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명수의 《그의 운명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생각》. 김경수 화백의 만평.
경북 안동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고향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재명 대표는 안동에서 살았다. 안동은 넓다. 현재 인구는 20만 명이 채 되지도 않는 인구규모로는 작은 도시지만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울 정도로, 만만한 시골도시는 아니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의 정신이 온전하게 살아있는 도시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으로 공자(孔子)마저도 사라진 중국에서도 유교문화의 전통이 살아있다고 존중하는 곳이 안동이다.
공자의 후손이 안동을 방문하고서는 ‘추로지향(樞路之鄉)’이라는 편액을 쓸 정도로 안동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유교의 기본덕목이 살아있는 곳이다.
이재명 대표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도촌길 505)이다.
그는 가장 최근에 출간한 <그 꿈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에서 “내 고향은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이다. 첩첩산중 산꼭대기 기막힌 오지, 화전민들의 터전. 지금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50, 60대 남성들의 로망을 그려내는 ‘나는 자연인이다’의 배경으로 맞춤한 곳”이라고 고향마을을 묘사했다.
그러나 요즘 이 대표의 고향마을은 버스가 다니지 못할 정도의 오지는 아니다.
자신의 블로그에서도 “도촌동은 당시에는 차가 들어가지 않았고, 70년대 후반에 겨우 전기가 들어왔다. 요사이도 저녁에 버스가 들어 왔다가 아침에 나가는 것이 전부이고 그나마 지통마을은 현재도 버스가 들어가지 않고 버스종점까지 5리 정도를 걸어 나와야 된다.”고 썼다.
“고향을 떠난 건 초등학교 졸업식 직후 1976년 2월 26일인가였다. 3년 앞서 성남으로 떠난 아버지를 따라 온 식구가 상경을 했다.”
본인의 자서전을 더 따라 가보자.
만평 김경수 화백
'고향을 떠난 데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지통마을 그 오지에도 한때 ‘도리짓고땡’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맞다. 20장의 동양화로 하는 그 놀이. 아버지도 마을주민과 어울리며 잠시 심취했고, 덕분에 그나마 있던 조그만 밭떼기마저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상경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성남과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재명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일부는 맞겠지만 일부는 틀리다. 이재명 대표의 부친이 그 마을에 이주할 때 마을 전체 땅을 매입해서 이사했다는 증언도 있다. 작은 밭뙈기(자서전에 쓴 ‘밭떼기’는 ‘밭뙈기’의 오기다)를 부치던 그런 가난한 소농은 아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작은 밭뙈기를 도리짓고땡이라는 도박으로 날려먹고 아버지 홀로 야반도주했다는 것이 이 대표 부친의 ‘나홀로’ 성남 이주 이유다. 과연 그것만이 진실인지 아래에서 더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남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그 곳에 살았는데, 이곳은 육지의 섬으로 불리는 봉화군, 안동군, 영양군 등 3개 군의 접경지역 산골마을로 소나무가 많아 송이가 많다.”
이 대표의 자서전이 나오기 전 쓴 블로그에서도 1976년 초등학교(엄밀히 말하면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다)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는 여러 책과 글을 통해 1963년생이지만 1964년으로 출생신고가 되어있다고 했고 학교도 그렇게 다녔다고 했다.
만평 김경수 화백
1964년 12월 22일이 생년월일이나, 이는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하여 임의로 쓴 날짜이고 실제 출생일은 1963년 음력 10월 22일에서 10월 23일로 추정한다고 본인이 밝힌 바 있다.
“음력 22일인가, 23일인가 헷갈리던 어머니는 고민 끝에 점바치(점쟁이)를 찾아 생일을 물어봤다. 아무튼 겉보리 한 되에 우주의 기운을 모은 점쟁이에게 내 생일을 23일로 확정했다.” (그 꿈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 대표는 1964년생으로 호적에 기재된 대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그가 적시한 1976년 초등학교 졸업은 1963년생이어야 맞는데 맞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여러 책에서 자주 어긋났다.
<그 꿈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에서 이재명은 아버지가 가족들을 내버려둔 채 3년 일찍 고향마을을 떠나 성남으로 간 것에 대해 아버지가 도박에 빠졌다고 기술했다.
“지통마을 그 오지에도 한때 ‘도리짓고땡’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맞다. 20장의 동양화로 하는 그 놀이. 아버지도 마을주민과 어울리며 잠시 심취했고, 덕분에 그나마 있던 조그만 밭떼기마저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상경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작은 밭뙈기를 도박으로 날려서 홀로 성남으로 갔다는 것이다. 사실일까? 부친이 어울린 마을주민은 지통마을이 아니라 예안면 소재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도 예안면소재지는 인근 마을의 중심지로서 예안장(5일장)이 서는 등 제법 북적거린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다른 기술을 보자
“나의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고학력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 청구대학을 중퇴한 분인데, 순경, 교사, 탄광관리자를 전전하다가 결국 깊은 산골로 들어와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을 하면서 허구 헌날 밭에 돌만 집어내며 세월을 보내셨다. 물론 우리 형제들도 식전 식후, 그리고 하교후에는 아버지를 따라 돌투성이 밭을 따라다니며 돌집어 내는 일에 강제 동원되었다. 출생 혼인 사망신고 등 행정업무와 심부름을 도맡아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가족에게는 냉담했던 분이었다....”
이재명 대표 스스로 화전민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우리 집도 할아버지 대에는 그런대로 땅뙈기를 가지고 농사지으면서 꽤 먹고 살만했던 모양이다. 작은 마누라 얻어 살림을 차릴 정도였으니. 그러나 아버지는 별다른 농토도 없었고, 그나마 당시 유행대로 돈이 생길 때마다 밤에 몰래 모여 화투장을 쪼이고, 결국 도박습벽이 들어 집문서, 땅문서까지 잡히다 보니 결국 없는 재산이나마 거덜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머님 말씀이 봄에 밭을 갈려고 갔더니 다른 사람이 쟁기질을 하고 있길래 ‘왜 남의 땅에 쟁기를 대느냐’고 물으니 이제는 자기 땅이라고 하더라나. 겨우내 화투장 쪼우다가 결국 한 뙈기 남은 땅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린 것을 어머니는 농사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만평 김경수 화백
아버지는 결국 나도 모르게 어느 날 고향을 떠나...
자신의 블로그에는 보다 자세하게 썼다.
“아버지는 결국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도 모르게 어느 날 고향을 떠나셨다. 어머님은 어린 형제들을 데리고 남의 땅을 빌리고, 깊은 산속 밭을 일구며, 도저히 어려울 때는 이웃들에게 보리 한 되, 좁쌀 한 되 이런 식의 적선을 받으며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힘겨운 농사일에 예외는 없었다. 형님들과 초등학생인 나와 어린 동생들도 감자밭에 나가 풀을 뽑고 감자를 져 날랐다. 가까운 산에 올라 갈비(소나무낙엽)를 긁어모으거나 어떤 때는 몸짓만큼 큰 지게를 지고 땔나무짐을 지기도 했다. 들기조차 어려운 큰 도끼로 어머니가 불을 때기 쉽게 땔나무를 자르거나, 근 40리길을 걸어 구호식품으로 나온 밀가루를 얻어 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정말 이 대표의 부친 이경희씨는 도박 때문에 작은 밭뙈기를 도박빚에 넘기고 훌훌 털고 성남으로 떠났던 것일까? 이 대표의 부친이 고향을 떠난 무슨 다른 속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