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列傳] <정도전>에서 이인임 역으로 주목받는 박영규 : 월간조선

정도전(鄭道傳)이 역사 밖으로 걸어 나왔다. 청년부터 노년층을 가리지 않고, 거의 전 세대의 남성들이 열광한다. 시청률 고공행진 중인 KBS 대하사극 <정도전> 이야기다.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열어가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극적이어서 영화와 드라마로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이번엔 다르다. 단 한 번도 부각되지 않았던 인물이 시청자의 눈길을 잡아끈다. ‘고뇌하는, 그러나 냉혹한 현실주의자’ 이인임(李仁任)이다. 이른바 ‘이인임의 명대사’가 SNS망을 통해 널리 퍼지고 있다. 소문보다 빠른 속도다. 대표적인 대사 몇 대목만 인용해 보기로 하자.

“정치하는 자에겐 오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네. 하나는 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구.”

“내가 상대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날 찾게 만들어야 하네. 그게 정치일세.”

“정치에 선물이란 없네.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주는 뇌물이 있을 뿐.”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허망한 것도 없지요.”

“전장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 하지만 정치판에서 적을 만날 땐 웃으세요. 정치인의 칼은 칼집이 아니라 웃음 속에 숨기는 겁니다.”

이인임의 대사는 어쩌면 고려(高麗)가 아니라 현대 대한민국에 더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까. 사람들은 이인임의 캐릭터에서 ‘악당(惡黨)’이나 ‘권신(權臣)’이 아니라, ‘경세가(經世家)’ 혹은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정도전이 아니라, 이인임이 주인공 같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왔다. 이 화제의 중심에 배우 박영규(朴榮奎)가 있다. 이인임 역을 맡은 그가 아니었다면, 이인임이 이렇듯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역사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을까?

“처음엔 이인임이 누군지도 몰랐다”

박영규는 KBS 사극 <정도전>에서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이인임 역을 맡아달라며 대본이 왔는데, 처음엔 이인임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여말선초(麗末鮮初) 때의 인물이라야 이성계, 최영, 정도전, 역사적 사건으로는 위화도 회군, 이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였죠. 3회차까지 대본이 나온 상태였는데, 읽어볼수록 감이 오더라고. 이거다. 이 나라에서 어떤 연기자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제 고민, 좀 거창하게 말하면 제 삶의 철학을 구현한 듯한 대사가 곳곳에 박혀 있는데…. 물어보니 작가가 국회의원 보좌관을 10년 정도 한 분이더군요. ‘공짜도 반복되면 권리가 됩니다. 처음엔 고마워하다가 두 번째부턴 당연하게 여기고 세 번째에 이르면 불만을 터뜨리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고려는 망합니다’ 같은 대사는 작가 자신의 정치철학이 빙의(憑依)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배역은 현대와 역사를 넘나드는 역할이다. 내 평생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렸죠. 바로 연락했습니다. ‘하겠다’고.”

―어떤 연기자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운명처럼 이 작품과 만났다? 고민이라면 어떤 것이었는지요?

“제가 막 예순을 지났잖아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깊이랄까, 흔적이랄까, 그 시대를 살고 견뎌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싸구려로 가기는 좀 뭐하고…. 싸구려로 보이는 건 싸구려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인데, 저희 세대를 그런 식으로 그릴 수는 없잖아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사극(史劇)에 등장하는 거물급 정치인… 그렇다면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이 캐릭터에 실어서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생각한 겁니다.”

박영규가 그리는 이인임은 어떤 경우든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다. 항상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그 나지막함이 오히려 커다란 울림을 만든다.

“대본을 읽으면서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작가의 의도에 덧붙여서, ‘내가 만약 그 시대,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문제를 풀어갔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이성계가 정도전이 아니라 이인임과 손잡고 개국(開國)을 했더라면 나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는 인물입니다.”

“<정도전> 속 이인임은 균형 잡힌 인간”

―직접 연기해 보니 이인임은 어떤 인물이던가요?

“균형 잡힌 인간이죠. 고뇌하는 인물이고. 정치나 사업이나, 항상 이상적(理想的)으로만 풀리는 경우는 거의 없잖습니까? 원(元)나라가 망하고 명(明)나라가 흥하고, 이건 나중에 결과를 알고 보니까 확실한 거지, 당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불명확하고 절실한 문제였겠습니까.

‘당신, 원나라 편이요, 명나라 편이요?’라는 질문에 이인임이 ‘중국이 영원히 원나라와 명나라로 갈라져서 싸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려의 국익(國益)을 극대화하는 길이 그 길이라는 거죠. 국익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 아닙니까? 국제정세와 국력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교하게 대응해야지 그러지 않았다간 명분론에 휩쓸려 나라가 아예 망할 수도 있다고 본 겁니다. 주어진 여건 아래에서 최선책을 찾아가는, 그러나 이상주의자들한테는 ‘비겁하다’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그래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자기 소신을 관철해 가는 인물이 바로 이인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영규는 “정현민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대한민국 현실정치에 훈수를 둔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고 했다. ‘정치를 오래 하려면 잘 들으시오. 세상은 한번에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오’ ‘권좌를 갖기 위해서는 딱 한 사람을 다스리면 됩니다. 자기 자신이오’ 같은 대사는 박영규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단다. ‘힘이 없는 이상(理想)은 허망하며, 힘이 없으면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는 말도 가슴에 새겨두었다. 드라마 초기, 이인임의 후손들로부터 걸려오던 항의전화는 요즈음 ‘격려와 성원’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정 작가가 박영규의 이인임을 위해 써주는 듯한 대사도 부쩍 늘었다.

“단칼에 善惡을 나눌 수 있나?”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진보’가 하는 이야기는 무리수인 경우가 많죠.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은, 그래서 정리와 숙성이 필요한…. 그렇다고 진보의 아이디어를 무시하면 곤란하죠. 보수가 진보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여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 없이 발전하는 사회가 바로 성숙한 사회 아니겠습니까.

좌파 성향의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절대선(絶對善)’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아니 단칼에 선악(善惡)을 명쾌하게 나눌 수 있는 경우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선한 가운데 악이 있고 또 악한 가운데 선이 존재하는 것이 세상 이치라고 봅니다.

정주영(鄭周永) 회장님이 돌아가실 때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던데, 물론 정 회장님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을 겪은 분들에게는 그분이 악(惡)이겠지만, 국가적으로는, 나아가 세계 시민한테는 그분과 현대그룹의 기여가 지대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석기(李石基)의 삶도 역설적(逆說的)으로는 역사에 공헌한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국민들이 다 같이 공분했으니까요.”

―현실정치도 관심 깊게 보고 계시군요. 이인임의 눈으로 보기에 이석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영웅심리로 움직이는 사람? 사회생활을 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가치를 좀 높게 부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과격하고 위험한 이야기를 나눈 것 아닙니까? 그것도 나름 상당히 진지하게. 제가 보기에는 비슷한 분들이 모여서 미망(迷妄)에 빠진 겁니다. RO 모임에서 했다는 이야기도 국민 평균 수준보다 좀 못한 것 같고….”

―그래도 어떤 분들은 이인임을 기득권(旣得權)을 지키려 했던 권력의 화신(化身)으로 봅니다.

“기득권이라는 게 무서운 겁니다. 노조(勞組)만 해도 기득권 지키려고 저렇게 난리를 치는데, 더구나 한 나라의 기득권을 가진 정치가보고 당장 나가라고 하면 그게 바로 죽으라는 얘기죠. 프랑스에서도 부자들 세금 확 올리니까 다들 거주지 외국으로 옮기고, 결국 정부가 손들었잖습니까. 그렇다면 그 현실적 힘을 공동체를 위해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지, 단칼에 환부(患部)를 다 도려내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인임 대사 중에도 나옵니다. ‘한순간에 세상을 뒤집으려고 하지 마시오. 세상은 한번에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오’라고.”

이인임은, 박영규는, 정현민 작가는 ‘과격한 해결책은 심정적으로 통쾌하지만, 예기치 못한 2차, 3차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 대하사극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현상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

박영규는 1953년 부친 박순용(朴順用)과 모친 연봉례(延鳳禮)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청남도 대덕군 구증면 전민리가 그의 고향이다. 밑으로 여동생이 있는, 3남 1녀 중 3남. 1911년생인 부친과 1917년생인 모친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어떤 인터뷰를 보면 고향이 대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아기 때 부모님이 대전으로 이사하셨어요. 두 분 다 못 배우고 학력도 변변찮았거든요. 자식들 글이라도 남들 반만이나마 가르치시겠다고 결단을 내리신 거죠. 제가 살던 집은 ‘판잣집’이었는데, 철로변이어서 기차 지나가는 게 다 보이고, 비가 오면 잠자다 말고 일어나 빗물 받고 그랬죠. 두 분 다 일용직(日傭職) 종사자였습니다. 날품도 팔고, 포장마차도 하고 여름엔 냉차 장사, 참외 장사, 수박 장사, 참 다양했습니다. 저도 수박·참외 리어카 한참 밀고 다녔죠. 대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박영규도 일찍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하며 가계(家計)를 도왔다.

“제가 조간(朝刊), 석간(夕刊)을 다 뛰었다니까요. 조간은 《조선일보》, 석간은 《경향신문》. 당시 제가 받은 급여는 조선 500원, 경향 400원이었습니다. 《경향》이 짰던 것이 아니고 조간은 새벽에 일찍 나와야 하니 급여가 좋았던 겁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신문 돌리다 셰퍼드에게 엉덩이를 물려서 기절한 적도 있습니다. 충남도청 관사 근처에서. 그 개가 저를 도둑인 줄 알았나 봐요. 신문은 길바닥에 다 흩어지고, 병원으로 놀라서 뛰어온 어머니한테 ‘신문 마저 다 돌려야 되는데…’라고 말해 하염없이 울게 만들고…. 중앙일보사(社) 앞에 신문 배달 소년 동상을 조그맣게 만들어 놓았잖아요? 그 동상 볼 때마다 옛날 생각 많이 합니다. 하루에 연탄 두 장 살 수 있는 날은 행복한 날이었어요.”

대전 신흥초등학교, 중앙중학교, 대전공고 전기과, 서울예대가 그의 학력이다. 공고 전기과에서 예대로 진학?

―배우가 되려고 결심한 동기나 계기가 있습니까? 어려서부터 ‘끼’가 있었나요?

“어려서부터 명절노래자랑 나가서 1등 하고 양은냄비를 상(賞)으로 받아오고 그랬지요. 동네 약장사가 들어오면 천변(川邊)에다 포장 치고 창극(唱劇)을 하는데, 클라이맥스에서 딱 공연 끊고 약을 파는 거라. 저한텐 약 파는 시간이 너무 긴 겁니다. 빨리 나머지 이야기 계속 봤으면 좋겠는데. 남들보다 훨씬 더 예민했던 거죠. 나훈아·남진 리사이틀 하면 다 가서 보고, <엘비스 온 스테이지(Elvis on Stage)>라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실황을 담은 1970년판 영화가 있었는데 열 번 이상 봤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살짝 건달 비슷하게 지내기도 하고, 응원단장도 했습니다. 학교에 배구부가 있어서…. 지금도 만나는 기둥회라는 고교동창 모임이 있는데, 그때 친구들이 하나같이 저보고 배우를 하라고 그랬어요. 딱 그 길이라고. 배우나 가수가 네 천직이라고. 그 말이 그냥 하는 소리로 안 들리는 겁니다. 그 작은 모임을 할 때도 남들 앞에서 사회 보고 ‘숟가락마이크’ 잡고 노래하고, 저 자신을 드러내는 게 너무 좋은 겁니다. 친구들은 환호하고 연방 앙코르 요청하고.”

결단의 시간(?)은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찾아왔다. ‘내 갈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국가공인 면허시험을 치지 않았다. 학교와 집 양쪽에서 다 난리가 났다.

“전기과 3급면허 시험이었죠. 양원식이라는 제 친구하고 둘이서만 시험을 안 봤어요. 결과는 우리 반 57명 중 55명 합격.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인데, 어머니께서 포장마차 리어카 끌고 오다 그릇들을 길바닥에 팽개치면서 통곡을 하시고, 아버지는 ‘그래도 어디 가서 밥벌이 못 하겠냐. 걱정 마라’고 위로하시고…. 큰 형님은 대전공고 나와서 엔지니어 하고 작은 형은 대전상고 졸업하고 서울은행에 취직했거든요. 다들 자기 밥벌이는 하면서 살게 된 거죠. 그런데 막내아들이 엇나간 거잖아요.

나중에 제가 유명해지고 나서 ‘그때 시험 안 보길 잘했죠?’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그때 합격했으믄 몸이 날랬으니께 지금두 워디 돌아댕기메 전봇대 오르락내리락 하구 살았겄지 뭐’ 하며 웃으시더군요.”

삯곡꾼 노릇했던 어머니

―어머니께서 유머가 많은 분이었습니까? 말씀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배우 박영규’를 기른 자양분 가운데 하나가 어머니의 유머감각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에둘러서 뜻을 전하는, 전형적인 충청도식 화법(話法)이죠. 어머니께서 하시던 아르바이트 중에 삯곡꾼이 있었습니다. 왜, 남의 장례식 가서 돈 받고 대신 울면서 분위기 슬프게 잡아주는 사람 있잖아요. 문상객들 대접한다고, 빈소(殯所)에는 음식이 많으니 저를 꼭 아르바이트(?) 장소로 부르시는 겁니다. 막 우시다가 저를 보시면 ‘왔냐. 어여 밥 먹고, 머리 고기 눌러 논 것도 한 접시 먹고, 일루다 한 상 좀 차려줘유’ 그러시고 또 얼른 가서 서럽게 우시고. 당신 설움도 섞어서 손짓, 발짓, 몸짓 다 하시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고…. 어머니의 이 모습이 제게는 보고 들은 것 중 ‘최고의 연기(演技)’입니다. 슬픔과 반가움, 생사(生死)를 수시로 자유롭게 넘어선다는 면에서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을 했다. 유성온천 만년장호텔(현 리베라호텔) 웨이터였다. 다들 먹고살기가 바빴던 탓에 식구들은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무대의 꿈’을 버릴 수 없어 혼자 연습하고 참가한 1973년 연말 대전 KBS 노래콩쿠르. 조영남의 ‘떠나는 마음’이란 노래로 덜컥 1등을 했다. 이 계통의 일을 직업으로 삼으라는 계시라고 생각했다. 기왕 하려면 좀 더 본격적으로 배우고 제대로 해보자 싶어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예비고사에서 떨어지고, 신문광고를 보고 응시한 끝에 합격한 곳이 서울예전 영화과다.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로 무대에 서

코미디언 故이주일. 박영규가 지방무대를 돌던 시절 사회를 봤다.

“말하자면 재수를 한 거죠. 서울예전 74학번입니다. 동기생으로는 선동혁, 양희경, 이도경 등이 기억납니다. 전 나중에 연극과로 옮겼는데, 그땐 학과도 영화과, 연극과, RT(라디오/TV)과 딱 세 개였고, 학생 전체가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어요.”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1학년 봄 소풍 장기자랑 시간에 부른 엘비스 프레슬리의 ‘스위트 캐롤라인’. 얼마 후 누군가 그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탄광에 갇혔다 16일 만에 생환한 양창선 사건을 극작가 윤대성(尹大星) 선생이 극화한 <출세기(出世記)> 캐스팅. 작품 중간에 광부 양창선이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한 장면이 있고, 엘비 김이라는 가수가 나온다. 윤대성의 원고엔 ‘엘비 김-서울예대 학생 중에 있음. 봄 소풍 때 노래 부른 친구’라고 적혀 있었다.

―공연 당시 이 장면이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고 들었습니다.

“‘저 배우 한국 사람 맞냐, 어디서 데려왔냐’ 난리가 났죠. KBS에서 제가 출연한 대목만 녹화해서 방송하기도 했으니까요. 이 일이 계기가 돼서, 이창성이라고, 뉴코리아쇼 단장을 하던 분 권유로 방학 때 용돈 정도의 개런티를 받고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영등포, 미아리, 대구, 부산, 광주, 제주도까지, 전국 곳곳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엘비~~킴!’이라고 소개하면 엘비스 옷 입고 구레나룻 붙이고 나가서 노래하는 거죠.”

당시 사회자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주일 선생이다. 백설희, 박노식, 최무룡 같은 스타들이 출연하기 전에 무대 안팎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인생을 늘 정식으로만 사는 것도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땐 객석 한가운데 연탄난로 피워놓고 난방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겪은 서민 관객들의 리액션이 저한테는 나중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무대를 알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출세기>가 한번 쉬어가는 계기를 만들어 준 측면도 있습니다. 당시에 학생이 기성(旣成)무대에 선다는 건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었거든요. 갑자기 주목을 받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살짝 건방져지기도 했고,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극작가 오태석과의 인연

박영규에게 평생의 멘토인 극작가 오태석.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박영규는 1976년 3월 23일 육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강원도 인제군 포병 333관측대에서 작전병으로 3년을 보낸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연극, 영화, 문화 기사를 빠짐없이 스크랩해서 ‘달달 외우며’ 치열하게 공부했다. 1978년 말에 제대를 하고, 1980년 공간 사랑에서 <1980년 5월>이라는 공연을 연출하던 오태석(吳泰錫)과 재회했다. ‘저분에게는 뭔가 배울 것이 확실히 있다’는 평소의 느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사실은 제 입학시험 때 면접관이 오태석 선생이셨어요. 오 선생님은 제 은인이죠. 단언컨대, 오태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박영규는 없는 겁니다. 그 작품에서 소품 담당 심부름을 하고, 6월에 드라마센터에서 <태(胎)>를 공연할 때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출연했습니다.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 거지요.”

연극학계에는, 극작가와 연출가를 겸하며 자기만의 문법(文法)을 창조한 연극인들을 지칭하는 영예로운 표현이 있다. 프랙티셔너(practitioner)다. 전 세계의 연극학자들은, 오태석(1940~)을 이러한 칭호를 받을 만한 예술가라고 기꺼이 인정한다. 유럽의 문화유산과 한국적 전통을 버무려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인과 즉각적인 공감대(共感帶)를 형성할 수 있는 연극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오태석 선생은 어떤 분입니까? 특히 젊었을 때의 모습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배우들을 매료시키는 마력(魔力)이 있는 분이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한계, 그것을 뛰어넘는 예술가입니다. 오태석 선생이 주재하는 극단 목화의 배우들이 강한 이유가 뭘까요? 오 선생이 만드는 ‘생략과 비약’을 배우가 상상력으로 메우는 훈련을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오 선생은, 작가가 그리는 세계를 빨리 자기화(自己化)할 수 있도록 배우들을 도와주는 명인(名人)이죠.

예컨대 셰익스피어를 한다, 그러면 여기에 오태석의 재(再)해석이 들어갑니다. 훈련할 때 배우들이 정말 힘들어요. 왜? 오 선생 마음속에 있는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려내야 하니까. 셰익스피어와 오태석을 모두 뛰어넘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면 연기가 몇 단계 발전합니다. 글자 그대로 확 늘어요. 자주 하시던, ‘꽃망울이 확 피어날 때 튀어 나가는 느낌으로 연극을 하라’는 말씀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폐결핵으로 배우 생활 잠시 중단

극단 목화는 배우들의 ‘연기 사관학교’로 불린다. 한명구, 정원중, 김학철, 손병호, 김병춘, 성지루, 박희순, 장영남, 황정민을 비롯, 수많은 배우가 목화를 거쳐 갔다. 박영규는 극단 목화의 창단멤버다.

“전 오 선생의 ‘가방모찌’였어요. 주석(酒席)이 파할 때까지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하나둘 가고 나면 새벽 다섯 시까지 오 선생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날 연습을 복기하고 궁금한 걸 여쭙고…. 그만한 공부가 없었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맞지 않는 말인데 구체적이고 분명한 논리적 근거가 확실하거든요. 그 틈을 메우려는 노력이 제 연기의 근본입니다. <태>를 연습할 때 오 선생이 ‘야, 다들 영규처럼 해 봐!’라고 말씀하시는데 온몸에 전율(戰慄)이 흘렀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전 오 선생님의 모든 말씀을 노트했습니다. 그걸 집에 와서 다시 반복해서 읽고, 궁금한 사항을 메모해서 다음날 여쭙고…. 배우로서의 DNA를 발견해 가던, 정말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박영규가 기거하던 곳은 이화여대 정문 철길 아래 창고였다. 극단 76을 이끌던 기주봉, 기국서 형제가 그의 룸메이트다. ‘라면 한 개 먹으면 잘 먹은 날’이던 시절이었다. 건강에 문제가 찾아왔다.

“1981년 9월에 <자(自)1122년>이라는 작품에서 묘청(妙淸) 역을 맡았는데, 몸무게가 42kg까지 내려갔어요. ‘서경(西京)에 천개(天開)하리라’라는 대사를 하는데 무대 위에 선 채로 10여 초간 기절하기도 했습니다. 제 몰골이 흉해서, 관객들이 눈을 가릴 정도였다니까요.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대전에서 올라오셔서 몇 년 만에 모자 상봉을 하고, 은평구 역촌동에 방 한 칸 얻어서 어머니랑 둘이 지내면서 투병생활을 했지요.”

그때 박영규가 생계유지를 위해 택했던 직업이 있다. 책 외판원이다.

책 외판원 하면서 투병

“지식산업사에서 간행한 책들을 팔았죠. 제가 외모와 목소리가 좀 되잖습니까. 설득력 있게 말할 줄도 알고. 하하. 톱 세일즈맨이었어요. 김경희 사장님이 사무실 열어주고 나중에는 세일즈맨 교육도 맡기고, 부장까지 승진했습니다.

은행 지점장 한 분이 계셨는데, 17~18회 방문하고도 실적이 없었거든요. 이거 못 팔면 일 접는다는 각오로 들이댔지요. 사무실에서 일단 만났는데, 30분이 지나도 안 돌아오는 겁니다. 화장실에 숨어계셨던 건데, 변기 위에서 계약서 쓰셨어요. 나중에 성공하고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조우(遭遇)했는데, ‘삶을 사랑하는 집중력’을 높이 사서 책을 사주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게 번 돈으로 투병하고, 보건소 가서 약 타다가 엉덩이 주사 직접 놓고, 어머니는 뱀, 개고기 섞어서 탕 끓여주시고. 회복하자마자 바로 오 선생께 달려갔지요. 1983년에 <한만선>이라는 작품으로 복귀했습니다.”

한만선(韓滿線)은 한반도에서 만주를 관통하는 가상의 철도 이름이다. 그는 1986년까지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자전거> <아프리카> <메밀꽃 필 무렵> <봄봄> 등의 연극을 오태석과 함께했다. 가히 연극에 ‘미쳐서’ 지낸 시절이다.

MBC <베스트셀러 극장>으로 TV 데뷔

MBC창사기념공연 <메밀꽃 필 무렵>에 박영규를 픽업한 표재순.

―TV랑은 어떻게 인연이 닿은 겁니까?

“1985년 4월에 문화방송 창사기념 공연으로 <메밀꽃 필 무렵>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제작비가 엄청났어요. 전 약장사 역으로 출연했는데, 제 아내 역이 윤복희씨였습니다. MBC가 녹화로 방송을 내보냈는데, 영상 연출 책임자였던 표재순(表在淳) 선생님이 저를 픽업했습니다. 그해 MBC <베스트셀러 극장 초록빛 모자>가 제 TV 데뷔작입니다. 시인의 러브스토리였는데 제 상대역이 서갑숙씨였죠. 신문에 ‘중량감 있는 주연급 배우가 나타났다’는 평이 실릴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이 작품 이후 방송국에서 계속 연락이 왔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에서는 이미숙의 상대역으로, <윤봉길>에선 윤봉길 역으로, 단막극 <바람>에선 원미경과 공연(共演)했다. 스타급으로 발돋움한 건 1988년 <내일 잊으리>에 출연한 이후다.

“방송에 나가고 나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사정이 확 풀렸습니다. <초록빛 모자>를 20일간 촬영했는데 당시 돈으로 40만원을 받았는데, 세상에 내가 이렇게 큰돈을 벌다니,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상의 안주머니 속으로 몰래 손 넣어서 세고 또 세 보고…. 보증금 100만원 세 살던 시절인데, 보증금 거의 절반을 3주 만에 번 거니까요.

사실은 밤무대도 다녔습니다. 노래 불렀죠. 1990년에는 ‘카멜레온’이라는 곡으로 음반도 내고. 밤무대는 대중적 인기를 파는 곳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분위기고 대학생 때 쇼단 따라다닌 경험도 있어서 낯설거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목돈을 쥘 수 있는 지름길이고 하루에 열두 군데 돌면서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하기는 했는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다지 바람직한 시간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 결혼

박영규가 1990년에 낸 음반.

1986년 4월 <봄봄>과 5월 <뺑덕어미 굿판>을 끝으로 박영규는 연극무대를 떠나 TV와 영화에 전념한다. <폭풍의 계절>에선 최진실의 상대역이었고, <국희> <주유소 습격사건> 등에선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연극무대로 복귀한 건 1994년 1월 오태석이 그를 위해 써준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1인극을 통해서다.

“오 선생님 숙원이 상설극장을 마련하는 거였는데 마침 대학로 흥사단 건물 지하에 자리가 났죠. 번 돈 다 투자해서 3년 계약하고 ‘충돌극장 2’라고 간판 걸고 개관(開館) 작품으로 공연했습니다. 권리금을 1억원이나 주고 들어갔는데. 나올 땐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지금도 ‘흥사단’이라면 느낌이 별로인 이유죠.”

연극의 내용은 박영규의 개인사(個人史)가 절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불효자의 회고담이 절반이다. 개막 첫날, 무대에 등장하던 박영규는 객석 맨 앞줄의 소년 관객과 눈이 마주치고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연 중간엔 ‘너, 지금 뭐 알고 웃는 거니?’라는 즉흥 대사를 던지기도 했다. 필자는 그때 그 소년 바로 뒷자리에서 이 연극을 관람했다. 소년의 이름은 박달(朴達·1983~2004). 지금은 고인이 된 박영규의 유일한 혈육.

―결혼을 여러 번 하셨네요?

“세 번 했죠. 첫 결혼은 폐결핵 앓을 때 간병해 주던 서울예대 5년 후배와 했습니다. <자1122년>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죠. 1983년에 결혼했는데, 처갓집 반대가 심했습니다. 장인 장모가 이북 분들이었고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제가 그 입장이라도 허락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양가에서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제 자취방에서 비닐옷장 놓고 신접살림을 시작했지요. 결혼 후 아이를 안고 갔는데도 인정을 안 해 주셔서,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따뜻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 배우의 숙명일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아이랑 아이 엄마가 조기유학을 갔으면 해서 둘 다 미국엘 보냈는데, 사실상 별거(別居)나 마찬가지였죠. 심정으로나 실제로나. 1990년대 중반에 이혼하고, 1997년 가을에 만난 패션디자이너와 재혼했지요. 이 사람과는 3년 살고 2001년에 헤어졌습니다. 암에 걸렸어요. ‘건강할 때도 아내 노릇 제대로 못 했는데 자신 없다. 마음 편하게 투병하련다. 당신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 고별사였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박영규는 드라마 <국희>에서 국희의 성장과정을 돌봐주는 역을 맡았다.

세 번의 결혼에서 그가 얻은 자녀는 박달 군 하나다. 2004년 3월 14일은 박영규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 사망. 미국 대륙횡단 여행을 떠났다가 당한 횡액(橫厄). 출발지는 샌프란시스코였고 사고지점은 메릴랜드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떤 일도 극복이 가능합니다. 딱 하나만 빼고. 자식을 먼저 보낸 고통이 어떤 거냐고요? 묵직한 슬픔의 덩어리가 늘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해도 없어지질 않아요. 그날 이후, 전 ‘감정의 세포’가 죽어버린 사람입니다. 어떤 행복한 일이 있어도 그 즐거움이 제 내면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뱃속엔 내장(內臟) 말고도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인데, 그 우주가 열리질 않는 겁니다. 기쁨으로 가는 회로와 통로가 다 막혀버린 겁니다.

얼마 전에 부산 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사고가 있었잖아요? 미친 듯이 울었습니다. 제 아이가 딱 그 나이 때 하늘로 간 거니까…. 전 종교가 없지만 하느님께 원망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했죠. ‘저를 세상에 내보낸 이유가 뭡니까? 이런 고통을 안 주면 안 됩니까?’ 응답이 없으시더라고요. ‘하느님, 당신은 저를 이해 못 하실 겁니다’라고 소리치고 또 막 흐느끼고…. 그러고 보니 제 아들이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연기 변신 거듭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로 박영규는 아직도 ‘미달이 아빠’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의 아내와는 ‘전화번호만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아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마침 근처에 거주하고 있었기로 염치불구하고 전화를 넣어 사고수습과 장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해 12월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재회했고, 딱 1년 후인 2004년 12월에 식을 올렸다. 이미 여러 매체에 보도된 대로, 박영규의 아내는 배우 이영애씨의 현(現) 남편의 전(前) 부인이다.

“처음엔 첫 남편이 누구였는지도 몰랐고 지금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 일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 삶이 중요하니까요. 그 사람의 삶도 내가 지켜줘야죠.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박영규의 인생에서 1998년 작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를 빼놓을 수 없다. 대중은 아직도 그를 ‘미달이 아빠’로 기억한다. 신문과 잡지로부터 ‘우리 문화의 충격. 진정한 코미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멜로드라마 배우’의 이미지가 이 작품으로 인해 ‘코미디 배우’로 변화했고, 코믹한 이미지는 <정도전>의 이인임 역으로 재차 변신에 성공 중이다.

박영규는 지금도 극단 목화의 공연장에 자주 간다. 오태석을 만나고, 후배 배우들을 다 모아서 고기를 사 먹인다. 그 자리에 늘 아내를 데려간다. 후배들과 끼니를 함께하면서 그는 언젠가는 무대 위로 돌아가야 한다는 다짐을 거듭한다.

아들 보내고 마음 추스르는 데 7년 걸려

아들을 잃은 후 7년 만의 TV복귀작 <보스를 지켜라>에서 박영규는 코믹한 재벌회장 역을 맡았다.

―아들 생각은 어떻게 정리했습니까?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고통을 주신 것도 ‘배우’로서의 그릇을 만들기 위한 시련이었다고 봅니다. 크기가 늘어난 거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견디는 겁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무너지니까….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7년 동안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2011년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가 제 연기 복귀작입니다. 마음 겨우 추스르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린 거지요.

비슷한 고통을 겪은 분들께, ‘저는 이렇게 극복하고 잘 지냅니다. 여러분도 저를 보면서 잘 견뎌주세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고요’라고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제 소명이 아닐까요. 최근엔 ‘아빠, 저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고통의 시간과 경험을 잘 삭여서 사람들에게 용기를 전해주세요’라는 아들의 마음을 느낍니다. 분명히요.

그래서 이인임 역이 제가 아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삶의 고통을 승화(昇華)해서 연기한다는 느낌이 들고, 또 그런 기분으로 연기하기에 딱 맞는 역할이니까. 하느님은 정답을 바로 알려주시는 분이 아니고, 스스로 그 길을 찾아가도록 하는 분이로구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천국에서, 아들과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꿈에, ‘나’를 태워서, 좀 더 나은 인간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배우가 될게 라고 말했더니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콜!’이라고.”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

“남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깊고 넓은 화두(話頭)를 던지는 사람, 다양한 삶의 공통분모를 끌어내는 사람이죠.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로 앵글(low angle)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존재. 어느 분야의 사람과도 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 그 경지까지 가려면 철학과 연륜을 길러야겠지요. 사관(史觀)도 바로 세우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도 하고, 정치가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정치가 못지않은 기여를 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배우니까요. 진정한 소통이란 내 생각과 상대방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토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배우는 그 토론이 열릴 수 있도록 정서적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다시 하고 싶어

―앞으로 꿈이 있다면?

“배우는 관객, 시청자와 만나는 마지막 예술가잖아요. 학창 시절부터의 제 꿈은 ‘그 배우의 인생이 국민과 함께 울고 웃었다’는 평을 받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비슷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불효자는 웁니다>를 꼭 한 번 다시 하고 싶습니다. 지금 희곡을 읽어보면 뭉클한 대목들이 많아요. 선배 한 분이 초연 때 ‘영규야, 너 딴 거 할 것 없다. 이 안에 무지개 다 들었다’고 말씀하신 선배가 계셨는데, 제가 놓친 부분이 허다한 거죠.

그때의 공연이 ‘쇼’였다면, 지금은 진정성 있게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관객과 인생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 선생님께 제 아들 이야기도 넣어서 각색해 달라고 부탁할 겁니다. 제가, 진짜 불효자니까 정말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도 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부자(父子) 사이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 영화 속에서 아들을 창조하는 것이 제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할 테니까요.

아, 그리고 언젠가는 연기를 가르치는 학교도 만들고 싶습니다. 학원이라도 좋고…. ‘기능’만 가르치고 끝나는 곳이 아니라, 전인교육(全人敎育)을 통해 바닥이 단단한 배우들을 길러내는….”

―영화 만들면 영화제에도 출품해야겠네요.

“만약 제가 국제영화제나 연극제에서 상을 받게 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이 60년 만에 위대한 나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준 토양이다. 이 상은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받는 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닮고 싶은 배우는 신구”

박영규가 닮고 싶은 배우로 꼽은 신구.

―박영규에게도 닮고 싶은 배우가 있습니까?

“물론이죠. 신구(申久) 선배님. 일관성을 놓치지 않는 배우죠. 제 대학 1학년 때, 오태석 연출로 〈LUV〉라는 작품에 출연하셨을 때부터 팬입니다. 인생사의 업다운(up and down)을 연기로 녹여내는 진정성을 배우고 싶습니다. 신 선배님이 힘을 쭉 빼고 연기하시잖아요? 관객들을 정말로 편하게 만들어주는 연기. 사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겁니다. 제가 요즘 이인임 대사를 힘 빼고 하잖아요. 사극에선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하더군요. 힘을 빼고도 잘 들리고 편안한 대사와 연기를 하는 배우. 신구 선배님을 능가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 제 평생의 목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박영규가 물었다. “대답 제대로 잘했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좋은 인터뷰는 배우가 아니라 독자들이 궁금해할 때 나오는 겁니다” 라고. 그의 눈자위가 살짝 젖어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얼른 악수를 하고 돌아서는 것이 예의인 듯싶어 나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