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밤길을 걸으며…

  • 이상흔 월간조선 기자 hanal@chosun.com
  • 업데이트 2009-06-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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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갔는데 밤길을 두 시간 정도 걸었습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별빛을 가렸습니다. 발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개구리 소리, 밤새 소리, 풀벌레 소리, 이름 모를 짐승 소리가 교향곡처럼 울립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반딧불이 모습도 여기저기 많이 보였습니다.

귀신이 나온다고 무서워 지나가지조차 못하던 상여집이 있던 곳도 지났고, 어스름 한 무렵 미루나무 가지에 걸려서 날리던 비닐을 보고 귀신이라며 무서워 줄행랑을 치던 그 길도 지났습니다. 지금은 논밭이 되어 버린 공동묘지가 있던 곳도 지나고, 아버지랑 감자를 캐서 밤길을 걸어오던 그 길도 지났습니다.

밤길을 걸으면서 이처럼 완벽한 어둠을 최근에 본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都市에 살면서 '완벽한 어둠'을 느끼기란 참 어렵습니다. 보름달이 뜬 날이나, 컴컴한 그믐날이나 도시의 풍경은 변함이 없습니다. 밤 8시가 이처럼 암흑천지인지 이번에 새삼 느꼈습니다.

낮에 보면 분주한 들녘의 풍경이 펼쳐지지만, 밤이 되면 논밭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산등성이만 컴컴한 어둠 속에서 병풍처럼 서 있습니다. 한반도가 형성된 이래 변함없이 이어져 왔을 풍경입니다.

산골짝마다 전설이 스며 있고, 고개마다 사연이 있는 적막한 이곳도 몇 년 후면 도시의 불빛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경북 道廳을 이전한다면서 이 첩첩산중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완벽하게 보존된 벌판과 산을 밀어버리고 도청과 신도시를 짓는 것이 과연 지역 발전인지, 수백년 이어오던 이 지역의 전통을 없애 버린 후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저도 이런 시골에 新도시를 만들겠다는 발상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뭐든지 부수고 세워야 돈이 생깁니다. 특히 전통적인 개발 논리에 따르면 자연은 그대로 두면 아무 부가가치를 생산시키지 않는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운하를 파든, 4대 강을 살리든, 도청을 이전하든 무슨 명목이라도 만들어 자꾸 뒤엎고 파내야 경제적 효과가 발생합니다. 심지어 한 번 파헤친 강을 새로 뒤덮는 한이 있더라도 끊임없이 건드려야만 경제적 부가가치가 생긴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경북 도청 부지로 정해놓은 곳은 하회마을 코 앞입니다. 도청 부지외에 安東과 醴泉의 접경지역에 무려 400만 평을 신도시 예정 부지로 묶어 놓았습니다.

도청과 신도시가 계획대로 들어서면 이곳에 대대로 내려오던 큰 집성촌 두세 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외 작은 마을 몇 개는 지도에서 이름을 지워야 합니다.

도청이 실제 들어올 부지는 하회마을 바로 앞에 있는 갈전(갈밭마을)이란 동네가 될 예정입니다. 인근 나머지 400만평의 부지는 관공서와 온갖 산업단지, 무슨 클러스터와 거주지역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신도시의 목표 인구를 10~30만명으로 잡아 놓았습니다.

안동시의 현재 인구가 15만명 정도입니다. 안동에서 30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현재 안동시 인구와 맞먹는 규모의 신도시를 짓겠다는 것입니다. 허
허벌판에 설사 도청을 지어놓는다고, 안동까지 30분, 대구까지 1시간 반 거리인데 어느 공무원이 거기에 터를 잡고 살지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하회마을 앞에 도청과 관공서 몇 개 지어놓고 나머지 땅은 신도시 부지로 묶어만 놓고 있다가 한참이 지난 후 용도 변경해서 기업들에 팔아버릴 것이 눈에 보듯 뻔합니다. 그 후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아도 그려집니다.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방은 풍부한 전통과 儒敎 문화가 아직 꿈틀대는 곳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현재의 위치에 도청과 신도시가 들어서면 하회마을은 용인 민속촌 같은 박제화된 마을이 될 것입니다. 먼 훗날 하회마을을 보존하기 위해 사방에 철조망을 치거나, 진짜 거주민은 없고 민박이나 기타 장사하는 사람만 살던가, 아니면 아예 마을 자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전부터 하회마을과 그 주변 지역은  ‘유교와 전통문화’라는 거대한 주제를 놓고 거기에 맞게 잘 개발을 하면 미국의 아미쉬 마을처럼 전통도 보존하면서,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처럼 아무 철학도 개념도 없이 지자체들의 경쟁구도 속에서 중구난방으로 길을 넓히고, 공장을 지어서 그렇고 그런 특색없는 회색 신도시를 만들기에는 잃는 것이 너무 많은 아까운 지역입니다.

산천은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몇 년 후 불도저가 사납게 산허리를 밀어버려도 누구하나 이 유구했던 산천을 대변하거나 울어주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 산천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은 뭐가 뭔지 모르는 농민들입니다. 도시민의 이해 관계가 없는 곳이기에 사라질 때도 그저 그렇게 자기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는 개발과 발전에 대한 정의도 달라질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깎고 파헤치고, 공장을 짓는 것만이 개발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한 이 땅 어느 한 곳도 온전하게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동네 야산 하나를 허물더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행위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사라질 고향 밤길을 겆고 있자니 온갖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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