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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와 한국

박정희, 월남전 종전 자랑하는 키신저에게 "월남은 끝났다"...정주영, '중국 좌초' 가능성 말하는 키신저에게 "中, 美에 버금가는 경제대국 될 것"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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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1월 방한한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파리평화협정 등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조선DB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키신저는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강대국간의 세력균형을 통해 안정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빈 체제를 만든 메테르니히, 19세기 말 유럽 국제정치를 조종했던 비스마르크가 그의 멘토였다. <회복된 세계> <외교론> 등에 키신저의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키신저가 거의 병적으로 '세력균형을 통한 안정'을 추구했던 것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 초기 독일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세계에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불안정한 세계'는 그에게는 일개 개인의 삶에까지 파국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악(惡)이었다.

하지만 키신저가 세력균형을 통해 안정시키려 했던 세계는 기본적으로 강대국 중심의 세계였다. 이는 강대국 중심의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약소국은 언제든지 장기판의 졸(卒)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얘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월남(남베트남)이었다. 키신저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이려 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 남부에서 미국의 안보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월남을 버렸다. 키신저는 파리평화협정 후 국가의 생존을 위해 읍소하는 티우 월남 대통령을 감언이설로 달래고, 협박하고, 조롱했다. 티우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2년 3개월 후 월남(남베트남)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1973년 11월 방한한 키신저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베트남전쟁 종결을 위한 파리평화협정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키신저는 "앞으로 월남엔 물자와 장비를 지원해서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이제 월남과 월맹은 평화적으로 대치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월남의 평화를 만들어 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보시오, 미스터 키신저, 잘된 거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월남은 끝났소. 끝의 시작이오."


사실 파리평화협정이나 월남의 패망은 이미 키신저가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던 1969년 7월 나온 닉슨독트린(괌 독트린)에서 예고되어 있었다.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만 유지할 수 있다면 아시아에서의 소소한 분쟁에는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을 테니,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게 닉슨독트린의 골자였다. 이 또한 얼음처럼 냉혹한 현실주의 국제정치을 추구했던 키신저식 사고방식의 소산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71년 하루 아침에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은 티우처럼 미국에 울며 매달리는 대신, 중화학공업화를 통한 자주국방 노선을 선택했다. 유신체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단이 1970년대의 파고(波高)속에서 대한민국을 살아남게 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1976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지미 카터는 취임 전 키신저를 만났다. 닉슨-포드 등 공화당 대통령 밑에서 국가안보보좌관-국무장관을 지냈지만, 당시 '세계의 외교 대통령'으로 인식되던 키신저를 카터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권외교'를 내걸었던 카터는 키신저에게 “한국의 정치상황이 들리는 소문만큼 정말 좋지 못하냐”고 물었다. 키신저는 “지난 몇 년간 미국이 한국 정부의 정치적 자유 정립을 위해 힘써 왔다"면서 "우리(미국)의 영향력이 박정희 정부에 강해질수록 오히려 우리가 고려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터가 한국에서 미군 철수가 가능하냐고 묻자 키신저는 “중국이 공식적으로 한국의 미군 철수(를 원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아마도 이 철수를 추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도 현실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카터의 인권외교, 주한미군 철수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키신저의 생각이 느껴진다. 키신저는 카터가 된 후 포드 대통령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카터는 외교를 모른다"고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키신저의 외교적 업적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가 1972년 2월 닉슨의 깜짝 중국방문을 성사시켜 중국을 '죽(竹)의 장막' 밖으로 이끌어냈다는 사실이다.

키신저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인 1985년 7월 한국을 방문, 정주영 전경련 회장을 만났을 때 중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공산주의체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만 시장경제체제로 간다면 그동안 공산주의체제에 익숙했던 의식구조와 관행이라는 타성, 소득격차 확대에 의한 계층 간의 불만과 갈등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야기되어 좌초될 수도 있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은 “내 견해는 다르다”고 반박했다.

“불과 반세기 정도 공산주의체제 속에서 살았다고 해서 이들 핏속에 뿌리 깊이 내려온 최고의 장사꾼 기질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정에서 다소 혼란과 차질은 겪게 되겠지만 앞으로 몇 십 년 안에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부상(浮上)할 것이다.”

역사는 정주영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이 키신저의 사망 소식에 '중국의 오랜 친구'운운해가면서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마도 키신저가 자기들이 '미국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키신저는 《외교론》에서 6.25 당시 맥아더가 유엔군을 압록강까지 북진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맥아더가 한만(韓滿)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북진하지 말고, 평양-원산 선(線)에서 진격을 멈추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압록강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이 선에서 미군의 북진작전이 멈추어졌다면 중국에 참전의 구실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미·중(美中) 충돌도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평양-원산 간 지역은 한반도에서 동해안과 서해안의 거리가 최단거리인 이른바 ‘좁은 목’(Narrow Neck)이어서 유엔군이 방어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역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여기서도 한국인들의 통일 열망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대국간의 세력균형을 통한 안정을 강조하는 키신저식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키신저는 1970년대 일본 외무장관과 만났을 때 "강대국들은 서로 싸우고 있을 때에도 물밑으로는 대화를 나눈다. 이런 사실을 한국 같은 나라들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얘기다.


입력 :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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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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