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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兪炳彦 前 세모 회장 出獄 후 최초 인터뷰

『내가 왜 오대양 사건 背後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합니까? 어금니를 깨물며 억울함을 참습니다』

장원준    wjj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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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양 集團變死 사건의 배후로 언론으로부터 거센 의혹을 받았던 兪회장이 결국 구속되고 재판받은 혐의는 몇년 전 검찰이 한번 무혐의 처리했던 詐欺 사건.
● 아직도 兪회장과 ㈜세모 사람들을 보는 일반 사람들의 시각은 「뿔 하나씩은 달린 사람」
● 『5共 사람들과 잘 알지도 못했고, 정치 자금을 주지도 않았다』
● 『처벌받은 詐欺 사건도 억울 … 옛날 수사에서는 조그만 봉지라고 하던 게 현금이 가득 든, 가마니 두 개만한 큰 마대자루로 변하더라』
OX 문제 3개
  간단한 OX 문제 몇개부터 풀어보자. 기억을 더듬으면서 독자들은 다음 세가지 명제 중 몇 개나 맞는 서술인지 한번 답해보시기 바란다.
 
  <①金泳三(김영삼) 前(전)대통령의 次男(차남) 賢哲(현철)씨는 한국 경제를 IMF 換亂(환란)으로 몰아간 방아쇠 중 하나였던 韓寶(한보) 사태와 관련, 무모한 대출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韓寶로부터 억대의 돈을 받았다. 검찰이 이걸 「혐의 없다」고 뭉개려다가 대검 중수부장이 교체되는 망신까지 당하고는 마침내 金씨를 구속했다.
 
  ②어이 없는 대형 火災(화재)로 수십명의 어린이들이 불에 타 숨진, 끔찍했던 최근 화성 씨랜드 사건의 뒤에는 예상대로 뇌물을 받고 대강대강 공사 허가를 내준 郡守(군수)가 있었다. 처음에 구속영장이 기각되기도 했지만 결국 화성군수는 씨랜드 인허가 과정에서 뇌물 1억3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③32명의 成人(성인)이 한꺼번에 變死體(변사체)로 발견돼 1987년 여름을 강타했던 오대양 사건의 背後(배후)에는 오대양과 관련된 또다른 종교 집단 「구원파」의 중심 인물 兪炳彦(유병언) 당시 세모 사장이 있었다. 한때 오대양 신도들의 집단 自殺劇(자살극)으로 결론지어졌던 이 사건은 재수사 끝에 兪씨의 관련 혐의가 밝혀졌고, 그래서 兪씨는 징역살이를 했다>
 
  몇개나 맞다고 답하셨는가? 1개? 2개? 아니면 3개 모두? 얼핏 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 명제들은 다 틀렸다. 「0개」가 정답이다. 이걸 맞추었다면, 그리고 「이런 문제는 대강 다 틀렸다고 하는 게 정답이더라」는 식의 어림 짐작이 아니라 틀린 부분까지 지적하면서 답한 것이라면, 그 독자는 평소 신문을 꼼꼼하게 읽는 편이고 판단력이나 기억력도 훌륭한 것으로 자부해도 괜찮겠다.
 
 
  金賢哲씨의 경우
 
 
  먼저 최근 赦免(사면)에서 殘刑(잔형)을 면제받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金賢哲씨의 경우부터 보자. 韓寶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1997년, 여론은 「韓寶 몸통 金賢哲」을 잡아넣으라고 들끓었다. 1차 수사에서 金씨의 韓寶 대출 개입 혐의가 없다고 결론내렸던 崔炳國(최병국) 대검 중수부장은 교체됐고, 결국 「드림팀」으로 불린 새 중수부장 沈在淪(심재륜) 검사장 이하 수사진은 5월17일 金씨를 구속수감했다. 새 수사팀은 外壓에 굴하지 않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을 잡아넣는, 검찰 사상 초유의 凱歌(개가)를 올린 것으로 평가됐다.
 
  凱歌를 올린 것은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차 수사에서 밝혀진 구속영장상 혐의는 金씨가 韓寶가 아닌 다른 기업인들로부터 대가성이 있는 돈을 포함, 66억여원을 받았고 또 이로 인해 내야 할 세금을 포탈했다는 것이었다.
 
  여론을 등에 업고 검찰이 그만큼 캤는데도 걸리지 않았다면 金씨가 韓寶와 관련해 돈을 받거나 특혜를 알선해준 것은 정말 없다고 봐야 된다는 얘기고, 따라서 최소한 金씨가 한국 경제를 不渡(부도)로 몰고간 주요 단초 중 하나였던 韓寶 사태로 비난받을 일은 없다는 말이 된다.
 
  2차 수사 끝의 구속을 놓고 金씨 측에서 「別件(별건) 수사」라는 반발을 보인 것은 그런 맥락이었다. 일단 「잡아넣겠다」는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애당초 문제가 됐던 부분을 수사하다 안되니까 다른 것을 털고 털어서 애써 범죄를 「구성」한 것 아니냐는 취지다. 이런 돈에 대해 「조세포탈」이라는 잣대까지 들이댄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당시 법조계 일부에서도 드러내놓고 말은 못해도 「金賢哲 수사는 검찰 역사상 대표적인 標的(표적) 수사로 남을 것」, 「그런 식으로 수사하는 것은 正道(정도)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없지 않았다.
 
  顚末(전말)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과 함께 자연스런 忘却(망각)이 거듭되면서 「韓寶의 몸통 = 金賢哲」이라는 의혹을 줄기차게 던졌던 당시 언론 보도와 金씨가 결국 잡혀들어가 有罪 판결을 받았다는,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만 뇌리에 남겨둔 사람들에게는 金씨가 대강 ①번 명제처럼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의 일이라 아마도 忘却의 훼손은 덜 입었을 씨랜드 사건과 화성군수의 경우(명제②). 조사 결과 防災(방재)시설이 미흡했던 것으로 드러나 국민을 분노케 했던 이 사건으로 인해 認許可(인허가) 선상의 화성군 공무원들이 수사대상이 됐다. 통상 이 정도의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사건의 경우, 실무 책임의 「頂點(정점)」에 해당하는 인사에 대해 구속을 집행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며 수사가 일단락되는 것이 관례이다. 검찰청사 복도에서 수사관들에게 양쪽 팔짱을 끼인 채 카메라 플래시를 받은 후 소형차 뒷좌석의 가운데에 타고 구치소로 가는, 익숙한 바로 그 광경 말이다.
 
  이 사건에서 頂點으로 간주된 郡守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이 신청됐지만 검사 기각이 됐다는 보도 얼마 후인 8월1일 郡守는 씨랜드와는 무관한 다른 아파트 사업승인 등과 관련, 3개 업체로부터 총 1억3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결국」 검찰에 구속됐다. 이 경우를 놓고도 「구속을 목표로 한 別件 수사」라는 지적이 없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아마 신문의 제목만을 대강 훑어보았던 독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몹쓸 郡守가 뇌물 먹고 許可해주는 바람에 불쌍한 어린이들이 죽었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최소한 「숱한 어린 영혼을 불에 타 숨지게 한」 씨랜드 시설과 관련, 郡守가 「뇌물을 받고」 일을 적당히 처리했다는 사실은 아직 확인된 바 없다.
 
  자, 이제 이 기사의 주 관심대상인 兪炳彦 前세모 회장件을 살펴볼 차례다. 물론 명제 ③도 틀렸다. 참고로 ㈜세모는 한강 유람선과 스쿠알렌(深海 상어의 肝油를 정제한 것) 등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회사를 말한다.
 
  오대양 사건에 대한 검찰의 최종 수사 발표문(1991년)은 꼼꼼히 보면 구성이 흥미롭다. 발표문의 처음은 오대양 集團變死(집단변사) 사건으로 시작된다. 중간쯤에서는 세모와 오대양이 연계된 의혹 부분에 대해 수사 내용이 한참 이어진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 사건 처리 부분에서는 세모 兪사장의 구속 혐의가 딱 한 페이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죄목은 오대양과는 관계 없는, 9년 전의 詐欺(사기) 혐의이다.
 
 
  泰山鳴動 鼠一匹
 
 
  이 수사 발표문은 「오대양 사건」, 「㈜세모」, 「兪炳彦 당시 ㈜세모 사장」 등을 두고 뜨겁게 벌어진 논란과 의혹과 억측과 종결 등 일련의 과정을 압축해서 상징하고 있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이 사건의 개요를 간략히 짚어본다.
 
  오대양 사건은 1백70여억원의 私債(사채)를 빌려쓰고 행방을 감췄던 ㈜오대양 대표 朴順子(박순자·당시 48)씨와 그 직원, 가족 등 32명이 1987년 8월29일 경기도 용인에서 집단 變死體로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수사 당국은 이 사건이 소위 「집단 자살」, 그러니까 전원의 자유 의사에 따라 남자 3명이 나머지 29명을 목졸라 살해하고 3명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후에도 두 차례나 再(재)수사 과정을 밟게 된다. 먼저 6공화국으로 정권이 바뀐 1988년 12월, 5共 비리를 밝힌다는 차원에서 재수사에 들어갔으나 결론은 변함없었다.
 
  잊혀져가던 이 사건이 다시 여론의 도마에 오른 것은 1991년 7월. 사건 당시 행방이 묘연해 잠적한 것으로 추정됐던 오대양 총무 등 직원 3명을, 사실은 「32명 變死 사건」 이전에 자기들이 살해하고 暗埋葬(암매장)한 것이었다면서 오대양의 다른 직원 7명이 자수해온 것이다(3명에 대한 살인사건은 32명 變死 사건과는 별개의 일임).
 
  「미궁에 빠졌던 오대양 사건 의혹을 풀 수 있게 됐다」는 언론 보도와 함께 檢警(검경)은 전면 재수사에 들어갔고, 이를 둘러싸고 대체로 시커먼 제목으로 장식된 각 신문의 기사들은 두툼한 조선일보사 스크랩북으로 네 권에 이를만큼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당시 언론이 제기한 의혹, 또는 推理(추리)는 요컨대 다음과 같은 취지이다.
 
  ▲집단 自殺이 아니라 누군가가 죽여서 현장으로 시신을 옮겼다든지 하는 식의 他殺(타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대양이 빌렸던 私債가 1백70억원이 넘는데 그 행방이 묘연하다. 누군가 背後가 있고 막대한 돈은 바로 그 背後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背後는 오대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집단 구원파(注; 구원파라는 명칭은 세간에서 불렀던 것이고 정식 명칭은 「기독교복음침례회」였음)로 보이고, 그 중심인물은 당시 잘 나가던 ㈜세모의 사장 兪炳彦씨다 ▲오대양 직원이 자수하는 데도 세모나 구원파 사람들이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세모가 자수를 조종했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아마도 더 큰 흑막을 숨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세모는 5共의 비호를 받아 사업을 확장했고, 오대양 수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정권의 外壓(외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세모가 오대양 사건의 背後로 지목된 데는 당시 국회의원 朴燦鍾(박찬종)-金炫(김현)씨의 폭로성 주장이나,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종교연구가 卓明煥(탁명환·사망)씨의 구원파 비난 등이 큰 계기로 작용했다.
 
 
  의심의 여지 없는 集團 自殺
 
 
  하지만 3차 수사, 즉 앞에서 발표문을 살폈던 그 최종 수사에서도 오대양 사건의 결론은 「집단 자살」이었다. 기자는 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사건 발생 당시 가장 먼저 현장에 간 검사였던 朴英秀(박영수) 現 평택지청장, 가장 먼저 현장에 간 경찰관인 李三載(이삼재) 前 경찰청 수사연구관, 그리고 剖檢(부검)을 맡았던 黃迪駿(황적준) 現 고려대 법의학과 교수 등에게 다시 한번 이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다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집단자살극』이라는 답변을 주저없이 주었다. 사실 이는 세 차례에 걸친 검찰 수사에서도 일관되게 내려진 판단이기도 했거니와, 당시 현장 자료와 부검 결과 등을 찬찬히 분석해보면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오대양 사건을 「미궁」, 「의혹」, 「미스터리」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다른 추론들을 키워가는 가장 큰 전제는 이 사건의 「他殺 가능성」이었다. 돌이켜보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의혹들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셈이었다.
 
  또다른 관심은 거액의 오대양 사채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갔느냐는 것. 이 부분을 놓고도 세모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여러 차례 언론을 탔지만, 수사 결과 「어디론가 유입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오대양이 高率(고율)의 사채 이자를 갚는 데 쓰인 것」으로 추정됐다.
 
  결국 이 사건은 오대양이라는 邪敎(사교) 집단이 엄청난 액수의 私債 등에 눌려 위기에 몰리자 朴順子씨를 비롯한 핵심 교인들끼리 狂信的(광신적) 분위기에서 저지른 「자체적 사건」이었지 「배후의 흑막」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종합적 결론이었다.
 
  배후의 핵심처럼 지목돼 온 兪炳彦씨가 구속된 혐의는 兪사장이 宋모(여)씨 등과 공모해서 구원파 신도들을 상대로 「兪炳彦을 돕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속여서 총 11억여원대의 사채를 끌어들이는 상습 詐欺(사기)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수사발표 시점에서는 9년 전, 그리고 오대양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는 5년 전인 1982년의 일 등을 내용으로 한 이 혐의는 이미 1989년 광주지검의 수사 끝에 불기소처분을 받았던 부분이었다.
 
  결국 兪씨의 경우도 金賢哲씨나 郡守처럼 여론의 관심과 지탄 속에서 검찰 수사가 진행됐지만, 일반 시민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엉뚱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엉뚱한 혐의의 억울함에 관한한 兪씨는 金씨나 郡守보다 훨씬 더 심하다.
 
 
  더 억울했던 兪炳彦씨
 
 
  賢哲씨나 郡守는 「돈 받고 편의를 봐주었다」는 식의 의혹을 받다가, 결국 囹圄(영어)의 몸이 된 혐의도 원래와는 다른 회사로부터이긴 하지만 어쨌든 「받으면 안되는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의혹과 실제의 間隙(간극)이 아주 멀지는 않은 셈이다.
 
  하지만 兪씨는 「32명이 집단 사망한 오대양 사건은 自殺이 아니라 他殺(타살)인데 그 배후에는 세모 兪사장이 있는 것 같다」는 식의 의혹이 연일 신문과 방송을 통해 증폭되면서, 마치 엽기적 殺人(살인)의 敎唆者(교사자)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다가 막상 기소되고 재판받은 것은 몇년 전 한번 수사했다가 덮었던, 오대양과는 무관한 詐欺 사건의 공모자로서였다. 「의혹과 실제의 間隙」이 현격하게 벌어져 있는 셈이다.
 
  또 기소된 詐欺 부분과 관련, 1992년 당시 月刊朝鮮(월간조선) 李政勳(이정훈) 기자는 재판 과정 등에 대한 추적을 통해 「이 건은 증거가 부족하며 언론에 떠밀려 검찰이 수사했다는 흔적이 많다」는 취지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돼 4년형이 선고됐다. 兪사장은 형기 4년 중 2개월만을 남긴 1995년 6월 석방됐고, 이런저런 이유로 어려움을 겪던 ㈜세모는 1997년부터 법정관리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한때 「소그룹」 세모의 회장이었던 兪씨는 현재 공식적으로 직함이 없다.
 
  이 회사 직원들은 아직도 『세모에서 나왔다』고 말하면 소비자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고 한다. 흠칫 놀라면서 『오대양 사건 때 줄줄이 사람 죽은 것과 관련된 사이비 종교 집단 아닌가』하는 식으로, 「뿔 하나씩은 달린 사람들」로 보는 반응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역시 강한 인상만이 오랫동안 忘却을 피해가는 두뇌 습성상 「오대양∼세모∼兪炳彦∼私債」와 같은 단순 이미지가 기억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세모 직원이야 정 힘들면 회사를 떠날 수도 있지만 兪회장은 개인을 놓고 그려진 이미지여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兪회장은 어쩌면 이 사건과 관련된 최대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일 수 있다.
 
  兪회장을 지난 8월9일 만났다. 出獄(출옥) 이후 언론과는 처음 갖는 인터뷰였다. 1백61㎝의 短軀(단구)에 童顔(동안)인 兪회장은 웃는 낯에 才氣(재기)가 튀는, 매끄러운 多辯(다변)이었다.
 
  임시 거처로 빌려 쓰고 있다는 경기도의 한 빌라에서 기자를 만난 兪회장은 『더운데 먼 길 왔으니 샤워부터 하라』는 첫 인사를 했다. 「초면에 남의 집에서 샤워를 하라니, 참 인사치고는…」 하고 의아해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兪회장 자신이 「샤워 마니아」였다.
 
 
  『全敬煥씨와의 친분說은 만화 같은 이야기』
 
 
  ─5共 사람들과 친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입니까?
 
  『저는 全斗煥(전두환)씨 집안 식구 아무도 모릅니다. 단 제가 발명특허협회 이사로 있었을 때 全敬煥(전경환)이라는 사람이 명예 이사장으로 와서 한 번인가 두 번 인사한 것은 기억이 나도 개인적으로 대화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사받을 때 보도된 것을 보면 어릴 때 같이 자랐고 무술을 같이 했고, 겨루기를 같이 했고…. 전부 만화 같은 소리를 했더라구요』
 
  ─알려지기로는 全斗煥 대통령과 직접 잘 통했고, 그래서 뒤를 봐주었다느니 비서진으로부터 미움을 샀다느니 하는 말이 있던데요.
 
  『친할 것도 없고 봐 준 것도 없어요. 오히려 제가 1986년에 세무 조사를 당해서 30억원 넘게 추징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매출액의 19% 정도였는데 5공이 비호했다면 왜 세무조사를 당했겠습니까. 세무 조사 당할 때 보니까 완전히 벼룩 한 마리 잡기 위해서 해머로 방구들 깨는 것과 똑같았어요.
 
  인연이 있다면 처음 全統(전통)이 대통령 되고 얼마 후 경제동향보고 월례회에 갔었어요. 거기서 아마 짜여진 질의 응답이 끝난 모양이었는데 제가 손을 들었어요. 분위기가 살벌해지데요. 사회 보던 徐錫俊(서석준)씨가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이미 시간 끝났습니다」 해요. 저는 손 안내리고 가만 있었죠. 그러니까 대통령과 귓속말 하더니 「하라」 해요. 全대통령이 그런 건 격식 안차리데요』
 
  이 자리에서 兪회장은 『공직자가 일반인 대하는 게 마치 매가 참새 새끼 보듯이 먹이로 본다』면서 기업인으로서의 애로 사항과 그 즈음 겪은 공무원의 발목 잡기 사례를 지적하는 「돌출 발언」을 해 자리에 있던 공무원들을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월례회에서 질문을 던진 7명이 다음날 청와대로 초청을 받았는데, 외제차를 타고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직원에게 「그러면 안가면 돼」 했는데, 상공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내 차에 0이 붙어서 못가겠습니다. 다른 차 없습니다」 했더니 세 시간 후에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대통령이 「지난번 兪사장 질문하셨죠? 조사해보니 아무 문제 없습디다」 해서 「그런 보고 올라왔습니까? 그건 대통령 안보 문제와 관련됩니다. 있는 사실 없다고 보고하는 건 공무원들 글재주겠죠. 그런 식으로 보고하면 앞으로 크게 문제될 겁니다」 했습니다.
 
  또 「이왕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합시다. 도대체 청와대 문턱이 왜 그렇게 높은지 외제차 타고는 절대 못들어 온다고 합니다. 청와대 경호차는 뭡니까? 국산입니까?」 하고 물었죠. 그리고 「외국 바이어에게 국산차 태웠다가 사고난 적이 있어서 외국 손님들이라도 안심하라고 외국 대사관에서 2년 이상 굴렸다는 중고 벤츠 샀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全統이 「탈 사람은 타야죠」 하더라구요. 속으로 「사람, 속은 트였네」 했지요. 그 다음에 「兪사장 빽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직선적인 話法
 
 
  대화를 나눠 보니 兪사장은 말을 앞뒤 재지 않고 직선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1984년에는 구제 금융 건과 관련, 재무부 차관보와 면담하던 중 언성이 높아졌을 때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당신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목에 너무 힘 주지 마시오. 우리가 애써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 겁니다. 나도 세금 몇천만원씩 내려면 허리가 휘청거려요. 공직은 바람 불면 스러져 가는 자리고, 이 나라는 국민이 주인입니다. … 내 말이 기분 나쁘면 새 신발 신고가다가 개똥 밟은 셈 치시오』
 
  세모가 널리 유명해진 것은 한강 유람선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 이 즈음 兪회장은 부친 친구의 아들 친구로 안면이 있는 모 정보기관 관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 사람이 「이만한 프로젝트를 땄으면 인사를 해야 합니다」 해요. 저는 이런 걸 잘 모르죠. 왜냐하면 회사 시작한 이래 한번도 회사의 자금 문제에 손을 대본 적이 없었거든요』
 
  兪회장은 세모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1997년, 23년 만에야 자신의 인감을 다시 받아보았을 정도로 돈 문제는 철저히 부하 직원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아이디어 개발에만 신경 썼다고 했다.
 
  『이유가 뭐냐. 돈은 전문가가 맡고 저는 아이디어를 책임지자고 생각했습니다. 또 제가 종교 강연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돈에는 손대고 싶지 않았어요. 하여튼 「그래서 돈 관계 같은 것으로 인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했더니 「제가 사장님을 아끼니까 합니다. 남 같으면 이런 말 안합니다」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지요.
 
  「全대통령과 식사한 적이 있는데 대통령께서도 뇌물받는 사람들은 시청 광장에 놓고 총 쏘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저는 그런 인사하라는 게 최소한 대통령 뜻은 아닐 거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나중에 제가 대통령과 식사했다고 공무원들에게 자랑하고 돌아다니는 것으로 바뀌더군요』
 
  兪회장의 독특한 話法(화법)과 면모 때문에라도 아마 적지 않은 사람에게 미운 털이 박히고, 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하는 식으로 한편으로는 5공 유착설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性폭행당한 처녀같은 심정』
 
 
  1991년 오대양 사건으로 구속되던 시점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부분에 대해 말할 때만은 兪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를테면 戰犯(전범) 재판을 한다면서 전쟁과 관련된 게 아니라 사소한 일반적 일을 갖고 따지기 시작하면 그건 이미 戰犯 재판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대양 가지고 신문에서 떠들고 하니까 불렀다가는 과거에 무혐의 처리됐던 것을 꺼내서 사건을 만들어간 거예요.
 
  재판받을 때 오대양과 관련한 것은 결국 끝까지 전혀 없지 않았습니까? 제가 구속된 직후에는 또 세무조사를 받아서 그해 매출액의 15%인 1백64억원을 추징당했어요.
 
  지금도 나는 사람들이 오대양 사건과 저를 연관지었다는 것만 생각하면 아예 변명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왜 오대양 背後라는 멍에와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합니까? 원통할 때마다 어금니를 깨물며 억울함을 참습니다. 심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좁은 시골 동네에서 어느 날 갑자기 性(성)폭행당한 처녀 같아요. 억울해도 우리 정서상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는데 소문은 제가 몹쓸 년인 것처럼 동네방네 나는 겁니다』
 
  兪회장은 이어서 수사의 부당성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했다. 인터뷰 후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 관계자에게 兪회장의 주장을 전해주며 의견을 묻자 『공소장과 재판 결과 이외에 더 할 말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5공 신당설이 있고, 세모가 그 자금줄이 아니냐는 풍문이 있었는데 정치 자금을 달라는 요청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서슬 시퍼런 현직 대통령 때 인사드리라고 해도 끝까지 안했는데 미쳤다고 대통령 그만둔 다음에 정치자금 주겠어요?』
 
  세모 사람들은 당시 6共 정권이 세모의 5共 유착설에 부담을 느끼고, 또 5共 신당 정치 자금설로 손 좀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중첩되면서 1991년 오대양 수사 과정에서 세모가 희생양이 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언론은 「축소 수사」라고 비난했었지만 오히려 「과잉 수사」였다는 것이었다.
 
  ─1991년에 오대양 직원 3명 살인과 관련, 직원 7명이 자수했을 때 세모가 관련돼 배후에 흑막이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는데요.
 
  『그 오대양 직원들이 대부분 옛날에 기독교 복음 침례회(구원파)에 있다가 나간 사람들이라 세모 직원이나 교단 사람들이 안면이 있었는데,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세모 직원 몇 명이 관련자 전원의 자수를 권유한 것은 맞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2의 집단 자살 사건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그때 남아있던 오대양 직원들은 또 한번 오대양을 일으키려고 집단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데 일부만 자수시키면 나머지는 또 殉敎(순교) 운운하면서 자살할지 몰랐거든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죄지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자수시킨 게 무슨 잘못입니까?』
 
  ─詐欺 부분은 결국 유죄가 인정됐지요.
 
  『그것도 억울합니다. 제가 宋모(여)씨와 공모해서 수억원의 돈을 편취했다는 것인데 宋모가 저를 팔아서 사채를 끌어모았는지는 모르지만 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광주지검에서 수사받을 때 한번 무혐의처리 되지 않았습니까? 주요 증인 중 한 사람이 L모 여인인데 광주지검 수사 때는 저와 대질했을 때 「회장님 제가 조그만 봉지 하나 개발실로 가져간 것 못 보셨습니까?」 했었는데 나중에 이게 오대양 수사 때는 가마니 두 개만한 마대 자루에 현금을 가득 넣어서 가져다 준 것으로 변해버렸어요. 그리고 왜 지나간 일을 하필이면 오대양 사건의 살인이라도 제가 저지른 것 같은 의혹을 받을 때 들춰내서 구속시켜 버립니까? 그 의도가 뭡니까?』
 
  兪회장은 사건에 연루되기 전까지 발명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종이비누(하이얀)를 개발, 1981년 국제발명전시회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비롯, 유압식 보트(뒤집히지 않는 보트), 하이팬 환풍기(환풍기가 작동하지 않을 때는 자동적으로 팬이 맞물려 외부 공기를 차단하는 기기), 체중 조절용 보행대 등 그동안 수많은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했었다. 兪회장은 자신이 개발한 발명품을 한 사업부로 독립시켜 상품화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키웠다고 한다. 국제적 발명 특허만 25개에, 갖고 있는 공업 소유권은 5백여개.
 
 
  『純金은 도금하지 않는다』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느낄 수 있는 사례 한 가지. 兪회장은 4년 가까운 옥살이를 통해, 밤새워 재판 받은 날 하루와 전기 합선으로 방을 갑자기 바꾼 날 등 손을 꼽는 며칠을 빼고는 매일 샤워를 했다고 한다. 감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걱정이 「앞으로 샤워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을 만큼 兪회장은 「샤워 愛好家(애호가)」. 그가 개발한 온수 공급법은 이렇다.
 
  음료수나 주스 등을 담는 1.5ℓ짜리 페트병 빈 것을 일곱 개 모은다. 여기에 먹거나 그릇 닦을 때 쓰라고 주는 따뜻한 물을 담고는 화장지로 잔뜩 감은 다음 두툼한 양말로 감는다. 그러면 이게 바로 즉석 보온병이 된다.
 
  兪회장이 감옥에 들어가면서 「發明(발명)」한 이 「보온병」 일곱 개를 담요에 감고 자면 겨울에는 훌륭한 난방 장치가 됐고, 아침에 아직 식지 않은 물과 찬물을 섞어 샤워를 했다고 한다.
 
  ─㈜ 세모 경영에서는 손을 떼셨는데 앞으로 어떤 구상을 갖고 계십니까?
 
  『제가 회사 자금을 경리 담당 직원들에게 전적으로 다 맡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창피한 일이지만 이 사람들이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제 앞으로 남은 재산이나 회사 지분이 거의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없어져 버린 거죠. ㈜세모 주식은 부도나서 소각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남들처럼 동생이나 가족에게 자금을 맡겼더라면 귀퉁이라도 남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 직원들 싹 등을 돌려 버렸어요. 저는 「회사 대표면 배의 선장이다. 배가 가라 앉을 때까지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배가 가라앉으니까 헤엄 잘 쳐 먼저 빠져나가는 사람 따로 있는지 이제야 알았어요』
 
  兪회장의 서초동 집도 회사에 잡힌 채 현재 전세로 들어가 살고 있는 상태이고, 兪회장 부인으로부터 세모 직원들이 하루만 쓰겠다면서 15억원을 빌려갔다가 정식 빚으로 잡고 부도를 내는 바람에 부인이 오래 전부터 해오던 양장점도 계속 어렵다고 한다.
 
  兪회장은 스쿠알렌 얘기를 하면서 가장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정제법으로 만드는 세모 스쿠알렌은 아마 全(전)세계에서 가장 잘 팔린 스쿠알렌이었을 것이라면서 兪회장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우리 스쿠알렌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광고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純金(순금)은 鍍金(도금)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그래도 성공했죠. 이렇듯 鍍金하지 않아도 純金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저는 꼭 다시 일어설 겁니다. 지켜보십시오. 지금도 여러 가지 발명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張기자, 요즘 내가 개발하고 있는 것 한 번 보실래요?』
 
  벌떡 일어난 兪회장은 새로운 발명품을 갖고 오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총총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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