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이란 혁명에서 비롯된 제2차 오일 쇼크는 경제위기와 사회 불안을 부르고 부마사태를 거치면서 10·26 박정희 시해, 12·12 군사변란, 5·17 계엄 확대, 5·18 광주사태로 이어진다.
경제가 건국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니 국민들도 시위대에 냉담해지고 전두환 그룹의 권력을 향한 진격은 멈출 수 없게 된다.
석유 문제가 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세운 원동력이었다.”
경제가 건국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니 국민들도 시위대에 냉담해지고 전두환 그룹의 권력을 향한 진격은 멈출 수 없게 된다.
석유 문제가 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세운 원동력이었다.”

- 1980년 5월 20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다.
나는 한 주제를 잡으면 깊게, 지속적으로 캐고 들어가는 성격이 있어 수사식 취재(이를 탐사식 보도라고도 한다)를 즐겨 하게 되었다. 《월간조선》은 시간과 지면을 많이 주는 매체이기에 그런 심층 취재가 가능했다. 이런 취재는 자연스럽게 책 쓰기로 이어졌다.
여러 가지 전문 기자
1979년 11월에 뿌리깊은나무에서 펴낸 최초의 저서는 《석유 사정 좀 환히 압시다》였다. 히로뽕을 둘러싼 한일(韓日) 범죄조직 내막을 다룬 《코리언 커넥션》은 신성일 주연·감독의 영화로도 변형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고문과 조작 사건의 폭로를 기폭제로 하여 가속도가 붙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쓴 《마당》과 《월간조선》 기사는 《김기철씨는 왜 요절했나》(〈신화 1900〉이란 연극의 근거)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이 자료를 근거로 삼아 이수근에게 재심에서 무죄 선고)로 커졌다. 지난 1년간 SBS의 인기 프로그램인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선 내가 쓴 심층 취재 기사 세 건이 방영되었다.
공군에서 요격관제병으로 복무한 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어 1983년의 KAL 007기 격추사건, 1987년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도 깊게 취재하였고 범인 김현희씨와 오랜 인연을 이어갔으며 두 권의 책을 썼다.
부마사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2·12 군사변란, 5·17 계엄 확대(신군부 집권), 5·18 광주사태에 대한 장기간의 취재는 각 사건마다 한 권씩의 실록으로 남았다.
이런 심층 취재는 일간지나 방송보다는 취재 시간이 충분하고 지면도 넓은 월간지에 딱 맞는 종목이다. 나는 월간지의 장점을 특종 추적이나 심층 취재에 활용한 기자로 기억될 것이다.
1972년부터 내가 석유 발견 특종의 꿈을 좇아 기름 문제를 파고든 경험은 그 뒤 나의 지적(知的) 재산이 되었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가장 정치적인 광물’인 석유의 본질을 알게 되면 급변하는 정세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 요사이 진행 중인 이란 전쟁과 제3차 오일 쇼크는 제1차(1973년), 2차(1979년) 오일 쇼크를 취재한 경험에 비추면 제대로 보인다. 1982년 초 이란-이라크 전쟁 중, 쿠웨이트에서 원유 20만t을 실은 유조선(동해 2호)을 타고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 한 달 만에 울산항에 도착한 이야기를 방송에 나가서 하면 말발이 서기도 한다.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
《석유사정 좀 환히 압시다》(1998년)이러니 국민들은 현상 유지로 기울고 학생들과 야당의 민주화 요구는 먹히지 않게 된다. 그런 가운데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세력은 분열하고 신군부는 군사작전 하듯이 정권 쟁취를 향하여 진격한다. 나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에 석유의 결정적 영향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석유라는 현대문명의 본질적 주제를 잡았으므로 부산에 있으면서도 세상 흐름을 넓게, 깊게 볼 수 있었다. 최근 트럼프가 이란을 기습공격한 직후부터 나는 “이란 정권이 아닌 이란 국민과 문명을 공격한 것이라 이길 수 없다”면서 “미군은 이겨도 트럼프는 질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석유 사정 좀 환히 압시다》의 머리글에서 나는 재단법인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으로부터 받은 저술 및 출판 지원금 70만원의 격려에 힘입어 씌어졌음을 밝혔다.
신문기자 생활을 아홉 해째 해 오면서 버릇이 생겼다. 마감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다가서야 비로소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긴다. 시간에 쫓기면서 후다닥 갈겨 써내려 가다가 마침표를 찍는 것과 함께 다시 돌아보기도 싫다는 듯이 원고를 팽개쳐 버린다. 저술지원금 칠십만원은 그러한 직업적인 타성에 빠진 나를 채찍질하여 글을 쓰도록 몰아세우는 구실을 했다.
이 책의 본문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석유는 마력의 광물이다. 무성(無性)의 광물이 아니라 의지를 가진 광물이다. 뜨거운 정열을 부르는 액체다. 투기자의 꿈, 정치인의 의지, 기자의 호기심, 대중의 환상을 자극하는 석유! 석유가 나온 곳에서 역사가 바뀌었고 좌절과 희망이 엇갈렸다. 석유가 나오는 곳마다 인간과 역사의 드라마가 새겨졌다. “세계는 석유 위에 떠 있다”는 말대로 근대 세계사는 석유를 빼고는 쓸 수 없게 됐다.
김기철씨는 왜 요절했나?
고문 피해자 김기철씨의 사망을 다룬 1980년 3월 17일 자 《국제신문》 기사.1980년 3월 17일 내가 근무하던 《국제신문》 사회부 이문섭 기자가 쓴 박스 기사는 그 뒤 나의 행로를 바꾼다.
한때 아무 죄 없이 김근하(金根夏)군의 살해 공범으로 몰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김기철(金基哲·43)씨가 15일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웠던 일부 수사관들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한 인간을 흉악범으로 몰아, 그의 인생을 완전히 파탄으로 끝나게 한 것이다. 김씨는 범천동 산꼭대기 5평짜리 슬라브 단칸방에서 폐병으로 죽어 갔다. 그 누구 하나 임종을 지켜 주는 사람 없이, 한 점 혈육도 남기지 못하고. 그의 친구이자 유일한 병구완자였던 이웃집 홀아비 전모(48)씨가 술기운으로 잠시 졸다가 새벽 4시쯤 눈을 떠 보니 김씨는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한다.
1967년 10월 17일 과외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국민학교 5학년 김근하(당시 11세)군은 자기 집 근처 골목길에서 괴한에게 목이 졸리고 가슴에 칼을 맞고 피살되어, 군용 링거 박스에 넣어진 채 택시로 운반되어 해안 길에서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260일 만인 다음 해 5월 29일 검찰은 김군의 외삼촌 C씨(40)·K씨(33)·J씨(21) 등과 함께 김기철씨를 범인으로 붙잡았다고 발표했다. 그해 11월의 1심에서 피고인들에게 유죄 선고가 있었으나 그다음 해 3월과 7월 고법과 대법에서 연달아 무죄를 선고받아 모두 풀려났다.
고문 수사의 처참한 後果
이 기사는 김기철씨가 수사 과정에서 겪은 고초와 심적 충격으로 출소 후 한동안 거의 몸을 쓰지 못할 정도여서 상당 기간 맏형 집에서 요양을 해야만 했다고 전했다. 이문섭 기자는 “김씨의 죽음은 무지막지한 수사가 한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고 썼는데 나는 언젠가 이 사건을 깊게 다뤄야겠다고 명심했다.
그 석 달 뒤 해직당한 나는 1981년 서울로 옮겨 새 월간지 《마당》에서 취재부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김기철씨는 왜 요절했나〉라는 제목으로 석 달간 심층 취재 기사를 연재했다.
김근하 피살사건은 1982년 10월 17일에 공소시효(15년)가 끝났다.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날 나는 범인은 잡지도 못하고 검찰과 경찰이 경쟁적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든 이 사건 수사의 결산표를 만들었다.
먼저 수사 편에 선 사람들의 근황을 살폈다. 2차 수사검사 김태현씨는 요직을 두루 거친 뒤 부산지검장을 끝으로 1980년에 검찰을 떠나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홍조근정훈장도 받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근하 사건 수사 실패가 큰 상처로 남지 않았음이 명백했다. 김 검사 팀의 다른 두 검사, 정경식씨는 부장검사, 이원형씨는 국회의원으로 있었다. 1차 수사에서 ‘가짜 범인’을 만드는 데 관여했던 두 경찰 간부는 은퇴 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피해자 쪽에 선 사람들의 삶은 황량했다. 초대 ‘진범’ 전경렬씨는 경찰에서 풀려난 뒤에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동과 암자를 오가다가 그때는 결혼하여 부산에서 봉급생활자가 되어 있었다. 약을 계속 먹고 있으며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가 있다고 했다. 김기철씨는 출소 뒤 고문의 후유증으로 42세 총각으로 요절, 어머니는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리자 충격을 받고 드러누웠다가 무죄 확정을 몇 달 남겨 두고 죽었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입을 굳게 닫고 말 없는 사람이 되어 혼자 살아가다가 아들 사망 1년 뒤 죽었다.
패가망신
제2차 조작 수사 때 공범으로 몰렸던 최형욱씨는 출소 뒤에도 자신을 보는 이웃의 눈초리를 견디지 못하고 대구, 서울로 옮겨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정대범씨는 용접공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수사와 교도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몸이 성치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사건으로 심장병을 얻었고 할머니는 충격을 받고 일찍 죽었으며 집안 살림은 몰락했다.
허위제보자 김금식씨는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방조범으로 조작되었던 교도관 네 명은 무죄 확정 뒤 모두 복직했다. 그들이 다른 피해자들보다 일상 복귀가 순조로웠던 것은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리라.
김근하군의 아버지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결국 경찰과 검찰의 무지막지한 수사는 세 사람의 생명을 일찍 앗아 갔고, 네 집안을 몰락시켰으며, 다섯 사람에게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후유증을 남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구미제 사건으로 끝나 버린 김근하군 피살과 생사람 잡은 수사는 그 뒤 연극과 방송 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 기자와 검사들이 참고하는 사례가 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같은 사건이 역사를 바꾸는 것은 기자들이 이 시기 고문과 조작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과도 연관된다.
당시 경찰서에선 고문이 기자들의 양해(?) 하에 경찰서 조사실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기도 했다. 물론 소매치기, 강도 같은 피의자들에 대한 형사들의 강압 수사가 대부분이었으나, 고문이란 것에 맛을 들이면 형사나 검사는 쉬운 자백 유도 방법으로 이를 남용하게 되고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요 성과로서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수사기관의 고문 풍조를 없앤 점을 든다. 기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북사태 현장에서
사북사태를 다룬 1980년 4월 24일 자 《국제신문》 기사.나중에 언론이 ‘서울의 봄’이라고 이름 붙이는 시기, 기업 경영은 악화되는데 노동자들의 욕구는 분출하기 시작했다. 계엄령 하에서도 노사분규가 잇따랐고 계엄군은 개입을 자제했다.
1980년 4월 강원도 탄광촌에서 사북사태가 터졌다. 4월 23일부터 사흘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광부들의 소요로 한 명(경찰관)이 죽고 91명이 다친 그 현장에 나는 부산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가 있었다. 임금 인상과 어용(御用) 노조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면서 4월 18일부터 농성을 벌여 온 사북광업소 광부 가족 등 6000여 명이 21일과 22일 경찰과 충돌, 경찰관 1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광부들과 가족들은 곡괭이를 휘두르며 사북 읍내의 전(全) 관공서를 점거하고 한때 노조지부장의 아내를 끌고가 옷을 벗기고 조리를 돌린 다음 연금(軟禁)까지 했다.
강원도경국장의 지휘로 경찰이 사북지서를 탈환하려 진입하자 광업소에 있던 광부 1000여 명, 시내에 있던 광부 1000여 명이 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였다. 이덕수(李德洙) 순경이 광부들이 던진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1980년대의 시위 현장에서 기자가 안전한 곳은 돌이 날아오는 경찰 쪽이 아니라 돌을 던지는 시위대 쪽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사태를 수습한 광산노조와 광업소장 사이의 합의문엔 ‘현재 250%인 상여금을 400%까지 인상한다. 1~2월 임금 인상 소급분 20%는 5월 말까지 지급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 사북광업소 근로자의 평균 월급은 15만 5000원이었다. 9년 차 기자이던 나의 월급은 당시 37만원이었다.
사태가 수습되고 탄광촌도 평온을 되찾았을 때 우리 기자 일행도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동원탄좌 광업소 입구에서 취재차를 돌리는데 한 광부가 뛰어왔다. 마흔을 넘었을까. 수염이 듬성듬성 난 노리끼한 얼굴이었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흐물흐물해질 만큼 낡아 버린 누런색의 월급봉투였다. 그 광부는 그 전날 내가 광부들의 임금 실태에 대해 취재한 사람이었다. 복잡한 광부 임금 체계를 잘 알아듣지 못하자 “월급봉투를 가져오겠다”고 그는 말했다. 광부는 봉투 뭉치를 건네주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를 잘 써 주십시오. 봉투는 꼭 돌려주셔야 됩니다.”
그 3년 뒤 나는 《마당》 기자로서 사북을 다시 찾아 취재하게 된다. 1962년부터 탄을 캐던 이 광업소는 2004년에 문을 닫았다.
개발연대에 사회부 기자들이 가장 자주 쓴 떼죽음 기사는 해난(海難)사고와 광산 붕괴 사고였다. 수산회사가 몰려 있던 부산 서구를 관할지로 삼았던 나는 원양어선 침몰 사고를 자주 취재해야 했다. 실종된 선원 집을 찾아가서 통곡하는 가족 앞에서 사진을 구해야 하는 내 모습도 말이 아니었다(당시 신문은 실종자들 얼굴 사진을 다 올리는 경쟁을 했다). 1970~80년대 선원과 어부의 사망자는 연간 수백 명, 광산 사고 사망자는 누계로 수천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땅 위에 사는 이들은 바다와 땅 밑에서 일하는 이들의 고생을 잊기 쉽다.
동명목재 강석진의 몰락
동국제강 소요 사태를 다룬 1980년 4월 30일 자 《국제신문》 기사.사북 취재에서 돌아온 며칠 뒤 나는 부산 남구 용호동 동국제강 소요사태 현장에 가야 했다.
1000여 근로자, 경찰과 충돌. 공장 기물 부수고 건물 방화. 임금 인상 요구 사흘째 농성, 대치 경찰관 등 13명 중경상
강석진 동명목재 창업자. 사진=조선DB4월 12일엔 동명목재 창업자 강석진(姜錫鎭·1905~1984년)씨가 머물던 불교 시설에 강도가 들어 노(老)기업인을 칼로 협박, 금품을 앗아 갔다. 1950~60년대에 한국에서 제일 부자는 이병철, 정주영이 아니라 강석진으로 통했다. 동명목재를 설립, 합판 수출로 소득세도 가장 많이 냈던 그는 부산 좌천동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당시 50대였던 그를 가끔 볼 수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였고 늘 작업복 차림으로 뭔가 일을 하는 모습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해 합판으로 만들어 파는 사업은 부산에서 번창했는데 중화학공업 건설이 시작되는 1970년대에 들어가면 뒷전으로 밀리다가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으로 인한 제2차 오일 쇼크 때 결정타를 맞는다. 동명목재는 원목 값이 폭등해 팔수록 손해를 보다가 1980년 5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 정리되어 버린다. 이에 반발한 직원들이 집단행동을 벌이는 현장에 취재 갔던 나는 한때 수출 한국의 상징적 인물이 악덕 기업인처럼 매도당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냉담해진 국민들
우리 아버지는 1950~60년대 연료상을 운영했다. 숯, 장작, 연탄(19공탄)을 팔았다. 연탄을 하나씩 손으로 찍어 내는 구식이었는데 자동화된 연탄공장이 등장하니 문을 닫아야 했다. 이것도 인연인지 나는 기자 생활 과정에서 석유, 석탄 등 에너지와 관련된 취재를 많이 했다.
비상계엄령 하에 있었지만 정치적, 사회적 욕구가 분출하는 시기였고 그 바닥엔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불황이 깔려 있었다. 부마사태를 민란 수준으로 격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산의 광복동, 남포동 상인들도 봄이 오자 학생들의 시위에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동명목재 무기한 휴업을 전하는 1980년 5월 7일 자 《국제신문》 1면엔 〈올해 1/4분기 성장률, 16년 만에 마이너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같은 지면에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개헌을 중심으로 한 정치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며 “안개 불투명 정국 운운은 억측”이라는 (국무회의) 발언을 하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김대중 세력을 겨냥, “당 분열 행위 용납 못 해”라고 경고하고 있는 가운데 국회 개헌특위는 5월 15일까지 국회 단일안을 확정할 것이라 밝혔다. 이날 신민당은 학원 사태 실태 조사를 마친 뒤 “교수회의에서 총장을 뽑고 계엄령을 해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리고 5월 17일 신군부는 행동을 개시했다.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합수본부는 김종필·김대중을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하는 등 정치인들을 대거 체포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무력화되고 군부가 전면에 나선다.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사태에 대하여 언론이 계엄사 발표문을 인용하여 처음 보도한 것은 5월 21일, 《국제신문》 제목은 〈광주에서 소요사태, 軍警 5, 民 1명 사망〉이었다.
5월 22일 나는 병가(病暇)를 내고 광주로 향하여 23일 시민군이 장악한 시내로 들어갔다.
집례 거부하고 죽은 김재규
1980년 5월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장에게 모처로부터 어떤 전갈이 왔다. 그 내용은 구치소장을 비롯한 일곱 명의 실무 간부들에게만 통보됐다. 사형수 담당 김준영 목사에겐 “내일 아침에 대기를 해 달라”는 연락이 갔다.
다음 날 새벽 4시경 군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재규(金載圭)는 서울구치소 보안청사의 지하실 독방으로 이감 수용됐다. 수갑이 차이고 포승으로 묶인 채였다. 봄날의 아침이 밝아 올 무렵인 아침 7시 정각, 구치소 직원 3명이 김재규를 데리러 왔다. 두 직원은 김의 양쪽 팔뚝을 붙들고, 한 직원은 김의 뒤에서, 그를 데리고 나갔다. 김은 얼굴을 치켜든 채 말없이 걸어갔다. 위에는 흰 저고리, 아래는 잿빛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운동장과 9사(舍) 사이의 골목 같은 길을 지나 1분쯤 만에 당도한 곳, 흰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기와 목조건물이었다. 사형집행장이다(이 장면은 뒤에 당시 목격자들을 만나 재구성한 것이다).
집행장의 옆문을 통해 김재규는 계호(戒護)를 받으며 들어왔다. 그는 정면 단하(壇下)의 돗자리 위에 앉혀졌다. 단상 정면에는 집행관, 그 오른쪽에는 스님과 목사, 뒷벽을 따라선 관계 공무원들이 앉아 있었다. 집행장의 바닥은 퇴색한 마루. 1년에 한 번 정도, 처형이 있을 때만 문이 열리고 청소되는 곳이 이 건물이다. 집행 기구가 낡아도 수리를 하려 하지 않는다. 집행장에 손대는 걸 모두 꺼리기 때문이다. 목에 거는 밧줄이 새까맣게 때가 묻어 반들반들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그런 데 있다.
김재규에 대한 인정신문이 시작됐다. 집행관은 죄수번호, 성명, 생년월일, 본적, 주소를 일문일답식으로 물었고 김은 대답했다. 이어서 집행관은 김재규의 범죄 사항과 재판 경과를 날짜에 따라 읽고 나서는 “오늘 법무부 장관의 사형집행명령에 의해 그 형을 집행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집행관은 “유언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했다. 김재규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집행관은 “스님을 모셨습니다. 집례를 받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김재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로 흔들어 버렸다. 보는 이에 따라선 “모든 게 귀찮다”든지 “나 혼자 힘으로 최후를 맞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는 계속 염주를 만지고 있었다. 교도소가 모시고 온 고광덕 스님은 단상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형
김재규 사형 집행 소식을 보도한 1980년 5월 26일 자 《국제신문》.집행관이 사인을 주자 김의 뒤편에 섰던 세 명의 계호 직원이 재빨리 움직였다. 한 직원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하얀 천의 용수를 김의 머리에 덮어씌우는 것과 동시에, 두 직원은 김의 상체와 두 다리를 포승으로 감아 묶었다. 교수될 때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안대도 씌웠다. 뒤에서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그를 비스듬히 뒤로 끌고갔다. 직원들은 내려뜨려진 흰 커튼을 젖히고 김을 별실 같은 집행 장소로 약 3미터쯤 끌고갔다. 도르래에 달린 밧줄이 내려와 있었다.
앉혀진 김의 목에 올가미가 걸렸다. 직원들은 비켜서면서 “준비 완료, 포인트 제껴!”라고 고함을 쳤다. 건물 바깥에 나가 있던 직원이 벽에 붙은, ‘포인트’로 불리는 손잡이를 젖혔다. 김재규가 앉은 네모 마루 판자는 받침대가 빠지면서 ㄱ자로 꺾였다. ‘쾅!’ 마루 판자가 지하 광의 벽을 때리는 소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집행장을 쩡 울렸다. 김재규의 몸은 지하로 떨어져 허공에 매달렸다. 비명은 없었다. 이럴 때 사람에 따라선 숨이 콱 막히는 ‘컥!’ 소리를 듣는다고도 하지만 판자가 지하 벽을 치는 소리에 묻히고 만다.
25분쯤 흐른 뒤, 의무관이 지하 광으로 내려가 김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사망을 확인했다. 다시 5분을 기다렸다가, 생명이 달아난 김재규의 몸을 풀어 내려놓았다. 집행의 모든 과정, 인정신문에서 사망 확인까지는 컬러 사진으로 기록됐다. 54년간 이어져 온 남자의 삶을 정지시키는 데 든 시간은 약 30분이었다. 김재규의 네 부하들도 같은 절차를 따라 10시부터 차례로 최후를 맞았다.
새로운 권력의 탄생
김재규 등 5명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나는 광주 금남로의 어느 여관에서 들었다.
다음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 나는 전남도청과 상무관, 그리고 전남대 병원을 돌면서 시신(屍身)들을 확인하고 다녔다. 관 뚜껑을 열고 치명상을 알아보기도 했다. 총상 이외에 둔기로 머리가 박살 난 시신이 많았다. 광주 시내는 시민들의 장악 하에 있었다.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복면한 청년들이 빼앗은 군용 차량을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단 청소년들도 보였다.
밤은 일찍 왔다. 이른바 ‘시민군’이 통행금지를 일찍부터 실시하는 바람에 밤 8시경부터 중심지 거리는 무인지경으로 변했다. 낮에 있었던 시민 궐기대회의 열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쌩, 쌩, 달리는 차 소리와 함께 간간이 연발사격의 총성이 들려왔다. 광주는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광주시 외곽은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선으로 변해 있었다. 그 선을 넘나드는 것은 38선을 오가는 정도의 위험은 아니지만, 상당한 모험이었다.
여관방에서 잠을 청했다. ‘드르륵—’ 또 먼 총성이 북쪽에서 들려왔다. 낮의 함성, 밤의 총성, 그 가운데서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고 있었다.
광주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 5·18 기간 중 계엄군이 체포된 ‘시민군’을 감시하고 있다. 사진=조선DB나는 《국제신문》에서 보낸 취재반을 5월 24일에 만나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26일 오후 8시를 기해 광주에 있던 외신기자들에게 계엄당국으로부터 철수령이 내린 것을 알고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직감, 숙소에서 26일 밤을 뜬눈으로 대기했다.
27일 새벽 5시, 콩 볶듯 하는 총성이 잠시 멈추는 틈을 타 취재반은 숙소에서 6km가량 떨어진 전남도청으로 다가갔다. 계엄군을 실은 차량이 줄을 이었고 그들은 철모 위에 흰 띠를 두르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는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매복, 시 전역을 수색하고 있었다. 건물 옥상에는 군인들이 M-16 소총으로 무장, 경계하고 있었다.
오전 7시30분 우리 취재반은 현장 지휘관의 협조를 얻어 도청 구내로 들어갔다. 구내엔 교전하다 사살된 무장 시위대원들의 시신과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엎드려 있는 시민군들, 화염병, 무전기 등 장비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오전 9시 계엄군은 도청 앞 로터리에 10여 대의 탱크와 20여 대의 작전 트럭을 배치했고, 데모대가 붙였던 각종 유인물과 플래카드를 뜯어 내고 있었다.
오전 11시, 10일 만에 처음으로 교통순경이 등장해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다.
광주에서 만난 경상도 전경
나는 1980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유혈(流血) 사태를 취재했고, 그 뒤에도 계속 관심을 가져 왔다. 경상도 억양의 말을 하는 기자이지만 광주에서 취재를 하는 데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지역감정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아니란 느낌이 왔다. 계엄당국이 당초 광주사태의 본질을 지역감정 쪽으로 돌린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일어난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한 진압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연행도 촉발의 한 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는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았다.
“전두환 타도!”란 구호 뒤에는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늘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 가는 사람을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 주기도 했다. 계엄군을 몰아낸 뒤 광주를 장악한 이른바 시민군 지휘부는 군기(軍紀)를 비교적 엄정히 잡아 약탈 등의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5월 27일 20사단의 광주 탈환 작전은 희생자를 최소화한, 효율적인 것이었다.
나는 5월 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 구경 나온 시민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청년을 발견했다. 말을 붙이니 그는 전남도청 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관(상경)인 남(南)모씨였다. 경북대 정외과 2학년에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5월 21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사복(私服)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 다행히 ‘고마운’ 아저씨 집에 숨어들어 7일간 지냈다는 것이었다.
남 상경을 따라 전남도청에서 가까운 그 집을 찾아갔다. 부동산 사업을 한다는 50대 초반의 광주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기자 일행을 맞아들이더니 점심 대접을 해 주면서 “제발 지역감정 차원에서 이 사태를 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남 상경도 “공수부대원들이 몽땅 경상도 군인들이란 얘기는 틀렸고, 광주시민이 경상도가 밉다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면서 체험담을 들려주었다.
그 뒤 1985년 7월호 《월간조선》은 광주사태를 다뤘는데 나는 남씨(당시 대기업 근무)를 다시 만나 그의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 뒤 40여 년이 흘렀고 여러 측면의 주장과 증언이 나왔지만 남씨의 증언은 사태의 중심부에서 목격한 내용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전경도 돌을 던지다
나는 경북 대구의 경북대학교 정외과 2년을 마치고 전투경찰관으로 입대, 전남도경 2기동대 소속으로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사태를 맞게 됐다. 광주사태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5월 20일 밤, 나는 전남도청 앞에서 데모대를 막고 있었다. 광주의 밤하늘은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길로 환했다.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와 가끔 ‘펑!’ 하면서 치솟는 화염이 전장(戰場)을 방불케 했다. 우리 전경부대는 도청 앞의 네거리 중 노동청 광주지방사무소 쪽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네 줄로 늘어서 저쪽의 군중과 대치하고 있었다.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군중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들을 우리 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트럭, 버스, 승용차, 지프 등 갖가지 차들이 슬금슬금 밀려오다가 중간지대에서 멈췄다. 불타거나 불탄 차들이 서로 뒤엉켜 절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형세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부서지고 불탄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우리 전경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피해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 버스를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
그때 우리는 최루탄이 거의 떨어져 데모대가 몰려오면 투석(投石)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전경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오른쪽에 있는 담벼락을 긁으면서 스르르 멈추었다.
버스 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둠 속에서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끼거나 깔려 뒤엉켜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어머니!” 하는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축 늘어진 팔, 다리였다.
거의 같은 순간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담벼락을 넘고 달아나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이미 달아났고 다른 한 사람이 담벼락에 다리를 걸친 순간, 두 명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 뚱뚱한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사람은 뒷발길질을 하여 뿌리치고는 달아났다.
우리는 플래시로 버스 바퀴를 밝히면서 사상자들을 끌어내 병원으로 옮겼다. 이 경찰관들은 사고 당시 담벼락 밑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전열(前列)에 있었던 젊은 전경대원들은 달려오는 버스를 보고 피해 달아날 수가 있었으나 이 경찰관들은 앉아 있다가 일어나 버스를 피하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 서 있다가 버스와 담 사이에 끼거나 깔린 것이었다.
(편집자 주: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경장,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순경 등 네 명이 숨졌고 김대민 순경 등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버스를 몬 운전사 두 명은 복역한 후 풀려났다. 이들은 군중이 버스를 탈취, 밀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몰고 가다가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를 세웠는데 그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엄마! 엄마!”
20일 자정인지 21일 새벽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데모대가 밤을 새워 시위를 했다. 중학생에서 노인까지, 여대생에서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 쇠파이프 등이 들려 있었다. 모두가 악에 받혀 있었다. 여자가 마이크로 군중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경찰이 던지는 것은 수류탄이 아니고 최루탄입니다. 맞아도 죽지 않으니 전진합시다!”
도청에서 가까운 충장로로 우리 부대가 진압 차 출동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데모 군중의 습격을 받고 우리 몇 명은 고립됐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곁에 있던 동기생 한 놈이 “우린 여기서 죽는다”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달아나다가 쓰러졌다.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1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우리를 구원하려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돌진했고, 군중은 흩어져 달아났다.
갑자기 주위가 깨끗이 청소된 듯 비워졌다. 공수부대원들이 휩쓸고 지나간 저쪽 길바닥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두 명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달려갔다. 한 중학생은 가슴이 밟혔는지 푹 꺼져 있었다.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다. 다른 중학생은 “엄마! 엄마!”라고 신음하고 있었다. 곧 신음도 끊어졌다.
“하느님! 왜 이 사람을 죽였습니까”
나는 이 소년도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소년을 길에서 들어내 가게 옆에 붙여 놓고는 부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청 옆 주유소 근방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끌려가는 중학생 한 명을 목격했다. 나는 저놈이 군부대로 넘겨지면 혼이 날 것 같아 공수부대 사병에게 “이놈은 나에게 넘겨주십시오. 혼을 내서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소년을 도청 근방의 민가(民家)로 데리고 가 넘겨주면서, 잘 보호했다가 부모를 찾아 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도청 쪽으로 돌아와 보니 데모 군중과 진압부대가 충돌, 군중들이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주유소 앞에 20대 청년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한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치명상이 어딘지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다른 청년은 숨이 끊어져 가는 중이었다. 나는 방독면을 벗고 5분쯤 인공호흡을 시켰다.
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인데 ‘하느님! 왜 이 사람을 죽였습니까’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허망함이 그때의 내 심경이었다.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대해 내가 본 사례로는 18일인가 19일쯤의 일로서 금남로 부근에서 대낮에 구타당하는 대학생을 할머니가 감싸고 말리는데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할머니를 때렸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 퍽 쓰러졌다. 공수부대의 진압봉은 약 70cm. 야구방망이처럼 앞이 굵다.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휘두르면 앞이 무거워 가속도가 붙는다.
계엄사가 1980년 6월에 발표한 사망자 명단과 사인(死因)을 보면 시민 측 사망자 164명 중 27명이 타박상·두부 손상·자상(刺傷)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다. 사망자 34명이 19세 이하이고,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나 된다. 두부 손상 사망자 중엔 65세 노인도 있었다. 광주에서 얼마나 죽었느냐도 문제지만 어떻게 죽었느냐의 문제도 중요하다. 27명이 맞아 죽고 찔려 죽었다는 이 사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원초적 분노가 광주사태의 핵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