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왼쪽부터 1947년작 《안나 카레니나》. 비비안 리가 안나 역을 맡았다. 1997년작 《안나 카레니나》. 소피 마르소가 안나를 연기했다. 2012년작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가 안나로 나온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1875년 1월 1부가 처음 발표되고, 1878년 단행본으로 완간된 뒤 1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 문학의 고전이라는 자리를 지켜 왔다.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던지는 물음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정말 사랑했는가. 브론스키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안나의 남편) 중 누가 더 선한가. 시누이 사이인 돌리와 안나의 선택 중 누가 더 근대적인가, 레빈과 오블론스키의 선택은 왜 다른가.
이 네 가지 물음은 단순한 줄거리 감상의 도구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시대의 윤리를 동시에 비추는 렌즈가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개인적 욕망이자 동시에 사회적 사건인지를, 톨스토이는 이들 인물을 서로 교차시키며 때로는 집요하게 파헤치며, 때로는 담담히 들여다본다.

복선과 상징 — 기차, 승마, 사냥
이 소설에는 정교한 복선과 상징이 곳곳에 숨어 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날, 기차역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사고는 초기 서사에 불길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작품 전반에서 반복되는 기차 이미지의 의미망을 예비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인물의 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에 잠재된 긴장 구조를 암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인물들의 취미와 놀이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브론스키가 승마에 열광하는 모습은 그가 카레닌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승부욕을 상징하는 듯하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브론스키의 승마는 충동적이고 격렬하다. 반면 레빈의 사냥은 전략과 침착성을 요하는 행위로, 키티를 향한 조심스럽고 진중한 구애의 몸짓처럼 읽힌다. 두 남자의 본질적인 차이가 이 두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프랑스어도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귀족끼리만 통용되는 언어로서 프랑스어는 계층을 가르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며, 당대 러시아 상류사회의 폐쇄성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레프 톨스토이
두 알렉세이 — 이름의 우연인가, 운명의 반복인가
안나의 남편 이름도 알렉세이, 그녀의 애인 이름도 알렉세이다. 이것은 우연일까. 두 사람은 둘이면서 하나의 모습이 아닐까. 안나는 결국 두 알렉세이 사이에서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채 외로움 속에 고립되었다. 남편 알렉세이는 악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안나를 자신의 사회적 지위라는 틀에 딱 들어맞는 아름다운 소유물, 혹은 부속물처럼 여겼다.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나타난 것은 남편이 악해서가 아니었다. 안나는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삶에 순응하며, 무채로운 하루들을 조용히 채색해 가고 있었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렇게 홀연히 다가왔고, 그 홀연한 등장이 한 인간의 운명을 전복시켰다.
안나와 돌리 — 순종과 일탈 사이에서
톨스토이가 마련한 가장 인상적인 장치 중 하나는 안나와 올케 돌리의 삶을 끝까지 나란히 놓고 대비시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안나를 손가락질하고 돌리를 “참을성 있는 아내, 헌신적인 어머니”로 평가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의 삶이 진정한 삶인가를 묻는 순간 답을 찾는 회로는 복잡해진다.
돌리에게는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다. 오블론스키의 상습적인 외도에도 떠나지 못할 가정이 있고, 지켜야 할 아이들이 있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지쳐 있고, 분노라 말하기엔 너무 일상적인 체념과 노동이 그녀의 매일을 채운다. 안나는 다르다. 카레닌을 사랑하지 못하며, 그와 함께하는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브론스키와의 사랑은 그래서 더 위험한 빛을 띤다. 안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불륜이 아니라, 나도 한번은 나의 인생을, 나로서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보고 싶다는 뒤늦은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돌리의 내밀한 독백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솔직한 고백으로 읽힌다. 돌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안나였다면 틀림없이 안나와 똑같이 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후회한다. “그때 나는 남편을 버리고 다시 삶을 고쳐 시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정말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이 고백은 안나를 향한 질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향한 늦은 탄식이다.

2012년 안나 역으로 분한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
레빈과 오블론스키 — 두 남자, 두 세계관
레빈과 오블론스키는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거의 정반대다. 레빈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남자다움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사랑은 책임과 분리될 수 없는 감정이다. 반면 오블론스키의 사고방식은 명료하다. “가정에는 아무 일이 없도록 하되, 내 손은 언제나 자유롭게.” 가정과 유혹을 철저히 분리하며, 죄책감은 일시적인 불쾌감일 뿐 삶의 방향을 바꿀 계기가 되지 못한다.
오블론스키는 러시아 상류층 남성의 위선을 압축한 인물이다. 톨스토이는 그를 통해 가정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쾌락과 허영을 정당화하던 당대 귀족 남성들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 — 감정을 모르는 남자
카레닌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아내의 외도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심지어 신앙을 근거로 안나를 용서하려 하기도 한다. 읽어 갈수록 드러나는 것은 그의 본질이 관용이 아니라 감정의 회피라는 점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기를 원하며,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오늘날 간단히 분류하는 T형과 F형 인간중, 그는 단연코 T형에 속하리라.
주목할 것은 카레닌이 이혼을 결심하지 못한 결정적인 순간에, '랑도'라는 기이한 영매사(사이비 예언가)의 반응을 그 근거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신비주의적 계시에 기대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이 모습은, 그가 얼마나 내면의 진실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대외적 이미지를 지키는 데 급급한 채 자신의 감정조차 끝내 말하지 못하는 이 인물이야말로, 톨스토이가 그려 낸 가장 비극적인 불행의 전형일지 모른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2012) 속 안나와 브론스키.
안나와 브론스키 — 불균등한 사랑의 무게
안나는 이성보다 감성에 충실했고, 사회적 지위와 아들마저 내려놓고 사랑을 택했다. 그러나 브론스키는 달랐다. 시대의 문법을 깨뜨리는 사랑을 원하면서도 러시아 귀족의 사교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다. 안나가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브론스키는 여전히 한 발은 사랑에, 한 발은 세상에 디디고 서 있었다.
이 불균형은 여러 장면에서 드러난다. 브론스키는 독신 남성들만 모인 자리에 홀로 나가고, 대화 중에 여성 교육을 가볍게 비웃는다. 여성은 그에게 어디까지나 사랑의 대상에 머물러 있다. 안나의 사랑에 대한 집착은 이 불균형에서 자라난다. 환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매일 발견하며 질투와 자괴, 의심이 증식된다. 자기 자신은 없고 사랑만 남은 여자, 그 사랑을 끊임없이 검증하려 들다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여자의 모습이 안나의 후반부를 가득 채운다.
더욱 아프게 읽히는 것은 모성의 분열이다. 안나는 첫째 아들 세료자에게는 깊은 모성을 느끼지만, 브론스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는 그 감정이 배제된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 살고자 했던 안나에게, 브론스키의 딸은 그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처럼 남는다. 오직 한 남자의 사랑에 목마른 여자의 모습이 이 분열 속에 집약되어 있다.
키티의 출산, 레빈의 신앙 — 삶과 죽음의 또 다른 이름
키티의 출산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 중 하나다. 울부짖는 키티 앞에서 레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깨달으며, 난생 처음 간절히 기도한다. 무신론자였던 레빈이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가를 생명의 문턱에서 새삼 확인하게 한다.
키티의 출산이 사회로부터 합법적으로 축복받은 생명의 탄생이라면,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같은 출산이지만 두 여자가 맞닥뜨리는 세상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톨스토이는 이 대비를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 바깥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당시 한 여성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조용하고도 잔인하게 드러낸다.
레빈은 이후 농촌에서 지주와 농민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에 부딪히며 철학적 사유를 이어 간다.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품고, 죽음으로 귀결되는 인생에 회의를 느끼다가, 종국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선의 의미를 발견하며 새롭게 태어난다. 실용주의자였던 레빈이 형이상학적 성찰자로 변모하는 것이다.
소설이 품은 더 넓은 세계 — 사회, 계층, 토지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 소설인 동시에 당대 러시아 사회 전체를 조감하는 대하 드라마다. 톨스토이는 농민의 권리, 자본주의와 생산 확대의 필요성, 이민족 문제, 여성의 사회 참여와 교육권, 부부 간의 종속 관계, 슬라브족 해방 문제까지 방대한 주제를 소설이라는 장치 안에 녹여 냈다. 소설을 사회복지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활용한 셈이다.
귀족 선거제도가 무용지물임을 알면서도 그 제도권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동아줄을 잡고 있으려는 귀족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반면 실질적인 지주들이 등장해 기존 시스템과 충돌하며, 현행 농업제도로는 이익 창출이 어렵다는 현실 앞에서 토지에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도 엿보이듯, 그는 토지의 본질에 대해 평생 깊이 사유한 작가였다. 돈이 권력의 층위에 영향을 주고 관계를 설정하는 모습도 소설 곳곳에 스며 있다.
결혼이라는 시스템은 사랑이라는 성분보다는 사회적으로 얽힌 여러 외적 구성요소들이 모여 이끌어지는 하나의 규율에 가깝다는 것을, 톨스토이는 이 소설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증명한다.

톨스토이의 작법에 대한 불만 — 안나가 사라진 자리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정당한 불만이 쌓인다. 무엇보다 안나의 죽음 이후 인물들의 삶이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이 딸을 데리고 떠났다는 언급과, 브론스키가 우울증에 빠져 폐인이 되었다는 전언만 있을 뿐, 그들의 시점에서 서술된 장면은 없다. 세료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 이후, 소설은 안나의 세계를 완전히 닫아버리고 레빈의 사상 이야기로 전환된다. 안나의 죽음은 철저히 주변부로 밀려나고, 신의 존재와 선의 의미를 사유하는 레빈의 내면이 중심으로 부각된다. 실용주의자였던 그가 형이상학적 철학자로 변모하는 모습은 흥미롭지만, 안나의 비극과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안나 카레니나》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는 레빈이 주인공이 되어버린 듯한 구도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서사적 불균형은 톨스토이의 의도인지, 현실과 도덕의 긴장을 회피한 결과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통해 결혼 제도를 벗어난 불륜의 미래는 암담하고 비극적이라는 이분법적 교훈을 전달하려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의도는 조금 불편하다. 안나의 죽음이 도덕적 심판의 결과처럼 읽히는 것을 톨스토이가 의도했다면, 동시대인이라면 당장 면담을 신청해서 따지고 싶을 만하다. 이 부분은 아쉬움으로 오래 남는다.
운명의 수레바퀴 — 모든 것은 기차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인간의 운명을 다룬 장대한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오블론스키의 외도가 드러나 집안이 뒤집어지지 않았다면, 안나는 모스크바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브론스키와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고 브론스키와 결혼했을 것이며, 레빈은 오랫동안 혼자였을 것이다.
모든 갈등의 기점은 안나가 모스크바 역에 내리는 그 순간, 그리고 그 장면과 맞물려 일어나는 철도 노동자의 압사 사고이다. 기차라는 이미지는 이후에도 서사 속에서 반복되며, 초기 사건이 형성한 상징적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변주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안나의 첫 등장과 함께 일어난 선로 위의 죽음이 그녀의 운명을 어둡게 예고했다면, 마지막에 기차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시대의 규범, 사회의 시선, 개인의 절망과 뒤엉켜 한 인간을 압도하는 힘으로 변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톨스토이는 이 기차의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불화한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그리고 사랑이 얼마나 쉽게 운명의 수레바퀴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드러낸다.
마치며 — 러시아 노래가 듣고 싶어지는 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높이 사는 이유는, 각 등장인물의 세밀한 심리를 방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촘촘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편지와 전보만 존재하던 시절, 컴퓨터도 없이 이 방대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한 톨스토이의 작업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연재를 하면서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 것인지, 처음부터 전체를 설계한 것인지 여전히 궁금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관통하는 사랑과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사유는 다음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도 알고 계시잖아요. 우리 두 사람은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든지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되든지 둘 중 하나예요. 그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이렇게 돼 주었으면 하는 것은 아니야.
-무한한 시간, 무한한 물질, 무한한 공간 속에 물거품 같은 하나의 유기체가 창조되고… 그 물거품은 바로 나다.
《안나 카레니나》를 덮고 나면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진다. 혹독한 자연환경과 기후 속에서 응축된 처절하게 외로운 시간들이 톨스토이 같은 작가를 탄생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걸쭉하고 한기 어린, 한 맺힌 러시아 노래가 간절히 듣고 싶어진다. 안나 카레니나를 탄생시킨 나라라면 그런 색감의 노래가 분명 있을 것이다.
.... 마침내 찾았다! 〈마부여, 말을 재촉해 몰지 말아요.(Ямщик, не гони лошадей)〉를 소개한다. 인생에 사랑을 걸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위한 비장한 서(序)처럼 들린다. 보드카의 냄새가 음계마다 배어 나오는 듯하다. 추운 겨울이 서서히 지나고 봄이 스며드는 교차로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펼쳐 들고, 이 서사시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러시아’ 노래를 하나씩 골라보는 건 어떨까.
<마부여, 말을 재촉해 몰지 말아요>
나의 슬픔은 나를 극한까지 가라앉히고,
나의 길은 음울하고 황량한 여정이네.
과거는 무서운 악몽처럼 보이고,
오래도록 아파온 내 가슴을 괴롭힌다.
지친 말들을 재촉하지 말아요, 마부여,
이제 더는 달려갈 곳도 없으니,
내게는 사랑할 사람도 남지 않았네,
지친 말들을 재촉하지 말아요, 마부여.
나는 보상을 받듯 안식을 갈망하고,
사랑과 배신을 뒤로한 채 떠나고 싶지만,
기억은 나의 사악한 지배자,
과거를 다시 깨워 괴롭히네.



























































