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10월 1일 칠레에서 열린 2025 FIFA U-20 월드컵 경기에서 스페인과 멕시코가 2대 2로 비겼다. 사진=FIFA 유튜브 캡처
스페인 정부가 16세기 아메리카 대륙 정복 과정에서 원주민이 겪은 고통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식민 확장 이래 5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스페인 정부가 역사적 상처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는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사과는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호세 마누엘 알바레스 스페인 외무장관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마드리드에서 열린 전시회 ‘세상의 절반, 원주민 여성’ 개막식에서 입을 열었다.
“스페인과 멕시코의 관계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한다. 정복의 역사 속에서 원주민이 겪은 고통과 불의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
그는 이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페인 엇갈린 반응, 멕시코 “첫걸음일 뿐, 사과는 아직”
스페인 주요 언론은 이번 발언을 양국 관계 회복을 향한 상징적 제스처로 해석했다. 일간 엘파이스는 “500년간 이어온 역사적 긴장이 완화되는 순간”이라고 보도했다. 공영방송 RTVE는 “공식 사과는 아니지만, 스페인 정부가 더는 과거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보수 야당의 반발은 거셌다. 국민당(PP)과 이사벨 아유소 마드리드 주지사는 “정부가 스페인의 역사적 명예를 스스로 깎아내렸다”고 비판했다. 우파 진영은 정복을 ‘문명 전파’로 보는 전통적 시각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멕시코의 반응은 한층 냉정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은 “스페인의 인식 표명은 환영할 만한 첫걸음이지만, 사과와 책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못 박았다.
멕시코 일간 엘 유니베르살은 “유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원주민이 지금도 겪는 불평등은 식민의 그림자 아래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멕시코 원주민 인구는 전체의 약 20%를 차지하지만, 빈곤율은 전국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2019년 ‘사과 요구’ 이후 6년 만의 변화
이번 논의의 출발점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 대통령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와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서한을 보내 “정복의 잔혹 행위에 대한 사과”를 요청했다.
스페인 정부는 즉각 거부했다. “500년 전 사건을 현재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었다. 이후 스페인 국왕은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지 못하는 등 외교적 냉각기를 겪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 스페인은 한 발 물러섰다. ‘사과(apology)’는 아니지만 ‘유감(regret)’을 표명한 것이다. 이는 지난해 출범한 페드로 산체스 좌파 정부의 외교 노선 변화로 풀이된다.
‘유감’과 ‘사과’ 사이… 표현의 정치학
다만 이번에도 핵심 단어는 ‘사과’가 아닌 ‘유감’이었다. 스페인 언론은 이를 ‘외교적 절제’로 해석했지만, 멕시코 언론은 “역사적 책임을 피하려는 수사”라고 꼬집었다.
마드리드 외교안보연구소 후안 카스트로 교수는 “이번 발언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간 식민지 역사 대화를 여는 신호탄”이라면서도 “배상이나 공식 사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내다봤다. 그는 “다만 과거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스페인의 이번 행보는 유럽 전역에서 확산 중인 ‘식민지 역사 재평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벨기에는 콩고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검토 중이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영국 역시 케냐 마우마우 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고문과 학살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한 바 있다.
반면 프랑스는 여전히 알제리 식민지배에 대한 공식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식민지배는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사과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침묵을 깬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멕시코 일간 엘 피난시에로는 사설에서 이렇게 적었다.
“500년의 침묵 끝에 스페인은 ‘고통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는 선언이 아니라 실천에서 시작된다.”
양국의 역사 인식 간극은 여전히 크다. 스페인에게 정복은 ‘문명화의 과정’이자 ‘영광의 시대’로 남아 있지만, 멕시코에게 그것은 ‘대학살과 착취의 역사’다. 표현의 온도차만큼, 화해의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용어 설명]
정복(Conquista) :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한 과정. 원주민 인구의 90% 이상이 전쟁, 질병, 강제 노역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AMLO :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의 약칭. 2018~2024년 멕시코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