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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金銅半跏思惟像’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닮았나?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시대를 마감하는 금동반가사유상 특별전시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두움 속에서 렘브란트 조명(Rembrandt lighting)을 받으며 80여평의 전시실 한가운데 나란히 놓인 국보 제83호와 제78호인 ‘금동반가사유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들은 잠시나마 조용히 깊은 思惟의 세계에 몰입한다. 국가 지도자들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온 나라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이 때 서울 경복궁內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조각실에 가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 미술의 精髓인 ‘금동반가사유상’을 만날 수 있다. 잠시나마 이곳에서 요즈음 누구나 겪는 근심과 불안감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7월 20일부터 10월 17일까지 90일간 두 국보를 한꺼번에 나란히 놓고 감상 할 수 있는 특별전을 갖고 있다. 유리장안에 들어있던 국보가 밖으로 나와 그 자태를 드러냈다. 가까이서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프랑스 조각가 로댕(1840-1917)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 과 포즈가 너무 비슷하여 놀라기도 한다. 발가벗고 바위에 앉아 주먹을 입가에 대고 있는 로댕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의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을 감상하면서 단순한 몽상가이기보다는 미래를 개척하는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며 역설을 하시던 중학교 때 미술선생의 가르침도 생각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을 보고는 늘 ‘思惟하는 국민이어야 산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도 되새기곤 했다. 로댕이 혹시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하면서 우리의 국보인 ‘반가사유상’을 베낀 것이 아닐까? 주먹으로 턱을 바치고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像과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에 걸치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볼에 손가락을 댄 ‘반가사유상’ 자세가 너무 비슷하다. 사실은 인간이 고뇌를 하고 깊은 생각에 沈潛할 때 자연
충남 연기군 전의면 雲住山城 백제 부흥군이 결사항전을 했던 三千窟의 전설이 깃든 곳 산성을 돌며 삼국시대와 현재를 돌이켜본다. 사람도 사귀다 보면 속마음이 겉보기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산도 마찬가지다. 오르지 않고서 멀찌감치서 눈으로만 보고 나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어떤 산이든 직접 올라가 봐야 그 산의 진수를 알 수 있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과 전동면에 걸쳐 있는 雲住山(460m)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오가다 창밖으로 슬쩍 지나쳤을 운주산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두루뭉실해 보이나 역사적으로는 사연이 남달리 많은 산이다. 1번 국도인 천안 삼거리를 지나 전의읍에 닿으면 남동쪽으로 산봉우리 꼭대기에 햐얀 비석 같은 것이 세워진 산을 볼 수 있다. 구름이 머문다는 운주산이다. 운주산 자락으로 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나란히 지난다. 태안반도까지 이어지는 錦北正脈에 놓인 운주산은 주위의 300m급 산들에 비하면 높은 축에 든다. 실제로 운주산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천안일대와 남쪽으로는 조치원과 계룡산이 손에 잡힐듯 가깝게 내려다 보이고 동쪽으로는 청주시와 서쪽으로는 광덕산(699m) 줄기와 요즈음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공주시와 연기군에 걸처 있는 신행정수도 건설 확정지가 서남쪽으로 아득히 보인다. 이렇게 조망이 좋은 산에 아무런 군사시설이나 통신시설이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운주산에서 북쪽으로 빤히 건너다 보이는 흑성산(519m)이 더 높아 그 역할을 넘겨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운주산은 예로부터 三南의 요충지였다. 삼국시대에는 이곳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다. 이곳에서 남진하려는 고구려와 북진하려는 신라와 백제가 서로 合從連橫을 해가면서 밀고 밀리는 영토 싸움을 치열하게 치렀을 것이라 짐작이 되는 곳이다. 이렇게 150년 동안 치른 삼국간의 전쟁은 결국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승리로 끝나긴 했어도 진정한 의미의 삼국통일은 이루지
최근 고구려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원래 억지 주장을 펴는 쪽과 싸우는 쪽이 대체로 손해를 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억지 주장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인데, 당하는 우리가 답답하다보니 당연한 주장을 자꾸 하게 되고 결국, 진짜 문제가 있는 것 처럼 보여지게 됩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것과 비슷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도는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땅이고, 고구려는 지나간 역사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중국측 주장대로 고구려가 자신들의 속국이었다면 중국의 어느나라 속국이었는지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700년(많게는 900년) 고구려 역사에서 중국이 고구려에 맞설 수 있었던 나라가 수나라 당나라 말고 얼마나 더 있었는지도 알아보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촛점은 과연 고구려 자신이 자신들을 중국의 속국이나 신민으로 여겼느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삼국사기를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때 쓰여진 책입니다. 김부식은 역사책을 쓰면서 전대에서 해 온 것 처럼 '삼국사기'라고 못을 박아 당대의 우리 민족이 삼국시대 통일 이후 가졌던 시각을 그대로 잇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구 삼국사'를 써서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인식했으며, 그 유민을 우리민족으로 여겼습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나라의 역사로 생각했다면 이 문제(왜 남의 나라 역사를 너희들이 썼느냐는)에 한번이라도 항의를 했어야 합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으므로, 조선 정부에 정식으로 이 문제 제기를 했어야 합니다. 더구나 고려란 국호자체도 고구려에서 온 것입니다. 지난 수천년의 역사를 인터넷에서 몇 줄 지운다고 있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0 여년 전 어느 북한 학자가 중국에 대해 "나라가 망했다고 있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항변한 것이 떠오릅니다. (지금 북한은 꿀먹은 벙어
저는 이곳 기자칼럼의 성격도 있고 해서 시사적인 내용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경찰관 두 명이 성폭행 피의자를 체포하려다 도리어 칼에 찔려 숨졌습니다. 경찰관이 범인의 총에 맞아 순직할 수는 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움직이는 법집행관인 경찰관이 흉악범과 맨몸으로 사투를 벌이다 칼에 맞아 순직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것도 두 명의 경찰관이 한명의 흉악범에게 당했다니 이러고도 법이 있는 문명사회라고 한다면 말장난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전투 경찰로부터 강력한 시위진압 수단인 최루탄 사용권을 뺏아 버렸습니다. 이후 경찰관이 동네북이 되어 두들겨 맞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재작년 광화문의 북파공작원의 시위 때 북파공작원들은 생명에 직접 위협이 되는 가스통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경찰관들에게 돌진했습니다. 이때 돌진하는 북파공작원들을 방패와 곤봉으로 막다가 수없이 두들겨 맞고 중과부족으로 도망가는 전투경찰의 모습이 전국에 방영되었습니다. 또 여의도 농민시위 때 농민들이 기다란 장대를 가지고 밀집대형으로 모여 있는 경찰들의 눈을 향게 마구잡이로 찌르고 있었는데도 경찰은 방패로 이를 막아야 했습니다. 2년 전쯤에는 국군병원에 근무하는 어느 여의사가 맞아서 다친 젊은 전경을 보다 못해 『시위 때 제발 전경들 얼굴만은 때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한 글을 신문에 낸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한 일간지에 친북좌파 학생들이 전경의 차량 위에 올라가 주한미군 철수와 이라크 파병 반대를 하는 사진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모 TV프로그램에서 음주운전 방지 캠페인 차원에서 술을 마신 채 운전하면서 도망가는 사람과 이를 쫓는 경찰의 모습을 매주 편성해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30분 혹은 한 시간 가량 죽음의 질주를 한 용의차량을 멈춰 세운 경
거친 음식 건강법 10계명 여기서 거친 음식이란 사람의 손이 가지 않고 스스로 자란 식물류(곡식, 채소, 과일 등)을 말합니다. 저자 이원종 강릉대 교수는 미국에서 식품학을 전공했습니다. 미국에서부터 농사를 직접 짓기 시작했죠. 강릉에 살고 있는 그는 15년 전 쓰러져 가는 농가를 100만원 정도 주고 구입해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상추, 고추, 깻잎 등을 터밭에 직접 키워 반찬으로 이용합니다. 얼마 전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의 표정에서 농사꾼의 순수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출간한 그의 책에도 그의 순수함이 보입니다. 그에게 "서울에 집이 따로 있냐"고 물었더니, "처가가 서울에 있습니다"고 하더군요. 좀 민망했습니다. 1.천천히 오랫동안 씹어 먹는다. 음식을 빨리 먹으면 포만감을 뇌에서 느끼기도 전에 계속 먹게 된다. 2.집에서 직접 요리해 먹는다. 거친 음식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요리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제 맛이 나고 몸에 좋다. 3.사는 곳에서 나는 토종식품과 전통식품을 먹는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품은 그 지방의 기후, 풍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 특성이 있다. 4.색과 향이 진한 식품을 먹는다. 자연에서 자란 거친 식물은 햇빛을 많이 받고, 모진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화학물질을 만들기 때문에 색과 향이 진하다. 5.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식품을 먹는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뿌려 키운 식품은 생리활성물질이 다양하게 생성되지 못해 영양가가 떨어진다. 6. 살아있는 발아식품을 먹는다. 도정하여 씨눈이 벗겨져 나간 식품들은 싹이 트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싹이 튼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다는 얘기다. 발아 과정에서 비타민이나 생리활성물질이 많이 생겨 건강에 좋다. 현미, 보리, 밀, 콩, 무씨앗 등 거의 씨앗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싹이 튼다. 7.도정하지 않은 곡식
일부 한글관련 학회나 한글전용론자들이 주장하는 한글과 국어, 한자 문제 등을 들여다 보면 이들이 우리 국어와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라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 집니다. 이들은 한글 창제를 전가의 보도처럼 한글전용론의 각종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끌어다 붙입니다. 이들은 한자와 한글을 자주 대조하면서 한자를 쓰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의 본 기자칼럼 중 「한글날 소고」(게시물 28번, 게시물 8번도 참조)라는 글에서 저는 한글날을 당장 국경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한글은 우리 민족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자 우리 민족에게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정신적, 경제적 에너지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글날을 국경일(혹은 공휴일)로 정하는 것은 세종대왕과 이 위대한 문자에 대해 우리가 표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글에 대한 이 정도의 예의도 표시할 줄 모르는 후손이라면 나라와 역사를 유지시킬 자격이 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글전용론자들의 가장 큰 오류는 위대한 한글과 우리의 국어를 잘못 이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국어 사랑과 한글 사랑을 같은 선상에 놓기도 하고, 어떤 때는 벗어나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글의 위대함과 세종대왕의 업적을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데 너무 자주끌여붙혀 사람들을 정신없이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글전용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부터 좀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을 사랑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인지, 국어를 사랑하자는 것인지, 한자를 너무 일찍 배우지 말자는 것인지, 한자를 아예 추방하자는 것인지,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지 말자는 것인지, 한자가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는 것인지, 국어에 한자가 필요없다는 것인지 등등을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글 전용론자들 주장이 한자 무용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저는 한글
지난 10여일 간 미국에 다녀왔습니다. 1997년 이후 7년 만에 미국에 사는 누님을 방문한 것입니다. 누나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살고 있습니다. 1984년 미국 사람과 결혼하여 미국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인인 자형과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와 질녀 남매가 있는데 여자 아이가 17세(한국나이 18세), 남자아기가 16세입니다. 미국 시부모와 시누, 남편, 자식들과 섞여서 20년을 살아온 누나는 지금 한국말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미국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20년을 살고 있는 누나지만 음식 만큼은 미국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릴 때부터 먹은 한국 음식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음식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미국 가정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요리’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공장에서 만든 음식을 사와서 조리법에 따라 데워 먹거나 몇 가지 간단한 절차에 따라 물을 부어 끓여먹는 것이 고작입니다. 아마 우리의 라면 요리 보다도 더 빨라진 것이 오늘날 미국의 음식 요리 문화일 것입니다. 제가 7년 전 미국에 1년간 머무르면서 먹어본 가장 ‘요리다운 요리’는 ‘할로윈데이’ 때 먹어본 호박 요리 같습니다. 그 만드는 방법의 절차를 떠나 어찌되었던 간에 원재료인 호박을 사와서 온 가족이 집에서 요리를 만들었으니까요. 미국의 음식때문에 대부분의 미국인들, 특히 여자들은 18세가 넘으면 몸무게가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예뻤던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먹어놓은 코카콜라나 햄버거의 영향 대문인지 성인이 되기 시작하면 대부분 살이 찌기 시작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빠르고 간편하지만 먹으면 곧바로 살이 찌는 ‘패스트푸드’ 대신에 ‘슬로우푸드’ 먹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집안에서 가족이 모여서 식사하는 풍습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1주일에 한번씩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 캠페인도 일어나
심각한 경제난 탓으로 분석 올 들어 문화재 도난 사건이 크게 늘었다. 문화재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도난당한 문화재는 17건 3백65점에 이른다. 이는 2003년 한해 동안에 도난당한 문화재 8건 1백9점에 이른 것과 비교만해 봐도 2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2004년 상반기에 도난당한 3백 65점 가운데 보물 제668호인 권응수장군의 가전보첩등 지정문화재가 11점이고 비지정문화재가 3백 54점이나 됐다. 그가운데 현재까지 회수된 도난 문화재는 5건 96점뿐이다. 문화재 절도범들이 노리는 도난 문화재 대부분이 비지정문화재로 지정문화재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비지장문화재는 관리가 허술하여 흠치기 쉽고 고미술시장에 내다 팔기가 쉽기 때문이다. 문화재 절도범들의 수법도 대담해졌다. 지난 3월 전북 고창에 있는 문수사 명부전에 소장돼 있던 1653년에 만들어진 사천왕상등 목조상들은 명부전이 찻길에서 200m 이상 떨어져 있고 목조상의 높이가 약 1m 20cm 정도나 돼 최소한 2인 이상이 들어내야만 흠칠 수 있다. 절도범들은 이곳 명부전에 별다른 보안 장치가 없다는 허점을 노려 그것도 천둥 번개치는 야밤, 악천후속에서 하나도 아닌 6개나 되는 목조상를 리어카를 대놓고 실어갔다.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발발 당시 바그다드 시내 이라크 박물관의 28개 전시관과 라시드의 파이오니아 박물관, 하이파 박물관등에 전시돼 있던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중동 문화 유물 수만점이 거의 약탈됐거나 파괴됐다. 전쟁통에 절도범들이 제일 먼저 노리는 것은 돈이 될만한 값진 문화재들이다. 이들의 눈에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들이 인류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 아니라 황금덩어리나 막대한 돈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같이 문화재는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재 전문 절도범들이 우리나라에 전역에서 문화재들을 마구 흠처 내다 파는 사태는 IMF보다 더한 불어 닥친 경제 불황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게 문화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때 부동산 억제정책으로 여유자금
한국인의 끈기는 99% 벼농사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벼농사는 힘이 드는 농사입니다. 나락농사에 이앙법이 도입된 후 마지기당 소출은 늘었지만 이에 들이는 노동의 양은 배가 되었습니다. 이 이앙법의 순 우리말이 ‘모내기’ 혹은 ‘모심기’란 말입니다. 이른 봄(4월말)이 되면 나락씨를 물에 불립니다. 이 과정에서 쭉정이 나락은 걸러집니다. 요즘은 이때 씨를 같이 소독하고 있습니다. 이후 못자리를 할 논을 정해 물을 가두고 못자리판을 장만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논을 갈아엎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경운기가 없던 시절에는 논에 물을 가두어 소로 논을 갈았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이런 작업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구릉지대에 자연적으로 물이 생겨나는 논이나 「소(沼)」가 많아 1년 내내 무논 상태로 있는 논이 최고로 비싼 논으로 거래되었습니다. 비료가 없던 시절에는 논의 기운을 붇돋우기 위해 퇴비를 넣어야 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퇴비증산에 총력을 쏟은 적이 있는데 퇴비를 넣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을철에 웃자란 억새풀이나, 기타 각종 풀을 지게로 져온 후 논에 쏟아 넣고 그것을 일일이 발로 밟아 논에 쑤셔 넣었습니다. 못자리 장만이 끝나면 씨를 모판에 뿌립니다. 1970년대 이후 모판에 비닐을 씌워 싹을 좀더 일찍 틔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5월 중순이후 모내기를 할 시기가 되면, 먼저 논을 삶아야 합니다. 논을 평평하게 만드는 이 작업을 써레질이라고 합니다. 모판에서 모를 쪄내서 한 다발씩 짚으로 묶습니다. 이렇게 묶어낸 모를 ‘모침’이라고 합니다. 못자리를 한 곳과 모를 심어야 할 논의 거리가 멀 경우 모침 나르는 작업도 보통 고된 일이 아닙니다. 지게로 모침을 한 가득 싣고 좁은 논둑길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써레질을 끝낸 논에다가 모침을 뿌려놓아야 합니다. 모침 나르는 작업은 여럿이 함께 하기도 하지만 주로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을 담자’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꼼짝을 못한다. 체벌을 하거나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학생들의 카메라폰에 찍혀서 곤혹을 치르는 사례가 종종 신문이나 인터넷에 오르기 때문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나타나는 장소에 가면 예전에는 수첩에 사인을 받으려는 청소년들로 북새통을 이뤘지만 요즈음은 연예인 주변에 핸드폰 카메라를 든 청소년들이 장사진을 친다. 디지털 카메라가 내장된 카메라폰을 일제히 치켜든 청소년들은 말이나 글보다 이처럼 이미지를 선호한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 ‘디카(Dica)’가 신세대들 간에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인 1디카 시대를 반영하듯 2004년말 까지 우리나라에는 연간 400만대의 디카가 보급될 전망이다.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힘들게 받아 적지 않고 즉석에서 디카로 찍어 나중에 출력을 하여 돌려본다. 디지털 카메라 시대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이점은 보고 싶은 얼굴 모습을 실시간에 인터넷으로 주고받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을 외국에 살고 있는 손주를 그나마도 인터넷으로 매일 볼 수 있고 군대에 간 보고 싶은 애인에게 본인의 일상생활을 디카나 카메라 폰으로 찍어서 e-메일로 전송한다. 이 모두 디카 덕분이다. ‘필카’(필름 카메라)의 시대는 가고 디카의 시대가 왔다. 필름 대신 전자 이미지센서인 CCD나 CMOS로 찍는 디카 사진은 필름값과 현상, 인화료가 들지 않는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볼 때 화질에 있어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30만-40만원 代의 디카를 손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사진을 찍은 ‘다카族’이 늘고 있다. 디지털 사진은 이미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구입할 물건도 디카로 찍어서 서로 보고 의논하며 산다. 대형 서점에서는 비싼 전문서적을 돈을 내고 사는 대신 내용을 주인 몰래 디카로 찍어서 논문이나 과제물 제작에 인용하는 사례가 늘자 진열대에 사진촬영 금
올해 장마를 보니 모처럼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장마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반갑습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의 장마철은 그야말로 장마라고 부르기가 뭣할 정도로 변덕스러웠습니다. 원래 우리나라 장마는 6월말 장마전선이 생기기 시작해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한달 가까이 이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와중에 때로는 천둥 벼락도 치고, 때로는 국지적 호우도 발생해서 물난리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올해처럼 차분하면서도 줄기차게 비가 오는 것이 우리나라 장마입니다. 어저께 라디오에서 한 여자 기상예보관이 『금년의 장마도 예년과 어김없이 게릴라성 폭우를 뿌리며 각지방에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 기상예보관이 예년의 우리 장마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거나, 우리나라의 장마 특성에 대해서 몰라서 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정말 오랫만에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장마를 만나고 있는 것이지, 결코 게릴라성 폭우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비오는 날은 저는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물론 시골의 부모님은 논둑이 터질까 봐 삽을 들고 이논저논 열심히 쫓아 다니시겠지만요. 국민학교 나닐 때 비가 오는 날이면 중학교 다니는 형과 누나들이 우산을 하나씩 가져가고 나면 저한테까지 우산이 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비오는 날 당연히 우산을 더 많이 쓰고 다녔겠지만, 지금 와서 보면 우산을 쓰지 않고 다닌 기억이 더 뚜렷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한시간 거리였습니다) 우산이 없을 때는 국민학교 다니는 바로 위 누나와 우산을 같이 쓰고 가면 비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 누나가 아니라 바로 위 누나와 같이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누나와 같이 학교에 가면 자연스럽게 누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여자애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동네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 딱 알맞
장마철 오름 수위를 기다린다 7월 3일 토요일 밤, 제7호 태풍 민들레의 북상으로 충북 음성의 원남지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단골꾼들은 우비를 챙겨 입고, 파라솔을 펴고, 텐트로 빗방울을 피해가며 밤새 찌불을 지켰다. 이곳의 특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원남지는 수위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어야 입질을 기대 할 수 있다. 특히 여름철엔 물이 늘어 육초밭이 잠길 때가 절호의 찬스다. 원남지는 매년 장마가 끝나 오름 수위를 이루는 7월 중순 이후,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하는 8월초까지 ‘오름 수위 특수’를 누린다. 41만평 크기의 대형 수면을 자랑하는 원남지는 여름 시즌에 들어서면 상류지역에 포인트가 형성되다가 배수기인 8월초부터 중순까지 중류권으로 포인트가 이동된다. 토종붕어가 주류를 이루며 잉어와 메기, 끄리등 온갖 민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최근엔 간혹 떡붕어와 배스도 눈에 띈다. 입어료 24시간 1만원, 조황문의 음성 한라낚시 043-535-5756.
서울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서울 버스노선 변경 사업’이 큰 무리 없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바랍니다. 서울시가 추진한 버스 노선 변경의 근본이 옳다면 지금의 혼란은 곧 정상을 찾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서울시가 새로 칠한 버스 색깔을 아침 저녁으로 보고 있자니 입안에 가시가 돋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짙은 빨강, 파랑, 노랑, 녹색의 버스는 마치 벌레들이 먹이를 찾아 기어다니는 것처럼 보여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버스 색깔이 현대 도시의 버스 색깔치고는 너무 촌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산과 광화문을 다니는 1000번 버스를 보면 청색과 백색이 잘 조화되어 그 색깔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1000번 버스뿐 아니라 서울 외곽을 오가는 다른 광역 버스도 나름대로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국의 수많은 고속버스와 관광버스, 스쿨버스 등은 저마다 아름다운 색깔로 개성을 뽐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의 버스에 비해 서울시에서 새로 칠한 빨강, 파랑, 노랑, 녹색 버스는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더구나 고급스러운 색깔을 가진 거리의 자동차와 원색적인 서울시내 버스 색깔이 대조되어 더욱 어색합니다. 우리의 버스는 일정 기간 운영을 하고 나면 그 상당수가 곧바로 러시아, 중동, 동남아 등지로 인기리에 팔려나갑니다. 저도 이라크에 다녀 온 적이 있는데, 이라크에 굴러다니는 버스의 대부분은 한국의 중고 (좌석)버스입니다. 러시아, 중동 등에 촌스러운 색깔을 한 서울의 시내버스가 굴러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합니다. 그렇다고 중고차에 색칠을 다시 해서 팔아 먹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 굳이 버스 색깔을 구분해야 한다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원하는 색감을 나타낼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현재 버스 전체를 원색으로 하는 것 대신 버스의 지붕 꼭대기만 녹색선, 빨강선을 한 줄 혹은 두줄 정도 긋던지, 아니면 버스 전방이나 옆면의 색깔을 조정하여 원하는 색감을 충분히 전달
인터뷰/韓佛 문화교류의 전령사 프랑스와 데스쿠엣 駐韓 프랑스 대사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김치의 맛이 최고이지요』 -프랑스 문화축제 「랑데부 드 서울」 주최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만남에 노력 -김치 50여 종 맛 본 김치愛好家 약력 국립행정대학원(ENA)ㆍ파리정치학교(IEP) 졸업, 파리국립大 법학 전공, 駐日 대사관 서기관(1977~81), 駐인도 문정과학 참사관(1981~85), 駐日 오사카ㆍ고베 총영사(1986~88), 외무부 구주국 부국장(1988~91), 駐우간다 대사(1993~98), 외무부 감사관(1998~2001), 駐韓프랑스 대사(2001년 7월~현재), 프랑스 국가공로훈장ㆍ레지옹 도뇌르 기사장 수상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랑데부 드 서울」 지휘 2001년 7월 부임한 프랑스와 데스쿠엣 駐韓 프랑스 大使는 韓佛 문화교류의 전령사로 통한다. 그는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랑데부」(만남)에 힘써 왔다. 지난 5월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칸에서 개최된 제 57회 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作으로 선정된 것과 2002년 제55회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데는 그의 숨은 노력이 밑거름이 됐다. 駐韓 프랑스 대사관이 주최한 제 2회 프랑스 문화축제 「랑데부 드 서울」이 6월11일부터 19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세종문화회관 소극장, 야외공연장 등에서 열린 이 축제에는 클래식ㆍ재즈ㆍ록의 콘서트와 영화ㆍ야외공연ㆍ인형극 등이 매일 소개됐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 프랑스 영화제도 동시에 열렸다. 총 24편의 프랑스 영화가 소개됐다. 몇 몇 작품의 경우는 해당 감독과 배우가 직접 來韓(내한)해 한국팬들를 만났다. 프랑스 圖書 전시회도 열렸다. 데스쿠엣 대사가 부임한 후 韓佛간의 가장 큰 특징은 양국간 문화교류가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駐韓 프랑스 대사관은 서울市 미근동에 위치한 경찰청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지난 6월8일 공관에서 만난 그는 한국
충주호를 사랑하는 꾼들은 비를 기다린다. 80~100mm 정도 비가 쏟아져 수위가 오르면 갈수때 드러났던 육초가 잠기면서 깊은 수심에서 올라온 씨알 좋은 붕어들이 죽죽 찌를 밀어 올린다. 금년에는 6월 하순부터 이른 장마가 진다는데 그때가 멀지 않았다. 6월3일 현재 충주호 수위는 129.53m. 지난해보다 5m 이상 높게 유지되고 있다. 오름수위의 폭이 짧은 것은 붕어낚시에 그리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연안이 더 넓게, 더 오래 드러나서 육초가 충분히 자란 뒤에 수위가 올라야 붕어는 경계심 없이 풀씨나 풀벌레 등을 먹으며 새물을 타고 오른다. 낚시터 관리인들은 오름수위가 시작되기 직전 트랙터로 연안을 정비해 걸림을 줄이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오름수위를 향해 부풀어 오르면서 충주호는 그 전주곡으로 여기저기서 대물 붕어를 한두 마리씩 토해내고 있다. 5월30일 내사리 문골낚시터(043-851-5079)에서 41.5cm 대형 붕어가 얼굴을 내밀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6월1일엔 상류 청풍권 연론리에서 47.5cm짜리 떡붕어가 낚이기도 했다. 충주호에서 5짜 붕어를 한번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조황문의 : 충주낚시 043-848-1719.
백제 패망의 역사 현장 계백(階伯)장군이 이끄는 5천 명의 백제 군사가 황산벌에서 동으로부터 쳐들어 오는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군사와 혈전을 벌린다. 황산벌은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과 양촌면 일대. 신라군의 침공을 막았던 벡제의 마지막 보루인 삼영(三營)은 황산성을 가운데 두고 북쪽으로는 노성산성, 남쪽으로는 신흥리산성이 있다. 서기 660년 여름 군사수에 있어서 열세이면서 승승장구 하던 계백 장군은 신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끝내는 이곳에서 궤멸한다. 계백장군 역시 이곳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다. 그후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고 당나라에 끌려가면서 백제는 이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서울-조치원-공주를 거쳐 논산을 가다보면 노성읍내를 지나게 되는데 바로 읍내 뒷산이 노성산성이 있는 노성산(魯城山, 384m)이다. 동쪽에 있는 계룡산(845m)과는 노성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노성산 정상에는 백제시대때 쌓은 삼태기 모양의 둘레 894m의 석성이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노성산 기슭의 파평윤씨 집성촌에는 향토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280년 전에 지은 백의정승 윤증(尹拯, 1629-1714)선생 고택과 조선시대때 지은 노성 향교가 있고 1717년 숙종 43년에 지은 공부자(孔夫子)의 영정을 모신 노성 궐리사(闕里詞)가 있다. 노성산성은 면사무소가 있는 노성읍내 시멘트길을 따라 산으로로 올라간다. 상월면 구야고개에서 면사무소 뒷산까지 이어지는 임도와 만난다. 10분 정도 오르면 능선 옆으로 난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과 노성암-가곡리-구야고개로 가는 임도와 갈라진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소나무 숲길이다. 바람결에 스치는 솔향기를 맡으며 걷는다. 숲속 저만치에 복원해 놓은 높이 7-8m쯤 돼보이는 노성산성이 나타난다. 남측 성벽인 이곳을 지나 4-5m 높이의 창끝처럼 뽀족하게 다듬어 놓은 기암 괴석들이 늘어선 바위 사이를 지난다. 곧바로 느티나무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진영 봉하마을 가로수에 노란리본이 내걸렸다고 합니다. 헌재의 노대통령 탄핵 선고를 앞두고 노대통령이 무사히 돌아오라는 뜻으로 김해지역 노사모와 동네사람들이 매달아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 노란 리본 혹은 노란 손수건을 거는 것은 미국의 풍습니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을 환영하는 아내의 마음을 그린 유명한 팝송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라크와 전쟁 중인 미국에는 현재 노란리본이 걸린 지역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이처럼 근래들어 서양풍습을 따라 하는 모습이 부쩍 눈에 많이 보입니다. 작년 10월, 한국의 부자 동네에 있는 많은 유치원에서 할로윈데이 행사를 하느라 부모들이 앞 다투어 경쟁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할로윈데이는 가장 서양적인 풍습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로 치자면 「귀신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신날은 정월 보름 다음날로 이날 대문밖에 「채」를 걸어 놓거나 신발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 풍습이 있습니다. 어릴 때 경험한 전통 풍습은 아이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정월대보름 전날 쥐불놀이를 한다든지, 정초에 연날리기를 하는 것, 단오 때 아버지가 뒤뜰 나무에 새끼줄로 만든 그네를 태워주던 기억 등은 머릿속에 평생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기 마련입니다. 아직 철도 들지 않는 아이들이 호박귀신 가면을 뒤집어 쓰고 할로윈데이 풍습부터 배울 때 우리의 귀신날은 아이들로부터 낯설고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할로윈데이 때는 아이들이 가면이나 마녀복장을 하고 이웃을 찾아 다니며 사탕이과 과자을 얻곤 합니다. 우리나라 일부 유치원에서 경쟁적으로 벌였다는 그 할로윈데이가 좁은 유치원에서 가면만 뒤집어 쓰고 미국 흉내를 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할로윈데이를 제대로 흉내 내고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몇 달전, 모 인터넷
내성천은 낙동강의 큰 지류로서 경북 영주쪽에서 흘러나와 예천군을 돌아 거친 후, 안동에서 빠져나온 낙동강 원류와 합류하는 하천입니다. 이 내성천을 따라 백사장이 끝없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내성천의 수량은 그다지 풍부하지 않지만 넓은 백사장으로 인해 안동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 원류보다 그 폭이 넓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많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내성천을 따라 하류의 풍양까지 종일 걸어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백사장이 어느 곳 하나 끊어진 곳이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성천의 모래는 부드럽고 촉감이 좋을 뿐 아니라, 건축용으로도 최상품의 모래로 평가가 나 있습니다. 위 사진은 지난 5월1일 시골에 내려갔다가 내성천의 모래를 파내는 현장이 눈에 띄어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곳은 경북 예천군 호명면 월포리 앞을 흐르는 내성천 백사장입니다. 입구 안내문에는 예천군에서 오는 7월까지 모래 채취 허가를 내주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문제는 과연 오는 7월까지만 모래를 퍼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진은 사진 맨위의 모래 채취 현장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예천군 호명면 오천동 앞을 흐르는 내성천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1988년 경부터 무려 10년 가까이 모래를 파낸 현장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수십 대의 덤프 트럭이 쉴새 없이 모래를 퍼내더니, 제가 군에 갔다와도 모래 퍼내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년 더 모래 퍼내기가 계속되었고, 급기야 진흙바닥이 나와 더 이상 긁어낼 모래가 없자 이 일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일대의 모래의 양이 얼마나 어마어마 했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래가 너무 많이 쌓여 적당한 준설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1970년대 건설된 낡은 다리 바로 아래까지 모래가 차여 비만 오면 다리가 물에 잠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모래가 많이 쌓였다고 해도 10년 가까이 한 곳에서
뉴스의 人物/金石元 신임 전쟁기념관장 『전쟁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고 없이 우리 앞에 닥쳐오는 「현실」입니다. 애국심과 안보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비디오 세대들에게 視覺的으로 다가가는 기념관으로 거듭나겠습니』 지난 5월 10일 취임한 金石元(김석원ㆍ63) 신임 전쟁기념관장은 취임 一聲으로 『전쟁기념관을 模造品(모조품) 전시에서 탈피, 眞品(진품) 위주의 전시로 格을 한단계 높여나갈 방침』이라고 했다. 『6.25전쟁의 발발원인을 비디오 세대들에게 설명해도 피부로 느끼진 못합니다. 젊은세대들이 전쟁기념관의 전시물을 보면서 침략자가 누구인가하는 「解答(해답)」을 얻도록 하고, 戰禍(전화)를 이겨낸 한민족의 底力(저력)도 피부로 느끼도록 하는 게 전쟁기념관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金관장은 부임한 지 나흘만에 부서 업무보고를 통해 업무 챙기기에 나섰다. 그는 遺物(유물) 확보를 위해 국립박물관과 협조하기로 하는 등 東奔西走(동분서주)하고 있다. 1994년 6월 출범한 전쟁기념관은 연평균 100만명의 국내외 관람객이 찾는 아시아의 名所(명소)다. 金관장은 전쟁기념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기념관으로 도약해 청소년들의 護國(호국)의 전당으로, 가족 나들이 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했다. 金관장은 軍 시절 「작전통」 지휘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주변에서는 金관장을 겸손하면서도 추진력이 강한 군인으로 기억한다. 그의 이런 스타일은 吳滋福(오자복) 現 성우회장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金관장이 15사단 39연대 작전주임으로 있을 때 吳회장은 39연대장이었고, 이때의 인연은 軍 복무기간 내내 이어졌다고 한다. 1940년 경북 영주 출생인 그는 영주 제일고를 졸업하고 1962년 갑종 166기로 임관했다. 1968년 2월, 그는 맹호부대(사단장 尹必鏞 소장) 기갑연대 3대대 작전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한다. 그는 월맹군의 「구정 공세」 직후 戰場에 투입됐고, 「고보이 전투」등 越盟軍(월맹군)과 대대급 전투를 30여 차례를 치렀
미8군 사병 "SOFA 믿고 난동은 아니다" ------------------ 2004년 5월23일자 스포츠투데이에 실린 미 8군 사병 인터뷰입니다. 최근 주한미군 일부 병력의 이라크 차출과 관련, 미군들의 속내가 드러나 있어 눈길을 끕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서울 용산미군기지 앞이 최근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일부 미군의 칼부림 난동 사건과 미국 정부의 주한미군 이라크 파견 발표 등으로 미묘한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20일 기자가 찾은 용산미군기지 앞은 전경과 시위대들로 북적거렸다. 부대 앞을 지나가는 미군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위대를 애써 외면한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군당국에 따르면 미군들은 해외 파병이 필요할 경우 무작위 추첨을 통해 파병 인원을 결정한다. 또한 미국의 여러 해외 파병지 중 한국은 이라크에 이어 두 번째로 꺼려지는 곳이다. 전쟁 날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기 때문. 이런 가운데 익명을 요구한 두 젊은 미군이 스투와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최근 다시 들끓는 반미감정 때문에 속이 상하지만 떠날때 떠나더라도 한국에 머무는 그날까지 주어진 임무를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났다는 A하사(30). 그는 다들 꺼리는 한국근무를 ‘자원’했다.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우면서 알게된 ‘극동의 분단국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태권도 선생님의 나라를 내 손으로 직접 지켜주고 싶었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저를 반겨주지 않았어요. 연일 반미 시위가 일어나고 미군을 범죄자 취급했지요. 길거리에서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A하사는 “한국은 오랜 우방국가여서 우릴 반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 안 남은 계약기간이 채워지면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아마 다시 한국에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는 요즘 부대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이와 계급을 밝히기를 꺼린 B씨
'현산어보를 찾아서(청람미디어)'라는 책이 나왔을 때 저는 저자가 32살(현재 33세)의 젊은 교사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다섯 권으로 이루어 져 있는 이 책은 각 권이 4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현산어보(혹은 자산어보)는 다산 정약용의 형님인 정약전이 1801년 흑산도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흑산도 일대의 어류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란 책을 몇 장만 넘겨 보면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꼼꼼하게 자료 수집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책에 수많은 사진과 삽화 및 주석을 넣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으며, 정약전이 살았던 시대와 문화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이태원씨가 어제(19일) ‘신규장각’에서 개최한 ‘미래도서관 연구포럼’의 강사로 초청되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날 두 분의 강사가 초청되었는데 이태원씨를 비롯 ‘다시 쓰는 택리지'를 쓴 신정일씨였습니다. 이 두분의 강사를 초청한 ‘新규장각’은 ‘광화문에 도서관을 세우자’라는 목표를 내걸고 활동중인 미래도서관 연구 단체입니다. 그저께 사단법인 등록을 마쳤습니다(홈페이지 주소: http://www.kyujang.org/, 네이버 카페 주소: http://cafe.naver.com/kyujang.cafe). 현직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이태원씨는 이날 신규장각 포럼에 와서 ‘현산어보를 찾아서’란 책을 쓰게 된 동기와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이태원 선생님은 1996년 경 석사(서울대 생물교육학) 논문을 마치고 경남 마산에 있는 집에 갔다가 마산의 어느 서점에서 ‘자산어보’의 번역본(고 정문기 교수)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밤새 이 책을 읽어본 그는 200년 전 우리 조상이 이처럼 상세한 어류 조사보고서를 남겼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을 하나씩 규명해 보고 자세한 번역본을 내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그 후 李선
시즌 맞은 계곡형 맹동지 신록의 골짜기마다 월척 몸부림 물에 잠긴 버드나무숲의 어른거리는 초록빛 수면에 떠있는 오색찌. 그 주변을 맴돌며 철퍼덕거리는 붕어들이 어신을 기다리는 꾼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산새들의 울음소리 울려 퍼지는 맹동지 상류의 새벽. 부스스 일어난 꾼들이 수몰 버드나무 근처로 조용히 찾아올 대물을 기다리고 있다.〉 5월2일 충북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에 있는 맹동지. 32만평 수면의 크고 작은 45개 골짜기마다 낚싯대를 드리운 ‘神仙’들이 가득하다. 서울을 비롯해 경인ㆍ충청지역에서 4백여 꾼들이 찾아와 모처럼 화창한 봄날의 신록을 만끽하고 있었다. 1983년 준공된 물 맑고 수심 깊은 계곡지인 맹동지 붕어는 이웃 초평지나 원남지보다 산란이 늦다. 이제야 상류와 중류 골자리로 올라붙은 붕어, 잉어, 향어들이 산란을 하느라 사방에서 소란을 피운다. 이때를 놓칠세라 꾼들이 맹동지로 몰려들어 대물을 연신 낚아내고 있었다. 맹동지 중상류권 호황은 5월 중순까지 이어지다가 이후 밤낚시 시즌을 맞는다. 조황문의 : 음성 중부낚시 043-535-1432. 맹동지 관리소 이재노씨 011-465-1898. (월간낚시 6월) 〈최상류 수몰 버드나무숲은 대물 붕어들이 우글거리는 최상의 포인트〉 〈“건너편에서 밤새도록 떠드니까 붕어들이 다 이쪽으로 몰려 왔나 봐요.” 최상류 관리사무소 건너편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 자리를 잡은 이천꾼 한상진씨는 1박2일 동안 40여수의 붕어를 낚았다.〉 〈5월1일 직장 동료들끼리 밤낚시를 왔다는 박용규, 김경호, 이한영, 유형근(왼쪽부터)씨가 밤사이에 잡은 준척 월척 붕어들.〉 〈문정규(왼쪽)씨가 낚은 40cm 향어를 친구 김영민씨가 들어 보이고 있다.〉 〈“우리 아빠가 낚은 토종붕어래요!” 중류 밭자리에서 아빠가 잡은 뼘치붕어를 동생과 함께 살펴보는 윤혜리양.〉 〈글루텐떡밥을 투척하고 있는 서울꾼 황용하씨. 그는 아침8시경 상류 4번 골자리
지난 5월2일 일요일 종묘제례에 참여했습니다. 재 작년인 2002년의 종묘제례가 월드컵으로 인해 밤에 거행되어서 아쉬움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낮에 꼭 보고 싶었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종묘제례가 제대로 치루어 질 수있을 지 걱정을 하면서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날 종묘제례를 본 느낌을 이곳에 글을 쓰려던 차 마침 오늘(7일) 자 조선일보에 종묘제례 참석자가 쓴‘독자의 편지’가 있어 여기에 먼저 소개합니다. --------------조선일보 독자의 편지에서---------- 추한 한국인 모습 제발 벗어나자 지난 2일 아이들과 함께 종묘대제(宗廟大祭)를 관람하러 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와 제례악을 관람하려는 외국인 관광객과 일반관람객으로 붐볐다. 보슬비가 내렸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녀들에게 우리 전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잡은 문제되지 않았다. 자녀에게 자세히 보여주려고 한 손으로 우산을 든 채 2시간여 앞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뒤쪽 처마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변은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밀치고 들어온 한 아주머니는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뒤에 있던 친구까지 끌어들였다. 한쪽에선 30대 초반 여인이 앞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자녀를 야단치고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러 참석한 외국인들의 불쾌해 하는 표정을 보았을 때는 비참했다. 무례한 한국인이란 인상을 갖고 떠날 외국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다. 남을 배려해야 축제가 멋있어 진다. 김영서·서울보건대학 교수·경기 성남시 ------------------------------------------------------ 저는 30분 늦었기 때문에 위에 글을 쓴 교수님이 지적한 시간의 상황은 보지 못했지만, 위 지적이 아니더라도 종묘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이를 진행하는 주최측의 모습이 실망
엊그제 몇몇 일간지에 ‘우리의 김치가 일본의 기무치를 누르고 일본 자위대에 납품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 내용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김치가 일본에서 생산된 김치를 누르고 납품되었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문제는 언론이 이런 기사를 쓰면서 꼭 ‘김치’와 ‘기무치’가 마치 다른 음식인양 구별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기무치’는 ‘김치’의 일본식 발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미국의 ‘맥도날드’를 미국에서 발음하는 것같이 정확하게 발음 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노력해서 발음하듯이, 일본도 김치를 최선을 다해 원음(한국어)에 가깝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한국의 ‘김치’가 일본의 ‘기무치’를 이겼다”는 식으로 표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일본에서 생산된 김치가 일본인의 입맛에 변형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입니다. 맥도날드 한국지사에서 김치 햄버거, 불고기 햄버거를 만들어 팔듯이 일본도 그들의 입맛에 맛게 김치를 개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김치는 맥도날드처럼 어느 한 회사가 개발한 고유 브랜드가 아니고 음식 자체이기 때문에 일본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김치를 자기 입맛에 음식을 개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기무치’가 자위대에 납품되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단지 일본에서 생산된 김치가 납품되었다는 뜻이지 우리 김치가 맛이 없다거나 우리가 음식 전쟁에서 졌다는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자기 입맛에 맛는 김치를 ‘선택’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최선을 다해 김치를 ‘기무치’로 불러주는 것을 우리가 고마워 하지는 못할 망정 김치와 기무치가 다른 음식인 것처럼 구별하려고 달려드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일본이 ‘비빔밥’을 ‘비빈파’라고 부르면서 일본인이 좋아하는 바다 음식 몇 가지를 넣어 먹는다고 비빔밥의 국적이 어디 달아나지 않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인도의 ‘카레’라는 음식을 먹으면서 밥을 섞어 먹기도 하고,
만민(萬民)이 기대고 산 ‘生居鎭川’의 진산 만뢰산성 어디나 명산에는 대찰(大刹)이 있다. 그 뿐인가. 나무와 바위와 계곡에는 저마다 전설이 열려있다. 명산 기슭에서는 그 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명인들이 있다. 높기만 하다고 다 명산이 아니다. 산이 낮다 해도 산세나 풍기는 분위기가 뭔가 다른 산들이 있다. 김제의 금산사가 그렇고 경주 남산이 그렇다. 또 하나 옛부터 들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다 해서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라는 말 있었다. 그 말마따나 ‘생거진천(生居鎭川)’의 으뜸으로 알려진 만뢰산(萬賴山, 611.7m)이 진천에 있다. 일명 보련산·만노산·금물노산·이흘산이라고도 불렸던 이 산은 충남 천안시와 충북 진천군의 경계인 진천 연곡리와 백곡면 대문리에 솟아 있다. 만뢰산 기슭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3층목탑이 있는 보탑사가 자리잡고 있는가 하면, 통일신라시대 명장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탄생지가 있다. 수해(樹海) 한가운데 펼쳐져 있는 만뢰산 연봉들은 활짝 핀 연꽃을 닮아 꽃잎처럼 부드럽다. 만뢰산 정상은 그 가운데 제일 큰 꽃잎이다. 우리나라 불교건축의 정수로 꼽히는 보탑사 3층목탑은 바로 연꽃술에 해당하는 곳에 앉혀져 있다. 진천군에서 제일 높다는 만뢰산은 옛날부터 군사요충지였다. 정상에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쌓았다는 둘레 1,300m나 되는 석성이 있다. 빗물을 모아 두었다가 썼을 우물터와 망루터·깨진 토기와 와당 그리고 이곳저곳에 나뒹구는 돌무더기를 들춰보면서 1,500년 전의 만뢰산성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러나 최근 만뢰산의 모습이 확 바뀌었다. 우리나라에 3기 뿐인 고려 초기 때의 것으로 보이는 백비(白碑, 비문이 새겨있지 않은 비, 보물 제404호)와 5층 석탑만이 뒹굴던 비선골(碑立洞)에 큰 절이 섰다. 바로 그 절터에 우뚝 선 보탑사 3층목탑을 보려고 전국에서 수많은 산도들이 찾아온다. 20여 농가가 계단식 논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던 비선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