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집·앞
朴南喆 
1
스승 趙炳華께서 악수로써 껄껄껄 세배를 받으신 다음, 歐羅巴的 술잔에서 꼬냑을 한 잔 따라 주시면서, 스승의 연구실은 무척 따뜻했습니다
얘, 南喆아, 詩人에게는 집이 없지 여기 장영자씨도 계시지만, 評論家에게는 집이 있지 小說家에게도 집은 있고, 劇作家에게도 집은 있고, 심지어는 隨筆家에게도 높은 집은 있는 法이지 그러나 얘야, 南喆아, 詩人에게는 집이 없지 그냥 사람 ‘人’짜, ‘詩人’이지 뭐, 헐헐헐······
스승의 弄談은 듣고 보니 詩였습니다
나는 속으로, 꼬냑이란 술도 참 쓴 것이로구나 생각하면서, 나는 또 속으로 스승께서는 참 오래간 만에 한번 하시는구나 감탄하면서, 그러면서 나는 또 속으로 스승께서야 그림도 잘 그리시니까, 하늘이며 구름, 지평선이며 길, 까치집 등을 素材로 한 그림도 심심찮게 그리시니까, 그러니까 우리 스승께도 畵家로서의 고상한 집 한 채는 있는 셈이니, 결국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은 바로 나로구나····하고
꾜냑처럼 씁쓸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2
얘야, 南喆아, 詩人에겐 집이 없지
안주용 치이즈를 자꾸 더 권하시면서
스승은 즐거우신 듯 으허헛 웃으셨습니다
스승의 연구실엔 高踏的인 붓글씨에다
하늘에 구름 지나가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詩, 詩人의 집, 詩를 쓰는 사람의 집
나의 사랑 경희대학교 캠퍼스는 눈속에
고요했고, 어허헛 南喆아 詩人에겐
집이 없지, 몇 마리의 참새들이 쫓기는
아이들처럼 어디든가로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아, 언젠가 新春文藝로 등단한 위대한 토인 안재찬이가, 누나네를 쫓겨나와
캠퍼스의 벤치 위에 그냥 쓰러져 자더라고, 새벽
네 시를 알리는 웨스트민스터 종소리에, 고독한
나무 아래서 그만 끼득끼득 웃어 대면서, 밤이
이렇게 춥고 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하더라고,
안재찬이라는 나의 後輩가 말도 없이
말하더군요
그 겉이야 자못 화려하지만
그 속은 아주 슬픈, 아주 슬픈 秘密을
그때 그 애도 알게 되었을까요
아아아, 詩人의 집, 詩밖에 못 쓰는 사람들의 집
형, 詩人의 집은 아마 바람 속이나 아닐는지요
그날 그 안재찬이라는 슬픈 運命이 제법 詩的으로
말하더군요.
3
편지,
‘詩人의 집’
잘 읽었습니다.
집이 없다는 것은
그 만큼 더 넓은 人生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럼 또. 趙炳華.
가짜시인 朴南喆-2.jpg)
경희대 국문과 출신인 시인 朴南喆이 쓴 시다. 국문과 74학번 朴南喆과 78학번 박덕규의 공동 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청하 刊)에 실렸다. 이 시집은 1982년 4월 출판됐다. 당시 청하 출판사의 대표는 시인 장석주다.
참으로 한창 때 쓴 시다. 시 속에 朴南喆다운 싱그러움이 배어있다.
朴南喆은 우리 詩壇의 몇 안 되는 奇人이다.(기인이라고 하면 시인이 기분 나빠하실지 모르겠다) 요즘 글 꽤나 쓰는 이들 중 詩人 이름 값하는 이가 몇이나 되는지 되묻고 싶다. 근엄한 표정으로 짐짓 세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착한 척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밖에 없다.(실제로 착한 이들이 대부분이지만···쩝) 하지만 그는 착한 척하는 삶을 거부했다. 대신 싸움꾼을 자처했다.
기성 문학에 맞섰고 문단을 향해 싸웠으며 심지어 은사와도 맞섰다. 그리곤 용서를 청하며 뜨겁게 세상과 포옹했다. 그는 「사고뭉치」 미움을 받은 자였지만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자다. (사진은 1977년 국문과 재학 시절) 그는 스스로 필명을 가짜 시인이라 부르지만, 가짜 시인이기를 원하는 진짜 시인이다.
反省의 시인
그의 詩는 일종의 반성문이다. 삶의 허위의식에 일격을 가한다. 그렇다고 거창하지도 않다. 눈에 보이는 것, 보면서 느끼는 것 그대로 쓸 뿐이다. 형식도 없고, 형식이어야 하는 것도 없다. 산문과 운문을 종횡무진하며 독자로 하여금 강인한 詩 정신을 느끼게 만든다.
굳이 詩가 아니어도 좋다. 번뜩이는 정신이 다름 아닌 詩니까. 어느 평론가는 그의 詩를 「삶에 대한 도저한 반성적 성찰(김현·이선이)」이라고 했는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등단 이후 모습. 날선 눈이 번득인다. 1981년 무렵)
「詩人의 집」은 스승 趙炳華에 얽힌 이야기다. 趙炳華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한 朴南喆의 스승이다. 詩人이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할 1974년 당시 趙炳華는 문리대학장을 역임하고 계셨을 때로 짐작된다. 朴南喆의 學科 스승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大詩人에게 그는 감히, 해서는 안될 말을 한다. 그리곤 누나집에서 쫓겨나 학교 벤치에서 잠을 청한 안재찬을 갔다 붙인다. 안재찬이 누군가. 그가 바로 베스트셀러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쓴 류시화다. 안재찬은 국문과 78학번이다.
『하다못해 수필가도 집 ‘家’자를 쓰는데, 시인은 집도 없이 그냥 사람 ‘人’을 쓴다』는 趙炳華 大詩人이 값비싼 꼬냑을 먹고 高談峻論 같은 글을 쓰며, 산수화 같은 그림을 ‘심심찮게’ 그린다고 비꼰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스승께도 畵家로서의 고상한 집 한 채는 있는 셈이니···」. 심하게 말해 詩人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물론 스승의 허위의식을 야단친 것은 아니니라.
하지만, 스승은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집이 없다는 것은/그 만큼 더 넓은 人生을 살고 있는 겁니다」 고 답한다. 두 사람의 문답 서신은 그렇게 끝이 나지만 행간은 팽팽한 긴장감을 더한다.
경희대 국문과 70년대 학번들과 '시운동' 동인
「경희사단」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70년대 학번의 경희대 국문과 출신의 작가들이 많다.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그 중에서도 유독 詩人이 많다. 리버럴한 학교 분위기와 상관이 많다고 생각된다. 이후 신춘문예와 신인문학상 싸움에서 중앙대와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야 했지만, 어느 학교도 70년대 경희사단의 전성기를 잇진 못했다.
먼저 朴南喆이 국문과 74학번이고 「거인의 잠」「빙벽」 등을 쓴 소설가 고원정이 같은 학번이다.
78학번은 그야말로 문인들로 즐비하다. 朴南喆과 공동시집을 낸 박덕규를 비롯, 박덕규와 「시운동」 동인을 같이 한 안재찬(류시화), 이문재도 78학번이다.(시운동 동인으로 기형도와 남진우도 같이 활동했다)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꿈의 이동건축」으로 등단한 박주택 역시 국문과 78학번이다. 그는 <시운동 패거리>에 나중 합류한다. 90년대 이후 잘나가는 소설가에 끼는 김형경도 국문과 78학번이다.
시로 등단했지만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잡문을 쓰는 하재봉은 국문과 75학번이다. 하재봉 역시 시운동 동인으로 참여했다. 솔직히 그는 시와 소설(시집으로『안개와 불』(민음사, 1988)『비디오천국』(문학과지성사 1990)『발전소』(민음사 1995), 장편소설로『콜렉트콜』(열음사 1992)『블루스 하우스』(세계사 1993)『쿨재즈』(해냄 1995))을 두루 쓰고 영화평론서까지 냈다. 하지만 독자의 평이 그저그랬다. 그후 그는 영화평론가로 돌아섰고 조금 밥맛이지만 댄디스트 기질까지 선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