卜鉅一 경제평론가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소설 「목성잠언집」, 「캠프 세네카의 기자촌」, 시집 「오장원의 가을」, 「나이 들어 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평론집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등 펴냄.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소설 「목성잠언집」, 「캠프 세네카의 기자촌」, 시집 「오장원의 가을」, 「나이 들어 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평론집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등 펴냄.
두 매혹적인 단어의 結合
「균형」이라는 말보다 우리에게 매혹적인 말도 드물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나름으로 균형을 이루었으므로 존재한다. 균형을 잃으면, 물체들은 쓰러지고 생명체들은 병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늘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다.
무엇에 균형이라는 말이 붙으면, 우리는 이내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의 주장을 치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균형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균형이란 말을 자주 앞에 붙이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는 「개발」이다. 「개발」이라는 말은 자체로 매혹적이다. 누군들 자신이, 자신의 고향이, 자신의 사회가 개발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렇게 매혹적인 두 말이 결합한 「균형 개발」은 물론 더욱 매혹적이다. 그래서 이념이나 정책에 「균형 개발」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은은한 후광이 어리고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가 생긴다.
이런 현상은 물론 세계적이지만, 우리 사회에선 유난히 드세다. 특히 現 정권이 들어선 뒤엔, 「균형 개발」은 성스러운 목표가 돼서 그 논거를 따지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논거 없이 믿는 것을 우리는 迷信(미신)이라 부른다. 균형 개발은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미신이라 할 수 있다. 미신이 늘 그러하듯, 균형 개발이라는 미신도 우리 사회에 큰 害(해)를 끼친다.
균형 개발이라는 미신이 처음 드러낸 모습은 「산업들의 균형된 개발」이었다. 즉 모든 산업들이 엇비슷한 성장률을 보이는 상태를 사회 성장의 이상으로 삼았다. 예컨대, 제조업과 서비스 산업이 비슷한 속도로 성장하고, 농업과 공업이 비슷한 성장률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주장은 한때 세계적으로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재앙을 부르는 정책임이 드러났다.
균형 개발의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암묵적으로 하는 가정이 틀렸다는 점이다. 한 사회의 산업들이 균형 성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떤 경제가 특정 시점에 지닌 구조가, 실제로는 흔히 정책 수립 시점의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런 가정을 정당화하는 논거는 전혀 없다. 특정 시점의 산업 구조는 그 경제의 역사적 산물이며 그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非논리적이다.
산업 균형 개발론자들의 빗나간 처방
실제로 경제가 발전하면, 산업들의 성장 속도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비교우위가 있는 산업들이 빠르게 발전하고, 그것이 없거나 수요가 줄어든 산업들은 점점 위축되게 마련이다.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선 1차 산업의 비중이 낮아지고, 2차 산업이 빠르게 발전한다. 경제가 원숙해지면, 1차 산업의 비중은 더욱 낮아지고, 2차 산업의 발전도 느려진다. 대신 3차 산업의 비중이 부쩍 커진다. 이런 현상은 모든 발전하는 경제들이 보인다. 균형 성장이라는 이론이나 균형 개발이라는 정책이 들어설 틈이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장」, 「발전」 또는 「개발」이라 부르는 현상들은 거의 언제나 균형을 깨뜨리는 과정들이다. 생명체들의 발현이나 성장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태아는 단숨에 성체의 모습을 갖추어 모든 부분들이 고루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 부분들이 먼저 생기고 다른 부분들이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 아기가 막 태어나면, 정보 처리 기능이 시급하므로 두뇌가 빠르게 자란다. 사춘기에 이르면, 비로소 제2차 성징이 나타난다. 이 과정 어디에 균형 성장이 적용되는가?
역사적으로, 균형 개발 전략은 개발도상국들의 수출 능력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서 나왔다. 랑나르 넉시를 비롯한 1950년대의 비관론자들은 개발도상국들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로 하는 수준의 수출을 개발된 나라들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개발도상국들은 눈길을 안으로 돌려 보호무역의 울타리를 둘러치고 수입 대체를 통해 모든 부문들을 한꺼번에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럴듯한 주장이었고, 많은 나라들이 실제로 그것을 골랐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東아시아의 몇 나라들은 외부지향적 정책을 골랐다. 1970년대 이후 외부지향적 정책이 크게 성공해서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左派 경제학자들의 균형 개발 이론은 영향력을 잃었고, 이제 그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냥 사라지기엔 「균형 개발」이란 말은 너무 매혹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늘 새로운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근년에 우리나라에선 「지역적 균형 개발」이란 모습으로 부활했다. 지역들 사이의 발전 격차를 줄여서 지역적으로 고루 발전된 사회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너무나 매혹적인 주장
균형 개발이 워낙 매혹적인 주장이므로, 「지역적 균형 개발」은 우리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논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산업적 균형 개발」은 자신을 떠받칠 최소한의 논거는 있었다. 어떤 산업들이 너무 뒤지면, 다른 산업들의 생산성을 낮출 것이고, 한두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경제가 외부의 충격에 아주 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있다.
그러나 유기적으로 통합된 한 나라의 경제에서 지역적으로 균등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은 전혀 조리가 서지 않는다. 어차피 인위적 구분인 市·道 단위 행정구역들에 대해서 소득의 산술적 평균을 비교해서 그 격차를 줄이려는 일은 논리적으로 뜻이 없고 현실적으로 아주 해롭다.
소득의 비교에서 뜻을 지니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 살아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만일 現 정권이 추진하는 방식으로 수도를 나누어서 일부를 충청도로 옮기고 公기업들을 여러 市·道로 분산한다면, 수도권 밖의 사람들은 이득을 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런 移轉(이전)에서 지역 주민들이 볼 이득은 아주 작고, 나라 전체가 볼 손실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문제는 수도의 실질적 분할과 公기업들의 분산으로 지역 주민들이 보는 이득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주민들에게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이다.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득을 볼 수 있는 계기는 거의 없다.
「모든 시민들이 최소한의 소득을 얻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는 길은 사회안전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전해 주는 방안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방안을 실천하는 데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목표가 가난한 시민들의 소득을 최소한의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라면, 「지역적 균형 개발」은 실효가 전혀 없이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며, 사회 안전망의 구축을 방해할 따름이다.
「지역적 균형 개발」이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수도의 실질적 분할이나 公기업의 지방 분산이 부질없는 일들이라는 점은 문명의 발생과 도시의 발전을 살피면 이내 드러난다. 문명과 도시는 동시에 나온 현상들이며 실질적으로 거의 겹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의 주요 문명들인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 그리고 중국의 문명들은 모두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교통이 편리하고 배후지가 넓어서 교역이 번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협력과 분업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명과 도시는 함께 나서 함께 자랐다.
도시 집적의 효율성
만일 고대에 절대 권력을 쥔 자가 있어서 「지역적 균형 개발」을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빌론이나 제리코나 모헨조 다로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모두 소개시켜 인구 밀도가 고르게 했다면, 과연 문명이 자라날 수 있었을까?
도시의 기능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정보가 한데 모이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도시는 「정보의 망」에서 허브(중심) 노릇을 한다. 사회가 본질적으로 정보 처리 기구이므로, 도시는 사회의 중심이 된다. 도시가 발전하지 않고도 높은 수준에 이른 사회가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 발전은 도시와 시골의 불균형을 낳게 마련이다. 도시는 시골로부터 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 시골의 잉여 인력을 도시가 흡수함으로써, 시골은 가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로 다시 사람과 사회적 기능과 정보가 집중된다. 그것은 효율성이 강요하는 과정으로 어느 사회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도시가 발전하고 중심적 대도시가 생기는 것이 예외 없는 역사의 모습이었다. 「지역적 균형 개발」은 몽상가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한 허구다.
도시들은 저마다 독특한 역사를 지녔고 그 역사에 의해 다듬어진 모습을 한다. 특히 한 나라의 수도는 역사의 영향이 뚜렷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수도는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서울도 그런 도시다. 서울에 집중된 기능과 정보망은 나름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나누면, 헤아리기 어려운 갖가지 부작용들과 非효율이 나온다.
아울러 그런 수도의 실질적 분할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든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울이 영구적인 수도라는 근본적 가정 아래 자신들의 삶을 꾸려 왔다. 이제 서울이 수도 기능의 상당 부분을 잃으면, 그런 근본적 가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수많은 개인들이 새로운 조건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적응은 눈에 잘 띄지 않고 통계에 잡히지 않지만,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다.
公기업의 분산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公기업들은 그냥 옮길 수 있는 레고 조각들이 아니다. 나름으로 사회 환경에 맞게 진화해 온 유기체다. 그래서 현재의 모습은 여러 요소들이 서로 균형을 이룬 데서 나왔다.
그런 기업들을 하루 아침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정치적 결정에 따라 다른 데로 옮긴다면, 낭비와 非효율은 클 수밖에 없다. 종업원들의 삶에 닥친 어려움도 당연히 클 터이다.
미신이 깨지지 않는 이유
現 정권이 추진하는 수도의 실질적 분할과 公기업들의 지방 이전은 애초 정치적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다.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 시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역적 균형 개발」이라는 매혹적 주장으로 떠받쳐지지 않았다면, 시민들의 지지가 그리 높을 수는 없었을 터이다.
「지역적 균형 개발」은 미신이다. 안타깝게도, 미신은 미신이기 때문에 좀처럼 깨뜨릴 수 없다. 논거를 가진 믿음은, 그 논거가 틀렸음이 증명되면 이내 무너진다. 미신은 애초에 그런 논거를 지니지 않았고 그저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번창한다. 그래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깨뜨리는 일은 무척 힘들다. 그것이 미신이 지닌 강점이다.
우리는 「지역적 균형 개발」이라는 미신을 깨뜨리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미신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해야 한다. 그냥 물러나기엔 그 害가 너무 크다.●
무엇에 균형이라는 말이 붙으면, 우리는 이내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의 주장을 치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균형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균형이란 말을 자주 앞에 붙이는 개념들 가운데 하나는 「개발」이다. 「개발」이라는 말은 자체로 매혹적이다. 누군들 자신이, 자신의 고향이, 자신의 사회가 개발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렇게 매혹적인 두 말이 결합한 「균형 개발」은 물론 더욱 매혹적이다. 그래서 이념이나 정책에 「균형 개발」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은은한 후광이 어리고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가 생긴다.
이런 현상은 물론 세계적이지만, 우리 사회에선 유난히 드세다. 특히 現 정권이 들어선 뒤엔, 「균형 개발」은 성스러운 목표가 돼서 그 논거를 따지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논거 없이 믿는 것을 우리는 迷信(미신)이라 부른다. 균형 개발은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미신이라 할 수 있다. 미신이 늘 그러하듯, 균형 개발이라는 미신도 우리 사회에 큰 害(해)를 끼친다.
균형 개발이라는 미신이 처음 드러낸 모습은 「산업들의 균형된 개발」이었다. 즉 모든 산업들이 엇비슷한 성장률을 보이는 상태를 사회 성장의 이상으로 삼았다. 예컨대, 제조업과 서비스 산업이 비슷한 속도로 성장하고, 농업과 공업이 비슷한 성장률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주장은 한때 세계적으로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재앙을 부르는 정책임이 드러났다.
균형 개발의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암묵적으로 하는 가정이 틀렸다는 점이다. 한 사회의 산업들이 균형 성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떤 경제가 특정 시점에 지닌 구조가, 실제로는 흔히 정책 수립 시점의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런 가정을 정당화하는 논거는 전혀 없다. 특정 시점의 산업 구조는 그 경제의 역사적 산물이며 그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非논리적이다.
산업 균형 개발론자들의 빗나간 처방 실제로 경제가 발전하면, 산업들의 성장 속도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비교우위가 있는 산업들이 빠르게 발전하고, 그것이 없거나 수요가 줄어든 산업들은 점점 위축되게 마련이다.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선 1차 산업의 비중이 낮아지고, 2차 산업이 빠르게 발전한다. 경제가 원숙해지면, 1차 산업의 비중은 더욱 낮아지고, 2차 산업의 발전도 느려진다. 대신 3차 산업의 비중이 부쩍 커진다. 이런 현상은 모든 발전하는 경제들이 보인다. 균형 성장이라는 이론이나 균형 개발이라는 정책이 들어설 틈이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장」, 「발전」 또는 「개발」이라 부르는 현상들은 거의 언제나 균형을 깨뜨리는 과정들이다. 생명체들의 발현이나 성장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태아는 단숨에 성체의 모습을 갖추어 모든 부분들이 고루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 부분들이 먼저 생기고 다른 부분들이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 아기가 막 태어나면, 정보 처리 기능이 시급하므로 두뇌가 빠르게 자란다. 사춘기에 이르면, 비로소 제2차 성징이 나타난다. 이 과정 어디에 균형 성장이 적용되는가?
역사적으로, 균형 개발 전략은 개발도상국들의 수출 능력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서 나왔다. 랑나르 넉시를 비롯한 1950년대의 비관론자들은 개발도상국들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로 하는 수준의 수출을 개발된 나라들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개발도상국들은 눈길을 안으로 돌려 보호무역의 울타리를 둘러치고 수입 대체를 통해 모든 부문들을 한꺼번에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럴듯한 주장이었고, 많은 나라들이 실제로 그것을 골랐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東아시아의 몇 나라들은 외부지향적 정책을 골랐다. 1970년대 이후 외부지향적 정책이 크게 성공해서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左派 경제학자들의 균형 개발 이론은 영향력을 잃었고, 이제 그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냥 사라지기엔 「균형 개발」이란 말은 너무 매혹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늘 새로운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근년에 우리나라에선 「지역적 균형 개발」이란 모습으로 부활했다. 지역들 사이의 발전 격차를 줄여서 지역적으로 고루 발전된 사회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너무나 매혹적인 주장균형 개발이 워낙 매혹적인 주장이므로, 「지역적 균형 개발」은 우리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논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산업적 균형 개발」은 자신을 떠받칠 최소한의 논거는 있었다. 어떤 산업들이 너무 뒤지면, 다른 산업들의 생산성을 낮출 것이고, 한두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경제가 외부의 충격에 아주 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있다.
그러나 유기적으로 통합된 한 나라의 경제에서 지역적으로 균등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은 전혀 조리가 서지 않는다. 어차피 인위적 구분인 市·道 단위 행정구역들에 대해서 소득의 산술적 평균을 비교해서 그 격차를 줄이려는 일은 논리적으로 뜻이 없고 현실적으로 아주 해롭다.
소득의 비교에서 뜻을 지니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 살아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만일 現 정권이 추진하는 방식으로 수도를 나누어서 일부를 충청도로 옮기고 公기업들을 여러 市·道로 분산한다면, 수도권 밖의 사람들은 이득을 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런 移轉(이전)에서 지역 주민들이 볼 이득은 아주 작고, 나라 전체가 볼 손실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문제는 수도의 실질적 분할과 公기업들의 분산으로 지역 주민들이 보는 이득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주민들에게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이다.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득을 볼 수 있는 계기는 거의 없다.
「모든 시민들이 최소한의 소득을 얻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는 길은 사회안전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전해 주는 방안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방안을 실천하는 데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목표가 가난한 시민들의 소득을 최소한의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라면, 「지역적 균형 개발」은 실효가 전혀 없이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며, 사회 안전망의 구축을 방해할 따름이다.
「지역적 균형 개발」이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수도의 실질적 분할이나 公기업의 지방 분산이 부질없는 일들이라는 점은 문명의 발생과 도시의 발전을 살피면 이내 드러난다. 문명과 도시는 동시에 나온 현상들이며 실질적으로 거의 겹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의 주요 문명들인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 그리고 중국의 문명들은 모두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교통이 편리하고 배후지가 넓어서 교역이 번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협력과 분업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명과 도시는 함께 나서 함께 자랐다.
도시 집적의 효율성만일 고대에 절대 권력을 쥔 자가 있어서 「지역적 균형 개발」을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빌론이나 제리코나 모헨조 다로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모두 소개시켜 인구 밀도가 고르게 했다면, 과연 문명이 자라날 수 있었을까?
도시의 기능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정보가 한데 모이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도시는 「정보의 망」에서 허브(중심) 노릇을 한다. 사회가 본질적으로 정보 처리 기구이므로, 도시는 사회의 중심이 된다. 도시가 발전하지 않고도 높은 수준에 이른 사회가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 발전은 도시와 시골의 불균형을 낳게 마련이다. 도시는 시골로부터 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 시골의 잉여 인력을 도시가 흡수함으로써, 시골은 가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로 다시 사람과 사회적 기능과 정보가 집중된다. 그것은 효율성이 강요하는 과정으로 어느 사회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도시가 발전하고 중심적 대도시가 생기는 것이 예외 없는 역사의 모습이었다. 「지역적 균형 개발」은 몽상가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한 허구다.
도시들은 저마다 독특한 역사를 지녔고 그 역사에 의해 다듬어진 모습을 한다. 특히 한 나라의 수도는 역사의 영향이 뚜렷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수도는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서울도 그런 도시다. 서울에 집중된 기능과 정보망은 나름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나누면, 헤아리기 어려운 갖가지 부작용들과 非효율이 나온다.
아울러 그런 수도의 실질적 분할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든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울이 영구적인 수도라는 근본적 가정 아래 자신들의 삶을 꾸려 왔다. 이제 서울이 수도 기능의 상당 부분을 잃으면, 그런 근본적 가정이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수많은 개인들이 새로운 조건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적응은 눈에 잘 띄지 않고 통계에 잡히지 않지만,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다.
公기업의 분산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公기업들은 그냥 옮길 수 있는 레고 조각들이 아니다. 나름으로 사회 환경에 맞게 진화해 온 유기체다. 그래서 현재의 모습은 여러 요소들이 서로 균형을 이룬 데서 나왔다.
그런 기업들을 하루 아침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정치적 결정에 따라 다른 데로 옮긴다면, 낭비와 非효율은 클 수밖에 없다. 종업원들의 삶에 닥친 어려움도 당연히 클 터이다.
미신이 깨지지 않는 이유現 정권이 추진하는 수도의 실질적 분할과 公기업들의 지방 이전은 애초 정치적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다.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 시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역적 균형 개발」이라는 매혹적 주장으로 떠받쳐지지 않았다면, 시민들의 지지가 그리 높을 수는 없었을 터이다.
「지역적 균형 개발」은 미신이다. 안타깝게도, 미신은 미신이기 때문에 좀처럼 깨뜨릴 수 없다. 논거를 가진 믿음은, 그 논거가 틀렸음이 증명되면 이내 무너진다. 미신은 애초에 그런 논거를 지니지 않았고 그저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번창한다. 그래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깨뜨리는 일은 무척 힘들다. 그것이 미신이 지닌 강점이다.
우리는 「지역적 균형 개발」이라는 미신을 깨뜨리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미신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해야 한다. 그냥 물러나기엔 그 害가 너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