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용 장군, “심일은 도망자” 주장 … 심일의 미 은성무공훈장 수훈이 결정적 반박자료
⊙ 전선 찾은 심일 부모 위로 위해 태극무공훈장 주기로 했다? … 시기상 ‘거짓’으로 판명
⊙ 공적확인위원회, 미국 NARA의 은성무공훈장 자료와 태극무공훈장 추천서 최초 발굴
⊙ 육군참모차장, “심일 소령 공적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으로 최종 판단”
⊙ 국방부, 역사적 사실의 진위를 공청회에서 해결하려다 불필요한 논란만 키운 셈
⊙ 전선 찾은 심일 부모 위로 위해 태극무공훈장 주기로 했다? … 시기상 ‘거짓’으로 판명
⊙ 공적확인위원회, 미국 NARA의 은성무공훈장 자료와 태극무공훈장 추천서 최초 발굴
⊙ 육군참모차장, “심일 소령 공적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으로 최종 판단”
⊙ 국방부, 역사적 사실의 진위를 공청회에서 해결하려다 불필요한 논란만 키운 셈
6·25 전쟁영웅 심일(沈鎰, 1923-1951) 소령이 ‘비겁한 도망자’라는 주장이 지난해 중앙 일간지에 실리자 큰 파란이 일었다. 《조선일보》는 2016년 6월 17일 자 〈북(北) 탱크를 부순 ‘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이란 칼럼에서 “심 소령은 ‘전쟁 영웅’이 아니라 ‘비겁한 도망자’”라고 썼다. 사실이라면,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무색하게 할 기사였다.
해당 칼럼을 쓴 기자에게 증언한 인물은 춘천 전투 당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李大鎔·92) 전 주월공사(육사 7기)였다. 이대용 전 공사는 “춘천 전투에서 심일 소대장은 육탄돌격이 아니라 도망을 갔고 대전차포 1문을 적에게 넘겨줘 문제가 되자 중대장은 격노해 총살감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심 소령의 죽음 역시 1951년 1월 26일 영월 전투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장교 1명과 사병 3명과 함께 묘향산 화전민 움막에 숨어들어 중공군에게 포위된 후 뒷문으로 뛰어나가다 총에 맞아 숨졌다고 주장했다.
전공 조작도 1951년 심 소령의 전사 이후 심 소령의 4형제 중 2명(심일, 심익)이 전사하고 1명(심민)은 빨치산 토벌작전 참가 후 투병하는 등 딱한 처지를 염려한 당시 연대장이 1939년 ‘노몬한 전투’를 모방해 1951년 10월 선의로 전공을 조작해 태극무공훈장을 상신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작된 훈장 상신서가 정훈자료로 활용되면서 ‘거짓신화’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당시 심 소령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바로잡자고 논의했지만 심 소령의 모친은 만 100세까지 장수하셨고 그 전에 연대장과 전우들이 먼저 저세상 사람이 됐다”며 “결국 살아있는 내게 책임이 남게 됐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사범대 다니다 육사(陸士) 입학
우리 군이 태릉 육사 교정과 원주 현충공원에 동상을 세우고, 육군에서 매년 가장 우수한 전투중대장을 선발해 ‘심일상(賞)’을 수여하는 심일은 누구인가. 1923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심일은 1948년 25세라는 늦깎이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49년 5월 육사8기로 임관했다.
6·25가 일어나자 당시 6사단 7연대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으로 복무하던 심일 중위(당시 계급)는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계속 전진해 오자 특공대를 편성,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육탄공격을 해 적 자주포(SU-76) 2대를 격파했다.
심일 중위의 전공은 삽시간에 전군에 전파됐고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에 대한 아군의 공포심을 제거해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개전 초 북한군의 기세를 꺾고 춘천을 이틀간이나 지연방어함으로써 아군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의 참전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후 심일 중위는 대위로 1계급 특진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충북 음성지역 전투, 경북 영천 304고지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1년 1월 26일 강원도 영월지역 전투에서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정찰작전 중 전사했다. 정부는 그해 7월, 고인에게 위관급 장교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소령 특진을 추서했다.
국방부, 공적확인위원회 구성해 공적 재조사
언론 보도가 나가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심일 공적 관련 사료를 검토해 ‘6사단 전투상보, 당시 7연대의 연대장·대전차포 중대장·병기장교 등 기존의 관련자 증언과 태극무공훈장 공적서 등을 근거로 심일이 북의 자주포를 파괴한 공적이 있음을 확인’이라는 결과를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다.
국방부 정책실은 군사편찬연구소의 보고는 짧은 기간에 기존자료에만 의거해 검토한 것이므로 이대용 전 주월공사가 제기한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에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장관에게 건의했고, 장관은 군사편찬연구소 이외에 육군에서도 추가적으로 연구하도록 정책실에 지시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육군군사연구소는 6·25전쟁 관련 공식 자료들을 찾는 대신, 당시 전투와 관련된 생존자의 증언을 찾는 데 골몰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90세 이상의 생존자 13명을 찾아 이들을 면담하거나 통화했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그날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 육군군사연구소 측 주장이다.
결국 육군군사연구소는 지난해 8월 이대용 장군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대립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군 관계자는 “육군군사연구소가 심일 소령의 공적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박경석 장군의 증언도 참고한 것으로 안다”며 “박경석 장군은 육사정신을 상징하는 심일 소령뿐만 아니라 맹호부대(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재구대대) 대대장으로 부임하면서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폄하’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차장(준장)이었던 박경석 장군은 1981년 육군본부가 ‘심일 소령의 태극무공훈장 수여는 잘못된 것’이라는 진정서를 받았을 때 진상조사 책임자였다. 박 장군은 육군군사연구소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심 소령의 공적은 허위임을 결론내리고 이를 김홍한 인사참모부장(소장)에게 보고한 후 태극무공훈장 삭탈을 건의했다”며 “그러나 전두환 정권 출범으로 어수선한 때였던 탓에 훈장삭탈 실행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한 달 반에 걸친 연구 끝에 이대용 전 주월공사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국방부에 보고했다. 육군군사연구소의 보고를 받은 국방부 정책실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육군군사연구소의 연구검토 결론이 상반돼 객관적이고 투명한 사료검증을 위해 좀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원회를 만들어 사실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정책실은 전쟁사 전문가에 의한 객관적이고 투명한 사료 검증을 위해 중립적인 ‘고 심일 소령 공적확인위원회’ 구성을 장관에게 건의했고, 장관의 승인에 따라 지난해 9월부터 공적확인위원회가 가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 정책실은 객관적 검증을 위해 육군군사연구소 추천 전쟁사 전문가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추천 전문가 각 3인, 한민구 장관 추천 위원 1인 등 총 7명으로 ‘고 심일 소령 공적확인위원회’를 구성했다. 육군군사연구소 측 전문가는 이현수 전 육사 교수부장, 노영구 국방대 교수, 최홍석 청주대 교수 등이고 군사편찬연구소 측 전문가는 온창일 육사 명예교수(위원장), 김광수 육사 명예교수, 나종남 육사 교수이며, 한민구 장관이 추천한 위원은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였다.
미 은성무공훈장 추천자료 발굴 성과
7명의 6·25전쟁사 전문가들로 구성한 공적확인위원회는 지난해 9월부터 4개월 동안 대대적으로 국내외에 걸쳐 자료확보, 현장검증, 생존자 증언 작업에 들어갔다. 허남성 교수는 “이대용 장군과 육군군사연구소가 제기한 심일 중위의 전투 중 공적조작 의혹, 태극무공훈장 수여결정 과정 중 조작 의혹 검증에 착수했다”며 “공적확인위원회는 가급적 피아의 공식문서를 통해 쟁점사안을 확인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공적확인위원회가 발굴한 미 은성무공훈장 추천서, 태극무공훈장 공적서, 북한군 262부대 훈장(훈패) 상신서, 미 제1해병사단 사진자료 등은 쟁점사안을 파악하는 핵심 자료였다.
김광수 교수는 1980년대부터 공개를 시작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미 포로신문 보고서와 심일 소령의 미 은성무공훈장을 상신하는 공적조서를 발굴할 수 있었다. 당시 공적조서를 작성한 이는 전투 현장에 있었던 6사단 고문단장 토머스 맥페일(Thomas McPhail) 중령이었다.
김광수 교수는 “미국 정부가 심일 소령에게 은성무공훈장(실버스타)을 수여한 사실은 알았지만 자료는 이번에 처음으로 발굴했다”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대용 장군은 심일 소령이 실버스타를 수훈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공적확인위원회의 나종남 교수는 국가기록원에서 심일 소령 관련 6·25전쟁 개전 3일 상황에 관한 결정적 자료들을 확보했다. 심일 소령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기록들을 몽땅 찾아냈다. 김광수 교수는 국립도서관에서 6·25전쟁 당시 평양에서 노획한 북측 자료도 확보했다.
허남성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문서를 노획한 경험이 있었던 미군은 6·25전쟁 당시 평양 입성 때 ‘인디언헤드’라는 태스크포스 부대를 조직해 평양의 북한군 사령부의 문서 수천 박스를 트럭으로 진남포를 거쳐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가져갔다”며 “심일 소령에 관한 한국군과 북한군의 기록, 미국 측 자료들을 대조해 보면 당시 전투상황에 관한 퍼즐을 완성할 수 있다”고 했다.
구술자료 신뢰도는 10% 미만
지난해 12월 2일 《조선일보》는 〈北 탱크를 부순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 그 뒤〉라는 칼럼에서 “국방부가 육군에 대해 감사하는 모양새가 됐다”며 “국방부는 ‘심일 신화’를 지키려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해당 칼럼은 육군군사연구소가 면담한 13명의 생존자는 모두 심일의 공적을 부인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허남성 교수는 “역사학에서 하드소스(경성자료) 문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소프트소스(연성자료)인 오럴히스토리와 구술은 신빙도를 16~17%로 본다”고 했다. 허 교수는 “《육사30년사》를 집필하며 창군인사 200여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구술자료의 신뢰도는 10% 미만이었다”며 “이마저도 외국 참전 용사의 2분의 1의 신뢰도를 보였다”고 했다. 이대용 장군도 심일 소령의 옥산포 전투 시기, 적 자주포 파괴주체와 파괴대수 등의 증언을 할 때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해당 칼럼은 또 ‘은성무공훈장 추천서에 기록된 날짜와 장소에서 전투는 없었다’며 은성무공훈장 추천서를 문제 삼았다. 허남성 교수는 “육군군사연구소는 추천한 고문관이 직접 전투를 목격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미국의 훈장 수여 시스템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며 “맥페일 중령은 자신이 분명하게 목격하지는 않았으나 전투에 참여한 장교들을 철저하게 조사해 확인을 했다는 의미로, 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반드시 적는다”고 했다.
“도망가는 줄 알고 욕까지 했으나 …”
그렇다면 정부가 발간한 6·25전쟁 공간사(公刊史)에는 심일 소대장의 당일 전투행적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심일 소대장은 전쟁 당일인 6월 25일 오후 2시경 57mm 대전차포를 이끌고 전방으로 나아갔다. 일명 ‘옥산포 전투’다. 심일은 남하하는 북한군 2사단 예하 SU-76자주포를 향해 포탄을 쏘아 명중시켰으나 끄떡하지 않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수류탄과 사이다병에 휘발유를 넣은 휘발유병을 들고 전진해 오는 적 자주포의 궤도를 육탄으로 공격해 2대를 파괴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적 자주포 8대는 더 이상 남진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북쪽을 달아났다. 이를 지켜보던 7연대의 보병진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연대지휘소가 있던 우두산에서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에게 “심 중위가 육박(肉薄) 공격으로 전차(당시 자주포를 전차로 오인)를 파괴한 사실은 6·25가 난 지 몇 시간이 안 되지만 이것이 처음일 것”이라며 “우리 장병들은 그때부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뒷날에도 많은 전차를 고철로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7연대 3대대 인사장교 겸 12중대장 송인규 중위는 1980년 12월 증언에서 “심 중위가 지휘하는 57mm 대전차포가 명중했는데도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고 계속 전진해 오자 심 중위는 대전차포를 철수하기 시작했다”며 “나는 그들이 도망가는 줄 알고 욕까지 했는데 조금 있으니 길 옆 풀밭으로 기어 나와 해치를 연 전차에 모조리 수류탄을 던져 파괴시켰다”고 했다.
이대용 장군(7연대 1대대 1중대장)은 전쟁 당일 심일 소령(7연대 직할 대전차포 중대장)과 같은 부대도 아니었고 이대용 장군은 적의 조공방향, 심일 소령은 주공방향 5번 국도상에서 전투를 치렀다.
춘천 출신의 허남성 교수는 “당일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비가 쏟아졌고 게다가 쌍안경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렇게 옆에서 본 것처럼 말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다”며 “상식적으로 자기 부하들이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한가하게 2km 떨어진 인접 중대 전투상황을 관람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6월 26일 김일성은 춘천 점령 실패의 책임을 물어 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으로 교체했다. 북한군은 독이 올라 새벽 5시40분부터 맹렬한 포격에 나섰다. 6시간의 교전 끝에 소양교를 방어하던 심일 중위는 오전 10시경 춘천시내로 들어온 적 자주포 3대를 단독으로 파괴했다. 춘천 전투는 수원 이남으로 진출해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해 섬멸하려는 북한의 남침공격 계획을 좌절시켰다.
심일 중위는 6월 26일의 ‘소양교 전투’로 미 은성무공훈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한다. 1950년 9월 1일 미국 정부가 결정한 은성훈장 추천서는 ‘국군 제7연대 소속 심일 중위가 1950년 6월 26일 10시경 춘천 전투에서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는 적 전차 3대를 파괴할 때까지 진지에 남아 포격전을 전개한 영웅적 행위를 기려 훈장을 추천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6사단 장교 가운데 심일만 태극무공훈장 수훈
태극무공훈장은 읍소한다고 연대장 수준에서 줄 수 있는 훈장인가? 태극무공훈장은 1950년 12월 23일 순직한 미 8군사령관이나 흥남철수작전 시 피란민 10만명을 구한 미 10군단장 앨먼드 장군도 못 받은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이다.
당시의 서훈과정을 살펴보자. 정부는 1951년에 들어서 6·25 전공자들에 대한 무공훈장 심의 및 포상에 들어갔다. 심일 소령도 춘천 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아 1950년 11월 태극무공훈장 공적서가 올라갔으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국무회의에 계류돼 있다가 1951년 7월 26일에야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심일 대위는 이미 전사한 뒤였기 때문에 훈장은 부친 심기연이 부산 임시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심기연은 훈장을 받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1951년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할 때 장교와 사병이 찾아왔기에 따라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됐는데 그때 비로소 자식이 적 전차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술회했다.
정부에서는 심일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후인 1951년 11월 11일 소령으로 추서했다.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은 그 심사도 엄격했다. 그런 탓인지 1129일간의 6·25전쟁 중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군인 및 경찰은 191명에 불과하다.
191명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군이 73명, 경찰관이 1명, 그리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117명이다. 100만명이 넘는 참전자 중에서 불과 73명만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곧 그 훈장이 얼마나 받기 어려운 훈장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대한민국 제1호 태극무공훈장은 맥아더 원수를 필두로, 제1호부터 제8호까지 대부분이 장군급 지휘관이고, 제9호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는 유일하게 위관급 장교였던 심일 소령이었다.
허남성 교수는 “당시 국무회의장에서 태극무공훈장 17명에다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포함시켜 18명을 심사했다”며 “그중 절반이 탈락하고 심일 소령을 포함해 9명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태극무공훈장 서훈의 엄격함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허 교수에 따르면, 18명 가운데 6사단장 김종오 장군, 연대장 임부택 중령, 2연대장 함병선 중령, 심일 소령 등 4명이 올라갔으나, 사단장과 2명의 연대장은 탈락하고 심일 소령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던 것이다.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는 “심일 소령은 1950년 10월 말 심 소령이 생존해 있을 때 사단에서 공적서가 군단을 거쳐 육본과 국방부로 올라가 최종적으로 국무회의로 올라갔다”면서 “8개월간 심의기간을 거쳐 1951년 10월 15일 심일 소령이 전사한 후 훈장이 수여됐다”고 했다.
미국 정부도 심일 소령의 전공을 인정하여 북한군 8월 공세를 저지하고 한숨을 돌린 1950년 9월 은성무공훈장을 상신했고 심일 소령은 1954년 6월 12일 은성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은성무공훈장은 의회명예훈장, 십자훈장에 이어 외국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등급의 훈장이다. 심일 소령의 전공은 국방부의 전사에 기록됐다.
문제제기 했던 육군본부, “증명된 것으로 판단”
지난 1월 24일 공적확인위원회는 위승호 국방부 정책실장, 정연봉 육군참모차장(중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4개월 동안의 활동내역을 보고했다. 김광수 육사 명예교수는 “육군군사연구소 측 학자들조차 대체적으로 수긍했고 사실상 참석자들이 만장일치로 조사결과에 동의했다”고 했다. 정연봉 육군참모차장은 “공적확인위원회 문서와 육군군사연구소 자료를 모두 검토한 다음 공청회 발표를 듣고 보니 심일 소령 공적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으로 판단한다”며 “이것이 앞으로 육군의 입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회를 본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는 토의를 진행하며 “전술적으로 후퇴한 전우에게 ‘도망했다’는 표현을 어떻게 쓸 수 있나”라고 개탄했다. 허남성 교수는 “심일 소대장은 당시 적진 가까이 가서 2대를 파괴하고는 신속히 후퇴했는데 이것은 57mm 대전차포를 쏘고 나면 후폭풍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니까 진지를 변환하는 전술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당시 임부택 연대장은 “심일 중위가 끌고 갔던 대전차포 1문이 진흙 속에 빠져 포기하고 그대로 철수했다”고 증언한 데 반해 이대용 장군은 포 1문을 유기한 채 도망갔다“고 전언하고 있다.
공적확인위원회는 육군군사연구소와 이대용 장군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공청회 자료집을 토대로 최종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이다.
이대용 장군이 심일 소령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을 중점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에 대해 김광수 교수는 “이대용 장군은 심일이 사망한 후에 그의 어머니(조보배 여사)가 7연대장(양중호 대령)을 찾아와 한탄하자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전공을 조작해 훈장을 상신하기로 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에 맞지 않다”며 “1·4후퇴 이후 38도선상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1951년 1월과 5월 민간인 어머니가 전선을 방문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게다가 이미 1950년 11월 태극무공훈장이 상신된 아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을 달라고 한다는 게 이치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역사에 ‘불편한 진실’은 없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입장이 담긴 6·25전쟁 공간사(公刊史)를 쓰기 위해 1964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해 이에 대한 연구 및 편찬 작업에 들어가도록 했다. 전사편찬위원회는 6·25전쟁사 작성에 앞서 자료수집과 함께 당시 생존해 있던 참전자들에 대한 증언을 청취해 이들 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사》(총11권)를 편찬했다. 이로써 6·25전쟁에 대한민국 정부의 공간사가 탄생했다. 심일 소령에 대한 전공도 이 공간사에 수록됐음은 물론이다.
남정옥 박사는 “육군군사연구소가 1970년대 중반에 심일 전공을 나타내는 자료가 없다고 하는데 1951년에 작성된 1차 사료인 국가기록원의 《태극무공훈장부》(심일 편)는 왜 보지 않고, 언급하지도 않은 북한자료까지 봤다고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이대용 장군의 말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문서인 《태극무공훈장부》나 국방부의 공간사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지, 그런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면서 “공청회 현장에서 이대용 장군이 ‘역사적 공문서들은 조작된 것’이라고 소리를 칠 때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심일 소령에 관한 국방부의 6·25전쟁 기록은 최초 연구 편찬단계에서 이대용 장군이 제기했던 그런 문제점을 검토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대용 장군이 일간지 기자에게 제보한 ‘증언’ 내용은 과거의 내용을 전면 부정한다는 점에서 쇼킹한 내용일는지는 모르나 혼자만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역사자료로 채택하기에는 처음부터 객관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남정옥 박사는 “역사에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은 없다”면서 “‘사실(fact)’과 ‘사실 아닌 것(false)’만 존재할 뿐”이라며 “더 이상 검증되지 않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심일 소령의 전공을 폄하하거나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육사(陸士), 올해 졸업식에서 심일상 수여 안해
6·25전쟁 때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심일 소령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 채 위패만 모셔져 있다. 이를 뒤늦게 알고 안타깝게 여긴, 심일 소령이 육군사관학교 8기 생도시절 중대장이었던 손희선 장군(육군소장 예편, 육사2기)이 그가 전사했던 영월에 위령비를 세웠고 8기 동기생들은 위관장교로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심일 소령을 기리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내에 전공비를 세워 후배들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2003년도부터 뒤늦게 ‘심일상’을 제정해 매년 우수중대장 14명에게 심일상을 수여하게 됐다. 이는 베트남전쟁에 강재구상을 제정해 수여한 것처럼, 6·25전쟁에 심일상을 제정해 육사정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뜻깊은 사업이었다.
임업으로 큰돈을 번 심일 소령의 부친 심기연 선생은 월남해 아들 넷을 두었고 이 중 셋을 조국에 바쳤다. 큰아들 심일 소령에 이어 둘째인 심민은 경찰로 근무했고, 32세이던 1960년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근무 중 업무 과로에 따른 심장마비로 순직했다. 셋째인 심익은 서울고 재학 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만 17세의 나이에 학도병에 자원해 낙동강 방어전투에 참전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심일 소령의 막내동생인 심승택(63·공무원)씨는 “육군은 지난해 연말 육사출신 우수 중대장에게 시상하던 전투중대장상을 취소한 데 이어, 올해 졸업하는 육사생도에게도 ‘심일상’을 주지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지금껏 심일상을 받은 군인들의 명예는 뭐가 되냐”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호국영령 하나 지켜 주지 못하고 흠집이나 내려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잃는다”고 했다.
국방부 공적확인위원회는 이대용 장군과 육군군사연구소가 제기한 주장이 ‘사실무근’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냈지만, 최종보고서 채택이 늦어지면서 육군군사연구소도 “정확하게 검증하지 않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남정옥 박사는 “국방부는 역사적 사실의 진위(眞僞)를 공청회를 통해 안이하게 해결하려다 불필요한 논란만 키운 셈이 됐다”며 “지금이라도 공적확인위원회가 조사한 내용을 확정해 호국영웅의 명예를 되찾아드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해당 칼럼을 쓴 기자에게 증언한 인물은 춘천 전투 당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李大鎔·92) 전 주월공사(육사 7기)였다. 이대용 전 공사는 “춘천 전투에서 심일 소대장은 육탄돌격이 아니라 도망을 갔고 대전차포 1문을 적에게 넘겨줘 문제가 되자 중대장은 격노해 총살감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심 소령의 죽음 역시 1951년 1월 26일 영월 전투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장교 1명과 사병 3명과 함께 묘향산 화전민 움막에 숨어들어 중공군에게 포위된 후 뒷문으로 뛰어나가다 총에 맞아 숨졌다고 주장했다.
전공 조작도 1951년 심 소령의 전사 이후 심 소령의 4형제 중 2명(심일, 심익)이 전사하고 1명(심민)은 빨치산 토벌작전 참가 후 투병하는 등 딱한 처지를 염려한 당시 연대장이 1939년 ‘노몬한 전투’를 모방해 1951년 10월 선의로 전공을 조작해 태극무공훈장을 상신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작된 훈장 상신서가 정훈자료로 활용되면서 ‘거짓신화’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당시 심 소령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바로잡자고 논의했지만 심 소령의 모친은 만 100세까지 장수하셨고 그 전에 연대장과 전우들이 먼저 저세상 사람이 됐다”며 “결국 살아있는 내게 책임이 남게 됐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사범대 다니다 육사(陸士) 입학
우리 군이 태릉 육사 교정과 원주 현충공원에 동상을 세우고, 육군에서 매년 가장 우수한 전투중대장을 선발해 ‘심일상(賞)’을 수여하는 심일은 누구인가. 1923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심일은 1948년 25세라는 늦깎이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49년 5월 육사8기로 임관했다.
6·25가 일어나자 당시 6사단 7연대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으로 복무하던 심일 중위(당시 계급)는 남하하는 북한군의 SU-76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계속 전진해 오자 특공대를 편성,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육탄공격을 해 적 자주포(SU-76) 2대를 격파했다.
심일 중위의 전공은 삽시간에 전군에 전파됐고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에 대한 아군의 공포심을 제거해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개전 초 북한군의 기세를 꺾고 춘천을 이틀간이나 지연방어함으로써 아군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의 참전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후 심일 중위는 대위로 1계급 특진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충북 음성지역 전투, 경북 영천 304고지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1년 1월 26일 강원도 영월지역 전투에서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정찰작전 중 전사했다. 정부는 그해 7월, 고인에게 위관급 장교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소령 특진을 추서했다.
국방부, 공적확인위원회 구성해 공적 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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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4일 전쟁기념관 이병형홀에서 국방부와 육군본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의 사회로 ‘고 심일 소령 공적확인위원회’ 공청회가 열렸다. 사진=군사편찬위원회 |
국방부 정책실은 군사편찬연구소의 보고는 짧은 기간에 기존자료에만 의거해 검토한 것이므로 이대용 전 주월공사가 제기한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에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장관에게 건의했고, 장관은 군사편찬연구소 이외에 육군에서도 추가적으로 연구하도록 정책실에 지시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육군군사연구소는 6·25전쟁 관련 공식 자료들을 찾는 대신, 당시 전투와 관련된 생존자의 증언을 찾는 데 골몰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90세 이상의 생존자 13명을 찾아 이들을 면담하거나 통화했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그날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 육군군사연구소 측 주장이다.
결국 육군군사연구소는 지난해 8월 이대용 장군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대립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군 관계자는 “육군군사연구소가 심일 소령의 공적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박경석 장군의 증언도 참고한 것으로 안다”며 “박경석 장군은 육사정신을 상징하는 심일 소령뿐만 아니라 맹호부대(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재구대대) 대대장으로 부임하면서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폄하’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차장(준장)이었던 박경석 장군은 1981년 육군본부가 ‘심일 소령의 태극무공훈장 수여는 잘못된 것’이라는 진정서를 받았을 때 진상조사 책임자였다. 박 장군은 육군군사연구소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심 소령의 공적은 허위임을 결론내리고 이를 김홍한 인사참모부장(소장)에게 보고한 후 태극무공훈장 삭탈을 건의했다”며 “그러나 전두환 정권 출범으로 어수선한 때였던 탓에 훈장삭탈 실행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한 달 반에 걸친 연구 끝에 이대용 전 주월공사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국방부에 보고했다. 육군군사연구소의 보고를 받은 국방부 정책실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육군군사연구소의 연구검토 결론이 상반돼 객관적이고 투명한 사료검증을 위해 좀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원회를 만들어 사실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정책실은 전쟁사 전문가에 의한 객관적이고 투명한 사료 검증을 위해 중립적인 ‘고 심일 소령 공적확인위원회’ 구성을 장관에게 건의했고, 장관의 승인에 따라 지난해 9월부터 공적확인위원회가 가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 정책실은 객관적 검증을 위해 육군군사연구소 추천 전쟁사 전문가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추천 전문가 각 3인, 한민구 장관 추천 위원 1인 등 총 7명으로 ‘고 심일 소령 공적확인위원회’를 구성했다. 육군군사연구소 측 전문가는 이현수 전 육사 교수부장, 노영구 국방대 교수, 최홍석 청주대 교수 등이고 군사편찬연구소 측 전문가는 온창일 육사 명예교수(위원장), 김광수 육사 명예교수, 나종남 육사 교수이며, 한민구 장관이 추천한 위원은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였다.
미 은성무공훈장 추천자료 발굴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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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6사단 고문관 맥페일 중령이 작성한 심일 중위 미 은성무공훈장 추천 기록. ‘7연대 심익 중위’로 기록한 것은 심일 중위의 한자 일(鎰)을 ‘익’으로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맥페일 중령은 추천서에 백철원 대위 등 현장 목격자 3인의 이름도 함께 기록했다. 자료=군사편찬위원회 |
이를 위해 공적확인위원회가 발굴한 미 은성무공훈장 추천서, 태극무공훈장 공적서, 북한군 262부대 훈장(훈패) 상신서, 미 제1해병사단 사진자료 등은 쟁점사안을 파악하는 핵심 자료였다.
김광수 교수는 1980년대부터 공개를 시작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미 포로신문 보고서와 심일 소령의 미 은성무공훈장을 상신하는 공적조서를 발굴할 수 있었다. 당시 공적조서를 작성한 이는 전투 현장에 있었던 6사단 고문단장 토머스 맥페일(Thomas McPhail) 중령이었다.
김광수 교수는 “미국 정부가 심일 소령에게 은성무공훈장(실버스타)을 수여한 사실은 알았지만 자료는 이번에 처음으로 발굴했다”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대용 장군은 심일 소령이 실버스타를 수훈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공적확인위원회의 나종남 교수는 국가기록원에서 심일 소령 관련 6·25전쟁 개전 3일 상황에 관한 결정적 자료들을 확보했다. 심일 소령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기록들을 몽땅 찾아냈다. 김광수 교수는 국립도서관에서 6·25전쟁 당시 평양에서 노획한 북측 자료도 확보했다.
허남성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문서를 노획한 경험이 있었던 미군은 6·25전쟁 당시 평양 입성 때 ‘인디언헤드’라는 태스크포스 부대를 조직해 평양의 북한군 사령부의 문서 수천 박스를 트럭으로 진남포를 거쳐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가져갔다”며 “심일 소령에 관한 한국군과 북한군의 기록, 미국 측 자료들을 대조해 보면 당시 전투상황에 관한 퍼즐을 완성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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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춘 국가보훈처장(왼쪽 다섯 번째) 등 참석자들이 2015년 6월 1일 서울 송파구 송전초등학교에서 열린 호국영웅 우표 발행식에서 우표 제막을 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6·25 전쟁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 중에서 국가보훈처가 추천한 심일 소령 등 10인의 모습을 담은 호국영웅 우표를 발행했다. 사진=조선일보 |
해당 칼럼은 육군군사연구소가 면담한 13명의 생존자는 모두 심일의 공적을 부인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허남성 교수는 “역사학에서 하드소스(경성자료) 문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소프트소스(연성자료)인 오럴히스토리와 구술은 신빙도를 16~17%로 본다”고 했다. 허 교수는 “《육사30년사》를 집필하며 창군인사 200여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구술자료의 신뢰도는 10% 미만이었다”며 “이마저도 외국 참전 용사의 2분의 1의 신뢰도를 보였다”고 했다. 이대용 장군도 심일 소령의 옥산포 전투 시기, 적 자주포 파괴주체와 파괴대수 등의 증언을 할 때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해당 칼럼은 또 ‘은성무공훈장 추천서에 기록된 날짜와 장소에서 전투는 없었다’며 은성무공훈장 추천서를 문제 삼았다. 허남성 교수는 “육군군사연구소는 추천한 고문관이 직접 전투를 목격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미국의 훈장 수여 시스템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며 “맥페일 중령은 자신이 분명하게 목격하지는 않았으나 전투에 참여한 장교들을 철저하게 조사해 확인을 했다는 의미로, 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반드시 적는다”고 했다.
“도망가는 줄 알고 욕까지 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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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 소령 공적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대용 장군. 사진=조선일보. |
그러자 뒤따라오던 적 자주포 8대는 더 이상 남진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북쪽을 달아났다. 이를 지켜보던 7연대의 보병진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연대지휘소가 있던 우두산에서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에게 “심 중위가 육박(肉薄) 공격으로 전차(당시 자주포를 전차로 오인)를 파괴한 사실은 6·25가 난 지 몇 시간이 안 되지만 이것이 처음일 것”이라며 “우리 장병들은 그때부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뒷날에도 많은 전차를 고철로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7연대 3대대 인사장교 겸 12중대장 송인규 중위는 1980년 12월 증언에서 “심 중위가 지휘하는 57mm 대전차포가 명중했는데도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고 계속 전진해 오자 심 중위는 대전차포를 철수하기 시작했다”며 “나는 그들이 도망가는 줄 알고 욕까지 했는데 조금 있으니 길 옆 풀밭으로 기어 나와 해치를 연 전차에 모조리 수류탄을 던져 파괴시켰다”고 했다.
이대용 장군(7연대 1대대 1중대장)은 전쟁 당일 심일 소령(7연대 직할 대전차포 중대장)과 같은 부대도 아니었고 이대용 장군은 적의 조공방향, 심일 소령은 주공방향 5번 국도상에서 전투를 치렀다.
춘천 출신의 허남성 교수는 “당일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비가 쏟아졌고 게다가 쌍안경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렇게 옆에서 본 것처럼 말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다”며 “상식적으로 자기 부하들이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한가하게 2km 떨어진 인접 중대 전투상황을 관람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6월 26일 김일성은 춘천 점령 실패의 책임을 물어 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으로 교체했다. 북한군은 독이 올라 새벽 5시40분부터 맹렬한 포격에 나섰다. 6시간의 교전 끝에 소양교를 방어하던 심일 중위는 오전 10시경 춘천시내로 들어온 적 자주포 3대를 단독으로 파괴했다. 춘천 전투는 수원 이남으로 진출해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해 섬멸하려는 북한의 남침공격 계획을 좌절시켰다.
심일 중위는 6월 26일의 ‘소양교 전투’로 미 은성무공훈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한다. 1950년 9월 1일 미국 정부가 결정한 은성훈장 추천서는 ‘국군 제7연대 소속 심일 중위가 1950년 6월 26일 10시경 춘천 전투에서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는 적 전차 3대를 파괴할 때까지 진지에 남아 포격전을 전개한 영웅적 행위를 기려 훈장을 추천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극무공훈장은 읍소한다고 연대장 수준에서 줄 수 있는 훈장인가? 태극무공훈장은 1950년 12월 23일 순직한 미 8군사령관이나 흥남철수작전 시 피란민 10만명을 구한 미 10군단장 앨먼드 장군도 못 받은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이다.
당시의 서훈과정을 살펴보자. 정부는 1951년에 들어서 6·25 전공자들에 대한 무공훈장 심의 및 포상에 들어갔다. 심일 소령도 춘천 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아 1950년 11월 태극무공훈장 공적서가 올라갔으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국무회의에 계류돼 있다가 1951년 7월 26일에야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심일 대위는 이미 전사한 뒤였기 때문에 훈장은 부친 심기연이 부산 임시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심기연은 훈장을 받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1951년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할 때 장교와 사병이 찾아왔기에 따라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됐는데 그때 비로소 자식이 적 전차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술회했다.
정부에서는 심일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후인 1951년 11월 11일 소령으로 추서했다.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은 그 심사도 엄격했다. 그런 탓인지 1129일간의 6·25전쟁 중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군인 및 경찰은 191명에 불과하다.
191명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군이 73명, 경찰관이 1명, 그리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117명이다. 100만명이 넘는 참전자 중에서 불과 73명만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곧 그 훈장이 얼마나 받기 어려운 훈장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대한민국 제1호 태극무공훈장은 맥아더 원수를 필두로, 제1호부터 제8호까지 대부분이 장군급 지휘관이고, 제9호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는 유일하게 위관급 장교였던 심일 소령이었다.
허남성 교수는 “당시 국무회의장에서 태극무공훈장 17명에다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포함시켜 18명을 심사했다”며 “그중 절반이 탈락하고 심일 소령을 포함해 9명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태극무공훈장 서훈의 엄격함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허 교수에 따르면, 18명 가운데 6사단장 김종오 장군, 연대장 임부택 중령, 2연대장 함병선 중령, 심일 소령 등 4명이 올라갔으나, 사단장과 2명의 연대장은 탈락하고 심일 소령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던 것이다.
허남성 국방대 명예교수는 “심일 소령은 1950년 10월 말 심 소령이 생존해 있을 때 사단에서 공적서가 군단을 거쳐 육본과 국방부로 올라가 최종적으로 국무회의로 올라갔다”면서 “8개월간 심의기간을 거쳐 1951년 10월 15일 심일 소령이 전사한 후 훈장이 수여됐다”고 했다.
미국 정부도 심일 소령의 전공을 인정하여 북한군 8월 공세를 저지하고 한숨을 돌린 1950년 9월 은성무공훈장을 상신했고 심일 소령은 1954년 6월 12일 은성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은성무공훈장은 의회명예훈장, 십자훈장에 이어 외국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등급의 훈장이다. 심일 소령의 전공은 국방부의 전사에 기록됐다.
문제제기 했던 육군본부, “증명된 것으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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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대전차 화기에 맞아 화염에 휩싸인 북한군 76mm자주포. 사진은 1951년 4월 미 제1해병사단이 촬영한 것으로, 춘천 북방에 파괴된 채 버려진 SU-76 자주포. 심일 소령이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조선일보, 군사편찬위원회 |
사회를 본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는 토의를 진행하며 “전술적으로 후퇴한 전우에게 ‘도망했다’는 표현을 어떻게 쓸 수 있나”라고 개탄했다. 허남성 교수는 “심일 소대장은 당시 적진 가까이 가서 2대를 파괴하고는 신속히 후퇴했는데 이것은 57mm 대전차포를 쏘고 나면 후폭풍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니까 진지를 변환하는 전술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당시 임부택 연대장은 “심일 중위가 끌고 갔던 대전차포 1문이 진흙 속에 빠져 포기하고 그대로 철수했다”고 증언한 데 반해 이대용 장군은 포 1문을 유기한 채 도망갔다“고 전언하고 있다.
공적확인위원회는 육군군사연구소와 이대용 장군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위원회는 공청회 자료집을 토대로 최종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이다.
이대용 장군이 심일 소령의 태극무공훈장 수훈을 중점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에 대해 김광수 교수는 “이대용 장군은 심일이 사망한 후에 그의 어머니(조보배 여사)가 7연대장(양중호 대령)을 찾아와 한탄하자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전공을 조작해 훈장을 상신하기로 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에 맞지 않다”며 “1·4후퇴 이후 38도선상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1951년 1월과 5월 민간인 어머니가 전선을 방문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게다가 이미 1950년 11월 태극무공훈장이 상신된 아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을 달라고 한다는 게 이치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역사에 ‘불편한 진실’은 없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입장이 담긴 6·25전쟁 공간사(公刊史)를 쓰기 위해 1964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해 이에 대한 연구 및 편찬 작업에 들어가도록 했다. 전사편찬위원회는 6·25전쟁사 작성에 앞서 자료수집과 함께 당시 생존해 있던 참전자들에 대한 증언을 청취해 이들 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사》(총11권)를 편찬했다. 이로써 6·25전쟁에 대한민국 정부의 공간사가 탄생했다. 심일 소령에 대한 전공도 이 공간사에 수록됐음은 물론이다.
남정옥 박사는 “육군군사연구소가 1970년대 중반에 심일 전공을 나타내는 자료가 없다고 하는데 1951년에 작성된 1차 사료인 국가기록원의 《태극무공훈장부》(심일 편)는 왜 보지 않고, 언급하지도 않은 북한자료까지 봤다고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이대용 장군의 말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문서인 《태극무공훈장부》나 국방부의 공간사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지, 그런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면서 “공청회 현장에서 이대용 장군이 ‘역사적 공문서들은 조작된 것’이라고 소리를 칠 때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심일 소령에 관한 국방부의 6·25전쟁 기록은 최초 연구 편찬단계에서 이대용 장군이 제기했던 그런 문제점을 검토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대용 장군이 일간지 기자에게 제보한 ‘증언’ 내용은 과거의 내용을 전면 부정한다는 점에서 쇼킹한 내용일는지는 모르나 혼자만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역사자료로 채택하기에는 처음부터 객관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남정옥 박사는 “역사에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은 없다”면서 “‘사실(fact)’과 ‘사실 아닌 것(false)’만 존재할 뿐”이라며 “더 이상 검증되지 않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심일 소령의 전공을 폄하하거나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육사(陸士), 올해 졸업식에서 심일상 수여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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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2015년도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조보배(심일 소령, 심민 경찰관, 심익 학도병 3형제의 모) 여사를 선정했다. 조 여사는 세 아들을 모두 나라에 바친 이후에도 평생을 봉사와 사회활동에 헌신했다. 강원도 일대 수만 평의 임야를 개간해 이를 무의무탁 제대군인들에게 삶의 터전으로 제공했으며, 개인의 땅을 현충탑 부지로 기증하기도 했다. 사진=조선일보 |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2003년도부터 뒤늦게 ‘심일상’을 제정해 매년 우수중대장 14명에게 심일상을 수여하게 됐다. 이는 베트남전쟁에 강재구상을 제정해 수여한 것처럼, 6·25전쟁에 심일상을 제정해 육사정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뜻깊은 사업이었다.
임업으로 큰돈을 번 심일 소령의 부친 심기연 선생은 월남해 아들 넷을 두었고 이 중 셋을 조국에 바쳤다. 큰아들 심일 소령에 이어 둘째인 심민은 경찰로 근무했고, 32세이던 1960년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근무 중 업무 과로에 따른 심장마비로 순직했다. 셋째인 심익은 서울고 재학 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만 17세의 나이에 학도병에 자원해 낙동강 방어전투에 참전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심일 소령의 막내동생인 심승택(63·공무원)씨는 “육군은 지난해 연말 육사출신 우수 중대장에게 시상하던 전투중대장상을 취소한 데 이어, 올해 졸업하는 육사생도에게도 ‘심일상’을 주지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지금껏 심일상을 받은 군인들의 명예는 뭐가 되냐”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호국영령 하나 지켜 주지 못하고 흠집이나 내려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잃는다”고 했다.
국방부 공적확인위원회는 이대용 장군과 육군군사연구소가 제기한 주장이 ‘사실무근’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냈지만, 최종보고서 채택이 늦어지면서 육군군사연구소도 “정확하게 검증하지 않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남정옥 박사는 “국방부는 역사적 사실의 진위(眞僞)를 공청회를 통해 안이하게 해결하려다 불필요한 논란만 키운 셈이 됐다”며 “지금이라도 공적확인위원회가 조사한 내용을 확정해 호국영웅의 명예를 되찾아드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