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는 6월 27일 열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과 4.19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 신청 대상에 선정됐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 중에는 위 문건을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기록물로 언급하며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빙 둘러 적은 사발통문(沙鉢通文)과 농민군 해산을 권고하는 흥선대원군 효유문(興宣大院君 曉諭文) 등이 대표적이다. 동학자료들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한 평등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조선일보, 2017. 6. 28)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 말한 사발통문은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는 잡기로 분류해야 할 문건이다. 사발통문은 통문 중에서도 주모자를 숨기기 위해 참여자의 명단을 사발처럼 둥근 원을 따라가며 서명한 것을 이른다. 사발통문 이전에 통문이라는 자격부터 갖추어야 하기에 거기에는 일정한 서식이 있다. 개인 간에 오가는 편지에서도 서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문의 서식은 서두에 通文이라고 제호처럼 쓰고, 줄을 바꾸어 右文爲通諭事段……(우문위통유사단……)이라는 문구로 시작하여 본론을 말한 다음, 모일 장소나 일시를 쓰고 ……千萬幸甚(……천만행심)이라는 글귀로 끝을 맺으며, 수신처·발신연월일·발신처 및 발신자 명단을 차례로 열기(列記)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를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
대체적인 서식은 이와 같으나 ‘通文’이라는 제목을 주로 쓰는 가운데, 檄文(격문)이나 敬通(경통) 등 다른 제목을 쓴 경우도 있다. 마지막의 발신 일자, 참여자 명단, 수신처 등은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기 문건이 왜 통문이 될 수 없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 |
이 문건은 대략 내용에 따라 네 단락으로 구분된다. 이를 분석하면 아래와 같다.
![]() |
제1단락은 1893년 11월, 20명의 동지가 서명하고 각 리의 이집강(里執綱)에게 통고한 문서로 여겨지나 ①제목과 ②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이 ③발신 연월일 이하만 있다. 편지를 예로 든다면 마지막의 발신 날짜와 발신자만 있고 앞의 편지 내용이 없는 것과 같다. 둥글게 돌아가며 쓴 이름 안에는 직경 5cm의 원이 있고 그 원을 따라 쓴 20명의 이름 중에는 크기가 약간 큰 전봉준의 이름도 보인다. 제목과 본문을 갖추고 있었다면 여기까지를 통문이라 할 수 있다.
![]() |
제2단락은 ‘오른쪽과 같이 격문을 사방에 날려 보내니’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격문, 즉 앞의 통문을 배포한 다음 일어난 민심의 동향을 적고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虐政)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속만 부글부글 끓이면서 난리라도 터져 나라가 망해야만 한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던 차에, 동학교도들이 통문을 돌리고 봉기(蜂起)할 것이라는 소식이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호응하는 장면이다. 이 글에는 난리가 나서 나라가 망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이대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백성들의 원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 |
제3단락은 통문을 돌리고 난 다음 동요하는 민심 사이에서 동학교도로 이루어진 도인들이 송두호의 집에 모여 차후 진행해야 할 대책, 즉 선후책(善後策)을 논의하는 과정과 그 논의에서 결정된 4개 조항을 적고 있다. 그런데, 정읍시에서는 고부면 고부주산길 4(구 송두호의 집, 신중리 562-1)를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이라 하여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 문건을 통해 당시 통문이 배포되었다는 점과 통문 배포 후 송두호의 집에 모여 선후책을 논의했다는 점 외에 통문이 누구의 집에서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송두호의 집은 선후책을 논의한 곳이지 통문을 작성한 곳이 아니다.
![]() |
제4단락은 선후책 4개 조항을 결정한 후 이를 실행할 지도부를 구성하는 과정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나 나머지 부분이 잘려나가 더 이상의 내용 파악은 불가하다.
이 문건은 통문 배포와 이후 송두호 집에 모여 4개 조항의 선후책을 의결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집행부를 구성하는 등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잡기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아마도 이러한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자세히 알고 있던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발송 연월일 앞에 통문이라는 제목과 본문이 있었더라면 당시 배포된 진본은 아닐지라도 그것만 따로 떼어내 사발통문이라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발신 날짜, 발신자, 수신자만 남아 있는데다가 나머지 통문을 배포한 후 벌어진 상황이 같은 면에 기록되어 있어 통문이라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 문건은 2015년 12월, 전라북도에서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역사자료로,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20명이 거사 계획을 세우고 그 내용을 사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한 문서’라는 사유를 들어 문화재(전북도 고시 제2015-337호)로 지정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 필자는 상기 분석 자료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보내 통문이 될 수 없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한 바가 있다. 하지만 필자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 지정된 후에는 기념재단을 직접 방문하여 전북도청과 기념재단 관계자를 만나 사발통문은커녕 통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에 두 관계자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추후 문화재 심의위원과 논의하여 그 결과를 알려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연락은 없었으며 지난달 세계기록유산 후보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잡기에 지나지 않는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둔갑시킨 황당한 일은 교과서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행 교과서 중 교학사와 금성출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교과서는 해당 문건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사발통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 |
| ▲ 천재교육 한국사 교과서 197쪽 |
이에 대해 필자는 이 문건을 사발통문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필자의 지적에 대한 출판사의 답변과 처리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
교학사 |
수록하지 않음 |
|
금성출판 |
수록하지 않음 |
|
동아출판 |
학계의 일반적인 논의에 따른 것임 |
|
리베르 |
집필자의 답변 거부 |
|
미래엔 |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임 - 미수정 |
|
비상교육 |
검토 약속 - 미수정 |
|
지학사 |
집필자의 답변 거부 |
|
천재교육 |
사발통문 → 사발통문 필사본으로 수정 |
비슷한 질의에 대해 가장 황당한 답변을 한 곳은 국사편찬위원회다. 답변 중 일부를 소개한다.
‘조선시대 생산된 통문에 일정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본인은 들어본 바 없다. 또한 통문에 일률적으로 右文爲通諭事라고 언급되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일 따름이다.’
‘질의자는 통문이라면 전봉준의 글씨를 크게 쓰지 않았다고 단정하시고 있으나 그 근거는 매우 박약하다. 전봉준의 글씨가 크게 쓰여 졌다고 하나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 판단에 불과한 것이며 글씨의 크고 작음은 붓글씨를 쓸 때 각자의 버릇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집강(執綱) 좌하(座下) 이하의 문구는 난리를 일으키게 된 배경과 불특정 다수가 이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어떻게 난리를 진행시킬 것인가가 기재되어 있는 셈이다. 대개 연구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 문건을 고부 농민봉기를 촉발시킨 통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국편의 답변을 보노라면 답변자는 이 문건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답변자는 고문서에 대한 신중한 접근 자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고문서는 글씨의 크기뿐만 아니라 점 하나까지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서술조차 확인하지 않고 ‘금시초문’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다. 국편 질의 때마다 느끼는 실망감을 또 한 번 경험하였다.
![]() |
이 외에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사발통문이라는 항목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동학군의 통문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사발통문을 들 수 있다.’고 하여 근거도 없이 통문 제1호라 하는가 하면, ‘그 내용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京師]로 직향(直向)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라고 하여 사실 관계와 전혀 맞지 않은 서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통문이나 언론 등의 항목에서는 이 문건 사진을 사발통문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모두 수정해야할 부분이다.
필자의 주장은 위 문건이 본래의 사발통문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발통문이기 전에 통문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모두들 사발통문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백과사전에 싣고, 교과서에 실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문화재로 등록하는가 하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념관 관련자, 심의위원, 교과서 집필자, 백과사전 집필자는 모두 해당 분야 전공자일 것이다. 전공자라면 위 문건을 한 번만 읽어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읽고도 판단이 안 된다면 전공자라 할 수 없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