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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문가 1백1명이 뽑은 「20세기 한국 最高의 영화·감독·배우」

오발탄, 林權澤(감독),金勝鎬(男), 金芝美(女)

손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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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영화는 「오발탄」이 압도적,「서편제」「아리랑」이 뒤를 이어
●영화감독은 林權澤과 兪賢穆이 월등하게 높아, 3위는 金綺泳
●남자배우는 金勝鎬와 安聖基가 엎치락뒤치락, 그 뒤는 申星一
●여자배우는 金芝美가 崔銀姬를 3표 차이로 따돌려, 3위는 姜受延
작품은 오발탄, 그러나 감독은 林權澤
  한국의 영화전문가들 1백1명은 20세기 최고의 한국 영화로 兪賢穆(유현목·74) 감독의 「오발탄」을 선정했다. 그러나 감독 부문에서는 全(전) 연령층의 고른 지지를 받은 林權澤(임권택·63) 감독이 兪賢穆 감독을 3표 차이로 누르고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남자배우는 65명의 추천을 받은 金勝鎬(김승호·작고)씨가, 여자배우는 57명의 추천을 받은 金芝美(김지미·59)씨가 선정됐다. 또한 과반수가 넘는 응답자들이 21세기 한국 영화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月刊朝鮮이 10월20일부터 11월1일까지 전화와 팩스를 통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밝혀졌다. 조사대상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과 배우, 제작자, 촬영·조명·시나리오 작가 등의 스태프, 그리고 영화평론가 등 모두 1백1명이었다. 설문 내용은 「한국 영화 70년사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 3편과 감독 3명, 남녀배우 3명씩을 추천하고 그 이유를 간략하게 적어달라. 또 21세기 한국 영화의 미래에 대한 견해를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화인들은 「의미 있는 조사」라며 성실히 설문에 응해주었다. 특히 배우 黃貞順(황정순)씨와 정애란씨를 비롯해 시나리오 작가 金龍鎭(김용진·70)씨, 金志軒(김지헌·70)씨 등 원로 영화인들이 옛날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가며 성실하게 설문에 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 「오발탄」
 
 
  모두 48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각자 추천한 세 작품 중 48회 포함돼 있었다는 뜻) 최고의 영화로 뽑힌 「오발탄」(1961년作. 金振奎·文貞淑 주연)은 兪賢穆 감독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다. 戰後(전후)의 어둡고 암담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작품성과 사회고발이라는 측면에서 영화인들이 해방 이후 최고의 영화로 일찌감치 손꼽았던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6·25 전쟁 직후. 같은 겨레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싸움을 치른 뒤라 사람들은 각박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은 가난한 회사원 철호(金振奎 扮). 그는 피난 때 받은 충격으로 실성한 노모와 임신한 아내, 軍(군)에서 제대한 건달 동생, 양공주 노릇을 하는 여동생과 함께 가난한 판잣집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간다.
 
  주인공은 가난한 家長(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기에 급급하지만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동생 영호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처럼 잘살려면 양심과 윤리 따위는 무시하고 살아야 한다는 부정적인 인물. 영화는 이 두 인물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당시 사회의 혼란스러운 가치관과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특히 마지막 라스트신은 영화인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고 있는 장면. 무작정 택시에 올라탄 주인공이 목적지를 묻는 기사에게 『해방촌으로…, 아니 서울대학 병원으로…, 중부경찰서로…』하며 갈팡질팡하는 라스트신은 영상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극찬을 받았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제작자 權寧洛),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선구적인 작품」(EBS PD 李承薰), 「한국적 리얼리즘의 성공」(감독 金鎬善), 「사실주의 미학의 백미」(제작자 車勝宰) 등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한국 최고의 리얼리즘 영화」라는 점으로 모아진다.
 
  「戰後 한국 사회의 절망감을 가장 진지하게 탐구한 영화」라고 평가한 평론가 鄭秀婉(정수완·36)씨 역시 암담한 사회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높이 평가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조명감독 馬龍天), 「戰後 한국인의 자화상을 그린 대표작」(평론가 鄭重憲), 「인간의 절망과 구제의 話頭(화두)를 던진 대작」(평론가 金鐘元) 등의 응답도 같은 맥락.
 
  영화배우 安聖基(안성기·48)씨는 이 영화의 현실참여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40여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보니 지금 보면 낡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발탄」은 영화가 수행해야 할 역할 중의 하나인 사회성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가 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하면서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영상이나 훌륭한 연기에 앞서서 영화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또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영화에 녹아 있는 감독의 작가정신을 거론한 응답자도 적지 않았다. 「투캅스」의 감독이자 요즘엔 제작자로 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康祐碩(강우석·39) 감독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의 집념 어린 눈이 서려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추천했다. 「땡볕」의 河明中(하명중·52) 감독 표현에 의하면 이는 「작가정신의 극치」.
 
 
  「서편제」, 어려운 소재로 상업적 성공
 
 
  林權澤 감독의 서편제(1993년作. 金明坤·吳貞孩·金圭哲 주연)는 28명의 추천을 받았다. 李淸俊(이청준)씨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196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남도지방에서 떠돌다 사라진 소리꾼 김유봉(金明坤 扮)과 그의 양딸 송화(吳貞孩 扮), 그리고 북잡이 박동호(金圭哲 扮)의 한스런 삶이 판소리에 용해되어 흘러나오는 서정적인 영화이다. 영화 전체를 흐드러지게 뒤덮는 판소리 가락과 아름다운 영상이 어우러진 「서편제」는 우리나라에 판소리 붐을 일으키며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영화음악이 담긴 CD가 30만 장 이상 팔려나갔고 국악학원 앞에는 판소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한국영화배우협회 申禹澈(신우철·50)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화 「서편제」가 나오기 전까지 판소리는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촌스럽고, 고리타분하고, 나이 든 사람이나 좋아하는 그런 음악으로 인식되어 있었지요. 그런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 큰 모험입니다. 흥행하기 힘든 소재를 가지고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또 우리나라 최초로 1백만명이 넘는 관람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우리 판소리가 소개되고 인기를 얻었으니 결국 영화가 우리 얼을 살려낸 셈이지요』
 
  林權澤 감독이 당시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던 명창 김소희씨로부터 『과거 수많은 명창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서 판소리를 불러도 「서편제」만큼의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찬사와 함께 감사장을 받을 정도로 이 영화가 우리 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광범위했다.
 
  林權澤 감독은 한 평론가와의 대담에서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밝힌 바 있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졌던 의도는 우리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서편제를 만들 당시)이 바로 그런 때라고 생각했지요. 나는 우선 판소리가 우리 자연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얼마나 어울리는 소리인가를 영화를 통해서 알리고 싶었습니다』(영화평론가 이효인씨와의 대담중에서)
 
  「한국적인 소재로 외국에서도 호평받은 걸작」(제작자 金敏雄), 「영화를 통해 한국 문화가 해외에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배우 겸 제작자 高銀兒)는 응답은 이 영화의 세계성을 높이 평가했다.
 
  대중과 동떨어진 예술 영화가 아니라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응답자도 있었다. 「상업성까지 고려한 예술성 있는 영화」라고 평가한 평론가 全燦一(전찬일·38)씨나 「한국 영화 관중 1백만명 시대」를 열었다는 점을 주목한 시나리오 작가 金志軒(김지헌)씨가 그 대표적인 경우.
 
  한국영화제작가협회 柳寅澤(유인택·44) 회장은 특히 「서편제」가 나왔던 1993년 당시 우리나라 영화계의 현실과 관련해 『미국 영화 직배로 침체된 한국 영화계에 힘을 주고, 西歐(서구)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웠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3위 「아리랑」, 민족의 감정 표출
 
 
  春史 羅雲奎(춘사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作. 羅雲奎·申一仙 주연)은 모두 24명의 추천을 받았다. 활동사진의 수준을 넘어선 본격적인 한국 영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귀재 羅雲奎가 각본, 주연, 감독을 겸한 민족영화이다. 현재 필름은 남아 있지 않고 대본만 전해져오는 상태.
 
  1926년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인은 물론 온 겨레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전에 제작된 유치한 신파조 영화와는 다르게 우리 농촌의 현실적인 삶을 바탕으로 日帝(일제)에 억눌린 민중의 감정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추천한 응답자들 역시 「조선인의 비애를 저항의식으로 승화한 민족영화」라는 점에 주목했다. 「영화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민족의식을 고취한 기념비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평론가 孫基祥), 「한국 영화의 혁명적인 전기를 가져온 민족영화」(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姜大榛 회장), 「항일정신을 영화에 담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민족영화」(한국영상자료원 鄭鴻澤 이사장) 등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민족영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평론가 金鐘元씨는 이 영화를 『민족주의적 리얼리즘을 일구어낸 無聲(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작』으로 뽑으면서 『소설의 원작을 화면에 옮기는 데 지나지 않던 그 당시 서사 구조의 한계를 뛰어넘어 고유의 영상美學을 제시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응답자 중 일부는 『영화는 영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직접 영화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단지 대본이나 그 당시의 기록 같은 인쇄물을 통해 영화를 평가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한 방법이다. 「아리랑」은 교과서적인 작품은 될 수 있겠지만 한국 최고의 작품으로 뽑을 수는 없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배우 獨孤永宰(독고영재·46)씨는 「언제나 시작은 再조명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들어 작품 부문에서 「아리랑」을 추천한 것은 물론 감독과 배우 부문에서도 春史 羅雲奎를 추천했다.
 
 
  「만추」 「마부」 「만다라」… 順
 
 
  순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李晩熙(이만희) 감독의 「晩秋」가 17명의 추천을, 姜大振(강대진) 감독의 「마부」와 林權澤 감독의 「만다라」가 각각 13명의 추천을 받았다.
 
  사회에서 소외된 두 남녀의 짧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만추」(1966년作. 申星一·文貞淑 주연)는 故 李晩熙 감독의 대표작이다. 제3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대상을 비롯해 청룡상, 부일영화상, 백마상 등을 수상하고 베를린영화제에도 출품해 크게 각광을 받았다. 이 영화는 특히 원작이 없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시나리오를 쓴 金志軒씨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李晩熙 감독이 내 후배인데 하루는 나에게 이런 얘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어요. 자기가 「7인의 여포로」 때문에 감옥에 갔을 때 친하게 지낸 감방동기가 있었는데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다는 거예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그 친구는 형량이 아직도 까마득히 남아 있는 장기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탈옥했느냐고 물어보니 6일 동안 휴가 나왔다가 들어간다고 하더랍니다.
 
  자기는 죄수도 휴가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대요. 그래서 이런 걸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내게 물어온 거죠. 휴가 나온 여죄수와 쫓기는 남자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 「만추」가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겁니다』
 
  姜大振 감독의 「마부」(1961년作. 金勝鎬·申榮均·黃貞順 주연)는 「오발탄」과 더불어 암울한 시대의 어려운 상황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다. 가난 속에서 고생하며 사는 그늘진 서민이 갖은 어려움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최초로 제1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를 위해 마부들과 같이 일주일을 살았다는 金勝鎬씨의 신들린 듯한 연기가 압권.
 
  이외에 金綺泳(김기영) 감독의 「하녀」(9명), 申相玉(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6명), 河吉中(하길중)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5명), 역시 申相玉 감독의 「성춘향」(5명) 등의 작품이 그 뒤를 이었다.
 
 
  영화감독 1위 林權澤 …
 
  한국적 영상미의 大家
 
 
 
  20세기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으로는 59명의 추천을 받은 林權澤 감독이 선정됐다. 2위는 兪賢穆 감독(56명), 3위는 金綺泳 감독(35명)이 차지했으며 그 뒤를 申相玉 감독(30명)과 李晩熙 감독(24명)이 잇고 있다.
 
  林權澤 감독을 제외한 4명의 감독은 모두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치열한 작가정신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온 巨匠(거장)들이다. 시기적인 차이 없이 同(동)시대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보니 표가 갈리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반해 林權澤 감독은 1980년대 이후 영화계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교할 만한 동년배 감독이 없다 보니 응답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를 추천한 응답자들 대부분은 「인본주의」와 「장인정신」을 추천 이유로 꼽았다. 「인본주의」라고 간략하게 대답한 평론가 安柄燮(안병섭·63)씨나 「인본주의에 따른 영상 창조」(평론가 邊仁植),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영화의 장인」(평론가 鄭重憲)이라는 대답은 모두 같은 이야기.
 
  사실 「人本」은 林權澤 감독이 작품에서 일관되게 취해온 주제이다. 그는 『내가 영화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人本이며 인간끼리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작품을 만든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한국 영화인 중 최고의 장인」(제작자 安秉珠),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는 꾸준한 장인정신」(배우 문희), 「건강한 변화와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장인정신」(제작자 權寧洛) 등은 모두 그의 장인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여과 없이 그려내는 장인」(영화연구가 鄭宗和) 이라는 대답 역시 같은 맥락.
 
  「빨간 마후라」 「남과 북」 등의 시나리오를 쓴 韓雲史(한운사·76)씨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족보」라는 작품을 林權澤 감독하고 같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林감독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할 때였지요. 원래 다른 감독들은 영화를 촬영하는 중간중간 나를 찾아와서 작품에 대해 상의를 하곤 했는데 林감독은 상의는커녕 코빼기도 안 보였어요. 그러더니 한참 후에 제작사로부터 영화가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니 내가 대본에 쓰지 않은 장면이 하나 나오는데 죽음을 앞둔 선비의 시선을 따라서 한옥 지붕의 곡선이나 도자기의 간결한 선 같은 것들을 아무 대사 없이 차분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한오백년 가락을 배경음으로 깔면서 말이에요. 별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고결한 한국의 禮(예)의 경지랄까, 뭐 그런 걸 본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참 묘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말투도 어눌하고 아둔해 보이는데 영화에 관해서만큼은 아주 감각이 있어요. 자기 세계에 비춰 해석을 하는 능력이랄까요…. 그때 이후로 林감독의 작품을 신경써서 봤는데 「서편제」를 보고서 역시 林權澤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논밭을 어떻게 그렇게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찍었는지…. 우리나라 남도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고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감자」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金炯子(김형자·47)씨 역시 林權澤 감독의 독특한 영상미를 높이 평가한다.
 
  『林감독님은 날씨가 너무 좋아도, 또 너무 흐려도 촬영을 하지 않아요.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완성된 필름을 보니 날씨가 너무 좋지도 흐리지도 않은 날이 화면에 참 아름답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놀랐지요. 「씨받이」를 찍을 때 양산 통도사 들어가는 길에 있는 「보쌈마을」이라는 곳에서 촬영을 했어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아주 시골마을이었죠. 그곳에서 너무 흐리지도, 너무 좋지도 않은 날을 기다리느라 며칠씩 놀고 먹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작품성과 상업성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또 우리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林權澤 감독을 추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兪賢穆-현실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작가정신
 
 
  「오발탄」의 兪賢穆 감독은 모두 56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林權澤 감독과는 3표 차이. 1956년 「교차로」로 데뷔한 兪賢穆 감독은 여덟 번째 작품 「오발탄」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적인 감독으로 떠올랐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영화배우로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었다는 사실이다. 우수한 필기고사 성적으로 배우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못생긴(?) 얼굴을 가진 그를 본 면접관의 권유로 조감독으로 입문한 것이 오늘날의 兪賢穆 감독을 만들었다.
 
  兪賢穆 감독을 추천한 응답자들의 이야기는 「작가정신」 「지성인」 「리얼리즘」 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작가주의적인 영화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을 높이 산 평론가 鄭重憲씨나 「현실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기 위한 영화적 표현을 진지하게 탐구했던 작가」라고 응답한 평론가 鄭秀婉씨, 「작가정신이 강한 독보적인 감독」이라고 응답한 李斗鏞(이두용·57) 감독 모두 兪賢穆 감독의 「작가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평론가 趙熙文(조희문·42)씨는 그를 가리켜 「작가주의적인 일관성을 영화에 반영한 예술가」라고 이야기한다. 「언제나 타인」 「포옹」 등의 작품을 만든 趙文眞(조문진·64)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兪賢穆 감독은 일관된 작품세계와 고집을 갖고서 흥행을 생각하기 이전에 작품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진짜 작가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사람입니다. 진정한 작가는 자기 이야기를 주절주절하지 않는 법입니다. 검증키 어려운 근거 없는 스토리를 화면에 담거나 현학적인 표현으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사람은 작가라고 할 수가 없어요. 영화는 인생을 알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일 뿐이지요』
 
  「한국영화의 지성」(평론가 朴平植), 「가장 지적인 감독」(평론가 林英) 등 兪賢穆 감독의 지적인 면을 높이 산 응답도 많았다. 「인간의 내면 갈등과 지식인의 고뇌를 잘 그린다」고 이야기한 제작자 金亮三(김량삼·57)씨도 같은 의견. 아마도 이것은 그가 「오발탄」을 비롯해 「김약국의 딸들」 「카인의 후예」 「분례기」 「사람의 아들」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다루기 힘든 심각한 주제들을 가지고 현실을 관통하는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리얼리즘 영화의 한 전형을 이룬 대표적인 감독」(조명감독 馬龍天), 「리얼리즘의 끊임없는 추구」(배우 문희),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개척자」(시나리오 작가 崔奭圭) 등의 표현은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는 兪賢穆 감독의 위치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이런 역량이 꾸준히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兪賢穆 감독을 추천한 응답자 중 상당수가 「오발탄 이후에는 내세울 만한 작품이 없다」는 점에서 좀 머뭇거렸고, 또 그를 추천하지 않은 응답자 역시 이같은 이유로 그를 제외시켰다는 것을 볼 때 현실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그의 작가정신이 무디어졌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20세기 한국 최고의 영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면서도 정작 감독 부문에서는 2위로 밀려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金綺泳-한국 컬트영화의 始祖
 
 
  영화계의 奇人 金綺泳(김기영) 감독은 모두 35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영상창조로 「표현주의」라는 계보를 이룩한 金綺泳 감독은 1955년 「주검의 상자」로 데뷔, 「하녀」 「화녀」 「충녀」 등 여성과 性(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주로 만들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때문인지 일반인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지만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작품성과 개성을 인정받아 왔다.
 
  『갇힌 듯한 느낌을 주는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표현주의」로 일관한 영화인입니다. 고집도 세고 개성도 대단했지요. 겉으로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등장인물의 심리에 포커스를 맞추어 모든 사물을 표현했습니다. 주제 또한 여자와 性으로 일관했어요. 시대를 너무 앞서 가서 불운한 奇人(기인)이었지만 예술가적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연출력과 감각을 지닌 감독이었습니다』(평론가 金是戊)
 
  평론가 鄭秀婉씨 역시 『실험적인 표현양식과 여성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통해 한국 표현주의 영화의 위상을 확립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한국 컬트영화의 始祖(시조)」라고 대답한 평론가 韓玉姬(한옥희·51)씨도 같은 맥락.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金綺泳 감독의 독특한 시각은 캐스팅에서도 잘 나타났다고 한다. 배우 金怜愛(김영애·47)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감독님은 영화를 만드는 시각 자체가 남달랐어요. 연기자에게서 다른 사람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니 본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캐릭터를 정확히 끄집어내셨지요. 제가 20대 때 金綺泳 감독님 작품을 두 편 찍었어요. 사실 사람 보는 눈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 즈음에 제가 많이 했던 청순한 역할일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감독님이 제게 주신 역은 카리스마가 강한, 아주 힘 있는 배역이었어요. 그때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캐릭터였지요. 그래서 처음엔 몹시 두려웠는데 연기를 하다 보니까 제 안에 그런 성격이 內在되어 있더라구요. 아무도 알지 못했던 제 안의 잠재된 이미지를 金綺泳 감독님은 정확히 보고 있었던 거지요』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잘 표현했던 배우 河明中씨가 감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金綺泳 감독 덕분이다.
 
  『언젠가 여관에서 밤새도록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감독님은 녹음기까지 틀어놓고 제 이야기를 들으셨죠. 그런데 다음날 제 의견 그대로 연출을 하는 겁니다. 워낙 자기 콘티가 확실한 분이었기 때문에 저 자신은 물론 주위에서도 많이 놀랐지요. 그 후로 저를 볼 때마다 河감독이라고 부르셨어요. 제 안에 잠재되어 있던 연출 능력을 알아보고 키워주신 감독님이 없었다면 제가 감독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빼앗긴 이별」의 鄭一夢(정일몽) 감독은 『시나리오를 직접 쓰지 않는 감독은 진정한 의미의 작가라고 볼 수 없다』면서 『金綺泳 감독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영상화했던 진정한 영화작가』라고 대답했다. 『金綺泳 감독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에는 좋은 문학작품을 그대로 찍는 것이 유행이다 보니 소설과 영화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나리오로 만든 金綺泳 감독의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정신없이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대답한 한국영화배우협회 申禹澈 회장 역시 시나리오 작가를 겸한 金綺泳 감독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申相玉-영화에 미친 사람
 
 
  1952년 「악야」로 데뷔한 후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마유미」 등의 작품을 만든 申相玉 감독은 북한 탈출 이후 할리우드에 정착해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의 할리우드 첫 작품인 「닌자키드」는 1993년 미국영화 흥행 베스트 10에 들어갔을 정도. 1995년에는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빙되어 한국 영화작가의 위상을 세계에 과시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林權澤 감독에 대해서는 「장인」이라는 표현이, 兪賢穆 감독에 대해서는 「작가」라는 평이 많았던 반면 申相玉 감독에 대해서는 「영화에 미친 사람」이라는 표현이 많았다는 점이다. 「영화 없으면 죽을 사람, 영화생각밖에 안하는 사람」(감독 高英男)이라는 평은 점잖은 편에 속할 정도. 시나리오 작가 韓雲史씨는 망설임 없이 「영화에 미친 ○」이라고 잘라 말한다.
 
  『申相玉 감독하고 「빨간 마후라」를 찍을 때예요.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 수원 비행장으로 申相玉 감독을 찾아갔는데 스태프들이 한쪽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녁 식사를 벌써 하느냐」고 물었더니 「점심을 먹는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미친 사람하고 일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미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누구긴 누굽니까. 申감독이지」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申相玉 감독을 찾아보니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왔다갔다 하고 있어요. 가만히 보니까 비행기가 불시착하는 장면을 찍느라고 비행기 모형을 만들어서 그 모형을 트럭이 앞에서 끌고 있습디다. 그래서 내가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니까 한다는 소리가 「벌써 점심 때가 됐습니까?」 그러는 겁니다. 내가 언젠가는 申相玉 감독을 모델로 「영화광」이라는 시나리오를 쓸 생각입니다』
 
  한 커트를 위해 밤을 새워 再촬영하는 그의 완벽성을 제작자 潘大圭(반대규·61)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 「연산군」을 찍을 때 궁궐 안의 커튼을 값싼 천으로 달아놓았어요. 그랬더니 이걸 본 申감독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커튼을 다 찢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짜 왕실비단으로 다 교체를 했지요. 제작비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제작 여건이 어려웠던 시기에도 영화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감독」(제작자 高銀兒)이라는 대답도 潘大圭씨의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영화산업의 의지를 키워온 제작자 또는 기획자」라는 점에서 申相玉 감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많았다. 申相玉 감독은 영화예술 축적만으로는 한국 영화의 입지를 세계에 뻗칠 수 없음을 일찍이 간파하고 「한국 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목표로 의욕적인 사업들을 전개해 나간 감독 겸 제작자이다. 그는 동양 최대의 안양촬영소를 인수해 多作(다작)과 大作(대작)을 활성화하고 「신상옥 프로덕션」 「서울영화사」 「신 프로덕션」 「신필름」 등의 영화사를 운영하며 한국 영화산업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또한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위해 홍콩에 영화배급회사 「홍콩 오션필름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하기도 했다.
 
  「상업주의 시대의 개막」(감독 康祐碩), 「영화를 사업으로 이끈 장본인」(제작자 李椿淵)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 운영」(제작자 柳寅澤) 등의 대답은 바로 제작자로서의 申相玉을 높이 평가한 대답들. 공륜심의위원인 趙觀熹(조관희·64)씨 역시 「어려운 한국 영화의 시기에 상업성과 예술성의 타협을 시도하며 한국 영화를 이끌어왔다」점에서 申相玉 감독을 높이 평가했다.
 
 
  李晩熙-악인은 끝까지 악인으로 그려
 
 
  「만추」의 李晩熙 감독은 1961년 「주마등」으로 데뷔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 「7인의 여포로」 「귀로」 「삼포가는 길」 등의 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는 45세의 나이로 일찍 他界(타계)해 그의 재능을 아끼는 영화인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金敏雄(김민웅·56) 사무국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집과 개성이 있는 아주 출중한 감독이었습니다. 마지막 영화 「삼포가는 길」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李晩熙 감독은 아무리 철면피 같은 악인이라도 끝에 가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던 그 당시의 전형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악인은 끝까지 악인으로 그려내던 고집이 있었어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왜 당신은 영화 속의 많은 인물들을 구제하려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사회도 구제 못하는데 영화감독이 어떻게 구제하느냐」고 단박에 대답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작자 潘大圭씨는 李晩熙 감독의 재치가 기억에 남는다고 이야기한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촬영할 때였어요. 겨울 장면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지는 바람에 눈이 녹아 질척질척하는 겁니다. 병력까지 많이 동원한 상태라 스태프들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李晩熙 감독이 「야…, 전선에도 양지가 있구나」하고 콘티에 없던 대사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 넣었어요. 덕분에 무사히 촬영을 마쳤지요』
 
  李晩熙 감독은 「7인의 여포로」를 만들던 1965년 반공법에 걸려 옥고까지 치르는 수난을 당했다. 문제가 된 내용은 「인민군에게 포로가 된 국군 간호장교들이 호송당한다. 호송 도중 그녀들은 중공군에 의해 겁탈당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녀들을 호송한 인민군들은 한 핏줄이라는 생각으로 중공군을 처단하고 국군 간호장교들을 구출한다. 그리고 북으로 귀대할 수 없는 인민군들은 국군 간호장교들과 함께 남으로 귀순한다」는 줄거리.
 
  영화에서 「북한 인민군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용공 혐의를 받은 것이다. 이 당시 兪賢穆 감독은 李晩熙 감독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兪賢穆 감독 자신이 입건당하기도 했다. 결국 영화인의 열렬한 옹호 덕분에 李晩熙 감독은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고 「7인의 여포로」는 많은 부분을 다시 촬영하고 삭제당하는 등 재차 검열을 거쳐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겨우 상영되었다.
 
  영화연구가 鄭宗和(정종화·57)씨는 李晩熙 감독이 용공혐의로 심문당하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李晩熙 감독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취조관으로부터 심문을 당하는데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끄적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뭘하나 봤더니 종이에다가 영화 콘티를 짜고 있었다는 거예요. 심문당하는 그 와중에 말입니다. 영화에 미친 匠人이지요』
 
  李晩熙 감독 다음으로는 「아리랑」의 羅雲奎 감독이 6위(20명)를 차지했다. 7위는 「쉬리」의 姜帝圭 감독(10명), 「갯마을」의 金洙容(김수용) 감독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李明世(이명세) 감독은 각각 8명의 추천을 받았다. 10위는 「기쁜 우리 젊은 날」 「고래사냥」의 裵昌浩(배창호) 감독(7명).
 
 
  1위 金勝鎬-한 세기를 장식한
 
  독보적인 배우
 
 
  20세기 최고의 남자배우로는 金勝鎬씨가 65명의 추천을 받아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62명의 추천을 받은 安聖基씨. 이 두 사람은 설문조사가 시작된 초기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다.
 
  영화 「馬夫」에서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홀아비 역할을 실감나게 소화한 金勝鎬씨는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인간미와 독특한 억양, 몸짓으로 한국인다운 체취를 물씬 풍기는 서민의 우상이었다.
 
  金勝鎬씨를 추천한 응답자들이 제일 많이 사용한 표현은 「천재성」과 「열정」.
 
  「한 세기를 장식하고도 남을 독보적인 천재 배우」(감독 高英男), 「5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적인 배우」(감독 鄭鎭宇), 「잊혀지지 않는 명배우」(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姜大榛 회장), 「연기의 달인」(평론가 邊仁植) 등은 그의 천재성을,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배우 트위스트 김), 「영화에 대한 열정과 카리스마」(평론가 金鐘元). 「물레야물레야」의 李斗鏞(이두용·57) 감독은 「연기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연기자」라고까지 극찬한다.
 
  『만능배우예요. 연기에 대한 욕심이 아주 대단했지요. 金洙容 감독의 「혈맥」을 찍을 때 黃貞順씨와 피란촌 마당에서 싸우는 장면을 찍는데 어찌나 리얼하던지 감독이 아무 소리도 하질 못했어요』(감독 趙文眞)
 
  그의 연기에 대한 집념을 알려주는 에피소드.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가 쓴 작품이었는데 어느 날 金勝鎬씨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이 맡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뭘 하는 사람이었느냐고 나에게 묻는 겁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그 치밀함에 처음엔 놀랐고 다음엔 감동했습니다』(시나리오 작가 金志軒)
 
  金勝鎬씨의 아들로 같은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金熙羅(김희라·52)씨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가 영화를 찍는데 언제나 손가락 하나를 구부리고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화면상으로는 손가락 하나가 중간에 잘린 것처럼 보이는 거지요. 물론 대본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은 설정입니다. 그래서 감독이 「불편하게 왜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하는 말이 「주인공의 아버지는 재산이 많고 바람을 자주 피웠던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매독균이 있는 상태에서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선천적으로 이렇게 태어났다」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아버지는 역을 하나 맡으면 그 역의 부모, 자식, 친구까지 생각해서 연기를 하신 분입니다』
 
  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 金南眞(김남진·56) 회장은 「주연, 조연을 가리지 않는 진정한 연기자」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여자 김승호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물과 불이 만난 듯 金勝鎬씨와 완벽하게 호흡을 맞췄던 배우 黃貞順씨 역시 단역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金勝鎬씨는 엿장수로 단 한 장면에 등장한 적도 있었지요. 아무리 단역이라도 미리 촬영장에 나와서 현장을 한 번 둘러보고 자신이 등장해야 할 자리와 퇴장해야 할 자리를 머리 속에 생각했어요. 촬영감독에게 「나를 여기에서부터 잡아달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지요』
 
  악극 출신인 金勝鎬씨는 악극 특유의 과장 연기로 「오버액션」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이조차도 그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제작자 都東煥(도동환·61)씨는 이야기한다.
 
 
  스타로 남아 있기를 거부하는 성격파 배우, 2위 安聖基
 
 
  현역의 安聖基씨는 62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남자배우 2위로 선정됐다. 한국 영화의 1980년대는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성장한 安聖基의 눈부신 활약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1980년대 이후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배우이다.
 
  「연기의 폭이 가장 넓다」(시나리오 작가 崔奭圭), 「全 장르를 아우르는 성격파 배우」(평론가 朴平植), 「성격배우로서의 잠재력이 보이는 배우」(감독 李斗鏞) 등 安聖基씨의 다양한 연기 변신에 높은 점수를 준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조명감독 馬龍天씨는 『편안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지만 연기의 열정적인 변신이 놀랍다』면서 『지적인 인상의 부드러운 배역에서 투캅스의 타락한 형사역이나 퇴마록의 배역까지도 잘 소화해내는 국민배우』라고 평가했다. 평론가 徐仁淑(서인숙·38)씨 역시 『그의 인상과 평상시 모습이 아닌, 安聖基답지 않은 배역연기가 좋다』면서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를 대표적인 영화로 꼽았다.
 
  1992년 프랑스의 아미엥국제영화제에서는 「안성기의 週刊(주간)」이 개최됐는데 이때 한 신문에 실린 기사 역시 그의 신축성 있는 연기력을 격찬하고 있다.
 
  「그는 하나의 스타로 남아 있기를 거부한다. 때로는 자신의 위상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역까지 포용하는 용기 있는 배우이다. 그는 골목의 두목에서부터 명상의 스님까지 때로는 슬픈 광대가 되는 변화를 보인다. 그는 또한 자신이 처해 있는 사회와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1992년 11월12일자 아미엥 카피탈紙)
 
  영화에만 전념하는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긴 시간 동안 정상의 위치를 지키는, 가장 노력하는 배우」(제작자 朴泰煥), 「자신을 배우로 만들어가는 성실함과 노력」(감독 郭志均), 「연기력과 노력을 겸비한 귀한 배우」(배우 尹靜姬) 등.
 
  정작 安聖基씨 본인은 스스로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할까. 그는 우선 「지금까지 꾸준히 해온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다른 곳에 눈돌리지 않고 영화에만 몰두하는 자신이 대견스럽다는 것. 그 다음으로 그는 「사회성 있는 문제작들을 통해서 그동안 사회적·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못해왔던 이야기들을 해왔다」는 점을 들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칠수와 만수」 「남부군」 「태백산맥」 등의 작품을 떠올리면 그의 이야기가 쉽게 와닿을 것이다.
 
 
  배우를 사회적 우상으로 신격화한 申星一
 
 
  영원한 스타 申星一씨는 모두 36명의 추천을 받았는데 그를 추천한 응답자의 90% 이상이 「스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영원한 스타의 태동」(평론가 高麟培), 「청춘스타의 표상」(배우 安聖基), 「배우를 사회적인 우상으로 신격화한 스타」(평론가 趙熙文) 등이 대표적인 경우.
 
  康祐碩 감독은 「가장 잘생긴 배우」라는 점을, 시나리오 작가 崔奭圭(최석규·67)씨는 「전무후무한 주연 기록」을 이유로 들었다.
 
  이렇게 스타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지다 보니 배우로서의 연기력에 대한 평가가 부족한 듯한 아쉬움을 남긴다. 실제로 申星一씨를 추천한 응답자 중 일부는 그의 연기력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4년 「욕망의 결산」에서 처음 만난 이후 1985년 「길소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申星一씨와 함께 일해온 林權澤 감독은 한 평론가와의 대담에서 배우 申星一에 대한 그의 믿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申星一씨는 멜로건 액션이건 구애받지 않는 참으로 훌륭한 배우다. 외형이 주는 체취가 어느 곳에도 어울리는 드문 배우이다. 과연 그러한 배우가 몇이나 될까 생각한다』
 
  촬영감독 金南眞(김남진·56)씨 역시 「청춘영화에서 멜로물까지 폭넓은 연기세계를 가지고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라며 申星一씨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했다. 「자기 자신도 없이, 휴식도 없이 영화에만 몰두한 배우」. 이것은 배우 申星一에 대한 아내 엄앵란씨의 평가이다.
 
  申星一씨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 「맨발의 청춘」과 관련된 에피소드.
 
  『주인공(申星一 扮)의 시신을 리어카에 태우고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 장면이 잘려서 상영될 뻔했습니다. 「빈부격차를 너무 오도했다. 어떻게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가느냐」는 이유에서였지요. 당시 이 영화는 조선일보 아카데미 극장에 올리게 돼있었는데 方又榮(방우영) 사장이 朴正熙 대통령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러 청와대로 들어갔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朴대통령이 영화를 보고 나서 「붙이라」고 지시한 덕분에 불후의 명장면(?)이 그대로 상영될 수 있었지요』(배우 트위스트 김)
 
 
  위대한 조역 許長江
 
 
  순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金振奎(김진규)씨가 33명으로부터, 許長江(허장강)씨와 韓石圭(한석규·36)씨가 각각 19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지적인 이미지와 다양한 연기변신을 통해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했던 배우」(평론가 鄭秀婉), 「정확한 해석력으로 내면적인 인물의 패턴을 이루어낸 배우」(평론가 金鐘元)라는 점이 金振奎씨에 대한 주된 추천 이유들.
 
  대표적인 악역 배우인 許長江씨는 특히 영화감독들의 많은 추천을 받았다.
 
  『許長江씨는 감독에게 주연보다도 더 절실하게 필요한 배우였습니다. 주연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許長江씨 손에 달려있었으니까요. 요즘 영화계를 보면 주연급 중에는 연기 잘하는 배우가 꽤 있습니다. 하지만 許長江씨만한 조연 배우는 아직도 나오질 못했어요』(감독 高英男)
 
  『주로 깡패 같은 악역으로 나왔지만 선량한 역할도 잘 소화했습니다. 변신의 귀재였지요. 자기 역을 자기가 다 알아서 연기하는데 얼마나 소화를 잘 해내는지 감독이 그 연기를 보면서 「아, 저 역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하고 느낄 정도였습니다』(감독 趙文眞)
 
  배우 트위스트 김은 순진했던 시대상을 이렇게 전한다.
 
  『許長江씨와 부산에 촬영을 갔다가 시장을 지나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장 사람들이 許長江씨를 보고 너나없이 「못된 놈」이라며 별별 걸 다 던지는 겁니다. 뭐라고 변명 한 마디 못한 채 부지런히 도망갔지요. 한 연기자의 탁월한 연기와 순진한 관객들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리운 추억입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權寧洛(권영락·42) 부회장은 「그 당시 연기자 중 유일한 성격파 배우로 카리스마가 있었다」는 점에서, 평론가 鄭秀婉씨는 「어떤 역이든 許長江만의 역으로 바꿀 줄 아는 배우」라는 점에서 許長江씨를 추천했다.
 
  한국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둔 영화 「쉬리」의 韓石圭씨는 30대 배우로는 유일하게 베스트 5에 들었다. 「예리한 작품 선택으로 출연작마다 흥행의 성공을 가져오는 천재적인 배우」(제작자 朴泰煥), 「완벽한 연기력과 시나리오에 대한 안목을 갖춘 큰 배우」(조명감독 馬龍天) 라는 것이 추천 이유.
 
  시나리오 작가 尹三六(윤삼육)씨는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강한 힘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20세기 아니라 21세기에 평가해야 할 배우이다. 아직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외에 崔戊龍(최무룡)씨가 16명, 申榮均(신영균)씨가 9명, 羅雲奎씨와 朴重勳(박중훈)씨가 각각 8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1위 金芝美-카리스마 있는 미모
 
 
 
  여자배우 부문에서는 金芝美씨가 57명의 추천을 받아서 1위로 선정됐다. 2위 崔銀姬(최은희)씨와는 3표 차이. 「타고난 미모와 영화적인 마스크로 많은 사랑을 받은 1960년대 최고의 여배우」(한국영상자료원 鄭鴻澤 이사장), 「시원시원한 성격과 외모가 돋보이는 아시아 최고의 스타」(촬영감독 金南眞), 「한 세기를 장식하는 당차면서도 매력 있는 배우」(조명감독 馬龍天) 등 金芝美씨의 미모와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 응답자가 많았다.
 
  반면 배우 金怜愛씨는 「연기력이 미모에 가렸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화려한 외모 때문에 연기력에서 제대로 평가를 못받은, 그러나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응답한 李斗鏞 감독도 같은 이야기.
 
  「연기력과 인기를 겸비한 진정한 영화배우」(제작자 姜大榛), 「미모와 연기력을 조화시킨 카리스마」(평론가 趙熙文) 등 두 가지를 동시에 평가한 대답도 있었다.
 
  평론가 金鐘元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처음에는 미모에 의존했던 한계가 있었지만 우여곡절의 삶을 통해 연기에 눈을 뜬 대단히 좋은 연기자입니다. 1960년대의 스타에서 1980년대의 연기자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지요. 영화 「길소뜸」과 「티켓」이 그 전환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평론가 李英一(이영일·68)씨는 그녀가 멜로영화사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崔銀姬 시대까지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한복을 입은 고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이었지요. 그런데 金芝美씨의 등장 이후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으로 전반적인 추세가 바뀌었습니다. 물론 한복 대신 양장을 입었지요. 자기 주장도 강하고 세련된 외모를 지닌 여배우들이 우르르 등장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영화배우협회 申禹澈 회장은 영화계에 끼친 그녀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
 
  『배우는 연기력뿐 아니라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해야 합니다. 오랜 기간 사랑받으며 지금도 영화 발전에 전념하고 있다는 점에서 金芝美씨는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기로 시작해 지금은 영화계 관리까지 하는 외길 인생」(한국영화협동조합 金敏雄 사무국장) 등의 대답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申星一씨가 여성들의 영원한 우상이라면 金芝美씨는 남성들의 우상. 그래서인지 배우 金芝美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표현한 남성 응답자가 많았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영화가 꿈이었던 1960년대, 여배우의 상징인 金芝美씨를 볼 때면 눈부신 프리마돈나를 보는 느낌이었다』(감독 郭志均)
 
  『설명이 필요없는 아시아의 별』(제작자 都東煥)
 
  『그녀는 일종의 신화다. 다시 연기를 했으면…』(평론가 高麟培)
 
 
  아직도 소녀 같은 배우, 崔銀姬
 
 
  2위 崔銀姬씨는 54명의 추천을 받았다. 한국적인 이미지와 출중한 연기력을 지닌 崔銀姬씨는 서글서글한 우리의 연인이요, 누이요, 어머니 같으면서 때로는 강인한 분위기로 난관을 극복하는 고전적인 여인상을 주로 연기한 배우.
 
  그녀를 추천한 응답자들 역시 「한국적 여인상의 현대적 再現(재현)」(EBS PD 李承薰), 「마음의 고향을 느낄 수 있는 전통적인 여인상」(평론가 孫基祥), 「고전적인 忍苦(인고)의 여인상」(평론가 金鐘元) 등을 추천이유로 꼽았다. 영화연구가 鄭宗和씨는 「불세출의 영화배우」로, 제작자 姜大榛씨는 「독보적인 연기세계를 지닌 배우」로 崔銀姬씨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했다.
 
  사실 崔銀姬씨의 외모 자체가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는 서구적인 외모에 가깝다. 이에 대한 배우 安聖基씨의 이야기.
 
  『崔銀姬씨는 구수하거나 인자한 이미지는 아닙니다. 서구적인 외모에 체구도 요즘 여배우 못지않게 크신 편이죠. 그런 외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으로 부각된 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연기력 때문입니다. 그 당시 崔銀姬씨는 딸역에서 어머니역까지 왔다갔다 하며 맡았지만 하나도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예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스크린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배우였지요』
 
  崔銀姬씨와 함께 작업을 했던 동료배우들은 그녀의 성품을 높이 평가했다.
 
  『崔銀姬씨는 딱 여배우예요. 아주 여성스럽고 아기같이 귀여운 사람이죠. 아직까지도 申相玉 감독에게 화장 지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들었어요』(배우 太賢實)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나 욕심이 전혀 없었어요. 제작자의 부인으로 살면서 항상 억압되고 시달린 부분이 많았습니다』(배우 엄앵란)
 
  『촬영현장에 나오면 퍼스트레이디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귀부인의 품위가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친절하고 섬세하고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감독뿐 아니라 스태프 하나하나에게도 친절했지요. 한 번은 조감독의 실수로 의상에 문제가 생겨서 감독이 스태프들에게 호통을 치니까 자기가 실수한 거라고 다 자기 탓으로 돌리더라구요. 당대 최고의 스타가 말이죠』(감독 趙文眞)
 
  배우 선우용녀씨의 이야기는 새겨들을 만하다.
 
  『그 당시 연기는 대부분 반쪽 연기예요. 자기 목소리로 연기하는 배우가 거의 없었죠. 그땐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제작사들이 일주일 만에 영화 몇 편씩을 한꺼번에 제작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었어요. 인기 있는 배우들은 워낙 多作(다작)을 하다 보니 목소리 더빙에 참여하기가 불가능했죠. 목소리를 잃어버린 연기는 진정한 연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崔銀姬씨는 연기도 훌륭했지만 더빙에도 거의 끝까지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감독을 감동시키는 프로 근성의 배우,
 
  3위 姜受延
 
 
  월드스타 姜受延(강수연·33)씨는 모두 41명의 추천을 받아 3위를 차지했다. 해외영화제 2회 수상, 대종상 3년 연속 수상이라는 화려한 경력에 걸맞게 「연기력」과 「배우근성」을 높이 평가한 응답자가 많았다. 「무슨 역이든 다 소화할 수 있는 연기력」(제작자 朴宗瓚), 「어떤 자리에서도 당당한 프로연기자」(제작자 高銀兒) 등.
 
  평론가 徐仁淑씨는 『프로다운 느낌을 주는 여배우』라며 『역에 대한 몰입을 위해 여러 각도에서 노력하는 모습이 영화상에서도 엿보인다』고 대답했다. 姜受延씨의 배역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영화계에서도 유명하다. 「씨받이」 촬영 때는 출산과 관계되는 비디오테이프를 열 편 이상 보고 산부인과 의사의 특별 자문까지 받았다고 한다. 한 장면에서의 연기를 다섯 가지 이상 준비해와 감독을 감동시키는 배우가 바로 姜受延이다.
 
  평론가 金鐘元씨는 『슬럼프에 빠진 감이 없지 않으나 자기 세계를 특유의 승부근성과 투철한 배우의식으로 형성해가는 미완의 大器(대기)』라고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배우 安聖基씨 역시 『姜受延씨가 요즘 침체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처럼 세계적으로 공인된 大배우가 국내에서 이렇게 평가받지 못하는 현상은 외국영화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옛날에 태어났으면 무당이 됐을 만큼 끼가 많은 배우』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밖에 「혈맥」 「마부」의 黃貞順씨가 24명, 「8월의 크리스마스」의 沈銀河(심은하)씨가 19명의 추천을 받았다. 「깊고 푸른 밤」의 張美姬(장미희)씨와 「情事(정사)」의 李美淑(이미숙)씨가 각각 11명의 추천을 받았으며 「만추」의 文貞淑(문정숙)씨와 「카인의 후예」의 문희씨가 각각 9명의 추천을 받았다.
 
  영화 출연작품이 다섯 편밖에 되지 않는 沈銀河씨에 대한 높은 평가는 의외였다. 젊은 층으로부터 많은 추천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분석 결과 뜻밖에도 중장년층의 영화인들이 그녀를 많이 추천했다.
 
  60대인 조명감독 馬龍天씨는 「청순하고 가녀린 듯 보이지만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沈銀河씨를 추천했다. 40대 중반인 평론가 高麟培씨 역시 「섬세한 내면연기가 뛰어나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개같은 날의 오후」의 李珉鎔(이민용·41) 감독은 「우리나라 여배우들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마스크와 연기 잠재력」을, 배우 崔鐘元(최종원·50)씨는 「연기를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성실한 배우」라는 점을 추천이유로 꼽았다.
 
 
  영화만을 생각하는 영화인이 아쉽다
 
 
  21세기 한국 영화의 미래에 대한 견해를 묻는 마지막 질문에서 과반수가 넘는 응답자가 「상당히 밝다」고 대답해 한국 영화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한치의 앞을 예견할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하고 답답하다」(제작자 金眞), 「작가 不在·자본 不在로 절망적이다」(감독 金鎬善)라는 비관적인 대답도 다섯 명 정도 나왔지만 영화인들은 대체적으로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세대 영화작가들에게 큰 기대를 걸면서 희망적으로 생각한다」(감독 兪賢穆), 「싱그럽고 우수한 젊은 인재들이 있으므로 한국 영화의 미래는 밝다」(배우 黃貞順) 등 원로 영화인들 역시 한국 영화의 미래에 큰 기대를 보였다.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하는 평론가 金垠周(김은주·36)씨는 『영상세대라고 불리는 미래의 영화인층이 폭넓고 우수하다. 여기에 그동안 쌓여진 영화산업의 노하우가 합쳐진다면 훌륭한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의 미래를 낙관했다.
 
  역시 30대인 평론가 鄭秀婉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 영화의 제작편수는 줄고 있지만 장르가 다양화되고, 관객수가 늘었으며, 해외수출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수준 높은 국제영화제도 열리고 있습니다. 이런 산업적인 면에서 볼 때 한국 영화의 미래는 일단 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담고 있는 작가정신인데 진지하게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면서 한국 영화의 정체성을 담은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점도 비교적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에게 아부하지 않는 영화
 
 
  그러나 영화인들은 「쉬리」의 大흥행 이후 지나치게 과열된 영화 시장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했다. 트위스트 김은 『쉬리 이후 영화가 너무 활성화되는 것은 오히려 우려할 점이다. 준비없이 너도나도 뛰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너무 갑자기 보약을 먹고 급성장한 느낌」(감독 郭志均), 「뿌리없이 서있는 위험한 나무」(배우 金仁文) 등의 표현도 같은 맥락.
 
  趙文眞 감독은 한국 영화가 상업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다.
 
  『지나친 상업주의의 팽배로 진지함이 결여되어 인간적인 영화가 설 자리를 잃는 것은 영화발전에 장애가 될 겁니다. 요즘 젊은 감독들은 처음에 모든 승부를 거는 경향이 있어요. 때로는 실패조차도 영화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 金炯子씨도 「인간적이지 못한 영화 현장과 흥행만을 고려한 작품 선정」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엄앵란씨 역시 「요즘 영화는 감동의 여운이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만다라」의 제작자 朴宗瓚(박종찬·61)씨는 「관객에게 아부하는 영화나 유행을 타는 영화보다는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의 영화를 개발해 세계시장에 도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견영화인이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 獨孤永宰씨의 이야기는 주목할 만하다. 젊은 제작자와 감독에게만 치중된 한국 영화계에 보내는, 한 중견영화인의 간절한 부탁이자 따끔한 충고이다.
 
  『어느 분야이든지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의 후배들도 나이를 먹는다. 물론 선배들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시절을 묵묵히 지켜온 분들에 대한 인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곳곳의 문화를 지키듯이 영화의 과거도 소중히 지켜나가길 바란다』●
 
 
 
  설문에 응해주신 분들 (가나다 順)
 
 
  姜大榛 康祐碩 姜帝圭 康漢燮 高英男 高銀兒 高麟培 郭志均 權寧洛 金南眞 金東浩 金東虎 金斗鎬 金亮三 金明坤 金敏雄 金壽南 金洙容 金是戊 金怜愛 金龍鎭 金垠周 金仁文 金鐘元 金芝美 金志軒 金眞 金顯澤
 
  金炯子 金鎬善 트위스트김 都東煥 獨孤永宰 馬龍天 文盛瑾 문희 閔丙錄 朴勇俊 朴宗瓚 朴泰煥 朴平植
 
  潘大圭 邊仁植 卞張鎬 邊在蘭 徐仁淑 선우용녀
 
  鮮宇 浣 孫基祥 申江浩 申禹澈 安東圭 安柄燮 安秉珠 安聖基 엄앵란 呂貞鎬 柳東薰 柳寅澤 兪賢穆 尹三六 尹靜姬 李璟喜 李斗鏞 李明秀 李珉鎔 李逢運 李昇求 李承薰 李英一 李長鎬 李廷國 李眞榮 李椿淵 李泰元 林英 林忠烈 張錫龍 전조명 全燦一 鄭秀婉 정애란
 
  鄭一夢 鄭在亨 鄭宗和 鄭重憲 鄭鎭宇 鄭鴻澤 趙觀熹 趙文眞 趙容援 曺惠貞 趙熙文 車勝宰 崔奭圭
 
  崔鐘元 太賢實 河明中 韓玉姬
 
  韓雲史 黃貞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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