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3일) ‘군대에서 100일 휴가를 없앤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100일 휴가’란 입대한지 100일이 될 쯤 4박5일간의 위로휴가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작년 2월부터 훈련소를 마친 신병이 자대배치를 받은 다음 주부터 외출 외박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100일 휴가를 따로 줄 필요가 없어서 이 휴가제도를 폐지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뉴스를 들으면서 군에서 ‘100일 휴가’란 제도가 공식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전에도 ‘100일 휴가’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것은 부대 내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포상 휴가제도인지 알았지, 국방부가 이를 제도적으로 운영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제가 군에서 첫 휴가를 나온 것은 입대 후 10개월 만입니다. 1992년 3월25일 입대한 저는 같은 해 12월 말에 첫 휴가를 나왔습니다. 꽃샘추위가 한창이고, 개나리 진달래가 막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할 때 입대해서, 눈이 한길 쌓인 도로를 걸어 나왔습니다. 사실상 4계절을 모두 군에서 맞았기 때문에 저는 마치 1년 만에 세상에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군생활 할 때 우리 부대에서 100일 쯤에 첫 휴가를 나갔던 이등병은 거의 없습니다. 극히 일부 병사가 입대 100일 갓 넘기고 휴가를 나간 적이 있었지만, 이는 정말 예외적인 경우라 군생활 통틀어서 손에 꼽을 만한 정도였습니다. 대신 우리 중대 인사계는 일병을 위주로 4박5일 간의 포상휴가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 부대에서 입대 후 바깥 바람 한번 쐬려면 최소한 6개월 이상 군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원래 군대 첫 정기휴가는 입대 10개월 째 받는 것이 규정입니다. 때문에 그 전에 가는 휴가는 글자 그대로 ‘포상휴가’ 차원이었고, 이는 중대 자체로 유연성 있게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사계는 엄격하게 포상휴가 제도를 관리해서 모든 사병들이 정기휴가 전에 웬만하면 포상휴가 한번 정도는 나갈 수 있게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중대원이 사단 태권도 대회나, 기타 체육대회 등에서 단체로 딴 포상휴가증이나, 병장들이 개인적으로 중대장 등에게 받은 포상휴가증은 인사계가 모두 거두어, 중대원들에게 적절하게 배분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인사계의 이런 포상휴가 제도 운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인사계의 공정한 포상휴가 운영 덕분에 우리 중대원들은 누구는 휴가를 여러 번 가는데 누구는 한 번도 못가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포상휴가에 이등병이 끼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등병은 글자그대로 군대에 적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함부로 휴가를 보내어 기분을 들뜨게 하면 사고가 나거나 군생활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인사계의 생각 같았습니다. 때문에 포상휴가는 주로 일병들이나, 상병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입대한 지 10개월이 되도록 남들 다가는 포상휴가를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사계는 제가 이등병 때 휴가를 한번 갔다 온 것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에 저를 아예 휴가 대상에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대한 지 두 달 정도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인사계가 갑자기 저를 행정반으로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최고참 행정병을 불러서 “야! 이상흔이 포상휴가 보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등병이 포상휴가를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부대 상황에서 그것도 입대한 지 두 달도 안 된 저를 앞에 두고 포상휴가를 언급했으니 놀랄 만도 했습니다.
행정병은 “아직 입대 100일도 안 된 신병입니다”하고 인사계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인사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 아직 100일도 안 되었다고?”하더니 “그럼 100일 넘으면 나한테 보고해서 휴가 보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등병을 휴가 보낼 수 있는 마지노 선이 입대 100일이었나 봅니다. 이때 제가 휴가를 갔으면 제가 아는 한 아마 우리 중대에서 입대 후 최 단시일 내 휴가를 간 사병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속으로 휴가는 따논 당상인 줄 알고, 무척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100일이 지나고, 이등병 생활이 끝나고, 일병을 달아도 저의 휴가 건은 언급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인사계는 제가 이등병 때 휴가를 다녀온 줄 착각 하고 있었습니다. 해당 행정병도 신병이 100일 만에 휴가를 간다는 것이 전례가 없었기 때문인지 그 후 인사계에게 제 휴가 건을 보고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입대 10개월 만에 정기휴가를 명받은 저는 인사계에게 휴가 보고를 하러 갔습니다. 인사계는 “이상흔이는 이번이 두 번 째 휴가지?”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첫 휴가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너 이등병 때 휴가 안 갔어?” 하며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인사계는 저를 상병 때 포상휴가를 한번 보내주었습니다.
사실 상병 포상휴가란 것도 병장 진급 전 후 해서 군생활 중에 누구나 한번 쯤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가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의 상병 포상휴가는 인사계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휴가 나오는 날 공교롭게도 우리 부대에 탈영병이 생겼습니다. 전례에 의하면 탈영병이 생기면 휴가는 자동으로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인사계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저를 곧바로 영외로 내보내 휴가에 차질이 없게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입대 두 달도 안 된 신병일 때 인사계가 저에게 휴가를 줘야 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사계는 정말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당시 10년 동안 우리 중대의 인사계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인사계는 10년 연속 한해도 빠짐없이 사단 장비지휘검열에서 우리 중대를 1등에 이름을 올린 사람입니다. 사단에 중대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그 많은 중대 중에 우리가 10년 연속 1등을 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가 장비지휘 검열을 얼마나 혹독하게 준비했는지 상상이 잘 안 가실 겁니다. 철모, 야삽, 군장의 페인트는 전부 사포로 반짝반짝 할 때까지 묵은 페인트를 모두 벗기고 새로 도색했습니다. 다른 중대는 보니까, 그냥 덧칠하는 정도거나, 페인트가 우둘투둘 한 곳만 사포질을 했습니다. 수백개가 넘는 중대의 철모, 야삽, 반합, 군장의 도색을 사포질로만 벗겨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지공사 나가서 녹초가 된 몸으로 잠들기 전 텐트 안에서 도색을 벗기는 작업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장비지휘 검열 3일 전부터는 전 중대원이 잠을 안 자고 총을 정비합니다. 그야말로 3일 밤낮을 총을 닦는 것인데, 군에서 총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사계가 이렇게 3일간 밤샘으로 총을 닦게 한 것은 총을 닦는 목적도 있지만, 장비지휘 검열에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신훈련 차원도 있었을 겁니다. 장비지휘 검열을 준비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리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우리가 받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대단했습니다.
장비지휘 검열 외의 일로 인사계 때문에 사단이나 연대에서 우리 중대가 1등을 한 것은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태권도 승단율 1위, 이는 연대가 아니라 사단 1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중대의 유단자 비율이 너무 높다고 사단에서 특별 심사단을 파견해서 중대 유단자들이 전부 재 시험을 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우리 중대의 승단율이 90%가 넘었습니다(제가 입대했을 때 중대 고참 중에 단증을 못 딴 병장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군에서 태권도 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입니다. 정말 인정사정도 없이 무지막지 하게 태권도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대 예쁘게 꾸미기 1위, 사격 대회 1위, 무슨 대회 1위... 지금은 기억도 잘 안나지만 우리 중대는 뭐든지 붙으면 1등을 해야 했습니다. 대상이 뭐든 간에 1등을 못하는 날은 고참들은 인사계에게 깨지고, 우리는 고참들에게 깨지는 등 제삿날이 따로 없을 정도였습니다. 인사계는 심지어 화단의 꽃도 연대에서 제일 먼저 피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대 막사 주변에는 산비탈도 있고, 공터가 많았는데 인사계는 그 공터를 전부 밭으로 만들어 그 밭에 온갖 농작물을 다 심어 놓았습니다. 오이, 호박, 옥수수, 고추를 비롯해서 별 걸 다 심어놓았습니다. 당연히 이 밭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전부 우리 중대원의 몫이었습니다.
인사계는 이 밭뿐만 아니라 다른 중대 것 보다 몇 배나 넓은 화단을 만들어 놓았고, 다른 중대에서는 구경도 못하는 조그만 인공호수, 정자, 각종 물품 창고, 테니스장, 체력단련장, 건조대, 이발소 등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시설물을 A급 상태로 관리하려면 전 중대원이 자유 시간을 헌납하면서 쓸고 닦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 중대에서 교육 일과 외 시간은 전부=작업시간이란 등식이 성립해 있었습니다.
제가 자대에 배치 받은 지 1주일 쯤 인사계는 전 중대원을 영농장(부대주변에 일군 밭)에 집합시켜 놓고는 갑자기 시골에서 온 사람 손들라고 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몇 명이 손을 번쩍 들자, 인사계는 몇 가지 농사에 관련 된 것을 물어보더니 저보고 앞으로 영농장을 관리하라고 했습니다. 마침 영농장 책임을 맡고 있던 병장이 막 제대를 하려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일이 저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영농장 뿐 아니라 우리 중대에 딸린 모든 시설물에는 책임자가 한 명씩 붙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병장이 책임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중대에 리어커가 두 대 있었는데 1번 리어커 책임자는 000병장이고, 2번 리어커는 000병장이 책임을 지는 식입니다. 그러니 우리 중대 리어커는 항상 A급 상태로 유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일러 실은 000병장, 이발소는 000병장 하는 식으로 당번이 다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부대에 딸린 시설과 장비는 최상급 수준으로 유지가 됩니다.
제가 시골에서 왔고, 농사일을 많이 해 보았다는 이유로 인사계는 입대한지 일주일도 밖에 안 된 저보고 그 넓은 밭의 농작물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넓은 영농장에 할일이 많기 때문에 저에게는 사역병을 뽑을 수 있는 권한도 생겼습니다. 각 소대별로 사역병을 뽑아 잡초 뽑고, 비오면 밭 주변 배수로 정비하고, 쓰러진 고추 일으켜 세우고, 오이 순 따고, 호박 구덩이 거름주는 일 등등 모든 일을 제가 책임지고 먼저 한 후, 인사계에게 즉각 보고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인사계가 영농장 일을 맡기면서 부대 화단의 꽃까지 관리를 하라고 저에게 지시를 한 것입니다. 제가 워낙 짬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웬만큼 소소한 일은 사역병을 뽑지 못하고 제 손으로 직접 처리 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화단에 심은 꽃에 물을 주는 일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5월 쯤, 우리 중대 주변 화단에 온갖 꽃을 심었는데 꽃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려면 아침 저녁으로 물을 줘야 했습니다. 저는 신병이기 때문에 영농장이나, 화단 일 때문에 소대 막내가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거나, 교육훈련을 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때문에 화단 물주기나, 영농장 관리는 순전히 아침 저녁에 짬을 내서 해야 했습니다.
중대의 화단이 어찌나 넓은지, 막사 앞에 메인 화단이 길게 형성되어 있었고, 막사 뒤쪽은 앞 쪽 화단 보다 두 배는 넓고, 긴 화단이 있었습니다. 그 넓은 화단에 아침 저녁 짧은 짬 시간을 이용해 물을 주자면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수도 호수가 닿는 곳은 호수로 주면 되지만, 호수가 닿지 않는 곳은 양동이로 물을 퍼 날라서 줘야 합니다.
우물장에 가서 물을 받아 양손에 양동이를 들고, 화단까지 냅다 달려가면 물이 흘러넘쳐 아랫도리부터 전투화까지 온통 흥건하게 젖습니다. 물 주기가 특히 괴로웠던 것은 아침 저녁에는 각 소대가 가장 정신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사역병을 마음대로 뽑을 수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아침에 기상해서 식사를 마치고, 교육훈련 나가기 전까지 저는 화단에 물주기를 끝 마쳐야 합니다. 군에서는 아침 시간은 점호, 식사, 중대 주변 외곽청소, 내무반 청소, 식기 설거지 등을 다 끝내고 당일 교육 훈련 준비까지 마쳐야 하는 가장 바쁜 시간입니다. 일과 후 시간도 역시 전투화 정비, 내무반 청소, 외곽 청소, 점호 준비, 근무준비, 병기정비, 기타 각종 중대일 등으로 전 중대원이 마치 꿀벌이 벌통 주위를 돌듯이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정신이 없이 움직이는 때입니다.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사역병을 뽑으면 타 소대 고참들이 엄청 화를 내기 때문에 저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최대한 빨리 화단 물주기를 마치고, 내부반에 들어가서 점호 준비나, 기타 소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행정반에 어렵게 이야기해서 사역병 한 두 명을 겨우 지원받아 화단에 물을 준 후, 덤벙 젖은 몸으로 내부반에 들어서면 고참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옵니다.
“야 ×× 새끼야! 너 농사 지으러 군에 왔어!”
내무반에 들어서자 말자 고참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눈물이 핑 돕니다. 바로 위 일병들은 직접 막사 뒤로 불러내서 속된말로 또 조집니다.
“너 인사계 믿고 요즘 영농장에 가서 살두만. 아예 영농장에 텐트 치고 군생활 해라 ... 막내가 빠져가지고... 내무반 일은 전부 우리보고 하라 이거지?”
뭐 대충 이런 식의 구박이 이어집니다. 그렇잖아도 제가 속한 화기소대는 항상 인원이 모자란 소대입니다. 전투화 정비, 외곽청소, 내무반 청소, 중대 사역병 차출 등의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가장 바쁜 시간에 내무반에서 가장 많은 일을 많이 해야 할 막내가 아침 저녁으로 화단에 물 준다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고참들도 화가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화단 물주기와 영농장 관리 일이 워낙 바쁘고 힘든 일이었고(하루 이틀만 영농장을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 투성이가 된다), 인사계가 저에게 특별히 지시를 한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참들은 저를 이해 해 주고 제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입대한 지 일주일부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두 달 동안이나 막사 주변을 뛰어 다녔으니, 제 모습이 인사계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인사계가 기특하게 생각했던지 행정병을 불러서 이등병에는 거의 주지 않는 포상휴가를 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입대 100일이 안 된 이등병은 포상휴가 대상 자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저의 휴가 건은 일단 미루어 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인사계는 제가 실제 휴가를 다녀온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화단 물주기는 1992년 한 여름이 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등병 시절을 남들 두 세 배는 뛰어다녀야 했습니다.(이듬해 고참이 되어서는 화단 물주기는 제가 직접하지 않고, 전부 사역병 뽑아서 시켰습니다.)
10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오는데 거짓말 조금도 안 보태어 휴가 한 달 전부터는 가슴이 떨려 거의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중대에 동기가 두 명 더 있었는데 우리 세 명이 모이면 휴가 이야기만 했습니다. “위병소를 나서면 과자를 쇼핑백에 한 가방 사서 넣고, 버스에서 집에 갈 때까지 먹어보자” 는 약속도 했습니다. 휴가 전날 분대장은 저의 전투화를 반짝반짝 광을 내어주고, 옷도 쫙 다려주었습니다.
휴가 얼마 전 하루는 휴가나 중요행사, 제대 할 때만 신는 A급 전투화를 신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신던 전투화가 정비에 들어 갔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A급 전투화를 신은 날이 하필이면 M60 기관총 주특기 훈련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곳 기자수첩에서도 썼지만 M60 주특기 교육은 공식적인 얼차려 시간이라고 부를 정도로 혹독하고, 온 연병장을 박박기면서 해야 하는 교육훈련입니다.
저는 하루 종일 주특기 훈련을 받으면서 무릎과 팔꿈치가 다 까져도 그게 아픈지는 모르겠고, 그저 A급 전투화에 흠집이 나는 것에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휴가 때 신고 나가려고 한 번도 신지 않은 전투화였는데, 주특기 훈련을 마치고 나니 여러 군데 흠집이 나서 너무 속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휴가날, 위병소 문을 나서는데 전날 밤 사이 내린 눈이 발목까지 왔습니다. 저를 비롯 동기 세 명은 위병소 문을 나서자 “너희들은(중대원들) 뺑이치면서 눈이나 치워라! 우리는 집에 간다”하며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기 세 명은 위병소에서 양구군 남면까지 도로에 쌓인 눈을 밟으며, 노래도 부르고, 미끄럼도 타면서 달려갔습니다. 저는 지금도 눈이 수북 쌓인 도로를 보면 이때 장면이 떠 오릅니다.
참고로, 저는 군 생활하면서 면회를 단 한 번도 안 온 사람으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입대한 지 한달인지 100일째인지 되면 인사계는 이등병들을 행정반에 불러 집에 전화를 걸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때 우리 인사계는 “집에 전화 할 때 부모님 걱정하시지 않게 잘 이야기 하고, 잘 지내니 면회는 가급적 오지 말라고 전해”라고 하셨습니다. 군기가 빠짝 든 저는 전화기를 붙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결! 어머니, 양구는 멀고 힘든 곳이어서, 한번 왔다 가는데 3일은 잡아야 한답니다. 농사철에 면회 한번 오면 지장이 많을 테니 오지마십시요. 저는 잘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이등병 때 면회를 한번 오려고 마음 먹었는데, 저의 전화를 받고는 면회를 오지 않았습니다.
제대 후 하루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아들이 군생활 하는데 면회를 한번도 안 올 수가 있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니가 오지마라고 해서 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상병 이상이 되었을 때는 실제 가족들이 면회를 올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때문에 제가 아는 한 우리 중대에서 저는 면회를 한 번도 안 온 유일한 사병으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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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아래 사진은 10개월만에 첫 휴가 나온 저의 모습입니다. 사진기 후레쉬를 터뜨렸는데도 햇볕에 하도 타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단단히 쥔 주먹은 군기가 잔뜩 든 모습이고, 태권도 할 때 정권단련 시킨다고 고참들이 주먹쥐고 엎드려 뻗치기를 하도 많이 시켜서 주먹에 구덕살이 배긴 상태입니다.
쓰고 있는 안경은 휴나와서 곧바로 맞춘 것입니다. 입대 후 10개월 간 눈이 좋지 않은 데 안경이 없는 상태에서 사격을 하느라 사격 할 때마다 뺑뺑이 엄청돌았습니다. 안경쓰고 자대에 가서 총의 영점을 새로 잡았습니다. 영점 사격시 나오는 총알이 원래 9발인데, 제가 6발만 쐈는데도 고참들이 더 이상 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6발로 영점을 잡을 정도로 잘 쐈던 것입니다. 눈이 잘 보이니까 그렇게 총을 잘 쏘는데 안경이 없어서 10개월간 영점도 안 잡힌 총으로 사격하면서 온갖 구박을 들은 것을 생각하니 억울 한 면도 있습니다.
저는 이 뉴스를 들으면서 군에서 ‘100일 휴가’란 제도가 공식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전에도 ‘100일 휴가’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것은 부대 내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포상 휴가제도인지 알았지, 국방부가 이를 제도적으로 운영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제가 군에서 첫 휴가를 나온 것은 입대 후 10개월 만입니다. 1992년 3월25일 입대한 저는 같은 해 12월 말에 첫 휴가를 나왔습니다. 꽃샘추위가 한창이고, 개나리 진달래가 막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할 때 입대해서, 눈이 한길 쌓인 도로를 걸어 나왔습니다. 사실상 4계절을 모두 군에서 맞았기 때문에 저는 마치 1년 만에 세상에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군생활 할 때 우리 부대에서 100일 쯤에 첫 휴가를 나갔던 이등병은 거의 없습니다. 극히 일부 병사가 입대 100일 갓 넘기고 휴가를 나간 적이 있었지만, 이는 정말 예외적인 경우라 군생활 통틀어서 손에 꼽을 만한 정도였습니다. 대신 우리 중대 인사계는 일병을 위주로 4박5일 간의 포상휴가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 부대에서 입대 후 바깥 바람 한번 쐬려면 최소한 6개월 이상 군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원래 군대 첫 정기휴가는 입대 10개월 째 받는 것이 규정입니다. 때문에 그 전에 가는 휴가는 글자 그대로 ‘포상휴가’ 차원이었고, 이는 중대 자체로 유연성 있게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사계는 엄격하게 포상휴가 제도를 관리해서 모든 사병들이 정기휴가 전에 웬만하면 포상휴가 한번 정도는 나갈 수 있게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중대원이 사단 태권도 대회나, 기타 체육대회 등에서 단체로 딴 포상휴가증이나, 병장들이 개인적으로 중대장 등에게 받은 포상휴가증은 인사계가 모두 거두어, 중대원들에게 적절하게 배분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인사계의 이런 포상휴가 제도 운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인사계의 공정한 포상휴가 운영 덕분에 우리 중대원들은 누구는 휴가를 여러 번 가는데 누구는 한 번도 못가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포상휴가에 이등병이 끼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등병은 글자그대로 군대에 적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함부로 휴가를 보내어 기분을 들뜨게 하면 사고가 나거나 군생활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인사계의 생각 같았습니다. 때문에 포상휴가는 주로 일병들이나, 상병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입대한 지 10개월이 되도록 남들 다가는 포상휴가를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사계는 제가 이등병 때 휴가를 한번 갔다 온 것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에 저를 아예 휴가 대상에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대한 지 두 달 정도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인사계가 갑자기 저를 행정반으로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최고참 행정병을 불러서 “야! 이상흔이 포상휴가 보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등병이 포상휴가를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부대 상황에서 그것도 입대한 지 두 달도 안 된 저를 앞에 두고 포상휴가를 언급했으니 놀랄 만도 했습니다.
행정병은 “아직 입대 100일도 안 된 신병입니다”하고 인사계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인사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 아직 100일도 안 되었다고?”하더니 “그럼 100일 넘으면 나한테 보고해서 휴가 보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등병을 휴가 보낼 수 있는 마지노 선이 입대 100일이었나 봅니다. 이때 제가 휴가를 갔으면 제가 아는 한 아마 우리 중대에서 입대 후 최 단시일 내 휴가를 간 사병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속으로 휴가는 따논 당상인 줄 알고, 무척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100일이 지나고, 이등병 생활이 끝나고, 일병을 달아도 저의 휴가 건은 언급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인사계는 제가 이등병 때 휴가를 다녀온 줄 착각 하고 있었습니다. 해당 행정병도 신병이 100일 만에 휴가를 간다는 것이 전례가 없었기 때문인지 그 후 인사계에게 제 휴가 건을 보고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입대 10개월 만에 정기휴가를 명받은 저는 인사계에게 휴가 보고를 하러 갔습니다. 인사계는 “이상흔이는 이번이 두 번 째 휴가지?”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첫 휴가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너 이등병 때 휴가 안 갔어?” 하며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인사계는 저를 상병 때 포상휴가를 한번 보내주었습니다.
사실 상병 포상휴가란 것도 병장 진급 전 후 해서 군생활 중에 누구나 한번 쯤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가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의 상병 포상휴가는 인사계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휴가 나오는 날 공교롭게도 우리 부대에 탈영병이 생겼습니다. 전례에 의하면 탈영병이 생기면 휴가는 자동으로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인사계는 탈영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저를 곧바로 영외로 내보내 휴가에 차질이 없게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입대 두 달도 안 된 신병일 때 인사계가 저에게 휴가를 줘야 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사계는 정말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당시 10년 동안 우리 중대의 인사계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인사계는 10년 연속 한해도 빠짐없이 사단 장비지휘검열에서 우리 중대를 1등에 이름을 올린 사람입니다. 사단에 중대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그 많은 중대 중에 우리가 10년 연속 1등을 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가 장비지휘 검열을 얼마나 혹독하게 준비했는지 상상이 잘 안 가실 겁니다. 철모, 야삽, 군장의 페인트는 전부 사포로 반짝반짝 할 때까지 묵은 페인트를 모두 벗기고 새로 도색했습니다. 다른 중대는 보니까, 그냥 덧칠하는 정도거나, 페인트가 우둘투둘 한 곳만 사포질을 했습니다. 수백개가 넘는 중대의 철모, 야삽, 반합, 군장의 도색을 사포질로만 벗겨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지공사 나가서 녹초가 된 몸으로 잠들기 전 텐트 안에서 도색을 벗기는 작업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장비지휘 검열 3일 전부터는 전 중대원이 잠을 안 자고 총을 정비합니다. 그야말로 3일 밤낮을 총을 닦는 것인데, 군에서 총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사계가 이렇게 3일간 밤샘으로 총을 닦게 한 것은 총을 닦는 목적도 있지만, 장비지휘 검열에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신훈련 차원도 있었을 겁니다. 장비지휘 검열을 준비하는데 거의 한 달이 걸리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우리가 받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대단했습니다.
장비지휘 검열 외의 일로 인사계 때문에 사단이나 연대에서 우리 중대가 1등을 한 것은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태권도 승단율 1위, 이는 연대가 아니라 사단 1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중대의 유단자 비율이 너무 높다고 사단에서 특별 심사단을 파견해서 중대 유단자들이 전부 재 시험을 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우리 중대의 승단율이 90%가 넘었습니다(제가 입대했을 때 중대 고참 중에 단증을 못 딴 병장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군에서 태권도 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입니다. 정말 인정사정도 없이 무지막지 하게 태권도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대 예쁘게 꾸미기 1위, 사격 대회 1위, 무슨 대회 1위... 지금은 기억도 잘 안나지만 우리 중대는 뭐든지 붙으면 1등을 해야 했습니다. 대상이 뭐든 간에 1등을 못하는 날은 고참들은 인사계에게 깨지고, 우리는 고참들에게 깨지는 등 제삿날이 따로 없을 정도였습니다. 인사계는 심지어 화단의 꽃도 연대에서 제일 먼저 피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대 막사 주변에는 산비탈도 있고, 공터가 많았는데 인사계는 그 공터를 전부 밭으로 만들어 그 밭에 온갖 농작물을 다 심어 놓았습니다. 오이, 호박, 옥수수, 고추를 비롯해서 별 걸 다 심어놓았습니다. 당연히 이 밭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전부 우리 중대원의 몫이었습니다.
인사계는 이 밭뿐만 아니라 다른 중대 것 보다 몇 배나 넓은 화단을 만들어 놓았고, 다른 중대에서는 구경도 못하는 조그만 인공호수, 정자, 각종 물품 창고, 테니스장, 체력단련장, 건조대, 이발소 등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모든 시설물을 A급 상태로 관리하려면 전 중대원이 자유 시간을 헌납하면서 쓸고 닦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 중대에서 교육 일과 외 시간은 전부=작업시간이란 등식이 성립해 있었습니다.
제가 자대에 배치 받은 지 1주일 쯤 인사계는 전 중대원을 영농장(부대주변에 일군 밭)에 집합시켜 놓고는 갑자기 시골에서 온 사람 손들라고 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몇 명이 손을 번쩍 들자, 인사계는 몇 가지 농사에 관련 된 것을 물어보더니 저보고 앞으로 영농장을 관리하라고 했습니다. 마침 영농장 책임을 맡고 있던 병장이 막 제대를 하려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 일이 저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영농장 뿐 아니라 우리 중대에 딸린 모든 시설물에는 책임자가 한 명씩 붙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병장이 책임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중대에 리어커가 두 대 있었는데 1번 리어커 책임자는 000병장이고, 2번 리어커는 000병장이 책임을 지는 식입니다. 그러니 우리 중대 리어커는 항상 A급 상태로 유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일러 실은 000병장, 이발소는 000병장 하는 식으로 당번이 다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부대에 딸린 시설과 장비는 최상급 수준으로 유지가 됩니다.
제가 시골에서 왔고, 농사일을 많이 해 보았다는 이유로 인사계는 입대한지 일주일도 밖에 안 된 저보고 그 넓은 밭의 농작물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넓은 영농장에 할일이 많기 때문에 저에게는 사역병을 뽑을 수 있는 권한도 생겼습니다. 각 소대별로 사역병을 뽑아 잡초 뽑고, 비오면 밭 주변 배수로 정비하고, 쓰러진 고추 일으켜 세우고, 오이 순 따고, 호박 구덩이 거름주는 일 등등 모든 일을 제가 책임지고 먼저 한 후, 인사계에게 즉각 보고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인사계가 영농장 일을 맡기면서 부대 화단의 꽃까지 관리를 하라고 저에게 지시를 한 것입니다. 제가 워낙 짬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웬만큼 소소한 일은 사역병을 뽑지 못하고 제 손으로 직접 처리 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화단에 심은 꽃에 물을 주는 일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5월 쯤, 우리 중대 주변 화단에 온갖 꽃을 심었는데 꽃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려면 아침 저녁으로 물을 줘야 했습니다. 저는 신병이기 때문에 영농장이나, 화단 일 때문에 소대 막내가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거나, 교육훈련을 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때문에 화단 물주기나, 영농장 관리는 순전히 아침 저녁에 짬을 내서 해야 했습니다.
중대의 화단이 어찌나 넓은지, 막사 앞에 메인 화단이 길게 형성되어 있었고, 막사 뒤쪽은 앞 쪽 화단 보다 두 배는 넓고, 긴 화단이 있었습니다. 그 넓은 화단에 아침 저녁 짧은 짬 시간을 이용해 물을 주자면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수도 호수가 닿는 곳은 호수로 주면 되지만, 호수가 닿지 않는 곳은 양동이로 물을 퍼 날라서 줘야 합니다.
우물장에 가서 물을 받아 양손에 양동이를 들고, 화단까지 냅다 달려가면 물이 흘러넘쳐 아랫도리부터 전투화까지 온통 흥건하게 젖습니다. 물 주기가 특히 괴로웠던 것은 아침 저녁에는 각 소대가 가장 정신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사역병을 마음대로 뽑을 수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아침에 기상해서 식사를 마치고, 교육훈련 나가기 전까지 저는 화단에 물주기를 끝 마쳐야 합니다. 군에서는 아침 시간은 점호, 식사, 중대 주변 외곽청소, 내무반 청소, 식기 설거지 등을 다 끝내고 당일 교육 훈련 준비까지 마쳐야 하는 가장 바쁜 시간입니다. 일과 후 시간도 역시 전투화 정비, 내무반 청소, 외곽 청소, 점호 준비, 근무준비, 병기정비, 기타 각종 중대일 등으로 전 중대원이 마치 꿀벌이 벌통 주위를 돌듯이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정신이 없이 움직이는 때입니다.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사역병을 뽑으면 타 소대 고참들이 엄청 화를 내기 때문에 저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최대한 빨리 화단 물주기를 마치고, 내부반에 들어가서 점호 준비나, 기타 소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행정반에 어렵게 이야기해서 사역병 한 두 명을 겨우 지원받아 화단에 물을 준 후, 덤벙 젖은 몸으로 내부반에 들어서면 고참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옵니다.
“야 ×× 새끼야! 너 농사 지으러 군에 왔어!”
내무반에 들어서자 말자 고참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눈물이 핑 돕니다. 바로 위 일병들은 직접 막사 뒤로 불러내서 속된말로 또 조집니다.
“너 인사계 믿고 요즘 영농장에 가서 살두만. 아예 영농장에 텐트 치고 군생활 해라 ... 막내가 빠져가지고... 내무반 일은 전부 우리보고 하라 이거지?”
뭐 대충 이런 식의 구박이 이어집니다. 그렇잖아도 제가 속한 화기소대는 항상 인원이 모자란 소대입니다. 전투화 정비, 외곽청소, 내무반 청소, 중대 사역병 차출 등의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가장 바쁜 시간에 내무반에서 가장 많은 일을 많이 해야 할 막내가 아침 저녁으로 화단에 물 준다고 밖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고참들도 화가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화단 물주기와 영농장 관리 일이 워낙 바쁘고 힘든 일이었고(하루 이틀만 영농장을 관리하지 않으면 잡초 투성이가 된다), 인사계가 저에게 특별히 지시를 한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참들은 저를 이해 해 주고 제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입대한 지 일주일부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두 달 동안이나 막사 주변을 뛰어 다녔으니, 제 모습이 인사계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인사계가 기특하게 생각했던지 행정병을 불러서 이등병에는 거의 주지 않는 포상휴가를 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입대 100일이 안 된 이등병은 포상휴가 대상 자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저의 휴가 건은 일단 미루어 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인사계는 제가 실제 휴가를 다녀온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화단 물주기는 1992년 한 여름이 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는 시골 출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등병 시절을 남들 두 세 배는 뛰어다녀야 했습니다.(이듬해 고참이 되어서는 화단 물주기는 제가 직접하지 않고, 전부 사역병 뽑아서 시켰습니다.)
10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오는데 거짓말 조금도 안 보태어 휴가 한 달 전부터는 가슴이 떨려 거의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중대에 동기가 두 명 더 있었는데 우리 세 명이 모이면 휴가 이야기만 했습니다. “위병소를 나서면 과자를 쇼핑백에 한 가방 사서 넣고, 버스에서 집에 갈 때까지 먹어보자” 는 약속도 했습니다. 휴가 전날 분대장은 저의 전투화를 반짝반짝 광을 내어주고, 옷도 쫙 다려주었습니다.
휴가 얼마 전 하루는 휴가나 중요행사, 제대 할 때만 신는 A급 전투화를 신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신던 전투화가 정비에 들어 갔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A급 전투화를 신은 날이 하필이면 M60 기관총 주특기 훈련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곳 기자수첩에서도 썼지만 M60 주특기 교육은 공식적인 얼차려 시간이라고 부를 정도로 혹독하고, 온 연병장을 박박기면서 해야 하는 교육훈련입니다.
저는 하루 종일 주특기 훈련을 받으면서 무릎과 팔꿈치가 다 까져도 그게 아픈지는 모르겠고, 그저 A급 전투화에 흠집이 나는 것에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휴가 때 신고 나가려고 한 번도 신지 않은 전투화였는데, 주특기 훈련을 마치고 나니 여러 군데 흠집이 나서 너무 속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휴가날, 위병소 문을 나서는데 전날 밤 사이 내린 눈이 발목까지 왔습니다. 저를 비롯 동기 세 명은 위병소 문을 나서자 “너희들은(중대원들) 뺑이치면서 눈이나 치워라! 우리는 집에 간다”하며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기 세 명은 위병소에서 양구군 남면까지 도로에 쌓인 눈을 밟으며, 노래도 부르고, 미끄럼도 타면서 달려갔습니다. 저는 지금도 눈이 수북 쌓인 도로를 보면 이때 장면이 떠 오릅니다.
참고로, 저는 군 생활하면서 면회를 단 한 번도 안 온 사람으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입대한 지 한달인지 100일째인지 되면 인사계는 이등병들을 행정반에 불러 집에 전화를 걸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때 우리 인사계는 “집에 전화 할 때 부모님 걱정하시지 않게 잘 이야기 하고, 잘 지내니 면회는 가급적 오지 말라고 전해”라고 하셨습니다. 군기가 빠짝 든 저는 전화기를 붙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결! 어머니, 양구는 멀고 힘든 곳이어서, 한번 왔다 가는데 3일은 잡아야 한답니다. 농사철에 면회 한번 오면 지장이 많을 테니 오지마십시요. 저는 잘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이등병 때 면회를 한번 오려고 마음 먹었는데, 저의 전화를 받고는 면회를 오지 않았습니다.
제대 후 하루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아들이 군생활 하는데 면회를 한번도 안 올 수가 있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니가 오지마라고 해서 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상병 이상이 되었을 때는 실제 가족들이 면회를 올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때문에 제가 아는 한 우리 중대에서 저는 면회를 한 번도 안 온 유일한 사병으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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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아래 사진은 10개월만에 첫 휴가 나온 저의 모습입니다. 사진기 후레쉬를 터뜨렸는데도 햇볕에 하도 타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단단히 쥔 주먹은 군기가 잔뜩 든 모습이고, 태권도 할 때 정권단련 시킨다고 고참들이 주먹쥐고 엎드려 뻗치기를 하도 많이 시켜서 주먹에 구덕살이 배긴 상태입니다.
쓰고 있는 안경은 휴나와서 곧바로 맞춘 것입니다. 입대 후 10개월 간 눈이 좋지 않은 데 안경이 없는 상태에서 사격을 하느라 사격 할 때마다 뺑뺑이 엄청돌았습니다. 안경쓰고 자대에 가서 총의 영점을 새로 잡았습니다. 영점 사격시 나오는 총알이 원래 9발인데, 제가 6발만 쐈는데도 고참들이 더 이상 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6발로 영점을 잡을 정도로 잘 쐈던 것입니다. 눈이 잘 보이니까 그렇게 총을 잘 쏘는데 안경이 없어서 10개월간 영점도 안 잡힌 총으로 사격하면서 온갖 구박을 들은 것을 생각하니 억울 한 면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