卜鉅一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소설 「보이지 않는 손」, 「목성잠언집」,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그라운드 제로」, 시집 「오장원의 가을」, 「나이 들어 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평론집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벗어남으로서의 과학」, 「이념의 힘」 등 펴냄.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소설 「보이지 않는 손」, 「목성잠언집」,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그라운드 제로」, 시집 「오장원의 가을」, 「나이 들어 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평론집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벗어남으로서의 과학」, 「이념의 힘」 등 펴냄.
제1부: 2008년 2월25일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는 숨을 깊이 쉬었다. 흥분의 물살이 아직 몸속을 거세게 흘러서, 잠이 쉬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벌써…」 0시17분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흘긋 쳐다보면서,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첫날은 무사히 지나간 것이었다.
안도감 아래로 아쉬움이 살며시 번지고 있었다. 권력을 쥔 기간이 하루만큼 짧아진 것이었다. 「레임덕」은 취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얘기가 문득 절실하게 다가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부여하는 엄청난 힘을 써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하루만큼 줄어든 것이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일을 추진해야지. 내가 국민들에게 한 약속들은 모두…」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빈말이 아니지. 국민들은 늘 현명하고 옳지. 국민들에게 한 약속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야지」
취임식 광경이 눈앞을 스쳤다. 몸속으로 흥분의 물살이 한층 거세게 흘렀다.
「취임식에서 대통령 선서를 해본 사람만이 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잘 가꾸어진 집무실 밖 뜰은 텅 비고 조용했다. 물론 텅 빈 것은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경호원들이 날카로운 눈길로 살피고 있을 터였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그는 나직이 뇌었다.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 제69조에 나온 이 구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상투적인 얘기로 들릴 터였다. 그러나 아까 손을 들고 선서할 때, 그는 그 메마른 구절에 담긴 뜻이 하도 절실하게 다가와서 목이 잠겼었다. 그 순간 그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헤쳐야 했던 온갖 어려움들이 다 겪을 만했다고 느꼈다. 그가 평생 품었던 꿈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선서에 담긴 얘기들을 진정으로 이해했고 그것들을 진정으로 믿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하고 충실히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대통령의 임무는 그렇게 단순했고 그렇게 중요했다.
선거 캠프를 차릴 때, 원로 헌법학자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캠프에 참여해 달라고 하자, 그 사람은 밖에서 돕겠다고 완곡히 사양했다.
그때 그 헌법학자가 말했었다.
『대통령은 헌법에 의해 마련된 기구입니다. 당연히, 대통령이 된 사람은 헌법을 존중해야 합니다. 헌법을 자신을 인도하는 최고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대통령이 헌법을 경멸하고 무시하면, 그는 자신의 판단을 인도할 최고의 지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사사로운 이해 관계가 그의 판단을 좌우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대통령에겐 가장 위험한 함정이라고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이래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그 함정에 빠졌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얘기를 진지하게 새겼다. 몰락한 대통령들의 행로를 살피면, 그들의 몰락은 으레 헌법을 업신여기는 데서 시작했음이 뚜렷해졌다. 헌법에 대한 경멸은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헌법의 제약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헌법에 무리하게 손을 대고 싶은 충동을 낳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몰락은 「발췌개헌」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몰락은 「유신헌법」에서 이미 마련되었다. 만일 그들이 헌법을 존중하고 헌법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들을 결정했다면, 물론 당장엔 괴로웠을 터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들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에 흠집이 덜 나고 삶이 비참하게 끝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지금은 저처럼 원론적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이제는 표를 모으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나설 때 아니겠습니까?』라는 말로 그의 거듭된 요청을 사양한 다음, 그 헌법학자는 덧붙였다.
『대통령이 원래 헌법이 마련한 기구이므로, 헌법의 권위가 낮아지면, 대통령의 권위도 당연히 낮아집니다. 「그 놈의 헌법」은 필연적으로 「그 놈의 대통령」을 낳습니다. 대통령이 되시면, 무엇보다도, 헌법을 존중하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그 놈의 헌법」이란 구절이 그의 전임자의 모습을 불러냈다.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의 전임자는 세간의 평가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 비록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지만, 능력도 있었고, 좀 천박한 면도 있었지만, 인품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좌파 이념에 얽매인 면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현실적인 정책을 폈다.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주한미군기지 이전 협상과 같은 아주 어려운 일들에서 그런 실용주의적 면모가 잘 드러났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전임자는 헌법을 너무 업신여겼다. 법률가가 그렇게 헌법을 경멸한 까닭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의 전임자는 헌법의 규정들이 아니라면 그 정신에 어긋나는 일들을 많이 했다. 그렇게 헌법을 무시한 행보들은 당장엔 편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통령의 권위를 근본적 수준에서 허물었고 실질적 업적조차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전임자는 결국 「약삭빠른 바보」가 되었다.
빈 뜰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클클 웃었다.
『전임자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업적에 대한 평가는 전임자와의 비교가 큰 몫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의 전임자가 워낙 나라 살림을 그르친 덕분에, 그로선 덕을 볼 터였다. 평균적 실적만 쌓더라도, 높은 평가를 받을 터였다.
「말수 좀 줄이고, 좀 점잖은 말씨를 골라 쓰고, 경제를 좀 되살리면…」
그는 입맛을 다셨다.
『각하?』
상념에서 깨어나, 그는 「부속실 차장」이란 직명을 얻은 집사를 돌아보았다.
『차 좀 올릴까요?』
『차? 좋지』
그는 잠시 생각했다.
『좀 달콤한 것이 먹고 싶은데. 으음, 대추차 있나?』
집사가 얼굴에 웃음을 올렸다.
『예, 각하』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그는 보고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국제적 경영 상담 회사의 한국 책임자가 만든 문서였는데, 신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관한 조언들이 들어 있었다. 지난번 선거의 핵심 쟁점이 「경제」였고 그도 경제를 되살리겠다고 약속했으므로, 그로선 무엇보다도 경제에 마음을 써야 했다.
『새 대통령이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대통령이 한국 경제의 움직임에 미칠 영향력은, 그의 큰 권력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제약되었다는 사실이다. 근년에 침체를 보인 한국 경제를 좀더 역동적으로 만들어서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에선 특히 그렇다. 이 점은 널리 인식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조건들이 그렇게 만든다.
반면에, 대통령은 자칫하면 한국 경제의 건강을 크게 해칠 수 있다.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제도적 자원들은 방대하므로, 잘못된 정책들은 한국 경제를 허약하게 만들고 성장을 낮출 수 있다. 이 점은 지난 10년 동안에 비극적으로 증명되었다』
고개를 갸웃하고서, 그는 입술을 빨았다. 의욕적으로 「경제 되살리기」에 나선 그로선 달갑지 않은 얘기였다. 그의 경제 참모들도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경제학 교수들과 전직 경제 관료들이 대부분인 그들은 그의 전임자가 그르친 것들만 바로잡아도 경제는 이내 원기를 찾으리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도 같았다. 자유무역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서 시장을 활짝 열고, 규제를 크게 줄이고, 세금을 낮추고,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너무 경직된 노동시장을 자유롭게 하면, 경제는 잘 풀려 나갈 것 같았다.
『그런 사정은 근본적으로 경제의 특성에서 나온다. 경제는 아주 복잡한 현상이어서, 현재의 경제학 이론은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경제정책은 과학보다는 기술 쪽에 훨씬 가깝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제정책이 거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는 맞았다. 그래서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경제정책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둘째, 한국이 시장경제 체제를 지녔으므로, 경제에서 차지하는 정부의 몫이 제약되었다. 근년에 한국 경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커졌고 그런 사정이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정부의 몫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설계되어야 한다. 특히 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크게 줄여야 한다. 당연히, 새 대통령이 경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여지는 어쩔 수 없이 작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옳은 얘기였지만, 그로선 지도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하고 싶었다. 그의 이상적 모델은 국민들보다 멀리 내다보고서 과감한 경제 발전 전략을 실행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 때하고 지금은 좀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는 미지근해진 차를 마저 마시고 읽어 내려갔다.
『셋째, 새 대통령의 능력은 공간적으로도 크게 제약을 받는다. 세계화의 시대에선 어떤 나라도, 가장 강대한 미국이나 중국까지도, 독자적으로 경제정책을 세우고 실행할 수 없다. 민족국가들의 국경은 아주 낮아져서, 자본과 기술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인력도 비교적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경제 활동에 큰 제약을 두거나 세금을 많이 징수하거나 노동시장이 경직된 나라들에선 자본과 인력이 유출되고 투자가 부진할 수밖에 없다』
그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른바 「세계성(globality)」의 시대였다. 나라를 잘 이끌려면, 다른 나라들이 하는 일들을 살펴야 했다. 다른 나라들보다 좋은 여건을 제공해야, 외국 기업들이 들어오고 한국 기업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을 터였다.
「다른 것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전투적인 노조를 다스려서 법을 지키도록 하는 일만은…」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넷째, 새 대통령의 능력은 시간적으로도 제약되었다. 5년의 임기는 경제 분야에서 치적을 남기기엔 아무래도 좀 짧다. 짧은 기간에도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정치와는 달리, 경제는 아주 좋은 여건 속에서도 단숨에 도약할 수 없다. 그리고 경제 정책은, 옳은 경우에도, 효과를 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 시간적 지체는 짧게는 반 년에서 길게는 2년가량 된다. 새 정권 초기에 정책을 마련하는 데 걸리는 시간, 국회에서 입법 과정에 들어갈 시간, 경제정책들의 더딘 효과, 그리고 정권 말기에 「발을 저는」 기간을 고려하면, 새 대통령이 주요 경제정책들을 힘차게 펼칠 수 있는 기간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짧다』
『옳은 얘기지』
나직이 뇌이고서, 그는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셨다. 실제로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는 기간은 짧았다. 그의 임기 마지막 해 봄에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가 특히 사정을 어렵게 할 터였다. 총선거에서 이기도록, 경제정책을 다듬고 경기를 억지로 띄우라는 압력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세질 터였다.
『다섯째, 새 정권은 물러나는 정권으로부터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부정적 유산들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런 부정적 유산들은 필연적으로 새 대통령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을 크게 줄인다. 특히, 정부와 국민들이 진 엄청난 빚, 가파르게 낮아진 저축률, 전투적 노조와 비현실적인 노동법은 하나같이 한국 경제에 큰 짐이 되면서도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싱긋 웃으면서, 그는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가 지적한 「부정적 유산들」은 물론 심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뜻에선 그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런 부정적 유산들이 심각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가 당선된 셈이었다. 그 점을 고려해서 차분히 추진한다면, 그가 계획한 경제개혁은 예상보다 훨씬 쉽게 성공할 수도 있다.
「이제 자야지. 내일도… 아니, 오늘이지…」
자신에게 이르면서, 그는 벽시계에 흘긋 눈길을 주었다. 0시37분이었다. 그러나 잠이 쉬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몸속을 채운 흥분의 물살은 아직 잦아질 기색이 없었다.
「다 잊고 푹 잘 수 있는 능력이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입가에 비뚤어진 웃음을 띠면서, 그는 탁자 한쪽에 놓인 책으로 손을 뻗었다.
「내겐 책이 그래도 제일 좋은 수면제니까, 이거라도…」
선거가 끝난 뒤, 그는 전직 정보기관장 한 사람을 면담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정보기관의 보고를 너무 믿으면 위험하다는 얘기와 함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실상을 밝힌 책이라고 했다. 제목 <잿더미 유산(Legacy of Ashes)>이 가리키는 것처럼, CIA의 성과는 아주 작았고 국장들이 올린 보고들은 늘 대통령의 입맛에 맞게 가공되었다는 얘기였다. 그 제목은 CIA의 활동에 환멸을 맞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자기 후임자에게 「잿더미 유산」만을 남긴다는 탄식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책과 비서실에서 抄譯(초역)한 것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괜찮은 사람인데… 나이가 많긴 하지만, 나중에…」
그 사람이 한 얘기들 가운데엔 새길 만한 것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 한국 정보기관이 맞은 문제들은 정보기관의 본질에서 나왔다는 진단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자유주의 사회에선 정보기관이 설 자리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라를 지키려면 정보기관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사람은 바로 그것이 CIA가 처음부터 맞았고 결국 제대로 풀지 못한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가 문쪽으로 가는데, 집사가 문을 열었다.
『각하, 상황실장 전화입니다』
『그래?』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서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각하, 상황실 김시영입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김 실장, 밤 늦게까지 수고가 많은데. 그래, 무슨 일이오?』
『휴전선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흥분을 애써 억누른 목소리로 김이 보고했다.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이 아군 초소에 총격을 가해 왔습니다』
『아, 그랬어요?』
그의 대꾸는 자신의 귀에 차분하게 들렸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마음 한구석으로 이런 종류의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어젯밤 11시30분에 철원의 9군단 관할구역 아군 초소에 북한군이 소총을 50여 발 발사했습니다. 아무 이유 없는 도발이라는 군 당국의 보고입니다. 다행히, 아군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는 흘긋 벽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이처럼 중요한 사건의 보고가 한 시간 넘게 걸린 것이었다. 휴전선 총격 사건들이야 흔했다. 그러나 때가 때였다.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 북한군이 도발한 것은 예사가 아니었다. 물론 신속한 반응이 중요했다.
「정상적인 군대는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오는 한숨을 죽이고서, 그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국방장관을 연결하시오』
『예, 각하』
김이 한숨 돌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숨을 천천히 깊이 쉬었다. 그의 전임자가 그에게 남긴 부정적 유산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약해진 군대였다. 북한의 이념적·군사적 공세에 늘 시달려 온 대한민국으로선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군대를 그렇게 만든 책임은 오롯이 그의 바로 전임자 두 사람에게 있었다.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지고」 그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군을 통수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 불행하게도, 그들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그 신성한 책무를 저버렸고 이제 국군은 나약해지고 정치화되었다. 「햇볕정책」 덕분에 핵무기와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미사일까지 갖춘 북한은 이제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 점은 「서해교전」에서 아프도록 뚜렷이 드러났었다. 만일 그의 두 전임자들이 북한의 도발에 대해 꿋꿋이 맞섰다면, 그 해전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유화정책이 북한의 자신감을 부추겨서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도록 만들었고, 끝내 「연평해전」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해전에서 북한군이 패퇴한 뒤, 북한군의 보복 작전이 「서해교전」을 불렀다.
만일 그들이 「연평해전」 뒤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국군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제약들을 가하지 않았다면, 충돌이 일어난 뒤에도,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 터였다. 침범한 북한 함정들에 대해 제대로 사격할 수 없었던 우리 함정들은 「밀어내기」라는 어처구니 없는 전술에 의존해야 했고, 결국 국군 여섯 명이 죽었다.
정말로 그의 피를 끓게 만든 것은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그 영웅들의 장례식에 「국군을 통수」하는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 북한 정권에 구걸할 것이 많아서, 북한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전사자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의 관리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사실을 들어 당시 한국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꾸짖었을 때, 그는 부끄러워서 혼자 얼굴이 달아올랐었다. 그렇게 손발을 묶고 대통령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군인들로 중요한 자리들을 채웠으니, 군대가 정치화되고 나약해진 것은 당연했다.
울컥 치민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그는 방안을 서성거렸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에게 분노는, 아무리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일지라도,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늘 평정한 마음을 지녀야 했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각하, 국방장관이 연결됐습니다』
숨을 가다듬고서, 그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각하, 저 국방장관입니다』
『아, 이 장관, 밤늦게 수고가 많지요?』
『아, 아닙니다, 각하』
『상황실장이 휴전선에서 일이 벌어졌다고 하던데…』
『예, 각하, 북한군이 아군 진지에 총격을 해왔습니다…』
국방장관의 보고는 상당히 길었지만, 그 내용은 국정상황실장이 보고한 것과 같았다.
『그러면, 우리가 대응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제 생각엔 우리가 이번엔 꿋꿋하게 대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관은 이내 대답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 저쪽에 밀렸는데, 이번에도 우리가 꿋꿋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저쪽에선 우리를 얕잡아 보고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각하 취임일인데,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우리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방장관은 예비역 육군 대장이었는데, 군인답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로선 그 점이 반가웠다. 군인들이 나가서 싸우려 하고 대통령이 말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싸우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군대를 독려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었다.
『알겠소. 그러면 120%로 대응하시오. 우리가 똑같이 대응하면, 저쪽에선 자기들이 이겼다고 여길 것이오. 아무때나 멋대로 도발해도, 별 위험이 없다고 판단할 것이오. 저쪽의 도발을 그냥 견디지 않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이려면, 100%로 갚는 것은 아무래도 미흡하잖소?』
『예, 각하, 각하 말씀이 옳습니다』
『원금에다 이자까지 쳐서 갚아 줘야 사리가 맞지. 그러니 이자 20%를 얹어서, 120%로 대응하시오. 우리의 결의를 보여 주되, 확전을 부르지 않을 정도로. 내 뜻을 알겠소?』
『예, 각하, 각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국방장관의 목소리에 안도의 기운이 어린 듯했다.
전화를 끊자, 문득 피로의 파도가 몰려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 하루하루가 이처럼 힘든 결정들로 채워질 터였다. 게다가 그는 언행을 조심해야 했다.
지금 이쪽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평양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쪽의 반응은 너무 작아도 너무 커도 안 되었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안 되었다. 지금 그가 내리는 지시들은 이내 평양에 보고될 터였다. 이미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의 서류들이 평양에 보고되었다고 했다. 그 뒤 10년 동안 좌파 정권들이 청와대를 장악했었으니, 사정은 훨씬 나빠졌을 터였다.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평양에 이내 알려진다고 보아야 했다.
「다섯 해 동안 줄곧 이어질 경기가 이렇게 시작되었구나」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경기였지만, 그는 질 생각이 없었다. 그에겐 그의 전임자들을 붙잡은 치명적 약점이 없었다. 그는 평양에 구걸할 것이 없었다. 그저 나라와 헌법을 지키면 되었다. 나라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합치시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차분한 자신감이 몸을 채우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여러 마일 남았다』
그는 즐겨 외는 프로스트의 시구를 나직이 뇌이고 눈을 떴다.
『김 차장』
『예, 각하』
그의 힘찬 목소리에 좀 놀란 얼굴로 집사가 문을 열었다.
『상황실장에게 아침 일찍 안보회의를 열라고 하시오』
제2부: 2013년 2월22일
『대통령의 치적은 경제 분야가 으뜸이라고 모두 얘기하고 본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경제 분야의 치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국장이 말했다.
지금 그는 일간지와 대담을 하는 참이었다. 그동안 호의적이었던 신문이어서, 썩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대담을 허락한 것이었다.
『내가 취임했을 때, 많은 우리 기업들이 국내에서 영업하기 어려워서 해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한번 나가면, 기업들은 단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간 곳에서 망하면 망했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생각을 모든 기업가들이 품었다고 누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기업들은 다릅디다. 해외에 진출했던 기업들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고 신문에 났어요. 그래서 나 자신에게 다짐했지요, 우리나라에서 영업할 수 없어서 해외로 나간 기업들이 되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편집국장과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을 맡은 기자가 열심히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렸다.
『마침내 작년 봄부터 해외에 진출했던 우리 기업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정말로 흐뭇했습니다. 이제 많지는 않지만, 기업들이 꾸준히 돌아오고 있어요. 우리 경제의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해외로 나갔던 기업들이 돌아오는 것이 가장 뜻 깊은 지표인 것 같아요』
『잘 알겠습니다. 국민들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 경제를 그렇게 성공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웃음판이 되면서,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가장 간단한 답변은 「헌법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죠. 우리 사회의 궁극적 규범이니까. 대통령이 헌법을 충실히 따르면, 나라는 잘되게 되어 있어요』
『모두 깊이 새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부연해 주셨으면 합니다』
『헌법의 근본 정신은 법의 지배죠. 모두 법을 잘 지키도록 하면, 경제도 잘 돌아가게 될 것 아니겠어요? 경제와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법이 재산권을 확실하게 보호하는 것이죠. 정부의 몸집과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줄이고, 노동조합의 불법 행위들을 방치하지 않고. 경제학자들이 추천하는 그런 개혁 조치들이, 깊이 따지고 보면 모두 재산권의 보호 조치들이거든요』
『각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사장이 대꾸했다.
『내가 취임할 때 재산권에 대한 가장 심각한 침해는 노동조합의 불법 행위들이었어요. 기업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 노동시장이 하도 열악하다 보니, 외국 기업가들은 아예 우리나라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내가 받아본 노동시장에 대한 보고서에는 외국 기업가들이 우리 노동시장을 「독성」이라고 표현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바꾸려 애썼어요』
그는 야릇한 웃음을 얼굴에 올렸다.
『어때요? 좀 바뀐 것 같잖아요?』
세 사람이 따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동시장의 개혁은 모든 사회들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모두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워낙 힘든 일이라서, 성공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노동시장의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대통령 자신께서 꼽으신다면, 무엇입니까?』
『매사가 그렇지만, 노동문제와 같은 일에선 처음에 원칙을 확고히 세우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한번 원칙이 흔들리면, 그 다음에 바로잡기는 힘듭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사장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도 바로 그렇게 처음에 원칙대로 하신 것이 노동시장의 개혁에 성공하신 요인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가 취임한 뒤 얼마 안 되어서, 전국 곳곳에서 불법파업이 일어났어요. 아주 조직적이어서, 「이 사람들이 내 의지를 시험해 보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래서 단호하게 원칙대로 대처했죠. 법대로 하면, 이기게 되어 있어요. 대처나 레이건이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법파업에 대해선 법을 엄격히 집행하라고 지시했어요.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파업을 하든 그것보다 더한 것을 하든, 정부가 나설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불법행위는 사소한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이번 일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는 일이니, 마음 굳게 먹고 대처하라. 그렇게 지시했죠. 그리고 기업들에도 불법파업을 한 노조와 절대로 타협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냈어요. 혼자만 살겠다고 노조의 불법파업에 격려금 주는 기업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런 기업들에 분명히 얘기했어요, 「한번 그런 짓하면, 정말로 망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해서 불법 파업을 분쇄하자, 노동시장이 갑자기 좋아졌어요. 그 뒤로 불법파업을 하고 공장이나 매장을 폭력적으로 점거하는 일이 사라졌어요. 처음에 원칙을 세우는 일이 그렇게 중요해요』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깊이 새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대통령께선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들에도 그런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아요. 실은 노조의 불법행위 문제보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그 원칙을 먼저 적용했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의 얼굴에 어린 야릇한 웃음을 살피면서, 편집국장이 자세를 바로했다.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그는 잠시 생각했다.
『이거 아무래도 외교와 국방 차원에서 센서티브한 얘기니까, 나중에 우리 안보 스태프의 판단을 거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오프 더 레코드로 하고, 나중에 안보 스태프의 판단을 거쳐서 공개 여부를 결정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취임한 날 밤 늦게 북한군이 아군 초소에 소총으로 사격했어요. 휴전선에서 그런 일이야 비일비재하지만, 대통령이 취임한 바로 그 날에 벌어진 일이라 중요하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도발에 대응하는 방식을 결정해서 국방장관한테 지시했어요』
그는 당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랬었군요』
그의 얘기가 끝나자, 편집국장이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아군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실은 나도 그것이 궁금했어요. 저쪽의 도발에 120%로 대응하라고 지시했지만, 아군 지휘관들이 실제로는 어떤 조치를 취할까 나도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곧 보고가 올라왔어요, 기관총으로 적 초소에 500발을 쐈다고. 다음날 아침 국무회의에서 국방장관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박수가 터졌어요. 북한의 도발에 늘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으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우리 국민들 가슴에 울분이 쌓이도록 했는데, 모처럼 대응을 제대로 하니까…』
『예, 모두 우리 군이 적절하게 대응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한이 반응의 강도를 한 단계 높여 확전으로 치달을 위험은 없었습니까?』
편집국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위험은 물론 고려해야 했죠. 그러나 나는 그런 위험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북한 지도부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아, 그렇게 판단하셨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맨 먼저 손해를 보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권한은 일단 정치 지도자로부터 군 지휘관들로 이전됩니다. 이기든 지든. 북한의 절대적 독재자에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악몽이 있겠어요? 대한민국 대통령의 취임일에 북한군이 도발해 온 것이야 물론 북한 지도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겠지만, 북한 지도부가 확전을 감행하리라고 보진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후임자가 직무 수행과 관련해서 조언을 요청한다면, 무슨 얘기를 들려 주고 싶으신지요?』
잠시 생각한 다음,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국민들은 늘 현명하고 옳다』
적막했다. 대통령이 있는 곳이 이렇게 적막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빈 정원을 가득 채운 불빛이 오히려 적막감을 더해 주었다. 불빛이 없다면, 대신 들어설 어둠이 한결 量感(양감)이 있을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11시49분.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꼭 48시간이 남은 것이었다. 물러날 준비는 다 되었다. 오랫동안 공 들인 이임사도 완성되었고, 마음의 준비도 끝났고. 그저 이틀만 기다리면 되었다. 하긴 지금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도, 사무실도, 떠날 사람들이 떠나고 새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정상적이 아니거나 중요하다 싶은 것들은 모두 다음 정권으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좀 답답한 듯해서, 그는 가슴을 펴고 숨을 깊이 쉬었다. 지금 그로선 답답함이 아니라 흐뭇함을 느껴야 옳았다. 그래서 더욱 답답했다.
어떻게 보아도, 흐뭇하게 느낄 만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직무를 다섯 해 임기 내내 큰 탈 없이 해낸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가는 해본 사람만이 알 터였다. 그의 정적들까지 그가 직무를 무난히 수행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룬 일들도 많았다. 경제 분야에선 업적이 특히 두드러졌으니, 모두 그가 경제를 되살렸다고 말했다. 그의 전임자의 초라한 업적에 비기면, 그가 이룬 것들은 대단했다. 건강도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많이 지쳤지만, 좀 쉬고 나면 「원로 정치가」로서 활동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마음은 씁쓸했다. 배신감이 그의 가슴 밑바닥에 무겁게 고여서 검은 오염 물질 덩어리처럼 그의 마음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아까 낮에 신문사 사람들과 만난 일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런 배신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했었다.
『국민들은 늘 현명하고 옳다』
그는 나직이 뇌었다. 징그러운 음식을 억지로 먹은 것처럼, 입 안에 비릿한 맛이 남았다. 대통령 노릇 하면서 거짓말을 자주 하다 보니 이제는 거짓말에 익숙해진 터였지만, 정치가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그 흔한 얘기가 비릿한 뒷맛을 남긴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배신감을 느껴야 할 까닭이 있긴 있나?』
빨리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국민이라는 것이 원래…』
하긴 그랬다. 국민들은 늘 유치했다. 합리적 판단이나 원숙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들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실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른 채, 제 이익을 지키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기심과 시기심을 부추기는 선동가들에게 열광했다. 그들은 그의 전임자를, 그 「어릿광대」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 「어릿광대」가 통치한 다섯 해 동안에 배운 교훈을 잊고 다시 어릿광대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었다. 그 선동가가 『경제가 성장했다지만, 지난 오 년간 혜택을 받은 자들은 가진 자들뿐이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을 때, 그들은 열광했다. 다섯 해 전에는 외국 기업들이 철수하고 한국 기업들은 해외에 공장들을 짓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서 실의에 빠졌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잊었다. 그리고 그가 이룬 업적들이 부당하게 훼손되는 것을 허용했다.
『늘 현명하고 옳다?』
그는 빈 정원에 대고 쓰디쓰게 내뱉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각하, 차 좀 올릴까요?』
그는 집사를 돌아다보았다. 지금 입맛에는 쓴 차가 맞을 것 같았다.
『좋지, 뭐 쌉쌀한 차 없을까?』 ●
그림 : 김원
「벌써…」 0시17분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흘긋 쳐다보면서,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첫날은 무사히 지나간 것이었다.
안도감 아래로 아쉬움이 살며시 번지고 있었다. 권력을 쥔 기간이 하루만큼 짧아진 것이었다. 「레임덕」은 취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얘기가 문득 절실하게 다가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부여하는 엄청난 힘을 써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하루만큼 줄어든 것이었다.「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일을 추진해야지. 내가 국민들에게 한 약속들은 모두…」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빈말이 아니지. 국민들은 늘 현명하고 옳지. 국민들에게 한 약속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야지」
취임식 광경이 눈앞을 스쳤다. 몸속으로 흥분의 물살이 한층 거세게 흘렀다.
「취임식에서 대통령 선서를 해본 사람만이 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잘 가꾸어진 집무실 밖 뜰은 텅 비고 조용했다. 물론 텅 빈 것은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경호원들이 날카로운 눈길로 살피고 있을 터였다.『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그는 나직이 뇌었다.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 제69조에 나온 이 구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상투적인 얘기로 들릴 터였다. 그러나 아까 손을 들고 선서할 때, 그는 그 메마른 구절에 담긴 뜻이 하도 절실하게 다가와서 목이 잠겼었다. 그 순간 그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헤쳐야 했던 온갖 어려움들이 다 겪을 만했다고 느꼈다. 그가 평생 품었던 꿈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선서에 담긴 얘기들을 진정으로 이해했고 그것들을 진정으로 믿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하고 충실히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대통령의 임무는 그렇게 단순했고 그렇게 중요했다.
선거 캠프를 차릴 때, 원로 헌법학자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캠프에 참여해 달라고 하자, 그 사람은 밖에서 돕겠다고 완곡히 사양했다.
그때 그 헌법학자가 말했었다.
『대통령은 헌법에 의해 마련된 기구입니다. 당연히, 대통령이 된 사람은 헌법을 존중해야 합니다. 헌법을 자신을 인도하는 최고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대통령이 헌법을 경멸하고 무시하면, 그는 자신의 판단을 인도할 최고의 지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사사로운 이해 관계가 그의 판단을 좌우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대통령에겐 가장 위험한 함정이라고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이래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그 함정에 빠졌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얘기를 진지하게 새겼다. 몰락한 대통령들의 행로를 살피면, 그들의 몰락은 으레 헌법을 업신여기는 데서 시작했음이 뚜렷해졌다. 헌법에 대한 경멸은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헌법의 제약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헌법에 무리하게 손을 대고 싶은 충동을 낳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몰락은 「발췌개헌」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몰락은 「유신헌법」에서 이미 마련되었다. 만일 그들이 헌법을 존중하고 헌법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들을 결정했다면, 물론 당장엔 괴로웠을 터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들이 이룬 위대한 업적들에 흠집이 덜 나고 삶이 비참하게 끝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지금은 저처럼 원론적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이제는 표를 모으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나설 때 아니겠습니까?』라는 말로 그의 거듭된 요청을 사양한 다음, 그 헌법학자는 덧붙였다.
『대통령이 원래 헌법이 마련한 기구이므로, 헌법의 권위가 낮아지면, 대통령의 권위도 당연히 낮아집니다. 「그 놈의 헌법」은 필연적으로 「그 놈의 대통령」을 낳습니다. 대통령이 되시면, 무엇보다도, 헌법을 존중하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그 놈의 헌법」이란 구절이 그의 전임자의 모습을 불러냈다.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의 전임자는 세간의 평가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 비록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지만, 능력도 있었고, 좀 천박한 면도 있었지만, 인품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좌파 이념에 얽매인 면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현실적인 정책을 폈다.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주한미군기지 이전 협상과 같은 아주 어려운 일들에서 그런 실용주의적 면모가 잘 드러났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전임자는 헌법을 너무 업신여겼다. 법률가가 그렇게 헌법을 경멸한 까닭을 그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그의 전임자는 헌법의 규정들이 아니라면 그 정신에 어긋나는 일들을 많이 했다. 그렇게 헌법을 무시한 행보들은 당장엔 편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통령의 권위를 근본적 수준에서 허물었고 실질적 업적조차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전임자는 결국 「약삭빠른 바보」가 되었다.
빈 뜰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클클 웃었다.
『전임자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업적에 대한 평가는 전임자와의 비교가 큰 몫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의 전임자가 워낙 나라 살림을 그르친 덕분에, 그로선 덕을 볼 터였다. 평균적 실적만 쌓더라도, 높은 평가를 받을 터였다.
「말수 좀 줄이고, 좀 점잖은 말씨를 골라 쓰고, 경제를 좀 되살리면…」
그는 입맛을 다셨다.
『각하?』
상념에서 깨어나, 그는 「부속실 차장」이란 직명을 얻은 집사를 돌아보았다.
『차 좀 올릴까요?』
『차? 좋지』
그는 잠시 생각했다.
『좀 달콤한 것이 먹고 싶은데. 으음, 대추차 있나?』
집사가 얼굴에 웃음을 올렸다.
『예, 각하』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그는 보고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국제적 경영 상담 회사의 한국 책임자가 만든 문서였는데, 신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관한 조언들이 들어 있었다. 지난번 선거의 핵심 쟁점이 「경제」였고 그도 경제를 되살리겠다고 약속했으므로, 그로선 무엇보다도 경제에 마음을 써야 했다.
『새 대통령이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대통령이 한국 경제의 움직임에 미칠 영향력은, 그의 큰 권력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제약되었다는 사실이다. 근년에 침체를 보인 한국 경제를 좀더 역동적으로 만들어서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에선 특히 그렇다. 이 점은 널리 인식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조건들이 그렇게 만든다.
반면에, 대통령은 자칫하면 한국 경제의 건강을 크게 해칠 수 있다.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제도적 자원들은 방대하므로, 잘못된 정책들은 한국 경제를 허약하게 만들고 성장을 낮출 수 있다. 이 점은 지난 10년 동안에 비극적으로 증명되었다』
고개를 갸웃하고서, 그는 입술을 빨았다. 의욕적으로 「경제 되살리기」에 나선 그로선 달갑지 않은 얘기였다. 그의 경제 참모들도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경제학 교수들과 전직 경제 관료들이 대부분인 그들은 그의 전임자가 그르친 것들만 바로잡아도 경제는 이내 원기를 찾으리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도 같았다. 자유무역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서 시장을 활짝 열고, 규제를 크게 줄이고, 세금을 낮추고,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너무 경직된 노동시장을 자유롭게 하면, 경제는 잘 풀려 나갈 것 같았다.
『그런 사정은 근본적으로 경제의 특성에서 나온다. 경제는 아주 복잡한 현상이어서, 현재의 경제학 이론은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경제정책은 과학보다는 기술 쪽에 훨씬 가깝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제정책이 거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는 맞았다. 그래서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경제정책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둘째, 한국이 시장경제 체제를 지녔으므로, 경제에서 차지하는 정부의 몫이 제약되었다. 근년에 한국 경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커졌고 그런 사정이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정부의 몫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설계되어야 한다. 특히 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크게 줄여야 한다. 당연히, 새 대통령이 경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여지는 어쩔 수 없이 작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옳은 얘기였지만, 그로선 지도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하고 싶었다. 그의 이상적 모델은 국민들보다 멀리 내다보고서 과감한 경제 발전 전략을 실행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 때하고 지금은 좀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는 미지근해진 차를 마저 마시고 읽어 내려갔다.
『셋째, 새 대통령의 능력은 공간적으로도 크게 제약을 받는다. 세계화의 시대에선 어떤 나라도, 가장 강대한 미국이나 중국까지도, 독자적으로 경제정책을 세우고 실행할 수 없다. 민족국가들의 국경은 아주 낮아져서, 자본과 기술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인력도 비교적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경제 활동에 큰 제약을 두거나 세금을 많이 징수하거나 노동시장이 경직된 나라들에선 자본과 인력이 유출되고 투자가 부진할 수밖에 없다』
그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른바 「세계성(globality)」의 시대였다. 나라를 잘 이끌려면, 다른 나라들이 하는 일들을 살펴야 했다. 다른 나라들보다 좋은 여건을 제공해야, 외국 기업들이 들어오고 한국 기업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을 터였다.
「다른 것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전투적인 노조를 다스려서 법을 지키도록 하는 일만은…」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넷째, 새 대통령의 능력은 시간적으로도 제약되었다. 5년의 임기는 경제 분야에서 치적을 남기기엔 아무래도 좀 짧다. 짧은 기간에도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정치와는 달리, 경제는 아주 좋은 여건 속에서도 단숨에 도약할 수 없다. 그리고 경제 정책은, 옳은 경우에도, 효과를 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 시간적 지체는 짧게는 반 년에서 길게는 2년가량 된다. 새 정권 초기에 정책을 마련하는 데 걸리는 시간, 국회에서 입법 과정에 들어갈 시간, 경제정책들의 더딘 효과, 그리고 정권 말기에 「발을 저는」 기간을 고려하면, 새 대통령이 주요 경제정책들을 힘차게 펼칠 수 있는 기간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짧다』
『옳은 얘기지』
나직이 뇌이고서, 그는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셨다. 실제로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는 기간은 짧았다. 그의 임기 마지막 해 봄에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가 특히 사정을 어렵게 할 터였다. 총선거에서 이기도록, 경제정책을 다듬고 경기를 억지로 띄우라는 압력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세질 터였다.
『다섯째, 새 정권은 물러나는 정권으로부터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부정적 유산들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런 부정적 유산들은 필연적으로 새 대통령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을 크게 줄인다. 특히, 정부와 국민들이 진 엄청난 빚, 가파르게 낮아진 저축률, 전투적 노조와 비현실적인 노동법은 하나같이 한국 경제에 큰 짐이 되면서도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싱긋 웃으면서, 그는 그 구절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가 지적한 「부정적 유산들」은 물론 심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뜻에선 그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런 부정적 유산들이 심각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가 당선된 셈이었다. 그 점을 고려해서 차분히 추진한다면, 그가 계획한 경제개혁은 예상보다 훨씬 쉽게 성공할 수도 있다.
「이제 자야지. 내일도… 아니, 오늘이지…」
자신에게 이르면서, 그는 벽시계에 흘긋 눈길을 주었다. 0시37분이었다. 그러나 잠이 쉬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몸속을 채운 흥분의 물살은 아직 잦아질 기색이 없었다.
「다 잊고 푹 잘 수 있는 능력이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입가에 비뚤어진 웃음을 띠면서, 그는 탁자 한쪽에 놓인 책으로 손을 뻗었다.
「내겐 책이 그래도 제일 좋은 수면제니까, 이거라도…」
선거가 끝난 뒤, 그는 전직 정보기관장 한 사람을 면담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정보기관의 보고를 너무 믿으면 위험하다는 얘기와 함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실상을 밝힌 책이라고 했다. 제목 <잿더미 유산(Legacy of Ashes)>이 가리키는 것처럼, CIA의 성과는 아주 작았고 국장들이 올린 보고들은 늘 대통령의 입맛에 맞게 가공되었다는 얘기였다. 그 제목은 CIA의 활동에 환멸을 맞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자기 후임자에게 「잿더미 유산」만을 남긴다는 탄식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책과 비서실에서 抄譯(초역)한 것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괜찮은 사람인데… 나이가 많긴 하지만, 나중에…」
그 사람이 한 얘기들 가운데엔 새길 만한 것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 한국 정보기관이 맞은 문제들은 정보기관의 본질에서 나왔다는 진단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자유주의 사회에선 정보기관이 설 자리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라를 지키려면 정보기관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사람은 바로 그것이 CIA가 처음부터 맞았고 결국 제대로 풀지 못한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가 문쪽으로 가는데, 집사가 문을 열었다.
『각하, 상황실장 전화입니다』
『그래?』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서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각하, 상황실 김시영입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김 실장, 밤 늦게까지 수고가 많은데. 그래, 무슨 일이오?』
『휴전선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흥분을 애써 억누른 목소리로 김이 보고했다.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이 아군 초소에 총격을 가해 왔습니다』
『아, 그랬어요?』
그의 대꾸는 자신의 귀에 차분하게 들렸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마음 한구석으로 이런 종류의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책상에 걸터앉았다.
『어젯밤 11시30분에 철원의 9군단 관할구역 아군 초소에 북한군이 소총을 50여 발 발사했습니다. 아무 이유 없는 도발이라는 군 당국의 보고입니다. 다행히, 아군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는 흘긋 벽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이처럼 중요한 사건의 보고가 한 시간 넘게 걸린 것이었다. 휴전선 총격 사건들이야 흔했다. 그러나 때가 때였다.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 북한군이 도발한 것은 예사가 아니었다. 물론 신속한 반응이 중요했다.
「정상적인 군대는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오는 한숨을 죽이고서, 그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국방장관을 연결하시오』
『예, 각하』
김이 한숨 돌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숨을 천천히 깊이 쉬었다. 그의 전임자가 그에게 남긴 부정적 유산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약해진 군대였다. 북한의 이념적·군사적 공세에 늘 시달려 온 대한민국으로선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군대를 그렇게 만든 책임은 오롯이 그의 바로 전임자 두 사람에게 있었다.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지고」 그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군을 통수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 불행하게도, 그들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그 신성한 책무를 저버렸고 이제 국군은 나약해지고 정치화되었다. 「햇볕정책」 덕분에 핵무기와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미사일까지 갖춘 북한은 이제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 점은 「서해교전」에서 아프도록 뚜렷이 드러났었다. 만일 그의 두 전임자들이 북한의 도발에 대해 꿋꿋이 맞섰다면, 그 해전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유화정책이 북한의 자신감을 부추겨서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도록 만들었고, 끝내 「연평해전」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해전에서 북한군이 패퇴한 뒤, 북한군의 보복 작전이 「서해교전」을 불렀다.
만일 그들이 「연평해전」 뒤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국군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제약들을 가하지 않았다면, 충돌이 일어난 뒤에도,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 터였다. 침범한 북한 함정들에 대해 제대로 사격할 수 없었던 우리 함정들은 「밀어내기」라는 어처구니 없는 전술에 의존해야 했고, 결국 국군 여섯 명이 죽었다.
정말로 그의 피를 끓게 만든 것은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그 영웅들의 장례식에 「국군을 통수」하는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 북한 정권에 구걸할 것이 많아서, 북한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전사자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의 관리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사실을 들어 당시 한국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꾸짖었을 때, 그는 부끄러워서 혼자 얼굴이 달아올랐었다. 그렇게 손발을 묶고 대통령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군인들로 중요한 자리들을 채웠으니, 군대가 정치화되고 나약해진 것은 당연했다. 울컥 치민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그는 방안을 서성거렸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에게 분노는, 아무리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일지라도,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늘 평정한 마음을 지녀야 했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각하, 국방장관이 연결됐습니다』
숨을 가다듬고서, 그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각하, 저 국방장관입니다』
『아, 이 장관, 밤늦게 수고가 많지요?』
『아, 아닙니다, 각하』
『상황실장이 휴전선에서 일이 벌어졌다고 하던데…』
『예, 각하, 북한군이 아군 진지에 총격을 해왔습니다…』
국방장관의 보고는 상당히 길었지만, 그 내용은 국정상황실장이 보고한 것과 같았다.
『그러면, 우리가 대응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제 생각엔 우리가 이번엔 꿋꿋하게 대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관은 이내 대답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 저쪽에 밀렸는데, 이번에도 우리가 꿋꿋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저쪽에선 우리를 얕잡아 보고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각하 취임일인데,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우리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방장관은 예비역 육군 대장이었는데, 군인답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로선 그 점이 반가웠다. 군인들이 나가서 싸우려 하고 대통령이 말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싸우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군대를 독려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은 없었다.
『알겠소. 그러면 120%로 대응하시오. 우리가 똑같이 대응하면, 저쪽에선 자기들이 이겼다고 여길 것이오. 아무때나 멋대로 도발해도, 별 위험이 없다고 판단할 것이오. 저쪽의 도발을 그냥 견디지 않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이려면, 100%로 갚는 것은 아무래도 미흡하잖소?』
『예, 각하, 각하 말씀이 옳습니다』
『원금에다 이자까지 쳐서 갚아 줘야 사리가 맞지. 그러니 이자 20%를 얹어서, 120%로 대응하시오. 우리의 결의를 보여 주되, 확전을 부르지 않을 정도로. 내 뜻을 알겠소?』
『예, 각하, 각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국방장관의 목소리에 안도의 기운이 어린 듯했다.
전화를 끊자, 문득 피로의 파도가 몰려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 하루하루가 이처럼 힘든 결정들로 채워질 터였다. 게다가 그는 언행을 조심해야 했다.
지금 이쪽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평양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쪽의 반응은 너무 작아도 너무 커도 안 되었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안 되었다. 지금 그가 내리는 지시들은 이내 평양에 보고될 터였다. 이미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의 서류들이 평양에 보고되었다고 했다. 그 뒤 10년 동안 좌파 정권들이 청와대를 장악했었으니, 사정은 훨씬 나빠졌을 터였다.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평양에 이내 알려진다고 보아야 했다.
「다섯 해 동안 줄곧 이어질 경기가 이렇게 시작되었구나」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경기였지만, 그는 질 생각이 없었다. 그에겐 그의 전임자들을 붙잡은 치명적 약점이 없었다. 그는 평양에 구걸할 것이 없었다. 그저 나라와 헌법을 지키면 되었다. 나라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합치시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차분한 자신감이 몸을 채우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여러 마일 남았다』
그는 즐겨 외는 프로스트의 시구를 나직이 뇌이고 눈을 떴다.
『김 차장』
『예, 각하』
그의 힘찬 목소리에 좀 놀란 얼굴로 집사가 문을 열었다.
『상황실장에게 아침 일찍 안보회의를 열라고 하시오』
제2부: 2013년 2월22일
『대통령의 치적은 경제 분야가 으뜸이라고 모두 얘기하고 본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경제 분야의 치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국장이 말했다.
지금 그는 일간지와 대담을 하는 참이었다. 그동안 호의적이었던 신문이어서, 썩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대담을 허락한 것이었다.
『내가 취임했을 때, 많은 우리 기업들이 국내에서 영업하기 어려워서 해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한번 나가면, 기업들은 단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간 곳에서 망하면 망했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생각을 모든 기업가들이 품었다고 누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기업들은 다릅디다. 해외에 진출했던 기업들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고 신문에 났어요. 그래서 나 자신에게 다짐했지요, 우리나라에서 영업할 수 없어서 해외로 나간 기업들이 되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편집국장과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을 맡은 기자가 열심히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렸다.
『마침내 작년 봄부터 해외에 진출했던 우리 기업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정말로 흐뭇했습니다. 이제 많지는 않지만, 기업들이 꾸준히 돌아오고 있어요. 우리 경제의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생각엔 그렇게 해외로 나갔던 기업들이 돌아오는 것이 가장 뜻 깊은 지표인 것 같아요』
『잘 알겠습니다. 국민들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 경제를 그렇게 성공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웃음판이 되면서,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가장 간단한 답변은 「헌법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죠. 우리 사회의 궁극적 규범이니까. 대통령이 헌법을 충실히 따르면, 나라는 잘되게 되어 있어요』
『모두 깊이 새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부연해 주셨으면 합니다』
『헌법의 근본 정신은 법의 지배죠. 모두 법을 잘 지키도록 하면, 경제도 잘 돌아가게 될 것 아니겠어요? 경제와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법이 재산권을 확실하게 보호하는 것이죠. 정부의 몸집과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줄이고, 노동조합의 불법 행위들을 방치하지 않고. 경제학자들이 추천하는 그런 개혁 조치들이, 깊이 따지고 보면 모두 재산권의 보호 조치들이거든요』
『각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사장이 대꾸했다.
『내가 취임할 때 재산권에 대한 가장 심각한 침해는 노동조합의 불법 행위들이었어요. 기업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 노동시장이 하도 열악하다 보니, 외국 기업가들은 아예 우리나라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내가 받아본 노동시장에 대한 보고서에는 외국 기업가들이 우리 노동시장을 「독성」이라고 표현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바꾸려 애썼어요』
그는 야릇한 웃음을 얼굴에 올렸다.
『어때요? 좀 바뀐 것 같잖아요?』
세 사람이 따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동시장의 개혁은 모든 사회들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모두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워낙 힘든 일이라서, 성공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노동시장의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대통령 자신께서 꼽으신다면, 무엇입니까?』
『매사가 그렇지만, 노동문제와 같은 일에선 처음에 원칙을 확고히 세우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한번 원칙이 흔들리면, 그 다음에 바로잡기는 힘듭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옳으신 말씀입니다』
사장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도 바로 그렇게 처음에 원칙대로 하신 것이 노동시장의 개혁에 성공하신 요인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가 취임한 뒤 얼마 안 되어서, 전국 곳곳에서 불법파업이 일어났어요. 아주 조직적이어서, 「이 사람들이 내 의지를 시험해 보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래서 단호하게 원칙대로 대처했죠. 법대로 하면, 이기게 되어 있어요. 대처나 레이건이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법파업에 대해선 법을 엄격히 집행하라고 지시했어요.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파업을 하든 그것보다 더한 것을 하든, 정부가 나설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불법행위는 사소한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이번 일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는 일이니, 마음 굳게 먹고 대처하라. 그렇게 지시했죠. 그리고 기업들에도 불법파업을 한 노조와 절대로 타협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냈어요. 혼자만 살겠다고 노조의 불법파업에 격려금 주는 기업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런 기업들에 분명히 얘기했어요, 「한번 그런 짓하면, 정말로 망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해서 불법 파업을 분쇄하자, 노동시장이 갑자기 좋아졌어요. 그 뒤로 불법파업을 하고 공장이나 매장을 폭력적으로 점거하는 일이 사라졌어요. 처음에 원칙을 세우는 일이 그렇게 중요해요』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깊이 새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대통령께선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들에도 그런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아요. 실은 노조의 불법행위 문제보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그 원칙을 먼저 적용했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의 얼굴에 어린 야릇한 웃음을 살피면서, 편집국장이 자세를 바로했다.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그는 잠시 생각했다.
『이거 아무래도 외교와 국방 차원에서 센서티브한 얘기니까, 나중에 우리 안보 스태프의 판단을 거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오프 더 레코드로 하고, 나중에 안보 스태프의 판단을 거쳐서 공개 여부를 결정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취임한 날 밤 늦게 북한군이 아군 초소에 소총으로 사격했어요. 휴전선에서 그런 일이야 비일비재하지만, 대통령이 취임한 바로 그 날에 벌어진 일이라 중요하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도발에 대응하는 방식을 결정해서 국방장관한테 지시했어요』
그는 당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랬었군요』
그의 얘기가 끝나자, 편집국장이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아군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실은 나도 그것이 궁금했어요. 저쪽의 도발에 120%로 대응하라고 지시했지만, 아군 지휘관들이 실제로는 어떤 조치를 취할까 나도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곧 보고가 올라왔어요, 기관총으로 적 초소에 500발을 쐈다고. 다음날 아침 국무회의에서 국방장관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박수가 터졌어요. 북한의 도발에 늘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으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우리 국민들 가슴에 울분이 쌓이도록 했는데, 모처럼 대응을 제대로 하니까…』
『예, 모두 우리 군이 적절하게 대응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한이 반응의 강도를 한 단계 높여 확전으로 치달을 위험은 없었습니까?』
편집국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위험은 물론 고려해야 했죠. 그러나 나는 그런 위험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북한 지도부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아, 그렇게 판단하셨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맨 먼저 손해를 보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권한은 일단 정치 지도자로부터 군 지휘관들로 이전됩니다. 이기든 지든. 북한의 절대적 독재자에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악몽이 있겠어요? 대한민국 대통령의 취임일에 북한군이 도발해 온 것이야 물론 북한 지도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겠지만, 북한 지도부가 확전을 감행하리라고 보진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후임자가 직무 수행과 관련해서 조언을 요청한다면, 무슨 얘기를 들려 주고 싶으신지요?』
잠시 생각한 다음,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국민들은 늘 현명하고 옳다』
적막했다. 대통령이 있는 곳이 이렇게 적막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빈 정원을 가득 채운 불빛이 오히려 적막감을 더해 주었다. 불빛이 없다면, 대신 들어설 어둠이 한결 量感(양감)이 있을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11시49분.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꼭 48시간이 남은 것이었다. 물러날 준비는 다 되었다. 오랫동안 공 들인 이임사도 완성되었고, 마음의 준비도 끝났고. 그저 이틀만 기다리면 되었다. 하긴 지금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도, 사무실도, 떠날 사람들이 떠나고 새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정상적이 아니거나 중요하다 싶은 것들은 모두 다음 정권으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좀 답답한 듯해서, 그는 가슴을 펴고 숨을 깊이 쉬었다. 지금 그로선 답답함이 아니라 흐뭇함을 느껴야 옳았다. 그래서 더욱 답답했다.
어떻게 보아도, 흐뭇하게 느낄 만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직무를 다섯 해 임기 내내 큰 탈 없이 해낸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가는 해본 사람만이 알 터였다. 그의 정적들까지 그가 직무를 무난히 수행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룬 일들도 많았다. 경제 분야에선 업적이 특히 두드러졌으니, 모두 그가 경제를 되살렸다고 말했다. 그의 전임자의 초라한 업적에 비기면, 그가 이룬 것들은 대단했다. 건강도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많이 지쳤지만, 좀 쉬고 나면 「원로 정치가」로서 활동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마음은 씁쓸했다. 배신감이 그의 가슴 밑바닥에 무겁게 고여서 검은 오염 물질 덩어리처럼 그의 마음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아까 낮에 신문사 사람들과 만난 일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런 배신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했었다.
『국민들은 늘 현명하고 옳다』
그는 나직이 뇌었다. 징그러운 음식을 억지로 먹은 것처럼, 입 안에 비릿한 맛이 남았다. 대통령 노릇 하면서 거짓말을 자주 하다 보니 이제는 거짓말에 익숙해진 터였지만, 정치가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그 흔한 얘기가 비릿한 뒷맛을 남긴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배신감을 느껴야 할 까닭이 있긴 있나?』
빨리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국민이라는 것이 원래…』
하긴 그랬다. 국민들은 늘 유치했다. 합리적 판단이나 원숙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들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실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른 채, 제 이익을 지키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기심과 시기심을 부추기는 선동가들에게 열광했다. 그들은 그의 전임자를, 그 「어릿광대」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 「어릿광대」가 통치한 다섯 해 동안에 배운 교훈을 잊고 다시 어릿광대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었다. 그 선동가가 『경제가 성장했다지만, 지난 오 년간 혜택을 받은 자들은 가진 자들뿐이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을 때, 그들은 열광했다. 다섯 해 전에는 외국 기업들이 철수하고 한국 기업들은 해외에 공장들을 짓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서 실의에 빠졌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잊었다. 그리고 그가 이룬 업적들이 부당하게 훼손되는 것을 허용했다.
『늘 현명하고 옳다?』
그는 빈 정원에 대고 쓰디쓰게 내뱉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각하, 차 좀 올릴까요?』
그는 집사를 돌아다보았다. 지금 입맛에는 쓴 차가 맞을 것 같았다.
『좋지, 뭐 쌉쌀한 차 없을까?』 ●
그림 : 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