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3만 명이나 된다는 나라에서, 정작 시 잡지 한 권을 지탱하기 위해 분리수거까지 도맡는 발행인이 있다. 등단 60주년을 맞아 아홉 번째 시집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인문학사)을 펴낸 민윤기 시인 얘기다.
《월간시인》 발행인이자 서울시인협회 회장인 그는, 1966년 등단 이후 70년대 중후반부터 약 30년간 사실상 절필 상태였다. 정치적·사회적 환경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뜻밖에도 지하철 스크린도어였다. 2010년 새벽 등산을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던 그는 플랫폼에 내걸린 시들을 읽으며 스스로를 꾸짖었다. "시인은 시를 써야 시인"이라고.
어린 시절 《리더스다이제스트》 발행인 드윗 윌리스의 자서전을 읽고 '이 사람처럼 살겠다'고 결심한 소년은, 훗날 《주부생활》 《엘레강스》 《우먼센스》 등 10여 개 매체를 창간하거나 편집주간으로 이끄는 편집자가 됐다. 무료 일간지 《메트로신문》 편집국장을 끝으로 퇴직한 뒤에도 그는 《월간시인》이라는 '생애 마지막 소명'을 붙들고 있다.
이번 시집은 그 두 생애, 잡지인과 시인이 충돌하고 화해하는 지점을 날것으로 보여 준다.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는 평도 나오지만, 그게 바로 이 시집의 색깔이다. 격식을 버린 자리에 진실이 앉는다.
정기구독 한 부라도 더 하려고
한 부라도 미리 구독료 내는 정기독자 늘이려고
별별 기념품 행사 특집기사를 만들어보았다
시인이 3만 명이나 된다는 나라
전 세계 유일한 기록! 백만 부 팔리는 시집도 있고
일 년에 시집이 삼천 권쯤 나온다는 나라
몇 년 전부터 세계를 움켜쥐고 있다는 한류의 기본이
세종대왕님 창제한 한글 덕분이라는 걸 굳게 믿고
문학잡지 살길은 정기구독 뿐이야
남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문학잡지 하나 지탱하기 위해서
정기구독!
지금 나는 정기구독을 성경 구절처럼 되뇌며
시인들은 오로지
정기구독 하는 시인과
정기구독 하지 않는 시인
이분법으로 가려보며 살고 있다
— '사랑도 정기구독이 되나요' 전문

한 잡지 발행인의 절박한 독백이자, 한국 문학 생태계를 향한 블랙코미디다. 웃다가 서늘해진다. 세종대왕의 한글 덕분에 한류가 꽃핀다고 믿으면서도, 정작 문학잡지 하나 살리기 위해 '성경 구절처럼' 정기구독을 외쳐야 하는 아이러니. 민윤기는 그 모순을 시로 만든다.
망망대해로 고래 잡으러 나서는 노시인
젊은이라면 마땅히 마음 속에
고래 한 마리는 품고 살아야지
정호승 시인의 시에서 만난 구절이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송창식의 노래로 평생 위로를 받고 있다
송창식처럼 늦었지만 나도
이제 명이 다한 짐승 같은 고래 한 마리
청정한 바다를 더럽히는 고래 한 마리 잡으러
분노의 망망대해로 나가야겠다
포경선은 필요없어
시어를 두드리는 자판과
날카로운 낚시 같은 말만
있으면 돼
잡을 수 있어
이제 명이 다한 짐승 같은 고래 한 마리
저 바다 더럽히기 전에
— '고래사냥' 전문
정호승의 시구와 송창식의 노래를 경유해 다다른 이 시는, 노시인의 선언문처럼 읽힌다. 포경선 대신 '시어를 두드리는 자판'을 무기로 삼겠다는 다짐이다. 낡고 병든 것들, 시를 더럽히는 것들 을 향해 마지막으로 던지는 작살 같은 언어다.
간판도 시다, 도시도 시다
표제작 못지않게 인상적인 시가 '시 없는 간판 없고 간판 없는 시 없다'다. 오규원 시인이 텔레비전 광고에서 시어를 건진 것처럼, 민윤기는 서울 거리의 간판에서 시를 발굴한다.
정중한 라면
겸손한 술집 -낮술 대환영
디저트 연구소
……
맛없는 맥주 마시고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앞으로 오세요
오빠가 빽은 못 사 줘도 고기는 사줄 게요
— '시 없는 간판 없고 간판 없는 시 없다' 중에서
라면은 '정중'하고, 술집은 '겸손'하다. 이 우연한 형용사들의 조합이 민윤기에게는 시의 씨앗이다. "시인도 독자에게 이런 서비스 정신을 고민합시다"라는 자평은 40년 편집자 생애에서 나온 본능적인 독자 감각이기도 하다.
탄핵 촛불 앞에서, 임대료 걱정하는 시인
나는 요즈음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고 말한 전유성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 주장과 이념에 용기있게 다가가지도 담론과 사유에 빠지지도 않은 채 개인적인 너무도 개인적인 것으로 생애를 탕진하고 있다 "언어가 무기야!" 007 네버마인 주인공 본드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속삭이자 "아직도 당신은 베개 밑에 총 두고 자요? 그런 남잔 싫어!" 대답하고 돌아서는 여자에게 까여도 전혀 불만이 없는 본드처럼
나는 처가살이하며 죽는 날까지 박인환 시인이 살았던 청진동 중학천 개울가 생가 터와 천재시인 이 상이 금홍이를 데려다가 운영하던 제비다방이 있던 자리와 그 제비다방 바로 건너편「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로 유명한 박태원의 집터 다동 20번지 지척에서 아아! 무과수 제과점! 여드름투성이 중고등학생 시절 여학생들과 약속하면서 너 무과수 빵집 알지? 하며 자주 들렀던 무과수! 그 여학생들 이름은 모두 잊었지만 무과수 제과 곰보빵 맛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무과수 빵집이 있던 자리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나는 지금 명색은 발행인이지만 편집장 노릇에 원고청탁 정기독자 관리 홍보 활동 뿐만 아니라 분리수거 우편물 담당까지 일인잡지나 다름없는 시잡지를 만들고 있다 국정농단 사과하라 박근혜 퇴진 촛불 시위 행렬도 지켜보고 윤석열 탄핵하라 해체하라 주한미군 철수하라 물러나라 해체하라 피켓 들고 거칠게 외쳐대는 군중이 밀려왔다가 쓸려나가는 쓰나미 같은 시대의 물결 속으로 지지하면서도 뛰어들지 못하고 반대하지만 저항하지 못하고 임대료 관리비 낼 걱정 인건비 발송료 종잇값 외주비 인쇄비 이체할 고민거리들에 에워싸여
나는 좋은 시를 쓰기는 힘들고 시가 고픈데도 넘쳐나는 말로 넘어가며 투고된 시를 읽으며 지나온 삶보다 남은 미래를 응시하며 가라앉지도 잠수하지도 활짝 날개를 펴서 날지도 않는 이상한 몸짓으로!
—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전문
표제작은 이 시집 전체의 자화상이다. 박근혜 퇴진 촛불, 윤석열 탄핵 함성도 지켜보면서 뛰어들지 못하는 한 남자. 그를 붙잡는 것은 이념도 비겁함도 아니다. 임대료, 종잇값, 인쇄비다. 거대 담론 대신 생존의 디테일을 택하는 그 선택이 역설적으로 가장 솔직한 정치적 진술이 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에 희망이 무엇이냐
아버지 술 거나하게 취하면 동구 밖에서부터 부르던
그 노래 소리가 왜 새삼 그리워지는지,
…… 헐 어느새 나 그 나이 훌쩍 넘겨 장수하고 있구나
— '왜' 중에서
'왜'는 이 시집에서 가장 서정적인 시다. 야당 활동으로 온갖 눈총을 받다 예순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 나이를 훌쩍 넘긴 아들이 제삿날 밤 음복하며 아버지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어진다. '육십이면 살 만큼 사셨지'라고 무심히 여겼던 젊은 날의 아들이, 그 나이를 넘기고서야 느끼는 부채감과 그리움, 그 모든 것이 '왜'라는 단 한 글자에 담긴다.
그러니까 천구백팔십이 년 세상에서 큰일이 벌어진 때부터 햇수로 스물다섯 해째 시를 쓰지 못했다
누가 쓰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리 내가 시를 써 봐도 그게 저들을 향한
돌팔매질만한 힘도 없다는 거 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
그런 판결을 스스로 내렸었다
지금 다시 눈물이 나려고 한다 (2007)
— '스물다섯 해' 중에서
2007년에 쓴 이 시는 침묵의 자기 고백이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포기였다는 것, '돌팔매질만한 힘도 없다'는 자기 판결, 그것이 더 쓰라리다. 영화 한 편이 터뜨린 눈물이 25년 묵은 시심을 깨웠고, 그 시심이 결국 이 시집으로 이어졌다.
종이 책장 넘기는 소리로 읽어야 할 시
민윤기 시인은 '시만은 종이로 만들어 책장 넘기는 소리와 감촉을 느끼며 읽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평생 잡지를 만든 사람의 고집이기도 하고, 디지털 화면이 대체할 수 없는 감각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등단 60주년에 낸 시집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은 거창한 문학적 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시와 산문의 경계를 넘나들고, 고상한 시어 대신 간판 문구와 영화 장면과 아버지 노래, 생애 마지막 고백이 서로 뒤섞인다. 그러나 바로 그 잡스러움이 이 시집의 힘이다. 등단 60년, 편집자 40여년의 생애가 응축된 이 책은 '나는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아직 답하지 못한 한 시인이, 그 질문 자체를 시로 만든 귀한 결과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