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무라이 와타나베 아키라 씨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 업데이트 2006-04-1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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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일본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비즈니스 차원에서 일본에서 일도 하고, 일본사람들을 접대도 많이 했으며, 그들과 한ㆍ일 문제를 밤을 지새우면서 논(論)해 본 사람으로서, 그들과의 대화와 만남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편향적일수도 있고, 그들을 폄하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오로지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국한했으면 합니다.
일본을 상징하는 것은 많다. 국화, 칼, 벚꽃(사쿠라), 후지산. 생선회(사시미) 등. 그러나 일본을 대표하는 말을 내세운다면 당연히 ‘사무라이’(侍)일 것이다. 모실 시(侍). 즉 윗사람들 모신다는 말이다. 이는 곧, 윗사람을 위해서 과감히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린다는 뜻이며,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에 벌어진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일본 팀을 우승으로 이끈 ‘스즈키 이치로’가 사무라이 중의 사무라이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심지어 이승엽 선수도 일본 혼의 상징인 ‘사무라이’로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세 가지 칼을 사용하던 사무라이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무게와 재질이 다른 야구 방망이를 사용한다는 데서 일컬어진 것이란다. 일본어 국어사전에는 사무라이’란 뜻을 ①칼을 차고 무예를 갖추어 주군을 섬기는 자 ②에도시대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가운데 사(士)’의 신분을 가진 상급무사 ③상당한 인물, 기골이 있는 인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들 무사는 인(仁),의(義),예(禮), 지(智),신(信)의 5가지의 덕과 충(忠),효(孝)를 더한 7가지의 덕을 대단히 중요시하는 무사도를 숭상한다. 무사들은 특히 의(義)를 중시한다. 의리(義理). 인의(仁義). 충의(忠義). 은의(恩義). 신의(信義) 등이 모두 의(義)를 바탕으로 지켜야 할 덕목 들이다. 이러한 무사도 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일본인과 접촉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일본 비즈니스를 하려면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갖춰야 하는가? 다시 말해 일본 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영업맨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대체로 다음과 같이 10개쯤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열심히 일 해야 한다. 2. 성실성을 보여야 한다. 3. 부지런해야 한다. 4. 도전정신이 있어야 한다. 5. 신념을 가져야 한다. 6. 끈기가 있어야 한다. 7. 연구심이 있어야 한다. 8. 발상력 즉,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9.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10. 항상 친절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평범한 것 같지만 일본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내재되어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인은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중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인. 우리는 항상 그들의 속내에 대해서 경계심을 품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길게는 20여년, 짧게는 10년이 넘도록 일본인들과 업무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친분을 쌓아왔다. 그 친분을 토대로 업무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필자 역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일본과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뜯어보면 배울 점이 많다. 친절함, 예절, 성실, 검소함,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자세, 진지한 업무 태도,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 등을 일본인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규슈지방이다. 규슈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후쿠오카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50분이면 도착한다. 부산-후쿠오카를 오고가는 쾌속선은 2시간 50분밖에 안 걸린다. 규슈 지방에 가면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미술관, 백화점 등에 한글로 된 안내 간판이 즐비하다. 생김생김이 비슷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한국 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구분이 잘 안 될 정도이다. 특히 후쿠오카지역은 더욱 그러하다. 밤거리를 거닐다보면 도쿄와는 달리 인간적(?)으로 비틀거리며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내던지고, 때로는 고성방가(高聲放歌)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띤다. 그렇다면 규슈 사람들은 절제되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 사람들의 틀에서 이탈된 것일까? 규슈지방은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탓에 문화적인 교류도 많았을 것이다. 정확한 통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규슈 사람들의 90%가 한국인의 유전인자와 동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규슈 남쪽 가고시마에 가면 도자기로 유명한 14대 심수관 씨의 도예촌이 있다. 심수관 씨의 조상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사쓰마(현 가고시마)의 영주인 ''시마쯔 요시히로(島津義弘)''에 의해 전라도 남원 땅에서 붙잡혀 갔다. 14대 심수관 씨의 본명은 심혜길이다. 그는 몇 년 전 ''임란 도공 400년만의 귀향''이라는 테마로 우리나라에서 도자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필자는 수 년 전에 그의 도예촌을 간 적이 있다. 그는 대나무 통을 내보이며 수수께끼를 냈다. 대나무 통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면 도자기 선물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알아맞히지 못했다. 그 대나무 통에는 그가 14대에 이르기까지 고이 간직해온 가보(家寶)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대 조상인 심당길 씨가 일본에 붙잡혀 올 때 썼던 갓끈과 헤어진 망건 조각이었다. 달이 휘영청 밝은 추석날 밤이면 산에 올라 보름달을 쳐다보면서 400여 년 전의 조상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단다. 오늘날 일본 도자기는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러나 그 뿌리는 우리나라에서 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도공들의 수가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가사키 지역 아리다야끼의 주인공인인 이참평 씨 외 150여명, 사스마야끼의 심수관 씨 외 80여 명, 경상도 김해에서 붙잡혀간 후 이마리요를 일으킨 심해 종전 외 900여 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일본의 도자기 문화는 이처럼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우리 조상들의 눈물과 땀에 의해서 꽃을 피운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규슈 사람들은 타 지역의 일본인들과는 달리 한국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많다. 필자가 십 수 년 간 친구로 지내는 일본인들도 규슈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나카무라학원대학의 사무국장으로 있는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 59세) 씨다. "안녕하십니까? 죄송합니다만 혹시 일본말 아시는 분계십니까?" 와타나베 씨가 일본의 유명 건설회사인 하자마구미(間組)의 영업담당과장 시절 한국 조달청을 단신으로 찾아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그때 마침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이 모 계장이 손을 들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었단다. 어떻게 보면 독불장군(?)이다. 와타나베 씨도 후쿠오카 출신이다. 검도가 4단인 그는 하자마구미(間組) 규슈지점 영업부장 출신이다. 1988년 후쿠오카 대한민국 총영사관 공사 수주를 위하여 단신으로 대우건설 사장실의 문을 두드린 것이 그와의 첫 인연이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며 사명의식이 투철한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회사업무 관계에서 시작하여 개인적으로는 물론, 가족까지 친분이 두터워진 경우다. 그는 후쿠오카 지역의 주요 인사들을 필자에게 소개함은 물론 필자가 후쿠오카에 방문할 때는 비서실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밀착 경호(?)를 한다. 그와 필자는 각각 건설 회사를 떠나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나 교류는 계속되고 있고, 휴대전화를 통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서로의 안부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와타나베 씨와의 추억은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의 조카딸과 재일교포와의 결혼 문제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의 일이다. 와타나베 씨의 처조카 딸이 재일교포 2세와 사귀던 중 결혼문제가 거론 되었다. 물론, 집안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재일교포와의 결혼은 있을 수 없다며 신부 측 온 친척이 들 끊었다. 재일교포인 야나가와 유이치 씨의 좌절은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해 한국 사람들과 업무적으로,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고 있던 와타나베 씨는 가족들을 설득 해 나아갔다. 신부의 부모는 물론, 주변 친척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는 선입견만 가지고 반대하지 말라. 내가 접해 본 한국 사람들은 따스하고, 정이 많으며,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일본사람보다 더 낫다’는 것이 와타나베 씨의 주장이었다. 재일교포 남자와 잘 나가는 일본인 여자와의 결혼은 재일교포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 의식 때문에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와타나베 씨가 총대를 멘 끝에 이 결혼은 어렵게 성사가 되었다. 와타나베 씨는 상징적으로 필자 부부를 조카딸의 결혼식에 초청했다. 필자는 요즈음 말대로 결혼 홍보대사의 역할을 한 것이다. 필자 부부는 후쿠오카에서 신칸센을 타고 야마구치(山口)현의 우베라는 곳까지 갔다. 물론 신부 측 하객으로 자리했다. 결혼식은 사당 같은 곳에서 근엄하게 거행되었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양가 하객들을 소개하는 차례가 되었다. 재일교포인 신랑 측의 하객들은 숫자는 많았지만 차림새들은 신부 측 하객들에 비해 더 초라해 보였다. 와타나베 씨를 소개할 때 신랑 측의 하객들 사이에서 "아~그 사람~" 하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 결혼식은 결정적으로 와타나베라는 사람이 앞장섰기 때문에 성사된 것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후쿠오카 영사관 공사를 통해서 맺어진 와타나베 씨와의 인연이 재일교포 2세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까지 발전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 했다. 그 자리에 참석해 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감정의 설렘이랄까? 그때의 분위기는 그랬다. 한국인이면서 일본인 하객으로 참석한 필자 부부는 신랑 쪽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일본의 결혼식은 피로연이 재미있다. 적어도 두 시간 반 내지는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일본의 결혼식에 참가하려면 한 달 전 쯤 예약을 한다. 정확한 인원수, 자리배치, 음식주문 까지 매뉴얼로 짜여있다. 우리 식으로 봉투만 내밀고 줄달음치는 것과는 판이하다. 일단 참석하면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몇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한다. 때로는 ''가라오케''를 들여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날 와타나베 씨 조카딸의 결혼식에는 특이한 이벤트가 있었다. 신부의 어머니가 일본 고전 무용 전공자다. 그날 결혼식장에서 신부 어머니의 무용 공연이 있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춤이었다. 신부의 어머니가 행사 당일 춤을 춘다는 사실이 특이했다. 필자 부부도 지명을 받아 ‘사랑해 당신을’을 열창했다. 피로연이 점점 달아올랐고, 와타나베 씨는 재창, 삼창을 받았다. 마치 와타나베 씨가 그 날의 주인공 같았다. 피로연이 끝나고 필자는 신랑 측 집에까지 붙들려 갔다. 재일 한국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살고 있는 모습에서 그들의 아픈 과거, 현재, 내일을 느낄 수 있었다. ≪베니스의 개성상인≫(오세영 作)이란 소설에 조선인 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포로가 된 조선 수군들은 대마도를 거쳐 이키섬을 거쳐 하카다(현 후쿠오카)로 이송되고 그 일부가 다시 사쓰마(가고시마)로 보내진다. 그 당시 400여 명의 포로들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두 달 만에 일본 열도의 최남단 규슈 남쪽지방인 사쓰마까지 끌려가게 된 것이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 경상 우수영과 맞선 일본군이 바로 사쓰마의 영주인 시마쓰 요시히로의 부대였던 까닭이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도공들의 인생역정과도 같은 흐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당시 신랑 측의 친인척 그리고 군락을 이루고 살고 있던 그들의 모습에서 연상될 수 있었던 과거사 같기도 하다. 조총련, 민단의 구분이 안 되고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출신들이 뒤엉키어 살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을 나가서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을 잘 수 있는 모진 고통의 연속들이 이들의 삶의 전부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서 번듯하게 자라 일본의 귀한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동네잔치를 벌일 만도 했다. 울산이 고향이라는 팔순 할머니는 우리의 손을 부여잡으며 반가움의 눈물을 쏟아냈다. "여기가 어딘데, 여기까지 왔습니까?"라는 말에서 일본이 그야말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있을 수 없었다. 오로지 배고픔의 극복이 그들의 전부였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들이 집안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그들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에 점선으로 원을 그려서 ''조총련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신문에 나면 그대로 믿어질 수 있을 거라고 혼자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룻밤 묵고 가라고 애원하던 울산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떠나오던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지금쯤 그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 그동안 일본 땅에서 겪었던 삶의 질곡의 세월들을 모두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 후 와타나베 씨의 가족들이 서울에 왔다. 교포 신랑의 장인, 장모가 함께 왔다. 한강 물이 넘치는 대홍수가 났을 때였다. ‘올까말까’ 망설이다가 큰맘 먹고 강행했던 것 같다. 필자는 2박 3일 동안 그들을 정성껏 안내했다. 하루는 필자의 집에 초대하여 우리 한국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 신부의 부친은 도쿄예술대학을 졸업한 음악인이다. 그 날 필자의 집에서 음악을 전공한 필자의 아내와 함께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신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나 좋아했다. 한국이라는 나라. 잘 알지도 못하고 와 본적도 없는 나라. 그러한 한국 사람에게 딸자식을 시집보내고서도 뭔가 마음 한 구석에 어둠이 서려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본인들의 눈으로 보고 느낀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에서 사위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그들은 인사동에서 징과 꽹과리 등을 사면서 무척 즐거워했다. 몇 해 전, 와타나베 씨의 딸이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거행되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랑, 신부가 앞에서고 양가 부모들이 뒤에 섰다. 신부가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는 글’을 낭독했다. 바다의 깊이를 알 수 없듯이 별의 높이를 알 수 없듯이 부모님의 사랑은 그 깊이와 높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키워주시고, 결혼까지 시켜주신 아버님! 어머니! 손자, 손녀가 자라서 오늘의 저희처럼 결혼식을 할 때, 건강하신 몸으로 그 결혼식에 꼭 참석해 주세요…. 강인하고 심지가 굳고 검도로 단련된 무사정신이 투철한 와타나베 씨도 딸이 읽는 글을 들으면서 눈물을 훔쳤다. 결혼식 행사를 마치고 필자는 또 하나의 이벤트를 만났다. 야마구치 현에서 와타나베 씨의 주선으로 결혼식이 성사되었던 그 주인공들이 세 아이를 데리고 와타나베 씨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정말 세월의 빠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었다니….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더욱 반가웠다. 한국에 한번 오라는 말을 남기고 그들과 헤어졌다. 필자는 최근에도 와타나베 씨의 장남 결혼식에 다녀왔다. 이제는 그의 친척들까지 모두 한 가족이 되어버렸다. 장녀의 결혼식보다는 덜 화려했지만, 내용상으로는 훨씬 재미가 있었다. 신랑이 인사말을 하고, 신부가 노래를 하며, 주인공과 하객이 한데 어우러져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밖에도 와타나베 씨와는 많은 추억이 있다. 설악산. 속초, 대구, 경주, 부산, 거제도 등 시골 풍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그와 부산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에 갈 때의 일이다. 배 안에서 어떤 할머니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백제인의 골격을 닮은 탓일까? 그 할머니는 와타나베 씨를 한국인으로 오인하고 한국말로 계속 말을 걸었다. 물론, 와타나베 씨의 한국말 실력은 인사말 정도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가 그가 할 수 있는 한국어의 전부다. 아무튼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장시간 대화를 이어갔다. 때로는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감정의 전달이 중요하다. 서로의 제스처를 통해서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와타나베 아키라 씨가 근무했던 하자마구미라는 회사는 아직도 상당히 어려운 상태다. 그가 지금은 후쿠오카에 있는 나카무라 학원대학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지만, 한 때 대우에서 일본 지점장으로 와타나베 씨를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회사가 어려울 때 혼자만 빠져나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렇다. 나 혼자만 살겠다고 기웃거리는 요즈음의 세태와 비교하면 본받을 만한 대목이다.대학에서 제 2의 인생을 펼치고 있는 와타나베씨…. 그의 파이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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