용모의 준수함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춰야 할 인격, 올바른 인생관까지를 인물치레라고 봐요.
 
  판소리 어느 대목이 삶에 지친 사람에게 괴로움을 씻어 주고, 기쁨을 나눠 줍니다. 판소리 속에는 한국 사람의 심성이 담겨 있어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무엇을 중시했으며, 어떻게 살고자 했는지 전부 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소리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요즘 음악은 어떤가요.
 
  『너무 빨라가지고… 현대음악은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만, 판소리는 「이것이 옳지만 그를 수도 있다」는 식입니다. 빨리 달성해야 된다는 것이 상업주의잖아요. 돈을 빨리 벌어야 한다? 돈이 뭔가요. 우리가 만나 즐겁고 재밌게 만드는 과정이 소리여야 하지 않나요? 빨리 달려가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삶이 묻어나는 소리
 
  서양음악도 마찬가지지만, 판소리 역시 삶이 쌓이지 않으면 깊이를 알 수 없다. 「남원의 애기명창」 역시 세월이 갈수록 그 소리가 깊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릴 때는 힘으로 불러요. 하늘을 찌를 듯한 힘은 나이 먹어 가질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이런 얘기가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짚신을 삼아 시장에 내다 팔면 아버지 것만 팔리는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지만 묵묵부답이셨죠. 아버지가 병이 들어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들이 다시 비법을 묻자 아버지는 그냥 「털,털,털」 하다 꼴까닥했다는 겁니다.
 
  처음엔 그 뜻을 알 수 없었으나 아들이 문득 깨달은 「털」의 비밀은 이것이었어요. 아버지는 짚신에서 삐져 나온 볏짚 한 오라기까지 정성껏 마감질했다는 겁니다. 짚신 만드는 원리는 하나지만, 힘만으로 안 되는 법이지요. 어떨 때는 소리를 밑에서 둥글게 올리고, 어떨 때는 착 쳐서 띄웁니다. 애기(그녀는 자신의 문하생들을 그렇게 불렀다)들은 아직 뭔지 모르죠』
 
  ―젊은 시절과 지금의 소리가 얼마나 다릅니까.
 
  『애기명창 시절에는 인생의 의미도 모르고, 소리의 의미도 모른 채 그냥 음악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소리라는 것이 인생을 알아 가며 깊이를 더하는 것 같아요. 그때는 제대로 된 소리가 아니라, 그려 내는 소리로만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천진스러운소리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어떻게 변해갈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저를 가르친 스승들은 나이가 80, 90세가 넘어 비록 기운은 없으셨지만, 소리를 가지고 공을 차듯 노셨어요. 정말 자(尺)로 잴 수 없는 것이어서 자신만이 터득한 세상을 펼쳐 놓으셨어요』
 
  ―첫 리코딩은 언제 하셨나요.
 
  『1973년쯤일 겁니다. 판소리로만 음반을 낼 수 없는 시대여서 남도민요를 가지고 3집까지 냈어요. 그때는 소리가 예쁘고, 애원성이 있었습니다. 동생 옥선이와 TV 출연이 잦았죠. 지금 그 소릴 들어 보면, 모기가 앵앵거리는 듯한 아이 소리지요. 아무런 뜻도, 감흥도 없이 예쁜 소리만 내는 소리였지요(웃음)』
 
 
  完唱
 
  ―판소리 맛이란 어떤 것인가요.
 
  『소리만 잘하고 발림(소리의 가락이나 사설의 내용에 따라 손·발을 움직여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을 못 하면 어릿광대죠. 천군만마가 뛰어가듯, 천길 벼랑에서 물이 떨어지듯, 훔치고 잡아 떼어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드는 게 판소리입니다』
 
  安淑善 선생은 2003년 7월19일 미국 뉴욕 링컨센터 페스티벌에서 5시간30분 동안 「춘향가」를 完唱(완창)했다. 세계 각국 예술가를 초청해 열리는 링컨센터 페스티벌에 판소리가 처음으로 공식 초청된 것이다. 김수연·조통달·김영자·김일구 등 명창과 함께 닷새 동안 판소리 5바탕을 완창했다. 링컨센터의 나이젤 레든 예술감독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라고 판소리를 평가했다.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레든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安淑善의) 그 독창성과 엄청난 예술혼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말을 전혀 못 합니다.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단 한 명의 唱者(창자)가 5시간 넘게 무대를 이끌어 간다는 게 믿기지 않더군요. 관객들과 그토록 가깝게 호흡하는 예술 장르를 지금껏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회고다.
 
  『소리하는 삶을 후회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요. 또 제 음악을 들려 드렸을 때 행복해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던 관객들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볼 때 음악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외국 교민들 중 「우리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됐다」고 말해 주는 분이 있어요. 당시 뉴욕공연에서 외국인들이 저를 「쇼 케이스에 넣고 다니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네들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입니다』
 
 
  관객은 「귀 명창」
 
   ―언제부터 판소리 5바탕 완창을 하셨나요(판소리 5바탕이란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를 뜻한다).
 
  『요즘은 많이 합니다만, 19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간 다음부터 완창이란 게 생겨났어요. 저는 1986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제 앞으로 오정숙·박동진 선생이 먼저 5바탕 완창을 하셨는데, 그것이 판소리를 보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교과서를 떼는 기분으로 5바탕을 불렀습니다. 지금은 5바탕 완창이 거의 기본이 됐어요. 과거에는 소리 어른들이 5바탕을 다 떼야 한다고 한 적은 없었거든요』
 
  安淑善 선생은 1986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판소리 5바탕을 완창하는 공연을 가졌다. 한 바탕에 3~7시간씩 걸리니 최소 20시간이 넘게 걸리는 공연이었다. 말이 완창이지 唱者의 모든 것을 쏟아 내야 가능하다. 판소리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 역할은 물론이고 상황설명에 개 짖는 소리까지 혼자서 해야 한다.
 
  『「흥부가」·「적벽가」·「수궁가」는 3시간 정도지만, 「심청가」는 5시간, 「춘향가」는 7시간까지도 합니다. 관객들도 지치지요. 사실 관객은 소리꾼과 마찬가지입니다. 판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 끝까지 객석에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소리를 듣는 「귀 명창」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관객은 소리꾼이 소리를 하도록 이끌어 줘요. 唱者가 지친 듯하면 막 소리를 질러 기운을 돋우고, 실수를 하면 오히려 박수를 쳐줍니다. 소리꾼을 향해 「그래서」, 「그랬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라고 재촉을 하지요. 그런 소리를 이해 못 하는 관객은 오래 버틸 수 없죠』
 
  1998년 프랑스 아비뇽 축제에 초청, 이매방의 승무, 김덕수패의 사물놀이와 함께 그녀는 「춘향가」를 불러 현지 언론으로부터 『천상의 소리』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가는 곳마다 매진사례를 이뤘다. 그 덕에 프랑스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그녀의 인기가 높았던 것은 스승의 예술혼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金素姬 선생은 1962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9회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해 절규하는 동양의 소리를 알렸다. 작고하기 전 프랑스에서 8시간짜리 「춘향가」 완창을 공연해 현지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공연 중 화장실도 안 가는 것을 에티켓으로 삼는 프랑스인들이 오줌보를 움켜쥐고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프랑스에 많이 갔지만 제가 단독으로 공연한 것은 1988년입니다. 우리 문화를 알리는 차원에서 조통달씨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돌아가신 김동진 선생이 북을 치셨어요. 프랑스에는 晩汀 선생님의 팬들이 많으셨어요. 스승 때문에 판소리를 이해하는 프랑스인이 제법 많았던 것이죠. 그때 윤이상 선생을 뵈었지요. 제 노래를 들으시고 「현대적인 판소리 느낌이 난다」고 하셨죠. 그때부터 계속 제 소리를 들었다는 분도 계셨어요. 프랑스 문화훈장은 아비뇽 축제 때 초청받아 이매방 선생과 함께 받았지요』
 
 
  절제된 오페라
 
   판소리는 절제된 1인칭 오페라다. 서양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노래하고 울고 웃으며 연기도 하고, 심지어 개 짖는 소리, 바람 소리도 낸다. 소품은 부채 하나, 북이 전부다.
 
  『서양 오페라도 길지만, 중간 중간에 악기 연주도 하고 여러 명이 함께 공연하잖아요. 판소리는 한 사람이 끝까지 혼자서 다 합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쏟지요. 사설 내용을 들을 때 관객들이 그 소리에 빨려들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온몸을 다 짜내야 해요. 온몸을 쓰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나오는 법이지요. 그러니 「소리병」을 앓을 수밖에 없지요. 제일 많이 다치는 곳이 호흡기 쪽이고, 온몸이 결리는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완창을 하고 나면 심한 「소리골병」이 든다. 온몸의 기를 뽑아 내는 것이 소리이니 어쩔 수 없다.
 
  『판소리는 악보가 없어요. 음계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오히려 5선보대로 하면 맛이 안 납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음역이 다양해질 수 있죠. 영감이나 느낌을 그대로 말하듯 음악적으로 표현해야지 악보를 보듯 눈에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 오페라의 경우 음역에 따라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가 있지만 판소리는 어떻게 나뉘나요.
 
  『명창들은 하나같이 엄청 옥타브가 높아요. 음의 변화나 기복이 심하지만 음계는 정확하답니다. 판소리를 해부하면 그 음 속에 과학적인 엄격함이 있다고 해요. 음을 어디서 떨어야 하고, 어디서 졸라 떼야 되며, 어디서 밀어야 하는지, 특정 음에 딱 꽂히는 게 아니라 밀어 올려서 그 음까지 가야 하거나, 혹은 위에서 떨어뜨려서 내려가는, 그 과정이 판소리입니다』
 
  ―과거엔 「동편제」와 「서편제」의 구분이 확연했지만 개성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동·서편제 구분이 엄격했죠. 소리꾼들이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잖아요. 그러니, 자기만의 독특한 소리를 지켰죠. 혹시나 알려고 하면, 그쪽에 몰래 가서 음악을 듣고 자기 것을 싹 만들었어요. 하지만 요즘 들어 느낌만 다를 뿐 똑같이 불러요.
 
  어느 대목에서 조금이라도 원칙에서 벗어나면 판소리 발전을 막는다고 봐요. 교과서처럼 돼 있어 걱정이에요. 소리를 모르는 분이 들으실 때는 똑같이 들리겠지만, 소리는 목을 확 잡아당기는 맛이 다르죠. 같은 곡이라도 슬픔을 절제하는 맛, 늘어 놔서 가슴 아프게 만드는 식으로 말입니다. 「서편제」는 화려하게 쑤시고 졸라 떼는 식이죠』
 
 
  가족 이야기
 
  남원국악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그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예술제를 찾았다. 광주로, 전주로, 밀양으로 국악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면 남원 소리꾼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일찍부터 스타였던 만큼 많은 선물과 연애편지를 받았다. 지금의 남편 崔相昊(최상호·63)씨는 그중 하나였다. 安淑善이 열여섯 살 무렵, 진주 개천예술제에서 처음 만났다.
 
  『(남편은) 그때 방자 연기를 하는 제 모습에 반했다고 해요. 공연이 끝난 뒤 대금을 부셨던 제 외삼촌(강백천)에게 다가가 「방자 꼬마」를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해요. 외삼촌은 대신 남원국악원 주소를 알려 줬답니다. 편지를 보냈는데 글씨가 참 좋았어요. 그 편지를 친구에게 보여 주기도 했지요』
 
  이듬해 다시 진주 개천예술제에 참여했다. 영화배우 율 브리너같이 생긴 이가 찾아왔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눈썹이 짙어서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의 친구였다. 촉석루에서 처음 만난 남편은 티셔츠에 삼베바지를 입은 「한심한」 차림이었다.
 
  『율 브리너같이 생긴 친구가 사진기를 빌려 오겠다고 하더군요. 서로 말 없이 있는 게 불편해서 가겠다고 하니 남편이 「아, 그렇십니꺼. 그만 들어가이소」 그래요. 말투가 우스웠지만 절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은 1973년 결혼했다. 남편은 이후 가발공장·식당·목축업·직물회사를 다니며 생계를 도맡았다. 그녀는 『남편은 절대 남의 폐를 끼치거나 가슴 아프게 할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월급쟁이를 그만두고 서울 신촌 부근에서 식당을 했는데 시어머니가 쓰러져 문을 닫았고, 한번은 젖소를 키우겠다고 牧夫(목부)가 된 적이 있어요. 언젠가 공연을 마치고 축사를 찾았더니 단소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쪽에서 젖소들이 어슬렁거리고, 그 옆에 남편이 앉아 피리를 불어요. 그 시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녀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모두 국악을 가르쳤지만 딸 최영훈씨만 어머니 뒤를 잇고 있다. 현재 국립창극단에 소속된 그녀는 어머니와 달리 거문고 산조를 연주하고 있다.
 
  『남편이 「한국 사람이라면 우리 악기를 다뤄야 한다」고 해서 자식들에게 해금을 시켜 보고 대학까지 보내 소리를 시켜 봤습니다. 하지만 匠人(장인)의 길이 쉽지 않잖아요. 확고한 신념과 목표가 없이 대강 한다면 시간낭비인 것을 제가 잘 알기에 「너 하고 싶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둬라」고 했죠. 사실 소리꾼이 소리만 하는 게 아니라 살면서 부대끼는 섬세함·예민함을 음악적으로 버텨 승화시켜야 하잖아요』
 
  ―따님은 판소리 대신 거문고를 하시네요.
 
 
  소리의 무거운 업보
 
  『판소리 하려는 것을 제가 말렸어요. 거문고는 다소곳이 연주하면 되는데, 판소리 唱者는 소리로 모든 역할을 해야 되잖아요. 본격 연기는 아닐지라도 비슷한 연기를 하며 소리를 불러야 해요. 느낌을 절제하면서 표현해야 되는데, 어지간한 비위 가지고 되겠느냐고… 어떻게 감당하겠나 싶어서…』
 
  부모의 마음은 매한가지다. 온몸으로 절규하듯 부르는 판소리를 내 자식이 하는 것은 차마 보기 싫었을 것이다. 그녀의 표현대로 소리의 무거운 업보를 자식이 짊어지게 할 수 없었다.
 
  『소리라는 어렵고 무거운 짐을 언제까지 짊어져야 할지, 늘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게을리 할 수 없는 수련의 고통, 무대 뒤에서 나를 짓누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언제까지 감당해야 할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멍에를 지고 소리를 하는 수밖에요. 그게 제 삶이니까요』●
 
  〈진행·이상희 月刊朝鮮 조사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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