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 이순신은 쑥스러워하며 검명을 내보인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라고. 물들일 染(염)자의 공업적 이미지는 이순신의 칼의 내면을 드러낸다.
난중일기 - 이순신은 청년 장교 시절 함경도 국경에 근무할 때 「함경도일기」를 남겼고, 임진왜란 중에는 「난중일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 정신은 치열하다. 그는 빠뜨리지 않고 그는 중언부언하지 않았다.
성난 파도와도 같은 한없는 적의가 어떻게 적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작동되는 것인지, 나는 늘 알지 못했다. 적들은 오직 죽기 위하여 밀어닥치는 듯했다. 임진년에 나는 농사를 짓듯이, 고기를 잡듯이, 적을 죽였다. 적들은 밀물 때면 들이닥치는 파도와도 같았다. 적들이 멀리 물러간 밤에, 나는 때때로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했다.
적들은 아침에 왔다. 일출 무렵에 바람은 잠들었다. 해가 떠오르자 아침 안개는 스러졌다. 보름 사리의 북서 밀물이 명량의 멱통에서 소용돌이쳤다. 허연 파도들이 말떼처럼 출렁거리며 목포 쪽으로 몰려갔다. 물보라가 날렸다. 진도 동쪽 해안 금날산 묏부리에서 연기가 올랐다.
살려주자, 살게 하자, 살아서 돌아가게 하자....내 속에서 나 아닌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내 몸 속에서 양쪽 다 울어지지 않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 가장 괴롭고 가장 선명한 길을 칼은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 죽기를 원하느냐?
- 내 손으로 죽기를 원한다. 칼을 한번 빌려달라.
싸움을 끝낸 기진한 함대가 대열을 돌려 모항으로 돌아갈 때, 그 울음은 포구 어귀까지 들려왔고 적들의 울음 위에서 갈매기가 울었다. 적들의 울음이 개별적인 울음이라는 것을 임진년에는 알지 못했다. 칼로 베어지지 않는 그 개별성이 나의 적이라는 것도 임진년에는 알지 못했다.
포로들이 시체를 산 아래로 옮겨왔다. 나는 들 것을 든 포로 뒤를 따라 내려왔다. 포로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로 감독군관에게 뭐라고 지껄였다. 군관이 나에게 포로들의 말을 옮겼다.
- 죽은 자들을 고향이 보이는 바닷가에 묻게 해달랍니다.
나는 군관에게 말했다.
- 네가 알아서 묻어라.
한 싸움에 대하여 두 건의 다른 장계를 받으니 착잡하다. 대국을 섬기기란 이토록 어려운 것임을 너는 알라. 허나 스스로 공을 줄여서 天兵의 장수를 옹호하는 네 마음이 어여쁘다. 전쟁은 언제 끝나려느냐. 어느덧 가을 기운이 서늘하고 떠도는 남쪽 백성들은 올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데, 저 창궐하는 적들을 내 어찌해야 하겠느냐.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한개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 수……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적들 쪽으로…….
('칼의 노래' 중에서)
김훈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일보 문화부기자, 시서저널 편집국장, 국민일보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민권사회2부 기동취재팀 기자(부국장급) 역임.
- ‘칼의 노래’에서 작가로서 역점을 뒀던 건 뭡니까.(월간조선 오효진 기자. 이하 질문은 모두 오효진)
“문체는 완전히 제가 새로 만든 거죠. 전에는 제가 진양조 같은 24박짜리 문체를 썼거든요. 그런데 여기선 완전히 두 박자죠. 주어와 동사만 가지고 썼으니까. 문장을 뼉다귀만 가지고 쓴 거죠. 살은 다 빼 버리고. 그런데도 그 문체를 보고 또 수사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그런 문장을 썼던 일이 없었는데 그걸 제가 만든 거죠.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요! 그 문체로 그 소설을 끝까지 써 낸거죠.”
- 외국문학에선 그런 일이 적지 않았는데, 헤밍웨이도 지독한 단문을 썼고...그건 그렇다 치고 내용적으로는 어떤 점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까?
"한 영웅의 내면을 그린 것인데 그 영웅이 가지는 중세적 가치, 이를테면 충효라든지 勤王(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함)이라든지, 復辟(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주의라든지, 그런 가치를 그 영웅으로부터 제거해 버린 거죠. 적나라한 실존적 내면만 남겨 놓은 거죠."
- 소설가는 창조를 하는 사람이니까. 남이 하지 않는 일을 처음 하는데 상당한 의미를 자타가 부여하지만 구태여 이순신한테서 그런 가치를 제거하려고 한 뜻은 어디에 있었나요? 내 생각엔 충무공한테서 충성과 애국을 빼면 충무공이 아니지요. 부처님한테서 불심을 빼면 부처님이 아니듯이.
“이순신 장군은 사실상 그 중세적 가치로 전쟁을 했을 거요. 그런데 난중일기를 보니까 그의 내면이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대목들이 행간에 언뜻언뜻 나왔어요. 형식적으로는 勤王, 復辟이겠지만, 왜냐하면 그때는 군인이 충성심을 표방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을 당했으니까. 그러니까 자기 내면에 어떤 갈등이 있더라도 왕에게는 충성심을 보여야 했죠.
- 그런 대목이 어디에 있던가요?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고 40일 동안 갇혀서 매를 맞고, 혐의가 없어서 풀려 나왔잖아요. 그런데 나오던 날, 일기에 그냥 ‘몇 월 며칠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 어느 집에서 잤다’ 이것만 써 놨어요. 딱 한 줄로. 다른 아무 말도 안 썼어요. 그동안 매를 맞고 고문당한 정치적 부당함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죠. 그런 걸 기록에 남기면 죽으니까. 이런 걸 보면서 이순신이 충효사상에 의해서만 전쟁을 수행한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 그러니까 ‘인간 이순신’을 복원했군요.
“예, 그러나 그건 내 환상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로 이순신이 그런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요.”
- ‘칼의 노래’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女眞이란 여자를 데리고 잤는데 멸치젓국 썩는 냄새가 났다고 돼 있어요. 그런 구체적 단서가 어디 나옵니까.
“난중일기를 보면 여진이란 여자가 나오는데 굉장히 천한 여자였던 것 같아요. 이순신 장군이 해남 사령부에 있었는데, 이 여자가 여기와서 자고 아침에 갔다가 며칠 있다고 또 와서 자고 가고 그러거든요. 이런 걸 봐서 이 여자는 병영에서 꽤 가까운 데 있었을 겁니다. 아마 군대를 따라다니던 창녀가 아니었나 생각돼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이 여자와 하루에 (성행위를) ‘세 번 했다’고 써 놓기도 했어요. 군인이라서 정확하게 썼어요. 두 번 했으면 두 번 했다고 썼구요. 그런데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난중일기에는 그런 부분을 다 빼 버렸지요. 충무공이란 그 거룩한 이름에 누가 될 부분은 다 뺐어요. 또 난리통에 제대로 씼지도 못하고 먼 길을 걸어다녔을 테니까 젓국냄새 얘기를 쓴 거구요.”
- ‘칼의 노래’는 쓰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2001년 겨울 두 달 걸려서 썼어요. 그런데 보름간을 놀았으니까, 사실은 한 달 반 동안 쓴 거지요. 저는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하루에 세시간만 글을 써요. 나머지는 자전거도 타고 그러면서 놀아요.”
- 이순신 장군에게 특별히 매달린 건?
“내가 고대 영문과에 다닐 때 19세기 낭만주의를 배웠는데 워드워즈, 바이런, 셸리, 키이츠를 읽다가 난중일기를 읽게 됐어요. 낭만주의가 아름답고 이상적이고 그렇잖아요. 그때 이은상의 난중일기를 읽으니까 낭만주의가 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인간으로서 입에 담기 유치하고 졸렬한 소리를 이자들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내가 이담에 난중일기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글을 써야겠구나 하는 결심을 했죠. 그때는 내 역량이 너무 없어서 그런 글을 쓸 수가 없었지요. 그 후에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시간도 있고 해서 쓰기 시작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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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같이 살았다
김훈은 1948년 5월 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서울토박이다. 가회동 누상동 원서동 사간동으로 옮겨가면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金光洲)는 ‘비호’ ‘정협지’ 같은 무협소설을 쓴 작가다. 동아일보에 ‘비호’를 연재하기도 했다. 무협소설가의 직업상, 가족은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고료라는 게 없었다. 1년간 연재소설을 쓰면 신문사 사장이 쌀 한 가마를 보내는 게 전부였다. 리어카에다 쌀가마를 싣고 왔는데 쌀가마에 신문사 사장 명함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적같이 살았다. 지금도 굶은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평생 무협소설을 쓰셨는데 그래도 그걸로 우리가 겨우 먹고 살았다."고 했다.
김훈의 고교시절, 아버지는 암에 걸려 5년을 앓다 끝내 숨졌다. 투병을 하면서도 글을 써야 했다. 무협지를 팔지 않으면 가족이 굶어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김훈은 병든 아버지가 부르는 이야기를 곁에 앉아 원고지에 받아써야 했다. 문화부 기자가 집에 와서 기다렸다고 원고를 받아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부르고, 김훈이 받아쓴 걸 다시 읽으면 아버지는 ‘거기 점 찍어. 거기 줄 바꿔’라고 교정했다. 그는 “그때 저한테 문장수업이 좀 됐을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그땐 한국일보에 학력제한이 없었단다. 당시 장기영 사장이 고졸이었기 때문이다. 시험 쳐서 들어가 보니 그만 고졸이지 다 대졸이었다. 마지막 면접을 하는데 장 사장이 “왜 넌 학교를 못 나왔냐”고 물었다. 그는 “돈이 없어서 못 나왔다”고 했다.
장 “넌 뭐 하러 신문사에 올랴고 하느냐”
김 “저는 특별한 뜻은 없구 제대를 했는데 먹구 살게 없어서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한국일보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왔습니다. 뽑아 주시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장기영 사장이 그의 얼굴을 보더니, 한심한지 편집국장을 이렇게 보며 “야, 이런 애는 어떻게 해야 되냐”고 웃으며 “너는 이 자식아 目子(눈)가 불량해서 기자는 할 수 있겠다. 에라 들어와라!”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가 1989년까지 다니면서 몇 번이고 그만뒀다가 재입사했다. 이유는 상급자와의 불화였다. 그 후에도 입사와 퇴사를 밥먹듯했다. 한국일보(73)-낭인(90)-tv저널(91)-시사저널(94)-국민일보(98)-한국일보(99)-시사저널(2000)-한겨레신문(2002)을 거쳤다. 그는 불화를 이렇게 말했다.
불화, 불화, 절대 안 견뎌요
“상사와의 불화, 하급자와의 불화 때문이지요. 내가 경찰기자였을 때는 캡과의 불화, 차장 때는 부장과의 불화, 부장 때는 국장과의 불화, 또 국장 때는 하급자와의 불화...전 반성한 적이 없어요. 지금도 전 옳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이 다 잘못됐다고 생각합니까. 전 원칙에 대한 문제였지요. 내 성품이 모자라서 그랬지요. 전 견딜 수 없는 건 견디지 못해요. 전 절대 안 견디지요. 그냥 끝내 버려요.”
1980년대 들어 전두환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을 김훈이 대부분 썼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잘려 나갈 때도 그는 살아남았다. 기자 7년차 시절이었는데, ‘니가 글 잘 쓰는 놈이니까 다 써라’ 해서 ‘좋다 내가 다 쓴다’고 했다. 그가 원고를 쓰면 아무도 데스크를 안 봤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위에 차장, 부장, 부국장, 국장이 데스크를 봐야 하는데 ‘나는 모른다’하고 다 술마시러 가서 데스크를 봐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걸 김훈이 다했다. 혼자 원고를 공장(공무국)에 갖다 줘서,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나왔다.
1989년 12월 31일 신문사를 때려치웠다. 80년대가 하도 지겨워 80년대가 끝나는 날 나와 버렸다. “내일부터 깨끗한 90년대가 된다는데 이런 언론계에서 나가서 할 일 없으면 그냥 굶어 죽자, 하고 해서 나왔다”고 한다. (월간조선 2002년 2월호 참조)
그리고 소설을 썼다. 틈틈이 '기자질'을 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가난한 소설가로 돌아갔다. 그의 소설은 평생 치열하게 살았기에 가능한 침전물이다. 얼마나 뻑뻑한 진액인지 모른다. 그의 치열함은 언제나 자극제가 된다. 읽고 또 읽고 베껴 쓴다. 잘 싸우고 고집 세고 오만하고 꼼꼼하고 치밀하고 지랄 같고 거짓말하지 않는 문체를 배우고 싶다. 그래서 그의 글을 짓밟게 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