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晉錫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한국외국어大 사회과학대학장, 언론중재위원, 방송위원 역임. 現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 한국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조선총독부」 등.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한국외국어大 사회과학대학장, 언론중재위원, 방송위원 역임. 現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 한국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조선총독부」 등.
신문은 舊韓末의 타임캡슐
- 1910년 韓日합방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高宗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純宗, 高宗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그 옆은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舊韓末(구한말)의 신문은 19세기 막바지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치는 조선의 사회상을 그대로 간직한 타임캡슐이다. 이 시기의 신문을 읽다 보면 너무 한심한 일이 많아서 분통이 터진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20세기 초반의 세계사적인 기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6일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4일까지 발행되었으니 수명이 긴 신문은 아니었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이 기간은 우리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독립신문에는 기가 막히는 기사들이 실려 있다.
<1896년 9월18일 밤. 일본 민간인 한 명과 일본 순사가 통행금지 시간에 남대문을 열라고 했으나 문을 지키던 조선 巡檢(순검·경찰)들이 『날이 밝기 전에는 열 수 없다』고 했다. 일본 순사는 軍刀(군도)로 조선 순검을 무수히 때리고 남의 나라 首都(수도)의 城門(성문)을 열고 짐 실은 말 두 필과 하인 두 명을 들여보냈다. 南署의 순검 유치선이 술 취한 淸人 패에게 순라방망이와 포승·호각 따위를 빼앗겼다>
독립신문 1896년 9월26일자 「雜報(잡보)」에 실린 기사다.
1898년 1월에는 서양인 「차례」라는 자가 인천에서 조선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아 탄알이 배를 관통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차례는 요리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조선사람 수십 명이 몰려 구경하자 귀찮게 여겨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을 보도한 「협셩회회보」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발행하던 주간신문이었다. 기사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렇게 악한 오랑캐 놈을 당장에 雪憤(설분) 못 하였으니 듣는 자에게 분한 일이나 장차 정부에서 법률대로 조처할 일이다』
조선 정부가 범인을 처벌한 흔적은 없다.
「뎨국신문(제국신문)」은 1898년 8월 10일에 창간되었다. 사장 李鍾一(이종일)은 후에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人의 한 사람이었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李承晩(이승만)이 주필(기자)로 활약했다. 창간 일주일째였던 8월16일자 「잡보」 기사와 8월30일자 논설란에는 日人들의 행패를 실어 독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8월16일자 기사는 한국 병정 한 사람이 군복을 입은 채로 日人 전당포 주인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길 가던 사람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 연유를 물은즉, 日人 전당포 주인은 길 가던 사람에게까지 욕을 퍼부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李承晩이 쓴 것인데 그는 『막중한 군복을 입은 병정』이 日人 전당포 주인에게 얻어맞은 사실을 묘사하여 분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2주일 후인 8월29일자 「잡보」는 일본인이 조선사람을 칼로 쳐서 손이 상했는 데도 한국 순검은 수수방관하면서 자기네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日人 순사가 달려와서 적반하장으로 칼 맞은 한국사람을 자기네 경찰서로 연행했다고 보도했다. 현장의 군중들은 격분하여 일대 소동이 벌어졌고, 「칼질한 놈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처벌하라」고 요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賣官賣職 다반사
몇 가지 간단한 기사만으로도 나라꼴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외국인들에게 얻어맞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할 말을 못 하는 비굴한 백성이 되었을까? 썩은 관리들은 벼슬자리를 돈으로 바꾸고, 벼슬을 돈으로 산 사람들은 민중의 피를 빨아 배를 채웠기 때문이다. 장수가 나약하면 병졸은 오합지졸이 된다. 나라가 백성을 보호하지 않으니 백성은 자기 나라에서 주인 행세를 못 한 것이다.
1896년 9월17일자 독립신문 첫머리 논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새로 임명된 거창 군수 김봉수를 보고 내부대신이 『어떻게 자네가 고을 원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김봉수는 『돈 3만 냥을 주고 고을 원 벼슬을 샀다』고 대답했다가 파면되었다는 거짓말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원이 백성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는 보나마나다. 賣官賣職(매관매직)이 횡행하던 세태의 한 사례였다.
1898년 7월에는 독일영사 구린(口麟: Krien, D)이 외부대신 兪箕煥(유기환)을 폭행하는 해괴한 사건이 일어났다. 구린은 유기환을 독일영사관으로 불렀는데, 찾아간 유기환의 팔을 느닷없이 때렸다. 유기환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대답도 없이 이번에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리고 문 밖으로 밀어내면서 外部(외부: 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보낸 公文(공문) 두 장을 마당에 내팽개쳤다(독립신문, 1898년 7월2일, 4일, 6일, 7일자). 외부대신이 일개 외국 영사를 불러들이지 못하고 공관으로 찾아간 행위가 굴욕을 자초한 처사였지만,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義兵과 匪徒
1895년 俄館播遷(아관파천) 직후, 明成皇后(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을 응징하려는 義兵(의병)들이 전국에서 봉기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義兵은 「乙未義兵(을미의병)」으로 불린다. 독립신문은 바로 이 무렵에 창간되었다.
같은 때에 高宗(고종)은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궁궐에 머물지 못하고 남의 나라 보호를 받을 요량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내맡겼다.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高宗의 피신은 그의 무능과 나약함을 내외에 공개한 사건이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나라 위신은 참담할 정도로 땅에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 지방 여러 곳에서는 義兵이 들고일어나 백성들은 애국심이 살아 있음을 과시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간인은 물론이고 승려들까지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義兵이라 해서 모두가 순수한 우국충정을 지닌 애국자들은 아니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과 불량배 무리들이 있었다. 時流(시류)에 편승한 匪徒(비도), 떼도적들이 義兵을 빙자하여 횡행한 것이다.
양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흔해서 義兵과 도적의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많았다. 영국인 재정고문 브라운이 1896년에 예산을 편성하려고 보니 국가의 세입 400만원 가운데 3분의 1을 匪徒들이 도적질한 상태였다(독립신문, 1896년 9월24일 논설).
匪徒를 진압하기 위해서 官軍이 지방으로 출동하고, 高宗은 義兵을 향해서 「武力항쟁을 자제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독립신문에는 「匪徒」로 표현된 기사가 200회 이상 나타나고 있으나, 「義兵」으로 표현된 기사는 20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신문이 義兵을 匪徒로 표현한 것은 親日的인 시각이며 義兵을 모독한 것이라고 徐載弼(서재필)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匪徒와 義兵의 구분이 애매했기 때문에, 진압군이 지방에서 匪徒 또는 죄인을 포살(31건)하거나 교살(10건), 총살(7건)했다는 기사가 독립신문에는 자주 등장했다.
일본의 입체적 침략
일본은 한국 침략을 크게 네 분야로 추진했다. 첫째는 武力을 통한 침략이었다. 淸日전쟁과 러日전쟁을 치르면서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을 축출하고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했다. 국내의 무장 항일투쟁에 대해서 武力으로 제압했으며, 韓日의정서와 乙巳조약 등의 國權 탈취는 武力을 앞세운 강압으로 체결했다.
둘째로는 외교력을 동원한 침략이었다. 러日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의 외교노선을 표방했지만 일본은 1904년 2월 韓日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해 실질적으로 한반도를 武力으로 점거했고, 韓日협약(1905년 8월22일)을 강요해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乙巳조약(1905년 11월17일)·韓日신협약(1907년 7월24일) 등 형식상의 조약 또는 협약을 통해 한국의 國權(국권)을 탈취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맺은 태프트-가쓰라(桂太郞)협약(1905년 7월29일), 제2회 英日동맹(1905년 8월12일),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5일)과 같은 조약 또는 협약을 체결해 한반도에서의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한국을 强占(강점)할 수 있도록 列强(열강)의 동의를 얻어 냈다.
조선신보와 한성신보
셋째는 경제침략이었다. 1905년의 韓日협약은 일본인을 재정고문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日人 재정고문은 국가의 예산편성과 그 집행을 총괄해 高宗과 純宗(순종)조차 日人 재정고문의 승인을 받아야 예산을 집행할 수 있었다.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種太郞)는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惡性借款(악성차관)을 도입해 대한제국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1904년 2월부터 일본이 요구했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경제침략의 일환이었다. 민족진영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전개해 이를 좌절시켰다. 1907년 시작된 國債(국채)보상운동은 경제적 예속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었다.
넷째는 언론침략이다. 일본은 「漢城旬報(한성순보)」가 발간되기 전인 1881년 12월부터 부산에서 「조선신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보다 한 해 먼저인 1895년 2월에는 한국어와 日語로 편집하는 「한성신보」를 창간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는 논조를 펴기 시작했다.
인천에서는 일본어 신문인 「仁川京城隔週商報(인천경성격주상보)」(1890년 1월28일)가 발간되다 제호를 「朝鮮旬報(조선순보)」(1891년 9월1일), 「조선신보」(1892년 4월5일)로 바꾸면서 발행하였다. 특히 러日전쟁 이후에는 여러 종류의 한국어 신문을 발행해 침략의 선전도구로 활용하는 한편 한국인이 발행한 신문에 대해서는 親日的인 논조를 펴도록 유도했다.
독립신문 이후 여러 종류의 민간신문이 자생적으로 창간되었다. 독립신문은 정부의 보조로 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自力(자력)으로 민간인들이 신문을 발행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裴說(배설)이 창간한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는 영국인이 누릴 수 있었던 治外法權(치외법권)을 이용해 강력한 抗日(항일) 논조를 폈다.
황성신문·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와 같은 舊韓末의 민족 언론은 일본의 침략정책에 저항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문제에 냉담했던 영국
일본과 한국에 와 있던 列强의 외교관들은 대체로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필연적인 추세로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한국과 일본을 대등한 독립국가로 보고 中立的인 입장에서 兩國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일본의 입장에 서서 한국 문제를 바라보았으며, 한국 정부를 뒤로 제쳐 놓은 채 한국 문제를 일본과 협상했다.
영국 외교관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는 極東(극동)에 와 있던 영국 외교관들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영국 외무성의 외교방침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영국의 외교정책이었다. 영국은 한국에 극히 제한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영국이 볼 때 한국은 가난할 뿐 아니라 유익한 개발의 잠재력을 거의 갖지 못한 자원 貧國(빈국)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놓고 대립했을 때 영국의 외교정책은 러시아에 반대하는 노선이었다. 그것은 英日동맹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영국은 「한국은 일본의 안전과 이익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둘째는 조선 정부의 구조적인 취약성이었다. 서울에 와 있던 영국 외교관들은 한국 政界의 政派(정파) 갈등과 대신들의 잦은 교체로 협상의 상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駐韓 영국공사 조단의 눈에는 「한국의 궁정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한 각색 파당들이 싸우는 결투장이며, 그렇게 분열된 의결기관의 연출장」으로 비쳤다. 그보다 앞서 駐韓 영국대리공사로 근무했던 가빈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국 황제와 그 측근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금전상의 궁핍에 쪼들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돈을 얻으려고 하는 열망은 평소 때보다 훨씬 바빠진 미국·일본·프랑스·독일의 利權(이권) 사냥꾼과 借款(차관) 알선꾼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외부대신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외교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재량권은 거의 없었다. 조단은 한국의 외부대신이 『황실과 외국 공사관 사이에 드리워진 하나의 장식적 휘장일 뿐』인 존재로 보았다.
그 불행한 관리는 단지 황제로부터 외국의 외교관들을 격리시키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고, 對外관계의 실무 면에서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황실의 요구와 외국인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자리가 외부대신이었으며 그들은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1901~1904년까지의 4년 동안 외부대신은 무려 스무 번이 넘게 교체되었다. 같은 사람이 병을 이유로 잠시 물러나 대리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되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므로 사람이 달라진 횟수는 그보다 적었다. 그러나 교체가 심했던 1902~1904년까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02년에는 朴濟純(박제순)에서 兪箕煥(유기환·3월15일), 崔榮夏(최영하·4월29일), 유기환(5월31일), 최영하(6월21일), 유기환(7월1일), 최영하(8월13일), 趙秉式(조병식·10월17일)으로 교체되었다. 1903년에는 李道宰(이도재·1월30일), 李重夏(이중하·7월20일), 이도재(7월29일), 이중하(9월1일), 成岐運(성기운·9월15일), 이중하(9월21일), 李址鎔(이지용·12월23일)으로 1904년에는 박제순(1월25일), 조병식(3월12일), 金嘉鎭(김가진·4월1일), 李夏榮(이하영·4월19일), 尹致昊(윤치호·8월22일), 이하영(9월2일)의 순으로 정신없이 바뀌고 있다.
조단의 후임인 헨리 코번은 『외부대신들이 빈번하게 바뀌는 동기가 어떤 원칙의 주장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자리로부터 도피하려는 소망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을 잡았던 한국의 대신들이 외국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결정할 때 취했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들의 정책은 너무나 많은 복잡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동기로 결정되었고, 위기를 맞을 때마다 너무 자주 변했기 때문에 어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이를 기술하기란 불가능할 정도이다」
駐日 영국대사 맥도널드는 짧은 한국 체류 기간 중에 「한국 궁중은 괴상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음모로 가득 찼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無能한 외교로 고립 자초
이같은 영국 외교관들의 견해는 高宗과 그 측근들을 지나치게 貶毁(폄훼)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외교정책들은 대부분 列强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현상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駐韓 외국 외교관들이 편견을 가지고 한국을 바라보았다 하더라도, 한국 정부를 교섭 상대로 여기지 않고 따돌렸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한제국 정부의 無能(무능)한 시스템에 원인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쟁에 패한 지휘관이 자신이 기른 병졸에게 敗戰(패전)의 책임을 지우고 자신은 敵國(적국)에서 생명을 부지하면서 爵位(작위)를 받아 육신의 평안을 도모한다면 그는 장교나 하급 군인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다.
高宗은 비극의 왕이었다. 그는 44년간(1863~1907) 在位(재위)하면서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先祖(선조)가 세운 나라를 잃고, 자신과 一族의 생명을 敵國에 의탁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의 즉위 이전부터 조선 왕조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피폐해졌고, 백성의 기백은 꺾였다. 누적된 秕政(비정)이 高宗 시대에 와서 外勢의 침략과 맞물려 회복불능한 상태가 되어 나라가 망했다. 그러고 보면 高宗도 역사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가장 무겁고도 최종적인 책임은 역시 高宗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6일에 창간되어 1899년 12월4일까지 발행되었으니 수명이 긴 신문은 아니었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이 기간은 우리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독립신문에는 기가 막히는 기사들이 실려 있다.
<1896년 9월18일 밤. 일본 민간인 한 명과 일본 순사가 통행금지 시간에 남대문을 열라고 했으나 문을 지키던 조선 巡檢(순검·경찰)들이 『날이 밝기 전에는 열 수 없다』고 했다. 일본 순사는 軍刀(군도)로 조선 순검을 무수히 때리고 남의 나라 首都(수도)의 城門(성문)을 열고 짐 실은 말 두 필과 하인 두 명을 들여보냈다. 南署의 순검 유치선이 술 취한 淸人 패에게 순라방망이와 포승·호각 따위를 빼앗겼다>
독립신문 1896년 9월26일자 「雜報(잡보)」에 실린 기사다.
1898년 1월에는 서양인 「차례」라는 자가 인천에서 조선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아 탄알이 배를 관통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차례는 요리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조선사람 수십 명이 몰려 구경하자 귀찮게 여겨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을 보도한 「협셩회회보」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발행하던 주간신문이었다. 기사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렇게 악한 오랑캐 놈을 당장에 雪憤(설분) 못 하였으니 듣는 자에게 분한 일이나 장차 정부에서 법률대로 조처할 일이다』
조선 정부가 범인을 처벌한 흔적은 없다.
「뎨국신문(제국신문)」은 1898년 8월 10일에 창간되었다. 사장 李鍾一(이종일)은 후에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人의 한 사람이었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李承晩(이승만)이 주필(기자)로 활약했다. 창간 일주일째였던 8월16일자 「잡보」 기사와 8월30일자 논설란에는 日人들의 행패를 실어 독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8월16일자 기사는 한국 병정 한 사람이 군복을 입은 채로 日人 전당포 주인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길 가던 사람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 연유를 물은즉, 日人 전당포 주인은 길 가던 사람에게까지 욕을 퍼부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李承晩이 쓴 것인데 그는 『막중한 군복을 입은 병정』이 日人 전당포 주인에게 얻어맞은 사실을 묘사하여 분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2주일 후인 8월29일자 「잡보」는 일본인이 조선사람을 칼로 쳐서 손이 상했는 데도 한국 순검은 수수방관하면서 자기네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日人 순사가 달려와서 적반하장으로 칼 맞은 한국사람을 자기네 경찰서로 연행했다고 보도했다. 현장의 군중들은 격분하여 일대 소동이 벌어졌고, 「칼질한 놈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처벌하라」고 요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賣官賣職 다반사
몇 가지 간단한 기사만으로도 나라꼴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외국인들에게 얻어맞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할 말을 못 하는 비굴한 백성이 되었을까? 썩은 관리들은 벼슬자리를 돈으로 바꾸고, 벼슬을 돈으로 산 사람들은 민중의 피를 빨아 배를 채웠기 때문이다. 장수가 나약하면 병졸은 오합지졸이 된다. 나라가 백성을 보호하지 않으니 백성은 자기 나라에서 주인 행세를 못 한 것이다.
1896년 9월17일자 독립신문 첫머리 논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새로 임명된 거창 군수 김봉수를 보고 내부대신이 『어떻게 자네가 고을 원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김봉수는 『돈 3만 냥을 주고 고을 원 벼슬을 샀다』고 대답했다가 파면되었다는 거짓말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원이 백성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는 보나마나다. 賣官賣職(매관매직)이 횡행하던 세태의 한 사례였다.
1898년 7월에는 독일영사 구린(口麟: Krien, D)이 외부대신 兪箕煥(유기환)을 폭행하는 해괴한 사건이 일어났다. 구린은 유기환을 독일영사관으로 불렀는데, 찾아간 유기환의 팔을 느닷없이 때렸다. 유기환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대답도 없이 이번에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리고 문 밖으로 밀어내면서 外部(외부: 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보낸 公文(공문) 두 장을 마당에 내팽개쳤다(독립신문, 1898년 7월2일, 4일, 6일, 7일자). 외부대신이 일개 외국 영사를 불러들이지 못하고 공관으로 찾아간 행위가 굴욕을 자초한 처사였지만,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義兵과 匪徒
1895년 俄館播遷(아관파천) 직후, 明成皇后(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을 응징하려는 義兵(의병)들이 전국에서 봉기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義兵은 「乙未義兵(을미의병)」으로 불린다. 독립신문은 바로 이 무렵에 창간되었다.
같은 때에 高宗(고종)은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궁궐에 머물지 못하고 남의 나라 보호를 받을 요량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내맡겼다.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高宗의 피신은 그의 무능과 나약함을 내외에 공개한 사건이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나라 위신은 참담할 정도로 땅에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 지방 여러 곳에서는 義兵이 들고일어나 백성들은 애국심이 살아 있음을 과시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간인은 물론이고 승려들까지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義兵이라 해서 모두가 순수한 우국충정을 지닌 애국자들은 아니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과 불량배 무리들이 있었다. 時流(시류)에 편승한 匪徒(비도), 떼도적들이 義兵을 빙자하여 횡행한 것이다.
양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흔해서 義兵과 도적의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많았다. 영국인 재정고문 브라운이 1896년에 예산을 편성하려고 보니 국가의 세입 400만원 가운데 3분의 1을 匪徒들이 도적질한 상태였다(독립신문, 1896년 9월24일 논설).
匪徒를 진압하기 위해서 官軍이 지방으로 출동하고, 高宗은 義兵을 향해서 「武力항쟁을 자제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독립신문에는 「匪徒」로 표현된 기사가 200회 이상 나타나고 있으나, 「義兵」으로 표현된 기사는 20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신문이 義兵을 匪徒로 표현한 것은 親日的인 시각이며 義兵을 모독한 것이라고 徐載弼(서재필)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匪徒와 義兵의 구분이 애매했기 때문에, 진압군이 지방에서 匪徒 또는 죄인을 포살(31건)하거나 교살(10건), 총살(7건)했다는 기사가 독립신문에는 자주 등장했다.
일본의 입체적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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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유럽신문에 실린 러日전쟁에 관한 만화. |
둘째로는 외교력을 동원한 침략이었다. 러日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의 외교노선을 표방했지만 일본은 1904년 2월 韓日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해 실질적으로 한반도를 武力으로 점거했고, 韓日협약(1905년 8월22일)을 강요해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乙巳조약(1905년 11월17일)·韓日신협약(1907년 7월24일) 등 형식상의 조약 또는 협약을 통해 한국의 國權(국권)을 탈취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맺은 태프트-가쓰라(桂太郞)협약(1905년 7월29일), 제2회 英日동맹(1905년 8월12일),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5일)과 같은 조약 또는 협약을 체결해 한반도에서의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한국을 强占(강점)할 수 있도록 列强(열강)의 동의를 얻어 냈다.
조선신보와 한성신보
셋째는 경제침략이었다. 1905년의 韓日협약은 일본인을 재정고문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日人 재정고문은 국가의 예산편성과 그 집행을 총괄해 高宗과 純宗(순종)조차 日人 재정고문의 승인을 받아야 예산을 집행할 수 있었다.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種太郞)는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惡性借款(악성차관)을 도입해 대한제국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1904년 2월부터 일본이 요구했던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경제침략의 일환이었다. 민족진영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전개해 이를 좌절시켰다. 1907년 시작된 國債(국채)보상운동은 경제적 예속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었다.
넷째는 언론침략이다. 일본은 「漢城旬報(한성순보)」가 발간되기 전인 1881년 12월부터 부산에서 「조선신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보다 한 해 먼저인 1895년 2월에는 한국어와 日語로 편집하는 「한성신보」를 창간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는 논조를 펴기 시작했다.
인천에서는 일본어 신문인 「仁川京城隔週商報(인천경성격주상보)」(1890년 1월28일)가 발간되다 제호를 「朝鮮旬報(조선순보)」(1891년 9월1일), 「조선신보」(1892년 4월5일)로 바꾸면서 발행하였다. 특히 러日전쟁 이후에는 여러 종류의 한국어 신문을 발행해 침략의 선전도구로 활용하는 한편 한국인이 발행한 신문에 대해서는 親日的인 논조를 펴도록 유도했다.
독립신문 이후 여러 종류의 민간신문이 자생적으로 창간되었다. 독립신문은 정부의 보조로 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自力(자력)으로 민간인들이 신문을 발행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裴說(배설)이 창간한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는 영국인이 누릴 수 있었던 治外法權(치외법권)을 이용해 강력한 抗日(항일) 논조를 폈다.
황성신문·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와 같은 舊韓末의 민족 언론은 일본의 침략정책에 저항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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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경 서울의 일본언론사 기자들. |
한국 문제에 냉담했던 영국
일본과 한국에 와 있던 列强의 외교관들은 대체로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필연적인 추세로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한국과 일본을 대등한 독립국가로 보고 中立的인 입장에서 兩國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일본의 입장에 서서 한국 문제를 바라보았으며, 한국 정부를 뒤로 제쳐 놓은 채 한국 문제를 일본과 협상했다.
영국 외교관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는 極東(극동)에 와 있던 영국 외교관들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영국 외무성의 외교방침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영국의 외교정책이었다. 영국은 한국에 극히 제한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영국이 볼 때 한국은 가난할 뿐 아니라 유익한 개발의 잠재력을 거의 갖지 못한 자원 貧國(빈국)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놓고 대립했을 때 영국의 외교정책은 러시아에 반대하는 노선이었다. 그것은 英日동맹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영국은 「한국은 일본의 안전과 이익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둘째는 조선 정부의 구조적인 취약성이었다. 서울에 와 있던 영국 외교관들은 한국 政界의 政派(정파) 갈등과 대신들의 잦은 교체로 협상의 상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駐韓 영국공사 조단의 눈에는 「한국의 궁정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한 각색 파당들이 싸우는 결투장이며, 그렇게 분열된 의결기관의 연출장」으로 비쳤다. 그보다 앞서 駐韓 영국대리공사로 근무했던 가빈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국 황제와 그 측근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금전상의 궁핍에 쪼들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돈을 얻으려고 하는 열망은 평소 때보다 훨씬 바빠진 미국·일본·프랑스·독일의 利權(이권) 사냥꾼과 借款(차관) 알선꾼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외부대신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외교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재량권은 거의 없었다. 조단은 한국의 외부대신이 『황실과 외국 공사관 사이에 드리워진 하나의 장식적 휘장일 뿐』인 존재로 보았다.
그 불행한 관리는 단지 황제로부터 외국의 외교관들을 격리시키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고, 對外관계의 실무 면에서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황실의 요구와 외국인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자리가 외부대신이었으며 그들은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1901~1904년까지의 4년 동안 외부대신은 무려 스무 번이 넘게 교체되었다. 같은 사람이 병을 이유로 잠시 물러나 대리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되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므로 사람이 달라진 횟수는 그보다 적었다. 그러나 교체가 심했던 1902~1904년까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02년에는 朴濟純(박제순)에서 兪箕煥(유기환·3월15일), 崔榮夏(최영하·4월29일), 유기환(5월31일), 최영하(6월21일), 유기환(7월1일), 최영하(8월13일), 趙秉式(조병식·10월17일)으로 교체되었다. 1903년에는 李道宰(이도재·1월30일), 李重夏(이중하·7월20일), 이도재(7월29일), 이중하(9월1일), 成岐運(성기운·9월15일), 이중하(9월21일), 李址鎔(이지용·12월23일)으로 1904년에는 박제순(1월25일), 조병식(3월12일), 金嘉鎭(김가진·4월1일), 李夏榮(이하영·4월19일), 尹致昊(윤치호·8월22일), 이하영(9월2일)의 순으로 정신없이 바뀌고 있다.
조단의 후임인 헨리 코번은 『외부대신들이 빈번하게 바뀌는 동기가 어떤 원칙의 주장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자리로부터 도피하려는 소망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을 잡았던 한국의 대신들이 외국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결정할 때 취했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들의 정책은 너무나 많은 복잡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동기로 결정되었고, 위기를 맞을 때마다 너무 자주 변했기 때문에 어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이를 기술하기란 불가능할 정도이다」
駐日 영국대사 맥도널드는 짧은 한국 체류 기간 중에 「한국 궁중은 괴상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음모로 가득 찼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無能한 외교로 고립 자초
이같은 영국 외교관들의 견해는 高宗과 그 측근들을 지나치게 貶毁(폄훼)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외교정책들은 대부분 列强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현상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駐韓 외국 외교관들이 편견을 가지고 한국을 바라보았다 하더라도, 한국 정부를 교섭 상대로 여기지 않고 따돌렸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한제국 정부의 無能(무능)한 시스템에 원인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전쟁에 패한 지휘관이 자신이 기른 병졸에게 敗戰(패전)의 책임을 지우고 자신은 敵國(적국)에서 생명을 부지하면서 爵位(작위)를 받아 육신의 평안을 도모한다면 그는 장교나 하급 군인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다.
高宗은 비극의 왕이었다. 그는 44년간(1863~1907) 在位(재위)하면서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先祖(선조)가 세운 나라를 잃고, 자신과 一族의 생명을 敵國에 의탁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의 즉위 이전부터 조선 왕조는 이미 국가의 재정이 피폐해졌고, 백성의 기백은 꺾였다. 누적된 秕政(비정)이 高宗 시대에 와서 外勢의 침략과 맞물려 회복불능한 상태가 되어 나라가 망했다. 그러고 보면 高宗도 역사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가장 무겁고도 최종적인 책임은 역시 高宗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