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70년 전 그때

70년 전, 그때도 우리는 싸우고 있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선일보 DB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이승만 박사는 1946년 12월 ~1947년 4월 미국에서 건국외교 활동을 벌였다.
때마침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 박사의 건국 투쟁에 힘이 실렸다.
1947년 미 7사단 보병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프레드 다익스 씨가 촬영한 이승만 지지집회 현장 모습.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 레이황(황인우)이 쓴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the Ming dynasty in decline)》라는 책이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해’가 어디 있을까? 다만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는 각별한 사건이 없었던 해라는 의미일 것이다.
 
1947년 8월 15일 광주 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해방 2주년 기념식.
태극기와 함께 내걸린 성조기가 누가 한민족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켰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1947년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대한민국 건국 한 해 전인데, 1945년 해방, 1948년 건국, 1950년 6·25전쟁 같은 눈에 확 띄는 큰일은 없었다. 이승만 박사가 건국 외교를 위해 미국을 다녀왔다. 제2차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열렸고. 미(美)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앞세워 좌우합작(左右合作)을 추진했다. 하지만 중도세력의 어정쩡한 합작이었을 뿐이다. 해방 3년째에 이르러 좌우(左右)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미국에서 반세기만에 귀국한 서재필(가운데)과 김규식(왼쪽), 여운형(오른쪽). 얼마 후인 그해 7월 19일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7월에는 극우 청년들이 몽양 여운형을 암살했다. 좌우합작은 물건너갔다. 좌우만 갈등한 게 아니었다. 우익끼리도 싸웠다.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장덕수는 그해 12월 암살됐다. 한국민주당과 알력을 빚고 있던 상하이 임시정부 계열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백범 김구는 이 일로 미군정 재판정에 소환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이후 김구가 건국 노선에서 이탈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됐다. 그해 4월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한 것이 국민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1947년 12월 발생한 장덕수 암살 사건과 관련해 1948년 3월 미군정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김구. 우익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북에서 남으로 오는 행렬은 1947년에도 계속됐다. 그해 10월 38선을 넘어 월남하는 일가족을 미군 병사가 맞고 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7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MAGAZINE 인기기사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