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으로 再起한 重症 장애 해외 입양아들과 고마운 養부모들… 일부 한국言論의 선동적 보도는 사실무근이었다
入養 후 양부모 중 한 명이 죽거나 이혼할 경우 남은 아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入養 후 친자식이 태어나면 한국처럼 罷養하는 가정은 없는지, 多國籍 입양아 가정에서 한국 입양아들이 외톨이가 되는 일은 없는지를 조사했다. 미국의 양부모들은 기독교적 신앙심으로 정성을 쏟아 한국 입양아들을 돌보고 있었고, 入養兒들도 養부모의 헌신적 노력에 감사하고 있었다. 입양을 후회하는 부모나 입양아는 한 사람도 없었다
●「8손이」라고 한국에서 버려진 크리스를 미국에서 농구선수로 만든 英才학교 선생인 프레드씨 부부 이야기
●언청이를 입양, 세 차례 수술 끝에 정상아로 만든 건축가 존과 심리치료사 스코필드 부부 이야기
●뇌성마비로 미국에 입양된 「미아」는 다섯 번의 수술 끝에 이젠 의사를 꿈꾸는 소녀로 자랐다
●한국 입양아 출신으로서 가정을 가진 뒤 한국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린디 부인 이야기
●한 입양아 출신은 『해외입양이든 국내 입양이든 가정을 찾아주어 고아원 신세를 지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운이 좋아 고아원 직원, 아니면 창녀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미혼모로부터 태어난 한 아기가 출생 직후 어머니로부터 버려졌다. 아기는 변을 스스로 볼 수 없어 배가 올챙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서울역에서 발견된 이 아이는 즉각 서울시립병원으로 보내졌다.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미국의 한 入養(입양)가정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수술조차 받지 못해 그 여리디 여린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임시로 변을 받아냈다. 入養 후 양부모 중 한 명이 죽거나 이혼할 경우 남은 아이는 어떻게 될 것인가. 入養 후 친자식이 태어나면 한국처럼 罷養하는 가정은 없는지, 多國籍 입양아 가정에서 한국 입양아들이 외톨이가 되는 일은 없는지를 조사했다. 미국의 양부모들은 기독교적 신앙심으로 정성을 쏟아 한국 입양아들을 돌보고 있었고, 入養兒들도 養부모의 헌신적 노력에 감사하고 있었다. 입양을 후회하는 부모나 입양아는 한 사람도 없었다
●「8손이」라고 한국에서 버려진 크리스를 미국에서 농구선수로 만든 英才학교 선생인 프레드씨 부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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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로 미국에 입양된 「미아」는 다섯 번의 수술 끝에 이젠 의사를 꿈꾸는 소녀로 자랐다
●한국 입양아 출신으로서 가정을 가진 뒤 한국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린디 부인 이야기
●한 입양아 출신은 『해외입양이든 국내 입양이든 가정을 찾아주어 고아원 신세를 지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운이 좋아 고아원 직원, 아니면 창녀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국 入養기관의 기록에는 이 아이가 1989년 서울올림픽 직후 미국 콜로라도州 몬트로스市 리처드 헤이건氏 가정으로 입양된 것으로 적혀 있다. 서울시립병원에서조차 수술비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 미국의 한 가정에서 장애아를 입양하겠다고 나서서 임시 수술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한국 입양기관에는 그 기록이 전부였다.
10여년 전 미국으로 입양돼 간 이 장애 아기는 어떻게 됐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미국 養부모는 왜 한국인이 입양을 거부하는 장애아를 입양했을까. 국내에서는 아이를 입양하더라도 고르고 골라 데려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입양아가 성장하면서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지체 현상이나 장애 현상이 나타나면 간단히 罷養(파양;입양의 반대개념으로 아이와 인연을 끊어버리는 행위, 즉 아이를 입양기관에 반납하거나 버리는 행위를 통칭한다)하는 사람도 많다.
장애아 해외 입양이 많을 때는 전체 해외 입양아 수의 47% 가량을 차지했다.
「장애아 해외 입양의 이면에는 臟器(장기)매매로 한몫 챙기기 위해서」 혹은 「해외 입양된 아이들이 罷養되면 국제고아가 된다」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 한동안 일부 언론과 소설을 중심으로 떠돌았다. 인기스타 최진실이 열연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 입양아 수잔 브링크의 實話(실화)를 다뤘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해외 입양에 대한 기본적 개념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수잔이 어릴 때 養부모로부터 매를 맞는 장면」은 가뜩이나 해외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득차 있던 사람들의 인식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정상아로 변한 장애아
과연 해외 입양된 아이들이 영화와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처럼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가. 미국이나 유럽에도 한국처럼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다가 장애현상이 나타나거나 입양의 필요성이 사라지면 쉽게 버리는 罷養이 성행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시립병원에서 임시 수술을 받고 미국으로 떠난 장애아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 콜로라도州 몬트로스市로 알려졌다. 2000년 1월 리처드 헤이건氏 가정에 입양돼 있다는 기록만 가지고 아이의 현재 모습을 상상하며 비행기를 탔다.
몬트로스市의 인구는 1만2000여명에 불과하지만 미국으로 입양간 한국 아이들이 20명 남짓 모여 사는 곳이다. 몬트로스市는 평균 해발 2000여m의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기가 맑고 주위의 로키산맥과 어우러져 여름철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몬트로스市 한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이 아이는 입양 직후 이안 헤이건(11)으로 불려졌다. 이 아기는 지금 평화로운 2층집에서 사는 건강한 10대 초반의 개구쟁이로 바뀌어 있었다. 현재 몬트로스市 공립고등학교 교장인 리처드와 市운영위원인 노엘 부부는 장애아로 태어난 이안을 데려와 완벽하게 정상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안은 색소폰을 곧잘 불며 집안의 막내둥이로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이안의 집을 방문하여 한 가지 더 놀란 것은 이 가정에는 이미 두 명의 한국 입양아가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스(16)와 실리아(14)가 그 주인공들. 울산과 부산에서 버려진 아이 둘을 데려와 키우던 리처드-노엘 부부는 서울에서 버려진 이안을 또 데려왔다. 어머니 노엘의 설명이다.
『건강한 두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는 기쁨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번에는 애초부터 정상아가 아닌, 치료를 받아야 할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습니다. 이안에 대해 한국 입양기관에서 보내온 정보는 너무나 단편적이었어요. 버려진 아이로 변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정도였어요. 의사와 상담해 보니 최악의 경우 평생 몸에 의료기를 부착하고 살아야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그래도 우리는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렇게 해서 이안은 마침내 헤이건씨의 가족이 됐다. 이안의 몸상태는 엉망이었다. 3년에 걸쳐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마다 약 1만5000달러(한화 1800만원)의 수술비가 지출됐다. 수술 때마다 부부가 꼬박 병실을 지켜야 했고 고통에 신음하는 아이의 병수발을 들어야 했다.
마침내 이안은 정상인으로 돌아왔다. 복부에 긴 수술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지만 가족과 함께 스키와 수영을 즐기며 「피카추 게임」에 몰두하는 평범하고 건강한 아이로 성장했다. 아버지 리처드의 이안에 대한 이야기다.
『몇 년 전에 이안과 실리아, 니콜라스를 데리고 한국을 찾아가봤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母國(모국)인 한국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의 親부모들이 어떤 이유로 이 아이들을 포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저희들은 이 아이들로 인해 너무나 행복해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궁금해 하는 친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지만 기록이 잘못됐거나 없는 경우가 많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버려진 아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 입양하고 싶지만 이제 입양할 수 있는 연령제한 때문에 더 이상 입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교육자 가정답게 리처드와 노엘 부부는 아이들의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미국같이 公교육이 활성화된 나라에서도 이들은 아이들을 위해 만만치 않은 私교육비를 지불하고 있었다. 큰아이 니콜라스(태권도 2단)를 위해 8년째 태권도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딸 실리아에게는 따로 재즈 음악과 발레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직은 놀기에 바쁜 이안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한다.
2000년 여름이 오면 어머니 노엘과 장남 니콜라스는 한국을 다시 방문한다는 설렘에 요즘 밤잠을 설친다. 니콜라스는 한국어 공부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안 동네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리지웨이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언청이 입양 가정을 찾기로 했다.
언청이를 일부러 찾아내어 입양
1990년대 초 경기도의 한 未婚母에게서 태어난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언청이 상태였다. 놀란 미혼모는 아이를 낳자마자 병원에서 도망갔다. 그렇게 버려진 이 아이는 깊게 패인 코와 입술 사이의 홈 때문에 우유도 혼자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아이는 커도 「째보」라는 별명이 붙는 놀림감이 돼야 할 운명이었다. 이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미국인 가정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존과 팜 스코필드 부부였다.
건축가 존과 심리치료사 팜 스코필드 부부는 1989년도에 이미 한국에서 숀(10·한국이름 박해민)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었다. 존과 팜 부부는 숀이 혼자 외롭게 크는 것을 원치 않아 숀과 같은 한국 태생의 아이를 한 명 더 입양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언청이였던 이 아이를 입양해서 알렉스(7)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상아로 키운 어머니 팜의 회고다.
『입양을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어요. 우연히 오클라호마州에 있는 한 입양기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를 보는데 「입양이 어려운 아이들(hard to place children)」이라는 네 명의 아이들 사진이 있었어요. 모두 치료받아야 할 아이들이었고 그중 알렉스의 얼굴이 유난히 제 관심을 끌었어요. 저녁에 남편 존이 오자 사진을 보여주며 알렉스를 입양해서 우리가 수술을 시키면 어떨까 하고 의논했고 존도 기꺼이 좋다며 찬성했어요』
알렉스를 입양하게 된 이면에는 형 숀과 같은 건강한 아이를 입양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행복해 이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 보자는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입양기관에 연락하니 다른 세 명은 모두 입양이 결정됐는데 알렉스만 입양이 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양을 신청했다고 한다.
세 번 언청이 수술 후 발음 교육
알렉스의 언청이 정도는 심각했다. 보통은 잇몸 언청이나 입술 언청이의 경우가 많은데 알렉스의 경우 잇몸, 입술 모두 언청이 상태였다. 팜과 존 부부는 1993년 알렉스를 입양한 후 10일 만에 어린이 언청이 수술로 유명한 「LA 어린이병원」으로 갔다. 그들이 살고 있는 콜로라도州 리지웨이에서 자동차와 비행기로 거의 6시간이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州가 다르기 때문에 의료보험 혜택이 어느 정도 가능한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급한 수술 결정이었다. 1차 수술은 일단 입술을 꿰매는 수술이었다. 우유라도 제대로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차 수술은 1차 수술을 마친 후 약 6개월 만에 다시 했다. 수술마다 약 1만달러(한화 약 1200만원)의 경비가 지출됐다.
다행히 의료혜택이 가능해서 팜과 존 부부가 지불해야 할 돈은 수술마다 총경비의 20%에 해당하는 정도였다. 돈도 돈이지만 부부가 다니던 직장에 휴가를 신청하고 밤낮 아이를 돌보는 일이 더 힘들었다.
알렉스는 네 살 무렵 본격적으로 말을 하게 됐는데 정확한 발음이 나오지 않게 되자 다시 수술을 받게 된다. 3차 수술이었다. 이번에는 덴버에 있는 「로즈병원」에서 수술했다. 수술을 마치고 발음은 나아졌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팜과 존 부부는 수술 후 지금까지도 알렉스에게 매주 한 번씩 발음교정 치료를 받게 하고 있다.
알렉스가 아홉 살이 되는 2003년경 젖니를 모두 갈고 얼굴 형태가 제대로 잡히는 시점에 한번 더 수술을 시킬 계획이다. 이들 부부는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 정성을 쏟아부은 알렉스에 대해 단 한 번의 짜증도 불평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이를 지켜본, 이웃 주민이자 이 지역에 사는 유일한 한국인 주세린씨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 같으면 자기 자식이라도 놀림감이 된다며 아이를 바깥에 잘 내보내지도 않았을 텐데, 여기서는 똑같이 다른 아이들과 활동하게 했어요. 주변 아이들도 놀릴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팜과 존 부부는 이제 숀과 알렉스 두 아들을 데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스키장에 가서 로키산의 아름다운 광경과 스키를 즐긴다.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알렉스와 존도 養부모의 극진한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알렉스는 앞으로 한 번이 될지 두 번이 될지 알 수 없는 수술을 남기고 있지만 그날을 위해 養부모는 알뜰하게 저축도 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한번 입양은 평생책임(Life time commitment)』이라고 말한다.
손가락 여덟 개의 장애아를 입양한 프레드 브라운 3세 가정
이번에는 태어날 때부터 양쪽 손가락이 모두 여덟 개밖에 없어 버림받은 장애아를 추적해보기로 했다.
크리스 브라운(15)은 강원도 강릉의 한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였다. 날 때부터 손가락이 여덟개뿐이었다. 크리스는 두 살 무렵 강릉에서 몬트로스市 영재학교 선생인 프레드 브라운 3세 가정에 입양됐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프레드 선생과 부인 가니아가 크리스를 입양했을 당시의 기억이다.
『입양을 결정하기 전 아이의 사진을 봤는데 손가락이 모두 여덟 개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입양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아이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입양하고 난 뒤 병원에 데려가서 의사선생님과 상담했는데 기능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요. 그래서 특별하게 수술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기독교 신자인 프레드 부부는 이미 친자식을 두 명이나 두고 있었다. 보통 입양 가정은 자식이 없어 아이를 받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가정은 달랐다. 골프, 농구, 미식축구 등 만능 스포츠맨인 팀(16)과 누나 아비가일(18)로 어엿한 가정을 꾸렸음에도 이 부부는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를 한국으로부터 입양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다른 입양 부모들처럼 「홈 스터디」로 불리는 길고 힘든 심사과정에 들어갔다. 자서전에 가까운 분량의 자기 소개, 자신의 인생관과 家系(가계)에 대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재정상태도 증명해야 했다. 범죄기록도 조사됐다. 최종적으로 심사관이 나와 하루종일 집에 머물며 식사도 함께 하며 實査(실사)를 받은 후에야 크리스에 대한 입양 가능 판정이 나왔다. 프레드 부부는 한국 아이를 한 명 더 데려오고 싶지만 다시 또 길고 지루한 서류준비 작업에 시달릴 일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버지 프레드가 말하는 아들 크리스에 대한 자랑.
『얼마 전 이 지역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2인 농구시합(두 명이 팀을 이뤄 하는 시합)이 벌어져 크리스도 시합에 출전했고 중학교 2학년 그룹에서 1등을 해서 결승에 진출했어요. 결승 상대는 크리스보다 한 살 더 많은 중학교 3학년 그룹의 한 팀이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크리스팀이 우승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농구선수로 성장
그날의 우승 트로피를 자랑스레 보이는 養아버지의 눈이 지금도 감동에 젖어 있는 듯했다. 중학교 농구선수가 된 크리스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異國(이국)땅에서 우뚝 섰다. 養부모는 집에다 농구 연습장을 만들어주고 정상아와 똑같이 경쟁하도록 격려했다. 이번 여름 크리스를 데리고 한국을 찾아갈 예정인 아버지 프레드 브라운은 『혹시 악수를 하다 상대가 놀라면 크리스가 마음에 상처를 받지나 않을지, 크리스가 혹시 한국에서 손가락 때문에 놀림을 당하지나 않을지 염려된다』며 걱정했다.
농구시합이 있으면 2시간이나 떨어진 곳이라도 달려가 크리스를 응원하는 어머니 가니아에게 친자식과 입양해 온 자식에 대한 사랑에 차등이 있냐고 물었다.
『편애가 있었다면 오히려 입양아 크리스를 더욱 챙기는 바람에 친자식들이 가끔 섭섭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겠지요. 크리스 본인에게 편애 유무를 물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는 간단히 부인했다.
이번에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덴버市로 향했다. 역시 장애아 입양 가정을 찾아서였다. 비교적 최근에 장애아를 입양한 가정을 찾아보기로 했다. 1999년에 한국 아이를 입양한 가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언청이 포함, 한국 아이 셋을 입양해 키우는 마거릿·밥 부부
마거릿, 밥 모포드(40·컴퓨터 회사 부사장) 부부는 1995년부터 2년 간격으로 세 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했다. 가장 최근에 입양한 아이는 지난해 경기도 어느 지역에서 데려온 켈렙 림 모포드(1·임혁진).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켈렙은 養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밥과 마거릿의 한국 어린이 입양은 조세린 안 모포드(5·안기주)를 처음 데려오면서 시작됐다. 처음 조세린을 품에 안게 된 이들 부부는 『너무 행복했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런 후 2년 만에 언청이로 태어난 카메론 김 모포드(3)를 데려오게 됐다. 마거릿은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사업가 킴 마츠나가(한국명 김인)씨가 아직 養부모가 나타나지 않은 아이가 있는데 데려갈 의향이 있는지 물었어요. 물론 언청이 이야기를 하며 사진도 보여줬어요. 처음 언청이에 대해 잘 모를 때는 약간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지만 의사와 상의하고 난 뒤 수술만 받으면 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 바로 입양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어요』
이렇게 입양된 카메론은 곧바로 덴버 병원에 입원, 세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은 잘 됐지만 특정발음이 자꾸 새거나 똑똑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카메론은 요즘 한 주에 두 번씩 특수 학교에 가서 개인 발음교정 수업을 받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경비는 養부모가 지불하고 있다.
마거릿·밥 부부는 맏딸 조세린을 서울에서, 둘째 카메론을 충청북도에서, 막내 켈렙은 경기도에서 데려와 한 가정을 꾸렸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입양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단다. 이들 각자 이름에 일부러 한국 성을 남겨둔 것은 아이들이 언젠가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시점에 대비해서라고 했다.
젖먹이 켈렙을 끌어안고 누나 조세린을 앞세워 카메론의 발음교정 수업을 받으러 가는 이들 부부의 바쁜 발걸음이 웃음과 활기로 가득했다.
이번에는 좀 정도가 심한 장애아를 입양한 가정을 찾아보기로 했다. 덴버市에 거주하는 뇌성마비 장애아를 입양한 가정이다.
친자식 있으면서 뇌성마비 장애아 入養한 파바로·로리 부부
금발의 美人(미인) 로리 어머니(35)는 거의 하루종일 에밀리(3)와 함께 지낸다. 친자식 데이비드(12)와 네이탄(8)이 있지만 이들은 뇌성마비 장애아 에밀리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자식 두 명이 있었지만 1995년 한국으로부터 엘리사(5·오은지)를 데려온 후 다시 뇌성마비 장애아 에밀리를 입양했다. 친자식이 있으면서 어떻게 한국 아이를 둘이나, 그것도 重症(중증) 뇌성마비 장애아를 입양했을까.
로리와 파바로(36·컴퓨터 프로그래머) 부부의 경우는 앞에서 소개된 가정들처럼 入養兒의 상태를 미리 알면서 의도적으로 장애아를 입양한 것은 아니었다. 에밀리의 뇌성마비 증세가 입양 전부터 나타났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 로리의 입양 당시에 대한 설명이다.
『사실 장애아를 입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어요. 아이가 미국 가정으로 오면 보통 入養과정이 6개월 정도 걸립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장애현상이 발견됐어요. 우유를 삼키지 못하고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어요. 병원에 데려가 확인해 본 결과 뇌성마비로 판명났어요.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입양기관에서 저에게 계속 키울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선택을 요구했어요.
저희는 에밀리를 그대로 키우겠다고 대답했어요. 물론 일시적 감정에 따라 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 결정에는 우리 두 아이들(데이비드, 네이탄)의 뜻도 함께 했어요. 두 아이는 이미 우리 가정의 품으로 왔고, 아이들도 절대 다른 가정에 줄 수 없는 여동생이라며 떼를 썼어요』
그렇게 해서 에밀리는 로리·파바로 부부의 막내딸이 됐고 데이비드와 네이탄의 여동생이 됐다. 그러나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에밀리를 돌보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에밀리에게 식사를 시키는 데만 하루 꼬박 5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에밀리는 일주일에 세 번 신체 정상발육 훈련치료를 받고 있다. 언어교육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그외에 수시로 병원에서 각종 체크를 하고 있다. 이런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아무도 모른다. 집안은 각종 휠체어와 특수기구들로 가득 차 있다.
오빠 데이비드와 네이탄도 어머니와 에밀리를 위해 열심히 집안 일을 돕는다. 식사도 준비하고 설거지도 돕는 모습이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인다. 다섯 살 재롱둥이 엘리사는 어머니가 늘 에밀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불만인 듯하지만 어머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란다. 온 가족이 에밀리를 위해 힘을 쏟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겨울철 눈이 많은 덴버의 거리에 하얀 눈이 쌓이듯 에밀리 가정에 사랑의 축복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는 입양문제로 자살소동까지 벌였다는 한 가정을 어렵사리 찾아 취재했다. 역시 덴버市의 한 가정이다.
장애아 입양을 위해 자신의 직업마저 포기한 메리·알렌 부부
1986년 전북 전주의 한 고아원에서 버려진 아이가 미국에 입양됐다. 이 아이는 입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뇌성마비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메리 그레고리(50·변호사)는 병치레하는 자식을 돌보기 위해 상근 변호사직을 포기해야만 했다. 남편 알렌이 美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입양 3개월 만에 미아(현재 15세)에게 미약하나마 뇌성마비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병원과 집을 오가며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다섯 번의 대수술을 했다. 어머니 메리의 기억이다.
『처음 미아를 한국에서 데려왔을 때 한국에서 체중미달로 두 달 가량 병원 신세를 졌다는 기록만 있었어요. 특별한 증상은 개인기록 서류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곧 미아에게 예상치 못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우유를 제대로 빨지 못하고 입가로 흘렸어요. 입양기관에서도 모르고 있었어요. 입양기관에 상황을 알리고 상담을 요구하자 「아이를 다시 데려와도 된다」고 했어요. 나는 미아를 내 아이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입양기관에 되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키우기로 했어요. 변호사 일도 파트 타임으로 돌리고 미아에게 밤낮으로 매달렸어요』
養부모의 정성으로 미아는 조기에 뇌성마비 증세가 발견돼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거의 완벽하게 치유됐다. 미아는 이제 성적이 탁월한 중학생으로 교사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어머니의 헌신적 노력으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미아는 장래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음악활동도 열심인 미아의 말이다.
『어렸을 때 제가 여러 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부모님이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저는 나중에 정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요. 저를 키워준 養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저를 낳아준 한국의 부모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살아계신다면 꼭 만나고 싶어요』
미아와 달리 동생 니나(11)는 가끔씩 까닭 모를 분노를 폭발시켜 養부모들을 놀라게 한다. 니나 역시 머리가 뛰어나 성적은 반에서 톱 클라스에 속한다. 그러나 가슴 가득 자신을 버린 親부모에 대해 분노를 품고 산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고아원으로, 다시 미국 가정에 입양돼 핏줄 다른 미아의 동생이 된 니나의 말이다.
『시골에서 엄마가 나를 마흔 두 살에 낳아 도저히 가정형편상 키울 수 없어 고아원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미국으로 입양되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살면서 어쩌다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는 왜 우리 부모가 나를 버렸는지 생각만 하면 속상하고 화가 나요…』
사춘기의 니나는 화가 나면 養부모에게 저주를 퍼붓는가 하면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기도 했단다. 심할 때는 養부모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소리친 적도 있다고 했다. 메리 어머니는 이럴 때마다 슬퍼지지만 포기하지 않고 니나를 다독거리거나 심리치료사에게 보낸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는 니나가 의기소침해 있고 불안증세가 있으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니나를 걱정하는 언니 미아의 말이다.
『나도 때로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어요.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요. 어머니가 동생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할 때면 나도 답답하고 슬퍼져요. 자신의 모습을 현실로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요』
4명 중 3명이 한때 장애… 키우고 있는 데비·마크 부부
데비와 마크 로벨 부부는 한국 입양아만 네 명을 키우고 있다. 그중 세 명이 한때 장애현상이 나타나 치료를 받았거나 현재 심각한 장애아다.
덴버市 「어린이 병원」 의사로 근무중인 아버지 마크와 네 아이를 돌보느라 자신의 직장도 포기한 어머니 데비가 한국 아이들의 입양을 결정한 것은 1987년. 맨 먼저 生後 3개월인 에미(13)를 한국에서 데려왔다. 에미는 건강상 별 문제가 없었으나 여덟 살 때 손을 떠는 증세가 나타나 병원에 데려갔다. 정밀검사를 한 결과 특별히 심각한 장애는 아닌 것으로 나타났으나 일정기간 치료를 요했다. 언어遲滯(지체) 등의 문제는 지속적인 치료와 훈련으로 이제 완전히 극복했다. 에미는 타고난 근면함 덕분에 성적도 매번 「올 A」를 기록할 만큼 성실파다.
이들 부부는 플루트를 곧잘 부는 에미가 심심해할까봐 동생을 한국에서 입양하기로 했다. 동생 리사(10)는 경기도 평택의 한 고아원에서 데려왔다. 1990년 입양될 당시 리사는 언청이였다.
1990년에 입양된 리사는 얼마 후 수술을 받은 뒤 상태가 좋아졌다. 발음도 또렷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언어나 발음교정 훈련을 밟을 필요조차 없었다.
3년 후 데비·마크 부부는 서울에서 세 번째로 남자아이 데이비드(6·이중기)를 입양했다. 데이비드는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 아이를 좋아하는 이들 부부는 세 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네 번째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네 번째이자 막내둥이가 된 저스틴(3) 때문에 요즘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 데비의 말이다.
『저스틴을 입양하기 위해 병원기록을 보니 심장이 좀 약하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양 후 곧 치료해서 별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14개월이 됐을 때 귀머거리라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보청기를 사용했으나 충분하지 못했지요. 아이가 16개월은 지나야 「최첨단 청각장치」 부착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18개월 때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自閉症(자폐증) 증세까지 나타났습니다』
청각 상실에 따른 치료와 훈련도 힘에 겨운 판에 重症 장애로 분류되는 자폐증마저 나타나자 이 부부는 최고의 의사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수술과 치료, 특수훈련을 받게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술비는 차지하고 요즘 저스틴 한 사람에게만 한 달 평균 1000달러(한화 약120만원)의 의료비와 특수교육비 400달러(한화 48만원), 의료보험료 300달러(한화 36만원) 등이 지출된다. 아이가 아니라 심하게 표현하자면 「돈을 싸고 다녀야 할 病덩어리」다. 아마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이 부부는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부부는 아이들 치료와 교육 때문에 16년간 살아온 버지니아州를 떠나 덴버市로 이사왔을 정도로 아이 치료에 열성이다.
아침부터 저스틴을 안고 차를 몰아 병원과 특수학교를 드나드는 어머니 데비와 아버지 마크는 『이 아이들을 우리 부부와 함께 살게 해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한국에서 가장 罷養이 많은 경우로 배우자의 사망이나 이혼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 미국에서는 어떤지 한번 살펴볼 차례다.
부부가 한국 아동을 입양했으나 어느 한 쪽이 사망한 경우
메이 피아텍(14)은 生後 5개월 때 몬트로스市 스티브 피아텍(52·전기통신공사) 가정에 입양됐다. 자신의 한국 이름을 「이메이」로 알고 있는 그녀는 養부모가 한국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로 해서 지금도 「메이」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生後 서울의 한 고아원에 맡겨진 메이는 부모가 누군지, 어떤 경로로 미국까지 오게 됐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미국 생활에 대한 메이의 기억이다.
『미국에서의 기억은 대부분 즐겁고 행복한 것들입니다. 養부모가 저를 얼마나 귀여워해주시는지…저는 정말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아껴준 養어머니는 메이가 여덟 살 무렵 사망했다. 이후 아버지 스티브가 6년 가까이 만사를 제치고 보살펴 준 덕에 메이는 별로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고 한다. 이제 메이가 아버지를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됐다고 판단한 아버지 스티브는 올해 5월께 새 장가를 들 계획이다. 메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아버지에게 축복을 보낼 예정이란다. 스티브는 딸이 자신의 再婚(재혼)을 이해해줘 기쁘다며 얼굴에 선한 웃음을 가득 담았다. 아버지 혼자서 딸을 키우는 모습을 이웃에서 지켜봐온 한국인 주세린씨는 이렇게 말했다.
『스티브씨는 딸이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봐 주위에서 再婚을 권했지만 6년 가까이 미뤄온 것입니다. 이제 딸이 아버지와 대화상대가 되고 그 아이가 오히려 아버지의 再婚을 권하게 되자 비로소 50代의 나이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입니다』
딸 이메이도 아버지의 결혼이 기쁘단다. 성악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이메이는 다시 한국에 가고 싶고 가능하면 자신의 親부모가 누군지 한번 찾아보고 싶단다. 혹시 親부모를 찾게 되면 무슨 말부터 하고 싶냐는 물음에 이메이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친부모가 나를 거부하면 어떻게 하지요』 하고 걱정부터 먼저했다. 이제 養부모가 이혼한 경우를 살펴보자.
친자식 두고 한국 아이 둘을 입양, 이혼 후 어머니 홀로 양육하는 샤란 윌슨
덴버市에 살고 있는 샤란 윌슨(비즈니스 상담역) 부인은 친딸 사라(17)를 가진 후 남편 돈 윌슨과 합의해 1986년 앤드류(14·정수민)를 울산의 한 고아원에서 입양했다. 그후 3년 뒤 1989년 이번에는 서울에서 에믈리(11·정세희)를 데려왔다. 그로부터 꼭 1년 만에 부부는 이혼하게 된다. 어린 자식 셋을 남기고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남편, 졸지에 아이 셋을 혼자 돌보게 된 어머니 샤란의 말이다.
『이혼은 정말 거짓말처럼 나에게 왔어요. 우리 가정은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남편은 저에게 어떤 말도 없이 그냥 떠나 버린 거예요. 그후 몇 년이 지난 뒤 남편은 다른 여자와 再婚했다고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여자와 이혼했다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전부예요』
서글서글한 눈매에 잘생긴 외모로 신문기자와 방송기자를 지낸 샤란은 세 아이 양육을 위해 수입이 더 나은 직업을 택했다. 입양을 후회한 적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샤란은 이렇게 대답했다.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앤드류가 학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도 별 진전이 없을 때도 슬펐을 뿐이지 입양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해 한국을 찾았을 때 앤드류의 親부모를 찾을 수 없었을 때 슬펐고, 그 보모를 만났을 때 반가워서 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이들이야말로 저에게는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된 친딸이자 맏딸인 사라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다.
『부모님의 이혼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후 어머니 혼자서 그렇게 모든 것을 잘 처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우리 어머니지만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에요. 지난해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가 한 고아원에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저는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제가 아이를 낳을 수 있든 그렇지 않든 꼭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해 올 생각이에요.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가정과 부모의 손길을 기다리는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라는 2년째 한국 입양아들을 위해 매년 열리는 「한국 뿌리찾기 캠프」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도 내년에도 자원봉사자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한다. 어머니 샤란은 이웃에 살고 있는 미미와 함께 캠프운영 책임자 일을 맡고 있다. 순수 봉사직으로 자신의 경비와 시간을 또 다른 입양아와 그 가족들을 위해 베푸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입양 이후 친자식이 태어나면 입양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친자식이 있는데도 아이를 입양하는 사례를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친자식이 있으면서 한국 입양아를 택한 미국 가정
한 살바기 잭 깁슨(12·심경일)이 고든 깁슨 가정에 입양됐을 때는 깁슨씨 가정에 이미 네 살짜리 친딸이 있었다. 몬트로스市 포모나 초등학교 교장인 고든은 첫아기를 갖고난 뒤 입양아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잭도 生後(생후) 얼마 되지 않아 신체 하복부에 수술을 요하는 의료적 문제를 가진 아이였으나 고든 교장은 이를 개의치 않고 입양했다. 입양 후 몇 차례 수술 후 잭은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됐다. 누이 케티도 잭을 친동생처럼 잘 보살펴줬다.
잭은 2001년에 한국에 가겠다는 목표로 자신의 집에서 16마리의 닭을 키워 이웃에 계란을 팔고 있다. 아버지 고든 교장은 『우리도 잭을 위해 열심히 적금을 붓고 있다』고 했다. 친자식이 있는데 외국아이를 데려와 키우면서 혹시 차별 같은 것을 한 적이 없느냐는 물음에 대해 아버지 고든 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차별이라니요. 케티와 잭 사이의 차이점이라면 하나는 여자고 하나는 남자라는 것뿐이에요. 내가 낳았든 입양을 했든 일단 우리 가정에 들어오면 누구나 똑같은 우리집 가족입니다. 나는 단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잭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혹시 본인이 그렇게 느낀 적이 있다고 하는지』
잭의 대답.
『편애나 편견은 없었다, 養부모가 부족한 것 없이 잘 해줬다. 나는 행복하다』
어머니 셰릴의 대답은 오히려 놀라웠다.
『친딸 케티가 오히려 잭을 편애한다고 우리에게 불평할 정도였어요. 그렇다고 케티가 투정을 부린 적은 없어요. 케티도 누구보다 동생 잭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이번에는 친자식이 있으면서 아이를 두 명 더 입양한 또다른 가정을 찾았다.
親자식이 있으면서 한국 아이 두 명을 입양한 다나·랄프 부부
몬트로스市에서 살고 있는 항공 기술자 랄프 데트만과 간호사 다나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이들 부부에게는 조나단(22·메사대학 역사학 전공)이라는 親자식이 있었다. 그러나 성당에서 다른 聖徒(성도)가 한국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모습을 보고 입양을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랄프와 다나 부부가 1980년대 중반 처음으로 입양한 한국 아이는 당시 세 살바기 데이비드(19·김상업·메사대학 재학중)였다. 데이비드는 서울과 부산, 다시 서울을 오가며 몇 차례 한국에서 입양과 罷養 경험을 한 후 겨우 미국으로 입양된 경우. 이들 부부는 데이비드를 입양하고 나서 1년 뒤 한국 아이를 하나 더 입양하게 된다. 당시 5개월 된 로라(16·이하영)였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고아원에 맡겨진 아이였다고 한다. 두 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한 랄프와 다나 부부의 노력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미국 환경에 적응시켜 새로운 가정을 꾸릴 것인지에 집중됐다. 부부의 설명이다.
『한국 아이들은 침대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데이비드를 입양한 후 가족 모두 마룻바닥에 매트를 깔고 함께 잤어요. 그렇게 약 6개월을 생활했어요. 당시 데이비드는 세 살이라 한국말을 했는데 우리 집에 온 뒤에는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손가락질만 했어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지요. 이렇게 마룻바닥 생활을 한 후 다시 침대에 매트리스를 깔고 다시 수개월 함께 생활을 하다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후 독립된 생활에 들어갔어요. 오래도록 데이비드가 말을 하지 않다가 첫 말을 뗀 것이 「볼(공)」이었어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데이비드의 첫 마디가 볼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데이비드는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에서 단연 최고의 축구 실력파였다. 학교간 축구시합에서 데이비드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시즌이 끝나면 각 학교 코치들이 선정하는 이 지역 최고선수에 데이비드가 뽑힐 정도였다. 여동생 로라도 오빠의 영향 때문에 학교에서 여자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지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공헌했다. 지역언론에 사진과 함께 활약상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한국 출신 입양 오누이는 親자식 조나단과 경쟁하는 입장이었지만 부부는 똑같이 이들을 사랑하고자 노력했다.
어머니 로라는 한때 어린 데이비드가 교회가기를 거부해 답답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親어머니가 일찍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어머니가 불교 신자였을지도 모르는데 죽어 천당에 가게 되면 어머니를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며 교회 가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만난 사람이 한국 이름은 최승기. 등에 태극 마크 문신을 새기고 그 안에 한국어 최승기란 단어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차별 느꼈다는 제임스, 『그래도 고아원보다는 가정의 울타리가 더 낫다』
현재 콜로라도州 주립대학에 다니는 제임스 스타버그(18·최승기)는 養부모가 親자식만큼 자신을 사랑해주지는 않았다고 말한 입양아다. 제임스는 네 살 때 인천의 한 고아원에서 입양됐다. 인천에서 서울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던 제임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시 인천으로 보내졌고 네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제임스는 고등학교 선생인 세릴 하비 가정에 입양됐지만 초기 미국 가정에 정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밤마다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깨어나면 큰소리로 울곤 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養부모는 자신을 껴안고 달래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세릴 가정에는 이미 두 명의 親자식이 있었으나 제임스와 제임스의 누나 세라 스타버그(20)가 새로 입양된 것이다. 누나는 현재 몬트로스市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그랜드 정션市 메사주립대학에서 아동학을 전공하고 있다.
제임스는 자신을 버린 親부모에 대해 나쁜 감정이나 배신감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언젠가 다시 한국으로 가고 싶고, 다음 학기부터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했다. 제임스의 이야기다.
『養부모는 親자식과 똑같이 사랑한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어요. 親자식은 무슨 일이 생기면 쪼르르 부모에게 달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나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았겠지만 養부모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럴수록 한국이 더욱 생각났어요. 나는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최근 등에 태극기 문신을 새겼어요』
차별을 느꼈다는 제임스는 그러나 養부모가 이만큼 키워준 데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혹시 부모가 때리기라도 했느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입양과 罷養을 거치면서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아 미국생활 초기에 적응이 어려웠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 부분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미국에서 한 달 동안 취재하면서 유일하게 차별대우를 느꼈다는 제임스. 그렇지만 한국의 고아원에서 그대로 성장하기를 원했을까라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내 입양은 비밀입양이기 때문에 입양의 98% 이상이 3개월 미만의 영아 때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네 살 이후에는 국내 입양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결론은 『고아원보다는 그 어떤 차별과 박대가 있더라도 부모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는 곳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이제 조금 다른 가정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이가 없는 줄 알고 입양을 했는데 뒤늦게 늦둥이가 태어난 경우다.
늦둥이 親자식과 함께 입양아를 키우고 있는 제프·마릴린 부부
마릴린(40·사회사업가)과 제프(41·콜로라도州 에너지협회 근무) 부부가 한국에서 레이첼(13·김선)양을 입양한 것은 서울올림픽 직전인 1987년이다. 결혼 후 아이가 없어 입양을 결정했지만 그후 2년 만에 놀랍게도 親아들 에릭(10)을 갖게 됐다.
親자식 에릭이 태어난 후 「데려온 자식」 레이첼에 대한 대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어머니 마릴린의 설명이다.
『한국에서 데려온 레이첼과 내가 낳은 에릭 사이에 차별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편애도 없지요. 차이라면 남자와 여자 아이라는 점뿐이지요』
탁월한 학업 성적과 뛰어난 축구 기량으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레이첼의 말이다.
『차별이라니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어요. 제가 하고 싶고 관심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시켜주려고 하세요』
트럼펫과 나팔도 배우고 있는 레이첼의 꿈은 장래 미아햄과 같은 미국 여자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란다. 레이첼은 다른 한국 입양아들과는 달리 1999년 養부모와 함께 한국을 찾아가 親부모를 찾아내 이제 편지 연락은 물론 국제전화도 주고받는다. 養어머니 마릴린의 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잘 모르다가 자라면서 해외 입양 사실을 알게 되고 한국과 親부모에 대해 부쩍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각 입양 가정마다 한국에 관한 책이나 입양에 관한 동화책 같은 것이 많아요. 또 親부모를 찾으려 하면 도와주려고 노력하지요. 레이첼도 입양기관을 통해 親부모를 수소문해서 지난해 가을 겨우 만나게 됐지요』
1999년 가을 레이첼과 에릭을 데리고 親부모를 찾아 한국에 온 제프와 마릴린 부부는 레이첼에게 親부모와의 상봉을 이루어 주었다. 親부모에겐 레이첼과 꼭 닮은 여동생과 오빠가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부부갈등으로 레이첼을 포기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레이첼 덕분에 한국에 가서 한국 음식에 반하게 됐다는 제프와 마릴린 부부는 미국 집에 김치를 사다 놓고 먹고 있다 한국 손님이 오면 내놓기도 한다.
한국 아이와 캄보디아 아이를 입양한 피터와 쉴라 부부
덴버市에 거주하고 있는 피터(55·부동산 사업가)와 쉴라 미어(54·변호사) 부부는 한국 정부에 대해 불만이 많다. 한국 아이를 입양한 후 형제를 만들어 주기 위해 한 명 더 입양하려 했으나 정부가 올림픽을 이유로 한동안 해외 입양을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차선책으로 캄보디아 동생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國籍이 다른 형제지만 부모의 사랑으로 우애가 깊다고 한다.
닉(17·이종근)이 강원도 춘천에서 미국으로 입양될 당시 나이는 네 살. 친척집을 전전긍긍하다 고아원으로 버려진 아이였다. 1986년 네 살바기 종근이는 피터와 쉴라 養부모를 만나 이름도 닉으로 바뀌고 미국시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닉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태권도를 배우며 삭였다. 태권도 유단자인 닉은 養부모의 사랑에 지극히 고마워한다며 현재는 한국인이라는 생각보다 미국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고 했다. 닉의 동생을 한국으로부터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실패한 아버지 피터의 설명이다.
『한국은 1988년 올림픽 이후 한동안 아이를 입양시켜주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가 「어린이 수출국」이라는 언론보도에 민감하게 대응해서 그런 조치를 내리게 됐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됐습니다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한국만 해외 입양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갑자기 정책을 바꿔야 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지금은 중국으로부터 여자 아이들이 수도 없이 미국으로 입양돼 오고 있어요. 중국은 남자 아이는 귀하지만 여자 아이들은 태어나게 되면 상당수가 죽거나 입양될 수밖에 없는 사회환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이 중국 여자 아이들이 미국 가정에 입양되고 있지만 중국 정부가 해외 입양 정책을 바꿨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변호사인 어머니 쉴라의 이야기.
『해외 입양은 국가 수치가 아닙니다. 뭔가 오해하고 있어요. 가정이 없고 부모도 없는 아이들에게 미국의 입양 가정은 고아원보다는 훨씬 좋은 곳이라 믿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국내 입양으로 완전히 소화시킬 수 없는 경우 아이를 고아원에 그대로 두고 성장시켜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차선책이라도 찾아야 할 겁니다.
따지자면 한국 국내 입양이 한국 아이에게는 최고라고 나도 생각해요. 그 다음은 해외 입양이 차선책이라고 봅니다. 가장 나쁜 것은 아이를 가정도 부모도 없이 집단수용해서 고아원 같은 곳에서 기르는 것이겠지요』
피터와 쉴라 부부는 집에서나 집 밖 식당에서 식사할 때 아이들과 함께 한국語 「먹자」와 캄보디아語 「연바이」를 되풀이한다. 國籍은 서로 다르지만 미국 養부모와 함께 형제는 우애 깊게 성장하고 있었다. 피터와 쉴라 부부는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한국과 캄보디아를 동시에 여행하겠다고 말한다.
한국 아이 두 명과 필리핀系 한 명을 입양한 마크와 미미 부부
이번에는 한국 입양아와 필리핀系 입양아로 구성된 다국적 가정을 찾았다.
미미(병원 간호사)와 마크(다국적회사 회계사) 부부는 한국에서 두 명의 아이와 필리핀系 아이 하나를 입양하여 덴버市에 多國籍 가정을 꾸렸다.
장남 알렉스(14·정명수)는 경기도의 한 미혼모로부터 태어나 1987년 4개월 때 입양됐다. 탁월한 머리와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알렉스는 학교 공부는 물론 음악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알렉스를 입양한 후 2년 뒤 1989년 미미와 마크 부부는 다시 한국에서 케빈(12·김희섭)을 입양해 왔다. 케빈 역시 전라북도의 한 미혼모로부터 태어난 아이였다. 케빈은 한국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옷도 항상 태극기 마크가 붙어 있는 옷을 즐겨 입었다. 장래 꿈이 축구선수라는 케빈은 자신의 방을 온통 축구공과 축구 인형, 축구공 모양의 가구로 채웠다.
미미와 마크 부부는 다시 2년 뒤 미국 텍사스州 한 필리핀系 미혼모로부터 태어난 켈리(8)를 입양하게 된다. 아이들 세 명으로 북적거리지만 미미와 마크 부부는 조금도 불편하거나 힘들다는 표정이 없다. 어머니 미미의 말이다.
『아이들이 각종 스포츠와 과외 음악활동을 하기 때문에 누가 몇시에 어디를 가야 하는지 일일이 챙기는 것이 문제지요. 가장 힘들었을 때는 세 명이 한꺼번에 아팠을 때였어요.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아이 때문에 힘들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축구를 좋아하는 케빈의 경우 축구 연습장과 시합장을 오가며 차를 태워다 주고 데려와야 하지만 부부는 번갈아 가며 이를 불평없이 해낸다. 그림을 좋아하는 켈리는 집안 여기저기 늘 그림을 그리고 다녀 일거리를 만들지만 養부모는 아이의 소질을 계발시켜주겠다는 생각뿐이다. 얼마 전에는 회사로부터 더 큰 회사가 있는 휴스턴州로 옮겨줄 것을 제의받았지만 아버지 마크는 이를 거절했다.
『회사가 필요에 따라 더 큰 곳으로 이동해 주기를 요구했을 때 참으로 고민스러웠습니다. 물론 저에게 승진 기회도 동시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10여년 살면서 아내도 아이들도 크게 만족하고 있어 나 때문에 모두 이사해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특히 알렉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더욱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곳은 우선 교육환경도 좋고 범죄도 거의 없어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는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회사에 그대로 있겠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마크는 아이들에게 화 한 번 내는 법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버지 말보다 어머니 말을 더 잘 듣는 편이다. 어머니는 부드럽지만 원칙주의자다. 하루 30분 이상 컴퓨터 게임을 못하도록 교육시킨다. 물론 금요일은 「자유의 날」로 아이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지만 평일은 주어진 임무와 원칙을 지키도록 독려한다.
「어른 중심」 아닌 「아이 중심」
다양한 해외 입양 사례를 살펴보면서 국내 입양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내 입양과 대조적인 해외 養부모들의 입양 동기와 아이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서다. 국내 입양이 어른의 필요성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해외 입양은 아이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장애아 입양이다. 국내에서 일반 가정의 장애아 입양은 사실상 全無(전무)하고, 최근 일부 종교재단에서 장애아를 입양하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해외 입양의 경우 보편적으로 30~40% 남짓이 장애아였다. 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1994년 한 해 동안 외국으로 나간 총 해외 입양아 2262명 중 43.6%에 해당하는 987명이 장애아였다. 1993년에는 총해외 입양아 2290명 중 46.7%에 달하는 1032명이 장애아였으나 이 기간 국내 입양 1154명 중 장애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입양 조건을 따지는 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입양할 수 없다. 입양 부모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조건은 보통 까다롭지 않다. 경제적 여유와 안정된 직장, 훌륭한 인품과 직장 內의 평가, 범죄기록 여부 등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가능하다. 몬트로스市에서 가장 어린 입양아를 키우고 있는 케빈과 메리 부부를 통해 입양 과정의 까다로운 절차에 대해 들었다.
입양과정의 까다로움이 罷養을 막는다
다섯 살 테일러(한국명 신승진)는 몬트로스市 공무원인 케빈과 메리 부부의 집으로 입양됐다. 케빈은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서울에서 입양됐다. 케빈 가정에는 이미 인천에서 입양돼 온 누나 켈시(9·손인숙)가 살고 있었다. 케빈 가정은 인천과 서울에서 데려온 아이들로 한 가정을 꾸린 셈이다.
입양 당시 生後(생후) 일곱 달의 케빈은 이제 다섯 살 개구쟁이로 자라고 있었다. 제2의 타이거 우즈가 되겠다며 연방 골프폼을 잡고 있다. 케빈 부부는 두 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너무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입양 절차의 까다로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養부모 신청을 하면 연방수사국(FBI)으로부터 먼저 범죄기록 조사가 시작된다. 부부가 함께 열 손가락 지문을 찍어 제출해야 한다. 이와 함께 재산 정도, 직업에 대한 조사를 받는다. FBI는 前 직장의 동료는 물론이고 인근 주민들로부터 인물 됨됨이를 조사하기도 한다. 이런 서류작업으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사업가가 직접 가정을 방문해서 집과 아이가 머물게 될 방 등을 보며 實査작업과 인터뷰 과정을 거친다. 이런 것을 통칭하여 홈 스터디(Home Study)라고 하는데 이 과정은 최소 수개월씩 걸린다. 미국에서 입양하는 가정은 적어도 이런 과정을 거쳐 검증받은 모범가정으로 보면 틀리지 않는다.
입양기관의 이런 철저한 事前事後(사전사후) 관리가 아이들의 罷養을 막는다. 또 입양아가 성장하여 다시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도 있다.
입양아가 결혼, 다시 입양아를 데려온 린디·데이비드 가정
린디 커리(46·이정순)는 덴버 지역에서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지역 전래 동화를 再정리, 하프음악 연주와 함께 들려주는 연주가이자 동화 口演(구연) 일을 하는 주부다. 현지 언론도 린디의 활약을 종종 다루고 있다. 린디는 1998년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의 해외 입양아 訪韓(방한) 초청단에 포함돼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다.
린디 자신이 입양아이면서 지난 95년 한국으로부터 입양아 셰논(5)을 데려와 키우고 있다. 린디의 경우 전형적인 입양 1세대다. 한국전쟁 직후 태어나 버려진 린디는 경남 진해의 「희망원」이라는 고아원에서 네 살 때까지 생활했다고 한다. 린디의 4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한 토막.
『진해의 당시 고아원 생각을 하면 우선 어두웠고, 암울했고 슬펐던 기억들이 납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자주 노래를 불렀던 기억도 납니다. 늘 배가 고팠고요. 그런데 내가 입양이 결정된 뒤부터는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새 옷은 물론이고 당시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과자도 줬어요. 입양이 뭔지도 몰랐지만 바뀐 대우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냥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1957년 린디는 「한국 입양의 아버지」 해리 홀트씨가 사는 오레곤州 필립·마린 테일러 가정에 입양됐다. 입양 당시의 기억이다.
『養어머니 마린이 얼마나 저를 반가워하며 꼭 껴안았는지 먹은 음식을 토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어머니 말을 들으니 내 머리에 이가 있었다고 해요. 내가 입양된 가정에는 당시 9개월된 아들 로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입양된 지 2년 후 다시 랜디라고 하는 여자 아이가 태어났어요. 우리는 함께 자랐지만 養부모로부터 차별대우나 편애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어요』
린디의 養아버지는 69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나 養어머니 마린(82)은 지금도 오레곤州에 살고 있다. 린디는 매년 적어도 한 차례씩은 꼭 찾아가서 안부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린디는 한국 입양아를 데려오게 된 사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1991년 결혼했지만 4년간 아이가 없었어요. 남편과 입양을 의논하자 남편도 흔쾌하게 찬성했어요. 내가 입양아로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 입양아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 됐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당시 1개월된 셰논을 데려오게 됐는데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귀여운 아이였어요. 내가 養부모에게 받은 깊은 사랑을 이제 내 스스로 되돌려 줄 차례가 된 거지요』
셰논의 경우 현재 자신의 親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현재 스물세 살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 미혼인 셰논의 親어머니가 린디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지난 10월 린디씨를 만난 후로 제 삶에 큰 변화도 가져오고 한편 한숨 돌리며 안심할 수 있어 요즘 덕분에 안정된 생활로 열심히 살려 합니다….
…데이비드, 셰논 아빠께서 직접 써 주신 편지에 전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데이비드씨, 모든 것이 겸손한 말씀인 듯하여 제가 감히 말씀드립니다. 애현이는 진작부터 두 분의 딸이었습니다. 단지 이곳 한국을 빌어, 아니 제 몸을 빌어 세상에 오긴 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셰논의 삶은 데이비드씨와 린디씨의 자녀로 살아가라는 커다란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사진과 편지가 도착한 후 10일쯤 지나 테이프가 도착했습니다. 믿기 어려울 만큼 놀랐습니다. 지난 테이프에 이어 이번 테이프도 역시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런 두 분의 정성 잊지 않겠습니다…」
린디는 셰논이 이제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그동안 뜸했던 동화 口演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학교, 교회, 노인단체, 병원, 소년원 등 어느 곳이든지 그녀를 찾는 곳이라면 달려가 하프 연주와 함께 한국의 전래동화를 들려준다. 1995년 콜로라도 아시안 태평양 여성단체가 매년 수여하는 「아시안 여성 활약상」 예술부문(동화口演) 수상경력이 있는 린디는 한국 민간 외교관 역할은 물론 입양아의 어머니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 초청 입양아 중 한 명으로 한국을 방문한 후 린디는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의 일부다.
「…金대통령께서 우리의 해외 입양에 대해 사과를 표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의 경우 1957년 네 살의 나이로 입양돼서 養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안정된 가정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 당시 상황에서 해외 입양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한국 정부가 우리 입양아들을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면 각 입양아에 대해서 해외 입양의 과정과 이유를 파악하고 親부모를 찾는 일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親부모가 아이들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교육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지금 한국 고아원에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고아원에 오래 머물수록 그 아이들의 미래는 더욱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제발 아이들이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번에는 한국 쌍둥이를 입양한 가정을 찾았다.
한국 쌍둥이를 입양한 신디와 스티브 부부
스티브(56·多國籍 회사 인사부장)와 신디(53·항공사 근무) 부부는 공교롭게도 한국 여자 쌍둥이 아이를 입양했다. 1987년 한 살도 안돼 이 가정에 입양된 쌍둥이들은 이제 막 십대의 수줍은 여자아이들로 성장해 있었다.
30초 간격으로 언니가 된 켈시 레이(13·정희영)는 피아노와 색소폰 연주를 좋아하고 축구, 농구, 스노보드 등 운동을 즐긴다. 동생 린지 레이(13·정희정)는 親부모를 만나게 되면 『왜 자식을 그렇게 포기해야만 했는지 꼭 직접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이들 쌍둥이 자매가 갖고 있는 親부모에 대한 정보라고는 아버지가 전홍석이라는 이름의 사람이라는 것. 어머니는 병약한 몸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대전의 한 병원에서 자신들을 낳고 회복도 채 안된 몸으로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 이 쌍둥이 자매를 데려와 이만큼 키운 어머니 신디의 말이다.
『쌍둥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하나가 울면 이상하게 다른 하나도 잘 놀다가 따라서 운다는 거였어요. 어린 것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밤새 서럽게 울어 우리들도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쌍둥이 자매들은 부모의 사랑 속에 예쁘게 자랐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성장과 함께 커졌다. 한국뿌리찾기 문화캠프가 열리는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다녔다. 올해는 6월 중순 콜로라도州 덴버에서 열리는 「한국 뿌리찾기 행사(Korea Heritage Camp:3박4일)」에 참석할지 오레곤州 행사(6박7일)에 참석할지 고민이다. 덴버는 자신이 사는 동네라서 경비가 얼마 들지 않지만 3박4일 일정이 너무 짧다는 것이 불만이다. 그래서 비행기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오레곤州까지 가서 보다 긴 일정으로 한국의 문화를 더욱 다양하게 살펴볼 심산이다.
열일곱 살에 입양돼 이제 아기 어머니가 된 아이린과 에드워드 부부
아이린선미 벨리스 (29·김선미)는 열일곱 살의 나이에 입양된 특이한 경우다. 한국에서 불우한 생활을 보낸 아이린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학교생활을 근근이 했으나 결국 청소년 보호시설로 보내졌다. 고아원 생활 끝에 미국 가정으로 입양가게 됐다.
덴버市 외곽 보울더 지역의 빌과 자넷트 부부 가정에 입양된 아이린은 처음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아이린의 기억이다.
『고등학교 정규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언어교육부터 먼저 받았어요. 매일 養어머니가 숙제를 도와줬어요. 거의 24시간 함께 생활했어요. 養부모님은 제가 오기 전에 한국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는지 식사나 한국 사람의 습관과 문화까지 많이 알고 있었어요. 그런 보살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미국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 에드워드 데마리아(30·컴퓨터 프로그래머)와 결혼해서 이제 막 한 살짜리가 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이린의 한국에 대한 기억이다.
『한국에서는 고아라면 아무리 노력을 하든 뛰어난 성적을 내든 한계가 뻔하잖아요. 취업을 해도 오래 못 가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내 운명이 어떻게 변했을까를 생각하면 끔찍해요. 저는 입양온 것을 참 다행으로 생각해요』
나이가 많아 입양하기 어려운 아이린의 미국 입양을 끝까지 도와준 사회사업가 김인(60·덴버市 AAC 입양기관 대표)씨의 이야기다.
『16세 이상은 입양이 불가능합니다. 아이린의 경우 다행히 생일이 지나지 않아 겨우 입양이 가능하긴 했으나 드문 경우지요. 미국 입양이 전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린의 경우 한국에 그대로 있어봐야 아무런 희망이 없었어요. 불우한 환경에서 다시 고아원으로 옮겨졌지만 18세가 되면 고아원마저 떠나야 하는데 배운 것도 없이 어디 가서 무엇을 하겠어요. 아이린의 어머니가 해외 입양을 강력히 원했어요. 아이린이 미국에 와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서 대학까지 나와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큰 보람입니다』
아이린은 미국 입양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선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몰라요. 또 공부도 공부지만 운동과 음악활동 등 제가 늘 한국에서 꿈꾸어오던 것을 이곳에서 실제로 할 수 있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저와 결혼한 남편 에드워드는 제게 처음으로 콜로라도 대학 캠퍼스를 구경시켜 준 사람이에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아이린은 지난해 남편과 함께 한국을 찾아 親어머니에게 손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하염없이 울었단다. 再婚한 어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언론의 인터뷰에 일체 응하지 않아왔다는 아이린은 해외 입양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이 고쳐지기를 간곡하게 당부했다.
『한국 사람들은 情이 많으면서도 낯선 사람에게는 참 무례해요. 내가 한국의 한 식당에 가서 「김치백반」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었어요. 그랬더니 어디서 온 사람인데 김치백반도 모르냐면서 얼마나 면박을 주는지 참 어이가 없었어요. 어떤 경우는 아예 남편과 영어로만 얘기하며 주문하면 차라리 잘 해줘요』
한 달 예정으로 한국에 갔다가 일정을 단축시켜 2주일 만에 돌아왔다는 아이린은 손자를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 때문에 다시 한국에 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값싼 동정과 괜한 냉대에 질려 한국이 「가고 싶지만 가고 싶지 않은 나라」가 돼버렸다.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한국만큼, 특히 한국 사람에게 불친절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아이린.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상처를 주는 이 잘못된 사회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입양아가 꾸린 신혼가정
입양아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 사는 한국인의 불친절 때문에도 속상하는 경우가 잦다. 이런 사례는 미국의 유명한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도 소개된 적이 있고 국내 언론도 이를 보도한 적이 있다. 입양아로 미국에 와서 이제 신혼살림을 마련한 한 입양 가정의 증언이다.
입양아였던 알렉사(27·변호사 사무장)는 최근 미국인 마틴 매키유(27·회계사)와 결혼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오다 마침내 콜로라도州에 보금자리를 튼 것이다. 알렉사의 긴 이름은 그녀의 인생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현재 이름은 「알렉사 미주 머피 매키유」 (Alexa Meejoo Murphy Mchugh).
알렉사가 부산에서 미국으로 입양될 당시 나이는 여섯 살. 한국에서 부르던 이름은 미주였다. 미국에 입양가서 알렉사로 이름이 새로 만들어졌지만 한국 이름을 그대로 남겨두기 위해 「알렉사 미주 머피」로 불렀다고 한다. 養부모는 훗날 알렉사가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 오면 보다 분명하게 알도록 배려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결혼 후 알렉사는 남편의 姓(성) 「매키유」를 보태 이렇게 이름이 길어졌다. 국내에서는 나이 때문에 입양의 가능성이 全無했던 당시 여섯 살 알렉사가 미국으로 입양가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여섯 살 때 집에 불이 나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변을 당했어요. 주위에 친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몇몇 친척집을 떠돌다가 결국 나는 어떤 고아원으로 보내졌어요. 그곳에서 얼마 있지 않아 미국으로 입양된 것으로 압니다』
알렉사는 위스콘신州 아일랜드계 교육자 집안에 입양돼 유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대학은 콜로라도州 콜로라도 대학으로 진학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늘 한국생활을 그려온 알렉사는 자신이 떠나온 부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으로 입양된 뒤 한 번도 한국을 못갔으니 20년 세월이 넘었습니다. 철모르던 아이가 이제 남편과 가정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했고 얼마 후면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부산은 아직도 희미하게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바다, 생선, 배…』
성격이 밝고 활달한 알렉사는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만큼은 그렇게 밝지 못하다. 알렉사의 경험담이다.
『한국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한국인같이 생겼는데 한국말을 모르면 깔보는 것 같고 이상하게 대하는 것 같아요. 미국 대학에서 한국서 유학온 학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대부분 그런 식이었어요』
알렉사는 한국을 일주일이나 열흘 만에 다녀오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먼 곳이라 돈을 모으며 기회를 보고 있다고 한다.
『해외 入養은 최후의 선택이어야』
해외 입양이 이처럼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민족도 언어도 다른 이국땅에서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혹은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고민이다.
피부가 달라 모습은 한국인이면서 思考(사고)는 완전히 미국인인 이들 입양아들은 남들보다 적어도 두 번은 더 인생의 큰 혼란을 겪는다고 한다. 그 첫번째는 사춘기 시절, 그 다음은 한 가정을 꾸려 자신의 2세에게 부모의 살아온 이야기를 설명해야 할 때라고 한다. 한 입양아는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없는 나무』라며 親부모와 母國에 대해 강한 집착을 나타냈다.
덴버대학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엘리자베스(김진)는 1960년 두 살 때 미국으로 입양왔다. 엘리자베스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옮겨 다녔으나 결국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홀트 입양기관을 거쳐 미국 가정으로 입양됐다.
처음 일리노이州 한 목사 가정에 입양된 엘리자베스는 養부모가 잘 해줬지만 미국생활에 적응하기 꽤 어려웠다고 한다. 엘리자베스의 기억이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놀려서 싸웠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못생겼다고, 혹은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고 놀려서 싸웠고요. 선생님하고도 다른 어른들하고도 심하게 다툰 것으로 기억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리 養부모가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해주려 노력했으나 한국 입양아의 부모가 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한국에 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
『분명히 지금쯤 죽었을 거예요. 가난에 찌들렸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시절입니다. 운이 좋았다면 고아원 일꾼이 됐을 거고 그렇지 않으면 나이 어린 娼女(창녀)가 됐을 거예요. 나는 해외 입양에 대해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지만 현재의 내 위치를 생각하고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 養부모에게 고마운 마음이지요』
해외 입양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입양에 대한 유엔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유엔에서 해외 입양은 최후의 선택이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잃었다고 해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하루아침에 잃게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각 나라는 그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문제와 복지에 대해서 총괄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미국에서 30세 이상의 한국 입양아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수집, 분석 「인종과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입양 후 단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엘리자베스는 꼭 한국을 방문하고 싶지만 아직 돈과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入養觀을 再검토할 때
입양의 역사는 한국전쟁 직후 미국인 해리 홀트씨에 의해 시작됐다. 시작 동기도 전쟁고아나 기아를 데려가 잘 키우겠다는 한 가지 마음뿐이었다. 지금까지 해외 입양된 아이의 수는 20만여 명. 경제적으로 선진국 행세를 하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해외로 보내지고 있다.
국내 입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내 입양은 비밀입양에다 혈통을 중시하는 전통사회인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서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 문제의 가장 심각한 양상이 罷養으로 나타난다. 지금도 고아원이나 사찰, 사회복지법인 등에 가면 몇 번씩 버려진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보호시설에서 고등학생 때까지는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이후는 따로 독립해야 한다.
특별하게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아이들이 보호시설을 떠나 갈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 몇 번씩 罷養당한 아이는 심리적으로 사회에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갖고 있다.
정부는 진실로 아이들의 행복 추구권에 대한 고민 없이 수시로 해외 입양을 중단하겠다는 발표만 되풀이하고 있다. 1996년에 해외 입양을 전면중단하겠다고 해놓고 슬며시 철회했다.
국내 입양이 제대로 안되니 해외 입양을 장려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더구나 장애아이들은 우리 손으로 보살핀다는 의식이 꼭 필요하다. 그것은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장 넘쳐나는 아이들을 그냥 국내 보호시설에 가둬두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먼저 우리의 入養觀(입양관)에 대한 반성이 전제돼야 하고 해외 입양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떨쳐버려야 한다.
이번 취재를 통해 미국, 유럽 등지에서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입양의 동기는 아이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잘 키우겠다는 봉사와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아이를 어른의 종속물이 아닌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입양 가정에 대해 재정지원 혜택을 늘려간다는 정부정책은 非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일면 위험스런 측면도 있다. 세금혜택이 주어지니 아이를 입양하라면 아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것보다는 입양 후 아이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의료적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의료보험 혜택을 줘서 수술비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입양 대상이 되는 아이를 줄여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고아보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가 입양의 주를 이루는 만큼 현실적인 性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性과 임신에 대한 지식부족으로 임신한 사실조차 모른 채 임신 후 감기약이나 각종 약물을 복용하거나 지나치케 腹帶(복대)를 사용해서 장애아나 未(미)성숙아가 태어나는 경우가 잦다.
국내 입양이든 해외 입양이든 입양은 고맙고도 숭고한 일이다. 더구나 장애아마저 입양시켜 사랑으로 키우는 養부모들에게 한국인들은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