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영희 교수의 <3일 동안만 걸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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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만난 장영희 교수는 말이 너무 빨랐다. 흔히 말이 빠른 이는 뒷말이 흐지부지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뒷말 처리까지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에 대한 열정이 있으셨고, 그런 기대를 알게 모르게 직간접 드러냈던 것 같다. 기자는 그녀에게 “3일 동안만 걸을 수 있다면 무얼 하겠냐”고 물은 적이 있다. 순간 얼굴표정이 일그러짐을 느꼈다. 어쭙잖게 동정하는 듯한 표현이었나 싶었다. 이 질문은 헬렌 캘러의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란 책 제목에서 착안해 던진 것이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사실 사흘만 걷겠다는 열망은 없어요. 일생을 걸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죠. 사흘만이라는 전제조건이 너무 제한적이기에….”

그러나 두 발로 내딛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녀의 소망은 강렬하면서도 따스했다.

“아이스크림 콘을 손에 쥐고 걸어가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콘을 먹으며 걷는 모습을 보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조카 손을 잡고 파도 치는 백사장을 걷고 싶어요. 파도가 치면 종종 뒷걸음치며 물러서는 소박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쥐고 있을 그녀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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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56) 교수의 다리는 네 개다. 크고 작은 상흔들로 뒤덮인 목발 두 개는 생을 딛고 일어선 나이테와 같다. 그녀는 생후 한 살 무렵 앓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이다. 몇 년 전 하버드대 방문교수 자격으로 보스턴에 있을 때 우연히 유방암을 발견했다. 두 번의 수술을 받고 귀국했을 때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흠, 역시 장영희군. 남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암을 이렇게 초전박살 내다니….”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불운이 찾아왔다. 2004년 9월 척추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결국 2001년부터 3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북 칼럼을 접어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는 삶에 대한 절절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장 교수는 중고등 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영어교과서의 집필자이자 수필가, 번역가, 칼럼리스트다.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이미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미시 모음집인 ‘축복’‘생일’ 역시 큰 인기를 모았다. 번역서로 ‘종이시계’ ‘톰 소여의 모험’‘슬픈 카페의 노래’ 등 20여 편이 있다. 선친인 장왕록(前 서울大 명예교수·1994년 작고) 교수와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스칼렛’‘살아 있는 갈대’ 등을 공역하기도 했다.

  “저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 이 사회에서 장애인으로서 살아남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이 사회의 ‘주류’가 되는 길은 공부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천만다행인 것은, 이 세상에서 허락된 단 한 가지 일이 바로 제가 좋아하는 일이었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쉽고 편한 일이 공부라고 생각했죠.”


  ▨ 새옹지마

  학창시절, 장 교수는 늘 반에서 1,2등을 다퉜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성적관리 잘하는 ‘아주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장애인이란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이 불가능했다. ‘어차피 신체검사에서 떨어질 것을 왜 구태여 시험을 보느냐’는 식이었다. 선친은 이 학교, 저 학교 찾아다니며 탄원하는 것이 일과였다. 당시 선친이 서울대 사범대 교수인 덕에 겨우 서울 사대부중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3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를 포함, 모든 대학들이 그녀에게 입학시험 볼 기회조차주지 않았다. 선친은 여러 대학을 전전한 뒤 당시 서강대 영문과 교수였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제발 딸이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선친은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시곤 했다고 한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서강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보석이 될 수 있는 원석과 같아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바로 원석을 연마해 보석을 만드는 일이죠. 여기저기서 돌멩이라고 차버리는 장영희를 서강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이지요.”

  서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서강대에 박사과정이 없어 명문 사립대에 응시했다. 면접시험장에서 그녀는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장교수는 몇 달 뒤 뉴욕주립대에 진학,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 귀국했다.

  “그 대학에서 저를 받아 줬다면, 유학을 가지 않았을 거예요. 당시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어요. 부모님과 동생들이 완벽하게 수발을 들어 주니, 낯선 땅 기숙사에 살며 모든 것을 혼자, 내 몸으로 꾸려 가며 공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유학은 저의 선택이 아니었어요. 정말 새옹지마라고 할까요? 당시엔 너무 상처받고 슬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분(면접관)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날 용기와 동기유발이 된 겁니다.”

  어떻게 유학 준비를 했을까. 

  “영미 소설을 초벌 번역해 아버지께 드리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저를 믿으셨거든요. 아버지는 책을 내실 때 서문에다 ‘원고정리를 도와준 딸 영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는 표현을 늘 하셨지만, 저는 흡족할 수 없었어요. 제 이름으로 책을 내고 싶었고, 특히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부모님 몰래 유학 준비를 했고, 뉴욕주립대로부터 입학허가와 스칼라십을 받고서야 말씀드렸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두 달 전이었어요. 이미 준비를 끝낸 뒤 말씀드렸더니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떠나는 김포공항에서 난리치고 울었지만….”


  ▨ 선친에게 영어를 배운 적이 없어

  선친이 영문학자이니 당연히 영어를 잘했을 법하지만 장 교수는 아버지께 영어를 배워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선친은 늘 학교일로 바빴고 번역일도 많았다.

  “아버지는 성실 그 자체셨지요. 제게 한번도 공부하라 말씀하신 적은 없었지만 몸으로 실천하셨어요. 저희 형제들은 아버지의 등짝을 보고 자랐습니다. 저희 집에 방이 두 개 밖에 없었을 때 저희는 늘 아버지가 공부하시는 안방에서 놀았어요. 그러면 아랫목에서 앉은뱅이 책상에 앉으셔서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뭔가를 계속해서 읽고 쓰고 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은연중에 ‘인간은 태어나면 저렇게 공부를 하는 게 인간본연의 모습이로구나’하고 생각하며 자랐지요.”

  그녀는 이런 기억도 떠올렸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였어요. 펄 벅의 ‘대지’를 번역하시면서 끝없이 교정을 보시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 언니오빠가 원고정서에 정신이 없었지요. 그때 심심해하는 제게 등장인물인 ‘오란’ ‘왕릉’ 등 몇 개의 이름을 적어 주면 저는 흉내 내어 그 글자를 써 보곤 했어요. ‘대지’를 비롯해 스무 권에 가까운 펄 벅의 작품을 번역하셨던 아버지 덕에 펄 벅은 이웃집 할머니처럼 친숙한 이름이었지요. 훗날 제가 영문학도가 돼 원서로 읽은 첫 작품도 ‘대지’였지요.”

  ‘구둣방 아들이 맨발 벗고 다닌다’고 장 교수는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알파벳 대소문자를 겨우 아는 정도였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학원․과외를 받거나 달리 특별한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영어성적은 언제나 잘 나왔다.

  “전 무조건 교과서를 외웠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영어교과서는 ‘This is a book.  That is a pen’으로 시작했지요. 중1 교과서부터 고3 마지막 연습문제까지 암기했고, 전 그것이 제 영어의 기초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글이나 시를 보면 따로 적어 놓고 암기를 했지요. 말하기도, 글쓰기도 처음엔 ‘모방’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남이 쓴 말을 반복하고 남이 쓴 좋은 글을 자꾸 읽다 보다 보면, 영어적 ‘센스’가 생기지요.”

  공부 스타일은 어땠을까.

  “저는 ‘공부는 혼자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도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요.  집중에 방해가 되고 나만의 속도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오히려 불편해서요. 그래도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다 다니는 학원은 한 번 다녀 보고 싶었지요. 하지만 학교 오가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는데 학원은 어림도 없었지요.”

  장 교수는 “영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배우는 것도 좋지만 “어느 정도 사고능력을 갖췄을 때 영어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고 충고했다.

  “제자들 중에는 영어권에서 학교를 다녀서 영어를 썩 잘하는 학생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만 공부한 학생에 비해 영문학 공부를 더 잘하는 것은 절대 아니죠. 유창하게 말을 하는 학생도 일단 글을 쓰면 문법이 다 무너지고 도통 생각이 담겨져 있지 않는 예가 아주 많아요. 영어는 단지 의사표현의 도구에 불구하고, 애초에 ‘생각’이 없는 사람은 영어를 잘해도 표현 할 것이 없거나 너무 피상적이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 영어를 먼저 배우기보다는 생각하기를 먼저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언어를 배우는데 왕도가 없다

  장 교수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영어 교과서의 대표저자다. 처음엔 선친과 함께 교과서를 집필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장왕록 원칙’을 지켜 교과서를 썼다.

  “‘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라’는 것이 아버지의 철칙이셨어요. 같이 밥 먹다가도 막힌 문장이 생각 나시면, 그냥 국그릇에 수저를 놓은 채 서재로 가셨어요. 자기 일을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지만 정성을 쏟아야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독자들은 저자가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지 분명히 안다고 하셨어요. 10시간 걸려 책을 쓰면, 10시간짜리 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수준이 낮고 어린 독자들이라 해도 정성이 들어간 책은 금방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그녀는 말하기의 유창성만 강조하는 세태를 꼬집으며 “문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은 영어교육에 역행하는 것처럼 인식돼 안타깝다”고 했다.

  “영어교과서를 쓸 때 늘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본문내용이 학생들의 지식과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과 문법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요즈음은 말하기만을 중시해서 유창성만 강조해요. 하지만 영어로 말을 잘하면 배낭여행할 때는 도움이 되겠지만 고급정보를 교환하거나 유학을 가 논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은 결국 글쓰기에서 옵니다.”

  어떻게 하면 영어로 잘 말하고 잘 쓸 수 있을까.

  “언어를 배우는 데는 왕도가 없지요. 한달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영어가 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포기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지요. 언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열심히 하면 반드시 늘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하루 한 문단이라도 영어로 된 좋은 글을 반복해서 읽고, 또 책을 덮고 그 글을 기억만으로 다시 써보고, 원문과 비교해 보는 것도 글쓰기의 좋은 연습입니다.”

  장 교수는 현재 ‘연구년’을 보내고 있다. 연구년은 6년을 가르치고 재충전을 위해 1년 유급휴직할 수 있는 제도다. 미국대학의 초청을 받아 1년간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너무 속상하고 억울했는데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누구나 늙어지면 후회하는 일이 3가지 있다고 하지요? ‘좀 더 참을 걸, 좀 더 베풀 걸, 좀 더 즐길 걸’ 이랍니다. 더 늙기 전에 나중에 후회를 덜하도록 좀 더 참고, 좀 더 베풀고, 좀 더 삶을 즐기는 법을 연구하는 색다른 ‘연구년’을 만들려고 하지요. 그래서 나중 그것을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해 가르칠 수 있다면 아주 중요한 공부가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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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A 장영희 교수의 공부 이야기


Q 공부는 어떤 타입으로 하셨나요.
A 저는 대학 졸업 할 때까지 벼락공부 스타일입니다.  별로 예습 복습도 하지 않다가 시험 일주일 전부터 총력을 기울여 잠자는 시간, 밥먹는 시간, 하다못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 가며 대단한 집중력으로 공부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숙제는 철칙적으로 하는 것 외에는 별로 공부하지 않다가 말이지요.  하지만 이 방법이 요즈음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 공부의 낭만시대이던 꽤 성적 관리에 도움이 되었었지요.


Q공부와 관련해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줄 좋은 경험담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A 며칠 전 만난 졸업생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했다면 아마 학교를 톱으로 졸업했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왜 해야 하고 공부가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어요.  요즈음 회사에서 야근도 하고 상사와의 트러블 때문에 마음고생도 하면서 지금에야 깨달아요.  공부만 할 수 있었던 학생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학생이 있다고 생각하면 공부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고 공부가 좀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요.  낚시가 너무 좋아서 무조건 시간만 나면 낚시터로 가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헌데 어느날 이 사람의 사업이 망해서 낚시로 호구지책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낚시가 죽기보다 하기 싫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의무감에 공부도 하기 싫어질 수 있지요.  하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기회라고 생각하면 공부가 재미있어지겠지요.

Q 앞으로의 공부계획 (인생계획)이 궁금합니다.
A
 저는 지금 연구년 중에 있습니다.  6년 가르치고 재충전을 위해 1년 유급 휴직할 수 있는 제도지요.  올여름 미국에 가서 그야말로 공부에만 집중하려고 미국대학의 초대장도 받아놓고 좋은 연구비도 타놓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두었지요.  모든 걸 다 잊고 하루 종일 도서관에 앉아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일--아, 얼마나 가슴 설레일 정도로 환상적인 일인지요.  헌데 약간 건강 상의 문제 때문에 병원에 들락거릴 일이 있어 미국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아도 한국에 머무니 아무래도 연구년을 연구년답게 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억울했는데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습니다.  누구나 늙어지면 후회하는 일이 세 가지 있다고 하지요?  ‘좀 더 참을 걸, 좀 더 베풀 걸, 좀 더 즐길 걸’ 이랍니다.  더 늙기 전에 나중에 후회를 덜하도록 좀 더 참고, 좀 더 베풀고, 좀 더 삶을 즐기는 법을 연구하는 색다른 ‘연구년’을 만들려고 하지요.  그래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해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도 아주 중요한 공부가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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