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注>
이 글은 지난 9월 일본 외무성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온 필자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前 首相(전 수상)을 만나 나눈 대화를 나카소네씨의 양해하에 인터뷰 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1918년 다카사키시(高崎市)에서 태어난 나카소네 前 수상은 科技廳(과기청) 장관, 防衛廳(방위청) 장관, 行政管理廳(행정관리청) 장관, 通産相(통산상), 自民黨(자민당) 간사장·총무회장 등을 거쳐 1982년부터 1987년까지 首相을 지냈으며 현재도 衆議員(중의원)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글은 지난 9월 일본 외무성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온 필자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前 首相(전 수상)을 만나 나눈 대화를 나카소네씨의 양해하에 인터뷰 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1918년 다카사키시(高崎市)에서 태어난 나카소네 前 수상은 科技廳(과기청) 장관, 防衛廳(방위청) 장관, 行政管理廳(행정관리청) 장관, 通産相(통산상), 自民黨(자민당) 간사장·총무회장 등을 거쳐 1982년부터 1987년까지 首相을 지냈으며 현재도 衆議員(중의원)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政治에 후회는 없다』
나카소네 前 수상은 일본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이후 가장 비중 있는 수상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戰後(전후) 총결산 작업과 행정개혁을 밀고 나갔고, 美日(미일) 사이에서는 흔치 않았던 頂上(정상)유대를 통해 양국 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구축했던 일본의 외교안보 설계사였다. 또한 그는 미국의 레이건 前 대통령, 영국의 대처 前 수상과 더불어 세계 新(신)보수주의의 한 축을 이룸으로써 일본의 국가적 위상을 한 단계 높여놓은 지도자로도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지난 9월24일 오후 도쿄 중심부에 있는 국회의사당 옆 砂防회관 內 그의 사무실에서 이 日本의 巨人(거인)을 만났다.
나카소네 前 총리의 올해 나이는 만 81세.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언론을 통해 느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이 얘기로 대화를 시작하자 그는 『일본 정치인들 가운데는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받으며 웃었다.
─총리의 아버님께서는 목재상과 제재공장을 경영하면서 산림업도 겸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원래 장인정신과 家業(가업) 승계 정신이 강해서 남자의 경우 家業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家業과 거리가 먼 정치에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까?
『제게는 형님이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家業 승계는 장남인 형에게 맡기시고 차남인 저에게는 공부 많이 배워 다른 生(생)을 살라고 해서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참 오랫동안 정치를 해 오셨는데, 정치 때문에 인생의 귀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까?
『처음부터 정치인이 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정치 이외의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후회는 없습니다』
나카소네 前 수상은 이 부분에 대해 상당히 자신감에 찬 어투로, 전혀 주저없이 답변했다. 그는 평생을 정치에 몰두해 온 것에 대해 정말 조금도 후회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德川家康의 康과 弘法大師의 弘
─어머님께서는 쌀 곳간이 네 채나 있었다는 안나카(安中)의 豪農(호농)에다 豪商(호상)을 겸한 나카무라가(中村家)의 맏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서구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미션 스쿨인 교아이(共愛) 여학교를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 어렸을 때에 자주 목욕탕에 데리고 들어가 찬송가를 가르쳐 주곤 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지금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종교를 갖고 계시며, 기독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찬송가는 지금도 가끔 부릅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성경은 자주 읽습니다.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거나 특정 종파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넓은 의미에서의 佛敎(불교) 신도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佛敎 哲學(철학)에 대해선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 들어 佛敎 宇宙論(우주론)에 관한 학설은 무한정 확장중에 있습니다.
원래 인간의 DNA란 유전인자는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전해 받아 내려온 것인데, 인간의 조상을 계속 따지고 올라가면 우리 인간의 DNA는 결국 원숭이로부터 전달받아 자손에게 전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은 무한한 길로 들어선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도 결국 佛敎 哲學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죠』
─야스히로(康弘)라는 이름은 아버지께서 다카사키 신사(高崎神社)의 神官(신관)인 다카이 도이치(高井東一)씨에게 작명을 의뢰하여 그가 제시한 몇 개의 이름 중에서 하나 고른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후 「야스히로」라는 이름에 대해 누가 물으면 선생께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야스(康)」와 고보 대사(弘法大師)의 「고(弘·訓讀은 「히로」)」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보 大師를 평소에 존경하십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戰國시대를 끝낸 후, 3백년간이나 계속된 평화의 시대를 구축한 인물입니다. 고보 大師는 탁월한 지식을 갖춘 승려로서 治水(치수)공사를 비롯, 많은 병원도 설립한 실천가이자 행동인이었습니다』
─이제 평생 業(업)으로 해오신 정치에 관한 사항을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평소에 갖고 계신 선생님의 정치적 신념이랄까 철학적 아이덴티티는 무엇입니까? 선생님은 정치적 자유주의자입니까, 아니면 국가주의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일본 민족주의자에 가깝습니까.
『말씀하신 세 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본인만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평소 주장해 오신 인격적 문화 아이덴티티주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문화적 아이덴티티란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인간은 원래 문화적 존재입니다. 문화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문화와 문화 사이에는 차이성도 있고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감안해서 상호간의 문화적 독자성을 존중하자는 입장입니다. 이제 세계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고, 지구촌은 국가간의 장벽이 무너지는, 국경 없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21세기 사회는 국경 없는 사회, 인터넷 사회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인 만큼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존중하는 사회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EU(유럽연합) 통합은 실현되었고, 유럽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일과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등 EU 국가들은 각기 상호 국가간의 개성을 서로 존중해 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각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지켜 나가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네이션(Nation)」이란 말의 기원도 국민이란 말에 어원의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 말 자체가 엄격히 말해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국경 없는 사회가 되면 그만큼 아이덴티티를 고수하기가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어려워지겠죠. 그렇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全세계가 미국문화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로만 산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쓸쓸하겠습니까』
三緣主義
─오랫동안 현실정치를 해온 분으로서 앞으로 정치를 해나갈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습니까.
『나의 정치철학은 三緣主義(삼연주의)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 三緣主義는 佛敎에서 말하는 因緣主義(인연주의)로서 結緣(결연), 尊緣(존연), 隨緣(수연)을 일컫는 말입니다.
結緣이란 사람이 세상에 나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과 만나 緣을 맺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람은 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부모를 만나게 되어 부모 자식으로서의 緣을 맺게 되고, 또 어떤 사람과 만나 결혼하여 부부가 되기도 하고 친구도 사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매우 소중히 지키고 간직해 나가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尊緣이란 因緣을 매우 귀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 인생은 길고 무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인생을 진정 이해하게 되고 진실로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1백여명 정도밖에 안됩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사귀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처럼 알게 된 사람들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구축하고 마지막에 다정하게 彼岸(피안)으로 가는 인생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隨緣이란, 사람은 인생에서 반드시 스승이 필요함을 말한 것입니다. 그 스승이 예수일 수도, 부처일 수도, 공자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유교 등 중에서 스승을 갖고 가르침을 받아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게 됨을 말합니다. 원래 사람은 태어난 그 자체로는 벌레 같은 하찮은 존재나 다름없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카소네 수상은 이 말을 하던 도중에 직접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첩을 들고와 맨 뒷장을 펼쳐 보였다. 結緣, 尊緣, 隨緣이라는 글자들이 검정 사인펜으로 짙게 쓰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귀감이 되는 내용이나 자신이 참고로 해야 할 교훈들은 항상 수첩에 적고 이 말뜻을 곰곰 되새긴다고 했다.
『결국 세상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의 좋은 사귐과 관계가 세상의 전부』라고 그는 말을 맺었다.
필자가 『한국에도 三緣主義가 있다. 그러나 그런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地緣(지연), 血緣(혈연), 學緣(학연) 등을 따지는, 오용된 因緣主義여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질 못하고 오직 같은 학교, 같은 지역 그리고 같은 출신성분 등에 따라 사람이 등용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이런 三緣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작동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 정치사회적 구조나 토대를 만드는 쪽으로, 시스템 자체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한 후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三緣主義의 폐해성을 하나의 개혁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자 나카소네 前수상은 빙그레 웃었다.
『美·日·中이 북한에 등소평式 개혁 하도록 요구해야』
─「정치와 인생」이란 회고록을 보면 선생께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피력하면서 일본의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 메이지 유신과 맥아더 개혁에 이은 「제3의 開國(개국)」을 향해 일대 개혁이 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 이것을 단행하지 않으면 21세기 일본의 번영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가냘픈 꽃 일본이란 말이 있지만, 과연 그 말대로 극동에서 고립되려 하고 있는 일본의 앞길은 살얼음판을 밟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 일본이 일대 개혁을 해야 한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느 부분부터 개혁이 시작되고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東西獨(동서독)이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냉전이 종식된 바로 그 시점에 일본에서는 장기집권의 자민당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때 일본 정치에도 개혁시기가 왔다고 봤습니다. 그 동안 경제에 버블현상이 심하여 거품경제의 붕괴로 일본 경제가 곳곳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듯이 그동안 정치도 버블현상이 일어나 힘 약한 내각이 이어져 왔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진짜 실력 이상으로 거품과 허세가 심했던 사회가 붕괴되자 정치윤리의 기강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고, 학급이 붕괴되는가 하면 교사들이 학생들을 통제 못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정치는 이제부터 자민당과 자유당 그리고 공명당이 힘을 합쳐서 힘 강한 정치를 추구하려 하고 있고, 경제 또한 은행과 금융개혁을 촉진함으로써 대체로 회복세를 보이면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회개혁인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개혁이라고 봅니다』
─선생께서는 지난 8월22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紙(지)에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한 정상회담을 제안하시면서, 미국, 중국, 일본 등 3국이 북한에 대해 鄧小平(등소평)식 경제개혁을 채택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밝히신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제안의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나의 이런 주장은 일본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 한국이 힘을 합쳐 북한의 문호를 개방하자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사회로 북한이 나오도록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국제공동체 사회에 합류하도록 해야 하며, 북한이 점진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갈구한다면 위의 국가들은 북한을 돕기 위한 보다 나은 협력을 제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본인의 이러한 제안은 기본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포용정책과 脈(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을 채택할 경우엔 중국도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지금의 북한은 쇄국정책으로 체제와 세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신들이 문호를 개방하여 외부의 정보 유입이 자유스러워지면 체제 유지가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쇄국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일부러 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북한으로 하여금 문호를 개방하게 하여 북한이 창문을 열고 이에 따라 정보가 북한에 들어가 북한의 체제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위의 4개국이 지원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북한 경제의 정상회복 없이는 한국도 통일이 어렵습니다. 東西獨의 경우를 보더라도 西獨과 東獨이 한 나라가 되었어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을 한국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평화통일은 중요하지만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통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의 조성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런 의견이 있다는 것을 北에게 알릴 필요가 있어서였습니다. 또 북한이 이러한 주장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주장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紙에도 나왔지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紙에도 나왔습니다』
北韓을 국제사회에 참여시켜야
나카소네 前 수상은 설명을 끝내자마자 두 신문에 게재됐던 기고문의 복사본을 건네주면서, 최근 동북아시아 및 북한에 대한 자신의 정리된 생각과 시각이라고 말했다. 이 기고문의 요지를 소개한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북한의 核(핵) 개발 의혹 및 대포동 2호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응하여 북한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견해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자민당과 자유당 그리고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은 일본으로부터 북한으로의 송금을 중단시키는 법안을 마련 중에 있다. 이들 강경론자들은 자유세계가 북한에 대해 연약한 협상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핵무기 개발을 볼모로 한 북한의 조작극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본인은 북한이 취했던 태도를 독립을 과시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하여 북한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적도 있었으나, 이같은 상황이 지속될 수는 없다. 만일 북한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하기로 결정한다면, 국제에너지기구(IAEA)와 한국에너지개발기구(KEDO)는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여 추가적 경제제재 여부를 논의토록 해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경제적 고립을 심화시킬 각오를 하고 북한의 외교적 협박을 거부하는 의지를 결집하는 한편, 북한이 여타 세계와 협력하고 개방을 한다면 북한의 성공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결의를 역시 북한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북한은 피폐된 경제하에서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폐쇄적인 군사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북한 지도자들이 개방정책과 자유화는 주민들을 대외정보에 노출시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발전이 없는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지도자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민을 극도로 통제하고, 국가를 폐쇄하며,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북한의 비참함을 완화시키는 길은 오직 북한 정부에게 고립정책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에 참여토록 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 일본, 미국은 북한이 鄧小平 스타일의 경제개혁을 택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북한이 조금씩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모색한다면, 美, 日, 中 3국도 북한을 돕기 위해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문제를 책임 있게 해결하는 길은 남북한 양 당사자에게 달린 일이다. 북한이 남한과 대등한 정치 경제적 지위를 달성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金大中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넓은 도량과 인내심에 입각한 정책을 펴고 있음을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하려면 남북한 공동 非핵화 선언을 재확인하고 상호 核사찰의 이행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한 정상회담이 필요하다>
페리 보고서의 두 가지 불만
─최근에 발표된 페리 보고서를 보셨습니까? 일본의 입장에서 페리 보고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 감상으로는 페리 보고서가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첫째 북한의 군사력으로 인한 위험성과 전략적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고, 둘째 지금까지 북한이 스스로 만들어온 위기 카드 정책에 약간 굴복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이런 약점을 갖고 있는 보고서란 것을 자각하면서 이용해 나가면 됩니다. 또한 美 의회에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지금 현실적으론 이 길밖에 없기 때문에 보고서의 전체 방향에는 대체로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나카소네 前 수상은 그동안 북한이 취해온 벼랑 끝 전략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이 이러한 북한의 전략에 상당히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앞으로 21세기의 韓日(한일)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 韓日 관계인가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21세기는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20세기와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우선 21세기는 미래의 세기로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래사회는 인터넷과 같은 정보활용 수단이 급속히 높아짐에 따라 全세계로의 정보 보급이 매우 빨라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는 지난 20세기를 「전화 시민사회」라고 부른다면, 다가올 21세기는 「인터넷 시민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21세기에는 완전히 未知(미지)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양국이 새로운 韓日관계를 생각해 나가야만 합니다.
韓日 두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며 인권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가치관을 지향하고 추구해 나간다는 점에서도 양국은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이상의 가치관에 대해 완전한 의견일치를 갖고 있는 나라는 韓日 두 나라뿐입니다. 저는 다가올 21세기에는 일본과 한국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여 새로운 태평양 시대를 이끌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두 나라는 미래에 대한 공동의 청사진과 비전을 만들어 이를 공동으로 실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행은 어디까지나 일본과 한국이 서로의 아이덴티티의 확립을 존중해주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솔한 金大中 대통령에 감명
─작년 10월 金大中 대통령의 訪日(방일)은 양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金대통령의 외교능력에 대해 칭찬하고 있고, 많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金대통령께서는 訪日하셨을 때 여러 발언을 통해 매우 진솔하게, 숨김 없이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 金대통령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서 감격한 일본인들은 「이렇다면 한국을 21세기의 파트너로 삼고 같이 가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金대통령 訪日의 가장 큰 성과는 이제까지 양국 관계에서 불확실하고 불분명했던 것들을 확실하게 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韓日 양국은 서로가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제휴할 것은 제휴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다면, 앞으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문제는 정치인들의 역할이자 사명입니다』
─새로운 21세기의 日中(일중) 관계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대립과 갈등의 관계로 보십니까 아니면 안정과 협력의 관계로 보십니까 ? 지역 覇權(패권)을 놓고 각축하는 관계가 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일본과 중국은 양국 상호간에 지역 覇權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覇權主義(패권주의)는 이제 냉전의 유물일 뿐입니다. 覇權主義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1세기와 같은 인터넷 사회에서는 覇權主義라는 용어 자체가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향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서로 제휴하고 연대해 나가는 것은 동아시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중국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예상치 않았던 분열적인 요인들이 크게 돌출할 것으로 보십니까? 중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듣고 싶습니다.
『미래 중국의 장래를 예측하는 데는 미지수 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경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이 미래라는 새로운 세기를 자각하면서 준비하고 있듯이, 중국도 새 시대를 자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중국은 더욱 민주화될 것으로 보이며, 생활수준도 지금보다는 향상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같은 가치관 共有한 韓日
─21세기의 동북아 질서는 지금보다는 훨씬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간의 이해관계도 그만큼 복잡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한국과 같은 나라는 양국 사이에서 어떤 외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가장 國益(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 생각한 끝에 웃으면서) 그 문제는 한국 스스로 결정할 사항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가치관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국가는 일본과 한국뿐입니다. 양국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나라는 모두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韓日 양국만큼 동아시아에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나라, 똑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 국가간에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묻고 싶은 부분이 아직도 산더미 같지만 … 끝으로 한국의 개혁정책에 대한 평가를 한 마디 듣고 싶습니다.
『현재 金대통령께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개혁정책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정치적 리더십으로 볼 때 金대통령은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 나타난 정치지도자 중에서도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
그동안 필자는 脫(탈)냉전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질서 문제를 비롯하여 韓日 및 韓中 그리고 美日과 日中 관계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져 왔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과 일본의 문제였으며, 21세기에는 日中간의 관계가 어떠한 형태로 발전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담을 마친 후에 「좀더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카소네 前수상과의 대화에서 동북아 질서나 중국의 장래 문제, 그리고 21세기 일본의 나아갈 방향과 함께 특히 북한 核과 미사일, 정치체제 등에 대한 그의 識見(식견)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주변 강대국가 중 한 축인 일본이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게 된 점은 큰 소득으로 생각됐다.
나카소네 前 수상과의 대화 시간은 약 2시간 30분쯤 지속됐지만, 좁은 개인 사무실로 끊임없이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대화는 여러 차례 단절됐다. 그는 올해 81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놀라운 체력을 갖고 있었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 건강이 거의 일치할 만큼 빈틈이 없어 보였다.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고, 정리된 생각과 관점이 분명했으며, 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명확히 구별하는 신중함과 노련미도 갖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30대 초반의 젊은 비서관으로부터 한 장의 메모 쪽지가 전달되었다. 메모 쪽지를 펼쳐 본 나카소네 수상의 얼굴엔 금세 긴장감이 감돌았다. 뭔가 다급한 일이 일어났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일본 衆議員(중의원) 중진 몇 사람이 나카소네 前 수상의 개인 사무실로 급히 들이닥친 것이다. 오부치 수상의 2기 내각개편과 관련하여 인사문제를 상의하러 왔음을 나중에 알았다.
최근 일본 정계에서는 다케시타 前 수상의 건강이 좋지 않아 나카소네 前 수상의 막후 역할이 커져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자민당과 자유당 그리고 공명당의 3者 연립정권이 형성되는 배경에는 나카소네 前 수상의 막후 역할이 매우 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처럼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활발한 현역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중국의 鄧小平을 연상케 했다.
그와 나눴던 대화 중 인상깊게 남는 것 중 하나는 아직도 자신이 지은 하이구(일본의 短詩)를 가끔씩 영어로 번역해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와 만나기 바로 직전에도 자신이 지은 詩句(시구) 한 구절을 또 영어로 번역해 보았다면서 작은 메모 쪽지를 보여 줬다. 필자는 순간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고령에도 詩心(시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를 영어로 번역할 만큼 아직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 방문 때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란 유행가를 한국말로 부르고 싶어 한국어를 직접 배운 적이 있다는 말도 했다.
「자기 인생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 잠시 접견실에서 앉아 기다리면서 나카소네 前 수상이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둘러보았다. 필자는 이 사진들을 통해 과거 그의 외교적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그리고 교류의 폭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벽 한가운데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후지산 그림이 걸려 있었고, 벽 앞에 놓여 있는 사진 진열대에는 고르바초프 舊(구)소련 대통령, 레이건·부시 前 미국 대통령 그리고 鄧小平 전 중국 주석 등 세계적 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金大中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 있었다.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떠날 때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은 진열장에 놓여 있던, 「靑雲塾(청운숙)」이란 글씨가 새겨진 하얀 접시였다. 그 접시 속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살아 있는 자기 인생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들어 완성시키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필자는 지난 9월24일 오후 도쿄 중심부에 있는 국회의사당 옆 砂防회관 內 그의 사무실에서 이 日本의 巨人(거인)을 만났다.
나카소네 前 총리의 올해 나이는 만 81세.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언론을 통해 느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이 얘기로 대화를 시작하자 그는 『일본 정치인들 가운데는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받으며 웃었다.
─총리의 아버님께서는 목재상과 제재공장을 경영하면서 산림업도 겸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원래 장인정신과 家業(가업) 승계 정신이 강해서 남자의 경우 家業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家業과 거리가 먼 정치에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까?
『제게는 형님이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家業 승계는 장남인 형에게 맡기시고 차남인 저에게는 공부 많이 배워 다른 生(생)을 살라고 해서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참 오랫동안 정치를 해 오셨는데, 정치 때문에 인생의 귀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습니까?
『처음부터 정치인이 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정치 이외의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후회는 없습니다』
나카소네 前 수상은 이 부분에 대해 상당히 자신감에 찬 어투로, 전혀 주저없이 답변했다. 그는 평생을 정치에 몰두해 온 것에 대해 정말 조금도 후회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德川家康의 康과 弘法大師의 弘
─어머님께서는 쌀 곳간이 네 채나 있었다는 안나카(安中)의 豪農(호농)에다 豪商(호상)을 겸한 나카무라가(中村家)의 맏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서구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미션 스쿨인 교아이(共愛) 여학교를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 어렸을 때에 자주 목욕탕에 데리고 들어가 찬송가를 가르쳐 주곤 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지금 부를 수 있는 찬송가가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종교를 갖고 계시며, 기독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찬송가는 지금도 가끔 부릅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성경은 자주 읽습니다.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거나 특정 종파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넓은 의미에서의 佛敎(불교) 신도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佛敎 哲學(철학)에 대해선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 들어 佛敎 宇宙論(우주론)에 관한 학설은 무한정 확장중에 있습니다.
원래 인간의 DNA란 유전인자는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전해 받아 내려온 것인데, 인간의 조상을 계속 따지고 올라가면 우리 인간의 DNA는 결국 원숭이로부터 전달받아 자손에게 전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은 무한한 길로 들어선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도 결국 佛敎 哲學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죠』
─야스히로(康弘)라는 이름은 아버지께서 다카사키 신사(高崎神社)의 神官(신관)인 다카이 도이치(高井東一)씨에게 작명을 의뢰하여 그가 제시한 몇 개의 이름 중에서 하나 고른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후 「야스히로」라는 이름에 대해 누가 물으면 선생께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야스(康)」와 고보 대사(弘法大師)의 「고(弘·訓讀은 「히로」)」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보 大師를 평소에 존경하십니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戰國시대를 끝낸 후, 3백년간이나 계속된 평화의 시대를 구축한 인물입니다. 고보 大師는 탁월한 지식을 갖춘 승려로서 治水(치수)공사를 비롯, 많은 병원도 설립한 실천가이자 행동인이었습니다』
─이제 평생 業(업)으로 해오신 정치에 관한 사항을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평소에 갖고 계신 선생님의 정치적 신념이랄까 철학적 아이덴티티는 무엇입니까? 선생님은 정치적 자유주의자입니까, 아니면 국가주의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일본 민족주의자에 가깝습니까.
『말씀하신 세 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본인만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평소 주장해 오신 인격적 문화 아이덴티티주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문화적 아이덴티티란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인간은 원래 문화적 존재입니다. 문화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문화와 문화 사이에는 차이성도 있고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감안해서 상호간의 문화적 독자성을 존중하자는 입장입니다. 이제 세계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고, 지구촌은 국가간의 장벽이 무너지는, 국경 없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21세기 사회는 국경 없는 사회, 인터넷 사회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인 만큼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존중하는 사회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EU(유럽연합) 통합은 실현되었고, 유럽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일과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등 EU 국가들은 각기 상호 국가간의 개성을 서로 존중해 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각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지켜 나가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네이션(Nation)」이란 말의 기원도 국민이란 말에 어원의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 말 자체가 엄격히 말해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국경 없는 사회가 되면 그만큼 아이덴티티를 고수하기가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어려워지겠죠. 그렇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全세계가 미국문화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로만 산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쓸쓸하겠습니까』
三緣主義
─오랫동안 현실정치를 해온 분으로서 앞으로 정치를 해나갈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습니까.
『나의 정치철학은 三緣主義(삼연주의)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 三緣主義는 佛敎에서 말하는 因緣主義(인연주의)로서 結緣(결연), 尊緣(존연), 隨緣(수연)을 일컫는 말입니다.
結緣이란 사람이 세상에 나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과 만나 緣을 맺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람은 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부모를 만나게 되어 부모 자식으로서의 緣을 맺게 되고, 또 어떤 사람과 만나 결혼하여 부부가 되기도 하고 친구도 사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매우 소중히 지키고 간직해 나가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尊緣이란 因緣을 매우 귀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실 인생은 길고 무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인생을 진정 이해하게 되고 진실로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1백여명 정도밖에 안됩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사귀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처럼 알게 된 사람들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구축하고 마지막에 다정하게 彼岸(피안)으로 가는 인생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隨緣이란, 사람은 인생에서 반드시 스승이 필요함을 말한 것입니다. 그 스승이 예수일 수도, 부처일 수도, 공자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유교 등 중에서 스승을 갖고 가르침을 받아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게 됨을 말합니다. 원래 사람은 태어난 그 자체로는 벌레 같은 하찮은 존재나 다름없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카소네 수상은 이 말을 하던 도중에 직접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첩을 들고와 맨 뒷장을 펼쳐 보였다. 結緣, 尊緣, 隨緣이라는 글자들이 검정 사인펜으로 짙게 쓰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귀감이 되는 내용이나 자신이 참고로 해야 할 교훈들은 항상 수첩에 적고 이 말뜻을 곰곰 되새긴다고 했다.
『결국 세상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의 좋은 사귐과 관계가 세상의 전부』라고 그는 말을 맺었다.
필자가 『한국에도 三緣主義가 있다. 그러나 그런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地緣(지연), 血緣(혈연), 學緣(학연) 등을 따지는, 오용된 因緣主義여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질 못하고 오직 같은 학교, 같은 지역 그리고 같은 출신성분 등에 따라 사람이 등용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이런 三緣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작동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 정치사회적 구조나 토대를 만드는 쪽으로, 시스템 자체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한 후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三緣主義의 폐해성을 하나의 개혁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자 나카소네 前수상은 빙그레 웃었다.
『美·日·中이 북한에 등소평式 개혁 하도록 요구해야』
─「정치와 인생」이란 회고록을 보면 선생께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피력하면서 일본의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 메이지 유신과 맥아더 개혁에 이은 「제3의 開國(개국)」을 향해 일대 개혁이 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 이것을 단행하지 않으면 21세기 일본의 번영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가냘픈 꽃 일본이란 말이 있지만, 과연 그 말대로 극동에서 고립되려 하고 있는 일본의 앞길은 살얼음판을 밟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 일본이 일대 개혁을 해야 한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느 부분부터 개혁이 시작되고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東西獨(동서독)이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냉전이 종식된 바로 그 시점에 일본에서는 장기집권의 자민당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때 일본 정치에도 개혁시기가 왔다고 봤습니다. 그 동안 경제에 버블현상이 심하여 거품경제의 붕괴로 일본 경제가 곳곳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듯이 그동안 정치도 버블현상이 일어나 힘 약한 내각이 이어져 왔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진짜 실력 이상으로 거품과 허세가 심했던 사회가 붕괴되자 정치윤리의 기강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고, 학급이 붕괴되는가 하면 교사들이 학생들을 통제 못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정치는 이제부터 자민당과 자유당 그리고 공명당이 힘을 합쳐서 힘 강한 정치를 추구하려 하고 있고, 경제 또한 은행과 금융개혁을 촉진함으로써 대체로 회복세를 보이면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회개혁인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개혁이라고 봅니다』
─선생께서는 지난 8월22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紙(지)에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한 정상회담을 제안하시면서, 미국, 중국, 일본 등 3국이 북한에 대해 鄧小平(등소평)식 경제개혁을 채택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밝히신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제안의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
『나의 이런 주장은 일본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 한국이 힘을 합쳐 북한의 문호를 개방하자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사회로 북한이 나오도록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국제공동체 사회에 합류하도록 해야 하며, 북한이 점진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갈구한다면 위의 국가들은 북한을 돕기 위한 보다 나은 협력을 제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본인의 이러한 제안은 기본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포용정책과 脈(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을 채택할 경우엔 중국도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지금의 북한은 쇄국정책으로 체제와 세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신들이 문호를 개방하여 외부의 정보 유입이 자유스러워지면 체제 유지가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쇄국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일부러 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북한으로 하여금 문호를 개방하게 하여 북한이 창문을 열고 이에 따라 정보가 북한에 들어가 북한의 체제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위의 4개국이 지원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북한 경제의 정상회복 없이는 한국도 통일이 어렵습니다. 東西獨의 경우를 보더라도 西獨과 東獨이 한 나라가 되었어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을 한국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평화통일은 중요하지만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통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의 조성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런 의견이 있다는 것을 北에게 알릴 필요가 있어서였습니다. 또 북한이 이러한 주장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주장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紙에도 나왔지만,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紙에도 나왔습니다』
北韓을 국제사회에 참여시켜야
나카소네 前 수상은 설명을 끝내자마자 두 신문에 게재됐던 기고문의 복사본을 건네주면서, 최근 동북아시아 및 북한에 대한 자신의 정리된 생각과 시각이라고 말했다. 이 기고문의 요지를 소개한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북한의 核(핵) 개발 의혹 및 대포동 2호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응하여 북한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견해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자민당과 자유당 그리고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은 일본으로부터 북한으로의 송금을 중단시키는 법안을 마련 중에 있다. 이들 강경론자들은 자유세계가 북한에 대해 연약한 협상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핵무기 개발을 볼모로 한 북한의 조작극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본인은 북한이 취했던 태도를 독립을 과시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하여 북한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적도 있었으나, 이같은 상황이 지속될 수는 없다. 만일 북한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하기로 결정한다면, 국제에너지기구(IAEA)와 한국에너지개발기구(KEDO)는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여 추가적 경제제재 여부를 논의토록 해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경제적 고립을 심화시킬 각오를 하고 북한의 외교적 협박을 거부하는 의지를 결집하는 한편, 북한이 여타 세계와 협력하고 개방을 한다면 북한의 성공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결의를 역시 북한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북한은 피폐된 경제하에서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폐쇄적인 군사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북한 지도자들이 개방정책과 자유화는 주민들을 대외정보에 노출시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발전이 없는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지도자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민을 극도로 통제하고, 국가를 폐쇄하며,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북한의 비참함을 완화시키는 길은 오직 북한 정부에게 고립정책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에 참여토록 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 일본, 미국은 북한이 鄧小平 스타일의 경제개혁을 택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북한이 조금씩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모색한다면, 美, 日, 中 3국도 북한을 돕기 위해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문제를 책임 있게 해결하는 길은 남북한 양 당사자에게 달린 일이다. 북한이 남한과 대등한 정치 경제적 지위를 달성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金大中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넓은 도량과 인내심에 입각한 정책을 펴고 있음을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하려면 남북한 공동 非핵화 선언을 재확인하고 상호 核사찰의 이행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한 정상회담이 필요하다>
페리 보고서의 두 가지 불만
─최근에 발표된 페리 보고서를 보셨습니까? 일본의 입장에서 페리 보고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 감상으로는 페리 보고서가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첫째 북한의 군사력으로 인한 위험성과 전략적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고, 둘째 지금까지 북한이 스스로 만들어온 위기 카드 정책에 약간 굴복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이런 약점을 갖고 있는 보고서란 것을 자각하면서 이용해 나가면 됩니다. 또한 美 의회에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지금 현실적으론 이 길밖에 없기 때문에 보고서의 전체 방향에는 대체로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나카소네 前 수상은 그동안 북한이 취해온 벼랑 끝 전략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이 이러한 북한의 전략에 상당히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앞으로 21세기의 韓日(한일)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 韓日 관계인가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21세기는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20세기와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우선 21세기는 미래의 세기로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래사회는 인터넷과 같은 정보활용 수단이 급속히 높아짐에 따라 全세계로의 정보 보급이 매우 빨라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는 지난 20세기를 「전화 시민사회」라고 부른다면, 다가올 21세기는 「인터넷 시민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21세기에는 완전히 未知(미지)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양국이 새로운 韓日관계를 생각해 나가야만 합니다.
韓日 두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며 인권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가치관을 지향하고 추구해 나간다는 점에서도 양국은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이상의 가치관에 대해 완전한 의견일치를 갖고 있는 나라는 韓日 두 나라뿐입니다. 저는 다가올 21세기에는 일본과 한국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여 새로운 태평양 시대를 이끌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두 나라는 미래에 대한 공동의 청사진과 비전을 만들어 이를 공동으로 실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행은 어디까지나 일본과 한국이 서로의 아이덴티티의 확립을 존중해주면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솔한 金大中 대통령에 감명
─작년 10월 金大中 대통령의 訪日(방일)은 양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金대통령의 외교능력에 대해 칭찬하고 있고, 많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金대통령께서는 訪日하셨을 때 여러 발언을 통해 매우 진솔하게, 숨김 없이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 金대통령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서 감격한 일본인들은 「이렇다면 한국을 21세기의 파트너로 삼고 같이 가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金대통령 訪日의 가장 큰 성과는 이제까지 양국 관계에서 불확실하고 불분명했던 것들을 확실하게 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韓日 양국은 서로가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제휴할 것은 제휴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다면, 앞으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문제는 정치인들의 역할이자 사명입니다』
─새로운 21세기의 日中(일중) 관계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대립과 갈등의 관계로 보십니까 아니면 안정과 협력의 관계로 보십니까 ? 지역 覇權(패권)을 놓고 각축하는 관계가 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일본과 중국은 양국 상호간에 지역 覇權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覇權主義(패권주의)는 이제 냉전의 유물일 뿐입니다. 覇權主義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1세기와 같은 인터넷 사회에서는 覇權主義라는 용어 자체가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향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서로 제휴하고 연대해 나가는 것은 동아시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중국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예상치 않았던 분열적인 요인들이 크게 돌출할 것으로 보십니까? 중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듣고 싶습니다.
『미래 중국의 장래를 예측하는 데는 미지수 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경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이 미래라는 새로운 세기를 자각하면서 준비하고 있듯이, 중국도 새 시대를 자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중국은 더욱 민주화될 것으로 보이며, 생활수준도 지금보다는 향상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같은 가치관 共有한 韓日
─21세기의 동북아 질서는 지금보다는 훨씬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간의 이해관계도 그만큼 복잡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한국과 같은 나라는 양국 사이에서 어떤 외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가장 國益(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 생각한 끝에 웃으면서) 그 문제는 한국 스스로 결정할 사항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가치관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국가는 일본과 한국뿐입니다. 양국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나라는 모두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韓日 양국만큼 동아시아에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나라, 똑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 국가간에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묻고 싶은 부분이 아직도 산더미 같지만 … 끝으로 한국의 개혁정책에 대한 평가를 한 마디 듣고 싶습니다.
『현재 金대통령께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개혁정책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정치적 리더십으로 볼 때 金대통령은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 나타난 정치지도자 중에서도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
그동안 필자는 脫(탈)냉전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질서 문제를 비롯하여 韓日 및 韓中 그리고 美日과 日中 관계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져 왔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과 일본의 문제였으며, 21세기에는 日中간의 관계가 어떠한 형태로 발전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담을 마친 후에 「좀더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카소네 前수상과의 대화에서 동북아 질서나 중국의 장래 문제, 그리고 21세기 일본의 나아갈 방향과 함께 특히 북한 核과 미사일, 정치체제 등에 대한 그의 識見(식견)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주변 강대국가 중 한 축인 일본이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게 된 점은 큰 소득으로 생각됐다.
나카소네 前 수상과의 대화 시간은 약 2시간 30분쯤 지속됐지만, 좁은 개인 사무실로 끊임없이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대화는 여러 차례 단절됐다. 그는 올해 81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놀라운 체력을 갖고 있었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 건강이 거의 일치할 만큼 빈틈이 없어 보였다.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고, 정리된 생각과 관점이 분명했으며, 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명확히 구별하는 신중함과 노련미도 갖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30대 초반의 젊은 비서관으로부터 한 장의 메모 쪽지가 전달되었다. 메모 쪽지를 펼쳐 본 나카소네 수상의 얼굴엔 금세 긴장감이 감돌았다. 뭔가 다급한 일이 일어났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일본 衆議員(중의원) 중진 몇 사람이 나카소네 前 수상의 개인 사무실로 급히 들이닥친 것이다. 오부치 수상의 2기 내각개편과 관련하여 인사문제를 상의하러 왔음을 나중에 알았다.
최근 일본 정계에서는 다케시타 前 수상의 건강이 좋지 않아 나카소네 前 수상의 막후 역할이 커져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자민당과 자유당 그리고 공명당의 3者 연립정권이 형성되는 배경에는 나카소네 前 수상의 막후 역할이 매우 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처럼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활발한 현역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중국의 鄧小平을 연상케 했다.
그와 나눴던 대화 중 인상깊게 남는 것 중 하나는 아직도 자신이 지은 하이구(일본의 短詩)를 가끔씩 영어로 번역해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와 만나기 바로 직전에도 자신이 지은 詩句(시구) 한 구절을 또 영어로 번역해 보았다면서 작은 메모 쪽지를 보여 줬다. 필자는 순간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고령에도 詩心(시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를 영어로 번역할 만큼 아직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 방문 때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란 유행가를 한국말로 부르고 싶어 한국어를 직접 배운 적이 있다는 말도 했다.
「자기 인생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 잠시 접견실에서 앉아 기다리면서 나카소네 前 수상이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둘러보았다. 필자는 이 사진들을 통해 과거 그의 외교적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그리고 교류의 폭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벽 한가운데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후지산 그림이 걸려 있었고, 벽 앞에 놓여 있는 사진 진열대에는 고르바초프 舊(구)소련 대통령, 레이건·부시 前 미국 대통령 그리고 鄧小平 전 중국 주석 등 세계적 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金大中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이 있었다.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떠날 때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은 진열장에 놓여 있던, 「靑雲塾(청운숙)」이란 글씨가 새겨진 하얀 접시였다. 그 접시 속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살아 있는 자기 인생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들어 완성시키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