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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결정적 순간

인천상륙작전 성공 위한 양동(陽動)작전에 투입된 LST 문산호의 발자취

최초공개 - 장사동상륙작전 중 좌초한 문산호(汶山號) 선장·선원 명단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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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ST 문산호(汶山號), 6·25전쟁 당시 여수철수작전·장사동상륙작전에 투입
⊙ 민간인 신분의 선장과 선원 장사동상륙작전 중 전원 전사(戰死)
⊙ 최영섭 전 해군 대령(백두산함 갑판사관)·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노력으로
    문산호 선장·선원 이름 66년 만에 세상으로
⊙ “민간인이었던 문산호 선장과 선원 애국심 굉장했다”(최용남 백두산함 함장·최영섭 갑판사관)
1950년 9월 15일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의 모습.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한 북한은 강원도 동해안의 옥계, 정동진, 금진 등에 549육전대 1800명을 상륙시켰다. 묵호경비부사령관(김두찬 해군 중령)은 즉각 육군과 경찰 연합인 ‘합동 묵호 전투부대’를 편성하고 맞섰다. 아군의 화력으로 장기간 전쟁 준비를 해온 적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의 박격포격이 점점 치열해졌고 아군은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묵호경비부사령관은 퇴각을 위해 LST 문산호(汶山號)에 ‘동시 동원령’을 내렸다. 동시 동원령이란 선박은 물론, 민간인 신분인 선장(船長), 선원(船員)까지 동원하는 것이다. 당시 문산호는 석탄 적재를 위해 묵호항에 있었다.
 
1950년 9월 16일에 만들어진 문산호 선장과 선원 명단. 위에서부터 황재중(선장), 이찬석, 이수용, 권수헌, 부동숙, 박시필, 윤은현, 안수용, 이영룡, 한시택, 김일수 이상 11명. 이 명단은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에서 사망하자 육군이 해군 측에 인사 처리를 부탁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LST는 ‘전차 상륙함(Landing Ship, Tank)’의 준말이다. 선체가 넓적하고 평평한 구조여서 해안 깊숙이 진입이 가능하고, 뱃고물에는 출입구가 있어 사람 및 물자를 나르기 편하다. 문산호는 1943년 9월 인디애나의 제퍼슨빌(Jeffersonville)에서 건조했다. 태평양 함대에 배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활동했다. 1947년 2월 한국 정부에 매각되어 문산호라는 새로운 ‘함명(艦名)’을 부여받았다. 교통부(交通部) 산하 대한해운공사(大韓海運公司) 소속으로 밀가루, 석탄 운반 등이 주 임무였다.
 
  전투에 투입된 문산호는 퇴각하는 묵호 전투부대를 태우고 포항으로 철수했다. 아군은 철수에 성공했지만, 그곳에 남은 대부분의 주민은 북한군 549육전대와 처절한 전투 중이었다. 해군본부는 문산호에 묵호 전투부대를 다시 전투지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1950년 6월 28일 문산호는 묵호 전투부대와 무기를 싣고 포항에서 묵호로 이동했다. 이동 중인 6월 29일 오전 2시경, 묵호 근해에서 문산호는 정체불명의 포격을 받았다. 민간인 신분의 승무원 1명이 사망했다.
 
  문산호를 공격한 배는 USS CL-119, 미국 경순양함 주노(Juneau)였다. 포격을 받은 문산호는 항해를 멈췄다. 배에 타고 있던 강점복 중위(해군정보장교)는 상륙주정(上陸舟艇)으로 주노함에 가서 문산호가 한국 함정임을 알렸다.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문산호는 포항으로 회항했다.
 
  주노함의 문산호 타격은 대한민국 해군 수뇌부가 UN군에 대한민국 해군이 아직 묵호항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수철수작전
 
1950년 7월 27일 여수철수작전 때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문산호를 엄호했다.
  1950년 7월 26일 북한군 사단은 순천을 점령하고 여수로 남진해 왔다. 북한군 사단은 김일성의 ‘비밀병기’였다. 부산을 측면 공격해 단번에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기 위해 준비한 회심의 카드였다. 적 6사단은 북한군 내에서도 정예부대로 통했다. 이 부대 병력은 전원 중공이 국공내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할 때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들’이었다. 적 6사단의 임무는 빠른 속도로 호남을 장악하고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을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날 오전 최용남 ‘PC-701 백두산함’ 함장은 문산호 황재중 선장에게 이같이 부탁했다.
 
  “선장님, 어려운 일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적군이 순천에 들어와 우리 육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육군은 병력도 적도 무기도 부족해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적과 싸우면서 이곳(오동도)으로 후퇴해 올 것입니다. 선장님이 후퇴하는 우리 장병을 수용해 후송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지금처럼 램프(경사로)를 부두에 대놓고 대기해 주십시오. 백두산함 지시가 있기 전에는 절대 배를 떼지 마십시오. 한 명의 병사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백두산함은 화력으로 문산호를 엄호하겠습니다.”
 
 
  쏟아지는 적탄에도 버틴 문산호
 
좌초한 대한민국 민간 상륙정 ‘문산호’와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국군 제1유격대대(명부대) 소속 학도병.
  황 선장은 “함장님 지시하신 바를 잘 알았습니다. 명심하고 지시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 위해 싸워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답했다. 최 함장은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밤 이응준 장군과 이형근 장군이 문산호에 타실 겁니다. 잘 모셔주십시오”라고 했다. 황 선장은 “네,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 최 함장과 황 선장은 악수하며 눈빛으로 서로 신의를 교환했다.
 
  1950년 7월 27일 새벽 우리 육군과 경찰 혼성부대는 여수역 서북쪽 약 5000m에 있는 석천사(石泉寺) 능선에서 적을 저지했으나, 적 6사단 제1연대는 새벽 6시경 시내로 진입했다. 후퇴를 시작한 육군부대는 속속 최 함장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던 문산호로 들어왔다. 이응준 장군(서남지구 전투사령관)과 이형근 장군(제2사단장)도 승선했다. 이응준 장군은 일본 육사(26기) 출신으로 국군 창군의 산파역을 맡은 인물이다. 이형근 장군은 이응준 장군의 맏사위로 그 또한 일본 육사(56기) 출신이다. 1946년 한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대위로 입대, 이후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제2사단장, 제3군단장, 초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새벽 6시30분경 문산호가 대기하고 있던 부두 앞 약 300m 언덕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박격포탄이 부두에 떨어지고 기관총탄은 불꽃을 날리며 하늘에 피어올랐다. 백두산함은 문산호에 대한 엄호사격을 했다. 아군 병사들은 포복으로 사격하며 문산호 램프로 들어왔다. 적탄에 맞아 피 흘리는 전우를 끌어 들어오는 병사도 많았다. 적 소총과 기관총탄이 문산호에 집중됐다.
 
  문산호는 적탄을 맞으면서도 최후의 병사 한 명까지 구출하려고 버티고 서 있었다. 마지막 병사가 뒷걸음으로 문산호 램프를 밟았다. 최 함장은 문산호에 출항명령을 내렸다. 문산호는 램프를 걷어올리고 앵커(닻) 체인을 감았다. 백두산함은 언덕에 포진한 적군에게 기관총과 함포를 퍼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백두산함의 호위를 받은 문산호는 무사히 무슬포 해역에 이르렀다.
 
장사상륙부대는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정도 훈련을 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학도병들.
  최 함장은 문산호에 묘박(錨泊) 지시를 했다. 이응준 장군은 황 선장에게 “고맙습니다. 우리 부대를 구하려 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이 은혜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황 선장은 “최 함장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했다. 문산호가 여수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순간이었다.
 
  최 함장의 지휘로 문산호를 엄호한 백두산함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이다. 1945년 11월 11일 3군 중 가장 먼저 창설된 해군은 전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 미국에서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군함 구입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군의 전 승조원이 월급에서 5~10%씩을 냈다. 이렇게 모은 성금은 1만8000달러.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4만2000달러를 보탰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6만 달러를 가지고 1949년 10월 1일 미국으로 건너가 군함을 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8일 건조한 군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8년 5월 미 상선학교 연습함으로 이관되어 사용되던 비교적 신형 함정이었다. 우리 해군은 산 함정을 백두산함이라 이름 지었다. 백두산함은 최초의 전투함답게 대한해협에서 부산항 부두시설을 파괴하려고 침투하던 북한 수송선을 격침하는 공로를 세웠다.
 
  6·25전쟁이 일어난 날 북한은 후방인 부산 지역을 교란하기 위해 특수부대원을 태운 함정을 대한해협 쪽으로 우회 침투시켰다. 이때 최용남 함장이 이끄는 백두산함은 이 배를 발견하고 격침해 버렸다. 개전 첫날 육군은 6사단 7연대를 제외하고는 방어전에 실패해 전부 무너졌는데, 해군은 괄목할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전공이 없었다면 북한군 특수부대는 부산에 상륙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국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장사동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
 
유엔군이 북한군에 밀리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유엔군이 북한군에 밀리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밀고 밀리는 전투 중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서울을 탈환한다는 구상이었다. 상륙전은 그의 장기(長技)였다. 태평양전쟁 때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을 점령하며 필리핀을 거쳐 일본의 코앞 오키나와까지 상륙해 온 ‘상륙전의 귀재’가 바로 맥아더 장군이다.
 
  그런 맥아더 장군도 인천상륙작전은 ‘5000대 1의 도박’이라고 말했을 만큼 성패(成敗)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빠른 조류, 지원 함정들이 함포사격 하기에도 불리한 얕은 수심, 심한 조수 간만(干滿)의 차 등 대부대의 상륙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악조건을 두루 갖춘 탓이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가 기만전술에 있다고 봤다. 어디가 목표인지를 숨기려는 유엔군과 알아내려는 인민군의 정보전이 치열했다. 맥아더는 미(美) 5해병 연대원들에게 ‘군산(群山)’이란 이름을 흘리면서 인천에서 작전을 펼치기 하루 전 동해안 장사(章沙)에서 양동(陽動) 작전을 펴기로 했다. 작전명 174. 장사동상륙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작전에는 여수철수작전을 성공시킨 문산호가 투입됐다. 제1유격대대 4개 중대(772명)를 태운 문산호는 1950년 9월 15일 새벽 4시 반, 장사동 해안에 도착했다. 부산을 떠난 지 이틀만이었다.
 
  상륙부대는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이들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정도 훈련을 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실탄을 채 10발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에서 보급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 약간,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전부였다. 원래 이 작전은 위험한 임무 특성상 미 8군이 수행해야 했지만, 미군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 군에 떠넘겼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육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들에게 작전을 배정했다. 부대장 이명흠 대위 이름을 따 ‘명(明)부대’로도 불렸던 이들을 태운 문산호는 장사동 근해에 함미닻을 투묘(投錨)하고 해안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명흠 대위가 손가락으로 접안(接岸) 장소를 가리켰다. 황 선장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 이 대위는 작전 지점이라며 접안을 지시했다. 황 선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때맞춰 내습(來襲)한 태풍 ‘케지아’ 때문에 암초에 걸린 것이다. 북한군의 집중포화가 시작됐다.
 
  “바다에 빠져 고기밥이 되는 것보다 육지에 올라가 까마귀밥이 되는 게 낫다.” 이 대위의 상륙(上陸) 명령이 떨어졌다. 새벽 5시 반이었다. 해변까지는 50여m. 파도 높이는 4~5m에 달했다.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배에서 나오던 대원들은 해발 200m 고지에 포진한 북한군 2군단 예하 101보안부대의 기관총 세례에 차례로 쓰러져갔다.
 
  류병추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장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졌고, 죽고 사는 기로에 선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었다”고 회상했다. 많은 대원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대부분의 탄약도 바다에 유실됐다.
 
 
 
상륙작전 과정에서 선장·선원 전사

 
영덕군이 복원한 문산호. 영덕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학도병들이 큰 희생을 치른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장시간의 사투(死鬪) 끝에 ‘명부대’는 상륙에 성공했다. 황 선장과 선원들도 함께였다. 문산호에 파견됐던 미 해군 쿠퍼 상사는 해군본부에 문산호와 명부대의 상황을 알렸다. 해군본부는 인왕(LT-1)호를 현지에 급파했다. 명부대의 상륙 다음날인 1950년 9월 16일 오전 7시 현지에 도착한 인왕호는 문산호 구출에 착수했지만, 실패하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이 사이 유격대원들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적진지를 파괴하고, 도로와 교량을 폭파했다. 이 과정에서 ‘유격전의 귀재’로 불렸던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 황 선장과 선원 전원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장사동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작전인지도 모른 채 북한군 정예 병력과 악착같이 싸웠다. 명부대의 기세에 인민군은 포항에서 대규모 병력을 빼 장사 해안으로 출동시켰다. 이 와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전쟁의 주도권이 아군으로 넘어왔다.
 
  해군본부는 1950년 9월 18일 상륙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LST 조치원호를 현지에 보냈다.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9월 19일 오전 6시였다. 적의 공격 탓에 배를 해안에서 200m쯤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세웠다. 상륙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다. 북한군은 아군이 다시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더욱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대원 다수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거나 높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조치원호와 함께 이들을 데리러 온 미(美) 해군 LT(해난구조함) 함장 피어드 소령은 “군장을 벗어 던지고 살아남는 데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대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헤엄쳐 배에 올랐다.
 
  류병추 회장은 “병사 목숨을 아끼는 미군 태도에 감동했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국군 지휘부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느냐’는 반응이었다. 상륙작전에 학도병과 일반 화물선을 투입한 점을 보면 희생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상륙부대 학도병 39명은 적의 공격과 구명대가 유실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배에 오르지 못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복귀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맞았다. 일부는 우리 군이 북진(北進)하는 과정에 합류했다.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고규혁씨는 훗날 《버림받은 충혼》(1993)이라는 수기를 펴냈다. 살아서 부산으로 돌아온 학도병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곧 다른 작전들에 투입되고,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을 실행했다는 사실은 묻혔다.
 
  한국전쟁의 비사(史)가 세간에 공개된 것은 생존해 있던 당시 ‘상륙부대’ 학도병들이 1980년 7월 14일 ‘장사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를 결성하면서다. 동지회는 경기도 양평 소재 청운사 주지 스님과 함께 전국적 모금운동을 펼쳐 1991년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하던 그날을 기해 장사리 해안에 위령탑과 전적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매년 위령제를 올리며 꽃다운 영혼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덕인지 1997년 3월 6일 문산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장사리 앞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제1사단 대원들이 바닷속 갯벌에서 문산호를 발견한 것이다.
 
 
  문산호 선장과 선원의 발자취
 
최영섭 전 해군 대령(백두산함 갑판사관). 그는 “여수철수작전 때 만난 문산호 선장과 선원의 애국심이 상당했다”고 회고했다.
  학도병들과 문산호는 역사 속에서 부활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 문산호의 선장과 선원들이다.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에 투입돼 철수작전, 상륙작전을 수행한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단서는 전혀 없을까. 《월간조선》은 이들의 명단을 입수했다.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을 통해서다. 그는 한국군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다.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최영섭 대령을 만났다.
 
  ― 문산호 선장과 선원들의 흔적은 어떻게 찾게 된 것입니까.
 
  “이름없는 영웅들을 같이 기억하고 기리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국가와 공동체의 위기에 나서주겠습니까. 제 나이가 90(1928년생)이 다 되어 갑니다. 4년 전쯤인가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을 적어놓은 목록)’를 적었는데 그중 하나가 문산호 전사자에 대한 신원 확인입니다. 제가 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한국선주협회, 해기사협회, 해운조합 등에 연락해서 흔적을 찾으려 했는데 전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에게 부탁했습니다. 임 박사가 제 부탁에 해군이 보관하는 자료란 자료는 모두 뒤져 명단을 찾아냈습니다.”
 
  동석한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에게 ‘덕분에 문산호 선장·선원의 이름이 66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고 하자, 그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임 과장이 찾아낸 문산호 선장·선원 명단은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에서 사망하자 육군이 해군 측에 인사 처리를 부탁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 6·25전쟁 중에 이름없이 죽어간 영웅들이 많은데, 하필 문산호 선장과 선원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우리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습니다. 1950년 7월 26일 여수철수작전 당시 문산호를 백두산함이 엄호했지요. 그때 문산호 선장을 처음 봤는데, 애국심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아주 용감했어요. 선원들도 마찬가지였고요.”
 
  ― 문산호 외에도 조치원호, 안동호 등의 LST가 차출돼 활약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LST의 선장과 선원은 전쟁으로 전사하지 않았습니다. 문산호 분들만 돌아가셨지요.”
 
  ― 문산호 선장과 선원의 유가족은 국가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나요.
 
  “6·25 전사자 연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유가족은 만나보셨나요.
 
  “만나진 못했지만 황재중 선장 따님은 지금 치매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 선원들의 유가족은 찾지 못했습니까.
 
  “선원 3~4명의 자식은 찾았습니다. 모두 어렵게 살고 있죠.”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최근에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나이를 먹으니까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제 꿈은 문산호에 탔던 민간인들에 대한 추모사업을 하는 겁니다. 미국, 이스라엘 군대가 강한 이유를 아십니까.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것을 국가가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국가의 책무입니다. 우리 국민의 책무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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