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과 ‘大韓’에 대한 짧은 생각

  • 이상흔 월간조선 기자 hanal@chosun.com
  • 업데이트 2004-10-0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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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가리켜 ‘韓國’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국호를 정했을 당시 사람들은 ‘韓國’이라고 부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독립신문은 국호가 ‘大韓 帝國’으로 바뀐 후 ‘大韓國’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 사람’은 ‘大韓 사람’으로 ‘조선 땅’은 ‘大韓 땅’ 등 ‘韓國’이 아니라 반드시 ‘大韓’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大韓民國’을 ‘韓國’이라고 부르는 것은 100여 전 ‘大일본제국’ ‘大영제국’처럼 당시 통상 국호 앞에 ‘大’자를 붙였고, 그 후에는 붙이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도 ‘大’자를 붙여도 되고 붙이지 않아도 되는 하나의 수식어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한국’은 그냥 ‘대한민국’의 줄임말이라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다고 봅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한국’이라고 부르는 것을 굳이 잘못되었다고 하기에는 무리한 면이 있습니다. 국호 제정 당시에는 조선을 ‘大 조선’이라 했고, ‘大 명국’, ‘大 청국’ 등으로 흔히 표현했습니다. 같은 차원에서 ‘大 한국’이라고 했다고 보는 것도 틀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국호에서 ‘大’자를 빼고 ‘韓國’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국호 제정 당시의 고종실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三韓의 땅으로서 나라의 초기에 하늘의 지시를 받고 한 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大韓’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될 것이 없고, 또한 매번 일찍이 보건대 여러 나라의 문헌에는 조선이라 하지 않고 '韓'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어 '韓'으로 될 징표가 있어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모두 ‘大韓’이라는 이름을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고종실록 권 36. 광무원년(1897) 10월11일조.> 고종황제의 말씀인즉, 우리나라가 원래 ‘韓’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써왔고, 여러 나라 문헌에도 우리를 ‘韓’이라고 불렀으니 ‘韓’으로 국호로 정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는 설명입니다. 또한 고종황제는 “三韓이 하늘의 지시를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대한으로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종의 이 말을 국호 앞의 ‘大’자를 ‘뺏다 넣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통합된 三韓을 계승하고 하늘의 순리를 따르겠다는 의미를 포함해서 ‘大韓’으로 국호를 못박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호를 직접 만든 당시 사람들의 인식입니다. 독립신문은 ‘한국’이 아니라 ‘大韓國’이라고 쓰고 있다는 것은 처음 이야기 했습니다. 安重根 의사는 휘호 마지막에 항상 ‘大韓國人’이라고 썼습니다. 安의사가 한국을 좀 더 높이기 위해 ‘大’자 하나를 더 집어 넣은 것이 아니라 당시 국호가 ‘大韓’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그대로 쓴 것일 뿐입니다. 현재 애국가의 마지막 후렴에도 ‘大韓사람 大韓으로 길이 보전하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후렴구는 원래가사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에서 조선이란 국호만 그대로 대한으로 바꾼 것입니다. ‘大조선’에서는 흔히 ‘大’자가 탈락되는 경우가 더 많고, 주로 대외적 호칭위주로 ‘大조선’이 쓰였습니다. 내부사람끼리 스스로를 칭할 때는 ‘大조선’이라고 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국인들이 부르는 애국가에서는 大韓의 ‘大’자를 탈락시키지 않았습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국호의 ‘大’ 자를 ‘大조선’처럼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글자로 알았다면 애국가 가사는 ‘한국사람 한국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바뀌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밖에 대한제국 탄생 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헌법인 ‘大韓國 國制’에도 나라 이름을 ‘대한국’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의 인식에는 ‘대한’이 국호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大韓民國의 국호 결정에는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 ‘大韓民國’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년 4월10일 오후10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명. 처음 ‘大韓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1894-1953)였다.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呂運亨) 의원이 반대했다. “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大韓으로 망했으니 大韓으로 흥하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大韓民國’ 국호가 채택됐다.- 조선일보(2000.3.1)의 기사> 어쨌든 고종황제는 국호를 ‘대한’으로 정했고, 당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불렀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大’ 자가 떨어져 나간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말 나온 김에 국호에 이어 고종황제의 功을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국기로 사용하고 있는 태극기 입니다. 우리는 흔히 태극기를 박영효가 일본가는 배 위에서 만들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말하고 배웁니다. 그러나 박영효는 단지 국가의 공식 대외 업무에서 태극기를 국기로 처음 사용할 기회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이를 두고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만들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관료조직을 아프리카 어느 부족 수준 정도의 것으로 보지 않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표현 발상입니다. 아래 태극기에 관한 좋은 글이 있기에 소개 합니다. <태극기는 과연 박영효가 만들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의 기원을 일본으로 파견된 수신사(修信使)중 한명인, 박영효(朴永孝)가 선상(船上)에서 제작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극히 단순한 생각일뿐더러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국기를 당시의 군주인 고종과 어떠한 상의도 거치지 않고 신하가 마음대로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요즘과 비교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중요한 국가 정책을 대통령 협의 없이 행정부처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국기제작이 가벼운 낙서의 비중을 가진 일도 아니며, 요즘의 삼행시를 짓는 것처럼 즉석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박영효가 영국 선장의 건의를 받아 즉석에서 국기를 제작했다는 것 자체는 말도 안되는 단순화의 오류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태극기는 어디에 그 뿌리를 두며 그 제작과정은 어떠했을까? 고종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은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 때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군국기밀(軍國機密)과 일반 정치를 총관하던 관청)을 설립하고 1881년 외국과의 국교 수립에서 국호를 대조선(大朝鮮)으로 칭하고 군주의 칭호도 대군주(大君主)로 사용하도록 한 무렵이었다. 외국과의 외교와 국제질서에의 편입을 위해서 국기는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고, 이에 필요한 국기의 도안에 대한 검토가 구체화 되어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 체결시에는 태극기의 효시인 '태극팔괘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극 팔괘도가 이미 제작되어있는 상황에서, 제 3차 수신사 일행이었던 박영효는 고종으로부터 태극 팔괘도를 국기로 사용하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영국선장 제임스에게 '태극팔괘도'를 대조선의 국기로 소개하고 게양할 것을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 선장 제임스는 태극팔괘도가 너무 복잡하여 팔괘를 4괘로 간략화한 것을 국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 했고, 태극팔괘기는 군주기, 즉 왕실을 상징하는 어기(御旗)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던 것이다. 박영효가 쓴 '사화기략(使和記略)' 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태극에 8괘를 그린 도식(태극팔괘도를 말함)은 특별한 빛깔로서 아름다우나, 여덟 개의 괘를 태극 주위에 분포해 놓으면 너무 획이 조밀하고 복잡하여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또 여러 나라에서 이것을 보고 제작하는 것도 심히 불편할 것이므로 단지 4괘만을 사용해 네 모퉁이에 그어도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외국에서는 국기 외에 반드시 君主의 旗가 있는데 그 표시는 대개 국기의 모양을 따고 채색과 무늬를 놓아 번선(繁鮮)을 아주 화려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견 조율이 있은 후 박영효는 태극팔괘기를 간략화한 태극4괘기를 만들어 국기로 사용하면서 이 사실을 국왕 고종에게 보고하게 되었고, 보고를 접한 고종은 현재의 태극기와 모양이 근접한, 태극 4괘기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1883년 국기 제정 공포 때 건곤감리의 4괘를 그린 태극기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당시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도 군주기와 민기는 병용되고 있었고, 이에 발맞추어 당시 조선이 군주기와 민기를 제작하고, 더군다나 고종은 어기(御旗)가 아닌 민기(民旗)라 할 수 있는 태극 4괘기를 국가의 제 일차적 상징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18세기 후반의 민국정치이념보다 더욱 진일보한 것이라고 평가할만 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볼 때,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박영효가 외국 선장의 제의를 받아 선상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라는 태극기의 제작과정이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허무맹랑한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 태극기의 제작과정을 마치 삼행시 짓는 것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자존심에 침을 뱉는 행위가 될 것이다. 태극기는 당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던 조선의 산물이었으며, 이 산물을 산출해 내기까지 국정의 핵심자였던 고종과 대신들의 충분한 논의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더 이상 태극기를 단순히 한 개인의 즉석 창작물로 폄하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글쓴이: -바램(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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